'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어제의 생각.
"플래너를 쓰면서 느끼는 건 시간관리를 하기엔 좋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깊어지는 관계, 고민의 흔적, 그 시기의 중요한 메모들은 정리하여 다시 펼쳐보기가 쉽지 않더라는 점이다. 일기말고 한 개인의 이력, 내러티브를 담을 수 있는 기록 방법은 없을까."
 
#2. 7habits.
그간 나는 누구보다 7habits 방식으로 시간관리를 잘 훈련해왔다고 자부한다.(아.. 깔대기를 참을 수가 없구나) 그리고, 작년 한 해 동안은 GTD방식으로 직장에서 뇌에 무리가 갈 정도로 과열된 메모리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두 가지 시간관리 방식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줬고 지금도 실무적으로 혹은 특정 영역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방식들의 한계를 본다.

 

*주: 데이빗 알렌은 우리의 뇌를 컴퓨터의 메모리에 비유한다.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각 프로그램마다 일정량의 메모리를 확보하게 되고 따라서 실행한 프로그램 수가 늘어날 수록 메모리 부족으로 컴퓨터는 느려지게 된다. 데이빗 알렌은우선순위에서 밀린다고 판단하여 우리가 빨리 해치우지 않고 미루는 사소한 많은 일들이 우리 뇌의 메모리를 잡아먹고 그것을 언젠가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메모리 폭주에 비유했다.

 

#3. 크로노스 vs. 카이로스
'관계중심 시간경영'이란 책에서 저자는 시간관리에 있어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구분한다. 우리는 머리로는 시계시간(크로노스) 대비 사건시간(카이로스)을 더 의미있게 받아들이지만 실제 삶에서 시계 시간의 관리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통찰이 그것이다. 결국 시계 시간에 집중된 시간관리는 일정을 관리하고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는 유용할 지 모르지만 한 개인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미있는 정보들을 캐치하기가 쉽지 않다.

 

#4.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몇 년 전부터 우리 교회는 '아브라함 학교'라는 독특한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과정은 성경 속 아브라함 이야기를 명제가 아닌 서사(narrative)적 흐름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중요한 건 삶의 어떤 원리나 법칙(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방법, 구원의 원리와 같은)을 연역적으로 추출하는 것이 아닌 내 삶의 서사, 즉 유년시절부터 청년, 중년에 이르는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 속에서 어떤 선굵은 방향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트렌드이기도 한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중심의 관점과도 일치한다.
 
#5. 카이로스 플래너? 내러티브 플래너?
나는 요즘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카이로스 지향적인' 시간 관리 방법을 익혀나가는 중이다. 이러한 트렌드는 앞서 말한대로 내러티브, 스토리텔링과 같은 현재 우리 세대의 지적 관심과도 일맥상통하지만 이러한 서사적 방식으로 우리의 시간을 돌아보고 관리(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인생의 방향성을 따져보는)하는 프레임으로 플래너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아마 소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일기를 쓸 것이다. 하지만 일기는 너무 자기고백적이고 비밀스럽다. 내러티브는 보다 사건 기록에 치우치고 조금은 건조한 기록이다.

 

#6. 노트 중독자의 변명.
아무튼, 나는 또 노트를 샀고 이러한 나만의 시간관리 방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많은 주변의 지적 자극으로인해 시작된)으로 스스로를 잘 훈련한다면 좀더 건강한 노년을 맞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나는 노트에 하루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2012/07/11 22:48 2012/07/11 22:48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그런 생각이 든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나 관계, 사랑, 신뢰와 같은 것들은 시간이 조금은 지나야 그 핵심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결국 현재로서는 그 궤적을 잘 기록해두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
('12. 7/6)

#2.
요즘 책이 손에 안 잡힌다. 활자울렁증 같기도 하고. 근본적으로는 일상적 자각없는 담론들을 많이 목격해서 그런지. 성추행 목사,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자기 화를 아이에게 쏟아내는 부모. 수신제가가 안되는 주댕이들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서글픔이랄까
('12. 7/9)

#3.
플래너를 쓰면서 느끼는 건 시간관리를 하기엔 좋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깊어지는 관계, 고민의 흔적, 그 시기의 중요한 메모들은 정리하여 다시 펼쳐보기가 쉽지 않더라는 점이다. 일기말고 한 개인의 이력, 내러티브를 담을 수 있는 기록 방법은 없을까
('12. 7/9)

#4.
어제 아내에게 요즘 내가 뉴스타파도 안 보고 심지어 나꼼수도 올라오자마자 바로 듣지 않고 묵혀둔다고 불만을 내비쳤다. 나는 (독학의 혜안으로) 현재 진보의 폭로 이슈들이 장기화되면서 나를 포함한 대중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는 얘길 했다.
('12. 7/10)

#5.
가끔 스스로가 정말 특별하고 독특하다고(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굳게 믿는 사람을 만난다. 반대로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며 섣불리 타인을 자신의 사고 안에 가두려는 사람도 만난다. 가끔은 양손에 넣고 흔들어 둘로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
('12. 7/10)

2012/07/10 21:44 2012/07/10 21:44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영화 '매트릭스1'이 완결편이었다면 그 주제는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3부작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없다' 내지는
'우리는 기계문명과 상생해야 한다'가 될 것이다.

때때로 나는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과 같은
말들 속에 내포된 IT에 대한 정서적 반감, 아날로그적
... 감성에 대한 지나친 향수 등이 불편하다.
실제로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이유로 인터넷에 접속한다.
'접속' 자체를 게임이나 killing time으로 여기는 것은
전자신호를 '0'과 '1' 그 자체로 치부하려는 것만큼 어리석다.

CD를 그렇게 비난하던 LP 매니아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많은 예술가들도 이제는 컴퓨터로
자신의 창작물 작업을 한다.
수백년된 악기의 소리를 완벽하게 재현하거나
환상적인 photo들도 디지털 작업을 거친다.
물론 직장생활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자료와 보고서
노하우들은 디지털 문서이다.

가끔 IT를 감성적으로 배척하고 비판하는
일반적인 시각은 IT를 필요악으로 설정하는 것 같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컴퓨터에 앉아서 '버리는 시간'
을 모으면 휴머니즘이 되살아나리라는 기대감.

난 그 기대감도 하나의 허구라고 본다.
Homo Faber...
인간의 정체성에는 도구가 항상 자신의 몸처럼
존재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IT가 인간을 인간성을 삼킬 것처럼 떨지만
IT 뒤에 숨어서 IT의 해악을 조종하는 것 또한
인간의 멘탈 그 자체가 아니던가.

인문학적 감성, 아날로그적 감성을
어떻게 기술문명 '안에서' 구현할지를 고민하는 게
나는 더 정직하고 건강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포드주의를 넘어 IT혁명기 깊숙한 시간을 지나는
우리 세대는 여전히 자크 엘룰이 말하는
'기술 사회'의 해악을 원론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 중 다수는 아이폰과 맥북으로 소통하고
전자책에 대해 고민하고 클라우드 컴퓨팅을 활용한다.
디지털로 터치된 음원, 포토샵 처리된 사진.
식당, 기차, 비행기, 호텔 예약에서부터 여행 사진을
공유하는 모든 과정 과정마다 IT는 스며들어있다.

나는 지금이, IT의 첨단 도구를 구현한 인간이
이제는 기능보다 더 고차원적 상상력을 발휘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며 이미 패러다임은 그렇게 변해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수는 여전히 그 패러다임의 변화를
'변절'로 여기는 듯 하다.
2012/07/10 21:44 2012/07/10 21:44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

6.25 단상.
 저는 6.25를 경험한 세대의 정치적 보수성을 인정하려는 편입니다. 젊은 세대의 극우성은 논쟁하고 비판하려는 마음이지만 6.25를 경험한 세대의 어른들과는 논리를 넘어선, 그들만의 전쟁 경험에서 생긴 상처난 신념, 정서를 품어야 하지 않나...그런 생각 많이 합니다. 이는 제가 기본적으로 광주민주항쟁으로 인해 상처입은 전라도 분들에 대한 국가 사회적 이해, 포용의 필요성과 맥락이 같습니다. 자신의 부모와 자녀가 죽거나 헤어지는 가족 붕괴의 사적 고통들을 경홀히 여기는 어떤 이념이나 진영도 결코 옳을 수 없습니다.



단상.
나또한 개혁, 발전, 성장, 진일보.. 이런 단어들을 들으며 바쁘게 어딘가로 달려가는 이십대를 보냈다. 그렇기에 때때로 주변에서 만나는 이십대는 그저 표류하는 배, 난파선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당연히 부정적으로 보였다.

내 이십대에는 항상 할 일이, 아니 해야할 당위적인 일들이 내 삶을 가득채웠고 삼십대에야 비로소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삶이 나를 짓누른다는 것을 알았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음. 제자리 걸음, 더딘 행보... 나아가 고통의 순간순간을 단지 버티는 것. 뒤로 밀려나거나 설령 물러나더라도 줄을 놓지 않는 것. 그저 하루하루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 이것이 참 가치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2012/06/25 21:43 2012/06/25 21:43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며칠전 페북에 유철형님 글을 공유했더니 일본에 있는 전태호라는 페친님이 제게 댓글을 쓰셨더군요. 저도 고민하던 문제라 좀더 다루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글을 좀 써봤습니다. (편집자 주)


'전태호' 님을 인용 - 저는 링크하신 글도 그렇고 말씀하신 것도 그렇고 군이나 양을 붙이는게 왜 촌스러운 것이며 왜 권위적인 것인지 이해가 안가는데요? 촌스러운 거야 개인이 그리 느낄 수 있다 치더라도 이게 일제군국주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던가요? 정작 일본에서는 친한친구끼리도 쓰는 말인걸요. 동급생학생은 물론이고 자기보다 나이많은 사람에게도 친근감의 표시로 씁니다. 일본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문제가 된다면 ~씨도 쓰면 안되겠군요. 이것도 일본 신문기사등에서 쓰고 있는 말이니 말이죠.


------

일단은 그런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구요.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아 위의 글에 대해 제 생각을 조금 풀어서 쓰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용주군. 이라고 할 때 그는 저보다 연하일리는 없 습니다. 왜냐면 군, 양은 자신보다 연배가 어린 경우에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주야. 라고 하지 않고 용주군. 이라고 했을 때에는 필시 저와 친분이 깊지 않은 관계임을 암시합니다. 결국 용주야.라고 이름을 부를 때는 하대를 의미하나 친분이 있을 경우에 사용되는 호칭이고 용주군.이라고 부를 때는 하대하나 친분이 적절하지 않을 때 사용한다고 봅니다. 결국 OO군은 거리감이 있는 연하의 대상에게 나름 '정중한 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듯 합니다. 삼촌뻘되는 어른이나 결혼식 주례처럼 선생으로 모시는 분들이 용주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런 용례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한동안 저는 학교 후배들에게 OO군, OO양이라는 표현을 익살스럽게 쓰기도 했는데 불쾌해하는 친구들이 꽤 되더군요. (그 때 제가 받은 인상은 그들도 이제 나이를 어느정도 먹었는데 선후배 관계를 연상시키는 '하대', 그것도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고 거리감을 주는 표현을 굳이 고수하는 것에 대한 불만 같았습니다.)

 

직장에서 용주군, 혹은 용주양. 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정중한 하대의 의미입니다. 결국 직장 내에서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피고용인 간에도 서열이 있다는 의미겠지요. 보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저는 피고용인 간에는 일의 경중이 있고 그에 따른 급여차이와 직책이 다르지만 모두가 평등하다는 전제를 두는 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원에게는 OO사원님, 대리에게는 OO대리님이라고 부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저와 함께 일하는 조수는 이름을 부르는 편이지만 공적인 자리나 공문서, 메일 등에서는 OO연구원이라고 호칭합니다. 물론 OO씨라고도 칭합니다만 그것은 적어도 저에겐 사내에서 친밀함의 표현이지 회의석상이나 문서상에서 표하지는 않는 호칭입니다.

 

그런 연유로 변호사님들이 직장 내에서 김양, 혹은 OO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중한 하대의 의미일 것이고 특히 전자는 우리나라에서 커피 심부름이나 하는 시다급 '여'직원을 지칭할 때가 많아 왔으므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도 굳이 공적인 관계에서 정중한 '하대'를 이미 기득권자인 변호사가 티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상대가 변호사님이라고 호칭한다면 그는 김비서 내지는 김사무관, 김보좌관, 김대리 등과 같은 직책을 부르는 게 적절해보이고 개인적으로는 공적 자리에서는 '님'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현실과 괴리감이 크고 그런 방식 자체가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학생을 OO군이라고 부를 경우 그것은 정중한 하대란 의미로 봤을 때 일면 공감할 부분도 있겠습니다. '야이 새꺄'가 호명방식인 토종 교수님들도 많이 봤으므로 어느정도 예의를 갖추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럴 경우 지도교수-학생 간은 도제 제도를 상기하게 만드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학교, 연구실 내에서 지도교수-학생 간의 관계가 고객-서비스(지식)제공자 혹은 협업을 하는 준직장의 구도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이건 뭐 저의 오만불손한 생각일 수 있겠습니다만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OO군이라고 표현한다는 부분은 좀 걸립니다. 이러한 '정중한 하대'는 그 학생이 교수의 라인 아래 있는 제자임을 공적으로 거명하는 행위이므로 그렇게까지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이를테면 우스개소리로 하는 유라인, 규라인처럼 '김교수의 아이들'이라는 올가미를 학계에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용주학생이라고 말하는 것 보다 용주군이라는 말이 좀더 정치적으로 들립니다. 교수-학생은 상태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교수님-OO군은 다분히 '상태가 변할 것 같지 않은 위계질서'를 전제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느끼는 호칭의 어감에 따른 이야기이므로 군이나 양이 뭐 그리 대수냐, 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라고 하신다면 그것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지강유철님의 글에 공감하고 그 글을 인용한 대목에서 저는 위와 같은 생각을 자연스레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지강유철님의 원글을 함께 남기면서 마치렵니다.


교수님들, 아직도 홍길동 군입니까?

/지강유철

 

몇 년 전까지 판사 변호사(검사는 모르겠고)님들께서 사무실 여직원을 김 양, 서 양 이렇게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처음 그 소릴 듣고 웃었습니다. 21세기에 일제시대 잔재인 미혼의 여자를 양으로, 미혼의 남자를 군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앞에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웃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결혼식장에 가면 신랑을 군으로, 신부를 양이란 쓴 입간판을 세워놓고, 순서지에도 그렇게 써 있습니다. 그것도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신랑 신부와 주례사이에, 또는 신랑 신부와 하객 사이에 권력관계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결혼식장에서 그런 입간판이나 순서지, 또는 주례님의 말씀에 피식 웃습니다. 물론 이 웃음은 앞의 웃음과 다른 의미의 웃음입니다. 굳이 표현을 달자면 애교스런 웃음?

 

결혼하지 않은 남성을 군,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양으로 부르는 사례 중에 제일 고약한 경우는 교수님들이 책의 서문에서 자기 제자들을 그렇게 부를 때입니다. 오늘 제가 책을 읽을 때 가장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대목 중 하나인 서문(번역의 경우 역자후기)을 보다가 짜증이 확 몰려왔습니다. 나이도 저보다 세살 뿐이 안 많은, 그런니까 아직 연령으로 볼 때 쉰내가 나지않고, 보수꼴통 노털로 불리기엔 너무 이른 50대 교수님께서 자신의 책에 도움을 준 조교뻘 쯤 돼 보이는 박사과정 학생을 XX군이라 호칭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들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제자를 향해 XX군이라 불러야 자신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머리 큰 제자를 xx군으로 부르는 습성엔 보수 중도 좌파에 구분이 없더군요. 70-80대 명예교수님들이 그러는 거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40-50대 교수님들이 그렇게 부르면 확 깹니다. 21세기에 XX군이라...이거 너무 칙칙하고 촌스럽지 않습니까? 제자를 군으로 부르는 모든 교수님들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일제군국주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호칭은 인권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2012/06/01 18:38 2012/06/01 18:38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최근 회자되고 있는 J목사는 사실 복음주의권에서 김동호 목사와 더불어 차세대 대중설교자로 명성이 높았던 사람이다. 물론 소수가 이미 J목사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지만, 실제로 J목사는 우리 진영에서 사이비나 이단시되는 또라이 목사가 아니다.

그는 주류였고 '장'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를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적절히 흡수도 하면서 사실상 복음주의권은 청년부를 팽창시키는 그의 대중 설교를 적극적으로 소비해왔다.
 
지금 다수가 행하는 그에 대한 비판은 그가 속한 교계 진영에 발을 담그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인 회개와 각성이 우선하지 않는 한 섣불리 행해져서는 안 될 비판들이다. 특히 비개신교, 비복음주의권에서 보기에 우리는 J목사의 진영 안에 속한 자들임을 깨닫는다면 어떤 면에서 그를 또라이나 범죄자로 손가락질하며 선을 긋는 게 더 비겁하고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사역을 막는 형태가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가 공적으로 피해자와 교회에 공개적으로 죄를 구하고 근신한 후 종국에는 다시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도록 만드는 일에 '우리 진영'은 힘써야 한다. 나는 그것이 내가 아는 '예수 공동체'의 차별성이라 믿는다.

2012. 5. 22.



#2.
어제 CAP 미팅 때 'RAEW 기법'이란 걸 사용했는데 다들 생소하여 모든 사람이 적극적으로 떠들어댔음에도 불구하고 노말캡미팅(..걍캡)으로 마쳤다. 아무리 좋은 도구가 있어도 수행하는 개개인이 체화되지 않은 도구는 의미가 없다. 특히 구조나 시스템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 구조를 이용하는 개인의 역량, 수준, 시점 등을 명확히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도구를 집어드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2. 5. 18.



#3.
스승의 날.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정말 인간 관계 가운데 배운 스승이 별로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성적 농담이나 해대고 학생들에게 장풍이나 쏴댔지...기억에 남는 좋은 선생님은 없다. (물론 한 두 명 정도 노말했다고 기억나는 분들은 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책으로 만난 유명한 저자들이나 강의를 통해 접한 지식 전달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들을 나의 스승이라고 말하고픈 욕구가 있었지만, 살면서 지식이라는 게 중요하지만 관계성이 없는 지식전달자와 피전달자와의 사이가 이제는 그리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머리가 굵어진 후로는 내 성격이 모난 구석이 있고 나 혼자 잘난 척하고 살아서 그런지 지금까지 스승이라 부를 법한 분은 정말 손꼽는다. 왜 나는 정작 멘토같은 스승이 필요한 나이에는 배움의 열정을 혼자서 책이나 보면서 지냈을까. 후회가 되는 대목이다. 오늘은 한두 사람의 스승에게 문자를 보냈다. 스승의 날. 노년의 지혜를 멀리하고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의 배움을 등한시한 내 가벼움을 반성해본다.

2012. 5. 15.

2012/05/22 21:42 2012/05/22 21:4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내가 받았던 질문 중 가장 대답하기 어려웠던 건 "do you love me?" 였던 것 같다. 대체로 나는 이성이 이런 질문을 던지면 머뭇거렸다. 나쁜 남자라서는 아니다. (내가 어딜봐서 나쁜 남자...ㅠㅠ) 그저 '사랑'이라는 말이 대답하기 쉽지 않은 개념, 정서, 상태를 의미한다는 걸 그 때도 막연히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떠올리면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서로를 육체적으로 갖고 싶은 마음, 혹은 '언젠가는 우리 결혼해야 해' 라는 예비 다짐, 나아가 서로에 대한 특별하고도 오랜 상호 신뢰관계를 지속하는 것.

그땐 내가 사랑이란 말에 대한 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데 대한 실망, 죄책감이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십대에 사랑을 이야기하기가 내 정서적 성숙도에 비해, 참 어려웠다고 변명하고 싶다.

'클로저'란 영화 속 한 장면. 관계의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주드로에게 사랑이 어딨냐고 묻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렀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관계에 균열이 가고 어느덧 그 관념을 의심하게 되었을 때 사랑은 둘 사이에서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그저 타인의 입에서 튀어나와서는 나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말일 뿐이다.

이렇듯 이성 간의 사랑 혹은 사랑하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보이지도 잡히지도 들리지도 않는 말은 쉽게 오가기는 해도 그만큼 오용될 수 있고 속일 수 있고 또 속을 수도 있는 것 같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래, 시간을 가로축으로 보았을 때 여전히 그 단어에 얽힌 어떤 행동이 그 어떤 곡선을 그린다면. 그 곡선이 어떤 상승과 하강의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우리는 넌지시 자신이 내뱉은 단어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순간의 요동 순간의 폭락. 그것은 사랑이 아니야 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주저했던 때로 중요한 순간에서조차 조심스러워했던 그 단어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참 오랜 시간을 통해 그 궤적속에서 드러나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애정하는 선배 페친 김승중님의 포스팅이 던진 화두에 답하며.)


2012. 5. 21.

2012/05/21 21:38 2012/05/21 21:38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종이문서와 전자문서
기업과 관공서에 전자문서가 도입되면서 종이문서가 혁신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더 많은 종이가 소비되었다. 이전에는 종이에 글을 쓰다보니 수정이 어려웠지만 전자문서는 수정은 물론 아무리 긴 글도 복사하고 편집하는 게 용이하다보니 보고시점별, 보고대상별로 기하급수적인 보고문서의 수정이 이루어졌고 여전히 서면보고를 받는 기업문화 속에서 보고 건수 대비 종이출력물의 양은 예전보다 몇 배로 증가했다.

결국 이러한 관행 속에서 종이절약을 위해 이면지 사용을 권장했고 관공서에서는 강제적으로 보고서는 이면지를 사용하도록 규제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보고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면지를 '만들어내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면지의... 사용은 자원절약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이면지를 사용하다보면 성능이 나쁜 프린터 특히 구사양의 프린터들은 용지걸림으로 인한 고장이 잦아서 공용 프린터에는 하나둘 '이면지 사용금지'라고 붙여놓게 되었다. 이 이율배반적인 - 이면지로 보고하되 프린터에 이면지를 넣으면 안 되는 - 상황은 실무를 뛰는 직딩들로 하여금 돌아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린터에도 제어장치와 모터등의 전자 장치가 들어가고 그러한 칩들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펄프를 생산하는 공장과 비슷한 규모의 환경오염을 야기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서면 보고 없는 전자결재라고 생각되지만 여전히 상사에게 '내 자리로 와서 내가 쓴 보고서 함 바바'...라고 하기엔 ㅎㄷㄷ한 문화가 강하다. 물론,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문서를 상사에게 보내는 일도 가능하지만 그건 '나 여기까지 했으니 니가 고쳐서 보고해바바'...라는 무언의 손털기로 받아들여져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된다. 마지막 방법으로(내가 권장하고 싶은 방법인데) 상사에게 전자 결재를 상신하면 상사가 불러서 모니터를 함께 보며 수정지시를 하고 그 방법에 따라 재상신하는 방법이 있겠다. 이럴려면 상사가 오픈 마인드로 팀원을 불러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보고서 수정 방향을 나누어야겠지만 잘못하면 상사에게 수시로 불려가서 모니터 앞에서 깨져야 하는 번거로움, 스트레스성 보고가 되기 쉽다. (전자보고의 용이함 때문에 동일하게 서면보고 대비 전자보고로 인해 팀원이 상사에게 깨질 빈도수가 훨씬 높다는 가정하에.)

그것도 아니라면 최후의 방법이 있다. 태블릿PC로 보고서를 보고 하고 터치펜으로 수정 지시한 내용을 표기 후 재보고-수정-재보고-수정 후에 최종 전자결재를 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블릿 PC는 진정한 종이문서의 대안이 될 것인가.



태블릿PC가 종이문서를 구원할까.
태블릿 PC는 종이매체를 대체할 기기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이 태블릿PC는 전자책 시장을 타겟으로 삼아서 많은 양의 컨텐츠를 내고 있으며 카페의 메뉴판, 출장가는 회사원의 발표자료, 중고교 교과서 대용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환경적 측면에서도 이를 통해 분명 종이매체를 통해 소비되는 펄프, 즉 아마존 삼림들을 비롯 종이를 만드는 펄프 공장의 오염물질 등을 줄이는 등 자원 보존에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전자책 단말기나 태블릿PC 안에 들어가는 CPU와 램 등의 전자칩들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중금속과 제조공장 설비, 제조 공정에서 만들어지는 폐기물들도 환경오염을 가속화시킨다. 결국 이는 누가 더 자원을 많이 소모하고 환경을 더 오염...시키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쉽게 생각하면 아이패드 1개를 구입한 사람이 구입기간동안 소비하는 종이를 모두 전자매체로 전환한다고 가정하면 사실 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지금은 태블릿PC를 소유하는 이들이 많지 않지만 제3세계의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전자기기 가격이 떨어지면 언젠가 중국과 인도 시장에서 1인 1태블릿을 소유하게 될 수도 있다. 1인 1태블릿이 종이매체 소비보다 더 지구적으로 바른 소비인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1인 1차량과 같은 문제 아니겠나)

두번째. 새 모델의 주기(model year/period)다. 한 개인이 자동차를 구입하듯 태블릿 PC 구입 후 10년간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1~2년마다 새모델이 출시되면 소비자의 상당수는 새 제품을 구입한다. 결국 1인 1태블릿이란 개념은 그 자체도 무시못할 숫자지만 1-2년주기로 태블릿을 소비한다면 그 규모로 볼 때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광물 소비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그러면 환경단체들이나 녹색당이 운동을 펼치면 소비자들은 태블릿PC를 버리고 종이매체로 돌아갈까. 운동가들은 기술의 발전을 막는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소비자들은 환경운동가들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원을 고갈시키는 소비를 멈추게 될까.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이다. 특히 소비자의 양심을 자극하여(라고 말하지만 결국 훈계하거나 혼을 내서) 소비를 막는 운동성에 대해 비관적인 편이다.

물론 착한소비, 개념소비, 공정무역이라는 방향으로 진보주의자들은 나름 고민하며 소비를 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대안으로는 무엇보다 제조업체 즉 기업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도 필요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PC를 제조하고 모델변경 시점에 구모델을 반납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은 반납 조건으로 신제품을 할인해준다.(보상기변같은..) 그리고 법으로 신모델 출시시 구모델의 부품 호환성을 '40%이상'처럼 규제하는 것이다.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기업의 설계차원의 리싸이클링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소비자가 재활용에 동참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제조사에서 구모델을 동물들이 여기저기에 똥을 싸고 돌아다니듯 뿌려대고는 '폐기'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 한 플라스틱류, 중금속, 전자칩들과 같은 노동집약적이며 주요 자원을 소비하는 전자제품 쓰레기들을 줄일 방법이 마땅치 않다. 1년마다 새모델이 쏟아져 나오는데 시민 개개인에게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10년을 쓰라고 하면 과연 버틸 인간이 얼마나 될까.

고민을 하면 할수록 결국 대안은 기업의 리싸이클이란 생각이 강해진다. 사실 현재까지의 '재활용'이라는 프레임은 지나치게 시민 개개인의 윤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는 기업에게는 공장의 폐수정화나 설비 차원에 국한된 이른바 '제조 공정의 개선'에 제한한다. 이미 환경운동가들은 전지구적 자원의 고갈에 대해 경고한다. 따라서 아마도 다가오는 세대에서는 '재활용' 프레임의 확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관점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끝)

2012/04/27 22:38 2012/04/27 22:38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1. 나는 갈구는 농담이 싫다. 오늘도 그렇고 최근에도 페북의 귀한 친구들, 그것도 대체로 나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과 대화하다가 꼭 비슷한 패턴에서 나는 참지 못하고 굳이 지적(질)을 하게 되는 잘못을 범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름 재밌으라고 갈구며 던지는 농담에 나는 대체로 즉시 입꼬리가 내려가는 편이다.ㅠㅠ
 
2. 예를 들면, 내가 지적하고 싶은 문맥은 '우리 진짜 바보같지'라는 대화에 3자가 '니네 진짜 바보같아'라고 답할 때의 '바보'란 단어는 화자의 포지션에 따라 언어게임 상에서 용례가 다르다는거다. 혹은 '우린 참 대가리가 크다'라고 할 때 3자가 '대가리 큰 애들끼리 잘들논다'라고 하는 거다.

3. 기사로도 나왔지만 페북에서 갑작스럽게 친구관계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제가 없는 경우가 아니라 '댓글에 맘이 상해서'가 많았다고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쿨하려고 애쓰고 쿨하게 굴 것을 자주 강요받지만 나는 사람들의 정서가 쿨 할 수 없다는 데 한표를 던지는 편이다.
 
4. 한때 몸담았던 교회는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꽤 괜찮은 교회였다. 서로 진솔한 나눔들이 있었고 어느 시기를 지나자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한데 언제부턴가 모임 때마다 웃으며 상대를 갈구는 농담을 즐겼는데, '너네집 가난하잖아. 남은 음식 싸가야 하지 않겠어?'라거나 '어이 지방대 출신!'이라거나 '너 머리에 총맞았냐' 같은 말들이 난무하는 분위기에서, 솔직히 견딜 수가 없었다.
 
5. 아마도 그 시절 너무 오랫동안 불편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지켜본 탓인지 나는 상대를 비하하면서 즐기는 개그나 대화에 동참하기가 싫다. 때때로 나도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갈구면서 웃었을 수도 있다. 나도 살면서 어떤 시기에는 그렇게 웃어넘겼고 나름 예리하게 잘 찔러댔던 것 같다.

6. 정혜신 선생은 자학하면서 웃기는 연예인들, 이를테면 뚱뚱하거나 못생겼다고 자학하며 웃기는 개그맨들의 상당수가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수술을 하는 사례들을 들면서 그것이 쿨하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지속적인 상처를 줘서 결국 고통 속에 그 상황을 해소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지적한다. 깊이 공감했다.

7. 어쨌거나 나도 그런 거 같다. 구창모의 희나리 가사처럼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나는 까는 농담이 싫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갑자기 마음 문을 닫고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를 마치 없었다는 듯 '언팔'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나의 이런 지적질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생존본능에 가깝다고 하겠다.

2012. 4. 4



#2.
페미니즘 문제에 있어 남성이 여성적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여성 스스로가 그들의 목소리로 풀어가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은 일면 정당하고 합리적이다. 하지만 어떤 논제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그 논제를 말하는 발화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성차별문제에 있어 남성은 가해자이자 권력자이고 가부장제에서 지속적으로 여성을 괴롭혀온 당사자이다. 남성 발화자가 여성의 주체성을 논제로 들며 여성 스스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대목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노예 스스로 힘을 키우기 전까지 노예를 부리는 주인은 이 불합리한 상황을 고수하겠다는 의미에 다름 아닐 수 있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 권력을 가진 나(남성)는 성추행을 할 수 있고 커피 심부름을 시킬 수 있고 육아를 전담시키고 세끼 밥상을 차리라는 등 가사 노동을 전적으로 위임할 수 있고 힘이 약한 부분을 이용하여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주체의 자격, 주체의 역량, 주체의 권력을 소유하지 못하는 한 나(남성)는 고수할 것이다... 불행히도 남성은 여성의 주체성을 논할 발화자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어져 온 가해와 폭력, 그리고 가부장제를 강화해온 전범으로써 여성에게 사과하고 권력을 위임하고 여성을 젠더적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채무자이다. 따라서 가부장적 질서를 해체하는데 남성의 회개와 성정체성 변화도 '일상적으로' 주체적 행동이 요구된다.

2012. 4. 7



#3.
진보진영이 다양성을 존중하면 분열될까 아니면 연합할까. 아마도 이건 정답이 보이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 이상적으로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연합하는 것이 아름답겠지만, 대체로 사람은 타인과 나의 견해 차이나 행동지침, 지지기반이 달라질 때 자주 분열하고 나아가 상대 전체에 대한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보수는 언제든 '우리가 남이가?', '그 사람도 OO대, OO도 출신이야'하며 눈쌀을 찌푸려질 정도의 강한 연대정신을 보이는 게 문제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진보는 너무 자주, 자신이 품었던 사람에 대한 지지를 실망을 안겨준 단일 사건만으로도 철회하는 냉혹함을 보인다. 어쨌거나 현제까지는 진보진영은 다양성, 차별성을 표현하는 순간 그 즉시 분열해왔다. 그것도 정서적 반감을 표하면서.(그래서 이번 야권 단일화에 대한 생각이 다분히 긍정적이다)
 
살면서 인간관계에 서툴렀던 나는 인간 관계에서 오는 상처로 인한 스트레스에 취약한 것 같다. 예전엔 이 문제를 내가 정서적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으로 보았다. 이성적인, 객관적인,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초월적 존재가 되기를 꿈꿨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나를 인정하고 끌어안고 싶다.
 
나는 이중적이게도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성적 측면에서 비판을 하고 생각의 전환을 요구하지만, 스스로는 실제로 나와 견해차가 있는 사람에 대해 전혀 감정의 흔들림 없이 그 견해를 인정한다고 당당히 말하지도 못하겠다. 이 딜레마 사이에서 현실적 관계의 멘붕이 온다.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 어느순간, 이꼴 저꼴 다 보기 싫고 결국 관계 자체가 피곤한 일로 여겨진다. 그저 익숙했던 마음의 동굴로 돌아가고픈 욕망이 다시 똬리를 튼다.
 
진보진영이 다양성을 존중하면 분열될까 아니면 연합할까. 이 문제에 어떤 건조하고 원론적 판단을 말하기에 앞서 나는 내 한계를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샤프한 판단에 정서가 뒤따라주면 정말 땡큐겠지만 나란 사람이 그런 샤프한 판단력도, 더불어 땡큐한 인격이 아닌 관계로 매사에 많이 좌절한다. 그런데 이 불일치를 부정하려니 이중인격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이상적인 얘기만 겉으로 하고 속이 썩어간다. 정신 건강을 위해, 그리고 서투르더라도 관계의 '거북이 걸음식' 진보를 위해... 나는 일단 내 미숙한 관계의 수준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2012. 4.9



#4.
대한민국 1% 남편에 도전 중인 나. (풉)
 요즘 아내가 월요일마다 강의가 듣고 싶다고 해서 월요일만 퇴근길에 성하를 데리러 가고 있다. 아내가 잘 부탁하여 다행히 어린이집에서 늦게까지 기다려주기는 하는데 그 늦게라는 게 내 입장에서는 평소보다는 조금 일찍 회사에서 나와야 가능한 시간이다.

결국 월요일부터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엉덩이를 쳐들어야 하는 상황인데... 눈치가 보인다. 아이 데리러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아마 다수는 아내는 뭐하고 네가 가냐 라고 물을 것이고 선임은 나를 배려하기 보다 나를 주시할 것이다.

월요일의 이른 퇴근(10분? 15분?)은 일시적이고 나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지속적으로 데려오지 않아도 되는 남성이니 이것은 그냥 하나의 체험이겠지만 매일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데리러 가야 하는 직장 여성들은 출퇴근만으로도 스트레스 만땅일 것 같다. 듣기로 서울은 어린이집이 유아를 3~4시 이후로는 안 봐준다고 하여 아이만 픽업해서 집에 데리고 오는 직업도 있다고 한다.ㅠㅠ
 
여성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눈치를 보며 회사를 다녀야 하나. 사업장마다 어린이집을 설치하는 건 참 머나먼 숙원사업인 듯 하고, 지금으로서는 아이 데리러 가는 여성들 뒷통수에 대고 헛소리나 지껄이지 말고 맘편히 가게 해주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다.

그나저나 오늘은 또 어떻게 퇴근한다냐... 흠흠.

2012. 4. 9

2012/04/27 01:07 2012/04/27 01:07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성경묵상

[오늘의 묵상]

*유모의 심정으로 수고한 바울 (살전 2:7-12)   
 
  
[개역개정]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메시지]
7-8 우리는 여러분에게 무관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생색을 내거나 으스댄 적이 없습니다. 그저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여러분에게 마음을 썼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9-12 친구 여러분, 여러분은 그 시절에 우리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며 밤 늦도록 수고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 여러분에게 우리를 후원하는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얼마나 신중하고 경우 있게 처신했는지, 또한 여러분을 믿음의 동료로 얼마나 세심하게 대했는지, 여러분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거저 얻어먹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했습니다.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격려의 말을 속삭였고, 그분의 나라, 곧 이 기쁨 넘치는 삶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법을 차근차근 보여주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스스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으나 유모처럼 유순하게 굴었다는 이야기를 서신의 처음부터 언급하는 걸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셀프깔대기 수준의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거나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한다는 언급은 정작 서로 신뢰하고 서로의 공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이들 간에는 굳이 필요치 않은 사족같다.

자신의 애정과 헌신을 낯뜨겁게 언급하는 이 도입부는 역설적으로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느꼈던 불안함, 근심스러움 혹은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바울은 이후 서신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에 대해 비난하는 교회 내 일부 분위기에 대해 변론에 임한다. 한때 자신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복음을 전하고 양육한 한 교회에서 자신이 떠난 후 비난의 목소리를 듣게된 바울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오 해를 바로잡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허탈함, 서운함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서신을 써서 자신의 메시지를 바로잡고자 하는 그의 편지 초반 목소리에 다분히 사족같은 자기 공로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언급들이 주를 이룬다. 선의의 행동이 오해를 받았을 때 만큼 상처가 되고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일이 또 있을까. 바울은 어쩔 수 없이 한때 공동체였던 지체들을 향해 자기변론에 임한다. 한때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나도 자기변론적 글을 참 많이 썼던 듯 하다. 오해와 불신의 싹이 틀 때에도 동굴에 숨거나 인신공격, 혹은 맞비방의 마음을 버리고 힘들더라도 자기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바울 사도가 그러할진대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는가.

 

 

'12. 4. 13.

2012/04/13 23:20 2012/04/13 2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