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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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내가 육아를 분담한다거나 가사 기여도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주로 받는 질문이 있다. 맞벌이 하죠?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한다고 대답하면... 다시 묻는다. 그럼 아내는 집에서 뭘해요? -_-;;;

 

내가 '전담'이라고 했거나 '육아가사 기여도가 높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상황은 곡해되고 상대의 관심은 여지없이 아내의 잉여시간에 꽂힌다. 더 흥미로운 건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도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는 거다.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고,,, 아내는 짬이 나도 안 되고 한시도 멍때리고 있으면 안 될 기세다.

 

사실, 주중 대부분의 가사육아는 아내가 챙긴다. 나는 퇴근 후에 아이를 씻기고 재운다. 주말에는 원칙적으로 내가 아이를 전담하고 짬이 나면 가사를 돕는다. 따라서 내 육아 분담 비율은 높으면 3:7, 낮으면 2:8 수준. 그런데 2~3의 기여도에 의해 자주 아내는 집에서 뭐하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move! move! 잠시도 가만있으면 안돼..) 그것도 여자들에게.

 

얼마전 길고양이가 상태가 안 좋아서 아내가 성하를 잠시 편의점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동물병원에 다녀왔다. (아내는 편의점 아주머니와 친하다) 황당했던 건 돌아오다가 동네 엄마와 마주쳤는데 그 반응이 <성하를 길거리에 내팽겨치고는 지 볼일 보고 온 엄마>취급 하더라는 거였다.

 

나는 자주 '여자의 적은 여자'라거나 '이이제이'(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제압함)같은 생각을 종종 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자주 현실세계에서 확인한다. 나의 상식으로 남편이 육아의 일부분을 분담하여 아내에게 잉여시간을 만들어주면 주변 엄마들은 자신의 잉여시간을 만들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잉여시간을 확보한 엄마를 한량 취급한다.

 

 '엄마라면 한시도 자기 아이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아내라면 남편 밥은 차려줘야 한다', '딸이라면'... 안타깝게도 이런 윤리가 약자(여성)측에서부터 아주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대체로 강한 분노는 주변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톱니바퀴에서 이탈한 사람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비난이 쏟아진다. '엄마가 되서는 쯧쯔..', '아내가 그것도 안 하다니..'

 

1억 로또 당첨된 사람보다는 주식으로 천만원 번 사람에 대한 질투가 크다. 그 결과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일도 열심히 안 하고 주식질이나 해댔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정치도 여야 정쟁보다는 진보당 내에서의 다툼이 더 잔인하고 치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에서의 젠더 문제는... 갈 길이 멀다.(라고 쓰고 쫌 막막하다..라고 읽음)

2013/09/13 01:23 2013/09/13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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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서도 자주 여성의 적은 여성이 되곤 했다.
왜 그럴까.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적은 사측이 아닌
정규직 노동자인 것과 같은 논리? 그걸론 부족하다.
그 와중에 눈에 띈 책이 <나쁜 그녀들의 심리학>이었다.

냉큼 사서 오늘 2시간을 투자해서 2/3를 읽었다.
간단히 평을 하자면 이 책에 실린 사례들, 즉 개별 여성들의
고충을 읽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저자의 범주화라던가
어떤 직장 내 여성 동료들을 대하는 지침은 별로였다.
...
이 책을 읽다보니 이건 마치 이이제이 같은 느낌.
정작 빅브라더는 다른 곳에 있는데 을들의 싸움 속에서의
어떤 윤리, 논리, 지침 같은 걸 풀어내는 느낌이랄까.

가장 큰 문제는 일터에 여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고
가뜩이나 일자리가 빠듯한데
파이 열 조각 중 한조각이 배당된 그룹 내에서 게임을 뛰니
당연히 '나쁜 그년(그녀)'들이 생기는 셈이다.
물론 하루하루가 여성 동료들과의 불화로 지옥같은
직장인들에게는 현실적인 도움이 되겠지만
좀더 넓고 깊게 파고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2013/07/13 01:21 2013/07/13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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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쓰려던 <한국교회와 여성>은 서평을 쓰기에는 좀 거시기한 구석이 있어서 간을 보는 중.
일단 3개의 발제문 중 이정숙 교수의 "우리 딸들이 즐겁게 예배하기 위해"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그녀가 언급한 '젠더타협' 혹은 '젠더협상' 이론에는 별로 동의가 되지 않았지만 아래 내용들은 유익했고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여성신학도 갈 길이 멀구나...

"스탠리 그렌츠는 보수적 기독교에서 교회 내 여성문제에 대해 두 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고 전한다. 즉 사역의 모든 면들이 여성에게도 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등주의자들과, 여성은 오직 도와주는 역할로서만 합당하게 공헌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보완주의자들이다. 보완주의자들을 1987년 성경적 남성과 여성을 위한 협의회를 결성하고 1988년에 ...덴버성명서를 작성했다. 이들 그룹과 관련된 신학자들로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제임스 패커, 웨인 그루뎀, 페이지 페터슨, 로버트 갓프리, 존 파이퍼 등이 있다.

여성의 교회 사역에 관한, 또 부부관계에 관한 이들의 입장은 성명서의 다음 부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내들은 남편의 권위에 저항하지 말고 남편의 리더십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순종해야 한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한 축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다스리고 가르치는 어떤 일들은 남성에게 제한되어 있다." (113~114쪽)

교회 여성들조차 여성신학 관련 연구가 너무 학자연하여 공감하기 어려운 데다가 과격하고 또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신학이라기보다는 일부 진보적이거나 상아탑 안의 여성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여성 신학자들의 메시지가 신학적 색깔론에 가려져 여성들에게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면서 충분한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109쪽)

2000년 이후 지식층이며 진보적 인사를 자칭하는 남성들 중 여성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학문적으로 지지하는 듯 했지만 구체적인 헌신없는 관심으로 끝났다. 반면 복음주의 남성들은 여성주의를 멸시하거나 은근히 두려워하기도 했다. 마치 몇몇 여성주의자들이 온 세상을 타락시키고 전복시킬지 모른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들도 막상 자신의 딸들이 사회적 지위를 갖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고 예외적 여성이라고 평가받기 원했다. 교회 여성들의 경우는 진보나 보수를 떠나 비교적 유사해 보인다. (111쪽)

여성들은 교회 사역에서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양성 평등적 사고가 부족해 뎡등하지 못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다. 설문조사에 응한 절반의 여성들(51.0%)은 교회에서 주로 하는 일이 '청소와 음식 만들기'라고 하며, '교사, 예배 기도, 설교' 등의 항목에서는 모두 합해 1.7%의 여성들만이 참여한다고 답했다. 이는 교회 내에서 여성의 위치가 결코 평등한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문제가 문제로서 인식되지 않으니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설문조사에서 교회 여성들의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차이를 인상깊게 보았다.(129쪽)

신대원을 졸업한 H는 남편의 이해를 얻지 못해 예전처럼 평신도로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H의 경우 남편은 오히려 교회에서 다양한 사역을 하는데 비해 신학을 공부한 자신은 제한된 사역을 하고 있다고 했따. 동기동창인 남편이 평소 자신을 은근히 경쟁상대로 생각해 질투하며 불편해 하는 것을 감안해, 남편이 좀더 신앙적으로 성숙해져 자신의 사역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중략) 그런데 H의 주저함이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해서인지 가정의 평화를 위함인지는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다.(137쪽)"

(<한국 교회와 여성> 중 2장 '우리의 딸들이 즐겁게 예배하기 위해', 이정숙)
2013/04/07 01:20 2013/04/07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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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륜 스님은 과거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하소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나 책임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딸을 폭행한 아버지에게 어떻게 감사하라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내 고통은 점점 깊어집니다. ‘아버지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생각도 사실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그 순간에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매일매일 어머니한테 108배, 아버지한테 108배, 오직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세요."
 
"물론 그의 행위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성추행을 당했다는 그 생각이 나를 더러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껴안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사랑을 받았다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성추행을 당했는지 사랑을 받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이 도리를 깨쳐 버리면 어릴 때 상처를 담박에 벗어날 수 있고 이 도리를 못 깨치면 죽을 때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2.
 내가 최고 중 하나로 꼽는 영화 <여자, 정혜>에서 정혜는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기억을 묻어두고 사는 여자다. 그는 결혼 첫날밤 남편과 원치않는 상황에서 관계를 갖고 나서 그녀가 처녀가 아님을 안 남편의 비아냥 대는 듯한 추궁에 그날 새벽 짐을 싸서 호텔방을 나온다. 그녀의 일상은 '비정상적'이다. 딱히 어떤 광기어린 행동은 없지만 매사에 의욕도 없어보이고 존재감도 없다. 호감이 가는 남자가 생겼지만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어느 날 그녀는 칼을 들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정작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지도 못하고 뛰쳐나오다 넘어지고는 울음을 토하고 만다.
 
#3.
 한동안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교육 교재는 남성들의 비아냥 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당사자가 성적 굴욕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다'라는 대목이 그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남성들은 공공연하게 여성들에게 무안한 질문을 하고는 "굴욕감을 느꼈냐" 내지는 "이것도 성희롱이냐", "OO씨는 괜찮다는 데 니가 불쾌한 건 왜 그런거냐" 등등 당사자가 불쾌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라는 내용에 대해 남성들을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때로는 부하 여직원들에게 사소한 일로도 분노를 표출해댔다.
 
성희롱, 성추행, 나아가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빨리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을 가능한 빨리 잊는 것이다. 피해를 입기 전 상태로 몸도 마음도 회복하는 길이다. 폭행 사건에 연루되거나 교통사고 등에 의해 물리적으로 몸을 다친 것과 달리 성폭행은 다분히 경미하게 다치더라도 그 정신적 내상이 크다. 남성들은 쉽게 여성을 위로한답시고, 평상시에도 하는 성관계를 강제적으로 한 셈 치고 잊어라, 그것에 매몰되고 괴로워해봐야 니 손해다 라는 류의 이야기로 다독인다. 하지만 그녀는 주변에서 정상적인 여성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당사자는 잊기를 강권하고 주변인들은 오래토록 잊지 않는, 참 이율배반적인 반응이다.

 

#4.
 개인적으로 나는 법륜 스님의 결론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가해자가 있었고 피해가 있었고 나는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고통 속에 침잠해있어봐야 나만 손해다. 털고 일어나야 한다. 특히 이런 정신적인 문제는 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성폭행을 당했지만 그 기억을 잊자, 그저 어느 남자와 하루 잤다고 생각하자... 내 마음이 평정심을 찾는다면 그 일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에 영화 속 정혜는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여자다. 없던 일이다. 돌이켜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불쑥불쑥 올라오는 이해할 수 없는 우울함과 굴욕감, 스스로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원인이 있었기에 현상이 있다. 정신도 몸과 다르지 않게 고통에 신음한다. 내가 어떤 고통에 매몰되는 것은 그 원인으로 인해 내 마음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5.
 때로 건강한 여성들은 특히 '아버지'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란 딸들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 혹은 사회적인 상황에 대해 비교적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편이지만 아버지의 격려와 애정이 부족했거나 나아가 '아버지'에 의해 성적 유린을 당한 딸들은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자라면서 에너지를 충족시켜줘야할 대상이 에너지를 빼앗는 가해자 역할까지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여성에게 먼저 공감해주고 그녀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태도 없이 득도한, 혹은 '외란에 강한'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처방을 던져주는 법륜 스님의 말들이, 내게는 고통스럽게 읽혔다. 적어도 칼럼에 쓸 정도로 누구에게나 공정하거나 보편적이지 않은 처방이라 여겼다.

 

내가 법륜 스님같은 훌륭한 멘토도 아니고 전문 상담가도 아니지만 적어도 내 경험과 상식으로 판단하건데,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 대한 진정한 힐링은, 그녀가 겪은 사건이 정말 큰 일이었음을 공감하고 더불어 피해 여성을 여전히 가치있고 아름다운 존재라고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계속 아껴주는 것이다. 그 고단하고도 반복적인 일상적 치유들이 그녀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2/12 22:40 2013/02/12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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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들, 특히 나를 포함한 내 주위 개신교 남성들은 감정표현 없는 글쓰기의 달인들이다.

어찌나 이치에 맞는 말들만 쓰시는지...(나도 스스로는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쓰는 편이지만.-_-;;;)

솔직히 진리, 교리로 대변되는 몇 개의 키워드들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문장을 생성해서

한편의 단문으로 만들어주는 교계용 어플이 있나 싶을 정도다.

혹은 빅브라더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데 특히 남성은 글로 감정표현을 하는지 여부를

매순간 감시하고 행여 감탄사라도 보이기만 해도 잡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남성의 SNS 글쓰기 스타일도 어떤 면에서는 참. 연구대상이다.^^

2013/01/29 22:11 2013/01/29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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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주의적 시각이 갖는 부정의(injsutice), 몰역사성, 탈정치성은 차치하더라도 '성 역할'이라는 말은 있지만 '계급역할', '인종 역할'이라는 말은 없다는 점에서 '역할'이 얼마나 정치적인 담론인지 알 수 있다. 최소한 공식적인 사회 담론에서 "사람은 자신의 계급적, 인종적, 장애, 연령 등의 위치에 따라 평생 그에 맞는 역할(직업)을 해야한다. 흑인은 청소부 역할만을 해야 하고, 시각 장애인은 안마사라는 직업만을 가져야 하며, 가난한 사람은 그 위치에 맞는 심리, 행동,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은 발화될 수 없다.

 

 이에 비해 성별에 따른 역할론은 자연스럽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사회는 성 역할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에 대해서 심리적, 문화적,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혐오와 적의, 처벌을 행사한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계급, 장애, 연령, 인종, 종교, 지역, 국적 등으로 인한 분엽(차별)은 부정하며 극복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반면, 젠더는 그렇지 않다. 계급이나 인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사회적 제도이고 피해지만, 젠더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산, 재생산 노동을 모두 감당하는 여성의 노동력은 한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는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향상될수록 이 노동은 남성과 분담되기보다는, 여성들 사이의 계급, 인종, 나이 등의 위계에 따라 여성들 내부에서 '전가'된다.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여성들 역시 공장 노동과 같은 전통적인 제조업부터, 음식 서비스 산업, 가사 노동자, 아내, 농업 노동자, 한국의 심각한 저출산 문제의 해결자, 성 산업에 이르기까지 기존 국내 여성들이 담당해왔던 저임금, 비공식, 비가시화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별 구분보다 자본과 학력, 기술 등 개인이 가진 자원에 따라 젠더 범주가 '유연'해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가부장제의 쇠퇴는 여셩의 지위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2013/01/14 01:16 2013/01/14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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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성매매특별법상 자발적 성매매 여성을 처벌하는 조항에 위헌 소지가 있어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즉각적으로 양분된 반응이 쏟아졌다. 성매매 관련해서 하고싶은 얘기가 없지 않았는데 이참에 관련된 생각들을 조금 해볼까 싶다.


성을 매매할 수 있는가
원론적인 쟁점은 성이 매매 가능한지 여부다. 집창촌에서 일하는 성매매 여성들은 “우리가 원해서 성을 팔겠다는데 국가가 왜 개입하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이 자발적으로 성을 매매하겠다는 것에 대해 법적 규제가 정당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반대도 만만치 않다. 성매매는 간통과 달리 돈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자기결정권의 범위를 넘은 규제 대상이 될 수 있고 여성들이 성매매에 뛰어들지 않게 하는 교육·복지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고려대 하태훈 교수)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거래가 가능한 것 아닌가 어떤 억압적인 이유가 아닌 자발적 매매에 대해 국가가 내 자유를 침해할 권리가 있는가의 문제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것들이 매매가능한가. 일례로 개인의 장기매매는 어떨까. 내 콩팥 하나를 팔아서 수익을 얻는 행위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질 수 있을까. 물론 장기매매와 성매매는 몸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떼어주느냐 몸으로 노동을 하느냐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모든 매매의 자유에 대해 재고할 지점이 있다는 점 정도를 고민할 부분이다.


세계적 성매매 현황: 집단, 산업화 VS 개인 대 개인
세계적으로 성매매의 입장은 어떨까.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주, 스위스, 독일,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터키, 네덜란드, 헝가리, 미국 네바다주, 멕시코, 벨기에는 공창제(성매매를 직업으로 인정)를 시행하고 있고 잉글랜드, 아일랜드, 이스라엘, 캐나다, 폴란드, 핀란드, 스페인은 자치주의(국가가 성매매에 관여하지 않으나 인신매매, 호객행위는 규제함)이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 스웨덴,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예멘, 파키스탄 같은 국가들이 성매매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결국 성매매에 대한 국가의 입장은 어떤 지배적인 입장이 있지 않고 그 지역, 문화,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의 입장도 있다 . 한국처럼 성매매가 대규모 산업화한 나라에서 아무 전제 없이 성매매 여성을 처벌하지 않으면 성매매가 더 창궐할 가능성이 크고, 이를 사생활의 자유로 보는 것도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서울대 양현아 교수) 또한 한국의 성매매는 서구처럼 개인 간 일대일 거래 행위가 많지 않고 집단화·산업화한 양상이 지배적인 만큼 이런 식의 법적 판단(성매매의 합법화)가 성 산업만 키우는 꼴이 될 것으로 우려하기도 한다.(중앙대 이나영 교수) 충분히 공감할 만한 생각이다.


성노동자들의 인권 VS 여성 인권
또하나의 쟁점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여성인권과 성노동자들의 인권의 대립이다. 본질적으로 성매매는 남성중심 사회구조에 기인한 비정상적 노동수단이다. 남자들의 퇴폐 밤문화 속에서 보다 하드코어적인 자극을 충족시켜줄 대상으로 자신의 반대성을 가진 인격을 상품으로 대접받겠다는 욕망이 내재해 있는 셈이다. 당연히 이러한 매매구조에 여성이 동의할리 만무하다. 한 진보 여성단체 관계자는 "자칫 성 판매를 노동으로 인정하고 용인하자는 식이 될까 조심스럽다"며 "성매매를 여성 인권이나 건강권 보호가 아닌 노동권 보호 측면에서 보는 것은 여성계에서 아직 논란이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반대의 입장은 성노동자들 스스로의 입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순간 한국사회에서 성노동에 연루된 상당수의 여성들은 법의 사각지대 안에 놓이게 된다. 성매매를 하고도 화대를 받지 못하거나 모텔에서 몸이 강제로 묶인 채 폭행당하고 성관계 장면을 카메라로 촬영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업주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도 도리어 성매매 사실을 신고하겠다고 협박해서 무마되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집창촌의 경우도 경찰이 실적이 필요할 때마다 닭장의 닭 잡아가듯 한마리씩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집창촌 여성들이 하소연한다고 한다. 일반 여성들은 원론적으로 옳지 않은 성매매구조 자체를 문제 삼지만 실제 사회 안에 성노동자들은 투명인간 취급을 하게 되고 성노동을 그만둬야만 정상여성으로 인정된다. 그전까지는 성노동자 여성들은 여성들 세계에서는 타자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두식 교수의 인터뷰에 응했던 김연희씨의 증언들을 곱씹어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밀사와 함께 성노동자 권리모임 ‘지지’(GG) 활동도 하고 계시죠? 지지는 어떤 단체죠?"/ “2004년 성노동자들의 시위를 보고 충격을 받은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여성주의자들이 성노동자 운동과 연대하고자 성노동 세미나를 시작했어요. 그 연속선상에서 만들어진 게 성노동자 권리모임 지지예요. 운동이 침체되는 상황에서 밀사가 성노동 실험이라는 사고를 쳤고, 그 소식을 들은 지지 쪽에서 바로 밀사를 접촉했죠. 밀사가 지지 활동을 함께 하자고 저에게 제안했고요. 지지는 제가 집창촌에서 보던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과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어떻게 달랐죠?/ “그 전에 집창촌을 찾아오던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우리가 남성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다면서 ‘너희는 여기서 벗어나야 해’라고만 했어요. 먹고살기 위해서 하루하루 일하는 우리에게 ‘너희는 강간을 사고파는 거야’ 뭐 그런 이야기나 하니까, 듣는 입장에서 굉장히 불쾌했죠. 쌈리(평택의 성매매 집결지)에 있을 때는 업주들이랑 아가씨들이 아예 ‘여성단체 출입금지’라고 써 붙였을 정도예요. 그런데 지지 사람들은 ‘성매매가 현재 불법이기 때문에 폭력을 당해도 피해를 호소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 줬어요. 일상에서는 듣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맞는 얘기들이었어요. 우리가 일하는 상황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기도 했고요.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활동을 함께 하게 됐죠.”


덧붙여서: 성의식. 성해방, 성매매
이렇듯 성매매는 다중 가치관이 개입된 사회문제이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한 가지만 더 짚고 싶은 부분은 '성의식'에 대한 부분이다. 여성인권은 과거대비 최근들어 급격히 신장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여성의 성평등 문제는 미니스커트와 같은 페션에서부터 최근 '잡년행진'(SLUT WALK)까지 페미니즘적인 시각이 확산되는 추세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성해방운동은 여성의 피임기구가 발전하면서 임신을 전제하지 않은 자유로운 성생활에 대한 욕구와 그 실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문제는 성해방, 프리섹스주의와 시기적으로도 오버랩될 뿐더러, 여성문제를 다룰 때 성적인 요소들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성문제에 있어 주장하는 목소리의 결이 일치할 때가 많다. 허나 국내에서 여성 불평등 문제는 여성단체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지만 성해방이나 동성애 문제로 들어가면 대다수가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곤 한다는 점이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한국사회에서 보통의 여성들이 실제 보수적인 성의식을 가지고 있고 특히 그중 기독교인은 혼전순결을 중요시하고 여성의 성적 욕구에 대한 억압, 무분별한 성관계와 같은 성해방 이슈에 부정적인 입장이지 않은가.

여기서 내가 불편한 지점은, 성매매 문제에 있어 이러한 성의식이 성매매의 윤리잣대에 부지불식간에 스며든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수의 여성이 사회구조적으로는 남성중심의 한국사회의 직장문화, 유흥문화, 성불평등 문제 등에 강하게 반발하지만 성노동자로서의 개별 여성에 대해서는 사회일반적인 보수성을 - 남자와 잦은 성관계를 가진 여성은 더럽다, 성매매 여성은 정상적인 여성이 아니다  류의 - 계승한다.

남성의 성매매 여성에 대한 시각이 이중적이라면 - 성매수의 수혜자면서 사회적으로는 성매매의 대상을 더럽다고 혐오하는 - 여성들도 성노동자에 대해서는 이중적이긴 마찬가지다. 쉽게 말해 성노동자들이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성노동을 강요받는 피해자로 인식하지만 실제 노동자들과 대면할 때는 그들의 선택을 비난하고 법적인 처벌에 찬성하는 것이다. 또한 정서적으로 성노동자에 대한 더럽다는 인식을 여성들 스스로도 하는 듯 하다.

따라서 진실로 내가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런 것이다. 여성 성노동자들에 대한 일반 여성의 인식이 다분히 보수적인 사회인식에 편승한다는 것, 이는 결국 성을 사고파는 이른바 성을 상품으로 규정짓는 인식 이상의 윤리적 잣대를 성노동자라는 타자(대상)에 투영한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상대적으로 남성 성노동자에 대해서는 '더럽다'거나 '걸레같은 년(놈)'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지 않는다.) 종교적 신념에 의해 혹은 보수적 가치에 의해 성노동자들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유별나게 불결하고 더럽고 해서는 안되는 극단적 행위로 매도하는 데에는 그 잣대가 '매매행위' 자체에 있지 않고 '일대다의 섹스행위'에 대한 윤리의식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하다못해 장기 매매를 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분노함과 동시에 동정의 대상이 되지만 성매매를 하다가 죽거나 폭행당하는 여성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보다 가벼히 여기거나 성노동을 하는 여성의 몸 자체를 '인간말종' 내지는 '걸레'로 인식하는 한계가 보인다. 사실 이것이 '여성' '성노동자'에게 쏟아지는 이중비난의 알맹이인 셈이다.

나는 거시적으로나 장기적으로 성매매가 근절되어야 한다는 큰 그림에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성노동자를 대하는 그런 시각, 그리고 그들이 받는 고통에 대해 관심있게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원론적인 이야기(성매매반대)만 되풀이하는 것들이, 자주 불편하다. 그리고 그런 불편함은 내가 보수적인 개신교인이고 프리섹스를 옹호하지는 않지만, 성노동자의 인권을 얘기할 때 성해방 담론을 반대하는 윤리적 잣대가 그 개개인에게 얹혀지는 현실에 기인한다. (끝)
2013/01/11 01:14 2013/01/11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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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미터 밖에서 보면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인 거죠. 밖에서 페미니스트로서 발언을 하는 건과 현실에서 여성으로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의 사회적인 괴리가 큰 것 같아요. 반대로 생각은 정말 가부장적인데 인격적으로 여성을 대하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이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됐으면 그걸 실제로 표현해야 자기 것이 되잖아요. 생각과 태도의 괴리가 없는 것, 가능한 그것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적으로 건강한 변화가 아닐까 싶어요."

“남자들도 쉽지 않은 건 알아요. 아내를 배려해야 한다는 게 이중적인 부담으로 느껴지죠.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다 주는 것과 아내가 자기 이름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물론 남자들도 ‘나는 뭐 내 걸 챙기면 살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남자는 그래도 사회활동을 하면서 갖게 되는 네트워크와 직함이 있잖아요. 여성들은 계속 가정에서 지내다 사회에 나갔을 때, 그 갭이 상당하거든요. 남성과 다른 코스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동일한 사회적 위치에 서기까지는 정말 힘들죠. 여건의 차이를 인정해주고 여성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 양혜원 님. 인터뷰 내용 중

2013/01/10 01:13 2013/01/10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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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잘 의식하지 않았는데 '매를 맞는다'는 표현 자체가 대단한 '가부장적 창의력'이란 생각이 든다. 매를 때리는 경우에는 대체로 훈계를 하는 자와 받는 자를 규정하고 그 둘 사이의 관계에서 훈계 행위로 말로 하느냐 물리적인 힘을 가하느냐로 구분된다. 따라서 방법을 떠나서 '훈계 행위에 대한 긍정'이 전제된다. 결국 '매맞는다'는 의미는 아내가 남편의 훈계를 받는 존재임을 처음부터 암시한다.
 
'구타당한 아내', '아내 폭력', '폭행' 같은 대상과 행위를 명시한 표현이 아닌 가정폭력이라는 보다 큰 범주화로 포장하는 것도 문제지만 매맞는 아내라는 말은 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구조적으로 접근한다면 여자가 출가하여 남편의 집안으로 들어가면 서열 최하위의 노동자가 되고 그 노동자는 그 개별 가정(부부)의 가사, 출산을 도맡아야 함은 물론 그 집안의 가부장적 질서에 잘 몸을 녹여야 한다.
 
명절 제사나 기일, 혹은 남편 집안의 대소사에 불참 내지는 무신경하거나 개별 가정에서 남편을 보필(아침 접대, 남아 출산,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가사노동 전담)에 부실하거나 귀가시간이 늦도록 회식에 참여하거나 여성이 사회적으로 안해야 할 일들(흡연, 음주과다, 종교생활 집중)을 행할 시에 남편과 남편의 집, 본가에서는 개별 여성을 제대로(가부장적 원리대로) 훈육할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조직'에 들어온 신입 노동자인 여성은 국가가 법치를 내세우듯 유교주의라는 법도에 따라 여성을 '매'로 다스릴 수 있다. 우리는 교양인이니, 대부분의 경우에는 대화로 여성을 훈육해야 하겠지만 버르장머리 없는 요즘 여성(아내, 며느리)들이 분위기 파악을 못할 때는 좀 강하게 우리 집안의 법도를 인지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말단 가족원(여성)을 책임지고 있는 남편이 매를 들어라. 그리고는 사랑(성관계)으로 달래줘라. 이게 '매맞는 아내'란 말이 담고 있는 함의다.
 
내 생각이 과한가. 요즘 얘기같지 않은가. 불행히도 대답은 NO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1/10 01:12 2013/01/10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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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남자가 툭 던진 한마디에 여성이 갑자기 정색을 하거나 마음 상해하는 대목을 일상(남자)세계에서 희화화하는 경우가 많지만(회화화된 이야기 속에서 이때 여성은 데이트 중에 곧장 집으로 가버린다) 상황적으로 그 남자의 말은 우회적으로 의도된 (뼈있는) 말인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여자의 영민한 '촉'을 남자들은 '삐침' 정도로 비웃지만, 무의식 중에 나온 의도된 말실수를 깨달은 남자들은 직관적으로 사과하는 (척하는) 본능을 보인다. 그러고 뒤에서 드러난 사실만을 발화하며 여성들의 쪼잔함, 피곤함을 비웃는다. 마리 루티는 '사랑학 수업'에서 이런 이성 관계에서 오는 심리적 무의식 문제와 여성주의적 관점들을 적절히 사례로 풀어낸다. 공감할 만한 구석이 많다.

내친 김에 조금 더 달리자면.
"남자가 직장생활하면 그럴 수도 있지 여자가 피곤하게 왜이래?"라고 하는 대목의 배경에는 남자들의 술자리가 있다. 실제로 이렇게 말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자주 들었다. 남자가 고단하게 일하면서 구조적인 문제로 생기는 술자리 한두번에 왜 그렇게 가혹하게 혹은 예민하게 구느냐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것도 자신이 그렇게 비싸다고 구박했던 아내가 산 백화점 옷값을 써댔으면서도.) 이때에도 비난의 대상은 즉시 근면한 남편에게 잔소리나 해대는 여성의 옹졸함으로 귀결된다.

좋다. 내가 남성편을 좀 들어주겠다. '원치 않게' 그런 자리에 갈 수도 있다. 한두번 어쩌다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내 아내가 여성들 모임에서 원치 않게 한두번 3차, 4차에서 성관계를 갖거나 그렇지 않으면 룸싸롱 같은데 가서 유사 성행위를 하고 만취상태로 들어와서 "극심한 가사노동과 육아스트레스로 여자가 나가서 그럴 수도 있지. 지 아내하나 만족 못시켜주는 남자가 피곤하게 왜그래?"라고 말할 때 관대하고도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쿨한 남편이기를 바란다.

외간 남자가 말만 붙여도 부정하다고 여기는 '순수한' 남편들은 이 나라의 유흥문화(직장문화)가 미쳐돌아가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변명하거나 아내가 직장생활하는 남자 보필도 못하는 피곤한 타입이라는 등의 궤변론을 펼치지 말기를 부탁드리는 바...


 2013년 1월 4일

 

2013/01/04 01:10 2013/01/04 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