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이 아닌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하.
오늘따라 즈피아노 협주곡을 유심히 보다가 입을 뗀다.
"지휘 아저씨 머리.."
"응? 머리?"
"머리털 많은거 같애"
(ㅋㅋㅋ지휘자는 네빌 매리너경이다.)
"피아노 아저씨는..."
"머리가 쪼꼼 빠질라그래."
풉! 웃다가 물어본다. "그럼 아빠는!"
내 이마 위를 유심히 보더니,
"아빠는... 아빠도 털이 좀 빠진거 같애"
ㅡ,,ㅡ+
'12. 9. 3
'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김동문 선교사님과 대화 중에 김선교사님이 그런 말을 했다. 귀국한 후로 주변 사람(기독교배경)의 대화의 절반은 못알아듣겠다고. 이유인즉슨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할 때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책들과 저자들의 이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저자명과 서명이 어떤 기호나 암호처럼 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김선교사님은 그간 본인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음을 반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친 외국 저자들의 이름이 난무하는 대화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살짝 드러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우기도 쉽잖은 미쿡, 유럽 저자들의 책을 읽으면 사실 그 핵심 주장들이 그리 낯설지 않은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풀어내기 보다는 저자명, 서명으로 암호화한다는 말이다. 결국 알맹이는 단순하고도 일반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임에도 많은 대화에서 그 담론을 암호키 주고받더라는 거다.
나는 크게 공감했다. (아마도 원저자, 원저서명을 주고받는 이런 트렌드는 레퍼런스를 장황하게 밝히는 미국학풍을 반영한 것이리라.) 대화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우리에게 시급한 건 좋은 저자의 핵심 개념, 탁월한 상상력을 캐치하는 것이고 그것을 한국사회에 중첩시켜놓고 실천, 참여(앙가주망)의 방향성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미 내 것이 된 개념의 레퍼런스명들을 장황하게 외우고 그것을 상대에게 전송하는 키값(key value)처럼 주고받을 이유는 없지 않나...하는 거다.
불현듯, 중고등학교 때 사건의 의미보다는 연도나 위인의 이름을 외우던 역사시험 시간이 떠올랐다.
가끔 주변 눈치 보지말고 정말 네가 원하는 걸 하라는 얘길 듣는다. 물론 주변 눈치를 보면서 욕망을 누르는 것도 문제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강하게 원하는지 지금 원하는 것이 일시적 무료함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 본질을 뒤흔드는 일인지에 대한 불확실함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따라서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하기에 앞서 '너 자신을 알라'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체로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타자(세상)와 나를 구별짓거나 때론 동일시한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개인은 타인과 같은 욕망, 타인과 구별된 욕망을 찾아낼 수 있고 그 때에야 비로소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선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나는 자아, 혹은 자신의 내적 에너지가 없는 이들에게 무성의하게 '네가 원하는 걸 하라'는 선언적인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를 단련하라'고 격려하는 게 어떨까 싶다.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으로 때론 자아를 낮추고 조직에 몸을 맞추는 겸손함도 배우고, 때론 공동체와 구별된 독특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때는 그것을 발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세상은 점점 조직화되고 속도에 민감하게 흘러가서, 개인이 스스로를 인지하면서 성장하기를 기다려주기보다는 일단 그 나이와 역할에 맞는 톱니바퀴에 물려놓고 그 추동에 의해 개개인이 '잘 돌아가기만을' 기대하는 듯 하다. 한번 물린 이빨 안에서 적응하다보면 아무리 외부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빠져나와 돌아가라고 소리쳐도 그 보수적 추동을 끊기가 쉽지 않다.
대중과 섞여 있으면서 대중과 동화되는 지점과 차별되는 지점을 정확히 인식하는 개인은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향해 빠르게 행동할 확률이 높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단련된 사람들은 동질감을 느끼거나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에도 극단적인 분리 경험 없이 소통의 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선다. 줄이 길어지면서 일직선이 되지 않은 틈에 비뚤어진 중간 즈음에 누군가가 슬쩍 줄을 선다. 그 뒤로 사람들이 다시 줄을 선다. 이때 나는 심기가 불편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서 있다. 줄이 어느덧 두 줄이 되고 그 줄 사이로 간간이 사람이 들어와서 2.5줄 비슷하게 된다.
솔직히 나는 끼어든 줄보다 끼어든 줄에 아랑곳하지 않는 원래 줄의 사람들이 더 밉다. 잠시 후 버스가 온다. 버스는 줄 앞이 아니라 줄과 4~5미터 뒤에 정차하고 그 지점에서 걸어오던 사람들이 줄과 상관없이 버스에 타기 시작한다. 출입구에 3~4명이 한꺼번에 달려들고... 이쯤되면 처음부터 줄이란 건 없었던 것처럼 혼잡하다.
이게 뭔 미친 짓이란 말인가... 사실 이런 일은 일상적으로 수도 없이 겪는다. 커피주
문을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눈치를 잠간 보다가 점원에게 뭔가 물어본다. 그러고는 슬쩍 메뉴를 주문한다. 내 차례가 되어서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뒤에서 먼저 라떼 두잔이요..라고 소리친다. 점원은 그 주문을 접수한다. 점원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니가 빨리 말을 안 해서 그렇지.'라는 듯 나를 쳐다본다.
만원 지하철에서 내릴 즈음 문앞에 있는 나를 굳이 밀쳐내고 먼저 내리는 승객들이 있다. 나를 밀쳐내고 앞서 가면 도대체 얼마나 빨리 나가냐. 씨바... 뭐, 나를 포함해서 다들 스스로가 소중하고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겠지만 공중도덕을 떠나서라도 일상적으로 부딫히는 사람들을 장애물처럼 생각하고 무시하고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자신의 편의를 취하는 생활이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모든 윤리에는 역사적인 문제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선행한다. 허나 우리 개개인도 엘리베이터에서도 출구만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지나가는 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있는 데도 이어폰을 꽂고 지나칠 만큼, 어느새 아주 기본적인 공동체 윤리의식조차 나약해진 건 아닌지.
#2.
유독 우리나라가 공중 도덕이나 이른바 공동체 윤리가 낮은 이유는 여러 방면에서 보는 입장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입시에 '몰빵'된 교육 체제가 문제가 아닌가 싶다.
솔직히 나는 중학교 시절, 성적이 오른 후로 어머니의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오로지 공부만 잘하면 모든 다른 일들은 면제혜택을 누리며 자랐다. 설거지, 청소, 빨래 같은 집안 일은 물론 아르바이트 용돈벌이도 안 했고 하물며 학원 때문에 친척 결혼 같은 집안 경조사에도 간간이 빠져도 문제가 안 됐다. 학교에서는 반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예체능 점수를 담임 선생님이 알아서 관리(?)해줬다.
지금도 내 주변을 보면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대학 입시 전까지 모든 부모는 자녀가 학교 성적이 오르는 일에 집중하고 다른 많은 일들에는 면제의 혜택을 주는 '관행'이 지속되는 느낌이다. 사실 여기에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과도한 사교육으로 인해 지친 자녀들에 대한 불합리함을 공감하고 있어서, 되도록 공부에 찌들어 불쌍한 자녀의 다른 영역은 통제나 훈육하지 않으려는 '배려'로부터 비롯된다.
아이들은 무섭도록 빨리 어른들의 욕망을 알아채고 그 욕망의 선을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모방하고 체화시킨다. 부모의 욕망에 기인한 이런 가치관, 세계관은 당연히 '공동체 안에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지향하기 보다는 경쟁에 강건한 정신력을 갖추고, 명문대에 진학해서 지금까지 공부한 고생을 통해 남은 여생을 지속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상류층이 되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다.
그런 욕구로 아이들은 성장기에 체득해야 할 공동체 윤리적 습속을 익히지도 못한 채 공동체성이 전무하고 암기력만 탁월한 미숙한 성인이 된다. 당연히 이들은 스트레스에 취약할 수 밖에 그것이 자연히 공중도덕이 작용해야할 일상적 자리, 버스에서 줄을 서거나 음식을 주문하거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에서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한 욕망, 습관이 분출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요즘 세대는 오죽하겠는가. 어른들의 욕망대로 공부를 했지만 예전보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일자리는 줄었다. 공부를 잘해도 계급상승의 욕망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은 대다가 공부를 하기 위해 떠안은 빚도 만만찮다. 그런 연유로 그들이 비정규직 직종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그 일을 공동체의 일원의 역할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잠시 떼우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긴다.
결국 이러한 전반적인 구조가 가진 자도 지랄하고 못 가진 자도 지랄하는(죄송) 우리나라의 공동체 윤리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마, 이런 생각이 든다.
난 내 글을 디폴트 B급으로 친다. 요즘은 글을 자주 쓰지도 않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줄곳 내 글에 대한 스스로의 아쉬움이 이어졌다. 그것은 이른바 학계, 교계나 주류의 논객들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한때 나는 지식으로 철갑을 두른(칠갑 아니고) 논객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난 왜 신학이나 공부를 더 하지 않고 돈벌이 직딩이 되었나...하는 아쉬움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헌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길이 내게 주어진 것도 아니요 실로 내가 가고싶지도 않은 길이란 생각이 점점 커지면서 사실 교계든 뭐든 논객의 위치에서 이탈된 삶이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글 한편을 쓰고서 퇴고를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의 부족이 내 스스로의 글에 대한 자존감을 떨어뜨렸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창피하기만 한 이십대에 쓴 내 글들. 그래도 그 글들에 대한 특유의 자존심은 5-6번의 퇴고 작업에 기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넘긴 글은 솔직히 다시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겨웠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지금은 좀 낫지만 성하가 태어난 직후에 나에겐 글쓸 짬이 없었다. 성하가 좀 자라고 나서는 직장생활이 더 바빠졌다. 뭔가 쓰고 싶은 글이 생겨도 이제는 초안을 마치기조차 쉽지 않다. 때론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옮겨두지 못해서 아쉽게 잊어버린 것들도 많다.(아.. 그 대단했던 생각들이여.ㅋ) 결국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가뭄에 콩나듯 청탁이 들어왔고 나는 그 글을 쓰면서도 허덕였다. 퇴고는 무슨, 퇴근하고 초안을 쓰기도 버거웠고 그렇게 끝나기가 무섭게 마감 직전의 내 원고는 전자메일을 통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 '초안'이 종이에 찍혀서 내 손에 들어왔다. 처음엔 마음이 많이 상했다. 내 기준에도 못 미치는 글, 조금은 더 매끄러울 수 있는 표현들. 이제야 생각난 더 좋은 예화... 그래도 그렇게라도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게 어디냐 라는 생각을 위안삼고 넘어갔다. 근데 그렇게 생각을 하자 몇 번의 글을 더 썼고 그 이후로는 청탁이 아니더라도 글을 써서 내 손으로 매체에 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마음에는 그 글들이 B급이라는 평가와 함께.
요즘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시대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물론 내 생각도 변한다. 단순히 변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어떤 틀이 생기고 그 틀이 강물처럼 이리저리 길을 찾아 바다에 닿으려는 욕망 같다는 느낌. 결국 나는 글쓰기의 대가가 될 마음이 아닌데 내 생각이 조금 더 매끄럽고 조금 덜 매끄러우면 어떤가. 지금 나는 내 실존적인 이슈들을 써내려가고 싶을 뿐인데. 결국은 누군가와 공감하고 그 공감을 통해 연대하고 함께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내고 싶을 뿐인데 말이다.
물론 내 글이 뛰어나면 더 좋겠지만 내 목표가 어떤 류의 '팬덤'이나 학계에 오래도록 기억될 fine idea가 아닌 다음에야 글이 더 매끄럽기를 바랄 이유가 뭔가 하는 생각 말이다. 결국 무식이 용감이라고 나는 그런 B급 글쓰기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보기에도 조금은 못생긴 내 글들을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사실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1.
오늘은 성하 데리러 가는 날. 어린이집에서 아빠아아 하고 뛰어 나온다. 차 창문으로 바람이 뺨을 스치고 내 무릎에 앉은 성하의 머리에 내 턱을 대고 있었다. 내 품에서 꼼제락거리는 성하를 안은 채, 해저무는 풍경을 바라보며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언젠가 이 날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회상할 것 같다.
7월 16일.
#2.
세상 '벽'과 만나면 성하는 나에게 달려온다. 놀이터의 친구가 같이 놀던 장난감을 빼앗기거나 넘어지거나 밖에서 큰 소리가 나거나 혹은 엄마가 혼을 낼 때. 성하는 두 팔을 벌려 나에게 안긴다. 너무 쌔게 안으면 부서질 것만 같다. 어떤 사물의 크기만으로도 아우라가 생기는 듯, 작다는 것 자체가 울컥한 마음을 가져다 줄 때가 있다. 처음엔 팔뚝만하던 성하는 이제는 내 한쪽 다리만큼이나 자랐건만 여전히 그를 안으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내가 이 아이의 아빠란 사실이, 이 아이가 내 혈육이란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때에도 성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옷에 자기 얼굴을 묻고 비벼댄다. 조그만 손가락, 머리칼, 특유의 아이의 냄새, 턱에 쓸리는 머리카락. 멍 때리며 눈물을 닦는 표정...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밀어내고 다시 '세상'으로 뛰어가는 그 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언젠가 다시 내 품에 안기지 않을 날을 떠올려봤다. 아버지도 이렇게 만들어지는 걸까. 난 아버지에게 안겨본 기억이 없다. 아주 어린 시절 사진에선 봤지만 그건 그냥 사진일 뿐 내 기억 속 아버진 나를 물리적으로 안아 준 적이 없었다. 성하가 커서도 나에게 안기면 좋겠다. 물론 그땐 성하가 나를 안아주는 거겠지만.
7월 23일.
초등학교 시절. 3학년? 5학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아이큐가 118이라는 소문이 반에 돌았다. 당시에 동네 학군이 높았던지 평균 아이큐가 128 정도였고 나는 그보다 10이 낮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내가 너무 창피해해서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선생님에게 물어보셨는데 선생님은 부인하시면서도 끝내 아이큐를 알려주지는 않으셨다. 때문에 선생님은 원칙이라고 했지만 어머니와 나는 더욱더 내 아이큐가 118이라는 의구심을 키워갔다.
그땐 아이큐가 무슨 내 CPU사양이라도 되는 듯 그 숫자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였고, 나는 점점 천재, 영재의 성공스토리보다 99%노력을 강조했던 에디슨이나 둔재들의 성공 사례들에 희망을 얹고 그들과 나를 동일시하곤 했다.
문제는 머리가 나쁘면 열심히라도 공부를 해야 하는데 시험 때마다 나는 내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죄책감과 더불어 난 왜 날때부터 똑똑하지 못한가...하는 원망감. 악순환이었다.
중3, 고1 때인가. 학교에서 아이큐 검사를 다시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점수를 올릴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다. 문제는 악마도 만날 수 없고, 아이큐 검사의 해답지도 구할 수 없다는 것.ㅠㅠ 당시에 내가 한 최선의 치팅은 섹션별로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다른 섹션을 다 풀고 시간이 남으면 되돌아가서 못푼 섹션의 문제를 더 풀었던 정도?
그리고 다시 점수는 공개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어머니는 내가 아이큐가 낮다고 그간 자학해온 아픈 사연을 설명하셨다. 선생님은 이례적으로 내 아이큐를 알려주었다. 148. 학교마치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머니가 외친 숫자였다. 어머니의 흥분에는 넌 바보가 아니었어...라는 복음과도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난 그때 알았다. 아이큐는 날 규정하지 않는다는 걸. 솔직히 유년기와 사춘기 시기에 작은 단점마저 심각한 스트레스를 주던 바로 그 시기에 아이들이 내 지능을 갖고 놀린 부분은 5-6년 동안 내게 심한 트라우마가 되어왔다. 고정된 118의 지능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나는 자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까먹고도 그것으로 어머니에게 혼남과는 별개로 나는 내 지능에 대해 자책과 원망감에 휩싸이곤 했고, 공부가 인생의 전부같았던 그 시절.. 나를 참 많이도 괴롭혔다. 난 반 상위권이었지만 전교 상위권이 아닌 이유를 118에서 찾았고 그것은 성적을 더 올리지 못하는 장애물이 됨과 동시에 지능의 한계를 넘어서라는 도덕적 명령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도 못함을 의미했다.
148. 기쁘기 보단, 왠지 허무 개그같은 느낌의 숫자. 118에 기인한 나의 수많은 낮과 밤의 고민과 의문, 학교와 가정, 세세한 기억하나에서조차 그 원인을 찾던 118은, 알고보니 내 숫자가 아니었다? 이건 뭔 어른들의 개장난이야...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대체로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숫자나 딱지를 붙이는 걸 싫어한다. 지인들의 출신 대학도 잘 모른다. 그것들이 그 생동감 있는 독특한 한 개인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뼈속까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어떤 숫자나 딱지가 한 사람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줄 수 있는지도 안다. 누구 말마따나 나도 다 (당)해봐서 알겠다. 고로, 안 해봐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덧글.
이상은 아이큐 퍼기 깔대기였다.^^
1. 조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크게 2가지로 요약된다. 난놈이 혼자 달려가는 방법. 빌 게이츠가 말하듯 똑똑한 한넘이 어리버리한 여럿을 끌어주는 식. 창의성을 지속 독려하면 한번의 성공으로도 조직이 발전을 이끈다는 점에서 나름 강점이 있다.
2. 두번째. 조직원 모두가 공감하고 행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발적 변화를 이끄는 방법이다.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인 방식임에 분명하다. 이는 속도보다는 '함께'가 중요한데, 수직적 조직에서 소통의 문제를 경험한 이들에게 보다 절실한 부분이다.
3. 요즘 내가 고민하는 조직은 이른바 exemplar solving 그룹이다. 이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기인한다. 과학사에서 혁명은 난제들을 푸는 exemplar의 확장에 있다고 보았다. 즉 문제 해결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4. 혼자서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고 대중을 계몽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낳는다.(혼자 행동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처한 상황 위치에서 규모에 맞는 대안을 찾는 것, 이를 하나둘 실행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