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아내와 결혼하다
아내와 결혼한 지 6년째다. 흥미로운 건 내가 사랑한 한 여성과 결혼 후에 그녀가 '아내'라는 호칭을 얻게 되자, 두 사람이 싱글일 때는 전혀 고민해 보지 않았던 일들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혼 후 아내에게 생긴 변화 중 하나는 예전엔 명절 때 자기 집에서 편히 드러누워 음식을 끼고 TV를 보며 지냈는데, 갑자기 남의 집에 옷을 차려 입고 제사 음식까지 만들어 가야 하게 된 것이다. 우리 집안 손자들 중에 내가 첫 결혼이었으므로 제사 때 일을 거들 여자라고는 내 어머니를 포함하여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들 외엔 유일한 며느리인 내 아내뿐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큰집이나 우리 집이 가부장적인 정서가 비교적 적은 편이라 대부분의 일을 서로 나눠서 했고 설거지도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분위기라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없었지만, 명절에 정작 지방에 있는 아내의 집에는 가지도 못한 채 얼굴도 익숙지 않은 큰아버지 댁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내를 심정적으로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결혼한 첫 해에, 자기 부모님에게조차 밥상 한번 변변히 차려 본 적 없는 아내는 얼굴도 모르는 남편 친척들의 명절 음식을 하다가 서러운 마음에 급기야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말았다! 난 가부장적이지 않은 현대 남성이라 여겼지만, 오랫동안 명절 음식 차리기에 지친 우리 집안 어머니들의 일을 덜어 드리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그 노동의 일부가 아내에게 넘겨지는 것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내와의 긴 대화 끝에 나는 이 일이 아내가 나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제사 음식을 만드는 일은 내가 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명절에 처가에 못 가는 문제는 다행히 우리 집이 신정에 제사를 지내는 터라 구정에는 일순위로 처가에 가기로 했다. 이렇게 이 의무가 남편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자 감사하게도 아내는 점점 자발적으로 나를 '도와주게' 되었다.
'아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차별들
명절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아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불합리한 상황들은 이후에도 자주 발생했다. 솔직히 나는 내가 알던 것보다 나 자신이 더 꽉 막힌 마초라는 사실을 결혼하고 나서 절절하게 깨달았다. 불합리하게 여겼던 호주제는 다행히 2008년에 없어졌지만, 가사 노동의 분배부터 양가 부모님 용돈 문제까지, 화두가 될 때마다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때마다 나는 나의 잘못된 생각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함을 깨달았다. 집 청소를 미루던 나의 습관에서부터 아내가 우리 집 대소사를 챙기길 원하는 어머니의 잦은 전화까지. 한국 사회에서 남편으로서 아내가 결혼 후에도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가장 큰 사건은 아내가 임신을 하고 생겼다. 우리 부부에게 새 생명이 생겼다는 기쁨에 하염없이 들떠 지내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집안의 '돌림자'를 넣어서 말이다. 그 얘길 들은 아내는 겉으로 보기에도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내는 남편 성을 따라 아이 이름이 정해지는 것도 모자라서 이름 석 자 중에 두 자가 남편 집안의 룰을 따르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10개월 동안 정성스레 품었다가 해산의 고통 후에도 육아의 대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아내 입장에서, 자기 자식의 이름에 자신의 어떤 '의도'도 반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속상할지 공감이 되었다. 며칠 동안 잠을 설치며 고민한 끝에 그냥 아내와 둘이서 한글 이름을 지어 주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버럭 화를 내실 일이 눈에 선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아내를 배려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이야기를 해야지 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이 지은 아이의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 다행히도 그 이름을 아내가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당시에 무뚝뚝하기만 한 아버지가 아내에게 평소 안 주던 용돈을 주신 것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다행히 결과적으로는 아내가 부자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을 막아 준 셈이 되었지만, 나는 이 일을 통해 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에서 아내의 존재감을 살려 주려면, 미시적인 현장에서 그 구조 속에 얽혀 있는 다른 가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부장적 사회적 굴레를 넘어서
아내와 살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매 순간 얼마나 잦은 차별을 경험해야 하는지를 실감했다. 물론 이런 생각의 흐름을 하염없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앞선 세대에 여성들이, 아내들이, 어머니들이 당한 불합리한 차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어머니 세대에는 이 모든 불평등과 불합리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던 세대가 아니던가. 내 어머니와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는 우리 집안에 시집왔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명절에 처가엔 자주 가지도 못한 채로 음식을 만들었고, 자식들 이름을 남자 집안의 족보에 따라 지었다. 돌이켜 보면 명절에 어머닌 항시 나를 업고 보따리를 들곤 했고, 아버진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거나 뒷짐을 지고 유유히 담배를 태우시고 먼저 걸음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자식과 가정에 대한 어머니 세대의 노동과 헌신은 지금의 내 상식 선에서는 노예 수준의 '그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떤 모성애 내지는 여자의 지고지순함 혹은 현모양처라는 표현으로 미화하는 것에 나는 불편함을 느낄 정도다. 이 시대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미시적인 시각으로 볼 때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의 최대 피해자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의 문제는 이전 세대 차별과 불합리함의 악순환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다수의 어머니들이 자신이 당한 고통을 자신의 딸이나 며느리에게 그대로 되갚아 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게다. 오히려 자신이 경험한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해진 많은 어머니들은 그 질서는 지키되 그 강도를 약화시키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다. 흔히들 하는 말로 자신이 며느리에게 시키는 것들은 시어머니에게 받은 것의 반의 반에도 안 된다고 하는 말이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대가 다른 아내 세대는 부모 세대의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부장적 질서 자체가 불합리한 데다가 세대 차이가 나는 윗세대의 방식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하다. 결국 가부장적 질서의 고착화가, 여성이 도리어 여성을 억압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세대의 아내들을 보며,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나의 아내를 보며, 많은 고민과 대안을 찾고자 여전히 애쓰고 있다. 결혼 연차가 높아질수록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아들'이자 '남편'인 내가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작은 일부터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된다. 나의 고민과 대안들이 내 세대에서 세대 간의 악순환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더라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나와 많은 남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짐에 앞서, 이 두 세대의 여성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서로의 관계성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가 되면 좋을 것 같다. 아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정을 위해서도. 그리고 이런 변화들이 종국에는 가부장적 사회의 부조리를 푸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육아의 경험
나도 그렇지만 또래 친구 부부들도 육아에 정신이 없다. 만나면 나누는 대화도 이제는 아이들 이야기가 반 이상이다. 한번은 친한 친구 한 녀석이 지난 주말에 놀이터에 나가 아이랑 노는데 자기 애보다 몸집이 큰 애들이 괴롭히는 걸 보고 있자니 화가 나더라고 이야기했다. 애들이 다 그렇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며 웃었지만, 사실 나도 요즘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 애지중지하는 내 아이를 다른 부모가 막 대해서 울린다거나, 다른 아이들이 내 아이를 때려서 울리면 애처롭기 그지없다. 솔직히 내가 대신 맞아 주고 싶은 심정이랄까. 이러다 아이 버릇 나쁘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매번 자주 조심하게 되지만, 아이가 없었을 때 자신했던 것만큼 아이를 강하게 키우는 게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뿐이 아니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던 TV 채널에서, 유아 살해 사건이나 고질병에 걸린 영· 유아, 전쟁 중인 나라에서 다치는 아이들 보도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때 갖게 될 심정적인 아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라도 조교에 대한 기억
돌이켜 보면 대학 새내기 시절 실험 수업 조교는 유독 무서웠다. 실험에 사용하는 약품이나 시편, 장비들이 위험했기 때문이었는지, 혹은 단지 고가의 장비들을 망가뜨릴까 봐 노심초사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자한 교수님의 이론 수업이 끝나면 실습 조교가 들어와서는 '군기'를 잡곤 했다. 그중 유난히 물리학 수업 조교가 특이했는데, 우리는 그를 '전라도 조교'라고 불렀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그를 '전라도 사이코'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수업 시간 중에도 실습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간혹 길게 했다. 그것은 약간 악순환 같아 보였는데, 특유의 사투리를 쓰면서 고향에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할 때면 학생들이 하나둘씩 수근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눈치를 살피던 그는 점점 더 흥분하여 우리들에게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전라도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거란 말을 되뇌곤 했다. 우리는 그나마 부족한 실습 시간에 대수롭지 않은 일로 자꾸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그가 이상해 보였다. 우리는, 아니 나는 전라도 조교인 그가 많이 이상해 보였다.
5·18이 뭐길래
지난 5월18일은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었다. 기념행사에 대통령도 불참했고 끝날 때 방아 타령을 연주한다 하여 논란이 일기도 한 이날은, 벌써 3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젊은 세대 다수가 5·18에 대해 모른다는 기사가 간간이 나올 때면 마음이 답답하다. 다행히 몇 년 전 5·18을 직접 다룬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로 인해 대중들은 좀 더 가까이 5·18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극장을 나오면서 '우리나라에서 정말 저런 일이 있었냐'며 눈시울이 붉어진 학생들이 다소 놀란 듯이 대답하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난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어린 나이에 경상도에 살면서 겪은 80년대는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있다더라, 학생들이 과격한 시위를 한다더라, 전라도 사람들이 유별나다더라,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지역감정이 나쁘다더라, 김대중 씨는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더라,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남한이 빨갱이 나라가 된다더라 하는 정도의 이야기들이었다. 때론, 대부분의 말들이 정부가 유포한 잘못된 이야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스포츠 신문을 대하듯, 사실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것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는 긍정을 하는 느낌을 자주 받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광주'를 모르고 자랐다.
5·18, 지옥 같은 기억들
5·18은 알다시피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회가 12·12 사태를 통해 정권을 탈취하고 개헌을 막기 위해 전국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 2개의 대대가 진주했고, 18일 오전 10시에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시작된 비상계엄 반대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시위는 점차 시내 중심가로 퍼졌고, 시위가 거세지면서 공수 부대원들이 시위대와 시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강준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생들은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하고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그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몇몇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으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 공수부대 병사들은 …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 대며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1권' 중,122~123쪽)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 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 사람을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잡혀 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 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오줌 먹이기, … 송곳으로 맨살 후벼 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트기, 손톱 밑에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같은 책, 127~128쪽)
"도청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는 …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서 인근 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 이 학살에 대해 송기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 죽였으며, 배수관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여인에게 6발이나 총을 쏘아 죽이고,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국민학교 4학년짜리한테 10여 발이나 총을 갈겨 몸뚱이를 걸레로 만들었다.'" (같은 책, 148쪽)
역사가 내 삶으로 들어오기까지
내가 처음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새내기 때의 그 '전라도 조교'가 떠올랐다. 그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피해 의식, 자기와 자신의 부모님들이 경험한 일들을 너희가 겪는다면 알게 될 거라던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글자로 접한 그 사건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땠을까. 만일 내 아버지가 내 앞에서 피를 흘리며 구타를 당했다면, 만일 내가 그 지방에 살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 조교보다 더 멀쩡한 모습으로 살 수 있었을까. 아내와 나는 지금도 내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 지나치게 걱정하고 조바심을 낸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하나의 객관적 사건이 아닌 관계적 아픔으로 다가온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감정 이입이 된다.
그렇다면 5·18은 끝난 사건인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뒤에서 자주 듣던 말 중 하나는 '저 사람 고향이 전라도래'였다. 전라도가 고향인 지인 중 하나는 아버지가 아들이 차별받을 것을 걱정하여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를 서울로 옮기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얼마 전 강준만 교수 책을 읽고 약간 흥분하여 서평을 쓴 적이 있었는데, 댓글을 쓴 어떤 이는 자신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전라도 사람들은 더 이상 광주를 언급하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차별을 받는 것도 연민의 눈으로 대하는 것도 피한 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처럼 상처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우리 역사의 한편이 너무 답답하다.
우리는 너무 역사에 둔감하다. 냄비 근성으로 대변되는 초고속 사회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를 잊은 채, 혹은 모른 채로 현재를 사는 일에 너무 익숙하다. 때때로 역사가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한 사건들은 우리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일그러진 방향들이 지속적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것을 먼저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이웃과 사회를 이해하는 길이며 내 삶으로 들어온 역사를 끌어안는 길이다.
1. 거대 담론에서 미시적 일상으로
90년대 중반인가, 내적 치유와 상담 사역이 한차례 한국교회를 한 번 휩쓸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영향이 크게 줄진 않은 것 같지만 그때처럼 관심이 컸던 적은 없었던 듯하다. 내적 치유나 상담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한국교회가 그간 조직의 논리에 따라 무조건적인 순종과 헌신을 강요한 나머지 사역자 개개인들의 미시적 삶의 문제들을 등한시하고 내면의 문제를 방치한 것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무엇보다 조직과 일 중심의 사역에서 관계 중심적이고 인격적인 교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는 정권 교체 이후 민주화 투쟁이 수그러들었고 포스트모던 담론이 대중들에게까지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이나 거대 담론에 대한 관심이 점차 개인과 미시적 일상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문제들, 이를 테면 과거 부모로부터 받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과 자신의 기질, 개인 영성의 성장 등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부작용도 있었다. 반대급부적으로 생겨난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기독 지성 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같은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 주었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오히려 신앙적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기현상마저 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미시적 영역의 결핍에서 출발한 내적 치유와 상담, 개인 영성과 일상적 영역에 대한 관심이 교회 내에 끼친 긍정적인 면들은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2. 진보적인, 일상의 '귀남이들'
생각해 보면 겉으로 보기에 진보적인 이들 중에서도 일상생활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다. 비교적 여러 교회를 전전했던 나는 예배가 끝난 식사 자리에서 여성도들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주변을 정리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목사님들도 보았고(사실 대부분이 그랬다), 교계에 좀 더 깊이 발을 들여놓은 후 평소에 글이나 책을 통해 호감을 갖거나 존경했던 분들도 평상시에는 주변에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거나 마초 기질을 보이는 등 기대 이하의 행동을 보이는 일도 있었다. 대개 이런 경우는 평신도가 시중들고 목사나 신학 교수님은 대접받는 것이 익숙해 보였는데 결국 교회가 세상 조직 문화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우리 세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유년기 시절을 돌아보면 명절에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누나를 한 손에 잡은 채, 다른 손에는 보자기 짐을 들었던 반면 아버지는 코트에 손을 넣고 유유히 앞서 가던 모습이 가끔 생각난다. 나 또한 집에서는 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는 '귀남이'로 자랐다. 어머니는 세탁기 하나 없이 손빨래를 하다가 급기야 허리 디스크로 쓰러지셨는데, 그제서야 나도 집안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동안 나는 왜 집안일을 안 했을까.' 돌이켜 보면 남자가 집안일을 돕는다는 것에 나도 모르게 거부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주변에는 꽤나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진보성을 드러내는 이들 가운데 여전히 일상적 '귀남이'들이 많다. 이는 가부장적인 정서로 똘똘 뭉쳐진 우리 세대가, 진보적인 거대 담론의 습득과는 별개로 일상은 제자리 걸음인 경우가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3. 기독교 관조주의의 언행 불일치
한때 교회에서 유행했던 용어 중에 '기독교 관조주의'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던 보수적인 신앙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용어로, '하나님나라'로 대변되는 기독교적 이상(理想)은 세상에서의 어떤 구체적 행동 너머에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물론 살면서 관조적인 자세로 한 걸음 물러서서 현상이나 상황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객관화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관조적 자세가 일상적으로 겪는 많은 일들을 방관하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당시에 청년들의 입에서조차 이러한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 대다수의 교인들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득도한 사람처럼 매사에 수수방관하는 경우가 과하게 잦다. 마치 너무 천국의 삶을 동경한 나머지 현세의 희로애락을 무의미하게 느끼는 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런 부류일수록 일상 영역에서 기성세대의 보수성이나 가부장적 정서와 같은 인습에 얽매인 현실을 부지불식간에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젖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입에서 내뱉는 말은 하늘 끝에 올라가 있는데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을 보면 저질인 언행 사이의 불균형이 생기게 된다. 신앙적으로 보면 이런 언행 불일치는 세속주의적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이원론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4. 거시 영역과 일상 영역의 통합을 위한 글쓰기
어릴 때부터 매사에 약간은 방관적인 기질을 가진 나는 회심을 경험한 이후로 '거시적 영역'에서의 정치와 사회 참여,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을 가짐과 동시에 '일상 영역'에서 익숙하게 여겼던 내 안의 차별 의식이나 가부장적인 정서, 말만 앞세우고 실천을 게을리하는 등의 잘못된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곤 한다. 내 오랜 경험상 이 두 영역이 따로 놀아도 큰 고민이나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이유에서다. 특히 일상 영역은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공인의 위치에서는 좀처럼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은 고사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수준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거나 때론 치밀하게 숨기거나 속이면서 살아갈 확률이 높다. 나 또한 살면서 자주 그래 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정치, 사회 문제에 무심해지고 일상에 파묻힌 채 삶의 큰 방향성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문제이다. 그렇다. 이러한 통합 혹은 균형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영역의 통합은 나의 지속적인 고민거리이자 관심거리며 지금은 우리 기독인들이 이 두 영역의 통합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또한 이는 앞으로도 내 글쓰기의 주된 화두가 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