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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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체로 나는 동성애 논쟁이 일면 언급 자체를 잘 안하는 편이다. 물론 그건 다분히 의도적인 면이 있다. 이 논쟁은 한국사회에서, 특히 교회 내부에서는 마치 '레드바이러스'처럼 해봐야 당사자에게 그닥 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고는 진흙탕 싸움에서 뒹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우리나라 교계가 논쟁에 취약하다고 굳게 믿고있다. 별 얘길 안 하고 싶었는데 오늘 동성애 결혼이 미국에서 합법화되었기에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해 담아둔 속내를 한번 꺼내본다.

#2.
동성애 관련 논쟁이 교회 안에서 펼쳐질 경우, 우리는 동성애에 관해 신학자와 목사의설교와 책을 주석삼아, 혹은 그 권위에 기대어 논지를 풀어가는데 한 몇 년간 '성경이 뭐라고 말하더냐'에 대한 이슈를 깊이 파다보니 내가 내린 결론은 '불가지', 즉 명확히 알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성경 해석도 나름 '정치적'이어서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들은 동성의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문란한 성적 부패가 문제였다거나 성행위와 종교행위가 결합된 이방의 문화의 범주로 해석하는데, 동성애가 죄라고 단언하는 주류도 오버하는 느낌이지만 반대 입장 또한 그 해석이 명백하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동성애에 대해 가진 신앙적 입장은 '불가지론'이다.

#3.
교회에서만 곱게 자랐으면 사실 동성애에 대한 고민없이 보수적 성경해석이나 주류 목사와 신학자들이 말하는 반복교육을 받아들였겠지만, 동성애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몇가지의 경험이 이 문제를 실존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오래전 학교 친구 중에 한 명의 별명이 '호모'였는데 그 친구 외에도 그런 아이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주변에 종종 있었다. 아주 어린시절이라 그걸 짓궂은 장난삼아 불러대곤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친구는 아마 여성성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여성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4.
솔직히 주변에서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커밍아웃을 하는 소수의 이들이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내적 상처에 의해 혹은 성적 방종에 의해 몹쓸 동성애적 '질병'에 걸린다는 말에 선뜻 공감이 가지 않게 된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생각으로만 혐오하거나 길을 가다가 혹은 공공장소에서 몇몇 동성의 추파를 받고 어이없어 한 짧은 기억이 아닌 가까운 주변에서 꽤 오랜 시간 어릴 때부터 지켜본 지인이 있는 경우, 퍼즐이나 논리학 문제를 풀 듯 이슈를 대하기는 쉽지 않다.

#5.
호모포비아의 단적인 예는 항문성교, 구강성교에 의한 에이즈 등 각종 성병으로 대변되는 신체 질병이다. 그런 충격적인 내용의 만화가 한동안 SNS상에 돌아다녔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사실 동성 간의 이른바 '정상적이지 않은' 성교에 대한, '정상성교'를 하는 이성애자들의 혐오에 가깝다고 나는 본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흔히 이성애자들 중의 일부도 구강성교와 항문성교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이성애자들 중 '정상적이지 않은 성교'를 즐기는 이들의 수가 동성애 커플 중 '정상적이지 않은 성교'를 즐기는 숫자보다 많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더 나아가 성적 방종이 우리가 혐오하는 것의 어떤 본질이라면, 이성애자들 중에서 외도를 하거나 원나잇스탠드를 즐기거나 직장생활의 연장이라며, 접대의 관례라며 2차, 3차를 통해 가지는
밤문화, 성매매 향유, 혹은 여전히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목사들의 성도 성추행 문제에 대한 교회의 혐오는 더더욱 극에 달해야 한다고 본다.

#5-1.
그리고 솔직히 나는 동성애자를 동성간 성교만을 즐기는 성적존재로만 치부하려는 것에 반대한다. 평생 동반자와의 섹스 없이 살아가는 이른바 '보스턴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이미 많이 알려져 있고
페미니즘 운동 이후 유럽의 많은 여성들은 결혼 후 남편에게 받은 일상적이고도 반복적인 성폭행에 지쳐 동성 여성 동반자를 찾아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동성간의 결혼을 '성기를 항문에 넣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이성애자들의 변태적 상상과는 달리 이성에 대한 상처, 혹은 혼자 사는 외로움과 불편함 때문에 함께 삶을 공유하려는 '가정의 형태'도 있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6.
사실 교회가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내 생각에는... 물리적 관계망과 구별된 SNS 폐쇄망 안에서 사람들이 연예인이나 진상남녀, 국가 등등을 마음껏 욕해도 상관없듯이 교회가 동성애 문제로는 자기의를 맘껏 펼쳐도 '될만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형교회의 지도자를 까면 관련된 작은 교회 목사들이 돈줄이 막히고 줄줄이 높은 인맥의 전화를 받아야 하겠지만, 교회에서 매주 성매매나 불륜, 성희롱을 회개하라고 설교하거나 그런 이들을 강하게 교회 내에서 퇴출시키려 들면 공동체가 휘청거리겠지만, 이성애자들만 존재하는 폐쇄적 교회공동체 안에서 성경 해석을 들먹이며 나와는 무관한 성적 방종을 심판의 이유로 내세울 때 교회는 구원의 화신이 되고 한줌 LGBT는 심판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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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래. 동성애가 심판의 원인이고 그 자체가 죄라고 하자.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다. 교회의 일원으로 동성애에 대해 불가지적 입장이고 신의 생각이 내 좁은 생각보다 크시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그 사실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모든 죄가 그렇듯 동성애 또한 기독교의 용서의 범주안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표적인 인물 다윗왕의 경우, 자기 부하를 살해하고 그의 아내와 외도를 했다. 성적방종과 살인의 중죄를 저질렀기에 사실상 우리는 그를 쓰레기 취급해야 합당하다. (페북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끝이었다.) 하지만 그는 회개했고 외도한 여인과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다윗왕이 용서를 받고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남은 것 또한 확실하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동성애 결혼'이 '죄'라면 교회는 동성애 커플은 받아들이고 그 죄는 용서를 해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성적문란함과 성교의 방법을 훈계하고 싶다면 이성애 성도와 동일하게
성적 문란함을 질책하고 한 반려자에게만 충성하기를 설교하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질병의 위험이 있는 성교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다. 적어도 진정한 교회라면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8.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소수자의 인권 측면에서 동성애자들은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학교에서 왕따당하는 아이에게도, 장애인에게도, 성매매 여성에게도, 형을 받은 죄인에게조차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잠잠히 숨어서 죽어지내지 않고 퍼레이드를 펼치고 사회에서 섬세한 재능을 발휘하니까 세상이 그들의 세상이라도 된 듯 공포심을 조성하는데. 솔직히 나는 내가 속한 한국교회가 더 두렵고 무섭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그 새들 옆에는 어디든 십자가가 솟아 있다. 사회면 신문을 읽어보라. 그곳엔 언제나 비리의 중심에 한국 교인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이 개신교포비아를 펼치지 않음에 솔직히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길을 걷는데 돌을 던지거나 린치를 가하지 않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건 진심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국가와 별개로 우리나라 시민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시민 중 한줌 소수의 즐거운 이슈가 터진 날, 나는 함께 웃고 싶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이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2015/06/29 23:58 2015/06/29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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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독 T.P.O.(옷을 상황에 맞게 입는 것)에 약합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큰 행사 외에는 장소에 어울리게 입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죠."


술자리에서 주도를 지키지 않은 이에게는 정정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장소에 맞는 복장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 되려 겉치레가 심하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좋은 패션이란 아직까지는 검소한 옷이지, 상황에 맞는 옷은 아닌 것이다. '권력=악, 저항=선'의 도식이 '복장규제=악, 자율복장=선'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무엇이 사무실 복장으로 적당한지에 대한 철학이나 지식없이 그저 눈에 익은 것은 선호하고 낯선 것에는 눈살을 찌푸리니 복장 규제에 대한 반발이 들끓을만하다.

 

- '넥타이는 좋고 짧은 치마 나빠? 오늘도 사무실은 세대 전쟁',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 (2013. 9/12)

 

 

한국에서 드레스코드가 사회적 이슈를 탄 대표적인 케이스가 몇 가지 있다. 축구선수 안정환이 이전 선수들과는 달리 경기 입장시 정장을 입어서 운동선수의 계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흔들었던 경우. 반대로 유시민 전 장관이 국회의원이 되고서 당선자 선서식에 면바지를 입고 나타나 공직자들의 의복을 통한 보수성향에 경각심을 주었던 일. 마지막으로는 나꼼수의 수트빨 날리는 멤버들 모습. 진보는 멋을 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역행하는 그들의 세련된 패션 코드는 대중에게 신선함을 선사했다.

 

이것을 어떤 진영 논리나 계급 논리 혹은 권력 관계에서의 억압 구도를 잠시 접어둔다면, 나는 한국사회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슷한 시기에 수입되면서 겪은 문화코드가 고스란히 드레스코드에도 묻어난다고 보는 편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나라는 한복을 벗은 후로 유럽이나 미국처럼 어떤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의 긴 양장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서양의 문화에 어떤 합의로 녹아든 '상황에 맞는 의복 문화' 경험이 없다. 그저 어떤 공적 자리에서 입어야 하는 의무적 드레스 코드가 있을 뿐.(결혼식, 장례식, 기업 킥오프미팅, 논문 발표장, 관료 사회의 특정 회의 등)

 

서양의 드레스코드는 오랜 전통(모더니즘, 혹은 그 이전)과 파격(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시간차가 큰 만큼 그 안에서 상당한 규칙과 규칙의 파괴를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상대를 배려한다. 규칙은 규칙대로 존중하고 파격은 파격대로 허용된다. 물론 정장 안에서도 문화전쟁은 있다. (일례로 미국 백인은 흑인들의 화려한 색을 천박하게 여기고 유럽(영국) 백인은 미국 백인들의 펑퍼짐한 수트를 양키들의 옷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드레스코드에 관해 윤리와 눈치와 권력관계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양장에 대한 교양이 없다. 사실 그럴 여유?랄까 그럴 필요? 엄밀히 말해 그런 게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미국을 사랑하면서도 미국을 증오하는 우리의 이중성이 서양의 잘나가는 세련된 패션코드를 동경하면서도 정작 대중들의 문화 소비 영역에서는 강한 거부감 혹은 겉치레가 심한 된장남, 된장녀로 매도하게 되는 습속이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기업이나 국가가 의복에 어떤 규정, 가이드를 제시하는 순간 권력의 억압으로 여기고 '내맘대로' 캐주얼 복장이 진보와 자유의 코드로 읽힌다. (근데 그 자유함이 때론 어색하고 뽀대도 안 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대중이, 대중의 확신이 서양의 의복문화를 흡수하면서 그다지 주체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모던, 포스트모던의 공존 속에서 그저 옷은 치마의 길이나 넥타이의 유무, 검은색은 점잖고 빨간색을 화려하고.... 이런 기초적인 수준에서 논의가 된다고 본다. 게다가 타인의 드레스코드에 대해 쉽게 삿대질을 하는 강한 윤리의식, 진영논리, 권력논리마저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근데 그 기저에 한 백년도 채 되지 않은 양장 문화에 대한 사색, 주체적 수용, 여유로운 수용이 없지 않았나 싶다.

 

정답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기업이 캐주얼 정장의 가이드를 제시할 때 지나치게 억압의 기제로 받아들이거나 결혼식, 장례식에 양장의 정석을 수용하지 않았다고 험담하거나 타인이 빨간 바지를 입었다고 SNS에서 '이건 좀 아니자나요'라고 공유하거나, 진보진영에서 수트빨 날리는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인격마저 한심하게 치부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 물론 그런 생각 자체를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양장을 대하는 한국인인 나의 스탠스, 나의 철학 같은 걸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흥미로운 기사를 읽으며 들었던 잡생각은 이 정도...?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309/h2013091221253186330.htm

2013/09/15 23:28 2013/09/15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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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진영의 신앙적 고민들이 매체를 타면서 개신교 내에서도 회자되는 일이 잦다. 이에 대한 내 심정은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불편하다. 아마도 내 주변 개신교인들은 나의 불편함을 더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해서 내 불편함의 실체를 조금은 풀어낼까 한다.

솔직히 나는 가수이자 JYP의 대표인 박진영의 갑작스러운 '인생의 궤도 수정', 이른바 기독교로의 회심 조짐에 대한 우려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매체에서 언급한 대로 3년간의 공부 내용 중에 창조, 진화, 그리고 지적설계 이론을 언급한 대목에서 그리 긍정적인 생각을 갖질 못했다.(대체로 창조-진화 논쟁에서 현재까지는 기독교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지적설계 이론이 과학의 탈을 쓴 신학으로 치부되고 있다.)

 

물론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런 거다. 나는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 궤도를 수정할 때, 반대 극단으로 달려가는 현상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회귀현상이 뒤따른다고 보는 편이다. 하나의 유행이나 기호가 아닌, 종교성으로 대변되는 한 인간의 가치관, 세계관이 변할 때는 사실 스스로도 충분한 검증의 시간이 필요하더라는 사실이다. 그 변화에서 자신의 이성과 정서, 그리고 습관 모두가 어느 정도 합일점에 이르렀을 때 변화된 가치관, 종교관이 어떤 일상적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매체에서 보여준 박진영의 돌발(의도된) 발언은, 적어도 내겐 꽤나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 발언들이 자신 새앨범의 컨텐츠와 함께 공개되었을 때 솔직히 우려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의 신앙적 고민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인데 그의 말들이 편집되어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순식간에 기독교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그것은 다시 대중적인 복음주의 개신교권에서 확장, 증폭되고 소비될 조짐마저 보였다. 그에게조차 아직 잘 맞지 않는 옷을 개신교가 서둘러 반기며 오히려 적극적인 홍보(전도)에 동원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체로 한국 개신교권은 이런 대형 스타에 의존하는 몹쓸 습관이 체화되어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탁월한 말주변(설교)에 현혹되고 대형교회에 모여들고 대규모 찬양집회, 대형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다. 물론, 나또한 그런 배경에서 자라왔다. 보수 개신교권에 국한된 얘기만도 아니다. 한국 복음주의권도 1세대 몇몇 소수의 목회자들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결국 2, 3세대의 리더들은 현재 진보진영의 정치권과 비슷하게 그 리더십이 전수되지 못하는 느낌도 받는다.

 

우리가 박진영이라는 유명 가수의 변화를 반길 경우, 이른바 JYP라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대표를 개신교의 홍보 수단으로 적극 수용할 경우, 나는 그들의 진정 어린 어떤 기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가 박진영 본인의 신앙마저 망치는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도 본다. 솔직히 우리는 과거에도 '대도' 조세형이나 '보스' 조양은, 전병욱, 오정현에 '환호하여' 그들의 신앙이 무르익어서 열매를 맺기도 전에 더욱 이전 삶의 형태로 복귀, 질주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나는 그런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개신교 안에 없다는 점도 불편하다.

 

매체에서 보여준 그의 신앙적 고민. 나는 그 진정성을 믿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박진영이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상당히 우려스럽다. 내적 고민들이 깊어지기 전에 대형 자본에 길들여진 상품(음반)을 들고 기독교에 관한 이성적 동의 수준의 메시지를 '동일한 플랫폼'(이른바 뮤직 엔터테인먼트, 혹은 지상파 연예 프로그램) 위에 올려 놓은 상황이 불편하고 불안하다. 물론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자신의 변화를 표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도 흔들리고 그가 회심의 증거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대중적 개신교계도 함께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유명인의 신앙은 더 내재화되고 더 그 가치가 축소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수는 대중이 모이면 불편한 이야기로 그들을 흩으셨다. 나는 그가 매체에 자신의 상품과 함께 전달되는 말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일상이 변화되는 소소한 경험들 속에서 신앙이 싹트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신앙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닌, 무대 밖에서 조금씩 열매 맺길 기대한다. 그 때까지. 그의 신앙이 그의 몸에 잘 맞을 때까지 개신교는 잠잠히 그의 곁을 그저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섣불리 먼저 박수치기 보다는, 함께 걸어주기를 기대한다. 내 생각은 그러하다.

2013/09/15 23:27 2013/09/1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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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게다가 정작 크고 중요한 일은 회사에서 더 많았습니다만. 오늘 제 고민은 이 글을 쓸까 말까에 관한 것으로 압축됩니다. 처음엔 이슈를 잘 모른 상태에서 소소한 반응을 보였을 뿐인데 정작 제 페친이 두 갈래로 나뉘어 '좋아요' 진영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뭐랄까요 중재 욕구랄까요. 혹은 고질병이 도졌다고나 할까요. 어느덧 아이 목욕을 씻기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1.
시작은 이렇습니다. 지강유철님이 본인의 담벼락에 <1993>이란 제목의 짧은 단문을 올렸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최근 강사 섭외를 위해 알아보던 중 연애 문제에 관한 강의로 주가가 폭등하는 유명 강사인 김지윤님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되...었는데 그 분의 달변과 과도한 스케줄 관리를 위해 비서를 둔 것이 맘에 걸리셨던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강의를 보시면서도 위기감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기독교 지성과 기독교 인권, 한국교회 성차별 현실"에 있어서 책임을 느껴야 할 주변 지식인이 침묵하는 형태에 대해서도 의아함을 느끼셨다는 표현에서 상기 부분에서 비판점을 발견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강유철님은 자신이 1993년에 지켜본 '한 분'과 김지윤님이 오버랩되는 경험을 하였다고 토로합니다. 그 분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셨으니 누구인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재 상한가의 김지윤 간사님의 수직 상승에 대한 팬덤현상, 무비판적 지지와 관련하여 그 분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우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말은 1993년의 그 분의 결말이 좋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김지윤님도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소리를 했다는 의도이겠지요.

이에 대해 김지윤 간사님도 본인의 담벼락에 그 글에 대한 심경을 밝혔습니다. 컨텐츠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시겠다는 말을 하셨지만 "차 한잔 마시고 진심어린 대화 한번 나누지 않았으면서 나에 대한 인격적인 공격을 하는것은 비판이 가진 한계 비난과의 경계를 생각하게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고 그 글을 읽고 먹던 식사조차 마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2.
참고로 이 건을 풀어내기 전에, 저의 스탠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만 합니다. 저는 IVF 출신이고 한때 복음과상황(이하 복상) 필진이자 편집위원이었습니다. IVF출신인 김지윤님과도 인맥이 겹치고 복상의 간판 필진이었던 지강유철님과도 그러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지강유철님과 관련된 몇 차례의 논쟁에 뛰어든 바 있고 상당히 많은 부분 지강유철님의 입장을 옹호한 바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IVP에서 출간한 존 스토트의 책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입장에 선 바 있습니다. 저는 지강유철님에 비해 나이로는 한참 아래이고 필진으로 복상에서 글을 쓸 때도 그의 글쓰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운 것이 많습니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은 저의 인맥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강유철님과 저의 친밀함에 대한 사전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논란의 핵심 외적으로도 분명 호불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 텍스트 비평이 이루어진다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의미입니다.)

3.
각설하고, 저는 김지윤님의 강의와 동영상을 어느 정도 보았습니다. 찾아다니면서 보지는 않았고 페친들이 공유하는 것들을 함께 보며 공감도 하고 웃기도 많이 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걱정스러운 지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스스로를 (유사)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곤 하는데 김지윤님의 강의는 남녀 성역할을 어떤 고정된 구조로 상정하고 현실적인 접근들에 집중을 하는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로 페미니스트들의 담론은 정작 일반 여성조차 어렵다고 배척을 당하기 일쑤인데 김지윤님의 강의는 여성들, 그리고 여성들과 연애를 잘 해내고픈 남성들에게까지도 긍정적인 '행동교정' 효과를 갖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비슷한 얘기인데 한번은 제가 성역할에 걸맞는 연애학 강의를 배척하는 입장의 책에 완전 꽂힌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이 제 입장과 잘 맞는다 여겨서 주변에도 많이 추천했었지요. 헌데 페친 한분이 그 책을 읽고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 비판의 요지는 간단히 말해, 정작 본인은 연애를 시작하지조차 못하고 있는데 성역할 자체를 비판하면 남성이 호감갖는 여성이 되기 어렵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김지윤님의 연애상담을 더이상 나쁘지 않게 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작년 한해동안 '나꼼수'를 긍정했던 제 입장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비판의 지점은 명확하지만 정작 '식자'라고 떠드는 연애학 교수들이 해결하지 못한 현실적 문제들을 건드리고, 유쾌하게 풀어내는 스타일이 좋았던 겁니다. 이는 제가 나꼼수와 더불어 김지윤님에게도 흔쾌히 팬덤현상을 즐기는 일원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의미이지요.

4.
저는 이번 사건에서 김지윤님을 옹호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김지윤님이 언급한 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알고보니 지강유철님이 그 당사자라는 사실에 좀 당황했습니다. 네, 잘못된 만남인거죠.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뭐, 이런 얘길 할 사람이 저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오지랖 작렬이지요. (아내도 지랄말고 가만히 있으라더군요. 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네요.)

먼저는 페북에서 제3자에 대한 비판의 부적절성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로 논란의 '실체'가 있는 경우 페북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주로 매체를 이용합니다. 특히 페북에서 활동하는 사람에게 쓰리쿠션으로 비판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몇 분 정도가 마음에 걸리네요.) 쓰리쿠션으로 맞을 때가 더 억울하고 분하더라는 기억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강유철님은 김지윤님이 더이상 페이스북의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공인'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한 공인에 대해, 혹은 그 문화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단문을 썼다고 생각하시리라고 봅니다. 허나 저는 최소한 페북에선 직설화법이었어야 했다고 믿습니다.

다음으로 저는 누군가를 비판할 때 치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특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목에서는 친절한 설명과 논리전개가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상대가 다수가 공감하는 악인이 아닌 경우 생략과 비유, 단순화된 비판은 자칫 잘못하면 인신공격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강유철님의 비판에 정작 비판 내용이 없다, 혹은 과감하게 생략했다고 보며 그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문제제기한 내용은 '비서를 뒀다' 정도 입니다. 저도 주변에서 김지윤님이 비서를 뒀다는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 또한 더 나이가 많고 더 큰 교회를 운영하시는 이재철 목사님은 비서가 없기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김동호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CEO형 목회자들이 비서를 뒀다는 사실도 압니다. 개인적으로 김동호 목사님이 비서를 뒀다는 사실에 대해 저는 한번도 문제를 삼은 적이 없으므로, 이 건에 대해서도 문제삼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더 나아가서 저는 "기독교 배경의 그것도 간사 출신의 여성이 성공하니 비서를 두더라"라고 말하는 주변 분들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 있습니다. 그리고 '비서'가 매니저인지 파트너인지 그 업무영역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CEO들의 그것과 굳이 매치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그 외에 유추할 수 있는 비판의 지점은 "기독교 지성과 기독교 인권, 한국교회 성차별 현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대로 기독교 지성과 김지윤님, 기독교 인권과 김지윤님, 성차별 현실과 김지윤님에 대한 텍스트비판이 이루어져야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게 이런 비판의 글이 툭 던져진다면 저또한 이 비판에 대해서 어떤 반성을 하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런 이유에서 지강유철님의 비판은 의도와는 다르게 "잘 나가더라도 좀 겸손하게 행동하시지"라는 뉘앙스만을 풍길 우려가 있습니다. 연배로 봐도 그렇고 교계의 위치에서도 그러합니다.

5.
물론, 제가 알기로 적어도 지강유철님은 본인의 연배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할 소리는 하고 안 할 소리는 안 하는 분입니다. 고로 위와같은 제 표현에서 불쾌함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오히려 지강유철님은 본인의 한참 후배인 젊은 청년들에 대한 비판도 열심(?)이시라 득이 될리 없는 논쟁을 하고는 괜히 인심을 잃곤 합니다. 고질병이지요. 본인은 스스로가 별존재감이 없다고 믿는 편인데 주변에서 보면 인지도 있는 교계의 인사인 만큼, 본인의 의도와 정반대로 꼰대의 인상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걸 보고 있는 저는 참 당혹스럽습니다.

그런 이유로, 솔직히 저는 김지윤님이 지강유철님의 글을 컨텐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을 때 좀 의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격적인 공격이라고 느꼈고 심정적으로 힘들었음을 토로했을 때 그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 입장에서 지강유철님의 글은 컨텐츠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컨텐츠가 없는 비판은 사양하니 강의를 듣고 문제 지점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라고 따졌거나, 아예 '비서'를 둔 게 문제로 보였냐고 되물어야 했지 않나 싶습니다.

반면 1993년의 그 분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김지윤님의 지적처럼 '인격적인 공격'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애매합니다. 비교할 인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분의 수직상승과 추락'을 인격적인 모독으로 보기에는 또다른 생략이 넘쳐납니다. 물론 그렇기에 지강유철님이 퉁친 '1993의 그분'이라는 표현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비판의 날이 들어와도 반격하기가 쉽지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가 수직상승인 게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제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상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제 페친들의 편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페북 안에서 복상 내부문제, 나꼼수, 알라딘, 안철수 등등의 이슈로 편가르기의 느낌을 종종 받아왔습니다. 예전엔 잘 견뎠는데 나이가 들수록 친한 분들과 이슈로 갈리는 분위기 자체를 감내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버티지 못하면 이것 또한 접는 게 옳겠지요.

오늘 김지윤님의 담벼락에는 지강유철님에 대해 "시샘한다", "자기 처신이나 잘하라", "간사님을 대상으로 정치를 하려 한다", "인생이 꼬여서 그렇다" 등의 댓글들이 올라왔습니다. 모두가 김지윤님을 아끼는 분들의 격려겠지요. 허나, 누군가를 격려할 때 반대편 누군가의 인격을 따져보지 않고 해대는 표현들에 대한 불편함 또한 저를 괴롭힙니다. 지강유철님의 이번 글이 제겐 비판의 대상이지만 그분 자체가 제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이런 어정쩡한 글을 쓰고 한동안 모니터를 멍하게 보다가 잠을 청하겠지요. 매일 굿모닝이 가능한 어떤 분이 오늘은 많이 부럽네요. 두분께 또다른 결례가 되었다면 미리 사과드립니다. 샬롬.
2013/06/20 23:10 2013/06/20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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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갑을 관계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감독이 갑이었다가 감독이 스스로 기업(프로덕션)을 만들고 기업구조('XXX 사단' 류의)로 가다가, 대기업이 거대 배급사가 되면서 이제는 배급사가 배우도 선정하고 감독도 갈아치우는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배급사가 멀티플렉스까지 소유하니 나아가서는 배급사에서 감독을 채용하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싶다.

음반산업은 우리가 잘 알듯 LP, 테입 시대를 지나 디지털 매체인 CD가 호황이던 시절까지는 가수가 왕이었다. 신승훈이 음반을 팔아치우면 신승훈이 부자가 되는 구조. 물론 음반사(스튜디오)도 건재했고 우리가 아는 동아기획 같은 곳에서 벌이는 잘 안 되도 음반을 내는 것 자체가 가능했다. (하다 못해 과거엔 들국화의 드러머였더 주찬권도 음반을 낼 수 있었다. 주찬권이 지금 음반을 내고 싶다고 할 때 박진영은 뭐라고 했을까...)

디지털 음원은 곧 MP3라는 포멧으로 대중에게 음성적으로 유통되었고 곧 음반사들의 수익 악화로 이어졌다. 음반은 돈내고 듣지 않는 대표적인 컨텐츠로 변질되어갔다. 이 틈새를 뚫고 들어온 사람이 스티브 잡스다. 아마도 이러한 불안감이 없던 시대였다면 스티브잡스의 아이팟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메이저 음반사들이 모두 아이튠즈에 음원을 한곡당 1달러에 '헌납했다'. 음반사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아성을 되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디지털 컨텐츠들은 점점 배급, 유통과 같은 업체로 그 권력이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면 도서는 어떤가. 아마존은 자기 고유의 포멧을 이용하여 이미 전자책 시장을 석권했고 '킨들'이라는 자체 브랜드의 기기까지 만들었다. 나아가 이제는 전자출판 자체를 자신들이 진행하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아이패드로 전자책 시장에 달려든 애플에 구글까지 전자출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종이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출판시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개별 출판사들이 점점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다른 문화 컨텐츠들처럼 종이책도 유통업체가 권력을 갖기 시작했고 이 흐름은 점점 커질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흐름은 온라인 서점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프라인 서점도 정가대비 파격할인과 행사를 해왔고 자체 브랜드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게다가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변화 조짐을 보이면서 몇가지의 괄목할만한 변화가 있다. 물론 (지금 추세는 그렇지는 않지만) 종이책과 차별되게 전자책은 저자와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다.(구글이 그런 시도들을 해왔다) 그 말은 전자책은 포멧과 기기를 제공할 수 있는 온라인 업체가 판권 자체를 소유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금도 아마존은 개인출판물을 전자책으로 출판할 수 있으며 이 흐름을 국내업체도 따라가려고 한다. 가뜩이나 종이책을 대규모의 물량으로 가져가고 이익을 챙기는 온라인 서점이 마치 트로이목마처럼 출판사가 발굴한 저자들의 판권까지 넘보니 사실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솔직히 나는 정가제 논란에서, 입지가 좁아지는 출판사들이 어떤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논지를 풀어가는 방식이 불편하다. 종이책을 정가로 팔면 악의 축, 알라딘 같은 온라인 서점들의 횡포를 막고 동네 서점들이 우후죽순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나는 그냥 교보문고같은 온오프 거대서점이 그 파이를 독식할 것이라고 본다. 출판계는 잠시 수익이 개선되었다가(온라인 서점에 나눠준 파이가 돌아오니) 다시 점점 추락할 것으로 본다.

교보는 내달부터 전자책 정가회원제를 제안했다. 월회비를 내는 회원들은 기본적으로 매달 3권의 책을 공급받는다. 이 부분은 출판사가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영화 컨텐츠는 그린 파일 기준 최신본은 3,500원 지난 영화는 1,500~500원 단위로 거래된다. 파일이라서 그런가. DVD는 구간은 2,000원 행사도 한다. DVD도 정가로 오프매장에서만 팔아야 하지 않을까. 영화는 상품인가, 아닌가.

도서정가제로 높아진 가격은 오래된 도서에 대한 수요 탄력성을 악화시키게 되고 이는 재고 증가와 중고도서 전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도 교보는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하고 1시간을 기다리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주는 우회적 방법을 쓰는데, 나중에는 중고도서 부스를 만들지 않을까.

사실 도서정가제의 기본 정신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는데 점점 논쟁이 심화되어가면서 나는 더더욱 이런 흐름에서 도서정가제라는 하나의 대안(alternative)이 마치 진리이자 절대선인 양 달려가는 그 순수한 열정이 두려워졌다. 그렇잖아도 책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줄어들고 있는 출판 시장에서, 자기 몫의 파이가 줄어들고 있다면 이 부분을 명확히 하여 불합리하게 온라인 서점이 착취하고 있는 포션을 드러내달라.

이건 어떨까. 정말 현재는 엄청난 이익을 온라인 서점이 착취하고 있어서 출판시장이 고투하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유통사 마진에 대한 규제를 법제화하는 건 어떨까. 책값 자체가 이미 10%할인율이 감안된 상태에서 정가를 매기는 게 관례인데 차라리 파이를 나누는 비율에 대한 규제를 하는 게 더 정당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내가 전문가가 아니므로 여기에 대해서 강한 주장을 할 수는 없겠지만.

혹은, 유통업체가 대규모로 책을 구입하면서 금액을 다량 할인받고 재고를 다시 출판사에 떠넘기는 것을 규제하는 것은 어떤가. 출판사 재입고 시에는 감가상각에 대한 과금을 매기는 건 어떠한가. 왜 정가제만이 답이고 소비자는 10년된 누런 책들도, 혹은 이슈가 다 지난 구간들도 신간들과 동일한 가격으로 할인없이 구입해야 하는가. 그것을 왜 출판계는 출판 생태계를 동네 서점을 살리고 종이책을 살리고 제대로 된 책이 나오는 유일한 대안처럼 말하는지.

물론 정가제가 규제가능한 가장 현실적이고도 적절한 방식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래서 나도 도서정가제, 동의한다. 그래서 알라딘에서 도서정가제 반대서명도 안 했다. 그런데 내 동의 지점을 넘어 너무 달리는 게 보인다. 그게 내심 좀 안타깝다.
2013/01/30 22:25 2013/01/30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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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로 옥성호 집사님이 쓴 글을 보면서 대선 이후로도 잘 버텨냈던 멘붕이 왔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인이라는 게... 참 부끄러울 때가 많습디다. 매번 나라도 사과하고 교회 일은 내 일처럼 용서를 구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글을 쓰고 블로그를 하고 SNS를 했습니다.

그런 저이지만, 다른 분들은 어찌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는 고 옥한흠 목사님에 대해서는 한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땅에서 태어나 기독교인이 된 후로, 이 개신교 바닥 깊숙이 들어와서 실망하게된 분들도 많았지만 (이만열 교수님과 더불어) 옥한흠 목사님은 제가 여전히 존경하는 분입니다. 사실 그분의 지병은 목회를 통해 얻었다고 추정할 만큼 옥 목사님은 사랑의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혔고 급기야 암이라는 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노무현 대통령보다 옥한흠 목사님이 더 그립습니다.

그 후임으로 오신 목사님이 지금의 사랑의교회를 멋지게 리모델링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건축을 추진하면서 행했던 일들에 대해 저는 2년전부터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분노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헌데 그 분은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제가 몸담고 있는 복음주의라는 범주의 많은 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분이 발행하는 한 기독교 잡지는 정말 탁월합니다. 그 분의 추천사가 들어간 출판사는 제가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참 많은 도움을 받은 곳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제 종교생활 영역 안에서 무소부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외면하고 지냈습니다. 워낙 꼭대기에 계신 분이라 실제로 마주칠 일도 없고 이름만 무소부재할 뿐 제가 속한 복음주의 단체나 교회 안에서는 사실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2년을 버티다가 오늘 옥 목사님의 아들인 옥성호 집사님이 쓴 공개글을 읽고 말았습니다. 2년전에 들은 내용과 일치하였지요. 처음 그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 뒤척이다가 끝내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지금은 눈물은 안 나지만 손가락은 심하게 떨리는군요. 참, 사람으로 태어나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데... 그런 생각만 계속 드네요.

어쩌면 제가 그 일을 잊은 건, 혹은 없던 일처럼 보내려고 했던 건 그 분의 이름이 들어간 매체, 기독교 단체들이 많고 그 안에 있는 분들과의 친분을 유지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간간이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농담처럼 던지곤 했지요. 그래야 했고, 그러고 싶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옥성호 집사님이 아버지에 대한 책을 냈을 때, 저도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그 책의 상당 부분을 타이핑해두었습니다. 그걸 다듬어서 글을 쓸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불거지면서 글 쓰려던 마음을 접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제가 타이핑한 옥한흠 목사님의 행적들을 읽으며 저는 또한번 마음이 괴롭습니다.

글을 쓰는 와중에 페친분과 댓글을 주고 받다가 "오정현 목사 같은 이가 지도자되는 복음주의가 기독교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에게 던진 말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로. 오늘부로 저는 오정현 목사의 영향력 아래있는 어떤 기독교 집단과도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것이 한국 복음주의를 아우른다면 저는 한국 복음주의를 버릴 것입니다.

한국 복음주의권은 저같은 사람이 버린다고 사라질 교파가 아닙니다. 게다가 훌륭한 신앙인들이 참 많이 속해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지도자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저는 더는 못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http://cafe.daum.net/howsarang/8Xq5/1833

2013/01/23 22:08 2013/01/23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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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페친 김진형 간사님의 글 덕분에 머뭇거리다가 조금 써본다. 도서정가제에 대해 원론적으로 찬성한다. 단지 알라딘의 입지를 고려해볼 때 한기호님처럼 주범이자 응징의 대상으로 알라딘을 지목한 부분에 대해 좀 과하다고 판단한다.

 

알라딘을 제외하면 교보나 반디앤루니스는 오프서점을 보유하고 있는 온-오프 2종서점이다. 예스24는 현재 온라인 점유율이 1위이고. 이와 달리, 알라딘은 여러가지 재밌는 시도들을 많이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책읽는 법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있음에 호감을 표하지만) 정작 대중이 알라딘을 선택하는 이유는 여러 조합으로 낮아지는 도서의 가격 때문이다.
 
이벤트와 구간에 대한 할인, 쿠폰, 증정품, 등등으로 물리적으로 고객이 이익을 얻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알라딘에서 책을 산다. 그러고나서 고객은 마치 가격과 상관없이 '알라딘이 개념있는 온라인 서점'이라서 좋아한다고 종종 말한다.(나도 그중 하나다) 만일 알라딘에서 오프라인 서점과 동일한 가격으로 책을 판다면 당연히 오프매장을 보유한 곳, 물량이 많은 곳, 규모가 큰 곳(혹은 많은 분들이 기대하듯 동네 서점)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도서정가제의 흐름은 사실 출판사-온라인서점 간의 권력의 변화에 기인하기도 한다. 애플은 아이튠즈로 음반사보다 더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아마존은 개별 출판사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함과 더불어 이제는 직접 전자책을 출판하는 출판-유통업체로 거듭나려하고 있다. 아마존의 방향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알라딘의 경우도 이런 흐름을 탈 것이고 이는 결국 출판사들의 파이를 가져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출판사들은 그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할인과 광고를 위한 비용을 부담하며 불편한 상생을 해왔는데 지켜보다 보니까 이제 좀있으면 자신들의 밥그릇까지 가져갈 참이다. 게다가 고도로 단련된 '심미안'들인 우리를 배제한 채 어디서 '장사치' 같은 것들이 책을 시장경제의 상품처럼 취급하고 있냐는 대외적인 명분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출판사들도 10%할인에 맞춰서 가격들을 책정하고 있는 편이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허접 쓰레기 같은 책들을 10% 이상의 할인율로 별도 부스를 만들어 팔아왔다. 출판사 이벤트로 반값 할인 부스들이 쏠쏠히 보였다. 알라딘이 악마라서가 아니라 그간 그런 관행들이 있어왔던 셈이다. (하지만 관행을 깨면 가장 불리한 곳은 알라딘이 될 것이다.)
 
내가 하고픈 말은 알라딘은 자신의 스탠스에서 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순수하고 알흠다운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악마 수준은 아니라는 거다. 시장에서 위태로워지는 자리에서 경쟁사에 비해 불리한 방향에 대해, 아무 문제제기 없이 순수하고 깨끗하게 주저 앉기를 기대하는건가. 게다가 난 그정도로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업계의 방향이 순수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물론 정말 도서정가제 반대가 고객도 좋고 출판사도 좋다면 모르겠지만 출판사들이 쌍수들고 환영하는 분위기는, 그간의 곪아왔던 출판시장의 문제가 터진 것이다. 알라딘 같은 서적 유통업계는 반대를 주장하고 무턱대고 고객 서명을 받기보다 출판사들의 고충과 어려움에 귀기울이는 모습을 먼저 보였어야 옳다.

 

나야 순수 고객 입장에서는 양질의 책을 보다 저렴하게 공급받는 게 좋다. 개인적으로는 뽀대나는 하드커버가 아니더라도 문고판의 저렴한 편집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가격 경쟁으로 인해 허접한 책들이 저렴하게 유통되는 미래를 맞고 싶지도 않다. 도서정가제 논란은 이 두 지점의 양 극단 중 한쪽으로만 가야함을 전제한다.

 

 

[알라딘] 도서정가제법 강화에 반대합니다
http://www.aladin.co.kr/campaign.aspx?pn=130116_book

 

 [SisaIN] 절박한 질문 '책은 상품인가?'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953

 

 [한기호] 출판유통질서 파괴의 주범 알라딘을 즉각 응징하자
 http://blog.naver.com/khhan21/110157031726

2013/01/21 22:06 2013/01/2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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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화 결렬 소식이 들렸을 때 나는 공학도의 촉으로 안철수가 후보 사퇴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세시간 만에 그는 사퇴 선언을 했다.

안철수는 기성정치 세력에 대한 강한 불신이 만들어낸 국민들의 우상이다. 우상은 긍정적, 부정적 의미 모두를 함의한다. 이후 안철수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결단을 했고 서울시장 때는 자신있게 나섰고 대선 때는 조금은 숙고 끝에 나섰다.

단일화 토론을 나는 세세히 지켜보지 않았다. 원래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냉정한 평가를 한다는 게 오랜 정치경험과 국정운영 경험을 겸비한 상대와 맞비교 자체가 이미 불합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국민정서의 조급함을 본다. 급하게 안철수에게 기대하고 급하게 안철수에게 요구하고 더 조급하게 안철수에게 실망한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개월만에 날림공사로 이루어진다. MB식이다.

물론. 우리가 등떠밀어도 넌 나오지 말았어야지 라고 말할 국민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는 순순히 승복할 마음이 있다.

박총형의 치밀한 논리에 따라 안철수가 사퇴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신의 한수'는 아니더라도 공학적 사고에 잘 훈련된 그가 사퇴를 결정하는 게 나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되어버렸다.

허술한 대선캠프 아래서 현실정치에서 고려해야할 노이즈 인자들을 많이 경험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인생에서 치명적인 흠으로 남을 법한 두 번의 큰 포기를 보여준 그를 나는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싶다. 나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한 사람인 나보다 그가 더 훌륭하니 난 여전히 그의 이후 행보를 지지한다. 강산이 반쯤 변할 시간인 5년 정도 후에... 다시 한번 면밀히 그를 평가하고 이후 내 지지를 철회할 생각은 있다.

바라기는 그 때는 좀더 잘 짜여진 캠프와 보다 성숙한 정치 행보를 보여주길. 물론 굳이 다시 정치적 행보를 보여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2012/11/27 21:55 2012/11/27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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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끔 수능시험과 본고사 시험이 떠오른다. 그 춥고도 어색했던 기억.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않은... 아랫배가 지속적으로 아프지만 시험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정도의 통증. 생애 첫 새벽기도 일주일 참석.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입시가 무슨 역사책에서 문무를 겸비한 청년들이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대회, 축제라고 하기엔 좀 살벌한 경기 정도로 여겨졌다.

평가는 가치중립적이다. 혹은 자신의 지식이나 수련을 검증하는 절차는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 권력들, 사회 내의 특정 '장'에서 작동하는 '평가'의 위상이다. 입시를 지낸 많은 어른들은 학생들에게 충고와 격려, 조언들을 일삼는다. 혹은 성적 비관으로 인한 일탈, 혹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에 당혹감을 느낀다.

난 우리세대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좋은 멘토로서 충고나 조언을 하거나 혹은 꼰대기질을 발휘해서 의지력 부족이나 자살로 귀결된 학생들에게 안타까움으로 가장된 비난을 일삼는 일련의 입장이 불편하다. 평가라는 축제를 전쟁터로 만든 건 어른들의, 권력들의 욕망이 그 중립지대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S대 합격이란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성적 서열에 따라 '인'서울대와 지방대, 그리고 학과순으로 전국학생을 줄세운 후 그것을 세속권력의 줄에 매핑시킨 어른들의 죄의 결과다.

그것을 말리거나 비판하지 않고 그 장의 법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려는 어른들의 순응, 방조, 부드러운 동조가... (그들이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비극적이게도) 부드럽게 아이들을 일탈과 자살로 내몰고 있다. 그러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어줍잖은 멘토링으로 청춘들의 고장난 삶을 연장시켜준다.

대한민국 최대 '내전의 날'인 수능시험일. 전쟁을 막아주지 못한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충고나 격려, 위로를 하기에 앞서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지못미. 꿈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내 청년의 시기에 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학생들에게 더 밝은 사회를 선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헛된 꿈과 희망의 멘토링으로, 혹은 개인은 힘이 없다는 핑계로 나를 정당화하고 싶지 않다. 오늘만은 더욱 그러하다. 미안하다, 청춘들.


'12. 11. 8.

2012/11/08 21:54 2012/11/08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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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피에타>는 서울 청계천 공장들이 배경이다. 이곳은 15살 때부터 ‘기계밥’을 먹으며 삶을 버텨낸 어린 김기덕의 터전이었다. 1960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태어난 그는 공식 학력을 초등학교 졸업으로 끝내고 만다. 비인가 농업학교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는 청계천, 구로공단에서 단추공장·폐차장·전자공장들을 다니며 교과서 밖 세상을 배워갔다." (한겨레 기사 중)
 
나는 홍상수와 더불어 김기덕을 싫어했다. 홍상수 감독은 자주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불호를 말할 필요는 없겠고. 김기덕은 '나쁜 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가 싫어졌다. 특히 '나쁜 남자'는 예술 영화가 아니라 그냥 나쁜 영화라고 결론내린 기독교계의 입장과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 공감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까지도 페미니스트를 위시한 여성들이 김기덕 영화를 불편해하고 비난하는 입장에 대해 동의하고 이해한다.)
 
그를 다시 보게된 계기를 만든 작품은 <수취인 불명>. 양동근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사실 김기덕 영화인지를 모르고 봤다. 알고 나서는 김기덕이란 감독에 대한 내 평가가 너무 편향되지 않았나 돌아봤다. 이후로 장동건이 출연한 <해안선>과 하정우가 출연한 <시간>을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가장 큰 계기는 <영화는 영화다>를 제작하면서 생긴 제자감독과 배급사와의 불화와 그로인한 은둔 생활의 시작, 그리고 <아리랑>으로 복귀한 일련의 과정에서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간 '김기덕'을 깊이 파고들었고 비슷한 시기에 그의 영화를 모두 다시 보았다. 오늘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학력이 없으며 15살때부터 공단에서 기계공 생활 등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위한 하류의 삶을 시작했다. 그의 청소년기는 전형적인 밑바닥 인생이었고 아마도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결국 그 이후에 그는 지금 우리가 아는 김기덕의 모습으로, 촉망받는 감독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의 영화는 잔인하고 가학적이고 성적인 묘사가 많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의 영화 스타일이 헐리우드 CSI로 대변되는 그것 - 폭력, 섹스의 묘사 - 보다 건강하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미국 드라마 속의 폭력과 섹스는 대중에게 볼거리를 선사하기 위한 묘사인 경우가 많지만 김기덕에게 그것은 그의 하류인생 속에서 겪은 삶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부모의 폭력, 길거리를 전전하며 겪는 가학적 일상, 주변에서 겪는 매춘, 그것에 연루된 여성들, 다시 그들과 엮인 남성들. 그 잔인하고 힘겨운 일상 가운데 김기덕은, 그 안에서도 휴머니즘을 발견하기 위해 분투하지 않았나 하는 변명, 혹은 소극적 옹호를 하고 싶다.
 
내가 그의 영화에 애정을 갖는 또다른 이유는 그가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 공감과 애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악인조차 그 악행의 이유가 있고 정의에 불타는 선인에게도 빈틈이 있다. 그 인물들은 환경(하류인생) 속에서 추락을 거듭하지만 그 안에서도 때때로 (그의 표현대로) '연꽃'을 피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김기덕이 유하보다 더 나은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유하 감독의 인물들은 원래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배신자이고 원래부터 악한이다. 그런 인물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물론 감독의 동정조차 받을 수 없다.)
 
이번 영화, 피에타도 청계천의 공단들이 철거되는 한국적 상황 그 가운데에서 내몰리는 서민들이 부채를 갚지 못해 고통받는 자본주의적 구조 안의 지옥같은 삶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며 그 일상은 실제로 김기덕이 경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내 편안한 유년기와 청년기를 돌아보면서, 내가 그런 힘든 삶을 살지 않았기에 김기덕 영화의 극단적인 스타일에 대해 관객으로서 일종의 면죄부를 주고 싶다. 또한 그의 다소 극단적인 스타일은 선정성을 도구화하는 헐리우드식 영화나 미드의 스타일과는 구별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 예전에도 한번 썼듯이 - 궁극적으로는 나는 그가 최우수영화상을 수상하는 것보다 고단했던 그의 생의 남은 시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끝)

2012/09/10 21:51 2012/09/10 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