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보다 못한 복음주의
/김용주
영화 <매트릭스>의 열풍
“영화 <매트릭스2-리로디드>가 3주 연속 흥행성적 1위를 기록하며 전국관객 300만명을 돌파했다. 수입ㆍ배급사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에 따르면 <매트릭스2>는 7-8일 서울 관객 9만7천100 명을 동원해 주말 극장 흥행순위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서울 66개, 전국 231개의 많은 스크린 수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관객수는 전주말(21만5천 명)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등 감소 폭은 큰 편. 8일까지 이 영화가 동원한 전국 관객 숫자는 312만 명으로 개봉 17일만에 300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올 최고의 흥행작 <동갑내기..>와 비슷한 추세다.”
(씨네 21 기사 중 부분인용)
영화<매트릭스2-리로디드>가 개봉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봤다. 전작인 <매트릭스>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많은 네티즌들과 매트릭스 매니아들이 열광했고 지금까지도 영화 관련 웹 게시판에는 매트릭스에 관련된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딴지일보>에서는 이런 웹 상의 글들을 모아서 “매트릭스 짝퉁 감상법”과 “매트릭스 짝퉁 문학상”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메이저 급 영화 잡지들은 아직까지도 매트릭스 영화 상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매트릭스2-리로디드>가 개봉하기 전에는 미국의 대학교수들이 전작에 대한 분석과 논평을 모은 <taking the red pill>이라는 책까지 발매되었고 이 책은 아마존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며 많은 매트릭스 매니아와 지식층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이 책은 굿모닝미디어에서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현각 스님도 스스로가 매트릭스의 광이라고 자처하면서 영화를 10번을 보고 한겨레에 관람기를 싣기도 했다. 기학연에서는 이달 초부터 매트릭스에 관한 내용으로 세미나를 연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대충 내용을 알고나면 누구나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갈 듯도 하다.
1999년에 개봉한 <매트릭스>는 컬트 영화 감독이었던 워쇼스키 형제가 사고하는 액션영화를 만들겠다는 선언과 함께 만들어진 그들의 야심작이다. 실제로 그들은 영화 촬영 전부터 주연배우였던 키아누 리브스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인 시뮬라시옹을 읽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촬영 시마다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무슨 의미인지를 서로 토론하도록 권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 연유로 배우들도 매 장면마다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화면이 정지된 채로 360도 회전하는 장면이라던가, ‘불렛 타임’이라는 획기적인 촬영 기술(총을 쏘는 장면에서 총알이 날아가는 순간과 액션장면을 합성하는 기술)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매트릭스의 하부구조는, 다수의 관객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무엇보다 <매트릭스>는 많은 메타포가 숨겨진 영화이다. 이 영화의 전체 하부구조에는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산재해 있으며(이는 이 글의 본론에 해당하므로 여기에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를 쫓아가는 장면이라거나 플라톤이 언급한 동굴의 우상, 그 밖에 장 보드리야르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상과 최근 SF영화의 교과서가 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 기동대>에서 보이는 첨단 기술의 사회지배력이 골고루 퍼져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물론 전작에 비해 <매트릭스2-리로디드>는 많은 비판 또한 듣고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2편이 전편에 비해 더욱 구체화되고 세련되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매트릭스>의 뛰어난 하부구조들
많은 부분들이 매체를 통해 언급되었기 때문에 몇 가지만 지적함으로 이 부분을 설명하기로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매트릭스는 장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저서 <시뮬라시옹>에서 설명했던 “더 이상 모방이나 복제, 심지어 패러디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현실이 현실의 기호들로 대체된다는 것이다”라는 시뮬라시옹 사회의 단면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 네오가 불법 프로그램을 숨겨둔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시옹>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를 해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처음에 현대 소비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시뮬라크르는 신의 소상(塑像)이나 화상(畵像), 혹은 표상, 이미지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자신의 책에서 시뮬라크르를 기호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사물에 대한 기호론적인 사고는 마르크스(Marx)의 가치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르크스(Marx)는 사물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보드리야르는 사물에게는 마르크스(Marx)가 가정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는 환원이 불가능한 어떤 ‘상징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특정한 상품에는 단순히 그 상품 자체의 효용성과 교환 시의 가치뿐 아니라 결혼 반지처럼 반지라는 상품에 특정한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고, 나아가서 그 사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신분의 상징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인간들은 이렇게 기호화된 사물을 소비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호들은 현실로 대체되고 현실은 시뮬라크르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매개로 거래와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기호가치들의 존재, 즉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기호를 소비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뮬라크르 소비 사회를 가리켜 시뮬라시옹 사회라고 정의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뮬라시옹 사회는 사물에 대응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고 시뮬라크르가 현실이 된 세계이며 따라서 사물은 원초적으로 그것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코드화된 기호와 숫자에 그 기원을 두게 된다.
<매트릭스>의 첫 편에서 매트릭스 안의 세계는 시뮬라시옹 사회를 대변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쉽게 매트릭스 안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물질들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완벽한 사회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매트릭스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입장을 생각해보면 과연 어디까지가 실재로 존재하던 물체를 기호화한 것인지, 내가 먹는 스테이크는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조차도 구분할 수 없다. 실재 물질과 대응되는 스테이크라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데 단순히 상징적인 기호를 통해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는 셈이다. 보드리야르가 인식한 현대 소비사회의 코드는 그런 의미에서 고스란히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녹아있다. 한 예로 <매트릭스>의 전편에서 네뷰커네자르(Nebuchadnezzar) 호 안에서 해커들이 하는 잡담은 그냥 넘기기에는 중요한 개념들이 들어있다. 도저가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마우스라는 해커에게 주는 스프처럼 생긴 음식을 먹으면서 “테이스티 휘트”의 맛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자신은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한다면 그 맛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사물의 맛일지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이 사실은 기계들이 대충 짐작으로 만들어낸 기호체계일 뿐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다소 황당한 잡담을 늘어 놓는다. 따라서 이 장면은 감독이 매트릭스의 토대가 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대해 그런 가벼운 스케치를 통해서 본질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도 이와 같은 기본 하부구조 위에서 영화는 진행되며 키메이커를만나기 위해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라는 프로그램을 찾는 장면에도 이 개념들은 시각적으로 재현된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 네오(Neo)에게 자신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라고 할 때 네오(Neo) 앞에 펼쳐진 것은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디지털 기호들의 조합이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은 웃으면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매트릭스는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시뮬라시옹 사회의 모습. 그것이 매트릭스의 사회학이자 영화 전편에 흐르는 하부구조인 셈이다.
또한, 이 영화의 묘미는 단순히 보드리야르를 대변하는 사회학적인 기반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의 보다 탁월한 점은 IT기반의 기술들이 영화의 각 장면 장면마다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보통신 네트워크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보안과 암호화’이다. 영화를 보는 중에 감탄사를 내며 보고 나서 씨네21에 실었던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중심 내용만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작동하고 있는 보안프로그램인 세리프(sheriff)의 인증이 필요하다. 세리프(sheriff)는 누구나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개키를 상징한다. (제미있는 것은 보안에서 공개키를 표시할 때 노란색 열쇠로 표현된다. 따라서, 그의 노란색 광채는 공개키의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단, 싸워보아야만 그가 누구인지를 인증할 수 있기 때문에 쿵후대결을 암호해독이라고 볼 수 있다. 쿵후실력으로 인증을 받은 네오(Neo)는 백도어를 통해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게 된다.
그에 반해 키 메이커는 비밀키를 상징한다. 그는 짝이 맞는 키를 만들어서 무수히 많은 비밀키를 들고 다닌다. 아키텍트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네오(Neo)가 키메이커가 만든 키를 문에 꽂을 때 키가 문에 꼭 맞는다는 것을 클로우즈업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비밀키를 이용하여 인증을 받았고 접근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씨네 21, 406호, 독자 비평 중에서)
<매트릭스>에 나타난 기독교적 메타포
하지만, <매트릭스>에 가장 큰 호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 이 영화가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하부구조는 기독교적인 은유와 상징에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99년에 첫 편이 나오고나서 <딴지일보>의 총수로 있는 김어준이 쓴 기사에 많은 내용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최근에 <taking the red pill>에 실린 글 중에서 하버드 대학 신학대학원 출신의 Paul Fontana의 글에 보다 잘 드러나 있어서 이들의 글들을 참고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어떤 건물의 ‘303호실’에서 통신을 주고받는 트리니티로부터 시작된다. 트리니티(Trinity)는 성삼위일체를 가리키는 신학적 용어이며 실제로 이 트리니티라는 여주인공은 네오가 자신이 그(the One)임을 발견하는 데에 큰 영향력을 주는 인물이다. 주인공 네오가 살고 있던 방은 101호실로 나중에 네오가 스미스 요원의 총에 맞고 숨지는 방의 번호는 303이다. 결국 그가 스미스 요원의 총에 맞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방의 번호가 303호임은 트리니티의 삼위일체와 연관이 있는 셈이다.
네오는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인물로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가며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의 해커로 이중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 앤더슨은 “앤드류의 아들”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앤드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안드레아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풀이하자면 “사람의 아들”, 즉 “인자”라는 기독교적인 메시아로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토마스는 예수의 제자 중 “의심 많은 도마”를 의미하며 영화 속에서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모피어스가 생각하는 “the One”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름에서 유래하는 많은 글들이 나와 있으나, 검증된 것은 아니며 때로 황당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여기에 언급하는 명칭들은 그 중에서 개연성이 높은 것들을 주로 사용한다)
네오의 의미는 “새로움”이라는 의미이며 그는 자신이 세상을 매트릭스 세계 안에서 구원할 구세주이며 메시아라고 믿는 모피어스 무리들에 의해 훈련되고 결국은 자신이 그임을 확증하게 된다. 네오가 메시아,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라는 암시는 영화의 초반에도 나오는데 그에게 불법 프로그램을 사려는 초이라는 인물이 프로그램을 받으면서, “Hallelujah. You're my savior, man. My own personal Jesus Christ.”라고 말한다. 김어준은 이런 류의 대화에서 굳이 기독교적인 표현을 쓴 점에 착안하여, 대화 시 쓰는 흔한 욕설대신 이러한 종교적인 표현을 쓴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설명한다. 게다가 네오가 초이에게 주의를 주자 초이가 대답하길, “알아. 이 일은 없었던 일인거야, 그리고 난 너를 모르는 거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대목은 자신이 병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는 예수의 말과 일치한다.
네오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미스 요원에게 살해되었다가 트리니티의 키스 이후에 다시 살아나며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수퍼맨처럼 하늘을 날아 오르면서 끝이 나게 되는데, 김어준이 지적한 대로 이는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상징이 아니면 너무나 유치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모피어스나 다른 멤버들도 예수의 제자들처럼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것을 예상치 못했다는 점이 복음서와 일치한다.
네오를 매트릭스 세계에서 구하는 모피어스라는 인물은 “꿈의 신”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존재다. 모피어스는 영화 전반에 걸쳐 “세례 요한”을 상징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김어준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세례 요한은 예수 이전에, 인간을 구원할 예수의 등장을 광야에서 기다리며 예수의 길을 예비한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고 나서야 하여 비로소 예수로서의 '공적' 활동을 시작한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마가복음 1:3-4)
모피어스는 평생을 매트릭스(광야)에서 '그'(the One - 구세주, 네오)의 등장을 기다리며, 인간을 구원할 '그'가 갈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I've spent my entire life looking for you.’(모피어스가 네오를 만나서 하는 말-필자 주)
또한 매트릭스의 인간배양 인큐베이터에서 빠져 나와 '물'에 빠진 후에야 네오는 '그'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딴지일보, “매트릭스 짝퉁 감상법”, 김어준)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도 모피어스는 예언을 신봉하는 선지자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며 자이온(Zion)에서 백성들에게 기도하는 장면에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모습에 가까운 이미지를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주인공들 외에도 주변 인물들 중에서도 기독교적인 냄새들이 강하게 배어있는 이들이 있다.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도저와 탱크는 형제로 설정이 되어 있으며 반란군 전체의 수가 겨우 일곱인데 그 중 둘이 굳이 형제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들어볼 때 예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서로 형제임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모피어스가 깨어난 네오에게 멤버들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Tank and his big brother, Dozer”라고 소개하는 점이 그러한 심증을 굳히게 한다. 또한 사이퍼(Cypher)는 은 30냥에 예수를 판 '유다'처럼 겨우 스테이크 식사 한 끼에 조직을 배신하는 존재로 나오는데 요원들을 보면 무조건 도망을 쳐야하는 네오쪽 전력을 감안할 때 내부 배신자가 필수적인 설정이 아니었다는 것이 김어준의 설명이다.
Paul Fontana는 사이퍼와 네오가 함께 술 마시는 장면과 최후의 만찬에서 가롯유다가 배신을 하는 장면을 대조하여본다.
“사이퍼와 네오 식의 최후의 만찬은 둘이 밀주를 마시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장면에 이어 바로 배신자가 누구인지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곧 사이퍼가 스미스 요원을 만나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네오는 가솔린 맛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사어퍼가 건네준 술을 마신다. 이 장면은 예수의 예언적인 말을 상기시킨다. “이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요18:11)”
(폴 폰타나, “매트릭스에 신은 있는가”, 235쪽)
마지막으로 반란군이 타고 있는 우주선의 이름은 네뷰카네자르이며 이는 구약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과 일치한다. 느부갓네살 왕은 신상에 대한 꿈은 꾼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꿈은 메시아가 열국을 다스리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꿈을 담고 있는 네뷰카네자르 호는 매트릭스의 스토리라인과 일치한다. 또한 그 우주선을 지휘하는 모피어스라는 이름 또한 “꿈의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던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네뷰카네자르 호의 모델 번호가 Mark 3-11이다. 이는 마가복음 3장 11절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구절은 “더러는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이다. 결국 이 영화에 쓰이는 상징과 은유의 본질은 메시아 사상인 셈이다. 그리고 남겨진 인간의 도시이자, 매트릭스와의 전쟁이 끝나면 축제가 벌어질 곳이 '자이온'(Zion)이라고 불리며 이는 기독교적이자 유대교의 하부구조인 시오니즘과 일치한다. (“The last human city. If the war was over tomorrow, Zion is where the party would be”)
무엇보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믿음”이라는 키워드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이다. 네오는 처음에 진리를 지식적으로 이해만 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믿기 시작하고 결국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궁극적인 예언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이 <매트릭스> 전편의 내용이었다. 또한 개인적인 추측이기는 하지만,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네오는 6번째로 아키텍트를 찾아온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가 아키텍트를 만났을 때, 아키텍트는 이전에 자신을 찾아온 이들과는 다른 요소가 네오에게서 감지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라는 또 다른 불규칙성이라고 설명한다. 이전까지 아키텍트를 찾아온 the One들에게는 자신이 그, 즉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시온을 회복하리라는 소망도 있었지만 그것에 더하여 네오에게서 보여지는 또 다른 불규칙성인 “사랑”이 메시아로서 가진 속성 중 가장 큰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3편에서 네오가 시온을 구하게 되는 식으로 결말을 짓게 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이러한 네오의 구별된 불규칙성은 자연스럽게 고린도전서를 떠올리게 만듦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그리고 그것은 요한 서신서를 비롯한 성경 전반에 드러난 기독교의 본질이기도 하다.
<매트릭스>보다 못한 복음주의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매트릭스>는 단순히 흥행을 달리는 헐리우드 액션영화라기 보다는 다양한 은유와 상징이 녹아있는 이른바 ‘철학하는 영화’이며 그 메타포의 중심에는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워쇼스키 형제가 기독교에서 중요시하는 문제들에 대한 왜곡되었다거나 가볍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독교적인 기반을 가진 이들도 깊이 있게 돌아보아야 할 성질의 깊이를 그들의 영화를 통해서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연유로 기학연에서도 이런 한낱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가지고서도 세미나를 여는 것이리라.)
위쇼스키 형제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 이런 영화를 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을 영화라는 매개물을 통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고 자신들이 밝혔듯이 고민하는 액션영화의 제작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영화 관람가이자 복음주의자로서 기독교 세계관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나의 시각으로 판단하기에, 이 영화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영화의 곳곳에 그러한 요소들을 배치함으로써 ‘기독교적이라는 것’ 자체가 멸시와 환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대의 사상 및 문화적인 분위기를 변화시키기까지 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렇다면 내가 몸담고 있는 복음주의권은 어떠한가. 세속에 물든 컬트 영화 감독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야 만큼이라도 복음주의권에서는 세상을 제대로 분석하고 파악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오히려 ‘아 프리오리’(a priori)적이라는, 혹은 메타적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세속적 사상과 문화 뒤에 숨어서, 유치하기 그지없는 잣대와 세상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는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 문화를 가위질하고 있는 모습을 더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방향’이 잘못된 것일 뿐 세상의 모든 ‘구조’가 선하다는 생각을 토대로 삼아 복음으로 문화를 변혁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졌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이제는 세상을 파악할 수조차 없는 낡은 틀(framework)로 변하여 결국 자신이 그렇게 비난하던 이원론적인 사고에 눌러앉게 만드는 악행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문제는 돈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실상 헐리우드의 막대한 자본이 그러한 뛰어난 수준의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였다고,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의 ‘맘몬신’에게 절한 이들만이 세련된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변명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헐리우드의 자본조차 워쇼스키 같은 변방의 컬트 영화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보고서 그들의 자본을 거리낌없이 투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반성 거리가 있을 법하다. 게다가 그 시나리오의 메타포는 성경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내가 애정을 갖고 있는 복음주의권이 기독교적 깊이와 세상 문화에서의 창조성, 이 두 마리의 토끼 모두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건가.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이제는 이런 영화를 보면서 ‘뉴에이지 사상’에 젖어있다는 유치찬란한 기사가 복음주의 매체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주하며 도리어 기뻐해야 하는 문제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복음주의권에서 이제까지 세상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사상과 문화에서 창조성을 회복하고 변혁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난 그런 뜨거움 속에서 자라난 마지막 세대가 아니던가. <매트릭스>를 보면서 우리도 이제는 고고한 성에서 이제 그만 내려와야 할 때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해보게 된다. 복음주의의 수혜자를 자처하는 우리는 이제 우리가 그렇게 비난하던 헐리우드 액션영화보다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