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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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사이에 전자책 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책장을 넘길 때의 질감, 펜으로 그은 밑줄이나 끄적인 메모 등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깊게 배인 종이책은, 스마트폰이나 이북(e-book) 단말기로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점점 들고 다니기도 무겁고 좁은 방 양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가는 이사할 때마다 옮기기 힘든, 그렇다고 쉽게 버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는 느낌이다. 10년이 넘은 책들은 어느덧 제본이 벌어지고 색도 바래고 책벌레도 꼬이는 데다가 잦은 이사로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결국 나조차도 자연스럽게 전자책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실제 구입도 많이 늘었다.


우리나라는 아직 전자책 시장의 규모가 외국 같지는 않아도, 최근 몇 년간 나름 양적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이제는 상당량의 신간들을 전자책 형태로도 읽을 수 있다. 만 2년 정도를 써본 내 입장에서도 전자책은 매력적인 면이 많다. 나는 그날그날 읽고 싶은 이슈가 달라서 보통 가방 속 책이 두세 권은 족히 넘는다. 따라서 조금만 두꺼워도 그 책은 가방에 못들어가고 그 결과 영영 안 읽게 될 확률이 높다. 이에 반해 전자책은 분량에 상관없이 상시 50권이 넘는 책이 단말기에 들어 있으면서도 서류 가방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또한 신간이 나온 사실을 출근 후에 알더라도 온라인으로 주문하거나 서점을 찾을 일없이 바로 다운로드를 받아 그 즉시 읽는 게 가능하다. 읽다가 필요한 부분들은 줄을 긋거나 표시해둔 후 집에 와서 일일이 타이핑하는 일이 잦았는데, 지금은 읽다가 필요한 부분은 SNS나 스마트폰으로 보내고 필요할 때 카피해서 쓰면 그걸로 끝이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유한 기독교 관련 전자책은 전무하다. 규장, 나침반 등 몇몇 기독 출판사들이 전자책을 출시하고 있긴 하나 대다수는 전자책 시장 자체에 발을 들여놓을 계획이 없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기독출판계로 하여금 전자책 시장에 소극적인 자세를 갖게 만드는 건가. 사실 디지털 콘텐츠들은 순식간에 시장의 판세를 뒤집어 놓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레코드점에서 CD를 구입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음원 파일을 다운받는 일이 잦다. DVD를 컬렉션처럼 모으던 사람들도 이제 대부분 영화는 블루레이급 파일로 다운받는다. 이미 출판 시장도 디지털 시대를 열었다.

 

 

출판계의 고민, 핵심은 DRM
전자책 시장이 급성장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전 세계 언어로 된 모든 책을 60초 안에 제공한다”라는 모토 아래 아마존은 2007년 11월에 킨들(Kindle)이라는 전자책 단말기를 내놓으며 전자책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이 단말기가 2008년 5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아마존은 전자책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혔다. 킨들이 성공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전자 잉크(e-ink) 기술을 이용한 뛰어난 가독성, 3G 통신망을 이용한 잡지․도서의 즉각적인 다운로드, 그리고 ‘7인치 200그램’의 뛰어난 휴대성이 그것이다.


킨들의 성공에 이어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넷북과 전자책 단말기를 커버할 만한 태블릿PC ‘아이패드’를 2010년 세상에 내놓았다. 출시 초기에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으나, 잡스의 예견대로 이 ‘10인치의 아이폰’은 전자책 단말기를 넘어서는 혁신적인 기기로 급성장했다. 아마존도 태블릿의 가치를 알아보고 곧 킨들 어플리케이션과 ‘킨들 파이어’라는 태블릿 형태의 단말기를 개발했다. 검색 사이트의 표준으로 불리는 구글도 몇몇 대학과 협력하여 ‘구글 북스’라는 프로젝트를 시작, 구간 도서를 중심으로 700만 종의 종이책을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하는 등 본격적인 전자책 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아수스(ASUS)사와 함께 ‘넥서스’라는 자체 태블릿PC을 제작하고 작년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이로써 태블릿 시장은 아마존의 킨들파이어, 애플의 아이패드, 그리고 구글의 넥서스, 이렇게 3사의 경쟁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사실 메이저 출판사들이 아닌 애플, 구글, 아마존이 전자책 시장에 적극적인 것은 기이한 일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출판시장은 빠르게 디지털로 진화하고 있는데 정작 출판업계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근본적인 원인은 DRM, 즉 디지털 저작권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에 있다. 아마존은 전자책 사업 시작부터 자체 포맷의 DRM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마존을 제외한 대다수의 업계에서는 전자책의 표준인 ePub 포맷을 사용한다. 사실 출판계는 DRM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기술적인 전문지식이 없으므로 자신이 보유한 콘텐츠의 불법 복제 및 무단 배포의 가능성 자체를 두려워한다. 자칫 DRM이 풀린 상태로 수많은 고가의 전자책이 시장에 퍼질 경우 출판업계 자체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날로그 콘텐츠들이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음반회사들은 이미 엄청난 재앙을 경험한 바 있다. 디지털 음원은 곧 MP3 파일로 음성적으로 대규모로 유통되었고 곧 음반사들의 수익 악화로 이어졌다. 음반은 돈을 내지 않고도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콘텐츠로 변질되어 갔다. 이런 불안 속에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음반업계에 불법 복제를 차단하는 음원 유통망으로서의 아이튠즈 사업을 제안했고, 결국 메이저 음반사들은 모두 아이튠즈에 음원을 한곡당 1달러에 ‘헌납’했다. 음반사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아성을 되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과 메이저급 출판업체 사이에서 이미 비슷한 갈등이 불거진 바 있으며 구글은 자사가 스캔한 수천만 권의 책에 대한 저작권 문제로 미국출판사협회와 7년간 긴 소송을 치렀고 다시 작가협회와의 소송이 예상된다.
 


전자책 시장의 변화, 기독출판의 대응은?
영화와 음악 같은 디지털 콘텐츠들은 점점 배급, 유통과 같은 업체로 그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책은 어떤가. 아마존은 자기 고유의 포맷과 킨들이라는 기기를 이용하여 이미 전자책 시장의 중심에 섰고 이제는 출판사를 배제한 채, 저자와 직접 전자출판 계약을 체결하려 한다. 여기에 아이패드로 전자책 시장을 넘보는 애플과 넥서스를 개발한 구글까지 출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형국이다. 전자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출판시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개별 출판사들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 콘텐츠들처럼 종이책도 유통업체가 권력을 갖기 시작했고 전자책 시장의 확대에 따라 더욱더 이 흐름은 가속화될 것이다.


<복음과상황> 1월호 “그르니에의 ‘섬’이 되는 기독 출판을 희망함”에서 김진형 전 IVP 간사는 최근 9년간 결산회의 때마다 영업 담당자들이 “올해처럼 경기가 안 좋았던 적이 없었다”며 푸념을 했다던데, 나는 기독출판계가 한국 출판 시장에서 그간 꽤 선전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양적인 측면에 국한된 평가가 아니다. 물론 말랑말랑한 간증서나 자기계발서, 성공지향적인 가치관들을 기독교 신앙인양 포장한 책들이 호황인 트렌드는 여전하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많은 양서를 출간함으로써 평신도에서 목회자까지 책을 통해 스스로 고민하며 신앙을 성장시키는 동력 내지는 자정 능력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출판시장은 최근 몇 년간 과거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고 향후 몇 년 안에 극도의 위협과 난관에 처할 수도 있다. 기독출판계 또한 동일하리라고 본다. 혹시, 관성적으로 ‘묻어가기’ 내지는 세속 출판사들을 따라 하겠다는 전략이라면, 최소한 공이 날아가는 방향을 알고 떨어지는 곳에 서 있어야 제대로 슛을 날릴 수 있다. 내 생각에 ‘포도주’는 여전히 새 술인데 ‘부대’는 낡아 가고 있다.(끝)

2013/03/12 21:11 2013/03/12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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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대학원생이다.
대학 등록금은 내가 아르바이트도 했고 부모님도 많이 도와주셔서 해결할 수 있었다. 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부모님께 이야기 드렸더니 대놓고 화를 내진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자신은 여력이 없으니 대학원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쌀쌀맞게 말씀하셨다. 퇴직한 아버지 입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무리도 아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남들은 취업 준비하는데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게 두고두고 맘이 편하지만은 않다. 잘못된 결정이었나 자꾸 돌아보게 된다. 공부에 자신도 없고 2년 뒤에는 다시 취업해서 빚을 잘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자꾸 위축된다. 선교단체를 열심히 섬기던 학생 시절에는 실연을 당하거나 중간고사를 망쳐도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자신감 같은 게 있었는데 몇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빌리고 나니 대출금 갚을 생각만 하면 망망대해에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요즘은 식당에서 밥 사 먹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벌이는 없는데 자꾸만 찢어진 주머니로 돈이 새어 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가끔씩 지도 교수님이 던지는 농담도 논문이나 졸업과 관련된 얘기면 나답지 않게 경직되곤 한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되뇌지만 오늘밤도 이런저런 잡 걱정으로 뒤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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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는 이십대 후반 직장인이다.

오늘도 주식이 떨어졌다. 젠장. 오를 때는 찔끔찔끔 오르면서 떨어질 때는 짤 없다. 냉정한 시장경제! 그래도 주식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작년에는 성적이 꽤 좋았다. 중간중간 소액 투자한 돈을 잃기도 했지만 합계를 따지고 보면 아마 몇 백만 원 정도는 번 것 같다. 그래도 옆자리의 김 과장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성적이다. 작년에 김 과장님은 3천만 원 넘는 수익을 냈다는데, 아마도 주변에서 무슨 정보를 들은 게 분명하다. 올해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분산투자를 위해 펀드도 몇 개 가입했고 부동산도 슬슬 공부하려고 한다. 요즘 은행에 저축해서는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도 못해 마이너스 되기 십상이니만큼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재테크 공부를 제대로 좀 해야겠다. 직장을 다니고 보니 대학 때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어서 빨리 수익률 대박 나는 아이템을 찾아야 할 텐데. 그러면 가난한 우리 교회에도 크게 후원 헌금 내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살 수 있을 텐데. 사실 이제는 투자에 좀 자신이 생겨서 얼마 전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올해는 은행 이자보다 큰 수익을 낼 자신이 있다. 주변에서 ‘인생 뭐 있어, 한방이야’ 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는데 겉으로 티 나게 동조는 안 하지만 공감이 될 때가 많다. 작년에 주식으로 번 돈으로 부모님 선물도 해 드리고 태블릿 PC도 샀다. 올해는 시작부터 주가가 불안정하긴 하지만 기회가 또 올 거란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 승자 아니겠나.


# 3
나는 30대 중반의 직장인이다.
여윳돈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대출받은 돈이 꽤 된다. 결혼할 때 부모님이 보태 주신 돈과 대출금을 합해서 서울에서 전세를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재미에 빠져서 산 지 어언 2년. 집주인이 전세 시세가 올랐다며 4천만 원을 더 달라고 했고 돈을 추가로 빌리기는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경기도로 이사했다. 아내와 맞벌이로 대출금을 조금씩 갚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했고 그 때부터 다시 금전적인 어려움이 시작됐다. 직원 수가 많지 않은 직장에서 눈치를 받던 아내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출산을 한 첫해에는 아내 수입도 없어졌고 병원비며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서 대출금을 거의 갚지 못했다. 작년 연말에 ‘전세 대란’이 찾아오면서 지금 사는 전셋집 주인아주머니가 몇 천만 원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도 얼마 안 됐고 익숙하게 다니던 병원이나 가게들이 주변에 있는데다가 전세 시세가 다른 지역도 비슷하게 오른 터라 어쩔 수 없이 추가 대출을 받았다. 그래도 대기업 다닌다고 신용대출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이자는 6.8퍼센트. 변동 금리라 더 낮아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매달 이자만 3,40만 원을 낸다. 친한 회사 동기는 그 정도 금액을 연금보험에 내고 있는데 벌써부터 그 친구에게 뒤처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그는 집도 부모님이 사 주셨다. 첨엔 결혼하고 나서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게 한심해 보였는데. 가끔 재미삼아 몇 년이 지난 후 동기와 내 재산의 차이를 셈해 보곤 하는데 그 때마다 기분이 우울해진다.


# 4
나는 40대 초반의 가정주부다.
결혼 초기에는 직장 생활을 했는데 아이 둘을 낳고는 복직을 포기했다. 하지만 ‘둘째가 좀 더 크면 다시 내 꿈을 펼쳐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아이가 크면서 교육비 나가는 게 장난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돼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사실 나도 이렇게 아이들 사교육비를 많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이의 반 친구들이 다 학원을 다니는데 내 아이만 바보같이 키울 수는 없잖나. 더군다나 학원을 안 보내면 주변에 함께 놀 친구들이 없다. 큰애는 작년부터 방학 때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보내고 있다. 다행히 주변에 그런 정보에 훤한 학부모가 있어서 그 분 인솔하에 학생들이 방학 때마다 다녀오는데 정말 ‘빡세게’ 공부시키는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된다. 문제는 점점 여윳돈이 없어지고 빚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남편은 아이 교육비가 얼마나 드는지,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씀씀이 커졌다고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최근 들어 부쩍 부부싸움이 늘었다. ‘돈이 정말 없기는 없나 보네’ 하고 생각하게 된 게, 얼마 전 남편이 정색을 하며 빚을 줄이고 전세 살자고 말했을 때다. 확답은 안 했지만 생각해 보면 장기적으로 아이 교육비도 계속 들어갈 거고 집안 가구들도 너무 낡아서 이제는 바꿔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전셋집 매물들을 돌아다녀 보니 두 아이 각각 방을 내주려면 집 평수를 줄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애들 학원을 옮기면 성적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이 동네를 벗어나기도 힘들겠고. 나도 빚에 익숙해진 건지, 처음 대출을 받았을 때는 액수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 신경도 쓰였는데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봐도 빚 없이 사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나름 안심이 된다. 아이들 사교육비도 첨엔 미쳤다 싶을 정도로 비싸 보였는데 이제는 간이 좀 커진 건지 오히려 너무 저렴하면 의심이 가기까지 한다.


빚이 곧 신용인 사회

위의 사례들은 주변에서 흔히 들을 법한 이야기다. 내 가족의 일일 수도 있고 이웃의 일일 수도, 혹은 자신의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도 급속히 신용카드 사용이 늘었다. 언제부턴가 신용카드는 광고 속 카피처럼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는 도구가 되었고 채무, 빚이라는 단어는 ‘신용(credit)’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신용이 좋은 사람이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은행 이자율은 떨어져서 3퍼센트 대를 넘지 않는 요즘, 돈을 적당히 빌려서 자신의 자산을 불려 나가는 이른바 ‘재테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인정받는 분위기다. 대출을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가 자기 자산 관리 차원,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재테크의 기본적 요소로까지 여기는 인식의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주식 투자를 위해 3천만 원을 빌렸는데 1억 원으로 올라서 빌린 돈도 갚고 결혼 자금으로 썼다더라는 식의 아름다운 전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돌아다니곤 한다. 실제로 그 누군가는 그렇게 돈을 벌었음에 분명하지만 반대로 빚을 내서 시작한 주식투자로 손절매에, 파산까지 맞은 극단적 부류들도 분명 있을 텐데 그런 사례는 잘 회자되지 않는다. 솔직히 주변에서 대출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 먹고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산 관리의 한 형태로, 혹은 사교육비나 재투자를 위한 여유 자금을 어느 정도는 확보하기 위해서 빚을 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정 규모의 소비를 위해 빚을 지는 성향도 강하다. 자동차, 컴퓨터, 고가의 가전제품들도 지금 당장은 여력이 없지만 신용카드로 할부 구매하면 절대 구입을 못할 정도는 아니니 빚지고(물론 대다수는 지불을 살짝 미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신상품을 ‘득템’한 후 일단 간지 나게 사용하는 것이다.

빚으로 사는 시대의 복음

2011년 한국은행에서 가계 대출이 900조 원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제 곧 개강인데 가정마다 입시에 합격한 신입생들은 그저 기쁘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천만 원대의 등록금을 마련할 걱정에 학부모와 자녀 모두 한숨만 쌓인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당선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립대 반값등록금 선언은 진정한 ‘복음’(good news)임에 틀림없다! 그뿐이랴. 미국, 유럽의 위기와 국내의 전세 대란이 겹쳐서 한겨울에도 동네마다 집집마다 이사하는 가구가 늘고 있다. 작년부터 오른 전셋값은 서울의 경우 일 년 사이에 무려 4000~6000만 원 정도가 올랐다. 살던 곳을 고집할 경우 추가 대출이 불가피하고 그럴 경우 대략 이자로만 매년 300만 원 이상 나갈 추세다.

 

최근에 <시사IN>과 팟캐스트 ‘나는 꼽사리다’ 등 진보 매체들이 가계 대출의 심각성을 절절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 심각한 정도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운 탓인지, 세금혁명당의 선대인 대표는 2012년에는 무엇보다 가계 빚을 줄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사회가 소비를 조장하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고 있어 그 ‘관성’을 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은 매년 새 모델을 출시하는데 가격을 24개월간 낼 통신비에 쪼개 넣음으로써 고가의 기깃값을 숨긴다. 아이들은 중학교만 들어가도 특정 브랜드의 점퍼를 입지 않으면 창피하다고 하소연한다. 자녀 교육은 어떤가.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학군이 낮은 지방 도시로 이사를 간다는 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옆집 아이들은 벌써부터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원어민처럼 발음도 좋던데 내 아이는 왠지 뒤처지는 느낌이 들 때면, ‘내가 너무 무심해서 이 아이를 바보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노년을 위한 대비도 해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노년에 빚만 없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겠거니 싶다.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 봐도 딱히 정답은 없어 보인다. 성도들도 다들 대출 빚을 어느 정도씩은 가지고 있고 사교육비나 소비 규모도 서로 비슷한 수준이다. 함께 ‘빚진 자들’이라 위로가 되기는 한다. 교회 목사님은 나서서 교인들끼리 돈거래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보증도 서지 말고 큰돈은 누가 부탁해도 빌려 주지 말라고 설교 시간에 강조하곤 한다. 간혹 교회 안에 사기 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돈거래에 있어서는 교인들 사이에서도 경계심이 강해졌다. 한참 웃으며 덕담을 주고받다가 장난으로라도 보증 부탁을 하면 사이코 취급 받기 쉽다. 찬양할 때는 서로를 안아 주기까지 하는 ‘주 안의 형제자매들’인데 서로 돈을 빌릴 수는 없는 게 우리 공동체의 자화상인 셈이다.

 

빚에 허덕이는 성도들을 교회가 도와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교회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융통 가능한 큰돈이 있지 않을까. 실상 교회도 성도들 못지않게 빚이 많다. 개척교회에서 교인이 늘면 담임 목사님은 좁은 공간 때문에 교인이 증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금방 큰 장소로 이사를 가거나 건축을 추진하고 그 과정에서 임대료나 대출 빚이 크게 늘어난다. 허나 매달 성도들이 성실하게 십일조 헌금을 하기 때문에 이자를 갚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는 매달 임대료로만 300만 원 이상을 냈다. 따지고 보면 성도의 헌금이 교회나 이웃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주나 대출 은행으로 가는 셈이다. 이자로 커진 금융자본은 다시 성도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그 돈은 다시 교회로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교회와 성도가 동반하여 가난해지고 금융자본만 커 간다. 한국 사회의 빚, 한국교회의 빚. 미사여구로 포장된 이 빚은 진정 이 세대의 가장 큰 속임이 아닐까. 그야말로 ‘빚과 속음’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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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본지 편집위원, 현대기아자동차 남양만연구소 연구원 myjay.kim@gmail.com

2012/03/01 00:40 2012/03/0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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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30대의 전쟁터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한 지 6년째다. 현재 나는 자동차 연구소에서 부품 설계 업무를 하고 있다. 지금도 종종 지인들은 내게 설계가 적성에 맞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전공이 싫었던 건 아니지만 졸업을 앞두고는 기독교 단체 주변을 기웃거렸다.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그런 일이 더 신앙적이고 가치 있어 보였나 보다. 마지막까지 전공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졸업반이 된 후, 문득 4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살리지 않겠다고 결정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부모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면서 4년간 써먹지도 않을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전공 살리기는 대학원 생활을 거쳐 자동차 연구소에서 설계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지금의 직업이 천직이라거나 소명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내 직업은 공학에 호감을 느껴 전공으로 선택한 데 대한 책임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솔직히 아직도 확신은 없다.

나의 일상은 이렇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서 밤 11시에 퇴근한다. 그래도 주5일제 시행으로 주말에는 쉬지만 연차가 올라가면서 늘어난 업무량으로 인해 그마저도 요즘은 여의치가 않다. 회사에서는 점점 인원을 줄여가고 있으며 그만큼 축소된 인원으로 더 많은 업무를 시키고 있다. 또한 직급이 높아질수록 진급하는 인원도 극히 일부분이라 정년까지 회사를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업무 시간 중에는 도통 짬이 나지 않기 때문에 사내에서 어학 공부 같은 자기계발, 혹은 성경 공부나 독서를 하려면 식사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간혹 글이라도 쓰려면 끼니를 거르고 퇴근 버스 안에서라도 짬짬이 시간을 내야만 한다. 정년을 생각하면서 전세 대출금을 갚기 위해 돈 계산을 해 보면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서는 몇 년 내로 서울에서 작은 평수의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대출금을 다 갚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대기업 사정이 이러니 2차, 3차 협력 업체는 더 열악하리라. 일정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상사의 지시에 의해 업체 직원에게 과도한 업무를 떠넘기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퇴사하는 이들도 많다. 급여는 대기업에 비해 적으면서 며칠 밤, 심지어 몇 달씩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도 잦아서 몸과 마음이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다.



육아라는 이름의 부부 프로젝트

최근 비슷한 연배의 동료나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이제 아이를 낳기 시작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삶의 모든 것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내는 임신 후 육아 휴직 문제로 사내의 암묵적인 압력 때문에 자신의 경력을 포기한 채 직장을 그만두었고 출산한 이후에는 늦은 퇴근으로 육아를 돕지 못하는 나 때문에 육아에 부담을 느껴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주중에는 퇴근이 늦기 때문에 주로 주말에 육아를 많이 돕는 편이다. 문제는 직장에서 일주일의 피로가 가득 쌓인 내 입장에서도 이틀간의 육아가 버거운 게 사실인지라 때로는 사소한 일로 부부 간에 서운해 하며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요즘은 출산 후 바쁜 남편과 점점 커져 가는 고부 갈등, 육아에 대한 심적 부담감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 주변에도 부쩍 많아졌고 그러한 문제로 연고지 근처나 근무시간에 여유가 있는 직장으로 이직하는 남편들도 생겨나고 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들의 경우에는 육아 도우미를 쓰거나 기관에 보내기도 하는데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기피하기도 하고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이렇듯 육아라는 프로젝트를 놓고 부부가 서로 동역자가 되어 이를 감당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지칠 때까지 업무를 하고 있는 30대의 부모들은 이제 자기들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둔 채 직장 생활과 육아에 올인하며 이 시간들을 간신히 버티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이전에는 신앙 서적도 꽤나 읽었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때때로 시간을 내어 참여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수면 시간을 줄이는 방법 외에 이런 일에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대기업과 같은 제조업 관련 직종에게 국한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직장의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좀 더 자라거나 직종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상황이 변화될 것 같지 않다.

 

 

개인 영성에 매몰된 기독 학생 운동

선교단체 시절, 내가 경험한 가장 큰 갈등은 사역의 방향성 문제였다. 내부적으로 길고 지루했던 논쟁도 있었고 암묵적으로 제재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갈등의 주요 원인은 이러했다. 나의 주장은 개인 영성 훈련과 더불어 사회참여의 문제를 학부 때에 사역 방향에 포함시켜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자는 것-이것이 내가 이해한 복음주의 학생 운동의 방향성이었다-이었으나 선교단체 분위기는 개인 영성을 먼저 다진 후에 사회에 나가서 각론을 실천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주변 선후배들을 보더라도 그들이 졸업 후에 사회참여의 각론을 잘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지성 사회 복음화’를 모토로 내걸었던 선교단체의 일원으로서 나 또한 여전히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개인 영성과 사회참여의 균형성 문제를 거론했을 때 캠퍼스에서 개인 영성에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면 분명 졸업 이후에 사회참여 각론에 있어서의 어떤 방향성에 대한 지침 내지는 훈련의 장이 필요했을 법한데 기독 학생 운동에서는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모델 제시가 없었고 훈련의 장도 아니었으며 현장에서의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듯하다.

앞서 언급했던 직장과 육아 같은 현실적 문제들이 30대 직장인에게는 분명 커다란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요즘의 내가 그렇다. 전에는 목회 세습 문제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청 광장에 나가는 것을 혼자 결정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도 내 개인의 문제니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좋다는 책과 기사들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꼼꼼히 읽었고 실시간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회사 생활을 하면서 시의 적절하게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부 때부터 철저하게 고민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공부했어도 사회에 나가서 그러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실천해 옮기기가 쉽지 않은데, 물리적 시간과 심적 여유가 많았던 캠퍼스에서조차 그러한 고민과 참여의 경험이 없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갑자기 사회에 나가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직장에서의 총체적 복음

학부 시절 고민했던 총체적 복음에 대한 실천으로서의 직업과 신앙 문제의 거창한 통합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두 가지 고민이 있는데, 첫째는 앞서 말한 신앙과 전공, 신앙과 업무의 통합 문제다. 효율성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신앙과 업무를 아우르는 적용점을 찾기란 참 어렵다. 가끔은 전공 분야에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채 의욕만 앞세우는 기독교인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신앙적인 잣대로 자신들의 분야와 조직을 성급하게 비판하면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이제야 조금 설계에 익숙해진 ‘초짜’ 설계자이니 말이다. 둘째는 환경문제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 문제다. 소형차의 가격을 낮추기 위한 부품의 원가 절감 방안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낸다거나 연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 혹은 부품 업체에서 제조 공정상 폐기물이나 폐수들을 줄일 수 있는 재질과 공법 연구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만일 부품 설계자가 아닌 차종 프로젝트 기획자라면 단품을 넘어 좀 더 거시적인 영역에서 이런 방향들을 추진해 갈 수 있을 듯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직장에서 다른 팀과 적대 관계에 있거나 경쟁에 놓이는 경우, 그 팀의 직무 유기를 부각시키거나 우리 팀의 성과를 과대 포장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업무 분장에 있어서도 나와 우리 팀의 책임을 축소하고 다른 팀을 최대한 이용해야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동료 간에는 어떠한가. 고과를 높게 받기 위해 연구 성과를 먼저 보고하려고 애쓰거나 아예 후배 사원의 기술이나 보고서를 가로채기도 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는 개인이나 팀의 알력 다툼을 넘어 노조 문제나 협력 업체에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와 같은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에까지 나아간다. 일보다 사람을 중시하고 성공보다 동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힘쓰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직장에서는 인정받지 않으면 쉽게 도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과 사회의 윤리적 문제들을 깊이 사유하고 작은 일부터 신앙적 양심에 걸맞은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직장에서 만난 기독교인의 경험

회사 안에도 기독교 관련 단체들이 많다. 많은 경우 사내 신우회가 있고 각 선교단체의 학사모임도 있으며 BBB(직장인성경공부모임)라는 전국적인 직장인 모임도 있다. 부서 내 기도모임부터 로비에서 일대일로 큐티 나눔을 하는 이들도 간간이 보인다. 직장에서 기독교인을 만나서 대학 시절 선교단체에서 활동했다고 하면 어떤 기대감으로 나를 대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난 그런 부류를 싫어했다. 직장에서 내가 만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신앙 색깔을 가지고 있거나 술자리를 거부하는 ‘왕따’에, 업무가 급한데도 불구하고 예배나 기타 신앙 모임에 우선순위를 둬서 다른 동료들에게 누를 끼치는 이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독교인들과 신앙적인 이유로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솔직히 내 ‘고매한’ 신앙을 그들 때문에 흐리기 싫다는 일종의 신앙적 우월감도 작용했다.

 

얼마 전 함께 일하던 다른 팀의 수석연구원 한 분이 사무실 내 책상에서 신앙서적을 보고는 함께 식사를 청했다. 그분은 내가 예상한대로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라고 권했다. 나는 간간이 참석하는 건 모르겠지만 업무가 바빠서 부서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그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노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분은 더는 권하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셨는데, 그 이야기에 솔직히 적잖이 놀랐다. 그는 이제 자신의 나이가 많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급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이 남은 시간 동안 이 직장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결론은 젊은 시절에는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한 사내 전도에 매진하기로 마음을 먹고 직원들을 열심히 전도했는데 그로 인해 수많은 직원들이 회심을 했다고 했다. 합리적이면서 강압적이지도 않고 늘 직급에 관계없이 예의를 갖추고 상대를 대하는 그분의 성품으로 볼 때, 그의 인격에서부터 나온 전도가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날 난 내가 참 하찮게 느껴졌다. 사실 그분과 식사를 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내 신앙생활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선교사가 되지 않은 솔직한 이유가 선교지로 가기 싫어서라는 명백한 이유를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요즘은 힘들다는 핑계로 주일 예배를 빠지기도 하고 헌금이나 후원금을 내며 손을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그뿐이랴. 스스로 균형 잡힌 신앙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구분 지으려고 애쓰는, 답답하고 보수적인 신앙인들이 직장에서 모이기에 힘쓰고 주변 동료들을 전도하는 동안 정작 나는 한 명의 지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 그것도 하루 10시간 넘게 ‘회사’라는 신에게는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하면서 말이다.



기독 직장인의 소통과 공감, 연합과 참여를 꿈꾸며
직장인의 입장에서 졸업 후에 신앙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학부 시절 그렇게 존경하던 선배들이 학사가 되고 나면 수면에서 사라지곤 하는 일들을 보면서 실망도 많이 했지만 정작 30대 중반의, 중간 직급의 위치에서, 그리고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조차 버겁고 힘듦을 경험한다. 매순간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고 고민한다. 이런 치열함 때문에 과거에 사회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기독교인들이 이 시기에 어떤 교계의 중추 세력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도와 봉사에 국한된 지역 교회와 선교단체의 방향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또한 나를 포함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담을 쌓고 그들과의 교류를 비기독교인들과의 교제보다 더 꺼리는 편협한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적 기독교인들 중, 본이 될 만한 몇몇 분들의 일상에서의 성실함과 금욕적인 삶, 자기와 다른 의견에 공격적이지 않고 매순간 상대를 포용하려는 성품에 깊이 감동해 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 모든 면에서 옳다는 말은 아니다. 때때로 역사에 대한 몰이해, 신앙적‧정치적인 면에서의 잘못된 편견 등이 답답할 때도 많지만 따지고 보면 나 또한 그들에게 신앙적으로 완전하고 본이 되는 존재였던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학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내가 느끼는 소명은 복음주의권 안에서의 참여와 연합이다. 또한 요즘 들어 자주 고민하게 되는 것은 우리 세대 기독교인들 사이의 소통과 공감이다. 아직은 다소 무력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기독 직장인들은 나름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삶에 파묻혀서 자신의 일상에 매몰되기도 하고 자기가 속한 영역 안에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이들이 대다수다. 소통과 공감을 통해 이들을 연합의 장이자 실천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운동과 그에 대한 참여 방법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이 글의 일부는 <공부하는 그리스도인>(IVP)에 실린 ‘기독 지성과 삶의 일치를 향하여’와 복음주의연구소가 주관한 기독 지성 집담회 발제문, ‘현장에서 느끼는 기독 지성 운동’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필자 주)

2010/07/12 00:20 2010/07/1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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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미 정리가 끝나는 마당이라 사실 글 쓰기가 좀 주저스럽습니다. 예전에 대학원 다닐 때는 한참 온라인에서 북적거리다가 갑자기 뒷북치는 논객들을 좀 답답해 했습니다만, 지금 제 처지가 그렇네요.ㅜㅜ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 글은 시기가 한참 늦었기 때문에 논쟁이라기 보다는 후기에 가깝겠습니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미리 말씀 드리고 시작하려 합니다. 따라서 글은 구어체 형식으로 편하게 쓰려고 합니다.^^

 

신광은 목사님과 양희송 전도사님(직업을 맞추다보니 그렇습니다.ㅡㅡ;;)의 글들이 기세 논쟁을 정리하는 데에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양희송 전도사님이 김기현 목사님의 기세를 리차드 니버의 구분을 가지고 "대립 모델"에 매핑시킨 부분이 제게는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물론 김기현 목사님이 별 말씀 안 하시는 걸로 봐서는 "대립주의자" 혹은 "대립 모델의 기세"라고 인정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김 목사님의 기세를 신광은 목사님이 "무늬만 기세"라고 이야기한 듯 합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예전에 김기현 목사님이 번역하시면서 자주 언급하셨던 레슬리 뉴비긴의 <요한복음 강해>가 떠오르더군요. 헬라 철학의 옷을 입었지만 기독교의 정수를 드러냈던 사도 요한의 서신을 김목사님이 기세라는 종목에 적용시켜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김기현 목사님은 인용의 대가이시니 충분히 가능하다는 음모론적 생각..) 기세의 옷을 입고 있지만 속을 까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것이지요.^^

 

그건 그렇고, 신목사님 글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광은 목사님은 답글을 쓰시면서 "용주님의 솔직 담백한 지적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지나칠 정도의 방어적 태도에 의아"했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글들을 죽~ 읽어보면 제 글에 대해 신목사님이 공감한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ㅡㅡ;;;


글 쓸 때 자주 하는 실수인데 사실 이런 글을 접하면 부부싸움 할 때 상대편이 "내가 참 많이 미안하긴 한데, 당신 그러면 안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자꾸 떠오릅니다. 신 목사님은 중간 중간에도 이런 류의 자극적인 표현들을 좀 쓰시는데 읽으면서도 진의가 의심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기세 옹호론을 펼침으로써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로 변론하기 급급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지적도 그렇습니다. 저는 김기현 목사님의 연재를 읽다가 좀 과하다 싶은 부분들 몇 가지-신목사님에 따르면 3가지로 요약됩니다-를 지적했습니다. 논쟁의 과열이나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나머지 부분은 다 동의한다는 꼬리글까지 붙였는데 그렇게 읽으셨다면 그게 더 지나친 왜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려다 보니 오히려 신목사님이 제 글을 읽으시면서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로 변론하기 급급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게 만듭니다.

 

이원론-혼합주의 문제에 있어 신 목사님은 제가 "김목사님의 의견을 별로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 같으며 이원론의 문제를 모더니즘 탓으로 돌리는 단순한 논리를 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신 목사님은 저의 "현대 사회에 대한 이렇게 놀라울 정도의 단순한 분석에 그저 할 말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신 목사님 반응에 사실 저도 좀 그렇습니다.ㅡㅡ;; 신 목사님이 안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게 말씀하실 수는 있겠으나 좀 오버하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모더니즘 때문에만 신앙이 사유화, 내면화, 탈사회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김기현 목사님이 이원론을 혼합주의로 대체할 때 논리적 비약이 좀 있었다는 것이었고 의도적으로 개혁주의 기세에서 상당한 부분의 변증을 일삼고 있는 모더니즘을 통째로 날려버린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모더니즘적인 요소를 부각시킨 것이지 신목사님 지적대로 모더니즘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제 글을 다시 읽어보아도 매도당할만큼 그렇게 강하게 읽히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ㅜㅜ) 신앙의 사유화, 탈사회화와 같은 문제는 사실 모더니즘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사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적인 요소가 더욱 신앙의 사유화와 탈사회화를 가속시키는 요인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군부 독재라는 상황적 특수성으로 인해 신앙의 사회적인 역할의 고리들을 많이 잃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김기현 목사님이 모더니즘을 빼놓고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혼합주의로 넘어가고 있었고-저는 그것이 좀 지나치다 싶었고-그렇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가 개인적이고 내면적, 탈사회적인 종교로 축소될 것을 강요 받았던 근대사회에서 개혁주의 기세가 그에 대한 좋은 모델이 되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저는 김목사님이 이원론이 아니라 혼합주의가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두가지의 문제를 쉽게 대체시키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양립하거나 통합 혹은 병렬적인 구조가 아니라 배제 혹은 대체로 읽혔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김목사님의 주장과는 달리 여전히 이원론이 문제라고 말이지요. 이원론 문제를 포함시킬 수 있는 기세로 논의를 통합하거나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덧붙여 기존의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저의 관점을 정리하자면 수정(modified) 개혁기세 혹은 확장(extended) 개혁기세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목사님이 지적하신 것은 "현장성 문제"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동의되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는 말로 운을 떼시는데 앞에서 동의되는 부분을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좀 서운합니다.(아예 말을 마시지.. 저 엄청 기대했었습니다.ㅜㅜ) 이 대목에서 신 목사님은 제가 적반하장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김 목사님의 연재가 기존 기세의 문제 지적과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인데 연재를 마칠 때까지, 그리고 그 대안적 기세 모델을 적용할 때까지의 유예기간을 줄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덧붙여서 글이 현학적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따질 것 없이 실천 가능성을 가지고 판단하자는 말씀도 하였습니다만 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제 반론에서 충분히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실천 가능성 여부는 사실 또 다른 문제입니다.)


다시 유예기간 문제로 돌아가자면, 저는 좀~ 그렇습니다. 물론 일리가 없는 말씀은 아니나 이번에 번역하신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은 1995년에 나온 책입니다. 김목사님이 인용하시는 많은 책들도 사실 옛날 책들이 많습니다. 제가 그 책을 원서로 본 것도 2003년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제와서 다시 기세를 이야기한다면 그 유예기간은 좀 과하며, 좀더 짜게 말씀드리자면 이미 적용 사례를 이야기할 정도가 되어야만 이제 와서 이 지루한 기세 논쟁을 다시 끄집어 내는 것에 대한 '용서(?)'가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제가 지나친가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제 주변의 많은 분들이 이미 기세 논쟁을 좀 지겨워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습니다만(사실 이야기를 많이 하니 흥미롭습니다.^^), 지금도 기세 논쟁은 상당 부분 울궈먹기 내지는 '짜고 치는 고스톱' 같기도 합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오버라는 생각도 듭니다. 양희송 전도사님 지적대로 제가 기독교 세계관 전문가도 아닌데 제 영역을 넘어서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그렇습니다. 공학 분야에서는, 아니 이미 여러 학문 분야에서는 이론에 대한 검증을 가짜로 해보는 일이 잦습니다. 자신의 이론을 가적용해보는 것이지요. 제안서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기대되는 효과는 이러이러하다는 등. 일종의 시뮬레이션이지요. 제가 김목사님 글에서 답답한 대목은 마치 통합적인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하다가 '무늬만 기세'인 다른 기세(another Christian worldview)를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적용 사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검증 사례가 아니라 적용사례 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지나치게 이야기하자면 김목사님은 자신의 기세를 현장에 적용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저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인 모델을 구축하면서 그것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덜하더라는 것이지요. 물론 김목사님은 연재를 통해 "성경"이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가 중요하며 무엇보다 거기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논리로 새 모델, 혹은 대립 모델을 전개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아우를 수 있는 모델을 기대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물론 적용 사례들이 풍성하다면 그것이 더 좋겠지요.

 

글이 길어졌네요. 토른 글들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들도 있었고 배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더 많은 논의가 풍성하게 전개되기를 바라고 또한 무엇보다 김목사님의 연재와 다른 분들의 글들에 도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신목사님 글에 좀 과하게 이야기한 부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한 부분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자꾸 신목사님 글의 스타일을 자꾸 이야기하게 되었네요. 부디 신목사님의 글에 대한 애정이라고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글 중간에 김목사님이 저에게 '이쁘'다고 하셨더군요. 감사합니다. 김목사님도 연재 잘 마치시고 좋은 글들과 좋은 책 소개 많이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양희송 전도사님의 글은 언제나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는군요. 역시 글쟁이 답습니다.^^
그럼, 샬롬.

2007/07/01 22:49 2007/07/0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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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소견
: 직장인이 바라본 기독교 세계관

/김용주


들어가면서
최 근 복상에 김기현의 세계관 관련 연재가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아직까지 김기현만큼 제대로 기독교 세계관(이하 기세)을 논한 글을 읽어보지 못했다. '공격적 책읽기'로 널리 알려진 그는 이 연재를 쓰면서도 엄청난 양의 참고 문헌들과 신학과 철학 분야의 사상가들을 언급하고 있다. 혀를 내두를 정도다. 도예베르트, 아브라함 카이퍼, 리차드 니버로부터 시작해서 로버트 웨버, 제임스 사이어, 알버트 월터스, 브라이언 월쉬, 레슬리 뉴비긴. 이에 더하여 낸시 피어시, 스탠리 하우워와스, 알빈 플란팅가, 존 요더, 하워드 스나이더, 로날드 사이더, 자크 엘룰에 이르는 기독교 저자들의 최근 저작들까지도 자유롭게 넘나든다. 또한 데리다나 하이데거, 후설 같은 사상가들을 인용하며 그 사상의 깊은 의미를 반추하는가 하면 국내 저자들(송인규, 이승구, 신국원, 양승훈 등)의 저작들도 꼼꼼히 읽은 흔적이 역력하다. 뿐만 아니다. 양희송, 박총, 이원석, 정정훈 등 세계관에 대해 한 번이라도 글을 쓴 청년 필진들의 글들조차도 빠짐없이 읽고 적절한 대목에서 언급하는 성실함이 엿보인다. 이 정도라면 김기현의 기세 비판은 빈틈을 찾을 수 없이 촘촘하고 또한 성실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난처하다'는 김기현의 지적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깔끔하지 않은 부분들이 자꾸 머리 속을 맴돈다. 사실 그의 연재가 끝난 후에 글을 쓰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글을 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미 그의 초반 연재 글에서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연재 중반에 내가 지적하는 문제들이 후반에 가서 해결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기세에 대한 논의의 풍성함을 위해 기꺼이 글을 쓰려 마음 먹었다. 이 글의 주목적이기도 하지만, 부족한 내 글이 종국에는 김기현의 연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본론 으로 들어가자. 김기현은 개혁주의 기세의 현실 진단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며 몇 가지로 기세를 비판한다. 사실 기세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며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 상에 김기현의 글이 위치하고 있고 그의 글은 이제까지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비판적 논의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기현이 연재 글에서 비판한 기세의 몇몇 문제에 대한 반론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적하려는 내용들 외에도 김기현은 자신의 연재 글에서 개혁주의 기세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논의의 축소를 위해 내가 언급하지 않는 내용은 거의 동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사실 나는 김기현의 글에 비판적인 입장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감탄하고 있으며 멀리서 뵌 기억 밖에는 없지만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그것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개혁주의 기세는 명제적이며 내러티브가 없다는 비판에 대해
첫 째는 기세에는 ‘내러티브(narrative)’가 없다, 즉 명제만 있고 이야기는 없다는 비판이다. 기세의 명제적 성격이 현실 세계와의 괴리감을 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라는 이야기다. 이는 일반적으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도 동일하게 지적되는 부분이다. 사실 내러티브의 강조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 하나의 트렌드라 할 수 있다. 기세의 명제/내러티브 문제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이는 성경이 어떤 지침이나 규율, 혹은 신조와 같은 명제로 추출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가진 긴 서사(敍事)라는 말이다.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과 요셉이 경험한 하나님으로부터 공통 분모를 뽑아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지침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혹은 온전한 기독교인가? 거칠게 표현하자면 대충 이런 류의 고민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 의식이 신학과 세계관에 녹아나는 일은 고무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제적 성격의 기세를 평가절하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이는 마치 예수님의 행적이 중요한가, 그가 가르친 주기도문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와 같다. 물론, 둘 다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둘은 상호 보완이 필요하다. 관계를 따지자면 주기도문은 명제적 성격이 강하고 예수의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서사적인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내러티브의 살이 붙어야 그 명제가 온전히 드러나고 또한 강화된다. 이러한 문제는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신학분야에서도 특정한 주제들을 뽑아낸 조직신학이나, 성경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성경신학과 같은 도구의 효용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일례로 도로교통법에 의한 교통표지판을 상기해보라. 그 각각의 기표들은 특정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일반인들은 적절한 시간 동안의 교육만으로도 교통표지판을 읽고 그 기표를 보고서 자동차를 몰 수 있다. 신호등의 파란불이 깜박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파란불의 깜박임은 너무 많은 생략이 있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구구절절 자세한 문장으로 길을 건너는 데에 필요한 설명을 보기 좋은 곳에 서술해 두어야 하지는 않을까. 내게 내러티브의 문제는 이와 비슷하다. 기독교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김기현은 상대적으로 내러티브를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압축적이고 일관성 있는 명제의 효용을 지나치게 축소시키고 있다. 반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세의 일관성과 명제성을 배제하고 내러티브를 살린다면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관통할 수 있겠는가? 


나는 기세를 모르던 시절에도 경건의 시간을 5-6년 동안 가지면서 성경을 읽었다. 하지만 도통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성경은 신화적으로 다가왔고 예수님의 구속은 내 죄를 대속한 것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예베르트의 창조, 타락, 구속으로 대변되는 기세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틀로 역사를 관통하는 성경신학적 배경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기현의 문제 제기는 포스트모던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지적이나 자칫 잘못하면 성경의 일관성을 파악하는 효과적인 틀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상 내러티브의 강조는 개혁주의 기세의 명제성을 허물어뜨린다기 보다는 내러티브의 도움으로 오히려 강화되고 내러티브를 통해 무미건조한 신학적 도그마로 전락하지 않는 상호보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지적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원론이 아니라 혼합주의가 문제라는 비판에 대해
두 번째 비판 대상은 이원론이다. 김기현은 기세를 현실에 맞게 적용하려면 기존의 개혁주의 기세가 말하는 것처럼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보다는 교회 내의 콘스탄틴주의, 즉 혼합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개혁주의 기세는 현실 진단에서부터 이미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이미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세상과 격리될 걱정을 하는 것은 기우(杞憂)에 불과하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 그 왕국의 가시적 형태인 교회가 도리어 세상 속에서 세상 정신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김기현은 송인규의 “평신도 신학”에서 언급한 ‘세상’이라는 개념의 구분을 언급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 전체를 가리키는 ‘세상1’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정신을 의미하는 ‘세상2’를 구분하자는 송인규의 지적에 대해 “한국교회의 문제는 ‘세상1’과 ‘세상2’를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2’가 교회 안에 침투해서 사실상 장악 당한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김기현은 세상과 교회의 구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 없이 오히려 우리가 교회의 세속화에 주목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근거로 그는 신구약 성경의 내러티브와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의 혼합주의적 성격을 지적한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도 교회가 어떻게 권력과 결탁했으며 그로 인해 얼마나 기독교가 변질되어 왔는지를 설명한다. 그렇다.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내부에 있었으며, 결국 친절한 금자씨가 말하듯 “너나 잘하세요”가 우리 귀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김기현이 이성주의 시대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근대주의는 이성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경험적, 합리적, 과학적인 것들을 신격화하였다. 근대 기독교인들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가 무엇인지에 대한 수많은 탈기독교적인 답변들 속에서 혼란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모더니즘이 한 세대를 휩쓴 후, 기독교 신앙을 포함한 종교는 사유화되었고 내면화되었고 탈사회화 되었다. 종교는 이제 학문, 정치, 문화, 사회에 개입할 수 없으며 신존재에 대한 문제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학문 영역 자체에서의 도피가 이루어졌으며-이를 두고 쉐퍼는 “이성에서의 도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무신론으로 회심한 유물론자들로 인해 대다수의 기독인들은 과학, 심리학, 예술, 매체, 정치와 같은 영역의 것들은 세상적인 것이며 그 자체로 이단적이고 사탄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시대가 달라져도 인간 조건과 세상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로이드존스조차도 그의 대표적 저서인 “부흥(Revival)”의 초반부에서, 이런 근대적 사고로 인해 교회가 그 이전 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에 봉착해 있음을 직시했다. 유대민족과 중세 유럽의 문제가 혼합주의였다면, 근대 이후에 생겨난 이성우월주의적 사고 때문에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은 세상의 각 영역, 특히 학문과 문화 영역을 부정하고 이단시했다. 이 시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미시적인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도 하나의 포괄적인 틀로 제시될 수 있었던 기세의 긍정적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 교회도 개혁주의 기세에서 말하는 이원론의 극복이 ‘여전히’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김기현은 나와 생각을 달리할 것 같다. 지금은 모더니즘을 넘어선 포스트모던 사회로 들어섰으며 모더니즘의 문제에 집중했던 개혁주의 기세는 고스란히 모더니즘의 해악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으나 이는 한국 사회를 탈근대 사회로 볼 것이냐, 근대 사회로 볼 것이냐, 아니면 진중권의 지적처럼 오히려 전근대적인 방향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볼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의 생각은 제3세계, 특히 북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적 상황은 이 모든 것이 중첩된 형태를 띄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는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나는 개혁주의 기세로 대변되는 “구조와 방향 모델”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기독인들이 세상의 구조-문화, 정치, 사회, 학문, 예술 등-그 자체를 부정하고 불경스러워하며 담을 쌓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김기현의 문제 제기와는 반대로-송인규의 원래의 지적처럼-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 관심이 없는 것이며 또한 ‘세상1’(구조)을 ‘세상2’(방향)처럼 여겨서 ‘세상1’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혼합주의로 치부하고 정죄하고 멀리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리차드 미들톤의 교회와 세상에 관한 이원론적 사고의 문제성을 접했을 때 들떠 있었고, 월터스의 구조와 방향 모델을 접했을 때 내가 누리던 음악, 예술, 영화, 대중매체들이 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제서야 졸이던 가슴을 펼 수 있었다. 송인규가 천국에는 예술 작품들이 있고, 문화가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는 것, 나아가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기다려졌다. 김기현의 잣대로 본다면 나는 교회 안의 혼합주의에 전염된건가. 교회 안에서 사회와 문화를 누리고 더 나아가 변혁을 꿈꾸는 나는 콘스탄틴주의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인가. 이원론을 지적하는 기세는 여전히 현실을 잘못 파악한 건가. 나는 기세를 접한 그 때부터 후배들에게 기세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나와 같은 심리적 부자유함에 눌려 지내는 수많은 기독학생들을 만난다. 그 때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도 나는 음악을 하면 CCM을 고집하는 청년들은 본다. 아침 기도회를 빼먹고 시험공부를 했다고 죄의식을 느껴 학점을 포기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학생들도 본다. 주변에서는 적성에 맞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주기적으로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는 회사원들도 자주 만난다. 게다가 그들 열에 하나 둘은 이미 회사를 떠났다. 나에겐 이원론이 여전히 극복의 대상이며 개혁주의 기세는 여전히 현실에서 유효하고 가치 있는 모델임을 느낀다. 김기현은 때때로 주변의 보수 교회들을 탐방해보라. 그 교회의 평신도들과 이야기해보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성도들이 아닌 보수 교단의 기독 직장인들, 기독청년들과 이야기해보라. 난 그렇게 생각한다. 여전히 이원론이 문제다!


한국이라는 컨텍스트와 이야기에 무감하다는 비판에 대해
세 번째로 김기현은 개혁주의 기세 운동이 한국적 상황과 이야기에 무감각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기세 운동은 처음부터 단순한 지식체계의 성립보다는 삶 한가운데서의 실천을 목적으로 해왔다”는 최태연의 말을 인용하면서 “도예베르트나 쉐퍼가 매력적이었던 건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고뇌하고 대답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널리 읽히는 세계관 서적들은 ‘한국’이라는 컨텍스트가 아예 부재하거나 언급하더라도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 관점 역시 비판 받을 소지가 많다”고 결론 지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시작된 김기현의 연재에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이라는 컨텍스트를 관통하는 세계관의 비전을 제시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저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김기현의 세계관 연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오히려 “지식체계의 성립”에 치중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한국적 상황이 아주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네 번째 연재인 “이원론과 혼합주의”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 사학법을 대하는 한기총의 정치 참여를 혼합주의의 틀로 보는 대목이 그 부분이다. 하지만 이 대목은 혼합주의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예시 정도로만 읽힌다. 그렇다. 김기현에게도 현장은 아직 멀기만 하다. 사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세계관에 관한 연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런 류의 글을 기대하지 않았다. 친절하게 소개된 참고 문헌과 논문 버금가는 수준의 잘 짜여진 이론들의 종합과 비판을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생한 현장성이 담보된 실체로서의 세계관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김기현은 한국 교회의 고질적 문제인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미 FTA 문제는 어떤가? 교회의 세금 문제는 어떠한가? 지역 사회, 한국 사회에 대한 교회의 봉사와 사회 참여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수정로교회에서는 그런 현장성 있는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내러티브와 현장성이 반영된 김기현의 사역은 부산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어떤 열매들을 맺고 있는가? 그가 일구어 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어디쯤 와 있는가? 사실 나는 이런 것들이 궁금하다. 모든 사역을 가시적인 열매로 환산하려는 것에는 나도 부정적이지만 세계관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더군다나 현장성, 현실 세계의 참여를 이야기하면서 사역에 대한,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온 후로 세계관 관련해서는 별 다른 책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세계관 딱지를 달고 나오는 책들을 되도록 모두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실상 내게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책들은 현장성이 담보된 책들이다. 제3세계의 사회복음의 사례들이 잘 드러난 로날드 사이더의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나 사무엘 에스코바의 “벽을 넘어 열방으로” 같은 책들과 도시 빈민촌 선교행전이라고 볼 수 있는 “홍등가의 그리스도”, 그리고 일반 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NGO 운동의 한계를 느낀 학생들이 비영리 기업을 조직하고 운영하여 성공한 이들을 인터뷰한 사례들이 담긴 “세상을 바꾸는 대안 기업가 80인”같은 책들이 그것이다. 이런 책들은 수사법이 화려하지 않으며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10배에 달하는 참고 문헌을 돌아볼 필요도 없다. 이미 그들은 또 하나의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짧은 고백 속에는 언제나 ‘현장’이 묻어나며 그 소박함 속에서 울리는 공명은 내 깊은 양심을 오랫동안 뒤흔든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김기현이 지적하는, 이른바 개혁주의 기세라는 모델 자체가 현장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개혁주의 기세에 대한 모델의 검증이 안 된 것 아니냐는 얘기다. 김기현의 지적대로 개혁주의 기세가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그 세계관 배후에는 화란 개혁주의 기독교 선배들의 현장성이 담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기세는 그들의 삶의 토대 위에서 구축된 실천적 틀인 셈이다.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공 사례가 있는 모델을 우리가 적용해보지도 않은 채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냐는 거다. 내가 불편한 것은 김기현이 기세가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는 이유를 자꾸 개혁주의 기세 내부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나는 사실 기세의 다양성 문제와 모더니즘적인 토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기세 자체는 여전히 그 틀을 유지하면서 현실에 부단히 적용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백 번 양보해서 개혁주의 기세 운동이 우리나라 형편에는 일대일로 대응시켜서 적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니 수정, 보완하여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틀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아직까지는 회의적이다.


기세 비판, 텍스트의 평이성을 지향해야
알 버트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을 철학, 신학과 구별 짓는 키워드로 ‘일상’과 ‘상식’을 든다. 세계관이 그만큼 일반적이고 비전문적인 문제라는 얘기다. 기독교 세계관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상식의 문제이며 일상적인 문제다. 하지만 개혁주의 기세 자체가 철학, 신학을 잘 알지 않으면 논의하기조차 어렵다는 점을 많은 청년들이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고 나 또한 그에 동의한다. 김기현의 글에서 내가 답답한 대목은 김기현이 그런 기세의 문제를 지적하는 동안에도 다시 너무나 많은 철학과 신학의 토대를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세계관이 신학, 철학적 토대 없이 정립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세계관은 철학과 신학에 대해 메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철학적, 신학적 연구가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관의 표현이 학문적인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세는 노동자나 어린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비록 그렇게 하기엔 다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되도록 텍스트의 평이성을 지향해야 한다. 


나는 기세의 수혜자다. 내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신학을 공부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유혹이 만만치는 않다. 모두가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신학을 공부하는 방법만은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항상 그런 도전을 받아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솔직히 나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에 끼어 들어야 하는지를 놓고도 몇 달을 고민해왔다. 사실 기세를 놓고 내가 할 얘기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실 그렇다. 기세 논쟁은 그 텍스트의 난해함과 그를 해결하기 위한 방대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계관 운동의 논의 자체에 세계관의 수혜를 입은 사회인들과 운동가들을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있다. 기세 논쟁의 중심에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결국 운동가들은 말 한마디 하려고 해도 좀처럼 논의에 끼지 못한다. 내가 아는 이들 중 참여연대나 기윤실, 공의정치포럼, 뉴스앤조이 혹은 사회 운동가들과 직장인들이 기세에 대해 이렇다 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사실 그들이 세계관 운동을 하는 데에는 깊이 있는 철학과 신학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기세를 이야기하려면 그런 현장에서, 미답지(未踏地)에서 분투하고 있는 운동가들을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그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담론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기세를 갇힌 학문의 영역에서 척박한 사회의 중심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나는 김기현이 그의 연재를 통해 원론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의 기세 논의가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도 믿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논의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 되려면 학문의 옷을 벗고 보다 알기 쉬운 일반인들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학문적인 글이라도 리차드 파인만이나 송인규, 강준만 수준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나는 김기현의 글을 읽으면서 또다시 병이 재발하는 경험을 했다. 텍스트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김기현의 탁월함을 보면서 나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다시 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실 회사 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독서량에 한계를 느낀다. 내 문제의식이 지식의 한계 때문인가 하는 생각에 한 몇 달 동안을 1-20분만 시간이 나도 관련된 글들을 최대한 많이 그리고 자세히 읽어 보았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서 11시 가까이 되어야 퇴근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저녁식사 시간을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그가 인용한 참고 문헌은 다 읽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지금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그의 연재를 다 읽을 때 즈음에는 나는 엄청난 참고 문헌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끝내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다. 내심 꽤나 성실하게 기세 관련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는 내가 넘어설 수 없는 물리적 처지에 있는 김기현이 한편으로는 부럽고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내 모습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 가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이다. 하지만 나는 이변이 없는 한은 회사 생활을 지속할 것 같다. 또한 이 토대 위에서 지속적으로 기세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고 또한 나를 포함한 많은 운동가들을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면서: 기세가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진짜 이유는?
정 리하자면 이렇다. 기세가 현실세계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를 김기현은 개혁주의 기세의 변혁 모델 ‘안’에서 찾고 있다. 나는 그의 비판 중 내러티브의 부재나 이원론에 대한 비판과 같은 일부는 좀 과하다는 지적을 했다. 김기현이 컨텍스트 문제를 거론하는 데에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기세라는 전략으로 경기를 뛰어본 선수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군사 독재 시절 사회참여 문제를 놓고 기독연합 운동은 이른바 ‘6개대 사태’와 같은 사건들로 인해 보수-진보 세력 간의 아픔이 있었고 그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듯하다. 이후에 우리는 기세를 실천적으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내세울만한 현실의 운동 경험 없이, 북미의 영향을 듬뿍 받은 포스트모던-다원주의 시대를 맞이 했다. 권력은 다양화되었고 기세운동은 문화 운동으로 변화했으며 진보 세력은 분화되었다. 그 와중에 기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대두 되었고, 이제 기세는 김기현과 같은 신앙인들에 의해 한국 교회에서 아직 써보지도 못한 낡은 칼자루 취급을 받고 있다. 문제는 김기현이 ‘낡은’에 주목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써보지 못한’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을 마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여전히 개혁주의 기세의 변혁모델을 유효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는 점과 참여는 하고 싶으나 기세 논쟁 자체의 난해함으로 인해 토론의 시작점을 찾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내 글로 인해 보다 많은 이들이 기세 논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의 부족한 잡문(雜文)이 김기현의 이후 기세 연재에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끝)

2007/06/01 22:48 2007/06/0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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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급(秘笈) ‘다시보기’의 교훈>

어렴풋하지만 무협 영화 중에 그런 류의 내용이 가끔 기억난다. 주인공이 어떤 이유로 위기에 처했다가 무림의 고수에게 구조를 받게 되었다. 이 고수가 죽기 전에 주인공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비급(秘笈)을 전해주게 되고 주인공은 날마다 비급에 감추어진 무술을 연마하지만 웬일인지 비급을 완벽하게 체득하지 못한다. 어느 날 비급에 음식을 흘렸는데 비급에 묻은 음식을 지우다가 새로운 글자나 그림이 겹쳐져서 나타나게 되고 주인공은 그 숨겨진 부분을 익히게 되어 무림의 달인이 된다는 식의 줄거리다. 명확하진 않지만 음식이 묻은 경우가 아니라도 촛불에 비추어 본다던가 하는 식의 내용 전개가 있었던 듯 하다. 똑 같은 비급을 매일 수련하던 주인공에게 보이게 된 겹쳐진, 그러나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의 심경이랄까. 그 어떤 설렘과 신비감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지라 피아노 줄이 다 보이는 시시껄렁한 옛날 무협영화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릴 때부터 꽤나 착실히 교회를 다녔다. 때로는 당시의 나로서도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 종종 있었으나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뿐 별다른 고민을 해보지 못했다. 사실 학생시절에는 신앙 생활을 하는데 그러한 것들이 별로 중요할 성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난 때때로 내가 주변적이라고 느끼던 일들로 신앙적으로 자주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무엇보다 내가 교회 안으로 데리고 온 비기독인들은 내가 주변적이라고 느끼던 바로 그러한 일들을 꽤나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곤 했다.

물론, 난 그들이 편파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편파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교회에서 주변적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자주 나는 철없던 시절에 보던 무협영화의 비급이 떠오른다. 세상이 바라보는-기독인의 시각에서는 비급에 흘린 음식물처럼 약간은 더럽혀진 관점으로-교회라는 조직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후의 내용은 그러한 편파적인 교회보기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계급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회>

“하나님의 대리자인 목사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성도는 기도생활을 제대로 못해서 마귀가 들어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세속화의 전형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신성한 곳이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아마 모르긴 해도, 매 주일마다 어느 교회에선가 예배시간에 선포될 말씀이다. 때로는 큰 교회일수록 이러한 말씀 선포에 “아멘!” 하며 화답할 성도들도 많으리라. 이러한 말씀선포가 유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목사직에 대한 성직화가 가장 큰 원인일 것 같다. 카톨릭적 배경 아래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래로 개신교에서 수없이 반복하여 학습하는 루터의 가르침, 즉 ‘만인제사장주의’, ‘만인사제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유교와 만나 또다른 형태의 계급화를 부추긴다.

이러한 배경에는 또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평신도의 신학 교육이 그리 활발하지 않다는 데에 그 첫째 이유가 있겠다. 아니 좀더 원색적으로 말하자면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다. 예배에도 그 계급적, 그 상하 위계질서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어서 ‘소’ 예배나 ‘중’ 예배는 없는데 항상 ‘대’ 예배는 존재하며 ‘대’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의 경우에는 아예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게다가 이 ‘대’ 예배는 기존의 교육 전도사나 부목사가 설교를 할 수 없고, 꼭 담임 목사가 설교를 해야만 유효하다. 담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에 그런 듯 하다. 단, 예외가 가끔 존재하는데 그것은 담임 목사의 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 ‘육신적’ 아들이 담임목사 다음으로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그에게 ‘대’ 예배의 설교를 위임하는 일이 그 예외에 해당한다. 이러한 교회들의 대부분은 교회 내의 구조를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구약을 주로 인용한다. 따라서, 왕과 제사장, 그리고 각 지파들의 장로들과 백성들로 구성되는 구약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목사와 장로, 집사, 평신도를 구약적 모델에 일대일 대응하여 말씀을 적용한다.

왜곡된 신학뿐만 아니라 기존의 습속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위계질서가 유지된다. 유교적인 배경을 가진 한국 사회의 전통에 더하여 군부 독재정권의 오랜 압제 아래 있었던 국민의 대부분이 그렇겠으나, 교회 내의 성도들 간에도 자신들이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을 깊게 묵상하며 판단하여 교회의 일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타나서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오히려 편하고 만족스럽다고 여기는 부류가 많다. 이러한 대다수의 성도들은 자체로 어떤 참여적인 행동을 부담스러워하며 민주적인 절차로 어떤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데에 익숙지가 않다.

따라서, 이러한 need와 seed가 일치하는 지점에 교회의 왜곡이 발생한다. 만인이 제사장이자 사제이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제사장이나 성직자의 중개 없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할 수 있음에도 대다수의 성도들은 목회자의 안수기도가 자신의 믿음이 담긴 기도보다 효력이 크다고 생각하며,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경우에도 가까운 관계의 성도보다는 교회에서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판단되는 교역자의 기도를 높게 치부하곤 한다. 장로직 선거 시에도 목회자가 후보자에게 크게는 몇 천 만원의 기부를 강요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적잖게 듣곤한다. 이런 연유로 선거에 후보자로 올라서 장로직분을 받게 되는 성도는 사회에서 인지도가 있고 부와 명예를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인 경우도 많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처음 등록한 상당수의 비기독인들은 한국의 중, 대형 교회의 구조는 세상의 조직 구조와 너무도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재벌 기업과 교회 조직체>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칭한다. 사실 이때의 교회는 ‘성도’들 자체를 지칭하지만 흔히 교회에서 ‘우리 교회’라고 말할 때는 특정한 이름의 교회 공동체를 운영하는 조직을 지칭하는 일이 일반적이다. ‘성도’라는 의미의 교회와는 구별되는 이러한 ‘교회 조직체’는 다른 세상 기업들과는 달린 세금을 내지 않으며 조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담임 목사에 비해 부목사의 급여는 절반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으며 교육 전도사의 경우에는 최저 생활비에도 못미치는 급여를 받는 일도 허다하다.

대체로 대기업의 회장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조직체가 크면 클수록 이러한 대기업의 생리를 닮은 구석이 적잖이 보인다. 재벌 기업 사이에서 보이는 특수한 부의 세습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 기업들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데에 크게 일조하고 있으나, 교회 조직체는 이러한 ‘재벌’의 습성을 책망하지는 못할 망정 그대로 흡수하는 ‘관대함’마저 가지고 있다. 또한, 담임 목사의 직분을 그간 최소 생계비로 헌신해온 주변 동역자에게 넘겨주기보다는 연륜과 경험이 부족한, 한 세대 아래의 아들에게 주려고 한다. 대개는 그 아들이 담임 목사의 성품에 합당한 교육을 통해 길러진 훌륭한 믿음의 자녀이자 검증된 리더임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가정(假定)은 왕정시대, 혹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재벌 그룹에서도 동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되는 원인을 사람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한 사람의 결단이 그 교회 조직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 조직체에서 부의 세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짚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교회 조직체의 재정 운영 스타일이 재벌 기업의 그것과 비슷하며, 그런 연유로 재벌 기업가들이 하는 방식과 똑같은 스타일의 세습문제가 교회 조직체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 조직체는 교회의 건물이나 부지(敷地), 혹은 교회의 재산이 담임직을 맡고 목회자의 명의로 등록이 되어 있는 경우가 더러 존재하며 재정을 운용하는 그룹도 목회자의 뜻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담임직의 위임은 단순히 설교자로서의 위치를 위임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재산을 넘기는 일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교회 조직체 내에서 그러한 부의 편중형태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한 사람이 결단을 한다고 해서 그 조직체의 견강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를 견고히 하는데에는 성도들의 그릇된 습속도 한 몫을 거드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목사님은 그 정도의 부는 누려야 한다”거나 “목사님의 위신과 체면을 고려하여 그 정도의 치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의외로 많다. 허나, 이는 그릇된 체면과 허례의식이 조장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성도는 ‘교회 조직체’를 위해 종노릇하라?>

교회 조직체에서 성도의 위치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설교를 통하여 새로운 삶에 대해 도전을 받으며 헌신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지지만 실제로 어떠한 상황적인 문제에 대한 미시적인 행동 지침같은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은 회심 이후에 무거운 마음으로 전도 이외의 일에 대해 시야를 넓히는 일이 쉽지 않다. 게다가 교회 조직체는 교회 내의 견고한 공동체 형성을 위해 끊임없이 여러 가지 형태의 봉사 프로그램을 만들며 그러한 행사의 대부분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교회를 위한’ 행사인 경우가 많다.

결국 교회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고 스스로의 죄성을 심각하게 뉘우친 대다수의 성도들은 빚진 마음으로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찾게 되는데 이 때 교회 조직체는 교회의 일에 성도들의 노동력을 대가없이 사용하는 일이 생긴다. 분명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에 대해 선포하지만 교회 조직체는 그에 대한 선행 과제로 ‘교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종용하며 이러한 소명은 직분을 얻은 성도들이 소진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들이 교회 조직체를 위해 사용하는 많은 금전적, 시간적, 물리적인 헌신은 그야말로 대가 없이 행해지는 것이며 그것이 충당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신앙이 흔들린다거나 믿음이 후퇴했다고 치부하기도하고 심지어는 마귀가 들었다는 말도 서슴없이 일삼는다.

교회 조직체가 운영하는 사업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고용된 직원들은 교계의 연줄을 통해 서로가 아는 경우가 많으며 교회 조직체는 이들 대부분을, 정당한 댓가를 받는 정직원이라고 여기기 보다는 사회 봉사활동을 하는 자원봉사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 하다. 교회 조직체가 운영하는 사업체의 경우, 급여가 몇 달이고 밀리는 경우도 많고 그러한 경우에는 천국에 보화가 쌓이고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펴기도 하며 금전적인 문제로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 자체를 책망하기도 한다. 교회 내의 분위기에서 금전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세속화된 증거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이러한 배경을 가진 교회 조직체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의 교회 조직체 안에서도 재정적으로 풍요함은 누리고 있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상’을 담보로 헌신을 강요당하며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종노릇’하고 있는 계급이 교회 조직체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한 상상인가.



<교회가 무림의 고수로 거듭나기까지>

이렇게 생각해보자. 교회 내에 하나님에 관한 부분이 없다고. 교회는 단순한 또 하나의 조직이라고. 성령의 사역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없는 단순한 하나의 조직 사회라고. 대다수의 불신자들은 그런 시각으로 우리를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과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제외한 후에도 교회 공동체는 이상적인 공동체인가.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조직원들을 위하며, 재정사용에 있어서 전혀 거리낌 없이 어느 조직 사회보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운영되는가. 어느 특정 부류가 부를 선점하고 있거나 특정 부류의 희생을 담보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교회가 만인이 제사장이며 만인이 사제라는 원리에 충실한, 그야말로 평등한 조직인가. 재정 사용이 투명하며 정당한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주고 있는 조직인가.

그러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기독인들에게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하며 이 사회에서 ‘기독교 윤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교회는 이율배반적인 말씀의 선포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낫다. 혹은 어렴풋한 무협영화처럼 교회도 더러운 세상의 시야를 통해 새롭게 스스로를 연마하여 진정한 고수가 되거나. **

 
2004/02/01 08:09 2004/02/0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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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Sartre)로부터 시작된 나의 고민


내가 처음으로 교회가 혹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결코 낫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장 폴 사르트르(J. P. Sartre)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다. 물론 처음 사르트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도와준 책은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이었다. 그 책에서는 사르트르를 실존주의자로 분류하여 그의 사상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서술해 놓았다. 이후에 나는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사르트르의 약력이라거나 두껍지 않은 그의 책들 몇 권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잠시 관련된 내용 중 사르트르에 대해 설명한 발라스 듀스의 글을 인용해보자.

사르트르는 인간이 누구보다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해 조건 지워지고 구속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사르트르 이전의 앙가주망(engagement)에 대한 낡은 내용이다. 그러나 실존의 분석에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처럼, 인간은 사전에 본질이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인간은 그 한계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 숙고한 행동은 물론 상황을 무시한, 혹은 자유를 방기한 선택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 또, 어떤 행동의 선택은 당연히 이후의 행동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에 자유 속에 던져진 인간은 항상 선택을 하고 자기를 새롭게 구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그런 책임에 부합하는 올바른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사는 사계 전체의 움직임과 상황으로 인해 좁혀진 선택의 가능성을 확장해서 자기를 차츰차츰 해방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전체주의 하에서 사람들의 선택의 폭은 몹시 좁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새롭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냉전, 혹은 고도의 자본주의라는 상황 하에서 다시 선택의 가능성이 좁아져서는 안 된다.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시켜라.' 바로 이것이 사회 참여라는 새로운 의미로서의 앙가주망이다.
(발리스 듀스, "현대사상-앙가주망" 중에서)

듀스의 표현대로 실존주의자들의 미덕은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시키려는 책임과 참여(앙가주망, engagement)에 있다. 사르트르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약력을 살펴본다면 그러한 삶의 자세가 그의 생애 전반에 잘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수복(사회운동연구소 소장)은 사르트르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요소들과 융합하며 자신의 사상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는 인간이 기독교적 교리와 사회적 제도의 구속을 넘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또한 사르트르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이후 고전적 좌파 지식인의 전형이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선택과 참여는 역사적 결정론을 거부하고 억압 받는 자의 편에 서서 행위자의 실존적 선택과 자유를 옹호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많은 지식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그런 이유에서 마르쿠제는 사르트르를 가리켜 '세계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사르트르는 항상 기득권을 옹호하는 지식인이 되기 보다는 기존의 불합리한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사회참여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역사적 결정론과 환원론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가 실존주의자로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그의 사상의 근본에 충실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1964년 10월 노벨 문학상이 주어졌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고 생애 말년까지도 알제리 사태에 대한 계속적인 반대 운동, 1966년 베트남에서 자행된 전범을 재판하기 위해 구성된 '러셀 재판소'에서의 열렬한 활동, 쿠바 사태에 대한 항의, 1968년 5월의 프랑스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 체코 사태에 관한 소련의 무력적인 개입 비난 등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사르트르를 단순히 기독교 세계관에서 벗어난 실존주의자로만 평가한다. 이는 그가 어떤 일을 했건, 평생에 걸쳐 사회에 어떠한 이바지를 했건 간에 그가 명시했던 실존주의자로서의 명제, 이를테면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거나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와 같은 고백들을 대다수의 기독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사상을 비난하거나 가볍게 대하는 많은 수의 기독인들의 삶에 비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역사와 사회에 끼친 비중 있는 책임과 참여의 폭은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의 ‘양심’은 대다수의 기독인들이 한 구성원으로써 사회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평균적인 도덕성보다 더 순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보다 좀더 나아가 그러한 질문도 던져보고 싶다. 그러면 과연 누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인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누구를 사용하는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세상이 더럽다고 구별된 건물 안에서 세금조차 내지 않으며 고고한 성을 쌓던 교회는 또한 얼마나 세상과 닮았던가. 일말의 대화와 타협도 없이, 그대로 선포되어야 한다던 로고스(Logos)는 그 막힌 건물 안에서 얼마나 위조되고 또한 더럽혀졌던가.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실존주의자보다 못한 우리의 자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딴지일보>의 교훈
 
“우리는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다.”
(김어준, "딴지일보")

딴지일보가 처음 인터넷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일반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기독인들은 딴지일보의 스타일에 마음이 많이 불편했던 듯하다. 물론 이러한 ‘글쓰기 스타일’에 관한 문제는 강준만으로부터 비롯되어 진중권과 같은 류의 논객에 대해서도 여전히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선정적인 표현이라거나 특정 인물에 직격탄을 날리는 듯한 비판조의 글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술수라는 말도 많았다.

물론 일정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가지가 넘쳐날 정도로 사회에 뿌려대는 극우 신문과 극우 잡지들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스타일의 ‘오버’는 어떤 면에서 오히려 공정한 게임을 위한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는 딴지일보를 좋아한다. 그리고 딴지일보의 총수인 김어준의 생각을 존중한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호감을 갖는 부분은 딴지일보적이라 할 수 있는 그 ‘편파성’에 있다. 나는 딴지일보의 ‘편파성’이 좋다. 물론 많은 기독인들이 편파적인 글, 편파적인 행동, 편파적인 처우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조의 의미로 초반에 김어준의 말을 넣었다.

나는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선교단체와 교회 안에서 ‘균형’에 대한 많은 조언들을 들어왔다. 아니, 균형을 말하는 정도의 교회라면 교회 전반적으로 볼 때 소수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거다. 최소한 ‘복음주의’ 내지는 ‘사회참여’라는 용어를 쓰는 그룹에서만 균형이라는 단어가 소위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의 균형, 교회와 사회 사이의 균형, 신앙서적과 일반서적 사이의 균형,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 사이의 균형 등.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균형 잡힌 신앙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의 경험을 비추어볼 때, 균형을 말하는 기독 공동체의 상당수는 기만적이었다. 내가 속했던 선교단체가 그러했고 내가 아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그러했다. 항상 어떠한 실천적인 움직임을 동반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래, 그것은 우리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야. 하지만 그것만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거든. 마치 그것을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너의 편파적인 사고는 자칫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어.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하지. 그래서 말씀 묵상과 기도가 중요한 거야.’라며 문제를 회피했다. 결국 이러한 고백의 속내는 균형을 잡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에 대한 치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변화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불편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기만적인 ‘그럴듯함’에 그 목적이 있는 듯 하다.

딴지일보는 편파적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다. 스타일이 다소 껄끄럽게 느껴진다 해도 편파성에 이르게 된 과정을 누구나가 검색할 수 있고 필요하면 따질 수도 있다. (이것은 양방향 전송이 가능한 인터넷 매체의 유익이라 할 수 있다.) 과정 자체가 오픈 되어 있으며 내용을 담는 데에도 학구적인 냄새로 그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지 않은, 그야말로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네티즌의 말투 그대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딴지일보의 이러한 편파성이 복음주의 권의 균형성보다 낫다고 느낀다.
 


편파적인 세상보기를 시작하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이 연재의 흐름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입가를 맴도는데 막상 풀어내려 하니 그 첫 단추가 잘 떠오르지 않는 기분이랄까.

흔히들 기독인의 눈으로 보기에 세상은 기독인과 비기독인, 이렇게 두 가지의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듯하게 보일 때가 많다.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는 기독인 부류도 비기독인 못지않게 동일한 불합리성을 가지거나 혹은 그보다 더한 악행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럴 경우 기성 교회는 그에 대한 대답을 칼빈에게서 찾는다. 기독인 중에도 두 부류가 있으며 이 둘은 가시적인(명목상의) 기독인과 비가시적인(진정한) 기독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통적 구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인 악행들과 집단적인 행동도 많이 있다. 그리고 실제 세상은 기독인의 생각처럼 사회가 기독인과 비기독인 두 부류로 정확하게 나누어져 정신적, 물리적 활동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은 어떤가. 세상의 잣대 하나로만 두 부류를 평가해 보는 건 어떤가. 교회를 세상의 구조에 맞게 해석하여 그 불합리성을 분석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혹은 기존의 세상을 권력을 가진 소수의 조작으로 해석하는 것을 그만두고, 공정한 과정을 통해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건 어떤가. 이 모든 부분에 있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적인 표현들을 걷어내고 비기독인의 언어로 대화하였을 때 과연 우리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혹은 윤리의 기준으로서 편파적인 우세를 얻어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것들이 내가 써 내려갈 연재의 시도들이 될 것 같다.**

2004/01/01 08:03 2004/01/01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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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보다 못한 복음주의
/김용주

 

영화 <매트릭스>의 열풍

“영화 <매트릭스2-리로디드>가 3주 연속 흥행성적 1위를 기록하며 전국관객 300만명을 돌파했다. 수입ㆍ배급사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에 따르면 <매트릭스2>는 7-8일 서울 관객 9만7천100 명을 동원해 주말 극장 흥행순위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서울 66개, 전국 231개의 많은 스크린 수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관객수는 전주말(21만5천 명)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등 감소 폭은 큰 편. 8일까지 이 영화가 동원한 전국 관객 숫자는 312만 명으로 개봉 17일만에 300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올 최고의 흥행작 <동갑내기..>와 비슷한 추세다.”

(씨네 21 기사 중 부분인용)

영화<매트릭스2-리로디드>가 개봉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봤다. 전작인 <매트릭스>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많은 네티즌들과 매트릭스 매니아들이 열광했고 지금까지도 영화 관련 웹 게시판에는 매트릭스에 관련된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딴지일보>에서는 이런 웹 상의 글들을 모아서 “매트릭스 짝퉁 감상법”과 “매트릭스 짝퉁 문학상”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메이저 급 영화 잡지들은 아직까지도 매트릭스 영화 상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매트릭스2-리로디드>가 개봉하기 전에는 미국의 대학교수들이 전작에 대한 분석과 논평을 모은 <taking the red pill>이라는 책까지 발매되었고 이 책은 아마존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며 많은 매트릭스 매니아와 지식층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이 책은 굿모닝미디어에서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현각 스님도 스스로가 매트릭스의 광이라고 자처하면서 영화를 10번을 보고 한겨레에 관람기를 싣기도 했다. 기학연에서는 이달 초부터 매트릭스에 관한 내용으로 세미나를 연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대충 내용을 알고나면 누구나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갈 듯도 하다.

1999년에 개봉한 <매트릭스>는 컬트 영화 감독이었던 워쇼스키 형제가 사고하는 액션영화를 만들겠다는 선언과 함께 만들어진 그들의 야심작이다. 실제로 그들은 영화 촬영 전부터 주연배우였던 키아누 리브스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인 시뮬라시옹을 읽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촬영 시마다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무슨 의미인지를 서로 토론하도록 권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 연유로 배우들도 매 장면마다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화면이 정지된 채로 360도 회전하는 장면이라던가, ‘불렛 타임’이라는 획기적인 촬영 기술(총을 쏘는 장면에서 총알이 날아가는 순간과 액션장면을 합성하는 기술)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매트릭스의 하부구조는, 다수의 관객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무엇보다 <매트릭스>는 많은 메타포가 숨겨진 영화이다. 이 영화의 전체 하부구조에는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산재해 있으며(이는 이 글의 본론에 해당하므로 여기에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를 쫓아가는 장면이라거나 플라톤이 언급한 동굴의 우상, 그 밖에 장 보드리야르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상과 최근 SF영화의 교과서가 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 기동대>에서 보이는 첨단 기술의 사회지배력이 골고루 퍼져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물론 전작에 비해 <매트릭스2-리로디드>는 많은 비판 또한 듣고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2편이 전편에 비해 더욱 구체화되고 세련되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매트릭스>의 뛰어난 하부구조들

많은 부분들이 매체를 통해 언급되었기 때문에 몇 가지만 지적함으로 이 부분을 설명하기로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매트릭스는 장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저서 <시뮬라시옹>에서 설명했던 “더 이상 모방이나 복제, 심지어 패러디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현실이 현실의 기호들로 대체된다는 것이다”라는 시뮬라시옹 사회의 단면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 네오가 불법 프로그램을 숨겨둔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시옹>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를 해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처음에 현대 소비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시뮬라크르는 신의 소상(塑像)이나 화상(畵像), 혹은 표상, 이미지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자신의 책에서 시뮬라크르를 기호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사물에 대한 기호론적인 사고는 마르크스(Marx)의 가치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르크스(Marx)는 사물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보드리야르는 사물에게는 마르크스(Marx)가 가정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는 환원이 불가능한 어떤 ‘상징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특정한 상품에는 단순히 그 상품 자체의 효용성과 교환 시의 가치뿐 아니라 결혼 반지처럼 반지라는 상품에 특정한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고, 나아가서 그 사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신분의 상징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인간들은 이렇게 기호화된 사물을 소비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호들은 현실로 대체되고 현실은 시뮬라크르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매개로 거래와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기호가치들의 존재, 즉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기호를 소비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뮬라크르 소비 사회를 가리켜 시뮬라시옹 사회라고 정의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뮬라시옹 사회는 사물에 대응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고 시뮬라크르가 현실이 된 세계이며 따라서 사물은 원초적으로 그것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코드화된 기호와 숫자에 그 기원을 두게 된다.

<매트릭스>의 첫 편에서 매트릭스 안의 세계는 시뮬라시옹 사회를 대변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쉽게 매트릭스 안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물질들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완벽한 사회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매트릭스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입장을 생각해보면 과연 어디까지가 실재로 존재하던 물체를 기호화한 것인지, 내가 먹는 스테이크는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조차도 구분할 수 없다. 실재 물질과 대응되는 스테이크라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데 단순히 상징적인 기호를 통해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는 셈이다. 보드리야르가 인식한 현대 소비사회의 코드는 그런 의미에서 고스란히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녹아있다. 한 예로 <매트릭스>의 전편에서 네뷰커네자르(Nebuchadnezzar) 호 안에서 해커들이 하는 잡담은 그냥 넘기기에는 중요한 개념들이 들어있다. 도저가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마우스라는 해커에게 주는 스프처럼 생긴 음식을 먹으면서 “테이스티 휘트”의 맛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자신은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한다면 그 맛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사물의 맛일지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이 사실은 기계들이 대충 짐작으로 만들어낸 기호체계일 뿐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다소 황당한 잡담을 늘어 놓는다. 따라서 이 장면은 감독이 매트릭스의 토대가 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대해 그런 가벼운 스케치를 통해서 본질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도 이와 같은 기본 하부구조 위에서 영화는 진행되며 키메이커를만나기 위해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라는 프로그램을 찾는 장면에도 이 개념들은 시각적으로 재현된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 네오(Neo)에게 자신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라고 할 때 네오(Neo) 앞에 펼쳐진 것은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디지털 기호들의 조합이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은 웃으면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매트릭스는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시뮬라시옹 사회의 모습. 그것이 매트릭스의 사회학이자 영화 전편에 흐르는 하부구조인 셈이다.

또한, 이 영화의 묘미는 단순히 보드리야르를 대변하는 사회학적인 기반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의 보다 탁월한 점은 IT기반의 기술들이 영화의 각 장면 장면마다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보통신 네트워크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보안과 암호화’이다. 영화를 보는 중에 감탄사를 내며 보고 나서 씨네21에 실었던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중심 내용만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작동하고 있는 보안프로그램인 세리프(sheriff)의 인증이 필요하다. 세리프(sheriff)는 누구나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개키를 상징한다. (제미있는 것은 보안에서 공개키를 표시할 때 노란색 열쇠로 표현된다. 따라서, 그의 노란색 광채는 공개키의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단, 싸워보아야만 그가 누구인지를 인증할 수 있기 때문에 쿵후대결을 암호해독이라고 볼 수 있다. 쿵후실력으로 인증을 받은 네오(Neo)는 백도어를 통해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게 된다.

그에 반해 키 메이커는 비밀키를 상징한다. 그는 짝이 맞는 키를 만들어서 무수히 많은 비밀키를 들고 다닌다. 아키텍트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네오(Neo)가 키메이커가 만든 키를 문에 꽂을 때 키가 문에 꼭 맞는다는 것을 클로우즈업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비밀키를 이용하여 인증을 받았고 접근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씨네 21, 406호, 독자 비평 중에서)

 



<매트릭스>에 나타난 기독교적 메타포

하지만, <매트릭스>에 가장 큰 호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 이 영화가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하부구조는 기독교적인 은유와 상징에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99년에 첫 편이 나오고나서 <딴지일보>의 총수로 있는 김어준이 쓴 기사에 많은 내용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최근에 <taking the red pill>에 실린 글 중에서 하버드 대학 신학대학원 출신의 Paul Fontana의 글에 보다 잘 드러나 있어서 이들의 글들을 참고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어떤 건물의 ‘303호실’에서 통신을 주고받는 트리니티로부터 시작된다. 트리니티(Trinity)는 성삼위일체를 가리키는 신학적 용어이며 실제로 이 트리니티라는 여주인공은 네오가 자신이 그(the One)임을 발견하는 데에 큰 영향력을 주는 인물이다. 주인공 네오가 살고 있던 방은 101호실로 나중에 네오가 스미스 요원의 총에 맞고 숨지는 방의 번호는 303이다. 결국 그가 스미스 요원의 총에 맞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방의 번호가 303호임은 트리니티의 삼위일체와 연관이 있는 셈이다.

네오는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인물로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가며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의 해커로 이중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 앤더슨은 “앤드류의 아들”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앤드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안드레아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풀이하자면 “사람의 아들”, 즉 “인자”라는 기독교적인 메시아로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토마스는 예수의 제자 중 “의심 많은 도마”를 의미하며 영화 속에서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모피어스가 생각하는 “the One”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름에서 유래하는 많은 글들이 나와 있으나, 검증된 것은 아니며 때로 황당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여기에 언급하는 명칭들은 그 중에서 개연성이 높은 것들을 주로 사용한다)

네오의 의미는 “새로움”이라는 의미이며 그는 자신이 세상을 매트릭스 세계 안에서 구원할 구세주이며 메시아라고 믿는 모피어스 무리들에 의해 훈련되고 결국은 자신이 그임을 확증하게 된다. 네오가 메시아,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라는 암시는 영화의 초반에도 나오는데 그에게 불법 프로그램을 사려는 초이라는 인물이 프로그램을 받으면서, “Hallelujah. You're my savior, man. My own personal Jesus Christ.”라고 말한다. 김어준은 이런 류의 대화에서 굳이 기독교적인 표현을 쓴 점에 착안하여, 대화 시 쓰는 흔한 욕설대신 이러한 종교적인 표현을 쓴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설명한다. 게다가 네오가 초이에게 주의를 주자 초이가 대답하길, “알아. 이 일은 없었던 일인거야, 그리고 난 너를 모르는 거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대목은 자신이 병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는 예수의 말과 일치한다.

네오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미스 요원에게 살해되었다가 트리니티의 키스 이후에 다시 살아나며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수퍼맨처럼 하늘을 날아 오르면서 끝이 나게 되는데, 김어준이 지적한 대로 이는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상징이 아니면 너무나 유치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모피어스나 다른 멤버들도 예수의 제자들처럼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것을 예상치 못했다는 점이 복음서와 일치한다.

네오를 매트릭스 세계에서 구하는 모피어스라는 인물은 “꿈의 신”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존재다. 모피어스는 영화 전반에 걸쳐 “세례 요한”을 상징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김어준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세례 요한은 예수 이전에, 인간을 구원할 예수의 등장을 광야에서 기다리며 예수의 길을 예비한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고 나서야 하여 비로소 예수로서의 '공적' 활동을 시작한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마가복음 1:3-4)
모피어스는 평생을 매트릭스(광야)에서 '그'(the One - 구세주, 네오)의 등장을 기다리며, 인간을 구원할 '그'가 갈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I've spent my entire life looking for you.’(모피어스가 네오를 만나서 하는 말-필자 주)
또한 매트릭스의 인간배양 인큐베이터에서 빠져 나와 '물'에 빠진 후에야 네오는 '그'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딴지일보, “매트릭스 짝퉁 감상법”, 김어준)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도 모피어스는 예언을 신봉하는 선지자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며 자이온(Zion)에서 백성들에게 기도하는 장면에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모습에 가까운 이미지를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주인공들 외에도 주변 인물들 중에서도 기독교적인 냄새들이 강하게 배어있는 이들이 있다.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도저와 탱크는 형제로 설정이 되어 있으며 반란군 전체의 수가 겨우 일곱인데 그 중 둘이 굳이 형제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들어볼 때 예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서로 형제임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모피어스가 깨어난 네오에게 멤버들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Tank and his big brother, Dozer”라고 소개하는 점이 그러한 심증을 굳히게 한다. 또한 사이퍼(Cypher)는 은 30냥에 예수를 판 '유다'처럼 겨우 스테이크 식사 한 끼에 조직을 배신하는 존재로 나오는데 요원들을 보면 무조건 도망을 쳐야하는 네오쪽 전력을 감안할 때 내부 배신자가 필수적인 설정이 아니었다는 것이 김어준의 설명이다.

Paul Fontana는 사이퍼와 네오가 함께 술 마시는 장면과 최후의 만찬에서 가롯유다가 배신을 하는 장면을 대조하여본다.

“사이퍼와 네오 식의 최후의 만찬은 둘이 밀주를 마시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장면에 이어 바로 배신자가 누구인지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곧 사이퍼가 스미스 요원을 만나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네오는 가솔린 맛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사어퍼가 건네준 술을 마신다. 이 장면은 예수의 예언적인 말을 상기시킨다. “이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요18:11)”

(폴 폰타나, “매트릭스에 신은 있는가”, 235쪽)

마지막으로 반란군이 타고 있는 우주선의 이름은 네뷰카네자르이며 이는 구약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과 일치한다. 느부갓네살 왕은 신상에 대한 꿈은 꾼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꿈은 메시아가 열국을 다스리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꿈을 담고 있는 네뷰카네자르 호는 매트릭스의 스토리라인과 일치한다. 또한 그 우주선을 지휘하는 모피어스라는 이름 또한 “꿈의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던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네뷰카네자르 호의 모델 번호가 Mark 3-11이다. 이는 마가복음 3장 11절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구절은 “더러는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이다. 결국 이 영화에 쓰이는 상징과 은유의 본질은 메시아 사상인 셈이다. 그리고 남겨진 인간의 도시이자, 매트릭스와의 전쟁이 끝나면 축제가 벌어질 곳이 '자이온'(Zion)이라고 불리며 이는 기독교적이자 유대교의 하부구조인 시오니즘과 일치한다. (“The last human city. If the war was over tomorrow, Zion is where the party would be”)

무엇보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믿음”이라는 키워드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이다. 네오는 처음에 진리를 지식적으로 이해만 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믿기 시작하고 결국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궁극적인 예언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이 <매트릭스> 전편의 내용이었다. 또한 개인적인 추측이기는 하지만,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네오는 6번째로 아키텍트를 찾아온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가 아키텍트를 만났을 때, 아키텍트는 이전에 자신을 찾아온 이들과는 다른 요소가 네오에게서 감지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라는 또 다른 불규칙성이라고 설명한다. 이전까지 아키텍트를 찾아온 the One들에게는 자신이 그, 즉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시온을 회복하리라는 소망도 있었지만 그것에 더하여 네오에게서 보여지는 또 다른 불규칙성인 “사랑”이 메시아로서 가진 속성 중 가장 큰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3편에서 네오가 시온을 구하게 되는 식으로 결말을 짓게 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이러한 네오의 구별된 불규칙성은 자연스럽게 고린도전서를 떠올리게 만듦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그리고 그것은 요한 서신서를 비롯한 성경 전반에 드러난 기독교의 본질이기도 하다.


 


<매트릭스>보다 못한 복음주의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매트릭스>는 단순히 흥행을 달리는 헐리우드 액션영화라기 보다는 다양한 은유와 상징이 녹아있는 이른바 ‘철학하는 영화’이며 그 메타포의 중심에는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워쇼스키 형제가 기독교에서 중요시하는 문제들에 대한 왜곡되었다거나 가볍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독교적인 기반을 가진 이들도 깊이 있게 돌아보아야 할 성질의 깊이를 그들의 영화를 통해서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연유로 기학연에서도 이런 한낱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가지고서도 세미나를 여는 것이리라.)

위쇼스키 형제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 이런 영화를 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을 영화라는 매개물을 통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고 자신들이 밝혔듯이 고민하는 액션영화의 제작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영화 관람가이자 복음주의자로서 기독교 세계관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나의 시각으로 판단하기에, 이 영화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영화의 곳곳에 그러한 요소들을 배치함으로써 ‘기독교적이라는 것’ 자체가 멸시와 환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대의 사상 및 문화적인 분위기를 변화시키기까지 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렇다면 내가 몸담고 있는 복음주의권은 어떠한가. 세속에 물든 컬트 영화 감독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야 만큼이라도 복음주의권에서는 세상을 제대로 분석하고 파악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오히려 ‘아 프리오리’(a priori)적이라는, 혹은 메타적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세속적 사상과 문화 뒤에 숨어서, 유치하기 그지없는 잣대와 세상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는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 문화를 가위질하고 있는 모습을 더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방향’이 잘못된 것일 뿐 세상의 모든 ‘구조’가 선하다는 생각을 토대로 삼아 복음으로 문화를 변혁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졌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이제는 세상을 파악할 수조차 없는 낡은 틀(framework)로 변하여 결국 자신이 그렇게 비난하던 이원론적인 사고에 눌러앉게 만드는 악행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문제는 돈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실상 헐리우드의 막대한 자본이 그러한 뛰어난 수준의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였다고,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의 ‘맘몬신’에게 절한 이들만이 세련된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변명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헐리우드의 자본조차 워쇼스키 같은 변방의 컬트 영화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보고서 그들의 자본을 거리낌없이 투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반성 거리가 있을 법하다. 게다가 그 시나리오의 메타포는 성경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내가 애정을 갖고 있는 복음주의권이 기독교적 깊이와 세상 문화에서의 창조성, 이 두 마리의 토끼 모두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건가.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이제는 이런 영화를 보면서 ‘뉴에이지 사상’에 젖어있다는 유치찬란한 기사가 복음주의 매체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주하며 도리어 기뻐해야 하는 문제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복음주의권에서 이제까지 세상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사상과 문화에서 창조성을 회복하고 변혁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난 그런 뜨거움 속에서 자라난 마지막 세대가 아니던가. <매트릭스>를 보면서 우리도 이제는 고고한 성에서 이제 그만 내려와야 할 때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해보게 된다. 복음주의의 수혜자를 자처하는 우리는 이제 우리가 그렇게 비난하던 헐리우드 액션영화보다 못하다.**
2003/07/01 00:48 2003/07/01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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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결정이 한국 교회의 희망입니다
: 대형교회 목사님의 아드님들에게 보내는 서신

 
/김용주

  

새벽에 잠에서 깨면 온몸에 한기가 느껴지던 때가 불과 며칠 전인 것 같은데, 이제는 어느덧 따스한 햇살이 그간 움츠렸던 몸과 마음에 온기를 가져다 주는 봄기운을 느낍니다. 이 서신을 님께서 받아보실 즈음에는 이미 녹음(綠陰)이 푸르게 새 생명을 얻을 시기일 것 같습니다. 평안하신지요.

저는 조그만 교회를 다니고 있는 기독 청년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우연히 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제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를 포함한 많은 청년들과 성도들의 가슴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줄 만한 이야기였기에 저는 지금까지도 많은 관련된 이야기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것이 기정사실로 들어날 때마다 저는 님과 님의 아버지의 선의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님의 아버지께서 한국의 교회를 세우는데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흔히 복음주의 1세대라고 지칭하는 데에는 지금의 대형교회로 성장한 몇몇 교회의 목회자 분들의 헌신과 노력이 깃들어 있으며 그러한 토대 위에 세워진 터 위에서 우리가 커왔다는 생각을 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그 분들의 노고에 항상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처음 담임 목회직 세습에 대한 논의가 나왔을 때에도 저는 그 부당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님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좀더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부성애는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본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님께서도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 그리고 효심(孝心)으로 그런 어려운 결정을 하셨을 거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저는 세습이 부적절한 판단과 행동이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서도, 부족한 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내심 불편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렇게 님에게 서신을 띄우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으로는 님이 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저와 성도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위하여 큰 변화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저는 진정으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 사역을 하다 보면 자신의 아들을 학대하고 내버리고,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임의로 자녀들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볼 때, 저도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되어서 그런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진정 누군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지속적인 자기 것의 포기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하지만, 님의 아버지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 분들입니다. 당신 입으로 자주 말하는 '주의 종'입니다.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작정하신 분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의 자식 사랑은 공감은 하지만 용납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분의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인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그 분들의 가르침 아래에서 시장바닥에서 힘겹게 일을 하면서도 예배당을 짓고 하나님께 당신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헌금을 해왔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식의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못 보내는 일이 있어도 교회에 헌금이 부족한 경우에는 기꺼이 자식의 대학 진학을 포기시키고, 집의 전세비를 빼서라도 헌금에 열심을 내었던 일이 다반사였다고 들었습니다.

님의 아버지가 독재 시절에 사회에서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선량한 성도들이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렇게 함으로써 얻은 정부의 도움으로 한국의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성장하게 된 기독교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희망을 잃어가던 시기에 큰 버팀목과 안정을 줄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 억지스레 고개를 끄덕여 보던 적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제가 듣게 된 이야기들은 오히려 저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분들의 그러한 과거지사는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꽃피울 때에 진정 그 당위성이 받아들여지게 됨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재정적인 비리 의혹과 '제왕적 리더쉽'이라고 표현되는, 그리고 인맥을 중심으로 담임 목사직을 세습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간 그분들의 논리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하려던 일말(一抹)의 명분마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님의 아버지의 부정부패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위와 포럼장에 가 보기도 하고 기사로 듣기도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하늘 아래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러한 모습으로 만나야 하는 건지, 처음 시위에 동참하러 가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저는 이내 님의 아버지를 왜곡되게 사랑하는 사역자들의 이상한 행동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비난과 욕설, 그리고 폭력을 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단으로 치부하고 조롱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 사역자 분이 전문적으로 힘을 쓰는 머리짧은 분들을 데려와서 포럼 위원들을 힘으로 진압했을 때에 저의 가슴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분노할 수 없는 채로 절망했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들의 대응에 저는 같은 식으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아래에서 그 분들도 우리가 끝까지 사랑해야 할, 서로의 심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는 한 형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님의 아버지께서 권력과 명예나 재산을 탐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기사들이 나온다 해도 저는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저 사랑하는 아들의 길을 조금만 닦아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은 한국의 천만 성도들의 아버지에게도 동일한 마음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뒤로한채 예배당을 짓는 곳에, 선교를 하겠다는 곳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여진다는 곳에 님의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의 성도들은 자식의 편안을 위해 모아 두었던 재산들을 거리낌 없이 바쳤습니다.

저는 님이 커다란 기업의 사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백억원이 드는 개척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아버지의 교회에서 이제는 목회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장인어른과 40년 사이의 리더쉽을 뒤로한 채, 대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기까지 또한 아버지를 잘못 섬기는 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했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좋건 싫건 그러한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주변의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빨리 안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한편으로는 이해하게 됩니다. 아픔이 지속되면 누구나 힘들어하고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2세대인 님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정말 뵐 수 있다면 무릎을 꿇고라도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님의 청년기의 꿈은 이런 게 아니었지 않습니까. 우리가 처음 복음을 전해듣고 마음에 생겼던 뜨거움은 이런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낮아짐과 그 피흘림. 죄를 위해 자신을 버려야 했던 창조주의 사랑 앞에 우리의 초라함과 죄성을 깊게 뉘우치며 가슴 아파하며 눈물로 회개한 그 날의 우리는 이런 것을 꿈꾼 게 아니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얻게 될 안정된 그 자리에서 님은 젊은 시절의 영적 충만함과 기쁨을 느낄 수 없지 않습니까. 님께서 처음 복음을 접했을 때 가졌던 그 기쁨은 지금의 자리와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시간이었지 않았습니까. 편안한 그 일체를 버리고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찬송하고 기뻐하고 눈물흘리던 님들이 아니었습니까.

저의 아버지도 나이가 드셨습니다. 젊었을 때의 패기와 어릴 때 제가 느꼈던 아버지로서의 강한 인상이 많이 사라지셨고, 마음도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인간적인 부분으로 이해해 드려야 할 일들도 많아졌습니다. 때론 자식을 위해 판단력도 많이 흐려지시는 것 같습니다. 제 아버지도 점점 제가 편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아버지께 저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됩니다.
사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험한 삶을 마쳐갈 즈음에 자식이 고생하지 않을 수 있는 힘과 권력이 내게 있다면 저도 그러한 일에 분명 유혹을 받게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육체의 부모는 님을 맡은 것 뿐이며 우리의 영적 아버지는 때때로 육체의 아버지가 행하는 잘못된 방법들을 원치 않는다는 저의 신앙 때문입니다.

님의 결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님의 교회에서 이야기하듯 님의 교회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돈으로 세워진 예배당 같은 건물이나 재산과 명예가 아닌 성도들 그 자체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님의 아버지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님의 결정에 희망을 걸고 싶습니다. 님은 아직 젊지 않습니까. 지금 님의 학력과 재산과 명예만 가지고도, 아버지의 그러한 방법 없이도 님의 능력은 드러날 수 있지 않습니까. 많은 성도들의 희생과 사랑으로 커온 님들이 아닙니까. 님의 꿈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국 교회에서 ‘주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님의 결정을 통해 그것을 확증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저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그러한 결정으로 인해 님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희망으로 님을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님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정말로 간절히 원합니다. 종국에 역사는 굽어진 허리는 바르게 펴기 마련이며 그러한 올바른 역사의 결정을 내리게 될 때에, 님의 아버지께서도 마음이 누그러질 것이며 결국에는 님을 자랑스러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피를 심장에 이식 받은 형제된 저의 바람입니다.

영육 간에 평안과 건강을 기원하며.
 


김용주 드림.

2003/05/01 00:46 2003/05/0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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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 : 일단 청부론, 청빈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깨끗한 부자는 가능한가, 크리스찬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시작해 볼까요.


동언 : 질문이 영 맘에 들지 않는데요. (웃음)


상국 : 부자와 깨끗함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깨끗한 부자’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서로 정의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만.
 

용 주 : CBS에서 있었던 청부론 관련 토론을 보면서 느낀건데, 가난과 부에 대해 다른 용례로 쓰이는 말들을 주고 받으면서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강한 김목사님이 토론의 주도권을 쥐게 된 거죠. 토론회 이야기는 차후에 더 하기로 하구요. 서로가 생각하는 부와 가난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봐요. 물론, 그러면 청부론, 청빈론 사이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은 해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구요.
 

상국 : 단순히 돈이 많이 있을 수는 있을 거 같아요.
 

용주 : 원론적으로는 돈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상국 : 축재과정을 무시한다면.. 돈이 많은 것을 문제삼고 싶진 않은데요.
 

용주 : 그러면 책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해보도록 하지요. 김동호 목사님이 “부와 가난은 은사다”라고 하시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국 : 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난이 은사같진 않아요. 자발적 가난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은사라고 표현할 수 있을 지 모르겠는데 그냥 가난은 은사로 취급될 수 없는 문제로 보여지는데요.
 

동언 : 부와 가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말인가요?
 

용 주 : 김동호 목사님은 가난과 부가 은사라는 논리를 방언을 예로 드시더군요. 방언은 은사인데 나는 방언을 받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안 주시더라. 방언은 받는 사람도 있고 못받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은사인 거다. 크리스찬으로 부를 얻는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중요한 건 부가 축복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순복음교회의 이른바 “삼박자 구원론”을 의식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구요. CBS에서 그 문제를 놓고 토론도 하셨잖아요. 그리고 가난에 대해서는 가난하게 사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것도 은사이기 때문에 기독인 모두가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동언 : 저는 가난하게 살게된 게 목적의식적으로 청빈하고 검소하고 수도사적인 삶을 살겠다고 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열심히 살아도 마이너스인 사람이 많은 게 현실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상 국 : 깨끗한 부자라는 걸 쓰시게 된 것은 상황적 맥락이 아닐까요? 부자를 옹호하기 위해보다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성도들이 부자되기를 좋아하고, 돈을 번다는 것이 인기가 있는 것이기에,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 수 있고 쓸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쓰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언 :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길 수 있는 욕망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하고 보는 게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성경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상국 : 그러면 다 못 입고 못 사는 걸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잘 되길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고생해서 가난하게 살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기초인 것 같아요.
 

용 주 : 동의하는 부분도 있는데요. <깨끗한 부자>에는 김목사님의 개인적인 예화들이 꽤 있거든요. 김목사님 개인적으로는 금전 사용의 바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책에서 가난이 은사다라고 말한 부분에는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생각해요. 물론 여기에서는 가난이란 말을 구분지을 필요가 있구요. 저는 자신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데 근검절약하는 삶을 사는, 이른 바 “청빈”은 개인의 인격적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실제로 김목사님이 가난을 은사라고 표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면, 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을 못 가서 불치의 병이 아님에도 죽게 된 부모 혹은 자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심한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이 주변에 많은 게 현실이구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은사라고 김목사님이 표현하신 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의 신앙적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상황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봐요. 자본주의 사회,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것이 우리가 노력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체제로 인정해야 하니까 자연히 가진 자의 윤리적 행동 지침으로 책이 흘러가는 것이지요.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최소한 어느 정도 도우라는 식의.
 

동언 :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교회성도 중에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담임목사님이 모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할 것 같은데..
 

용 주 : 그럴 수도 있죠. 아무튼 그래서 전 가난을 좀 구분 지었으면 좋겠어요. 청빈과 구별되는 가난은 구조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적 재난이라고 생각해요.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오는 상황적 재난이라는 거죠. 은사가 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김목사님의 자기 고백에서 드러나는데요. 저는 그것이 선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목사님은 당신의 입으로 자신은 무난하게 목회했고, 새 교회를 개척하면서도 재정적 문제가 별로 없었지만 떳떳하고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그것은 김 목사님이 선택하신 일이라고 봐요. 김목사님이 만약에 수도권에 교회가 넘쳐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골로 가서 목회를 하셨다면 그런 부가 주어지지 않았겠죠. 자신의 여건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부는 은사가 될 수 없다는 거죠. 은사는 주권적인 것이어야 하니까요.
 

상 국 : 전 두 책의 오해의 소지를 좀 줄였으면 하는 생각이거든요. 두 분의 공통점은 극단적 금욕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김교수님의 책도 그렇고 극단적 금욕주의는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제 생각에 두 분의 차이는 김목사님은 부자들과 함께 목회를 하시는 분이고, 김교수님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분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부가 쌓여서 필요 이상으로 향락하고 사치하는 부는 틀렸다라고 말하고 있구요. 오히려 필요한 만큼만 갖고 나머지는 나누어줘야 한다는 관점이라는 거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통하는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초반 동기 문제는 명확하게 차이가 있는데 실제 방법론상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이고. 김목사님은 내 부는 정당하다라고 안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예화나 세부항목들을 보면 사치, 향락하는 부자를 길러낼 것 같진 않잖아요. 동기에 대해서는 이만큼 떼었으면 만족한다, 라는 것이 문제가 될 순 있다고 봐요. 하지만, 부자가 돼서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두 분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동언 : 제가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데, 김영봉 교수님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이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요?
 

용 주 : 저는 기독인이 부자가 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앞서서 부자에 대한 개념도 구분을 지어야 오해의 소지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자를 소득이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 소유가 많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고 봐요. 그런 경우에 고지론적인 의미에서의 부자는 가능해요. 기 독인으로서 기업의 사장이나 회장이 될 수 있겠지요.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것 자체로 정죄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몰론, 과정을 봐야하겠지요. 그리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부의 축적과정이 깨끗하다는 게 문제의 소지가 많긴 해도 원론적으로 소득은 많을 수 있다고 가정하자는 거지요. 반면 소유가 많은 기독인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에요. 김목사님 책에서 소유지향적 인간과 존재지향적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부자가 존재지향적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소득이 높은 사람이 존재지향적일 순 있겠지만 소유가 많은 사람은 이미 소유지향적인 사람이라고 봐야한다는 거죠. 저는 원론적으로는 기독인이 소유가 많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김영봉 교수님의 책과 김동호 목사님의 책을 서로 비교를 좀 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데요. 두 분의 텍스트 자체는 분명 다른 부분이 존재하지만 컨텍스트에서는 만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텍스트 자체로 본다면 김목사님은 지침서 정도의 가벼운 책인 반면, 김교수님은 좀 구체적인 학술서의 분위기가 나요. 저는 김목사님이 저축의 문제나, 원로목사제도에 반대하는 부분, 노후에 대해 목회자들의 예와 그에 대한 주장에는 대체로 동의해요. 책에도 나오지만 한경직 목사님이 깨끗한 빈손이 되실 수 있었던 건 교회가 그만한 대우를 해 주었기 때문이잖아요. 목회자들에게 노후에 교회에서 생활을 책임져 주는, 그런 것들을 바라지 말라는 이야기나 한국 교회의 전반적 행태인 기복신앙을 의식하여 부가 복이 아니라고 말한 부분은 좋게 생각한다는 거죠. 반면에 동의할 수 없는 내용도 있어요. 이를테면, 78쪽에 쓰여있는 ‘성경은 헌금과 구제가 기독인으로서의 최소요구’라는 부분이 그렇구요. 80쪽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수입의 1/10은 십일조로, 1/10은 구제로 내고 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는 깨끗한 자기 소유이니까 자유하라는 부분 말이지요. 책에서 김목사님은 사모님과 자신이 가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절제가 몸에 베여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이러한 말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에요.
 

동 언 : 한 80만원이 소득인 사람에게 8만원은 헌금하고 8만원은 구제하고 나머지 64만원으로 살아라, 이렇게 적용해도 되는건가요? 1억 가진 사람에게 1천만원 헌금하고, 1천만원 구제하고 나머진 내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요.
 

상 국 : 실례를 김목사님에게 갖다 대면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깨끗한 부자가 오해의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부자 아닌 사람이 오히려 감동적인 예화로 많이 나오는데, 부자 얘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 부분도 그렇고. 관심은 부자들에게 있다는 생각인데. 부자들은 정말 돈 쓰지 않잖아요, 사치하는데에만 쓰지 말고 적어도 이만큼은 이웃을 위해 써라, 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
 

동언 : 저는 오히려 그 부분이 아쉽거든요. 김 목사님은 부자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인지..인식의 한계 아닌가 싶은데요.
 

상 국 : 계산법으로 보면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더 좋은 제안을 하는 것 같아요. 필요한 만큼을 쓰고 나머지는 나누는 데 써야 한다고 말하거든요.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차피 생계비가 정해져 있으니 그 나머지는 이웃과 나눠야 한다는 계산법이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동언 : 두 책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계산을 하는지 궁금한데요. 그런 차이가 나는 건..
 

용 주 : <깨끗한 부자>에서 김목사님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소득의 1/7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으로 자유한 마음으로 써도 된다는 부분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구요. 그에 대해 김교수님은 자신의 책에서 청부론자들이 말한 1/7의 나머지 부분도 소유가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에서 김교수님은 자신이 부양하고 있는 식구들의 한 달 생활비를 계산해서 결과적으로 자기 소득보다 마이너스인 사람은 오히려 채워줘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이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동언형제 말처럼 수입이 50만원인데 할머니와 자녀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이 십일조로 5만원, 구제헌금으로 5만원을 내고 나머지 40만원으로 식구를 부양해야 하는가, 혹은 두 부부가 사는데 월급이 1000만원인 사람이 200만원을 헌금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자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잖아요. 김교수님은 청부론의 이런 문제들을 걸러내신 것 같아요. 김목사님의 예화들을 볼 때 김목사님이 부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쓰신 것 같진 않지만 규장 책들에서 보이는 명료한 지침들은 오히려 더 많은 의혹과 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 그리고 좀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깨끗한 부자>를 보면서 느낀 점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중상층 이상이라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었어요.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최소 중산층 이상이고 그런 이유로 부자의 윤리 지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김교수님은 청부론에 대한 비판적이고 보완적인 입지에서 책을 쓰셨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시간적인 차이도 감안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구요.

동언 : 김동호 목사님을 보면서는 현실적으로 가진 자의 종교가 된 마당에 어떤 최선의 방법이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성경이 지향하는 바를 이상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원색적으로 선지자처럼 선포해야 되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저는.
 

태 종 : 김목사님의 문제의식은, 대부분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재물관리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고려하여 본다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거 아닌가요? 사실 교회 입장에서는 십일조 헌금조차 내기 힘들어하는 게 현실이니까..
 

상국 : 그렇죠. 부자가 오히려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동 언 :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과연 ‘깨끗한 부자’를 보고 회심을 할까요? 기본적인 내용을 가지고 책으로 쓰고도 꽤 팔린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책이 김목사님에 대한 감탄사로 귀결되는 한국 교회의 상황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상 국 : 저도 좀 그런 부분이 있었는데요. <깨끗한 부자>에서 불편했던 점은, 불공평한 사회를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적 자선 등으로 덮어 놓겠다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 말이죠.
 

용주 : 김동호 목사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회상은 이상적인 미국사회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상 국 : 그런 느낌이 강하죠. 가난의 문제를 자선으로 해결 할 수는 없잖아요. 이런 식의 해결책은 점점 더 부의 불균형이 심해져서 사회적인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획일적인 공산주의를 싫어한다면 미리미리 부의 재분배에 힘쓰고 가난한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반면에,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보면서는 초반부에 우린 다 가난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균형을 잡아가시는 것 같더라구요. 돈 벌기 위해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서, 회사를 운영한다 라는… 기본적인 사람들의 부에 대한 관심, 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웃에게 쓰고 어떻게 환원할 것인가라는 관심을 가지고 부를 운용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김영봉 교수님의 접근이 사회를 좀 더 아름답게 만들고, 기독교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용 주 : 청부론 관련해서 CBS 토론회가 있었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관련된 이야기도 같이 해보지요. 제가 본 느낌을 말하자면, “깨끗한 부자”라는 말도 구분을 좀 지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깨끗함’을 이야기할 때 저는 개인 윤리와 기업 윤리로 나누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토론회에서 김목사님과 김남호 사장님이 이야기하는 부자는 기업윤리에 관한 이야기로 보였거든요. 저는 인격적 완성과 이웃사랑을 목표로 삼고 있는 개인과 이윤을 내는 것이 목표인 기업은 분명 구분 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얼마는 사회에 환원하고, 얼마는 신앙공동체에 환언한다는 식의 논리는 기업윤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이것을 개인윤리로 생각하면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기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깨끗함, 공정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고 봐요. 김교수님이 자신의 책에서 언급했듯이 현대 사회에서 내가 공정한 경쟁에서 노력하여 얻은 소유에 대해 전적으로 공정하고 깨끗한 과정을 거쳤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하루 8시간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도 하루 20시간을 공부해도 대학에 떨어지는 머리 나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머리 좋은 사람에게 그 경쟁은 공정했고 그가 번 돈에 얼마를 환원하면 깨끗한 삶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거죠. 나아가서 백인사회에서 성장한 사람과 흑인사회에서 성장한 사람, 선진국에서 자란 사람과 아프리카 오지에서 자란 사람, 부유한 가정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과 가난해서 교육은 고사하고 병원도 못 가서 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공정한 경쟁으로 부를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단순히 그가 번 돈의 과정이 공정하다는 것으로 그 돈이 순수하게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동 언 : 저는 성서의 기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웃실천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당연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8/10이 내 것이야 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고백이 되어지는 신앙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교회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사회주의 하자는 거냐는 공격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용 주 : 저는 그런 식의 대응에 아주 짜증나요. 부의 재분배를 얘기하면 무조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로 몰아세우는 논리 말이죠. 부의 재분배나 기회 균등을 얘기하면 “빨갱이”로 몰아 세우는 그런 방식에는 환멸감이 들어요. 토론하지 말자는 얘기잖아요.
 

동언 : 근데 사실 기독교가 좀 사회주의적이지 않나..
 

상국 : 그렇죠, 그런 색채가 있다고 봐요.
 

동언 : 적어도 자본주의에서 가질 수 있는 소유욕에 대해서는 부자청년의 비유에서처럼 근심하며 돌아서는 청년에 대해 김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가 궁금하군요.
 

용 주 : 그 내용이 두 책 모두에 나오는데요. 김교수님은 김동호 목사님이 언급한 욥의 경우는 성경을 통틀어 부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안 되는 사례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대부분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자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고 제자가 되려면 자신의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가 성경 전반적인 메시지라고 말하고 있어요. 반면 김동호 목사님의 경우에는 청빈론자들이 인용하는 부자 청년의 비유가 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지를 펴시더군요. 그 청년의 중심이 물질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라고 한 것일 뿐 다른 이에게는 재산 말고 명예나 자녀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동 언 : 저는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가 오히려 그런 맥락에서 소위 중산층, 기독 중산층이 욕망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금전적 소유욕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부자 청년은 단순히 2000년 전의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전반적으로 적용할 만한 문제라는 생각이구요. 많은 기독인들이 말로는 절제하면서 산다지만 결국은 부자청년의 근심을 늘 안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용 주 : 토론회에서는 김동호 목사님이 논리적으로 잘 말씀하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준비를 충실히 하셨다는 느낌이 든 반면, 고세훈 교수님은, 토론 자체로만 본다면 정말 실망스러웠습니다. 토론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씀도 많이 하였고 그로 인해 뜬구름 잡는 식의 거시적인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김동호 목사님에게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하실 때는 마음이 정말 안 좋았습니다. 김목사님 입장에서 보더라도 <깨끗한 부자>에서 쓰였던 바르지 못한 표현들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은 절충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런 작업이 토론회에서 잘 되지 않은 것 같아요.
 

동언 : 김동호 목사님 책의 원래 제목은 <신앙과 부>였다는 말도 있던데요.
 

상국 : 규장에서 제목을 바꾸는 경우가 있어요. 아주 선정적으로. (모두 웃음)
 

용 주 : 저는 고 교수님이 부가 동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개인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는 논지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김목사님이 세부적인 원칙들이나, 기준을 정해서 그것을 지켜가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을 가리켜서 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에요. 저는 실제로 김목사님이 동안 교회에서 그런 정관을 지속적인 토론과 연구를 거쳐서 만들어 가는 것에 큰 호응을 하고 있거든요. 그거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고 교수님 생각처럼 절대적인 잣대로 낮아짐을 이야기한다면, 동적인 영성에 대한 주의환기가 된다 할지라도 기준 자체가 없다면 개선 여부를 판단할 잣대가 없고 그것은 오히려 상황을 고착화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고 봐요.
 

상 국 : 대부분의 교회는 일단 기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고세훈 교수님 쪽이 김동호 목사님 쪽의 좀 깨끗해 보자는 주장을, 너희도 똑같다라는 주장으로 몰아 붙인 상황이 됐어요. 지금 상황에서라면 같이 가는 게 현명하다고 보이는데. 기복신앙을 꺾은 다음에 우리가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 보자고 나오는 편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구요. 그렇자 않더라도 넌 틀리고 나는 옳다는 측면이 아니라 당신이 말하는 부분은 이런 단점이 있다는 등의 개선점을 찾아가며 같이 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았나,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교회현실을 반영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자인 김영봉 교수나 비판적 서평을 썼던 김종희 대표가 나왔다면 좀더 좋은 토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용 주 : 동의해요. 저는 사실 토론을 보면서는 김동호 목사님이 <깨끗한 부자>보다는 <깨끗한 교회>란 책을 전병욱 목사님이 교회 성공신화적인 얘기를 하듯 쓰셨으면 아주 훌륭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모두 웃음) 물론 그랬으면 규장에서 책이 나오진 않았겠지만.
 

동언 : 자기 교회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단순하진 않을 것 같은데.
 

용 주 :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토론회에서 김남호 사장님과 김동호 목사님은 우리가 가난해진 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시던데 그거 잘못 짚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김남호 사장님은 대뜸 “그러면 얼마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라거나 “부자가 가난해진다고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분은 가난해짐, 청빈한 것을 마치 기업의 회장이 사직을 하고 청소부를 해야 하는가, 뭐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여기에서 부의 개념에 오해가 생긴 거 같아요. 사장이 소득이 많을 수는 있지만, 소유가 많은 게 문제인 거죠. 이 분은 기업 윤리와 개인 윤리를 동일시 하는데 개인은 적법한 경쟁을 통한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니라는 걸 잊은 거죠.
 

상 국 : 사실 저는 토론회를 보면서 내심 “바늘귀”가 의심스러웠어요. 부자들 거 다 뺏어서 혁명하자는 얘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책을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책 내용은 단순히 가난하자는 얘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요.
동언 : 덕분에 규장 책만 더 많이 팔렸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 썼길래 하는 마음으로..
 

용주 : 저는 규장 책은 그렇지 않아도 잘 팔린다고 볼 때 일반 성도들이 <깨끗한 부자>에 뭐라고 써있길래 하며 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는 현상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동언 : 토론하면서 드는 생각은 김목사님이 한국 교회에 대해 그렇게 느끼고 쓰신 거라면 교회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 교회의 윤리가..
 

상국 : 김목사님의 윤리보다 떨어진다고 봐야 해요. 전반적인 한국 교회의 현실이..
 

용 주 : 이제 대충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은데요. 종합적으로 얘길 하자면, 김목사님의 책에는 오해의 소지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CBS 토론회에 기대를 많이 했던 거거든요. 토론회 초반에 김동호 목사님이 용어의 정의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건 맞는 말이에요. 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쓰면서 논리적인 비약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토론 자체가 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고세훈 교수님이 인신공격적인 발언을 한 것 같고. 저는 여기에서는 좀 걱정이 되거든요. 실제로 김동호 목사님이 계신 숭의 교회는 한국교회로 봐서는 정말 파격적인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요. 그러한 과정에서 김동호 목사님은 내외로 힘들어 하신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토론회에서는 서로 절충하고 협력하는 계기가 되어도 모자랄 판국에 어느 정도 실질적인 개혁의 모양새를 만들어 가는 김목사님을 마치 기복신앙이나 삼박자 구원론과 도매급으로 넘기면서 적으로 만드는 태도는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일로 상처를 받으신 것 같구요. 특별히 고 교수님의 경우 개혁연대 계신 분인데, 그렇잖아도 개혁연대가 강경한 느낌을 준다는 교계 보수적 기독인들의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좀더 사려 깊게 행동하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동 언 : ‘깨끗한 부자’에 대한 비판적 글이나 토론이 나오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용주 형제 말처럼 김 목사님의 책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을 수 있을 것 같구요. 오히려 안타까운 것은, 김목사님이 하시는 개혁의 작업들이 있는데 그것을 충실히 감당하기도 벅찬 상황에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려고 토론에 나와서 오히려 손해 본 것은 아닌지 하는 안쓰러움도 생기네요.**


 

** 복상 서울 독자모임은 앞으로 잡지의 모니터링과 병행하여 관심 분야와 이슈가 되는 분야에 관련된 토론을 모임에 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복상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복음과상황> 서울 독자토론모임: 청부론 vs 청빈론 토론

정리: 임정은 자매/ 사진: 권경우 형제

 
2003/01/01 08:17 2003/01/01 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