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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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는 저녁을 먹고나면 대체로
응가를 한다. 그럼 한번에 몰아서
응가 처리도 하고 바로 뒤이어
씻기고 재우면 되서 성하가 응가
마렵다고 하면 혼자말로 "잘됐다"
라고 말하곤 했다.
어제도 성하가 응가마렵다고 하면서
나를 보며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 잘됐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너 땜에 웃는다. 이 귀요미 같으니...!!!
ㅠㅠㅠㅠ

 

2012년 12월 21일

2012/12/21 23:50 2012/12/2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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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진보진영 사람들이 오해하는 (혹은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마치 진보와 보수의 싸움을 20:80, 혹은 1:99로 분리해서 1%의 기득권층과의 대결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 말도 딱히 틀린 건 아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조사결과 1위가 박정희이고 2위가 노무현이였다. (혹 반대일수도 있다) 지금도 박근혜는 나라 국민의 절반이 그녀를 지지한다. 1%의 기득권층, 그녀의 집권으로 인해 실질적 혜택을 보는 이들 외에도 50배에 준하는 지지자가 내 주변에 절반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이해하는 그분들의 논리는 이렇다. "정치나 경제와 같은 나라의 큰 일은 해본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국가가 말리는 일을 굳이 왜 하고 사냐. 나는 평생을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착실하게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내가 스스로에 떳떳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면 그게 애국이요 바른 정치 아니겠냐."

 

"맨날 공부도 안하고 일도 안 하고 거리에 나가서 기물이나 부수고 경찰에 대항하고 국가나 기업을 위태롭게 만드는 게 더 위험하다. 동남아시아와 남미의 못사는 나라들을 봐라. 우리는 항상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끊임없는 수출과 교류를 통해 유지되는 나라다. 자원은 없고 인구가 많으니 한사람 한사람이 경쟁력을 쌓으려고 노력이나 할 것이지 왜 되지도 않는 국가 권력에 맞서려고 하느냐..."

 

사실 상 50%에 육박하는 보수편향적 국민들의 논리는 머리 속에서 명제나 수학, 말재주로 설득되는 류의 것이 아니다. 그 논리는 그들의 삶이자 일상이며 신념이며 철학이다. 그들에게 보수를 냉소하고 "개새끼, 씹새끼" 비난할 때 국민의 절반은 정서적으로 마치 자신의 삶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주로 젊은 세대보다는 나이든 세대들일 것이다.)

 

이 50%의 국민들은 기득권층이 뭔가를 베풀지 않아도 국가의 존재, 대기업의 존재, 판검사, 의사, 국회의원등 그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 그저 그 자리에 존재만 해도 자부심을 느끼는 부류다. 기득권층은 매체와 스포츠, 오락 사업에 적절한 정치적 암시만 줘도 그들은 자식들에게까지 보수적 가치관을 대물림한다. 자식이 국가에 의해 희생되거나 가족이 기업에서 해고 또는 질병을 얻거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극도의 빈곤과 소외를 경험하지 않는 한.

 

한때 나는 논리에 미쳐 있었다. 텍스트는 걸리면 무조건 해체시키는 게 논객의 자질? 실력이라 여기던 청년기를 보냈다. 말빨, 글빨 좋은 사람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매순간 주어진 텍스트는 검증하고 해체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은 고된 일상을 몸뚱이로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논리를 내세울 때 '분노의 대가리굴리기(논리)'로만 반응하는 것에 회의감을 갖곤 한다.

 

내 부모세대와 내 직장 선후배, 내 교회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 50%의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래. 나는 결코 1%와의 논리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게 내 요즘의 고민이다.

 

 

2012년 12월 17일

2012/12/17 21:57 2012/12/17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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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대첩으로 시끄러웠던 오늘.


나는 부산 부모님 집에 내려가서 그간 어머니가 사용하지 못하던 컴퓨터와 TV, 휴대폰 등을 설치했다. 신혼 때 인터넷용으로 조립해드린 컴퓨터가 드디어 맛이 갔다. 집에와서 미리 배송한 컴퓨터를 설치하고 TV 설정도 고치고 휴대폰도 업데이트에 어머니가 원하시는 앱들을 깔아드렸더니 얼추 하루가 간다. 페북과 인터넷 뉴스에서는 마지막 선거 유세로 뜨거운 오늘. 어머니의 IT기기 설치기사로 하루를 보낸 게 나는 나름 흡족하다. 저녁 아내와 통화했더니 '설치기사님, 설치 다 했으면 내일 빨리 본사로 복귀하라'고 농담을 막 던졌다.ㅋㅋ 왠지 훈훈한 밤이다.


p.s) 나도 그랬지만 오늘은 아내도 광화문에 많이 가고 싶었을텐데 주말을 육아로 소진한 아내에게 감사를. (어제오늘 상당히 멘붕일텐데.ㅋㅋㅋㅋ)

 

 

2012년 12월 15일

2012/12/15 23:02 2012/12/1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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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초기에는 일상적으로 paperless의 삶이 다소 불편했는데 (태블릿으로 보기, 찾기, 관리) 한 1년 정도 지나고 보니 충분히 그 가능성 타진에 검증이 된 터.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책들을 다 전자문서화 하고 있다. 박스단위로 나간 책들은 전자책으로 척척척 변환되고 만난 사람들의 명함도 스캔본으로 에버노트에 강의나 회의는 녹음파일로 정리되고 있다. 다소 의외인 것은 초기에 기대했던 ePub 형식의 전자책은 1년간 써보니 참 불편한 부분이 많다. 특히 라이센스 문제로 인한 보안정책이 개인의 편리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고나 할까. 결국 종이책 값+스캔 비용을 더 주더라도 스캔북의 형태로 책을 받는 것이 더 유익해보인다. 그나저나 누가(환경론자 오어 썸원) 계산 좀 해주면 좋겠다. 아이패드를 생산하여 문서를 전자화해서 볼 때와 종이책을 생산할 때 얼마나 생태계 측면에서 환경 오염의 차이가 나는지 말이다. 혹은 아이패드 몇년을 써야 생태계를 더 망치는 선택이 되지 않는지 같은 것... 그런 게 나오면 개념소비자들은 자기 디지털기기의 교체 주기에 대한 경각심을 더 갖지 않을지.

2012년 12월 12일

2012/12/12 23:25 2012/12/12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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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년 전까지 나는 절대적으로 독서량이 나보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자격지심 내지는 열등감 같은 게 있었다. 게다가 교수나 신학자 등등 좀더 학구적인 어떤 직함을 달고 있으면 더더욱 그런 열등감이 가중되곤 했다. 내 기억으로 2008년 정도까지 나는 내 열등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른바 '비전문가'의 설움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은 마치 검의 양날 같아서 내 지식이 비교우위에 속하면 뭔가 상대를 대할 때 여유(이를테면 하수를 대할 때의 어떤 느슨함 같은)가 생기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대체로 내가 부러움을 느꼈던 사람들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학파의 사람들이었다. 어찌나 독서량이 넓고 깊은지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귀를 쫑끗 세우고 그들의 독서편력을, 그 저자와 그 유명한 책 리스트를 어서 섭렵해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던 시절도 있었다. 허나 2004년에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런 욕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도저히 회사생활을 하면서 공부가 업인 사람들을 쫓아갈 수 없었고 나는 어느 순간 그들과 보조를 맞추려던 노력을 접고 먼발치에서 그들의 지식 달음질을 쳐다봐야만 했다.

7-8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 돌아보면 나는 가끔 내가 왜 그렇게 지식 습득에 연연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방대한 독서가 세상을 바꾸기는 커녕 한사람 조차 바꾸지 못하더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례로 10년 전에도 특정 저자와 책들을 신봉하던 부류의 사람들은 지금도 비슷한 이야기를 인용하곤 한다. 더 나은 번역과 더 명확한 저자의 이해, 더 넓고 깊어진 지식으로 무장했지만 그 페이스를 벗어난 내 입장에서 그들의 진보는 때론 '고상한 기호', 좀더 나쁘게 말해서 '머리쓰는 취미생활'같아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일정 수준의 독서를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사실상 책을 통해 얻는 것들이 많다. 책을 대하는 내 태도는 그간 자주 양가감정을 수반하곤 했다. 최근에야 책을 대하는 내 태도가 조금은 편안하고도 확고해졌다. 독서는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삶의 가치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독서에 바친다. 자신의 입이 특정 저자의 입이 되고 그 저자의 논리를 십분 이해하는 것에 전율한다. 아쉽게도 나는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이해라 해도 일종의 삶의 낭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로고스의 육화가 아니라 육체의 로고스화. 의외로 육체의 로고스화를 실천하는 이들이 많다.

20대에 나는 스폰지가 잉크를 빨아들이듯 (파형으로서의 교육에 앞서) 주형, 주입 그 자체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비평에 앞서 그 담론 자체에 깊이 침잠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다. 섣부른 반항심으로 정작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헛발질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 싶었다. 허나 30대를 지나 40대를 향해 달려가는 시기에도 10, 20대의 뇌처럼 저자의 로고스화를 꿈꾼다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로고스가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할 거라 생각했던 게 아니던가. 삶에서 더 진일보한 걸음을 걷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며 정리된 생각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니던가.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게 없어서일까... 그 진정성이 훼손되고 있다.

결국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그 사람의 어떤 진정성을 대변한다고 볼 때 '독서'라는 행위로 대변되는 지식의 분량은 이제 내겐 그다지 '이슈'가 되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저명한 저자의 컬렉션을 모으고 그것을 독해하는 기호와 애로영화들을 수집하고 여배우들의 특징을 기똥차게 표현하는 두 부류 사람들의 차이를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텍스트 안에서만 놀 거라면 둘 다 내가 보기엔 '덕후'일 뿐이다.

2012년 12월 3일
2012/12/03 21:56 2012/12/03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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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간단히 먹고 인터넷을 잠시 보다가
빨래를 돌리고 널고 있는 중.
성하는 옆에서 혼자 재잘거리며 내 주위를 맴돌며 놀고 있다.
조규찬 음악을 틀어놓고 집안일을 어슬렁 어슬렁...
성하는 쫑알쫑알 장난감을 들고 따라다니는 모습이.^^

나른한 오후. 살짝 행.복.하.다.

 

 

2012년 12월 1일

2012/12/01 23:49 2012/12/0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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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12쪽)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이상 면역학적 주제가 아니다. (13쪽)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이질성은 탈경계과정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그것은 경계선,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과정을 가로막는다.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 상태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면역학적 관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이질성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16쪽)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폭력 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되지 않는다. (20쪽)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은 바이러스성 폭력과 같이 여전히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르며, 시스템에 적대적인 특이한 개별자나 이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24쪽)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28쪽)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31쪽)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attention)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35쪽)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 기계로 변신한다. (58쪽)

(한병철, "피로 사회" 중에서)

2012/12/01 22:55 2012/12/01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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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자주 대화하는 부분인데, 실내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배우는 게 많다. 이른바 '몰입'이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학습한다. 재미가 있으면 친구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30분이 넘도록 집중력을 가지고 특정한 관찰과 행동을 지속한다.
 
이때 가장 큰 방해꾼은 부모다. 부모의 놀이룰과 아이의 놀이룰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가 몰입 단계에 들어가기 직전 부모들의 개입이 시작된다. "OO야, 그거 입에 물면 안돼", "OO야 소리지르지마, 시끄러워.", "OO야, 일어나 바닥 더러워"
 
함께 아이들이 노는 순간에도 부모들은 적극적으로 아이들 사이를 중재한다. "OO야 빨리 장난감 친구에게 줘. 니가 형이잖아", "OO야 저기 동생이랑 같이 블럭 쌓아봐" 멀리서 보고 있으면 마치 부모가
 놀이터에서 지향하는 놀이방식의 아바타 수준으로 아이는 자율성을 잃고 불안해하며 자주 노는 중간중간에 부모의 눈치를 본다.
 
부모는 아이 곁에 아예 붙어 앉아서 놀이지침을 교육시킨다. "OO야 우리 블럭으로 집을 만들어볼까" 부모는 아이에게 집을 만들어주고 자동차를 만들어준다. 아이는 부모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 작품을 가지고 잠시 놀다가 이내 싫증을 낸다. 하지만 자신이 자발적으로 놀기엔 왠지 불안해졌다.

결국 아이는 엄마에게 놀이 의존을 시작한다. 엄마 이거해줘, 집 만들어줘, 여기에 올려줘, 나는 잘 못하니까 엄마가 이걸 해줘... 부모는 자기 없인 아이가 노는 것도 혼자 잘 못한다고 한숨을 내쉰다. 내 시간 없이 아이에게 올인한다고 주변 부모들과 하소연을 간간이 해댄다. 그러다 이내 자기 아이를 보고 소리친다. "OO야 그렇게 만들면 안돼. 집이 무너지잖아"
 
2-3세 영유아를 키우는 부모나 17-18세 입시생을 키우는 부모나 어떤 길을 만들어놓고 아이를 그 길로 걷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부모들은 아주 초기단계부터 아이의 자발성을 왜곡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걱정스러운 상황이 있다. 어릴수록 질병에 노출되기 쉽다. 그렇다고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온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아이를 물리적인 힘으로 일으켜 세우고 항균티슈로 닦은 장난감만을 고상하게 가지고 놀 수는 없다. 아이 입장에서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하나의 역할극 내지는 무선조종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는 은연 중에 아이의 몰입에 의한 학습 발달을 방해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듯 하다.

물론 그 반대의 극단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몇몇 부모들은 아이를 놀이터에 던져 놓고 자신은 스마트폰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내가 종종 그렇다.ㅠㅠ) 때때로 부모는 개입하지 않음과 방치를 오해한다.

개입하지 않는 순간에도 부모는 효과적으로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다. 부모는 아이의 세밀한 행동들을 관찰해야 한다. 아이는 도약하기 직전의 선수나 잠시 웅크린 개구리와 같다. 그러므로 그 아이의 작은 몸짓, 표정, 손길, 말 한마디들을 읽으면서 아이의 독특한 성격과 욕망, 성장의 속도를 유추할 수 있다.

때때로 적당한 시점에서의 부모의 개입은 벽을 향해 계속 걸어가는 모터 로봇을 돌려놓은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작은 매듭에 걸려 헝클어진 실의 한쪽 끝을 풀어주면 긴 실타래가 한번에 풀리는 것처럼 아이는 더 높게 멀리 뛸 수 있다.

잦은 개입, 혹은 완전한 방치.. 그것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두기, 적당한 개입, 무엇보다 좋은 관찰자로서 부모가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이의 몰입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직 더 배울 것이 많겠지만 현재로서 내가 느끼는 부모의 자리는 그렇다.

2012/10/30 23:30 2012/10/3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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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성하와 자는데 갑자기 성하가 막 울었다.

깨서 말하길 "꿈나라에서 미라클포스에 나오는 괴물들이 나를 공격헤서 내가 죽었어."

(코빨개지며 눈물이 그렁그렁..ㅋㅋ)

나는 일단 어디가 이픈게 아님을 알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 그랬구나. 이제 괜찮아. 아빠가 옆에 있잖아...했다.

그러자 성하는 나를 등지고 누우면서 한마디 더했다.

"이제 다시는 꿈나라에는 안 갈거야." ㅋㅋㅋㅋㅋㅋㅋ (자다가 완전 빵터짐)

 

 

'12. 10. 29

2012/10/29 23:48 2012/10/29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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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실내놀이터에 아빠랑 같이 나온 아이들이 많다.
엄마도 함께 왔다가 불같이 화를 내고 사라지는 풍경도 자주 연출.;;;
한주간 얼마나 육아에 시달렸는지 얼굴에 다 써있다.ㅠㅠ
아빠들은...
내일 출근인데 제대로 쉬지 못한 멍한 모습.
그래도 자기 아이들은 예쁜지... 정성껏 놀아주고 있다.^^
애잔하고도 훈훈한 놀이터 풍경이여.

 

'12. 10. 28.

2012/10/28 23:47 2012/10/28 2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