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제이언니의 아빠일기' 열두 번의 연재 기사를 쓰고 나니 아쉽게도 더 이상 풀어낼 만한 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자들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매일 쓸 이야기가 넘쳐난다는데,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떤 혜안을 얻고 그것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일은 내게 쉽지 않았다(우리 가족과 내 아이가 즐길 만한 이야기들은 더러 있지만 공유하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재기사의 시작은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여기게 된 굵직한 몇몇 사건들에 기인했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남자와 여자는 여러 가지로 사소한 불평등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 아이들의 번호는 1, 2, 3번으로 시작했지만 여자애들의 번호는 41, 42, 43번이었다. TV에서 보던 재미있는 드라마 속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계급은 분명했다. 하다못해 우리말 더빙이 된 외국 드라마에서도 남편은 반말을 했지만 아내는 존댓말을 썼다. 나는 이런 상황이 글로벌 표준인 줄 알았다.

되돌아 보면 어릴 적 우리 부모님도 그렇지만 집집마다 부부싸움이 심했고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도 많았는데,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을 도리어 남편이 좋은 말로 돌려보내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부부문제는 가정사이니 가장인 남자가 잘 해결하겠다고 몇 마디만 건네면 경찰은 잘 알았다는 듯, 혹은 귀찮게 이런 일로 오게 하지 말라는 듯 무심한 발걸음을 돌렸다.

여자는 짐짝처럼 남편의 강한 손에 붙잡힌 채로 집안으로 끌려들어 갔고, 나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생각이 어슴푸레 들었다. 따지고 보면 대놓고 '남편(남자)은 하늘'이라는 가부장제도 교육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체화할 수 있는 많은 암시들이 그 시절에는 참 많았던 것 같다.

친누나와 나 사이의 차별도 꽤 심각했다. 나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내가 아들이란 사실에 대해, 자라면서 내가 누나보다 많은 혜택을 입은 것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다. 내가 누나를 해코지한 건 없으므로 사적으로 미안한 건 없지만, 자라면서 아들로서 받은 혜택을 누나는 덜 받았거나 거의 받지 못했다. 이런 것에 대한 찜찜함은 참 오래갔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수가 남녀차별을 경험했음을 깨닫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청년기 시절, 남녀문제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읽어낼 만한 그릇이 못 됐다. 여성은 '연애'의 대상 혹은 어떤 '공략'의 대상이었지 여성문제 자체가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한 어떤 에티켓이나 여성 심리가 궁금했지 성평등 이슈나 가부장제 속 여성의 인권 등의 개념은 없었다. 그보다는 더 진지하고 중요한(혹은 중요하다고 알려진) 정치 이슈나 내 개인적인 학업, 취업 이슈가 더 중요했던 시기였다. 또, 군대도 가야 했으므로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2년 넘게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 자체도 은근히 불만스러웠다.

시간은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게 되면서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자주 보던 백마 탄 기사 '코스프레'를 하게 됐다. 책에서 읽었거나 어디선가 주워들은 로맨스의 정석대로 여자친구에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게 해주겠다' 따위의 참으로 아름다운 동화 같은 약속을 했다.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100일, 200일을 지나 프러포즈도 하고 양가 부모님도 잘 설득하고, 그렇게 내 연애는 아름답게 결혼으로 골인하는 듯했다.


여성에 보수적이었던 내가 변한 결정적 계기는 '결혼'

하지만 결혼이 답 없는 대서사극의 시작이었음을 점점 깨닫게 됐다(여기서부터가 개략적으로나마, 내가 연재글에서 풀어내던 이야기의 시작인 셈이다). 글에서 자주 언급했듯 결혼 이후 나는 완전히 '카오스 상태'를 경험했다. 물론 그 카오스, 혼돈 상태라는 게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30년간 쌓아온 어떤 나만의 체계가 무너지는 느낌, 내가 경험해온 체계로는 이 상황들을 합리적으로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혼돈,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빨간약을 먹고 깨어난 새로운 세상과의 대면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적어도 나 잘난 맛에 '시크'하게 살았던 과거는 그렇게 갔다.

아내는 자주 질문했다. 왜 명절에 자기 집에는 갈 수가 없는지, 처가에 가면 김 서방은 쉬고 시댁에 가면 며느리는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아이가 태어나면 왜 엄마의 성은 쓸 수 없는지, 돌림자는 꼭 넣어야 하는지, 호주는 왜 남자여야 하는지, 왜 남자는 육아휴직을 하지 않는지, 일상적으로도 왜 주말에도 남자는 아이를 전담할 수 없는지, 여성은 왜 임신 기간 동안 소화제나 두통약 하나도 제대로 못 먹고 맥주도 한잔 할 수 없는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그냥 대답하기 싫었다. 내 삶도 충분히 피곤했으므로. 스물아홉의 나이에 취업을 해서 이제 막 직장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그저 가정과 회사 양쪽에서 샌드위치로 압박 받는 불쌍한 남자가 된 느낌을 받았다. 부모와는 분리되는 게 마땅하나, 누군가에게는 의지하고 싶은 미성숙한 남자아이로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억울한 정서도 있었다.

게다가 성평등 이슈는 처음부터 남성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대부분의 남성에게 있어 여성은 내가 책임질 대상, 돌봐줘야 할 화분 같은 존재로서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이지 나와 어깨를 맞대고 경쟁하고 팀워크를 맞춰가야 할 위치로 올라올 때는 더 이상 배려의 대상일 수 없다.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대하는 이중적 태도가 이런 측면에서 기인한다. 어리바리한 신입 여사원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동네 오빠 혹은 삼촌 같은 모습이지만, 자신과 진급이나 고과를 두고 경쟁하게 되는 '커리어우먼'(이 단어 참 묘하다)들에게는 뒷담화가 장난이 아니다.

역차별을 운운하거나 '상사에게 꼬리를 친다' 등의 듣기조차 불쾌한 말까지 내뱉으며 내면의 부정적 정서들을 가감 없이 쏟아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성은 수동적이면서도 저자세이고, 얌전하고, 가부장제에 잘 적응하며 출산·육아의 천명을 군말 없이 잘 수행하는 '현명함', '현숙함'이 전제돼야 나이가 들어도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는다. 그에 더해서 일도 잘하면 사회가 준남성으로 받아줄 용의가 있다.

아마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아내와 일상을 살면서 이 모든 담론들을 체험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성 문제에 관해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을 것이다. 더 섬뜩한 건,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진보적이고 개화된 남성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았을 것이라는 점.

왜냐하면 나는 담론으로서의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생각들에 대해서는 항상 열려있고, 새로운 지식들을 열정적으로 습득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삶과 별개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함에 있어 나는 관대했다. 하지만 내 일상에 들어온 부조리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 나는 회피하고 싶었고, 불편했고, 때로는 힘들었다. 하지만 자주 '내가 아내라면', '내가 여자라면'이라는 생각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내는 남편을 더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모든 갈등의 해결점은 '이해'가 시작이라 생각한다. 물론 대다수의 가정학교·아빠학교에서는 '이해'를 종착역으로 가르친다. 아내를 이해만 해줘도 아내는 정서적으로 만족해서, 그 결과 가부장제가 유지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혹은 강요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남편을 '족칠' 필요는 없다. 이해가 되면 남자들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을 찾는 지점에서 아내는 많은 이야기들로 남편을 불편하게 만들고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 어차피 부부관계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부부가 다양한 방향으로 해결책을 내 자신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전제가 남편과 아내가 동등한 주체, 평등한 위치라면 그 개별 삶의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건강하게 발전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나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그 작은 소망, 그 사소한 시발점으로부터 주변 관계의 다발이 줄줄 엮여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관계의 다발들이 풀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로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그 사회가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의 담론 곳곳에서 고질적인 문제들을 일으킨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됐다.

'제이언니의 아빠일기'를 통해 언니(여성)의 시각으로 아빠(부모)의 삶을 솔직하게 풀어내고 싶었다. 작게는 출산·육아를 둘러싼 소소한 일상에서 시작해 남녀 성평등, 가부장제도, 나아가 자녀에게 '올인'하는 가족구조의 미래 등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다. 거창한 욕심과는 달리 경험한 이상의 것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아 여기서 연재를 덮는다. 읽어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2013/12/09 23:15 2013/12/09 23:15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놀이터에서 아이가 놀고 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두 살 많은 다른 아이가 감옥놀이를 한다며 아이의 멱살을 잡고 끌고 다니다가 좁은 공간에 가둬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대체로 놀이터에서 또래 애들끼리 놀 때는 개입을 안 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심하다 싶어서 그 아이에게 동생들을 가둬두는 놀이는 하지 말라고 훈계 아닌 훈계를 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아이를 괴롭히는 상황을 목격하니 눈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잠시나마 '이 자식이 어디서…'라는 생각과 함께 그 아이에게 똑같이 멱살을 잡고 끌어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자기가 괴롭힌 아이의 아빠가 나타나 훈계를 해댄 탓에 당황했던지 그 아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하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갔다.

동네 장난꾸러기를 '악의 축'으로 만들진 않았나요?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가는 일이 일상인지라 그 다음부터는 그 아이가 눈에 자주 들어왔다. 그 아이는 또래 동생들보다 몸집도 커서 매번 같이 놀다보면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형국이 되곤 했다.

가만히 보니 이 아이는 동생들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곳에서 놀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으나, 동생들을 돌보기에는 아직 어렸다. 게다가 동생들 또래 애들과 놀기에는 너무 차이가 나서 종종 문제를 일으켰고, 이미 동네에서는 다른 부모들의 경계 대상이 되곤 했다. 사정을 알고 나서는 그 아이에게 먼저 말도 걸고 인사도 하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자연히 그 아이도 나와 내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때론 친동생들과 더불어 내 아이를 챙겨주기까지 했다(역시 아이들이란!).

이것도 투사라면 투사라고 해야 하나. 그 아이를 보면서 내 유년기·청소년기의 어두운 기억들을 떠올려 봤다. 그리고 사회에서, 작게는 한 마을에서 쉽게 유년기의 아이를 향해 규정짓는 선입관들이 그 아이를 고립시키고 더 문제아로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보다 더 어른들의 눈치를 보면서 크는 요즘 아이들의 성숙한 표정들을 대할 때마다 무슨 이유인지 마음 한편이 못내 불편하기만 하다.

우리는 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아이를 벌써부터 '악의 축'으로 규정짓는 건 아닌지. 내 아이에게 해대는 못된 행동에 대해 그대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고 보니, 이것이 부시 정권의 반테러 정책과 다를 게 없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허허.


내 아이의 행복? 다른 아이에게서도 나온다

흥미롭게도 내 아이도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에게 때때로 과격한 행동을 한다. 불합리한 놀이의 룰을 강요해서 동네의 다른 동생들을 힘들게 만들면서 은근히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동생들을 때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가서 말리기도 하지만 놀이터의 권력구도에서 내 아이가 '갑'일 때는, 솔직히 고백하긴 창피하지만 '애들이 같이 놀다보면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는 거지'라는 다소 여유로운 마음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놀이터에서 아이들끼리 싸울 때 피해를 입은 쪽의 부모가 서운함이 커져서 생기는 갈등을 종종 본다. 제3자의 입장에서 양쪽 부모의 스탠스가 모두 나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런 걸 보면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서 부모는 다 자기 새끼를 감싸고 도는 원초적 본능이 있는 것도 같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말 중에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란 용어가 유행이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성장을 담보하는 어떤 방향을 지칭하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OO 생태계'라는 말도 비슷한 의미로 자주 쓰이고 있는데 어떤 사안·전략·개별 주체 하나만 잘 돼서는 큰 효과를 내기 힘들고, 근본적으로는 그 주변 인프라가 잘 갖춰져야만 시너지 내지는 지속적인 발전이 이뤄진다는 반성에서부터 기인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조한혜정 교수가 매체에서 자주 언급하는 '창조적 공동체'라는 말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기본적으로 동네의 아이들을 내 자식같이 생각하고 남의 집 아이가 밥을 굶고 다니면 데려와서 내 아이와 함께 먹이는 이웃 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잠정적 '문제아'의 소지가 있는 아이들을 동네의 어른들이 품어주고 관심을 쏟아서 우리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봉사나 나눔의 룰이라기 보다는 실용적·실리적 측면에서 '내 아이의 행복'을 담보로 하는 마을 생태계를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 아이에게 위협이 되는 환경을 없애려는 실리적 측면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내가 악하고 무책임한 부모라고 전제할 때조차 내 아이가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을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내 아이가 잘 나가기를, 성공하기를, 부자되기를 욕망하고 그것에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도 아이를 둘러싼 위험 요소들은 끊임없이 피해가고 배제시키고 내 아이만 보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더 건강한 '욕망'의 발현

흥미롭게도 아이를 키우면서, 이 사회의 고질적인 프랙탈(fractal)을 경험하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마치 한참 유행하던 "바보야, 문제는 OO야" 식으로 말한다면 이 모든 문제는 내 아이를 둘러싼 '인프라', '생태계'로 환원된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는 스스로가 진보성향이든 보수성향이든 간에, 우리의 육아교육 전략은 환경(생태계) 파괴를 담보로 한 1970~1980년대 성장주의 전략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이를 출산할 즈음 아내와 상의해 국내와 해외 각각 한 명의 아이를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내 가정, 내 아이만을 위해 살지 않도록 경계하려는 의도였다. 솔직히 나는 구제와 봉사를 하고 있다는 심정적 안도감, 도덕적 우월감을 얻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욕망을 한다는 것 자체를 탓하기보다는 그런 욕망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는 게 더 건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는 내 아이와 동시대를 살아갈 많은 아이들이 유아, 청소년 시절부터 배제되고 위협적 존재로 치부되지 않는 생태계를 조금이나마 만들어 갈 책임이 아이의 부모들에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 조금씩 커진다.
2013/11/15 23:13 2013/11/15 23:13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나: "퇴근 안 해요?"
남자직원: "그냥 집에 일찍 가기가 싫으네요. 딱히 갈 데도 없고."
나: "왜 싫어요?"
남자직원: "집에 가면 아내가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첫째 아이도 제 몫이고 밀린 집안일도 도와야 하는데 오늘은 회사일로도 좀 지치네요."
나: "네…."

일이 다 끝났는데도 귀가를 미루는 유부남 동료들을 종종 본다. 귀가 후에 쉴 수 없어서 회사에 머무는 이들. 한때 간 큰 남자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곤 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유부남 직원들끼리 자주 하는 얘기가 있다.

옛날에는 마초와 마초 아닌 남자, 즉 육아·가사를 전혀 분담하지 않는 남자와 분담하는 남자로 구별이 되었다면, 지금은 영혼을 담아 육아·가사를 분담하는 남자와 '영혼 없이' 분담하는 남자로 나뉜다고들 한다. 즉, 가사·육아를 분담하지 않는 남자는 없다는 말이다.


새로운 가족의 출발점, 엄마는 고통받고 아빠는 억울하다

삼십대의 대다수 남자들은 직장에서 자기 에너지가 거의 소진될 정도로 노동력을 공급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귀가한 집은 이들이 꿈 속에서 그리는 '스위트 홈'은 아니다. 아이와 한판 전쟁을 치르고 난 카오스 그 자체의 상황. 집에 도둑이 들었나 싶을 정도의 어수선함 속에서 아내는 지쳐서 애타게 남편의 귀가 시간을 기다린다. 집 문을 여는 순간, 아내의 가사·육아 관련 지시가 떨어진다.

하지만 아내를 돕고 싶어도 띄엄띄엄 알고 있는 집안 일과 육아는 서투르기만 하다. 열심히 해보지만 그릇을 깨거나 아이를 울리거나 걸레와 행주를 헷갈려서 식탁과 주방을 더럽히거나 비싼 겉옷 빨래를 망쳐놓기도 한다. 아내는 남편의 반복되는 서투름에 짜증을 내다가 이내 '곧 죽어도 내가 하는 게 낫지, 저리가'라며 소리를 지른다. '나도 너만큼이나 힘들었어'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밖에 내면 싸움이 더 커질까봐 삼킨다.

결혼을 결심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는 둘이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던 부부였건만, 이들은 아이가 태어나는 시점에 거대한 전환기를 맞는다. 군대를 갔다 와서 정상적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해도 20대 후반, 휴학을 했거나 대학원이라도 간 사람은 30대에 들어서고 나서야 사회 생활이 시작되므로 자리를 잡으려다 보면 결혼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요즘은 중년이 되어서야 육아가 시작되는 커플들이 늘고 있다.

변화도 많고 사색도 깊어지는 중년의 나이. 그 와중에 아이가 태어나고 직장 생활과 가사·육아의 분담 문제만 해도 이미 부부는 넋이 나간다. 사회가 육아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가부장제도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그 역할을 강요하다 보니 여성 입장에서는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하소연을 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분노를 표현할 대상이 남편뿐이다.

죽고 못 살던 연인 사이가 불과 몇 년 사이에 타자화되고 분노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결국 사회에서 새로운 가족의 출발점인 출산, 육아, 자녀 교육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부부 관계는 소원해진다. 엄마는 고통 받고 아빠는 억울하다. 엄마의 고통은 말할 나위가 없으며, 아빠들 또한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나도 힘들어'라고 말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의 반복이다. 반복은 만성이 되고 그 안에서 부부의 생명력은 죽어 간다.

'영혼 없는' 가사육아 분담, 중년 남성은 어디로 가나

기사 관련 사진
 <대한민국 부모> 표지.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충격적으로 읽은 <대한민국 부모>란 책에서 저자들은 자녀 교육 문제로 일그러진 한국 사회의 가정 문제를 깊이 있게 풀어냈다.

대한민국은 자녀 교육의 늪에 빠져서 가정과 사회, 특히 부부를 찢어 놓고 있다. 따지고 보면 엄마가 매니저가 될 정도로, 아빠가 다른 가족을 이민 보내고 기러기 생활을 할 정도로 자녀 교육에 '올인'하게 된 건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과거 아이들은 특별한 조치 없이도 그냥 자랐다. 그 세대를 동경하거나 옳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모든 부부들이 온 정성을 쏟는 육아와 자연스레 이어지는 자녀 교육, 고가의 사교육 그리고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흔들리는 중년 남녀의 삶의 방향성을 생각해볼 때, 그 효능조차 검증되지 않은 '아이 성공시키기 프로젝트'에 너무 깊이 매몰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덜컥 들곤 한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내 삶도 변했다. 나는 일상에서 더욱 보수적으로 변해간다. 진보적인 생각을 하던 청년 때와 달리 직장 생활도 '가늘고 길게' 가기를 진심으로 바랄 때도 있다. 적어도 아이가 자라는 동안은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아내와 나누던 대화의 질도 비교할 수 없이 낮아졌다.

그저 아내가 지치지 않기를, 그녀의 여가 시간을 확보해주기 위해 육아와 가사를 효과적으로 분담해주는 행위, 그 자체에 몰입할 뿐 우리 부부 관계의 깊이, 영혼의 대화, 이 사람과 진정 마음이 관통한 것 같은 느낌은… 감을 잃은 것도 같다. 잠시만 고생하면 될 것 같던 이 부모 노릇은 생각하면 할수록 단기 프로젝트가 아님을 새삼 절감한다. 우리는 그저 이 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 결혼을 했던 걸까.

다행히도 아내는 자주 나를 돌아보기를 권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내와 나의 관계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환기시켜줄 때가 많다. 요즘 특히 더 그렇다. 바꿔 말하면 나는 그만큼 육아과정에서 산만하고, 갈피를 못 잡고, 나를 잃어버리고 있고 아내와의 관계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대한민국 부모>에 등장하는 부부들이 그렇듯 나도 육아 과정에서 표류할 조짐이 보인다.

사회에서 내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집에서는 아내를 돕기 위해 '영혼 없는' 가사·육아의 분담을 선택하는 많은 남편들은 가정 안에서 정작 중요한 정서적인 유대감을 잃고 있다. 회사에서 멍 때리면서 집에 가기를 미루거나, 유흥가에서 돈을 주고 연인에게 받았던 위로와 사랑을 구걸하거나, 다른 명예나 성공을 통해 정서적 결핍을 보상받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즐거운 나의 집'을 위해 시작된 중년 남성들의 희생의 종국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요즘 나의 고민은 이런 류이다.
2013/11/15 23:12 2013/11/15 23:12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이 분 여자 아닐까요? 기사를 보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이제 16개월짜리 아들을 키우며 직장맘 체험(?)을 톡톡히 하고 있는 후배 편집기자가 연재 '제이언니의 아빠일기' 기사를 보며 던진 말입니다. 이런 생각, 남자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면서요. '주 1회도 힘든데, 아내는 오죽했으랴', '마트서 아이 등짝 때린 엄마, 쉽게 손가락질 마시라', '"애 안 키워봤으면..." 그런 말 하지 마세요'까지 연재 10회 동안 쓴 기사 제목만 봐도 스스로 '제이언니'라고 칭하는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집니다.

'위로는 상대에게 내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라는 글을 최근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요. 일주일 내내 직장에 다니면서 주말육아까지 책임져야 하는 힘든 와중에도 연재기사를 통해, '남편도 아이들도 몰라주는 당신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제이언니와 이메일로 나눈 인터뷰 내용을 싣습니다.

☞ 김용주 시민기자가 쓴 기사 보러가기

"일과 육아로 힘든 직장맘, 남편의 지지도 많이 못받아"

기사 관련 사진
 <제이언니의 아빠일기> 연재하는 김용주 시민기자, 아이와 함께
ⓒ 김용주

관련사진보기


- '제이언니'라는 호칭이 꽤 자연스럽다. 집에서는 아내가 뭐라고 부르는 지 궁금해졌다. 설마 아이가 언니라고 부르는 건 아니죠?
"아내는 저를 평소에는 '여보야'로 부르고요. 제 이름 때문에 '용파리'라고 할 때도 있고 감정 상태에 따라 여러가지 표현으로 달라지기도 합니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부를 때 재미있는 증상이 하나 있는데요, 엄마를 부를 땐 "아빠…음…아니 엄마!", 아빠를 부를 땐 "엄마…아니, 아빠!" 이래요. 아이도 좀 혼란스러운 거죠. (ㅎㅎ) 사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밖에서 듣고 보고 배우는 엄마, 아빠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역할과는 많이 다르니까요. 아내와 저는 취향에서부터 성격까지 일반적인 부부들의 모습과 다르다는 말을 종종 듣는 편이거든요."

- 편집부 내 직장맘도 넷이다. 그 사이에서 김용주 기자님이 자주 거론된다. 뭐 이런 '언니'가 다 있냐는 반응이랄까. 주변 여자들 사이에서 어떤 남자라는 소리를 듣나.
"페이스북 친구들 중 여성들도 많은 편이고요. 대체로는 저를 지지해주는 편인데 종종 그런 경우가 있어요. 부부동반 모임에서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한데요, 기혼 여성분들 중에 제가 육아 얘기를 하면 아내가 직장을 나가는지 제가 주말이나 퇴근 후에 육아를 전담하면 그동안 아내는 뭘 하는지 물어봐요. 조금 퉁명스럽게. 처음엔 그 부정적인 감정이 이해가 안 되니까 그냥 성격이 그런 분들이겠거니 하고 넘겼죠. 저는 제가 나서서 부부간 육아 분담에 대한 남편 설득을 하려는 의도도 있는데 도리어 여성분까지 그러니까 생각이 참 많아지더라고요. 근데 사실 대체로 기혼 여성들이 일과 육아 사이에서 힘든 상황인데 남편의 지지나 도움을 못 받는 경우가 많잖아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부정적 감정의 표출은 사실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제 아내를 향한 것이었던 거죠. 제 아내도 그런 소리를 종종 듣는다고 하더라고요. 주중에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데 남편이 가사와 육아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 아니냐구요. 사실 가사와 육아 문제는 단순히 물리적인 분배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육아 중인 부모도 각자의 욕망, 꿈을 가진 독립적인 인격이니 그 부분에서의 배려가 필요한 거고 그걸 잘 이해해주는 관계가 아내와 남편 사이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 깊은 '동지애'를 전제로 했을 때 자연스럽게 공동체 생활의 패턴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보고요. 그런데 대체로 그 관계 설정이 잘 이뤄지지 않으니 니가 힘드냐 내가 힘드냐, 니네 아내는 뭐하냐 같은 부차적인 문제들에 매몰되는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이런 황당한 '아빠가 언니되는 연재물'을 시작하게 된 것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런 이야길 사석에서 좀 꺼내놓고 싶어도 상대가 불편해하면 더 얘기를 안 하는 경우가 많죠."

- 반면 이런 김용주 기자님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할, 혹은 이상하다고 여길 남자들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여성들의 반응은 멜랑꼴리(우울증)의 측면이 강하고요, 반면 남자들은 좀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죠. 면전에서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 '남자 망신 시키지 말고, 불알 떼고 살아라'라고 욕하는 게 다 느껴집니다. (ㅎㅎ) 일단 분노하는 거죠. 왜 잘 유지되고 있는 가부장적인 질서를 흩트려 놓느냐는 거죠. 거기엔 아버지 세대와 비교해서 내가 얼마나 아내와 아이에게 잘하는데 호강에 겨웠다는 나름의 비교의식도 한몫하는 것 같고요.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끼리 서로 의리를 다지는데 애를 많이 쓰잖아요. 근데 '의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으면 가정에서 아내와 먼저 의리를 다지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제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특별히 진보적인 사고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남성들의 그러한 비합리적인 일상에 실망감, 회의감이 강하게 들기 시작한 거거든요."

주변 눈치 많이 보는 소심남, 애 낳고 달라졌다

- 사실 이런 커밍아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보수적인 시각에서 보면 어쩌면 더욱? 어떤 계기로 대놓고 기사를 쓰게 된 건가.
"제가 사실 굉장히 소심하고 주변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로 자라왔거든요. 생각은 진보적이긴 한데 사람 자체는 소심하고 보수적이고 좀 그래요. 글에서도 썼지만,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 생각과 삶의 패턴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한 여성과 삶을 공유하면서 제가 이전에는 안 보이던 시야가 넓어졌다고 할까요. 아이를 낳게 된 건 더 유의미한 사건이었죠.

솔직히 당시에 저는 육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요, 반면 아내는 아이가 생기면 닥칠 문제들을 미리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임신도 하기 전부터 육아서적을 쌓아놓고 보기 시작하더군요. 지금도 '내가 그때 성경 읽을 때보다 더 경건한 자세로 육아 책을 읽었다'고 농담반 진담반 얘기하곤 해요. 저도 그 덕을 톡톡히 본 거구요. 육아에 익숙지 않아 혼란스러운 일상이 시작되었고 책을 통해 간접체험을 하게 된 거죠. 사실 책을 읽을 때도 지적 유희를 위해 읽을 때와 절실한 상황 가운데 읽을 때의 그 흡입력이 다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의 무게감이 결국 육아와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만들었고 결국 소심한 저를 넘어선 커밍아웃을 하게 만든 건 아닌가 싶어요. 일단 '그래, 나는 팔불출이야!' 대놓고 말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한 부분도 있고요. 생각과 일상의 변화는 그렇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기사를 쓰게 된 계기에는 그런 기대감도 좀 있었어요. 남성이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어떤 범퍼,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무래도 남녀 성평등 이슈는 여성이 남성과 대결구도로 가는 것과는 별개로 남성이 기득권을 내려놓는 행동도 포함된다고 보는 편이라 남성은 남성이 설득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있었죠."

- 기사를 쓰게 되면서 달라진 생활습관 같은 것도 있을 것 같다.
"읽고 쓰는 걸로 에너지를 풀어내는 스타일이긴 한데, 매주 연재 글을 쓰려니 좀 힘들더라고요. 특히 요즘은 <오마이뉴스>가 월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어떻게 안 될까요?)"

- 제이언니가 보는 시월드의 세계는 어떤지 궁금하다. 시댁 문제 있어 아내와의 인식 차는 어떻게 좁히려고 애쓰나.
"제게 '시월드'는 과거 30년간의 베이스캠프였죠. 문제는 그게 '과거'라는 점이고 이후에는 이 베이스캠프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아내의 시각으로 내 베이스캠프를 '낯설게 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실 아내는 나라는 한 개인을 선택한 건데, 갑자기 고구마 넝쿨처럼 남편을 잡았더니 '시월드의 멤버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오잖아요.

그 넝쿨이 딸려 올라와서는 도리어 권력구도로 볼 때 아내 위에서 군림하게 되잖아요.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죽었다 깨어나도 진급이라는 게 없는 서열상 맨 하위 계급이 되는 거고. 쉬운 예로, 보통 장모님에게 사위는 귀한 손님 대접을 받잖아요. 처가에 가도 '김서방 일하느라 힘들 텐데 방에 들어가서 편하게 쉬라'고 권하고 씨암탉도 잡아서 먹여주고. 근데 며느리는 같은 직장생활을 해도 시댁에 가면 '짤없이' 노동을 해야 하잖아요. 그 불합리함부터 먼저 부부간에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 거 같아요.

여느 젊은 부부처럼 저희도 세상 물정 모르고 갓 결혼하고는 신혼기간 동안 이틀에 한 번꼴로 밤이 새도록 끝장토론을 벌이곤 했어요. 서로의 밑바닥까지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우리 부부가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격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서로의 생각을 가감없이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거예요. 반복적으로 다투다 보면 부부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어떤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그 대표적인 이슈 중의 하나가 '시월드'죠. 그 이후부터 아내와 저는 손발이 척척 맞는 한 팀이 됐죠. 때에 따라선 부부사기단 수준으로 부모님들을 상대로 '선의의 뻥'도 잘 칩니다. 시댁문제를 풀어가는 키워드는 팀워크죠.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은 저보다 아내가 더 전문가죠. 아내는 억압받는 위치에서 자유로운 위치로 비약한 흔치 않은 대한민국 아줌마의 모델라고 봐요, 저는.

- 모든 '엄마들의 언니'를 자처하는 남자로서 '시댁공략 노하우' 뭐 이런 게 있을까? 제이언니네서 하는 특별한 모습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결국 시댁 문제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 문제'잖아요. 근데 좀 관습적으로 억압적인 측면이 있는 게 문제인 거고요. 사실 남편이야 내 사람이지만 남편의 가족들은, 시작은 남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지인 그룹일 뿐이거든요. 처음엔 서로를 잘 모르니까 낯설고 경계심이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근데 그것을 부정하고, 급하게 시부모들이 무르익지 않은 관계에서 '딸 같다, 아들 같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곪아터져서 결국 서로 미워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우리 사회는 결혼하자마자 서로 가족처럼 친해져야 한다는 부담을 조장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는 가족처럼 대해 주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남편이 처음에는 아내를 자신의 뒤에 두고 아내가 내 가족들에게 익숙해지길 기다려줘야 한다고 봐요. 며느리의 포지션이 아닌 손님의 포지션으로. 아내들이 분위기에 휩쓸려서 오버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행동을 하는데, 대개 한국 여성들이 그런 식으로 사랑 받고 칭찬받는 삶을 강요 받으며 자라서 그런 것 같은데 좀 지나면 다들 힘들어 하잖아요.

이번 추석 때도 기사를 보니 명절 전후에 이혼율이 더 높대요. 앞서 말했듯 남편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한팀을 이루는 게 그래서 참 중요한 것 같구요, 그러고 나면 부부간의 룰이 생기고 그 룰 안에서 자연스럽게 남편의 가족들에게도 익숙해지고 감정적인 친밀함도 쌓이게 되는 거죠. 각자의 부모에 대한 효도와 사랑을 상대 배우자가 지지하고 '도와주는' 시스템이 건강하다는 거죠. 상당히 상식적인 선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는 특히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지배를 그만큼 강하게 받는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 많이 해요."

- 기사만 보면 이런 남자와 사는 '여인'이 참 궁금하다는 반응이 많다. 공개적으로 아내 자랑할 기회를 드리겠다.
"아내에게 질문지를 보여주니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소리치네요.(ㅎㅎ) 소설가가 꿈이구요, 동물을 아주 좋아해서 집에 키우는 동물이 무척 많습니다. 몸으로 배우고 바로바로 실천하는 타입이고, 관습이나 통념에 얽매이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어찌 보면 저와 참 상극에 있는 사람이죠. 연애할 때 눈꺼풀에 뭐가 씌어지지 않았으면, 거북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근처엔 얼씬도 안 했을 것 같아요(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잘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자유로운 생각에 유연한 편이지만 일상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소심하고 안정적인 반면 아내는 자유로운 영혼인데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무모함도 좀 있고. 아내는 자기의 자유로운 내면을 점점 삶에서 확장시켜가고 있고 저는 또 그것을 보면서 제 안에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는 벽을 허물어가고 있고요. 우린 나름 좋은 팀인 것 같아요. 운이 좋았죠. (ㅎㅎㅎ)"

- 기사를 쓴 적 얼마 안 되었을 때, 딸아이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들이더라. 굉장히 스킨십을 많이 하고, 친화적이던데. 설사 그것이 기자 말마따나 '결핍의 흔적'이라 하더라도 아들 둔 아빠들 입장에서 그러기가 어렵다던데, 언니 감성이라도 공부해야 하는 건가.
"저는 아빠와 아이와의 스킨십은 가부장적인 정서, 특히 집안에서 남자와 여자, 아빠와 엄마의 고정된 성역할에서 자유로워져야 가능하지 않나 싶어요. 어떤 의미에선 가부장제가 아빠와 아이의 스킨십의 즐거움을 빼앗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결핍의 흔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제 내면과 가정 배경에 대해 더 고민할 요소가 있는 것 같고요.

아버지, 어머니와 저의 심리적인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는 거죠. 아이러니한 건 이런 관계의 결핍이 결국 제 아이와의 친밀한 관계를 맺게 도와주었잖아요. 그런 것도 있어요. 스킨십을 많이 하고 자녀 친화적인 제이언니에게서 아이가 떠날 때 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과연 심리적으로 건강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아마 그게 저에게 남은 내면의 숙제겠죠."

- 주말 육아도 스트레스가 있을 것 같다. 그걸 어떻게 푸는지? 혹시 기사쓰기?
"우리 부부는 교대로 자기 시간을 가져요. 처음엔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이것저것도 해보고 여기저기 가기도 했는데 요즘은 함께 외출을 하는 일은 별로 없고요. 저나 아내가 아이를 전담하고 한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거죠. 아내는 친구를 만나거나 정줄 놓고 맥주 한 잔하거나 집에서 동물들을 돌보거나 하고요, 저는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 나가서 책을 읽거나 몇몇 모임에 나가거나 합니다. 물론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글쓰기로도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해요."

아내도 만족하는 육아기사, 직장맘 힘내세요

- <오마이뉴스>에서 육아일기 연재가 있는데, 본적 있나? 혹은 <오마이뉴스>에서 이런 기사는 꼭 본다 하는 것들이 있다면?
"다른 기자님들의 육아 일기도 많이 읽었어요. 아무래도 아이 키울 때는, 다른 집 아이 키우는 이야기도 관심이 가고 다른 집 아이도 덮어놓고 막 귀엽고 그렇잖아요. 그 외에는 신정임 시민기자의 <아줌마 구직자의 취업실패기> 챙겨서 읽었어요. 아, 정말 글쓰신 기자님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 기사를 읽다보면 참 센스가 돋보인다. 글쓰기 공부, 따로 한 적 있나.
"감사합니다. 그런 글들은 어떤 공부를 해서 얻어진다기 보다는, 제가 가진 소심한 성격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다 보면 도리어 어느 순간 유머 코드로 읽히게 되는 것 같아요. 만약 소심한 성격을 숨기고 '있어 보이는 척' 하면 어떨까요. 20대에는 글을 쓸 때, 신영복 교수 특유의 서간문을 흉내내어 보기도 하고 진중권의 스타일을 따라해 보기도 했는데 결국 글은 사람의 '결'을 따라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 기사쓰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면, 혹은 부족함을 느끼는 게 있다면?
"저는 글은 빨리 쓰는데 생각 자체는 좀 오래해야 하는 성격이거든요. 머리 속에 대략적인 구조가 정리가 되어야 쓸 수가 있는데. 아무래도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죠."

- 만족하는 기사, 혹은 반응 좋았던 기사…. 혹은 아내가 가장 좋아했던 기사가 있었다면 소개해달라.
"최근 직장맘 관련 글에 대한 댓글을 읽다가 맘이 짠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누군가 제 입장에서 말해주면 위로가 되거든요. 그런데 직장맘들은 그런 식의 위로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기사 한 토막에 절절한 마음을 담은 댓글들을 읽으면서 순간 같은 직장인으로, 같은 애를 키우는 입장에서 속상하더라구요.

아내도 이번 육아 연재물을 대체로 좋아해요. 간혹 서평이나 시사 이슈 관련 글을 쓸 때는 아내에게 미리 보여주면 "니가 회사에 매여 오랫동안 착취를 당하다 보니 직접 경험하지 않은 걸 대충 쓴 게 글에 다 보인다. 진정성이 없어!"라고 독한 평을 종종 하거든요. (흑흑) 그런 의미에서 최근 가장 깊숙이 경험하고 관여한 육아에 대한 글이 아내가 보기에 가장 저다운 글일 수밖에 없죠. 혹평도 덜받고. (ㅎㅎ)"

- 본인의 육아 철학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글쎄요, 정리가 잘 안 되네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면 연재글을 쓰지 않았겠죠. 전 촌철살인, 뭐 이런 거 잘 못해요. 글도 좀 장황하게 쓰는 편이고."

- 육아일기는 끝이 없을 것 같다, 본인의 글이 어떤 육아일기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비슷한 내용일 수 있는데, 어떤 남편, 어떤 아빠이고 싶은가.
"언젠가 아이가 커서 제 연재글을 보게 되었을 때, 휙 읽다가 '아빠가 이걸 썼어? 쫌 의외인데'라고 말하게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하거든요. 주변에 자식이 커서도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혹여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 내 글을 읽어도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냉소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줄 정도의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이와의 관계와 별개로 '김용주'라는 한 인간으로 인식되고 싶어요. 부모들은 다들 직장에 헌신하고 육아, 자녀교육에 헌신하다가 어느새 중년이 되고 나면 '나'란 존재는 없는 경우가 많잖아요. 남편이기 이전에, 아빠이기 이전에 '김용주'라는 한 인간으로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생 깊고 즐거운 관계를 맺어가고 싶어요."

- 그간 편집부에 느낀 것 혹은 바라는 점이 있다면.
"글쎄요. 지난 번에 기자님이 책을 보내주셨어요.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이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가 육아 관련 기사를 쓰는 데에도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구요. 약간 사이버 편집부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런 경험들을 통해 편집부에 대한 느낌이 좀 훈훈해지더군요. 수많은 기사들이 올라오고 시민 기자들을 대하면서 어려움도 많으실 것 같은데 바라는 것보다는 힘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특히 직장맘 기자님들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작성: 오마이뉴스, 최은경 기자님.
2013/10/07 23:18 2013/10/07 23:18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병원 진료를 마치고 약국에서 약을 기다리던 중 어린 아기를 둔 엄마와 여성 약사 사이에 큰 소리가 오갔다.

"손님. 여기 있어요. 약을 복용하시는 중에는 모유 수유를 하시면 안 되세요."
"네? 뭐라고요?"

"모유 수유하시면 안 되신다고요."
"참내."

"네?"
"이것 봐요. 어떻게 수유를 안 해요? 아이 낳아봤어요?"

"아니요. 아직…."
"그러니까 저런 소리를 해대지. 애가 없으니까 팔자 좋은 소리하구 있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솔직히 그 약사는, 결혼은 안 했다지만 그녀보다 나이가 적어보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약사의 처방에 대해 인신공격적인 말을 해대는 아이 엄마의 반응에 내 심장마저 쿵덕거렸다. 그것도 같은 여성으로서 자기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상대에게, 저런 언행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약사는 상기된 얼굴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분노의 대상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인터넷에도 빈번하게 OO녀, OO남 이야기가 퍼지면 순식간에 그들의 신상이 털리고 만 하루가 되지 않은 시간에 포털사이트에 검색어가 뜬다.

사실 나는 이 약국 손님을 두고, 그런 상황을 얘기하고 재현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를 둔 엄마 손님도 그녀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이에 대해서는 첫 기사, '마트서 아이 등짝 때린 엄마, 쉽게 손가락질 마시라'에 충분히 생각을 풀어냈으므로 긴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임신과 육아에 많이 찌들어 있는 기혼 여성들이 종종 싱글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우려를 조금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아줌마에 관한 '뒷담화'

SNS를 하다 보면 '아줌마'로 통칭되는 기혼 여성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중년 여성의 엽기적인 행동에 관한 '뒷담화'를 종종 읽게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 수단에서 서둘러 자리를 잡거나 식당에서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백화점, 대리점에서까지 물건은 깎는 일 등은 이미 고전이 되었고 직장 내 여자 선배 직원의 과한 처세술부터, 육아 경험이 없는 싱글 여성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언행에 대한 분노의 글들도 자주 접한다.

'애 안 키워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는 어법이 주는 호전성은, 때로 원치 않게 결혼·육아 경험을 할 수 없는 싱글 여성들에게는 상처를 넘어선 분노를 자극하기도 한다. 물론 내 경험상으로도 육아는 힘들고 내 아내는 나보다 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육아를 경험하지 않는 부류를 향한 어떤 호전성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같은 여성에게.

육아 경험의 유무뿐만 아니라 그 확장도 자주 경험한다. 우리 집은 아이가 하나인데 놀이터에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아이 하나는 육아도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는 마치 남자들이 군대생활을 최전방에서 했느냐 후방 부대에서 했느냐에 대한 반응과 유사하다.

놀이터에 모인 엄마들 사이에서 아이 하나인 엄마는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묘한 스탠스를 갖게 되는데 이는 마치 공익근무를 한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를 할 수 없는 처지와 같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아이들도 다들 제 각각이고 첫째를 키울 때 쓰던 육아 방식이 전혀 먹히지 않음에서 오는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자주 아내도 나도 어떤 부모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는 듯한 압박감에 나름의 어려움을 토로하지도 못한 채 '맞아요, 우린 아이 하나고 그마저도 순해서 어릴 때부터 거저먹기였어요'라며 아이 많은 집 부부들 사이에서 '영혼 없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아이가 셋인 엄마는 아이를 하나 둔 엄마의 고충에 '팔자 좋다'는 반응을 보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보며 세월 참 좋아졌다고 비판한다. 이렇듯 서로 간에 분노, 증오로 뒤섞인 관계의 긴장감은 슬프게도 비기득권 진영 내에서 더욱 심하다.


비기득권 진영 내에서의 갈등, 좋지 않아요

'싱글 여성'과 '육아 중인 기혼 여성',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갈등 등 이른바 비기득권 진영 내의 갈등은 앞서 말한 대로 가부장제나 보수적 사회구조를 유지시켜주고 나아가 '남성', '기업'과 같은 기득권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자주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 가장 가까운 이들과 함께 그 문제를 풀어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들을 - 더 연약하면 연약하다는 이유로 덜 어려움에 처했다면 그것에 어떤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서 - 비난하고 상처를 주고 결국은 분리의 수순을 밟게 된다.

유사 페미니스트의 삶을 추구하는 나는, 솔직히 말해 여성이 남성을 적으로 여기는 상황들도 불편하지만 그보다 더 (기혼) 여성과 (싱글) 여성이 서로를 구분 짓고 서로에게 가해하는 상황이 더 불편하기만 하다. 또한 이는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시키는데 일조한다는 측면에서 전략적으로 지혜롭지도 않다고 본다.

싱글 여성이 임신, 육아의 지식을 공유하고 먼저 선배들의 고충을 배려해주고, 기혼 여성은 싱글 여성에게 상처가 될 만한 언행을 조심해주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성의 성평등에 남성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지만 이보다 선행될 부분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2013/09/26 23:11 2013/09/26 23:11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시기가 시기인 만큼 광화문 촛불 집회가 한창이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SNS를 통해 집회 소식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다들 비오는 날씨에도 고생이 많으신 듯). 이렇게 집회 자리에 있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다. 올해 들어서는 집회에 참석을 못 했다. 작년 대선 때 몇 차례 시도해봤으나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움직이는 게 만만치가 않았다.

결국 아이를 두고 가야 할 텐데 아내도 집회를 참석하고 싶어하므로 (다소 어색하긴 해도) 주말 육아를 전담하는 내가 아이를 맡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그렇게 나는 남고 아내는 집을 나섰다.

아내가 별 걱정하지 말라며 씩씩하게 떠나고 나면, 나는 집에서 아이와 만화영화 주제가를 같이 흥얼거리며 아내가 주중에 못다 한 집안 일을 하며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든다. 중간중간 아이가 밥 먹을 때나 놀이터를 전전하며 SNS에 올라오는 소식들과 기사들을 읽는다. 마음 깊이 공감하며.


황득순, 집에 남는 자

사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상이다. 예전 연재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민초들이 들풀처럼 일어나길 기대하며 집회 장소를 누비던 함석헌 선생의 활동 뒤에 가려졌던 아내 황득순씨의 일상도 이랬겠구나 싶다. 나는 내 의지대로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았었다. 싱글일 때 혹은 아이가 없을 때 전혀 고민해보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들, 그로인한 선택과 그에 따르는 감정들을 대면해야 한다. 이렇듯 내 정서는 새 국면을 맞이한다.

물론, 조만간 아이가 클 것이고 우리는 가족 모두가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설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촛불을 들고 있는 것과 아이의 장난감을 들고 있는 것 사이에 경중을 따질 수 없다. 유사(pseudo) 페미니스트로서, 아내가 아닌 내가 반드시 촛불을 들어야 할 어떤 논리나 당위도 없다. 누군가는 집회의 자리에 서 있고 누군가는 그 시간에 야근을 하고 또 누군가는 집에서 '아무개의 엄마'로 가사와 육아를 돌본다. 때때로 사람들은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기도 할 것이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신앙적인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위해 프란시스 쉐퍼가 만든 공동체인 라브리에 찾아온 수많은 청년들에게 지적인 대답을 주기 위해 노력한 쉐퍼 자신보다 예산 없이 매일매일 수십 명이 되는 청년들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애간장을 태운 그의 아내 에디스 쉐퍼가 더 대단해 보인다. 또 함석헌 선생이 비운 집안에서 군소리 없이 "나야 뭐…"라며 쑥스럽게 가정을 보살핀 황득순 여사의 일상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엄밀히 말해 나는 고작 몇 차례의 시간 동안 아이와 집에 있었을 뿐인데 삶의 대부분을 그렇게 산 그(녀)들의 삶을 절절히 공감했다는 표현은 다소 '오바'일 게다.


행동하는 존재 Vs.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존재

솔직히 고백하건대 과거에 나는 집회에 나서지 못하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반대 급부로 자연스럽게 집회 참석에 관심이 없거나 사회 문제 자체에 의식 없는 청년들에 대한 반감도 꽤 있었다. 그저 소심한 마음에 내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자리에 동참하는 것이 내겐, 그리고 내가 타인을 대하는 꽤나 중요한 이슈였다. 헌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뻔뻔하게도 이런 글을 쓸 정도로 '날라리'가 됐다. 그것도 함석헌보다 황득순을 더 강조하려는 논리까지 내세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런 내적 변화가 싫지 않다.

그날, 나는 아이와 칼싸움을 하고 그네를 밀어주고 저녁밥을 차려주고, 씻기고 재우면서도 SNS에 올라온 집회 사진과 글들을 보며, 어느 때보다 평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집회 장소에 있던 분들을 응원했다.

물론 나는 집회에 나선 이들이 다치거나 어려움에 처하지 않도록 매순간 기도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서 노심초사하면서 귀가를 기다리는 많은 이 땅의 '황득순 여사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행동하는' 존재만큼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존재도 강조될 이유가 있다는 생각. 조금씩 생겨난다.

노심초사한 마음조차 생경한 밤 시간. 아내가 돌아왔다(휴…).
2013/09/16 23:09 2013/09/16 23:09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한때 시간관리·자기계발 분야의 책들에 관심이 많을 무렵이 있었다. 당시 읽은 책 <관계중심 시간경영>에서 저자 황병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시간 개념을 구분해 사용한 것을 주목했다. 여기서 크로노스는 '시계 시간' 혹은 흘러가는 시간을 뜻한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사건 시간', 즉 무수한 시간들 중 의미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자기계발서가 제안하는 시간 관리는 대체로 시계 시간을 보다 촘촘하게 관리하는 것에 기반한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같은 시간도 다르게 인식한다. 누구와 만났고 어디를 갔고 무슨 일을 했느냐에 따라 그 시간의 의미는 달라진다. 고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른바 한 개인의 삶에 있어 '사건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고 또 앞으로도 그와 비슷한 시간들이 흘러갈 것이다. 이 모든 양적 시간들 중에 사실상 나에게 의미 있게 각인된 특정한 사건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업고 병원으로 뛰던 기억, 아내와 처음 데이트하던 장소, 아이가 태어나던 날, 폐렴으로 입원했던 기억, 회사에서 몇 주 동안 밤새 준비했던 보고서를 결재받던 날….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우는 것이 많다.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는 좋은 스승이다. 그런 소소한 깨달음 때문인지, 나의 정리'벽'은 기억들을 종이에 노트에 그리고 컴퓨터에 저장해두는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이건 덧칠이다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앨범을 신청하라는 안내문을 받았다. 허걱, 앨범 가격 무려 6만 원이란다. 나는 그래도 신청할까 고민했으나 아내는 '상술'이 엿보인다며 끝내 앨범을 신청하지 않았다. 물론 돈 때문만이 아니다. 어린이집에서 하는 활동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아이의 아이다움'을 저해한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일례로 지난 어버이날에 아이가 만든 카네이션에는 '엄마 아빠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어쩌고 하는 무슨 틀에 박힌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정말 우리 아이가 쓴 내용이었다면 아마도 '아빠 똥꼬나 먹어' 내지는 '아빠 스티커 다 모으면 큰 장난감도 사줘야 해'라고 쓰지 않았을까.

문제는 아이의 아이다움에 어른들이 '윤리적인 덧칠'을 해대는 것이다. 따라서 성장기에 어린이집 아이들이 어떤 기억의 저장으로 담아오는 많은 추억들도 천편일률적이다. 그저 수많은 아이들 속의 내 아이, 남들에게 처지지 않게 성장하는 내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장 앨범을 경제논리에 따라 고가의 비용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

내 어릴 적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어디에 살았는지, 그 시절 내 친구는 누구였는지, 나는 어릴 때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사실 지금도 나는 유년기에 어떤 성격을 가진 아이였는지 가끔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자료는 없다. 빛바랜 사진 몇 장에 기댄, 그저 풍문 속에 전달되는 내 영유아기의 사건들. 그것조차 어른들의 가치관으로 채색된, '넌 어릴 때부터 착했지, 점잖았지, 공부를 잘했어…' 그들의 욕망에 기댄 평가들.
내 아이만의 앨범을 만들다

기사 관련 사진
 어린이집 친구가 그려준 그림에 친구 이름을 함께 넣었다.
ⓒ 김용주

관련사진보기


어차피 자료들은 자료를 선별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된다. 나 또한 내 아이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내 시각으로 내 가치관으로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린이집에서 막 찍어내는 앨범이 아닌, 내 아이가 나중에 자신의 영유아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그 시절의 특징들 그리고 자라면서 경험한 환경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것이 10대나 20대에는 별 의미 없는 자료일 수 있겠지만 30대가 넘어 내 나이 즈음이 돼서는 스스로에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성격심리학 분야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의 고유한 성격과 기질은 30대에 꽃을 피운다고 한다. 10대나 20대에는 여전히 주변의 눈치(환경에 적응)를 보느라 본유적 성격이 죽는다고.

아이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이 아이를 보호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이 아이가 편하게 고지를 선점하게 만들 수 있을까. 부모라면 그런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만들고 자기의 과거를 통해 미래의 삶을 스스로가 개척할 내적인 힘을 길러주는 게 아닐까. 부모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게 해주려면 부모와 사회의 가치관으로 덧칠한 기성 성장 앨범들이 아닌 부모의 눈으로 자세히 관찰한 내 아이의 특징들을 잘 기록해 주는 게 정작 더 중요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아이의 성장책을 만들어본다. 아이와 앉아서 옛날 어린이집 친구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받아적었다. 어린이집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서 친구들의 이름을 같이 적은 뒤 육아일기 한쪽에 넣어둘 생각이다. 아이에게 간간이 보여주며 나의 추억에는 없는, 선명한 이미지를 남겨주고 싶다. 나도 안다. 이런 것들의 이면에는 나의 어떤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가 깔려있다는 것을. 그래도, 아이가 나이가 들어 네다섯 살 시절을 추억할 때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른다면 나도 기쁠 것 같다.
2013/09/14 23:07 2013/09/14 23:07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기사 관련 사진
 실내놀이터.
ⓒ 김용주

관련사진보기


실내놀이터 풍경

아이와 실내놀이터에 있다 보면 본의가 아니게 주변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화는 몇 개의 주제로 범주화되는데 사실 범주화라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는 말이 더 적절할 듯하다.

처음엔 아이에 관한 이야기-내 아이 자랑, 혹은 걱정-으로 시작해서는 남편의 험담으로 번져간다. 내가 주로 아이와 실내놀이터를 오는 시간이 주말이다 보니 주말에도 육아를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한 상태로 대화는 남편 성토대회가 된다(그럴 때마다 나는 그네들의 남편도 아니면서 자주 식은땀을 흘린다).

남편의 험담이 끝나갈 무렵이 되면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어서인지 드디어 화자인 본인에 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이 엄마들의 학력이나 이른바 '스펙'이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스펙에도 다수 엄마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 없는 속내를 내비치곤 한다.

개중 몇몇은 부모님의 도움으로 꿋꿋이 회사를 다니는 이들도 있었지만, 석사 논문을 앞두고 출산 후에 과연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 회의감을 보이는 엄마도 있다. 또 직장에 육아 휴직을 냈지만, 여의치가 않아 퇴직을 고려하거나 이미 퇴직상태인 엄마들도 더러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아내도 결혼과 임신, 출산을 거치면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장을 바꿔야 했고 진로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처음으로 남편인 나는 출산 이후 육아 과정 중에 한 번도 직업에 대한 고민 내지는 어떤 위기감을 느낀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남자도 육아휴직을 낼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도 내 주변에서 아빠가 되었다고 육아 휴직하는 직원을 본 적은 없다.

기사 관련 사진
 성별 육아휴직자 수.
ⓒ 여성가족부·통계청

관련사진보기


반대로 출산 이후 팀을 옮기거나 복직하지 않은 여자 직원들은 자주 보았다. 엄마가 아빠에 비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떨어져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건가.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그리 아름답지는 않은, 그리고 남편이나 아내의 사적인 이유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기사 관련 사진
 우리나라 성별 대학 진학율 추이
ⓒ 여성가족부·통계청

관련사진보기


지난 6월 통계청에서 발표된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별 대학 진학율 추이를 보면 여성이 74.3%, 남성은 68.6%로 2008년부터 남녀비율이 역전되었고 이제 그 차이가 5%를 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알파걸(엘리트집단 여성을 지칭하는 새로운 단어)'들이 캠퍼스에서 수석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날 법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별 경제활동인구는 남성 73.3%, 여성 49.9%로 남성이 23.4% 높게 나타났으며 이 수치는 과거 10여 년간 변화가 미미한 수준이다. 왜 그럴까.

통계청에 의하면 가사육아 전담자는 721.9만 명이며 이 수는 비경제 활동인구 1580.7만 명의 45.6%에 해당한다. 또한 가사전담자가 1999년 456만 명에서 2012년 576.5만 명으로 10여 년 사이에 그 수가 120만 명이나 증가했다. 경력단절 여성의 수가 197.8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기혼여성의 20.3%이며 전년대비 4.1%가 증가한 수치다.

경력단절 사유는 결혼(46.9%), 육아(24.9%), 임신출산(24.2%)로 나타났다. 결국 여성 교육의 기회가 늘어난 반면 실제로 사회에 진출한 많은 여성들은 결혼,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흥미롭게 읽은 책 중 하나인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스 벡-게른스하임 부부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그 원인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먼저 저자들은 자국인 독일에서도 여성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건 68년 '5월 혁명' 이후지만 77년에 이르러서야 가족법과 결혼법의 발효를 통해 여성의 실제적인 평등이 실현되었고 현재까지도 높아진 교육기회가 여성의 고용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는 현실에 주목한다. 이유가 뭘까.

저자들은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개인 자유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닌 그저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노동 조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주시한다. 봉건적 위계질서에서 갓 해방된 개인이 또다시 노동시장이라는 구속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자율적 개인'은 주중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노동을 제공할 수도 있는,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언제라도 원할 때 회사로 뛰쳐나올 수 있는 존재다.

"종교개혁 덕분에 사람들은 교회와 신이 정해준 봉건적 위계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산업적인 세계로 들어섰다…(중략)…노동시장이 모든 사람이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은 실은 모든 사람이 이러저러한 압력에 순응하고 취업시장의 요구 조건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노동시장에서의 자유이다."(29쪽)

이러한 거짓된 '개인의 자율성'은 여성의 직장생활, 경력단절과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한 가정에 속한 남녀 모두가 자기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가정과 노동시장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하나의 노동 시장 일대기와 평생의 가사노동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 있지만 두 개의 노동 시장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는 없는 가족 모델의 실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동시장 일대기는 내적으로 두 배우자가 모두 자기를 우선시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개의 원심적 일대기를 서로 연결하는 일은 아슬아슬한 공중 곡예로 중심잡기가 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중략)…따라서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바로 그 조건들이 새롭고 낯선 의존들을 생산한다. 즉 스스로의 존재를 표준화하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개인들은 전통적 강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노동시장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29~31쪽)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것은 여성

중요한 건, 이때 두 배우자 중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것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통계치가 말해주듯 결혼, 임신, 출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시장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다. 책의 저자들은 교육기회의 평등이 사회적 지위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나아가 산업사회에서조차 자신의 미래가 요람에서부터 결정된다고 말한다.

"여성들의 조건은 지난 세대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더 좋은 일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으로 교육받은 남편들은 이미 직장에서 훨씬 앞서 나가고 있으며, 여성들은 전과 다름없이 평생 가사 노동을 선고 받는다…(중략)…바로 여기에 산업 사회의 봉건적 중핵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운명, 즉 평생 가사 노동을 할 것이냐 아니면 노동 시장에 적응해 돈벌이를 할 것이냐는 원칙적으로는 산업사회에서조차도 요람에서부터 결정된다."

유감스럽게도 당시 독일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와 겹친다. 고도의 산업사회에서도 노동시장에서 남녀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지적재산권이나 환경규제의 명분을 내세워서 개발도상국이 침범할 수 없는 이미 확보된 기술 장벽을 통해 시장 진입을 막는 선진국의 현실과도 닮았다. 따지고 보면 참정권조차 없었던 여성에게 성 평등, 성해방운동의 실제적인 열매(법적 효력)를 경험한 것이 불과 반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다시, 실내놀이터 사색

다시 우리 동네 실내놀이터로 돌아오자. 왜 남편들은 주말에도 아이를 전담하지 못하고 실내놀이터에서 뭇 아내들의 비난 대상이 되는 것인가. 사실, 다수 남편들은 더욱 치열해진 경쟁 속에서 직장생활을 견디고 주말에는 '배터리 방전 상태'다. 하지만 아내들은 그 경쟁 끼어들 틈조차 없음에 무력감을 느낀다.

우리 동네에도 즐비한 '알파걸' 엄마들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으며 화려하게 사회에 '데뷔'했지만,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생각지도 못한 삶의 전환점을 경험하고 있다. 자기계발이나 경력관리는 고사하고 아이를 잠시 떼어놓고 가까운 카페에 한 번 나가기도 쉽지 않다.

남자는 노동시장이, 여자는 가사전담 구조가 각자의 '면역체계'를 허물어뜨리고 결국 그 두 사람이 한 조직(가정) 안에서 다투고 서로를 비난하는 결과를 낳는다. 아마도 육아를 책임져주지 않는 한국사회는 점점 더, 구조적으로 부부를 갈등관계로 밀어넣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끔 유럽의 선진 육아 시스템을 엿보면서 놀라움과 더불어 어서 빨리 그런 사회구조가 우리나라에도 자리 잡기를 기대하지만, 이미 천금보다 귀한 '젊은 엄마들'의 시계는 육아와 함께 2~3년이 훌쩍 지나간다. 남자는 남자대로 가사, 육아에 깊이 관여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미 직장 경쟁이 내 생존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는 내 생존이 아닌, 우리 가족의 생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장 하에서의 새로운 가부장제 조짐도 보인다. 여성이 먼저 경제논리에 따라 사회의 성역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남편에게 넉넉한 수입만을 요구하고 자신은 오롯이 육아의 짐을 떠안는 것이다. 이게 출산과 육아를 둘러싼 우리들의 현실이 아닐까.

물론 답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련의 거시적 상황들을 부부가 공부하고 함께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실직이나 경력 단절이 남편의 탓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적으로 발생한 아내의 '분노'(우울)를 이해하고 아내의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한 고민을 함께 해 나갈 필요가 있다.

반대로 전쟁터 같은 노동시장에서 겪는 남편의 고충과 심적 부담감에 대해 아내가 공감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이상적인 방향으로는 서로가, 사회가 규정짓는 성역할에서 벗어나 남성도 육아의 즐거움(괴로움)을 경험(분담)하고 아내도 노동시장에 발붙일 수 있는, 나아가 감히 여성이 사회에서 자아실현을 꿈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현재로선, 내 생각은 이러하다.
2013/08/24 23:06 2013/08/24 23:06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어머니는 신문을 유심히 보다가 급하게 옷을 차려입고 누나와 나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렇게 시간에 쫓기듯 따라나섰다. 웬 횡재인가, 하는 마음으로 누나와 즐겁게 끌려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게다가 영화관 앞에서 당시에는 1개에 2000원이나 하던 바나나도 사이좋게 하나씩 입에 물었다(어머니는 바나나가 싫다고 하셨어.^^;;).

그렇게 급하게 본 게 바로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영화였다. 영화와 같은 제목으로 삽입된 노래 때문에 꽤 유명했지만, 정작 영화는 초등학생인 내가 보기에 별 재미가 없었다. 영화 스토리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 후, 그렇게 그 사건은 오래도록 잊혔다.

나는 자랐고, 대학에 갔고, 직장에 갔고,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육아에 관심이 많은 아내 덕에 육아에 관한 책들을 읽고 좋은 부모, 좋은 아빠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생길 즈음, 문득 그 노래가 떠올랐고 그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났다. 무료했던 영화보다는 그날의 어머니가 자꾸 떠올랐다. 어머니는 그날 신문에서 '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영화의 타이틀을 보고 아이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라는 생각에 무작정 우리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던 듯하다.

내 어머니는 여느 부모처럼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 한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니 가끔 떠오르는 어머니의 행동에 놀랄 때가 있다. 이제 갓 육아에 들어선 초보 아빠인 나는 벌써 매사에 아이의 나쁜 버릇을 교정하고 아이가 바른 길로 자랄 수 있도록 훈육하려는 기미가 보인다. 따지고 보면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이의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려고 애썼던 노력이 이제는 조금 읽힌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 온몸으로 말하는 아이를 느껴야

기사 관련 사진
 이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 김용주

관련사진보기


우리 집 주말 육아는 오롯이 아빠의 몫이다(아내는 아이에게 주중에 충분히 시달렸으므로). 평소와 달리 아이가 짜증을 냈다. 날이 덥긴 했으나 매사에 구시렁거리고 미운 말을 해댔다. 함께 장을 보러 나왔다가 다음부터 이럴 거면 따라 오지 말라고 했다. 그 짜증이 저녁 시간까지 이어졌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 저녁 밥을 만들어서 아이에게 차려줬더니 점심때 과자를 먹어서 그런지 먹으려 하질 않는다.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내 눈치를 보며 억지로 조금 더 먹었다.

씻기고 재우려는 데 아이가 짜증 내는 수준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몸을 만져보니, 열이 심하게 났다. 39도를 훌쩍 넘긴 고열상태. '아…. 얘가 아팠구나.' 밤새도록 해열제를 먹이고 물로 몸을 닦아주면서 아이를 바라본다. "아파서 짜증이 났었구나. 아빠가 미안해"라고 말하는 순간, 내 눈 주위가 화끈거린다. 분노의 주말 육아가 순식간에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게 한다.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는데 아이에게 그 분노가 향해 있다가 갑자기 깨달은 내 잘못으로 인한 절망감에, 주말 밤 끝내 멘붕 상태가 되었다.

청년 시절 스스로 가졌던 긍정적인 생각들은 결혼하고 아내와 살면서 한 번 무너지고, 육아하면서 또 한 번 무너진다. 난 살면서 매 순간은 아니지만, 삶의 상당 부분에서 스스로 참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자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빠 노릇, 아이가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 그 아이가 상하지 않고 잘 자라도록 돕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정서적인 것은 고사하고 몸뚱이만이라도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지. 특히나 오늘처럼 아픈 아이를 인지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다.

영화 <비포 미드나잇>에서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가 호텔 방에서 육아 이야기를 하며 심하게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제시가 출장을 다니고 외부 활동할 때, 셀린느는 두 쌍둥이를 낳고 어쩔 줄을 몰라하며 불안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한 아이의 성장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 매 순간 커가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해해야 하는 한 엄마의 심리가 잘 드러난 장면이었다.

육아를 전담하는 세상의 많은 엄마들은 오죽할까 싶다. 고로 이 공포를 부모 중 한 사람에게만 짐 지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나름 자명한 셈이다. 하지만 죄책감에 사로잡힌 오늘은 이조차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아이가 커서도 나에게, 적어도 막연한 고마움을 갖는 부모로 남을 수 있을까. 가끔 조바심이 난다. 자신이 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본 <어른들은 몰라요>가 떠올랐다. 그래, 어른들은 모른다. 일상에 지쳐서 아이들의 세밀한 표현과 손짓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다.

이번 주말처럼 아이의 상태도 모른 채 버릇없이 군다고 호통을 칠 때도 있다. 몸의 질병은 낫더라도 자라서 그런 서운함과 억울함이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의 정서에 어둡게 자리 잡지 않기를 뒤늦게 바라곤 한다. 내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부모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온몸으로 하는 아이의 말을 매 순간 좀 더 귀담아 들어야겠다.
2013/08/16 23:04 2013/08/16 23:04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가끔 아이와 놀다 보면 아이가 "아빠, 그냥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라고 말할 때가 있다. 과자를 많이 먹거나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나는 즉시 물러선다. "어… 알았어." 사실 나는 아이의 놀이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몹쓸 모범생 기질 때문에 정해진 룰을 아이에게 강요할 때가 종종 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어떤 정형화된 방식을 '부드럽지만 교묘하게' 강요하면, 눈치가 9단인 다섯 살의 아이는 즉시 그것을 감지하고 아빠에게 항의한다. 내가 이게 바른 방법이라고, 더 재미있는 방법이라고 혹은 이렇게 '해야 한다'며 아이를 교정하려 애를 쓰면 쓸수록 사실상 아이는 위축되고 재량은 줄어든다. 이런 개입이 반복되면 아이는 점점 외부 세계에 주어진 룰부터 찾으려고 하며 주변 눈치를 보고 불안해한다.

결국 아이는 자기가 즐기는 놀이에서조차 주도권을 잃게 되고, 아빠가 노는 방식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정작 본인은 금세 흥미를 잃고 만다. '아빠주도형 놀이'의 탄생이랄까. 솔직히 나는 드러나지 않게 내심 이 모든 과정을 아이가 체화(體化)하길 기대하며 은근히 아이에게 강요하는 편이다. 내가 '범생처럼' 자라왔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그렇게 내 DNA를 전수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강요에도 자기주장을 분명히 해주는 아이가 신기하고 고맙다. 아이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넨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을 정도의 소리로. 오늘도 나는 한걸음 물러서서 대답한다.

"아, 미안. 네가 혼자서 해봐."

실내놀이터, 부모의 아바타 놀이터

기사 관련 사진
 아이의 창의력은 '방해받지 않음'에 있다.
ⓒ 김용주

관련사진보기


실내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배우는 게 많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몰입'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학습한다. 재미가 있으면 친구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30분이 넘도록 집중력을 가지고 특정한 관찰과 행동을 지속한다.

때론 과학자를 방불케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다가 때로는 꺄르르 혼자 빵 터져서 몇 분을 구르기도 한다. 이때 가장 큰 방해꾼은 유감스럽게도 나 같은 '부모들'이다. 부모의 놀이 방식과 아이의 놀이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아이의 놀이 방식은 무질서하거나 위험하고 더럽기 때문에 종종 '틀린 방식'으로 치부된다.

놀이터에서 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몰입 단계에 들어가기 직전, 부모들의 개입이 시작된다. "OO야, 그거 입에 물면 안돼", "OO야 소리지르지마, 시끄러워", "OO야, 일어나 바닥 더러워" 등과 함께 아이들이 노는 순간에도 부모들은 적극적으로 아이들 사이를 중재한다.

"OO야 빨리 장난감 친구에게 줘. 니가 형이잖아."
"OO야 저기 동생이랑 같이 블록 쌓아봐."

멀리서 보고 있으면 마치 아이들은 부모의 아바타가 된 것처럼 부모의 룰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이내 자율성을 잃은 채 불안해하며 노는 중간중간 부모의 눈치를 본다.

불안해진 아이들은 부모를 찾게 되고, 이제 부모는 아이 곁에 아예 붙어 앉아서 제대로 놀이 지침을 교육시킨다. "OO야 우리 블록으로 집을 만들어볼까" 부모는 아이에게 집을 만들어주고 자동차를 만들어준다. 아이는 부모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 작품을 가지고 잠시 놀다가 이내 싫증을 낸다.

악순환으로 점점 엄마 아빠가 바빠진다. '엄마, 이거 해줘' '집 만들어줘' '여기에 올려줘' '나는 잘 못하니까 아빠가 이걸 해줘' 등등. 부모는 잠시라도 자기가 없으면 아이가 혼자 놀 줄 모른다고 한숨을 내쉰다. 놀이터에서조차 내 시간 없이 아이에게 '올인'한다고 주변 부모들에게 하소연을 한다. 그러다 이내 자기 아이를 보고 소리친다.

"OO야 그렇게 만들면 안돼. 집이 무너지잖아!"

두세 살 난 유아를 키우는 부모나, 고3 입시생을 키우는 부모나, 어떤 길을 만들어놓고 아이를 그 길로 걷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부모들은 아주 초기 단계부터 아이의 자발성을 왜곡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유아를 돌봄에 있어 위험한 상황들이 있다. 어릴수록 질병에 노출되기 쉽다. 그렇다고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온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아이를 매순간마다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 항균 티슈로 닦은 장난감만을 가지고 놀게 할 수는 없다.

아이 입장에서 그것은 스스로가 즐거운 놀이일 리 없다. 그저 하나의 역할극 내지는 무선 조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아이의 몰입에 의한 학습 발달을 방해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잦은 개입과 방치를 넘어

기사 관련 사진
 부모에게는 아이의 몰입을 위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 김용주

관련사진보기


물론 그 반대의 극단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를 놀이터에 던져 놓고 자신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책을 읽는다(솔직히 내가 종종 그렇다, 흑…) 때때로 부모는 '개입하지 않음'과 '방치'를 오해한다. 나 또한 일상적으로 아이와 겪는 일이기도 하다. 하루는 아이와 자려고 누웠는데 하품을 하고는 눈물을 닦더니 갑자기 '눈물'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 "아빠. 눈물에서 기름 냄새가 나."
: "무슨 눈물에서 기름 냄새가…. (말 멈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입을 닫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성하의 말을 막고 싶지 않았다.)

아이: "눈물이 줄줄줄 내려오면 입안에 들어가는데 그때 여러 가지 냄새가 나거든. 햄 냄새도 나고, 치킨 냄새도 나고, 어… 어… 막 그래…."
: "크크크, 아, 그렇구나. 아빠는 잘 몰랐네. 눈물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구나. 너 어떻게 알았어?"
아이: "나…, 나 먹어봐서 다 알아.(뭔가 무게 잡는 듯한 눈빛)"

사실 아이가 첫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무슨 눈물에서 기름 냄새가 나니? 냄새가 아니고 '맛'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건 소금 맛이야"라고 말하려고 했다. 아마 그랬다면 소심한 우리 아이는 '눈물은 소금 맛'이라는 아빠의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냄새로 표현했다는 점 그리고 눈물의 맛(냄새)이 기름·치킨·햄과 같았다는 말에 놀랐다. 눈물이 짜기는 하지만, 소금 맛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서, 아이는 간이 밴 음식들을 떠올린다는 사실에 나는 전율하기까지 했다.

사소한 일로도 우린 부모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훼손하고 난도질하고 있을까. '정답'에 이르는 빠른 길을 알려준다며 부모의 언어와 생각을 자녀에게 이식시키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참으로 아이의 자라남은, 오름직한 동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처럼 예민하게 느끼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공감되지 않는 움직임이 많다. 내가 매일을 분주하게, 그리고 어딘가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마다 지나치는 많은 아이의 몸짓과 속삭임이 있으리라.

매번 명시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순간에도 부모는 아이를 교육할 수 있다. 부모는 자주 아이의 세밀한 행동들을 관찰해야 한다. 아이는 도약하기 직전의 선수나 멀리 뛰기 위해 잠시 몸을 웅크린 개구리 같다. 아이의 작은 몸짓·표정·손길·한마디 툭 내뱉은 말을 읽으면서 내 아이의 독특한 성격과 욕구 그리고 성장의 속도를 유추할 수 있다. 때때로 적당한 수준의 부모의 개입은 벽을 향해 계속 걸어가는 모터 로봇의 방향을 돌려놓은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작은 매듭에 걸려 헝클어진 실의 한쪽 끝을 풀어주면 긴 실타래가 한번에 풀리는 것처럼 아이는 더 높게 멀리 뛸 수 있다.

잦은 개입과 완전한 방치의 극단 사이에서 적당한 수준의 거리 두기와 적당한 개입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관찰자'로서 부모가 자리매김하는 게 아이의 '창의력 돋는 몰입 행위'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직 더 배울 것이 많겠지만 현재로서 내가 느끼는 부모의 자리는 그렇다. 오늘도 내 식이 아닌 아이의 방식을 생각하며, 아이와 함께 있는 순간만은 아이의 언어에 더 귀를 기울이자고 다짐하는 날이다.
2013/08/04 23:02 2013/08/04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