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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지금껏 이런 일을 해왔단 말인가
웹툰 <미생>에 공감... 남편, 아내의 일상적 책임부터 나눠가져야


 

 

최근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 121회(4월 19일)를 보면서 갑자기 예전에 '귀남이'로 유명했던 드라마 <아들과 딸>이 생각났다. 가부장적인 창작물의 대명사였던 <아들과 딸>을 넘어서는 디테일에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미생>(프로기사만을 목표로 살아오던 주인공 장그래가 '회사'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겪는 일들을 그린 웹툰) 121회분 에서도 보여주듯, 이 나라의 여자들은 일상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직장생활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어야 살아남는다.

 

그래서 성공신화의 여성 임원들은 모두 수퍼우먼들이다. 열정적인 실무자이면서도 자상한 어머니상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남는다. <미생>에 나오는 여성도 가사 육아를 모두 해내면서 대기업 '차장'으로 진급했지만 엄마의 역할을 강요받으며 가장 인정받아야 할 가정에서마저 그 자리를 위협받는다.

 

남성은 '가장'이라는 명분으로 더 좋은 직장을 위해 몇 개월의 '잉여생활'도 이해받을 수 있고, 진급을 위해 집에서도 모든 노동에서 면제받는다. 진급 문제가 아니어도 직장에서의 '생존' 그 자체의 명분을 위해서도 집에서는 피로회복을 위해 낮잠도 자고 사람도 만나러 다니고 회사 단합대회로 낚시나 등산도 한다. 반면 여성은 퇴근 후 엄마의 부재에서 오는 아이의 '정서적 결핍'에 노심초사하며 짜투리 시간 모두를 쏟아 붓는다. 그도 모자라서 직장생활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남성은 결혼 이전부터 공부만 하면 모든 가정일에서 면제 혜택을 누렸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남성들은 밤새도록 공부만 해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오고 과일도 깎아주고 행여 방해될까 부모들이 TV도 꺼주고 과외학원도 알아봐줬다.

아이돌 가수 키우듯 대학 입학 때까지 공부 외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던 남성들은 결혼을 한 후에도 직장이라는 또 다른 '장'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생존 경쟁을 한다. 그 동일한 방식이라는 것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주변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희생의 대상은 자주 '아내'의 몫이 되곤 한다.

 

아내는, 한 회사의 모범 직원이자 가정의 성실한 가사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들을 잘 소화하고도 '엄마'로만 남기를 종용당한다. 그리고 그 논리는 '여성' 그 자신이 아닌 누구의 엄마로서, 대출을 갚는 식구로서, 남편의 성공을 돕는 아내로서의 정체성일 뿐. <미생>은 이런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잘 담았다. 나도 많이 배웠다. 여성문제에 더 고민하고 더 좋은 조력자가 되기 위해. 갈 길이 멀다.

 

 

많고 많은 집안일... 하지만 티가 안 난다
<미생>에서 개인적으로 주의깊게 지켜본 부분은 남편과 아내가 말다툼을 하는 과정에서도 아내가 쉴 새 없이 집안 일을 하는 대목이었다. 남편은 '그만하자'며 자리를 피하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아내는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닦은 후 가계부를 펴고 계산기를 두드리다 새벽 2시 즈음에나 잠자리에 든다. '혼자 낭만 다 차지하고 앉아서 나만 현실과 싸우란 거야, 뭐야' 그녀의 넋두리가 들린다.

 

우리 부부도 만화 속 장면에 공감하게 된 계기가 있다. 신혼 초에 아내가 직장을 잠시 그만 두었고 나는 갑자기 회사일이 바빠져서 자연스럽게 어영부영 집안 일은 아내 몫이 되었다. 나는 작은 일을 해도 생색을 내는 게 익숙한 캐릭터라 집안일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아내에게 생색내기 일쑤였고 아내도 초반에는 그런 나를 다독여줬다. 허나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아내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당신도 집안일의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실제적으로 나에게 다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아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집안일을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난 그 둘의 '차이'를 알지 못해 아내와 많이 다퉜다.

 

지금도 아내의 기대에는 못 미치겠지만 요즘은 빈말이라도 간간이 칭찬도 해줄 때도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제서야 고백하건대 집안 일은 정말 지랄같다. 회사원 마인드로 보자면 맨아워(1인 1시간의 노동량)는 끊임없이 드는데 티가 정말 하나도 안 나는 일이다. 젠장.

 

요즘 주말 매식비가 많이 들어 한 번은 이틀간 밥 여섯끼를 다 만들어 먹어보았다.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일단, 아침 점심 저녁을 먹으려면 식단을 짜야 한다. 5살 아이가 있으니 대충 먹더라도 영양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고로, 하루 한두 끼는 밥상을 제대로 차려야 한다. 밥상을 차리고 나면 먹는 건 10~20분이지만 다시 끼니마다 설거지가 쌓인다. 설거지를 다하면 음식 쓰레기를 모아서 버려야 한다.

 

밥 뿐이랴. 누가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속옷과 아이 옷은 삶아야 하니 따로 분리하고 울빨래거리와 걸레들도 따로 돌리니 분류할 때부터 나름 손이 많이 간다. 빨면 널고, 마르면 거둬서 갠다. 세탁기의 세탁망도 주말에는 뜯어서 찌꺼기를 제거해야 한다. 침대 시트도 갈아야 하고 주 1~2회는 침구 청소기를 돌린다. 침구 청소기는 망을 매번 빨아야 한다.

 

가습기 물도 매일 보충해야 하고 매번 깨끗이 행궈야 균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여 매번 열과 성을 다하여 행군다). 청소기 돌리고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제거하는 일도 해야한다. 그 외에도 휴지통 비우기,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식수 채우기 등 자잘하고 귀찮은 일들이 부지기수고 왔다갔다 하며 그런 일들 하다보면 두세 시간은 금방 가버린다.

 

아이 어린이집 준비물에 독서 숙제도 있고 날짜마다 입금해야 하는 돈도 많고, 씀씀이가 커질까봐 작년부터 시작한 가계부 쓰기도 해야 한다. 키우는 강아지도 주 1회는 목욕을 시켜줘야 하고 간간이 산책을 다녀야 이 녀석도 우울해하지 않는다. IT기기들도 펌웨어, OS업그레이드에 그간 찍은 사진 정리, 자료 정리, 아이 동영상 파일 정리들을 수시로 해줘야 나중에 지워지거나 분실할 염려가 없다.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 적어보면 많아도 정작 해도 생색낼 거리가 하.나.도. 없.다. 안 하면 티가 확 나지만 200%를 해도 차이를 잘 모를 일들이다. 차라리 자크 라깡 같은 사상가의 책 한 권을 읽고 서평 몇 줄 끄적이는 것만 못하다(때로 인터넷에서 파워블로거나 서평의 달인으로 인정받는 남편들이 키보드에 붙어사는 동안 아내는 허드렛일로 앉을 새도 없이 왔다갔다 분주한 건 아닌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

 

 

남편이 아내의 일상적 책임부터 분담해야

사실 신혼 초에도 나는 위에 언급한 모든 일 중 많아야 두세 가지의 일만 했다. 이유는 아내가 휴직을 했다는 것. 공학도인 내 입장에서 나름 공평한 업무 분배였다. 그 몇 가지의 일을 하면서도 나는 내심 내가 '아내가 할 일'을 돕는 좋은 남편이라고 으쓱댔다. 언젠가, 부부싸움 끝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내가 다 하겠다고 큰소리 치고는 아내가 하는 일을 일일이 따라 해보았다. 물론 매일매일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집안 일은 내 회사 업무량과 비슷했다. 특히 출산과 육아 초반의 가사노동량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아내에게 얘기한다. 내가 자취할 때 난 이런 프로세스로 살지 않았다고(더럽게 살았다는 말이다). 아내는 대답한다. 아이와 자기와 함께 살려면 내가 자취하던 그 프로세스로는 살 수 없다고. 물론,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를 분담하고 때때로 전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동료가 계속 허드렛일을 하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다들 걱정한다. 그가 혹여 '내가 이런 일 하러 고생하며 이 회사 들어왔나' 하는 생각을 할까봐, 그러다 퇴사를 하거나 팀을 옮길까봐 그렇다.

 

집에서 아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 받아줄 사람은 남편 밖에 없다. 짐을 나눠질 사람도 남편 밖에 없다. 등산도 다니고 낚시도 다니고 동호회 활동도 할 수 있는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자기계발을 해서 더 나은 사회적 입지를 얻을 아내를 만들어 줄 사람은 남편 뿐이다. 이른바,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모두 전담할 수 있는 탁월한 '엄마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면 아내의 자기계발, 혹은 2~3일의 정줄(정신줄) 놓은 외출이 가능하다.

 

이제 나의 아내는 외출이 가능하다. 며칠 친구들과 놀다와도 일상에 별 지장이 없다. 이 사실이, 가부장적 한국사회에서 의미하는 바는 크지만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내가 가정에서 '엄마역할'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간간이 쓰는 현학적인 글들보다 더 의미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내가 낼 수 있는 생색은 이런 거라고 본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8131

2013/04/26 00:50 2013/04/26 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