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도 만난 지 10년째, 결혼한 지 9년이 지났다. 우리도 종종 농담처럼,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살아야 하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청년시절에 즐겨 읽던 트로비쉬 부부의 책이나 폴 스티븐스가 말하는 '영혼의 친구'로서의 부부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신실하고 굳건하게 관계가 무르익을 줄 알았는데 솔직히 결혼이라는 게 장난이 아니구나, 정말 만만치 않구나 하는 생각만 커져간다. 따지고 보면 주변에 불륜 이야기도 많고 최근에는 심지어 말로만 듣던 이혼을 실행하는 부부들도 생겼다. 요즘은 이혼을 소재로 한 막장 드라마가 심야에서 아침으로, 다시 저녁 안방극장으로까지 퍼지는 느낌이다.
이혼이라... 우리 부부도 간혹 심하게 다투는 날이면 이혼이란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다툼이 심해질 때면 아내가 먼저 '이혼해주면 될 거 아냐'라는 말을 내뱉곤 했는데, 솔직히 나는 그 말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싸우다가 이혼이란 말을 내뱉으면 진짜 이혼할 거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혼이라는 말이 아내의 입에서 나오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무서웠다. 부부싸움이라는 게 대부분 사소한 일로 시작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만큼은 내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런 과도한 공포심의 원인은 관계에서 갈등상황을 겪고 싶지 않아하는 내 성격적 결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이혼 자체를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단 한번도 이혼을 상상하거나 꿈꿔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부부싸움이 끝난 후 차츰 공포심이 사라지고 나면 멍하니 앉아 이혼을 상상해보곤 했다. 상상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내 기억에 크게 두 번 정도, 아내와 진지하게 헤어질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결혼한 첫 주에 시작된 부부싸움에서였다. 연애할 때와 달리 아내는 결혼 후의 부부싸움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게다가 결혼한 후라서 그런지 그간 숨겨왔던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싸움 후에 항상 먼저 사과하긴 했지만 그간 내가 알던 여친과는 너무 달랐다. 과연 이 여자와 계속 이렇게 다투며 살 수 있을지,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 건지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두 번째는 불과 2, 3년 전의 일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육아의 늪을 통과하자 불현듯 아내는 내가, 나는 아내가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육아기간 동안 부부생활이 아이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30대 중반을 통과하면서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자기 본연의 성격과 모습을 발견해갔다. 이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긴 쉽지 않다. 어쨌든 서로가 본연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건, 그리고 그것을 일상적으로 매일 가까이에서 서로 지켜본다는 건,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 이상의 낯선 느낌을 가져다주곤 했다. 일례로 우리는 신혼 때 종종 함께 여행을 다녔는데 둘이 함께 있는 것이 마냥 좋았던 시기가 지나자 우리는 서로의 취향이 반대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내는 텐트를 치고 거친 공간에서의 모험을 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는 호텔 같은 깨끗하고 조용한 휴양소에서 쉬는 것을 즐겼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세상이 규정지은 학생 티, 혹은 아들딸의 티를 벗으면서 더 각자의 빛을 발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서로에게 이끌렸던 특정한 코드들이 희미해지거나 오히려 배치되는 것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의견충돌이 너무 심해서 아내를 놓아주는 것이 어쩌면 아내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이성적인 판단마저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건 아이뿐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면 아이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뭐랄까, 사막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 내가 누군가를 놓아준다고 말하지만 정작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했다.
그렇게 몇 년간 우리는 서로의 차이에 대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에게 잘 보이려는 연애감정 때문에 그동안은 가려졌던 서로의 적나라한 모습을 더 많이 볼 수도 있었다. 때로는 이렇게 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부부라는 울타리 속에서 부대끼는 ‘낯선 타자’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더 많이 알고, 느끼고,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한번의 이혼을 경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상당수의 부부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는 더이상 관계의 깊은 성찰 없이 허울좋게 혹은 일종의 체면 때문에 내적인 변화들, 그에 따르는 불편한 감정을 꼭꼭 감춰두고 싶어 한다. 적어도 아내와 나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내놓을 수 없는 그런 감정에게 자리를 허락하고 정직하게 대면했다. 사실 우리는 이혼을 외치면서도 정작 헤어짐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혼, 그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단절감,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는 느낌, 혹은 주변의 시선들이 무서웠다.
문득 지난 대선 직전에 문재인 후보가 했던 인터뷰가 생각났다. 질문 중에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결혼하시겠냐는 물음에 문 후보는 훈훈한 분위기에서 "다음 생에는 다른 사람이랑도 살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그의 대답이 전혀 어색하거나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물론 대중들은 동화 같은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길 원했겠지만 나는 그 말이 더 여유롭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우리 부부도 이제 헤어짐을 말할 수 있다. 이혼의 ‘이’자만 나와도 이성을 잃던 나조차 이제는 농담도 자주 건넨다. 한번은 아내가 "아무리 사랑이 식어도 아이가 불쌍하니 성인이 될 때까지는 ‘의리’를 지키자"고 말했다. 나는 황당하다는 듯, 혹은 어이없다는 듯 아내를 쳐다봤다. 순간, 아내도 웃고 나도 웃었다.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우리의 결혼은, 이렇게 하루하루 연장되고 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