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결혼일기
혼인 서약을 할 때 부부간에 '영원히' 사랑할 것을 유독 강조한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부부는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결혼식을 하던 그때 그 마음 같지만은 않다. 가까운 지인들과 부부동반으로 모이면 짓궂은 농담처럼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배우자에 대한 애정이 식었음을 토로한다. 시내를 걷다가 남편이 젊은 여자의 몸매를 곁눈질해서 속상했다는 아내도 있고,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던 아내가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을 향해 ‘저런 남자랑 잠시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더라는 남편들의 하소연도 종종 듣는다.

아내와 나도 만난 지 10년째, 결혼한 지 9년이 지났다. 우리도 종종 농담처럼,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살아야 하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청년시절에 즐겨 읽던 트로비쉬 부부의 책이나 폴 스티븐스가 말하는 '영혼의 친구'로서의 부부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신실하고 굳건하게 관계가 무르익을 줄 알았는데 솔직히 결혼이라는 게 장난이 아니구나, 정말 만만치 않구나 하는 생각만 커져간다. 따지고 보면 주변에 불륜 이야기도 많고 최근에는 심지어 말로만 듣던 이혼을 실행하는 부부들도 생겼다. 요즘은 이혼을 소재로 한 막장 드라마가 심야에서 아침으로, 다시 저녁 안방극장으로까지 퍼지는 느낌이다.

이혼이라... 우리 부부도 간혹 심하게 다투는 날이면 이혼이란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다툼이 심해질 때면 아내가 먼저 '이혼해주면 될 거 아냐'라는 말을 내뱉곤 했는데, 솔직히 나는 그 말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싸우다가 이혼이란 말을 내뱉으면 진짜 이혼할 거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혼이라는 말이 아내의 입에서 나오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무서웠다. 부부싸움이라는 게 대부분 사소한 일로 시작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만큼은 내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런 과도한 공포심의 원인은 관계에서 갈등상황을 겪고 싶지 않아하는 내 성격적 결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이혼 자체를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단 한번도 이혼을 상상하거나 꿈꿔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부부싸움이 끝난 후 차츰 공포심이 사라지고 나면 멍하니 앉아 이혼을 상상해보곤 했다. 상상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내 기억에 크게 두 번 정도, 아내와 진지하게 헤어질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결혼한 첫 주에 시작된 부부싸움에서였다. 연애할 때와 달리 아내는 결혼 후의 부부싸움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게다가 결혼한 후라서 그런지 그간 숨겨왔던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싸움 후에 항상 먼저 사과하긴 했지만 그간 내가 알던 여친과는 너무 달랐다. 과연 이 여자와 계속 이렇게 다투며 살 수 있을지,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 건지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두 번째는 불과 2, 3년 전의 일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육아의 늪을 통과하자 불현듯 아내는 내가, 나는 아내가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육아기간 동안 부부생활이 아이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30대 중반을 통과하면서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자기 본연의 성격과 모습을 발견해갔다. 이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긴 쉽지 않다. 어쨌든 서로가 본연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건, 그리고 그것을 일상적으로 매일 가까이에서 서로 지켜본다는 건,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 이상의 낯선 느낌을 가져다주곤 했다. 일례로 우리는 신혼 때 종종 함께 여행을 다녔는데 둘이 함께 있는 것이 마냥 좋았던 시기가 지나자 우리는 서로의 취향이 반대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내는 텐트를 치고 거친 공간에서의 모험을 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는 호텔 같은 깨끗하고 조용한 휴양소에서 쉬는 것을 즐겼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세상이 규정지은 학생 티, 혹은 아들딸의 티를 벗으면서 더 각자의 빛을 발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서로에게 이끌렸던 특정한 코드들이 희미해지거나 오히려 배치되는 것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의견충돌이 너무 심해서 아내를 놓아주는 것이 어쩌면 아내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이성적인 판단마저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건 아이뿐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면 아이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뭐랄까, 사막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 내가 누군가를 놓아준다고 말하지만 정작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했다.

그렇게 몇 년간 우리는 서로의 차이에 대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에게 잘 보이려는 연애감정 때문에 그동안은 가려졌던 서로의 적나라한 모습을 더 많이 볼 수도 있었다. 때로는 이렇게 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부부라는 울타리 속에서 부대끼는 ‘낯선 타자’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더 많이 알고, 느끼고,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한번의 이혼을 경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상당수의 부부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는 더이상 관계의 깊은 성찰 없이 허울좋게 혹은 일종의 체면 때문에 내적인 변화들, 그에 따르는 불편한 감정을 꼭꼭 감춰두고 싶어 한다. 적어도 아내와 나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내놓을 수 없는 그런 감정에게 자리를 허락하고 정직하게 대면했다. 사실 우리는 이혼을 외치면서도 정작 헤어짐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혼, 그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단절감,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는 느낌, 혹은 주변의 시선들이 무서웠다.

문득 지난 대선 직전에 문재인 후보가 했던 인터뷰가 생각났다. 질문 중에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결혼하시겠냐는 물음에 문 후보는 훈훈한 분위기에서 "다음 생에는 다른 사람이랑도 살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그의 대답이 전혀 어색하거나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물론 대중들은 동화 같은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길 원했겠지만 나는 그 말이 더 여유롭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우리 부부도 이제 헤어짐을 말할 수 있다. 이혼의 ‘이’자만 나와도 이성을 잃던 나조차 이제는 농담도 자주 건넨다. 한번은 아내가 "아무리 사랑이 식어도 아이가 불쌍하니 성인이 될 때까지는 ‘의리’를 지키자"고 말했다. 나는 황당하다는 듯, 혹은 어이없다는 듯 아내를 쳐다봤다. 순간, 아내도 웃고 나도 웃었다.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우리의 결혼은, 이렇게 하루하루 연장되고 있다. (끝)


-----
*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악당으로, 작중 마법사 세계에서 이름을 부르기조차 두려워할 정도의 대상이다.
2014/12/05 18:35 2014/12/05 18:35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결혼일기
"우리집은 아들만 셋이에요. 아빠나 아들 둘이나 어쩜 하는 짓이 똑같은지."
"우리집은 딸만 둘이에요. 퇴근하면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주변 부부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다. 우리 부부도 가끔씩은 서로를 ‘딸-아빠’, ‘아들-엄마’의 관계로 환원시켜놓고 은근슬쩍 상대방을 갈구기도 하는데 이런 농담이 자칫 지나치면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농담처럼 얘기한다 하더라도 상대를 아들, 딸로 치부하는 대화의 기저에는 내심 상대를 도움이 필요하고 보살펴야 하는 수직적 관계의 대상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을 다녀온 아내에게 “애나 엄마나 돈 아까운 줄 모른다”라고 말하거나, 아이를 훈육하려는 남편에게 “애랑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아라”라며 툭 던지는 말을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발끈하여 결국엔 부부싸움의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부부 사이 연륜이 쌓여서 이런 모종의 역할극을 잘 주고받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잘만 대처한다면 아빠 같은 남편, 엄마 같은 아내의 위치에서 이른바 ‘베푸는 자’의 뿌듯함을 누리게 된다. 내 아내는 어릴 때부터 남동생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탓에 성인이 되어서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질 수 없었던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나는 그런 물건들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기념일 같은 날 깜짝 선물을 해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진심으로 기뻐하곤 했다. 그 행복한 얼굴과 상기된 목소리라니. 그때 내게 보여준 아내의 웃음과 고맙다는 말들, 그 따뜻한 느낌은 지금도 선물 자체가 무색하리만치 소중한 기억이다. 반대로 내가 두통에 시달릴 때면 아내는 나를 자기 무릎에 눕혀서 머리를 안마해주고 새벽까지 끓인 배숙을 챙겨주었을 때는 마치 다시 보살핌을 받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를 떠나왔지만 이제는 새 엄마처럼 아내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그런 안정감이 서른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솔직히 싫지 않았다.

하지만 부부 간의 이런 ‘엄마, 아빠 역할극’을 계속 즐기다 보면 아들과 딸이라는 미숙한 상태에 머무르고 싶은, 혹은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커져 어느새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상대방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들곤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약했던 건강을 빌미로 몸이 아플 때는 주변 사람들이 마치 엄마가 나를 대하듯 걱정해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물론 대놓고 타인에게 표현한 적은 없다.) 그래서 아내에게도 평소엔 내가 헌신적일 수 있지만 적어도 몸이 아플 때는 좀 과하리만치 나를 아들 대하듯 ‘우쭈쭈’라도 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내심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릴 때부터 건강했던 아내는 전혀 공감할 수 없어 하는 눈치였다. 도리어 아내는 내가 건강상의 적신호를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그냥 방치해 버리는 내 습관을 읽어냈다. 아플 기미가 보이면 쉬면서 몸을 보호하거나 병원에 가서 약을 먹어야 하는데, 나는 의도적으로 더 과로를 했고 병을 키웠다. 그리고는 머리를 싸매고 비장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곤 했다. 안쓰러운 얼굴로 머리에 손이라도 얹어주길 바라며. 물론 아내는 그럴 때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병원에 보냈다.

역할극만이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 더 미묘한 부부 사이의 우월감과 열등감도 존재한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고 아내와 나는 미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되었다. 연애를 할 때, 아니 신혼 초까지만 해도 콩깍지가 씌어서인지 서로가 좋게만 보였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흐르자 나는 아내가, 마치 한 공간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조용한 집에 단둘이 있으면서도 서로가 각자의 일에 몰두할 때면, 적절한 표현이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뭐랄까, 어떤 친밀함, 에로틱한 느낌과는 사뭇 다른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거기엔 라이벌 관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경쟁심마저 존재했다. 배우자가 가진 어떤 재능이나 성격, 직관력, 풍성한 인간관계, 사회적 자본(아비투스)을 은근히 부러워하기도 하고 유년시절 부모와의 친밀도가 뜻밖의 질투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마치 그림자에게 쫓기듯 아내는 나와, 나는 아내와 보이지 않는 경쟁을 했다. 솔직히 우리는 상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보다 정직하게 내면 깊은 곳에서 인지되는 어떤 우월감과 열등감을 직면하는 날엔 함께 살을 부비며 누워 있어도 서로에게서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아내를 통해, 아니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선을 보다 세밀하게 경험하며 산다. 나도 알지 못했던 나를 대면하는 경험을 한다. 물론 지금도 그 경험은 ‘현재진행형’이다. 때론 아내에게 아들이고 싶은 내 모습과 더불어 아내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는 아빠가 되고 싶은 내 이중성을 본다. 때론 그보다 더 창피한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나름의 꿈을 꾼다. 그런 거창한 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한다. 특히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많은 교인들이 ‘공동체’를 말하고 ‘관계중심적’인 담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한 인격을 통해 나의 내면을 투영해볼 만큼 깊은 관계에 집중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라는 역학관계는 여전히 아내와 나에게 많은 화두를 던지는 듯하다. 나는 기대해 본다. 이 모든 감정선의 기복을 털어내고 아내에게 그저 사랑하는 남편이자 진정한 친구로 자리매김할 날을, 그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아내와 한 공간 안에서 일상을 보낸다.
2014/10/01 19:58 2014/10/01 19:58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결혼일기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낯선 일이다. 이성을 보고 불현듯 가슴이 설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 사람을 계속 떠올리며 히죽거리고, 만나면 자주 ‘정줄’을 놓게 되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여름에도 찰싹 붙어 다니는 이 기이한 현상들... 지금도 주변을 둘러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전국에서는 주말마다 남남이었던 수백 쌍의 커플이 결혼을 한다. 결혼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그 기저에 '므흣한' 스킨십과 섹스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그것이 이전에 가능했다 해도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즐거움이 분명 존재한다. 뭐랄까, 이제는 부모에게 쉬쉬하지 않아도 되는 쾌락이라는 점에서 결혼이라는 굴레가 더 은밀한 자유를 허락하는 역설적인 묘미가 있는 셈이다.

사실 이번 글은 쓰면서도 도대체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지금도 쓸 말보다는 쓰지 않을 말들에 대한 머릿속 계산 속도가 더 빠르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부터 나는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그건 마치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의 확신'처럼 내겐 자명한 진리 같았다. 나는 부드러운 남자고 여자들과 말도 잘 통하고 이성교제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으니, 이 결혼이 아내에겐 참 '남는 장사'일 거라는 황당한 자기확신 같은 게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대와는 달리 우리 부부는 여전히 육체적으로 친밀하지 않다. 오히려 대화로 더 즐거움을 얻는 편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 청년시절에 꿈꾸던 '나쁜 짓'을 대놓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 '나쁜 짓'이라는 게 삶의 다른 일상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사이의 온갖 정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남성으로서의 내 문제도 발견했다. 성관계를 몸의 대화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아내와의 기나긴 대화 끝에 갖는 ‘스트레스 해소’의 시간으로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아내와 몸으로‘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내겐 피곤하면서도 일정 부분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그 무엇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결혼 직후에는 야릇한 긴장감을 즐기며 섬세하게 배려하고자 노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적 본능 사이에서 나는 심한 내적 분열을 경험했다.

솔직히 나는 부부관계에서 육체적 교감에 관한 어떤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물론 책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욕구를 참는다거나 아내의 반응을 살핀다거나 하는, 이런 식의 몸의 대화가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았다. 매순간 아내와 교감을 나눠야 하는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몸은 잘 따라오지 않았다. 아니 그 상황 자체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는 '몸을 통해' 즐거운 날들도 있었지만 나의 즐거움이 아내에겐 도리어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아내 또한 성적인 대화가 편하지 않았기에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간혹 정서적 불편함을 표현하곤 했다. ‘여자는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몸의 대화가 점점 불편해졌다. ‘구원의 확신’만큼 확실하던 내 성적 자존감은 어느덧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 어딘가를 서성이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내 고민은 우리 사회의 보다 깊은 영역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른바 부부 사이의 성적 역학관계라고 해야 할까. 

가부장적인 한국사회 남자들의 대다수는 섹스에 관한 한 여전히 일방적인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욕구에 대해 매순간 여성이 이해하고 받아줄 것을 기대한다. 통계적으로 여성들의 상당수가 자신은 즐겁지 않더라도 남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성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섹스가 두 사람 사이의 또 다른 대화의 형태가 아닌 아내의 일방적 봉사인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주변에서는 육아에 지친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한다고 불평하는 남편들의 당당한 하소연도 종종 들린다. 한때 아내가 가입했던 인터넷 출산육아 카페에서 남편의 성욕해소를 위해 임신 중에 유흥업소 출입을 방관했던 엄마들 이야기를 읽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 글에 공감의 댓글을 다는 아내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교회 안의 결혼예비학교에서도 사역자들이 공공연하게 남편의 성욕을 아내가 ‘긍휼한 마음’으로 해소시켜줘야 한다는 말도 한다. 이렇듯 부부간의 섹스는 내 세대에서조차도 여전히 남편의 성욕을 받아주거나 아니면 받아줄 수 있는 다른 방법마저도 허용하는 느낌이 강하다.

남성의 성욕을 언제나 긍정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남성의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 말이 불편하다면 고쳐 말해서 성욕이 해소되지 않을 때 그의 전 인격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전 존재가 거부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성욕의 좌절 그 이상의 감정적 동요에 휩싸였다. 나는 이것이 남성의 성욕을 절대시하는 이 사회가 개별 남성 한 명 한 명의 깊은 내면에 뿌리내린 부정적 영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흔한 말로 부부싸움 후의 섹스에 대한 농담이 그런 단적인 예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로 잠자리(성욕의 해소)를 들지만, 이것이 아내의 입장에서는 ‘신앙적 긍휼함'이었거나 '굴욕적 외교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는 자주 부부관계를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관계에 비유하곤 했다. 미숙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을 기대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땐 환호했지만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길 원할 때는 불편해 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이라 일컫기도 했다. 혹은 아예 하나님을 떠나 풍요를 빌어주는 이방신을 섬기기도 했다. 나는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성경 속 백성들이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남편들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결혼생활의 전 영역에서 모범 남편이 되고 싶어 하는 기대와는 달리, 나는 성적인 부분에 있어 왜곡되어 있고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현실적 문제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사실 아직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 그것이 남성인 내겐 구원이자 희망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계속)
2014/07/31 21:30 2014/07/31 21:30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결혼일기

연애를 할 때도 그랬지만 결혼 후에도 아내는 자주 나에게 고마워했다. 결혼 후 아내의 내면을 좀 더 깊이 알게 되면서 신혼 초에는 관계 자체가 힘들 때도 많았다. 아내는 마치 개학을 앞두고 방학숙제를 해치우는 아이처럼, 나와 만난 이후부터 밀도 있게 내면의 많은 문제와 씨름을 했다. 때로는 며칠을 두문불출하며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고 한동안은 심리상담 치료를 받기도 했다. 내가 나름 의지가 되었던지, 아내는 가끔 농담조로 나에게 '아빠, 아빠'라고 말하기도 하고 분위기가 좋을 때는 정말 업어달라며 내 등에 올라타기도 했다. 하지만 침체되거나 분노에 휩싸이면 소소한 대화중에도 싸움이 커져 밤새 다투기도 했다.

일상적으로 부부 중 한쪽이 심하게 침체되면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솔직히 때로는 그런 아내가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여자의 어두운 내면에 잠식당하는 느낌, 나로 기인하지 않은 어떤 우울한 영향 때문에 함께 힘들어지는 정서가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그것보다는 아내를 통해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구나, 혹은 도움을 주는 어떤 존재구나 라는 생각에 속으로는 어떤 우쭐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다 보면 이런 정서적 도움을 주는 성숙한 인격이야말로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궁극적 존재’가 아니던가. 힘든 일상 중간 중간마다 아내가 고마워하면 나는 때때로 그 기분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나는 20대 초반부터 내면 정리를 성실히 수행해왔다. 부모 문제라거나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어려움들은 일찌감치 졸업했고 그 다음 단계로서의 어떤 모범적 신앙인, 사회인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런 고민들을 잘 정리해서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급기야는 주변 후배들에게도 ‘멘토’를 자처하며 지식을 쌓는 것과 더불어 상담 관련 책들도 읽고 나름의 정답을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어떤 면에서는 아내에 대한 나의 태도도 자주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무의식중에도 우회적으로 아내가 나에게 기대고 지속적으로 고마워하길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내 기준으로 볼 때 아내는 참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거나 계획한 일들을 미루는 것을 정말 싫어했지만, 아내는 마치 나보란 듯이 그것들을 자주 지키지 않았다. 아내와 여행을 가도 목적지에 가는 중에도 흥미로운 곳이 있으면 목적지는 잊은 채 그곳에 머물러서 풍경이나 주변을 즐겼고, 나는 일정이 틀어질 때마다 긴장하고 불편해했다. 겨울이면 동네 슈퍼에 물건을 사러 나왔다가 길가에서 발견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가져다주거나 바람막이 집을 지어주겠다며 몇 시간을 길바닥에서 허비하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아내는 아이와 길을 걷다가도 아이가 개미집을 발견하면 그곳에 함께 앉아서 한참을 개미나 다른 곤충들을 지켜보며 그것들과 같이 놀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내와 살면서 짜증이 나던 많은 상황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왠지 모르게 아이와 함께 놀 때마다 나는 시간에 쫓기듯 불편하고 불안해했다. 함께 여행을 할라 치면 정작 떠난 첫날부터 그다지 즐겁지 않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따지고 보면 내 삶이 딱 그랬다. 휴가 기간이 다가오면 휴가 계획을 세우고, 아이가 태어날 시기가 다가오면 육아 계획을, 하다못해 밥을 먹으러 가면 식사 계획을 세우고는 그것을 잘 수행하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뒀다. 그리고 아내에 비해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참으로 많이 보는 사람임을 발견했다. 그것이 관계에서는 행동에 대한 어떤 명분을 찾고자 애쓰는 모습으로, 글을 쓸 때조차 과도하게 방어적인 글쓰기 방식으로 드러나곤 했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어서 빨리 밀린 숙제를 마치고 자아를, 나아가 자신의 욕망과 행복을 찾아가는 아내의 몸부림으로 인해 원치 않게 나 또한 깊은 성찰 없이 내면의 문제들을 대충 덮고 앞으로만 나아가려던 내 안의 어떤 관성과 대면하도록 만든 측면이 있다. 나는 물리적으로는 부모에게서 독립을 했으면서도 인생의 매 단계, 삶의 구석구석에서조차 “잘했어 우리 아들”이라는 환청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니 삶은 긴장의 연속이며, 꼭 지켜야 할 그 무엇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것을 건조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건 그 구조 속에서 나름대로 ‘멘토링 게임’을 즐겼기 때문이다. 성취감과 함께 관계망도 조성되는 이 구조로 인해 나는 후배들에게도 자주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어떤 끈끈함과 뿌듯함을 누려왔다.

문득 집을 둘러봤다. 마트에서 독감으로 죽어가는 걸 아내가 발견하고 치료해서 키우는 모란앵무와 인터넷 카페에서 버려진 앵무새들, 그리고 다리를 다쳐서 몰골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던 길고양이 ‘마오’와 또 다른 길고양이 ‘나비’는 모두 아내가 데려와서 함께 살고 있는 동물이자 가족이다. 아내는 우리 아이와 더불어 자신의 주변에서 생명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니 내 입장에서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싱글 시절, 나는 집에 오면 밀린 일들을 하거나 죽은 시체처럼 잠을 잤다. 나에게 집은 일종의 배터리 충전소 같은 곳이었다. 지금은 집에 오면 많은 생물이 나를 반긴다. 어쩌다보니 나도 가끔 멍하니 그들과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변화가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일상적으로는 느슨한 아내의 삶이 불편하고 집안의 많은 생명체들이 낯설 때가 더 많다. 아내는 내가 아니듯 나 또한 아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는 매순간을 집중하며 충분히 누리고 있고 나는 어서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매순간 쫓겨 다니는 것도 같다. 때때로 결혼이란 도대체 뭘까 싶은 마음이 든다. ‘사랑’이라는 달콤한 기표가 벗겨지고, 원하든 원치 않든 결혼은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공존의 방식을 체득하도록 이끈다.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타자와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내 속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사실 아직은 이 모든 여정이 낯설다. 하지만 이제는 왠지 그 여정이 싫지 않다.

2014/06/03 21:29 2014/06/03 21:29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결혼일기

누구에게나 사랑이란 감정이 찾아온다. 나에게도 몇 차례 연애 기회가 있었고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그렇게 조금씩 경험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당시에 유행하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같은 가벼운 책에서부터 게리 콜린스, 폴 투르니에의 책들을 읽었으니 나름 선행학습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선교단체 소그룹 리더를 하면서 얻은 교제의 노하우들은 연애에 도움이 됐다. 자주 우려먹는 내면 깊은 곳의 이야기 하나를 풀어내다 보면, 몇 번 만나지도 않았지만 금세 상대방과 내면의 깊은 대화로 발전하곤 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다분히 왜곡된 연애 판타지 같은 게 있었는데, 백마 탄 왕자라거나 키다리 아저씨, 혹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이상형에 나를 동일시하곤 했다. 그렇게 내 연애는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정형화되었고, 그런 경험들은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졌다. 게다가 이런 헌신과 배려의 태도는 신앙적으로도 권장할 만한, 인간관계의 어떤 모범처럼 느껴졌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나아가 상대방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연애에서도 바람직한 자세로 보였다. 그 결과, 내게 연애는 필연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가는 설렘이 지나면 내 일방적 배려가 지속될 수 있을 때까지만 유지되는 어떤 불연속적 이벤트가 되곤 했다.

'내'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고 '너'의 안에서만 정서적 위로를 주려는 이런 ‘시스템’은 결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허물어졌다. 결혼은 관계의 수위를 조절할 수 없는 어떤 특이한 물리적, 정서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일례로, 사소한 부부싸움 중에 꼭꼭 숨겨둔 내면의 상처를 공격받으면 무시하고 획 돌아서 갈 곳이 없었다. 한 침대 안에서의 일상은 에로틱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벼랑 끝 같은 곳이기도 했다. 심리적 도피 공간이 없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말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제대로 말해봐.”... 이런 단순한 질문 앞에 나는 자주 망설였고 이내 말문이 막히곤 했다. 솔직히, 살면서 타인에게 스스로가 정한 내면의 선을 한 번도 허락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라는 이름의 이 ‘무례한 타자’는 사소한 일에서조차 그 선을 침범했다.

독립적인 두 남녀 사이를 넘나든다. 불행히도 사랑은 할리우드 영화처럼 젊은 두 사람이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고 서로 키스를 하고 눈이 맞아 잠자리로 이어지는, 그런 ‘샤방샤방’한 경험에서 끝나지 않는다. 주변을 보면 연애의 설렘이 다할 즈음 결혼 준비에 정신을 쏟고 결혼하여, 신혼의 설렘이 끝날 즈음 임신과 육아에 정신 팔려 살다가, 이내 자녀교육에 ‘올인’함으로써 부부 관계에서 오는 빈 공간을 채워가는 모습을 본다.

영적으로 더 깊어져야 할 사랑의 감정은 외부의 분주함에 기대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중년의 심리를 다루는 많은 저자들이 지적하듯 자녀가 둥지를 떠나고 나서야 부부는 낯선 상대의 모습들을 대면하게 되고 그제야 미뤄둔 실존적 질문에 직면한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졌던가, 우리가 결혼을 통해 얻으려던 지향점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표현을 그저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건 아닐까. 혹은 섹스 그 자체로 이해했거나 반대로 선교의 베이스캠프라는 영적인 개념으로 비약하려 했던 건 아닐까.

곧 불혹의 나이가 되는 나는 여전히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다. 아내와 영혼을 대면하는 경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다. 육아의 늪에서 빠져 나오고 나니,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서로에 대해 또 다른 낯선 모습을 경험한다. 아내의 거친 ‘야수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 안의 지질하고 연약한 여성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당혹스러움도 맞닥뜨린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이렇듯 사랑하던 사람의 낯선 영혼과 대면해야 하며 나아가 나조차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단 말인가.

사랑, 그 친밀한 관계의 원형은 삼위일체의 신적 교제 그 자체에 있다. 나아가 하나님 스스로만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조물 간에도 더 깊은 교제를 지향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로를 지향하는, 영혼이 대면하는 지점에서 각자가 그 민낯을 편하게 드러내기엔 우리가 감내해야 할 두려움과 고통의 수위는 높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페르조나’를 쓰고 역할극에 익숙해지려 한다. 이른바 부모-자식 노릇, 김과장 노릇, 교인 노릇 등, 그 겉보기 등급의 삶을 분주하게 만든다.

다행히 그 두려움 속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사랑이 찾아온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주기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다. 영혼의 민낯을 대면하는 경험으로 내몰린다. 사회는 결혼이라는 꽤나 보수적인 울타리 안에서 그 고통을 대면하도록 이끈다. 그 안정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조차 영혼의 민낯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영 이 사회에서 답답한 가면을 벗어 던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결혼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신적 경험이자 최고의 도전이다. 물론 내겐 ‘아직도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2014/04/02 20:08 2014/04/02 20:08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결혼일기
지금은 주변에 얘기해도 잘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소문난 모범생이었다. 특목고 진학을 꿈꾸던 중학생 시절, 나는 그저 ‘공부기계’였다. 같은 문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풀었으므로 시험을 보면 답이 툭툭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코흘리개 시절에 소심하다거나 착하단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시험을 몇 번 잘 치고 나니 ‘모범생’이란 딱지가 붙었다.

그 이후로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범생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애를 썼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부모님은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 두 분이 잠시 별거를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면,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를 우울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아마도 그때 나는, 내가 모범생이 되면 부모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다시는 이전처럼 슬프게 헤어지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도 어떤 조직에 들어가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다분히 성취 지향적인 행동에 집착하여 매사에 지나치게 긴장하는 습관을 갖게 된 건 아마 그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되고 싶었고,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고, 그것도 좋은 학과에 가고 싶었다. 물론 그 근저에는 항상 ‘부모가 원하는’ OO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솔직히 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부모가 뭐가 되라고 괴롭힌 적도 없지만,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공부를 잘하면 의례히 그렇게 되리라는 ‘어떤’ 학과와 직업을 제시하곤 했고 나는 그것을 목표로 공부만 해댔다.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부기계가 되고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 몹쓸 모범생 코스프레는 30대 초반까지 줄곧, 그리고 불혹을 앞둔 지금까지도 나를 짓누르는 어떤 내적 지향성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 또래의 많은 이들이 참 착한 자녀의 삶을 살아왔고 그 모범생의 삶을 이제는 자기 자녀에게 강요하는 걸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변의 많은 이들도 부모의 기대, 바람의 대물림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타자의 욕망’, 특히 부모의 욕망에 따른 삶에 익숙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삶의 주체성이 결여된 채 분주하게 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분주함의 대부분은 파편화된 사건들, 그 개별적인 것들을 잘 마치는 것, 그 성과로 누군가에게(부모에게, 직장상사에게, 혹은 남친이나 여친에게, 배우자나 자녀에게) 칭찬받는 것에 목적을 둔다. 얼핏 보면 책임감이 강하고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그 내면 깊은 곳에서는 영혼이 소멸되는 느낌,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칭찬해주는 주체가 없으면 존재 이유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자신을 지배하는 셈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회사를 왜 다녀야 하는지, 왜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같은 당연한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순간 숨이 멎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요즘 ‘픽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이 성행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예술가인가 했더니 쉽게 말해서 여자 꾀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란다. 이런 곳에다 몇 백만 원씩이나 돈을 내며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넘쳐난다고 하니, 이성을 사귀고 싶지만 잘 안 되는 싱글들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연애를 하는 이들은 ‘연애 상담’도 많이들 받는다. 연애 중인 커플들은 ‘결혼예비학교’라는 곳도 간다. 그뿐이랴. 요즘 결혼 후 아이를 출산한 부모들을 위한 ‘부모학교’도 성행하고 있다. 이렇듯 모두가 모범적인 연애, 결혼, 육아, 자녀교육을 실수나 시행착오 없이 수행하고 싶어 한다. 물론 배우는 건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배움 행위들이 어떤 내러티브나 연관성을 갖지 않고 파편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개인이나 관계의 근본적인 성장을 담보로 한다기보다는, 중고교 시절의 반복처럼 연애, 결혼, 출산, 육아도 그 개별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이른바 그 분야의 모범생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느낌이 강하다는 말이다.

연애, 결혼, 출산, 육아 매 단계에 모범생이 되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님을, 나는 결혼한 지 10년째인 지금에서야 아내를 통해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일례로 나는 칭찬받는 연애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정작 연애를 하는 중에는 즐겁지 않을 때가 많았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나는 생애에 한번뿐인 귀한 예식에 집중하기보다는 주변의 눈치를 참 많이 봤다. 그 과정에서 정작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원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신혼 초에 심하게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이 결혼이 좌초되고 실패한 무엇으로 전락하게 될까봐 두려움에 떨었다.(매번 아내보다 내가 더 지질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본다. 난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진실한 삶 그 자체였나, 아니면 인생에서 중요한 매 단계마다 누군가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으려 한 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모범생의 티를 벗으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본다. 내 잣대대로 남을 평가하지 않는 것, 나아가 그 잣대대로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는 것, 타인의 눈치를 보기보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 문득 그런 상상을 해봤다. 나의 부모가 서로 깊이 사랑해서 그 충분한 사랑을 통해 자주 “우리 걱정은 말고 네가 원하는 걸 하렴.”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면, 그러면 나는 어떤 아이가 되었을까. 생각만으로도 표현 못할 감정이 요동치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 가정에, 내 아이에게, 그리고 나와 내 아내에게도 필요한 음성은 아닐까.
2014/01/15 23:44 2014/01/15 2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