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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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s law of life

살다보니 어느 덧 20대의 중반에 접어 들게 되었다.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순간순간 겪었던 일들을 통해 나름의 반성을 해보기도 하고, 이렇게 살아야 겠다는 목표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내 안에 생겼다. 요 몇 년 사이에 추상적으로만 그려 오다가 최근에 접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을 보고 내 나름대로의 삶의 법칙들을 정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999. 5. 현재

1. 기도는 내 모든 계획과 행동에 우선한다.
그 말은 나의 계획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삶의 계획들을 세워 나가야 하며 기도를 통해 그 계획들이 검증되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2.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항상 성실하자. 또한, 매주, 매달, 매해별 평가를 갖도록 하자. 단순히 하나님께 맡긴다는 식의 나태를 기도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키지 말자.

3. 타인과 대화하다가 서로의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시비의 가림을 잠시 멈추도록 하자. 논쟁하는 가운데 감정이 섞이게 되면 서로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기가 쉽다.

4. 항상 타인을 나보단 낫게 여기자.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게서 배울 점을 찾으려 노력하자. 나와는 다르다는 괴리감을 더 깊게하지 말자.

5. 내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실망하게 될 일, 내가 죽기 전에 돌아보았을 때 후회가 될 일을 하지 말자. 언제나 내 비밀스런 행동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여기고 행동하자.

6. 반복되는 일상, 매일 대하는
1999/05/05 18:47 1999/05/0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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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PASSION
: Jay가 '재희'가 되길 꿈꾸며...  (1999.5. 5.)

/ 김용주
 

Jay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해야겠다. 원래 나의 필명은 "My Jay"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90년대 중반 학번으로 나의 필명을 모르는 한양IVFer는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이름은 다소 어거지(?)의 조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처음 나의 필명은 "male Y.J."였다. 같은 선교단체의 지부 내에 영주, 연정이 누나가 "Y.J."라고 많이 썼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성별을 표기한 것이다. 겉보기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첫 글자 만을 따서 "M.Y.J"로 만들고 보니 "My J."라고 쓰는게 더 그럴 듯해 보였다. 게다가 "my"라는 소유 대명사 뒤에 있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에 같은 발음인 "jay"라고 쓰게 되었고, 그렇게 쓰기 시작한 "My Jay"라는 필명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쓰고 있다. 흔히 외국인들이 부르기 편하라고 "Jay"를 이름처럼 쓰곤 하기도 한다.

jay란 말은 영어로, 흔히 속된 말로 "수다장이" 혹은 "멍청이"정도라고 한다. 필명을 만들면서 내심 속으로 나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조소내지는 방관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jay만큼 나와 잘 어울리는 말도 없는 듯 했다. 나는 내 스스로 상당히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중간중간에 있었던 많은 어려움들로 인해 삶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사회의 어두운 부분과, 생존이라는 이름아래 겪어야 하는 많은 고통들을 알게 되고 난 후로는 삶의 그런 어두운 부분이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했었다. 흔히 어린 왕자나 바보이반으로 대표되는 순수함을 나 자신도 간직하고 싶어서 였을까...아무튼 그런 생각들로 마음을 정화(?)하며 살아 보려고 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삶이라는 과정 속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1년동안 앞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가정 내의 불화, 직장에서 쫓겨난 아버지, 어머니의 쓰러짐, 학교 내의 비리들...이런 일들 속에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나를 더욱 현실과 거리가 생기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학에 발 붙이면서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낙천적 성격을 유지했던 내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 나의 여자 친구도 그런 모습에 끌렸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밀려오는 현실의 문제 속에 나는 더이상 어린 왕자 흉내를 낼 수 없었고, 난 한없이 나의 정해진 것 하나없는 미래에 두려워해야만 했다.

휴학 후, 나는 나름대로 여러 경험을 해 보기 위해 공장에 들어가서 3개월동안 일을 해보기도 했고, 거기에서 나의 부족함으로 빚어진 다툼때문에 공장을 그만 두게 되었다. 하지만, 몇가지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노동판에서 일하는 이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과 내 자신의 생각이 너무 협소했다는 것, 그리고 사회라는 이름의 구조를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즈음해서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고 군 문제로 훈련소 들어가기 한 달 전에는 내내 침대 생활을 해야만 했다. 내 예상보다 더 길어지게 된 휴학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서 나에게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더이상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
사실, 힘든 시간이었다. 공장에서 있었던 일의 뒷 문제나 보충역이나마 군 복무가 시작되었는데 계속되는 건강의 악화, 내면의 흔들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서도 낙천적으로 보이기 위해 웃음이라는 가면을 들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곤 했다.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만나려면 꽤나 많은 수치의 약을 복용해야 했던 나를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리라. 결국, 그렇게 내 어리석었던 가치관은 허물어졌다. 광대처럼 사람들 앞에 당당히 웃음짓던, 그 거짓된 여유를 더이상 부릴 자신이 없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바보 이반이란 있을 수 없다는 쓰디쓴 교훈만을 배웠다.


휴학한 지, 이제 3년째에 접어들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그 무섭다는 세상에 대한 공부를 한 지도 꽤나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다. 많은 사람도 만나보고 그들의 얘기를 통해 많은 도움도 받았다.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은 조금은 다른 것인 것 같다. 사실, 알고 보면 나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현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 반성도 없고 삶에 대해 바르게 대처하고자 하는 열정도 없이, 그저 그것들과는 벽을 쌓고 어린 왕자처럼 예쁘게, 혹은 몸 하나 안 더럽히고 순수함을 유지하려 했던 백면서생의 모습의 전형인 나 자신을 바라 보았다. 리스트의 손처럼 가냘픔이 사라지고 군데군데 굳은 살이 붙으면서, 삶과 직면하고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나는 내 어리석은 과오들이 나를 두렵게 한 근본 원인이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최근에는 "Jay"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법을 골몰하던 중, "재희(再喜)"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말은 "rejoice"와 같다.
"다시 기뻐함"
이제 나에게 붙여야 할 말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에서 뼈가 굳어지고 생각이 넓어지는 요즈음에 이제는 현실과 벽을 쌓지 않고, 그 두려움을 바라 보면서 내심 웃을 수 있는 준비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쁜 건강 가운데에서도, 힘든 일상 속에서도 이제는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내년에는 다시 웃는 내 모습을 캠퍼스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의미는 3년 전과는 사뭇 틀리겠지만...
1999/05/05 18:45 1999/05/0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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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태인이 고향이지만 아버지가 군인(공군 하사관)이었던 탓에 셀 수 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전라 경상 충청 경기 할 것 없이 남한에서 비행장 있다는 고장은 다 살아봤고 그 고장에서도 이런저런 형편 때문에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했으니 기억하는 이사 횟수만 스무 번은 넘는다. 여섯 살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았던 대구는 매미가 다닥다닥 붙은 사과나무의 환영과 가슴 아린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은 곳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상사 네는 전라도 사람 같지 않아.

그 희한한 칭찬은 어린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의 반복은 나로 하여금 전라도 사람이 어떤 큰 죄를 가진 사람인 모양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아버지에게 그 일을 따져 묻는 게 예의가 아니고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알아챘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나의 성장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게 뒤집힌 건, 스무 살 무렵이다.
머리는 텅 비고, 반항기만 가득했던 내게 반역으로 점철한 전라도의 근현대사가 갑자기 다가왔다. 머리통을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로 채워가며 나는 난생 처음 겪는 지적 체험에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 눈에 담았던 그 산과 벌판, 그리고 내가 걷던 길들이 그대로 동학군의 땀과 피가 서린 곳이었다니, 와. 그 뒤로 나는 전라도 사람임을 자랑하게 되었다.
묻지 않아도 내가 전라도 사람임을 밝혔고, 특히 전라도 출신을 꺼릴 법한 상대나 자리라면 반드시 내 고향을 밝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하곤 했던 것이다. 피해 지역의 지역 감정도 좀더 엄격하게 조절되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은 건 최근이다.

시사잡지 기자인 B는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대뜸 내 글 칭찬을 했다. 문장을 인용까지 해가며 하는 소리라 빈말은 아니었지만, 사람들도 많고 해서 점잔빼고 앉았다가 대신 고향을 물었다. 말씨로 보아 전라도 사람이 분명했기에 그걸 확인해서 우호감을 나누려는 수작이었다. 몰라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B는 정색을 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한참 후 다른 곳으로 술자리를 옮긴 후에야 나는 아까의 일을 물었다. 짐작대로 나는 광주가 집이고 얼마 전엔 5.18 보상금도 받았다. 하지만 전라도 사람끼리 배타적으로 뭉치고 하는 건 딱 질색이다.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이 나라의 지역 문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앉은 듯 싶지만, 그럴수록 이 나라가 단일 민족인 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고향 좀 다른 것 가지고도 이렇게 못 잡아먹어 난리인 사람들이 인종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몇 년 전 르완다에선 인종청소로 100만이 죽었고 오늘 유고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니할 말로 이 나라가 여러 인종이었다면 진작에 수백만은 죽어나가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전라도 문제는 빼고라도, 연변 동포에게, 굶주리는 북한 인민에게 한국인들이 보이는 야비함을 보라.

어릴 적 대구에서의 희한한 칭찬을 들려주었다. 매우 정열적이었던 증조할아버지는 만주를 거쳐 일본에 건너간 식솔들을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다. 동네사람들(일본인들)은 아버지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상네는 조센징 같지 않아. 해방되던 해 아버지 가족은 연락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해가 바뀌도록 급우들(한국인들)로부터 매를 맞아야 했다. 급우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하곤 했다. 죽어라, 쪽발이 새끼. (99년 4월)
1999/04/16 19:23 1999/04/16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