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대학원 시절 MIS과목 교수님이 본인이 제안한 '제트기 이론'이란 걸 설명한 적이 있다. 일정 속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긴 활주로가 필요한데, 항공모함등에서 출발하는 제트기는 바퀴를 강제적으로 고정시켜놓고 속도를 신속하게 비행할 수준까지 올린 상태에서 풀어주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나 시간을 save하고 바로 이륙시켜주는 점에 착안한 이론이다. 시장점유율이나 소비자 기대치 등등을 설명하면서 고안한 생각이었던 것으로 막연히 기억하는데, 공학적 방법론을 사회경제에 적용한 나름 신선한 접근이었다.


*페이스북 10/15
2011/10/16 21:31 2011/10/16 21:3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내가 알기로 뛰어난 사진가적 자질 중 하나는 '과감한 프레임' 처리에 있다. 아마추어일수록 직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피사체를 모두 담고 싶어한다. 인물의 전신상, 반신상, 얼굴 전체. 실수로 짤라먹는 게 아니라면 일반인들의 사진 작업은 대충 본인이 대상으로 삼는 피사체의 완전한 복원, 혹은 담아내기를 꿈꾼다. 틀 안에 정보를 모두 담아야 한다는 책임감. 그래서 프레임이란 게 무서운 것 같다. 뒷통수를 자르고 얼굴의 일부만을 프레임에 가득 채운 사진. 혹은 손모양, 이마의 주름,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부모의 상반신을 잘라낸 사진. 이런 과감한 프레임처리는 사진에 새로운 생명을 준다. 고정된 프레임의 탈피, 혹은 해체가 필요한 게 비단 사진에 국한되지는 않으리라. 사고나 판단, 우리의 삶도 그렇다.
2011/10/13 21:31 2011/10/13 21:3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나는 가수다'를 보며. 간간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옹호하는 말을 하면서 상대방을 까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음악의 급이 다르다느니 저런 실력으로 이겼냐느니, 청중 수준이 형편없다는 식의 말이다. 나도 그럴 때가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농담이다. 실제로 청중들이 다양한 음악들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더 뛰어난' 음악과 '덜 뛰어난' 음악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학교종이 땡땡땡'과 말러 교향곡은 작곡가의 수고나 음악의 완성도 측면에서 분명 다르다. 대형 엔터테인먼트사에서 히트친 음원 샘플들을 수집하며 그것과 유사하게 찍어내고(copy) 안무나 비주얼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낸 노래와, 순전히 음악으로만 승부하려는 의도로 언더그라운드 싱어송 라이터가 공들여... 만든 노래는 그 '질'을 평가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뛰어난 음악이 반드시 좋은 음악이 된다거나 덜 뛰어난 음악이 나쁜 음악이라는 생각은 불편하다. 음악적 엘리트주의. '아리랑'이 '환상교향곡'보다 더 나쁜 음악이 될 수 없고 신중현의 '미인'이 나훈아의 '무시로'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한 음악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된 싱어송라이터의 노래가 가사의 의미도 모른채 불러대는 딴따라 가수의 노래보다 좋다고 혹은 옳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이 없는 성악가가 종교음악을 부를 때의 울림이 그런 예일 것이다)

다분히 본인의 음악적 소양이 높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의 가장 큰 실수는 예술에 옳고 그름의 좋고 나쁨의 절대적 잣대를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 혹은 비평가들의 냉정한 평가만이 옳다고 믿는다. 물론 이런 전문적 평가들이 자주 예술을 조망하고 그 수준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평의 잣대로 '이건 쓰레기야'라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 본다.

그래 참 불행한 일이다. 누군가에겐 새벽녘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신경이 거슬리는 무엇이 돠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생명의 아름다움이 노래가락으로 승화하는 신비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천박하기 그지없는 트로트 한 곡조가 또다른 누군가에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유연함, 공감.. 우리에겐 자주 그런 것이 필요하다.
2011/10/13 21:30 2011/10/13 21:30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어제는 성하가 잘못한 일이 있어 아내가 꾸짖는 중에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사실 아이가 사과는 정말 잘한다)하며 땅을 치고 울었다...가 이내 또 잘 논다. 시간이 조금 흘러 아이가 또 사고를 쳤다.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이라 나는 즉시 혼을 내려 했지만 아내가 말했다. "방금 혼냈는데 또 혼내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아?" 성하가 내 눈치를 본다. "아빠가 화가 났지만 또 혼내지는 않을거야 대신 다시 그러면 안돼, 알았지?" 아침에 출근하여 생각하니 정말 찰나의 시간이었는데 아내의 순간적인 판단이 항상 옳다. 신이 엄마에게는 육아에 있어서는 특별한 판단력을 주시는 듯 하다.

 

 

 '11. 10. 7

2011/10/07 23:40 2011/10/07 23:40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아내와 한참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하가 아내를 가리키며,
"얘가 여보야야?" 한다. ㅋㅋㅋㅋ
호칭을 배워가는 성하를 보며 잠시 웃었다.

 

 

'11. 10. 6

2011/10/06 23:40 2011/10/06 23:40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언젠가 기독인들의 소비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지금까지 생각한 걸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상대적 박탈감이 큰 편인데 기독인들 사이에서는 잘 드러나질 않는다. 가끔 나는 수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에 명품 옷을 입은 사람과 9900원짜리 티셔츠 입은 사람이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었다. 혹은 물욕이 많은 이들을 암암리에 비난하는 교인들도 종종 봤다.

더 큰 문제의식은 교회를 가보면 실제로 중산층 이상이 다수고 극빈층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게 사실 은근히 돈없는 사람들이 위화감 때문에 교회 오는 게 꺼려지는 요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따라서 내 생각은 자연히 그럼 소유, 소비 자체를 적절하게 절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게 올바른 방향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관심사는 그렇다면 맘몬(물질의 우상화)을 섬기지 않는다는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적정한 소유는 과연 어느정도일까 하는 문제였다. 이건 절대 수치인가 아니면 연봉에 기인하는 건가, 혹은 공동체의 수입 평균에 맞춰야 하는 건가. 넌 교인인데 너무 물질적이야 라고 말할 때의 그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

사실 이러한 소유의 문제는 이미 청부론, 청빈론이라는 주제로 교계에서도 한참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나도 해답이라고 부를 만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정답, 즉 청빈론이 옳다한들 교회가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은데, 실제로 주일마다 만나는 이들의 개인 소비 문제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나도 청빈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 나는 남 비판하기 전에 내 소유부터 따져보기 시작했다. 내 소비성향과 소유성향을 따져보고 나는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그 물건 금액의 상한치를 정했다. 이를 테면 냉장고를 살 때 내가 생각하는 상한 금액은 얼마이고 그 이상은 과하다는 식으로. 혈액형이 A형이자 다분히 계획적인 내 성격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이 프로젝트는 척척 진행됐다. 바지는 3만원 전후, 신발은 5만원 전후, 코트와 구두는 15만원 이하, 노트북은 100만원이하, 책은 부부가 합쳐서 매달 10만원, 외식비는 한번에 5만원이하, 매달 20만원 이하...

이런 걸 계산하고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에 대한 물가 차이도 생기고 모든 물건을 다 이렇게 정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여 어느 정도까지 하다가 포기했지만.. 사실 지금도 내 심중에는 어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에 대한 상한치의 금액을 정한다. 물론 그 룰에 맞게 매번 물건을 산 것도 아니고 또한 그 물건 자체가 필수품이냐 사치품이냐도 중요하니 사치품에 상한선을 정해서 많이 사재낀다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이런 고민을 오랜시간 하다보면 물건을 사는 금액보다 물건을 살 수 있는 금전적 여유의 문제가 점점 부각되고 그 여유는 결국 근본적인 연봉, 수입, 소유의 문제가 된다. 근본적인 교인들의 경제문제인 셈이다. 나는 소그룹 나눔에서 입고 오는 옷이나 주말에 식당에서 먹은 음식, 아이들에게 사준 고가의 장난감, 그 아이들이 입은 옷, 이런 작은 부분에서 교인들이 상당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는 것을 알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 교인들의 다수는 듣기만 할 뿐 그다지 공동체로서 도와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더욱이 그 도움이라는 게 치명적인 상황이 아닌 경우, 생활 자체가 안될 정도는 아니지만 매번 소비에 심적 부담을 느낄 정도, 혹은 중산층이 다수인 교회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초라함을 느낄 정도인 경우에 말이다.

난 버젓하게 직장이 있지만 전세 이사를 네번했다. 이제는 미친듯이 오른 전세값으로 아예 전세를 빼고 사택으로 이사했다. 교회를 가면 우리 아이보다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그 장난감에 눈독을 들이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조금 심난하다. 내 동기는 아내와 맞벌이를 하고 부모가 사준 아파트가 있어 같이 시작한 직장 생활에 벌써 모은 돈만 몇억이랜다.

사실 교인 중 누군가는 내가 내 동기를 부러워하듯 내 아이가 입은 옷이나 내 직장, 사택을 갈수 있는 내 형편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이 예배를 드리나 우리는 다른 상상을 한다. 난 교계에 쏟아지는 담론들 중 이런 얘기를 콕 찍어서 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역사니 내러티브니 하는 신학 논쟁이나 정치이야기들, 물론 중요한 담론이지만 나는 매주 나가는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그런 건 것보다는 이런 일련의 생각들을 하게되는 나눔과 사건들이 더 잦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모두가 '아멘'이고 '샬롬'이다. 집에가서 어떤 가정은 호텔 뷔페를 먹지만 누군가의 아내는 울고 누군가의 아빠는 한숨쉰다.
2011/09/25 21:24 2011/09/25 21:24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나에게도 '절대악'이라 생각되는 존재가 있다. 전두환, 정형근.. 뭐 이런 분덜도 그렇고 살면서 나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대우를 한 이들. '20세기 기사단' 내지는 '요술공주 쉐리'들이라 부를 법한 '또라이'들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을 퍼부을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성경에 삭개오라는 자가 나온다. 민족의 배신자이자 왕따, 또라이 쉐리 삭개오를 예수는 주목하고 있다가 그의 집으로 가서 함께 식사한다. 온갖 나쁜 짓은 다하던 삭개오. 예수의 방문에 알랑방귀를 끼며 회개까지하고 착하게 산댄다.

걔보다 내가 백만배는 더 착하고 의로운데, 예수와 식사를 한다면 딴놈들은 아니더라도 삭개오가 아니고 내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 예수에 대한 의로운 분노마저 든다. 그래 공의는 개뿔, 정말 억울하고 불합리하다.

난 어떤 인간에 대해 절대악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자주 삭개오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내 본성을 거스르고 힘들게 힘들게 그들을 인격체로 대하려는 내 심리 때문에... 나는 진보진영에서 과격하게 극우파나 혹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집단을 아주 쉽게 그리고 극단적으로 꼴통취급하는 사람들이 한편으론 공감도 되면서도 한편으론 참 싫다.

그들도 언제든지 예수가 찾아갈 수 있는 잠재적 삭개오란 인식이 없어 보여 그렇다. 나도 너도 우리도 모두 사랑어린 권면이 필요하다.

((딴소리))

1. 난 '분노'를 반대하지 않는다. 특히 인권을 위협받는 여성문제,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투쟁에 참여하는 경우, 이들의 바판을 용인, 혹은 적극 동참해야 하고 그에 더하여 그 욕섞인 메시지를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불편하게 여기는 건 기독교 맨탈리티를 가진 이들 가운데 극단적 표현과 비판을 일삼는 부류다. 또한 그 비판은 최소한 '인간'보다는 행동, 논지, 입장에 한정하며 인신공격성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3. 보수적 신학관을 가진 몇몇은 삭개오는 회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지 않냐, 예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얐냐, 전두환, 정형근과는 다르다 라고 말할 지 모르겠다. 내 내면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안에 바리새인의 피가 흐르지는 않나 돌아볼 필요도 있다.

2011/09/25 21:24 2011/09/25 21:24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년이 바뀔때마다 반 친구들과 헤어지게 된다는 게 그렇게 싫었다. 때론 친구들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 중학교 때 어떤 친구는 '서울대에서 만나자'라고 인사했었다. 그리고 대입을 치르고 내게 전화했다. '너도 붙었냐고' -키우던 강아지를 다른 집에 보내기도 했다.

그 순간순간마다 매번 나는 가슴이 철렁했고 슬픔에 울컥했으며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난 내색을 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헤어지기 아쉽다고 오버하는 친구들 중엔 내가 너무 냉정하다고 서운해하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유년기 시절, 이별의 기억들은 나의 복잡한 심정과 어설픈 행동들을 고착화시켰고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그러나 다소 막연한 정서를 만들어냈다. 고독, 외로움, 거절감, 영원히 볼 수 없음에 대한 아련함..

성인이 되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는 이별을 경험할 때마다 그런 정서가 지나치게 반복되어 점점 그 정서를 '인지'는 하되 체감하지는 못하는 시기가 왔다. 정말 나는 이제 '그렇게'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서 해댄 거의 광기어린 연락과 집착, 혹은 무정하게 이별을 고하고는 돌아서던 길. 터벅터벅 의미없고 괴롭기만한 인생을 곱씹으며 어디론가 낯선 공간으로 숨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던 가슴앓이.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 스위치를 켰다 끄는 것처럼 일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찾아보니 어디에 뒀는지 모르게 잃어버린 여권지갑처럼. 내 안의 나름 심각했던 이별의 트라우마들을 잃어버렸다. 그저 윤리적 행동양식의 흔적만 남은 채로. '그래, 그 사람 떠나는데 밥 한번은 먹어야지.'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지나는 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다. 뭔가 심오한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그냥 그렇게 난 식어버렸다.

 


*facebook 노트: 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오후 2:20 작성

2011/09/25 21:23 2011/09/25 21:23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성경묵상
(출3:13-15)

내 성격은 약간 이중적이다. 내가 주도해서 이끌어야 할 상황이 아니면 다분히 내성적이고 수동적이다. 허나 내가 책임을 지거나 나서야 하는 판단이 서면 다소 적극적인 자세로 돌변한다. 또한 나는 숫기가 없다. 어린시절 손님이 오면 어머니나 누나가 없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대신 나가서 그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고 불편했다.

대학원에서는 교수님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도록 시킬 때 그게 그렇게 싫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올 것이고 나는 주체가 아닌 입장에서 잘 대답하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렇다고 교수님에게 이것저것 예상되는 문제들을 꼼꼼이 물어볼만큼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조금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나는 모세가 주저했을 그 자리에 내가 섰다고 생각해본다. 물론 노예생활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집트를 떠나자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도 사실 만만찮다. 그리고 왜 내가 의분을 일으켰던 그 옛날 나의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이 아니고 이제는 모든 기력과 의지도 별로 없는 노년에!

정말 싫다... 하나님의 메신저. 그 많은 군중 속에서 나올법한 모든 질문들과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불가능해보이는 과정들.. 게다가 나는 살인을 한 도망자가 아니던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동족에게 채찍질한 이집트인을 죽인 나를 살인범으로 몰지 않았던가. 아.. 정말 나서고 싶지 않다.

내가 모세였다면.
흔히 역사 속 이스라엘 민족이나 모세 등등 많은 이들을 다룰 때 불순종의 대상 혹은 실수에 대해 가볍게 비난하는 - 그건 모세의 어리석음이지, 이스라엘 백성들 아직 정신을 못차렸어 - 판단들이 얼마나 더 어리석은지 깊이 돌아본다.

이집트를 떠나 사막생활이 수십년간 이어지고 아이는 굶주리고 돌림병이 돌고 약속은 이뤄지지 않을 때 그 궁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보지도 않은채, 책상 사무실에 앉아서 개고생하던 한 인간, 한 집단을 깊이 묵상치 않고 해대는 비난들은, 사실 그 비난의 잣대를 검증해보지 않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긴장되는 상황을 글자로만 인식하는 나또한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모세의 머뭇거림을 십분 공감한다.If I were Moses

2011/09/25 21:22 2011/09/25 21:2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언젠가 기독인들의 소비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지금까지 생각한 걸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상대적 박탈감이 큰 편인데 기독인들 사이에서는 잘 드러나질 않는다. 가끔 나는 수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에 명품 옷을 입은 사람과 9900원짜리 티셔츠 입은 사람이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었다. 혹은 물욕이 많은 이들을 암암리에 비난하는 교인들도 종종 봤다.

더 큰 문제의식은 교회를 가보면 실제로 중산층 이상이 다수고 극빈층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게 사실 은근히 돈없는 사람들이 위화감 때문에 교회 오는 게 꺼려지는 요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따라서 내 생각은 자연히 그럼 소유, 소비 자체를 적절하게 절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게 올바른 방향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관심사는 그렇다면 맘몬(물질의 우상화)을 섬기지 않는다는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적정한 소유는 과연 어느정도일까 하는 문제였다. 이건 절대 수치인가 아니면 연봉에 기인하는 건가, 혹은 공동체의 수입 평균에 맞춰야 하는 건가. 넌 교인인데 너무 물질적이야 라고 말할 때의 그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

사실 이러한 소유의 문제는 이미 청부론, 청빈론이라는 주제로 교계에서도 한참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나도 해답이라고 부를 만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정답, 즉 청빈론이 옳다한들 교회가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은데, 실제로 주일마다 만나는 이들의 개인 소비 문제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나도 청빈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 나는 남 비판하기 전에 내 소유부터 따져보기 시작했다. 내 소비성향과 소유성향을 따져보고 나는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그 물건 금액의 상한치를 정했다. 이를 테면 냉장고를 살 때 내가 생각하는 상한 금액은 얼마이고 그 이상은 과하다는 식으로. 혈액형이 A형이자 다분히 계획적인 내 성격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이 프로젝트는 척척 진행됐다. 바지는 3만원 전후, 신발은 5만원 전후, 코트와 구두는 15만원 이하, 노트북은 100만원이하, 책은 부부가 합쳐서 매달 10만원, 외식비는 한번에 5만원이하, 매달 20만원 이하...

이런 걸 계산하고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에 대한 물가 차이도 생기고 모든 물건을 다 이렇게 정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여 어느 정도까지 하다가 포기했지만.. 사실 지금도 내 심중에는 어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에 대한 상한치의 금액을 정한다. 물론 그 룰에 맞게 매번 물건을 산 것도 아니고 또한 그 물건 자체가 필수품이냐 사치품이냐도 중요하니 사치품에 상한선을 정해서 많이 사재낀다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이런 고민을 오랜시간 하다보면 물건을 사는 금액보다 물건을 살 수 있는 금전적 여유의 문제가 점점 부각되고 그 여유는 결국 근본적인 연봉, 수입, 소유의 문제가 된다. 근본적인 교인들의 경제문제인 셈이다. 나는 소그룹 나눔에서 입고 오는 옷이나 주말에 식당에서 먹은 음식, 아이들에게 사준 고가의 장난감, 그 아이들이 입은 옷, 이런 작은 부분에서 교인들이 상당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는 것을 알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 교인들의 다수는 듣기만 할 뿐 그다지 공동체로서 도와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더욱이 그 도움이라는 게 치명적인 상황이 아닌 경우, 생활 자체가 안될 정도는 아니지만 매번 소비에 심적 부담을 느낄 정도, 혹은 중산층이 다수인 교회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초라함을 느낄 정도인 경우에 말이다.

난 버젓하게 직장이 있지만 전세 이사를 네번했다. 이제는 미친듯이 오른 전세값으로 아예 전세를 빼고 사택으로 이사했다. 교회를 가면 우리 아이보다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그 장난감에 눈독을 들이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조금 심난하다. 내 동기는 아내와 맞벌이를 하고 부모가 사준 아파트가 있어 같이 시작한 직장 생활에 벌써 모은 돈만 몇억이랜다.

사실 교인 중 누군가는 내가 내 동기를 부러워하듯 내 아이가 입은 옷이나 내 직장, 사택을 갈수 있는 내 형편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이 예배를 드리나 우리는 다른 상상을 한다. 난 교계에 쏟아지는 담론들 중 이런 얘기를 콕 찍어서 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역사니 내러티브니 하는 신학 논쟁이나 정치이야기들, 물론 중요한 담론이지만 나는 매주 나가는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그런 건 것보다는 이런 일련의 생각들을 하게되는 나눔과 사건들이 더 잦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모두가 '아멘'이고 '샬롬'이다. 집에가서 어떤 가정은 호텔 뷔페를 먹지만 누군가의 아내는 울고 누군가의 아빠는 한숨쉰다.
2011/09/25 18:34 2011/09/25 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