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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도발적인 캠퍼스보기 (6): 캠퍼스 부흥은 영적 허구(SF)인가?

/김용주 


<캠퍼스 부흥에 대한 단상> 

대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교단체 간사님의 권유로 마틴 로이드존스(M. Lloyd-Jones)의 부흥 (생명의말씀사)을 처음 읽고, 몇 주 동안 부흥이라는 주제를 놓고 오랜 시간 들뜬 상태로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그 책과 성령의 주권적 사역 (CLC)에서 로이드존스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사역인 부흥은, “진정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시기에 소망 없는 장소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이후로도 오랜 동안 ‘부흥’이라는 주제는 내 머리 속을 맴돌았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의 교회와 선교단체는 부흥이라는 모토로 수많은 집회와 CCM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 시기부터 지금까지 캠퍼스 리더들과 사역자들 사이에 가장 흔한 복음주의적인 고백들은 이런 류이다.

“나는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않는다.”
“내가 쓰러진 그 시점이 하나님이 진정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때이다.”
“내가 하는 모든 노력들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이 채우실 때에만이 진정한 그 분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처음 부흥에 관한 신학적인 서적들을 읽으며 2차 대각성운동 시기 동안의 찰스 피니(Charles Finney)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접했을 때, 나 또한 위와 같은 고백들이 충분히 되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깊게 묵상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국의 캠퍼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부흥이라는 주제와 그 방향성을 좀더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캠퍼스에서 받아들여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과 부흥의 원대한 열망은 그 의미가 어느 정도는 퇴색되는 경향이 있다.
 

<날개잃은 천사(?)>

실제로 많은 선교단체의 학생들은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선교단체를 통해서 수련회와 집회들을 가지면서 캠퍼스에 대한 원대한 꿈들을 품게 된다. 이들은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열정이 가득하며 많은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이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캠퍼스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돌아보기도 하고, 기독학생의 연합문제와 학내의 문제들에 대해,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는 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가지고 때로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궁금해 하기도 하며 캠퍼스 안에서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변화시켜 가기를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시기는 잠시이며, 곧 이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의 견고함에 놀라며, 점차 그 거대한 구조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함과 동시에 선교단체 활동과 전공공부 간의 시간활용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선교단체의 기존 사역자들은 대다수가 학내와 사회에 대한 참여적인 문제나 기독학생 연합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선교단체의 사역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모임에 헌신된 리더를 양육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선교단체 안에서 학생들이 복음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전문인의 비전을 품는다거나, 혹은 연합과 사회참여적인 생각, 그리고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려는 시도들은 종종 부정적으로 치부되며, 결국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암묵적으로 ‘큐티와 기도생활 같은 개인경건훈련에 철저한가’,‘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모하고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가 뭔가 해내려는 불순한 동기가 있진 않은가’ 혹은 ‘한 사람을 전인격적으로 품을 수 없는데 무슨 사회참여냐’는 식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기존의 캠퍼스에 편입된 이질적이며 가능성 있는 학생들은, 실제적 한계와 공동체 안의 부정적 분위기로 인해 총체적 복음의 한쪽 날개인 ‘사회참여’라는 이슈를 포기하게 되며, 심하게 말하면 복음주의 유산의 절반으로부터 ‘회심’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종종 그런 간증을 한다.

“이제까지 내가 뭔가를 하려고 노력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꺾으셨습니다. 한 사람도 품지 못하고 멤버들을 전적으로 사랑하지도 못하는 내가 이제껏 뜬구름을 잡듯이 사회니 통일이니 하는 류의 이야기들만 하고 다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능력들을 부어주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분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나는 캠퍼스 4년간 이런 간증을 하는 학생들을 무수하게 보아왔다. 물론 개인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차이로 인해 때로는 나에게 크게 감동적인 간증이 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간증 이후에 이러한 ‘회심자들’의 삶을 돌아보면 난 많은 부분에 있어 큰 아쉬움이 생긴다.


<더 중요한 것>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 유산은 말씀 선포이다.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이제까지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 부흥을 기다리는 많은 ‘회심자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일하심, 그리고 성령으로 부어주심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때는, 각종 집회 때나 설교시간에 성경강해를 들을 때이다.

이들은 더 탁월한 강해, 더 탁월한 세미나에 목말라하며, 그런 집회에서 듣는 설교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느낌’으로 마음속에 달궈진 에너지를 이후에 있는 찬양 시간에 쏟아낸다. 결코 어느 락 가수의 콘서트 못지 않게 뜨거운 찬양시간을 통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며, 그렇게 한 한두 시간을 찬양을 하고 나서는 소그룹을 통해 예배시간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했으며, 얼마나 뜨겁게 느꼈는지에 대한 나눔(sharing)을 하고 기도제목을 나누는 일련의 ‘끈끈한’ 교제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통성으로 기도한다.

이런 스타일의 모임이 일주일에 한두 번, 그리고 방학에 몇 번의 수련회를 통해 이뤄진다. 그리고 이런 예배 형태의 모임들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모임이 필요하다. 일단 모임날짜가 정해지면 그 모임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또 다시 예배의 형태로 준비모임을 가지며, 또한 강의를 듣고 도전 받은 내용으로 찬양하고, 또 모임을 이끄는 사람들 사이에 소그룹이 편성되며 또다시 그들 사이에 나눔을 갖는다. 그러한 가운데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들의 모든 에너지를 이 사역에 다 쏟아낸다.

이런 일련의 반복적인 예배 형태의 모임들을 부정적으로만 보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각심을 가지고 직면해야 할 문제가 있지 않은가, 더 중요한 것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박제(剝製)가 된 부흥>

99년에 언급했던 소위 ‘헨리 나우웬식 영성’은 캠퍼스에서도 그 여파가 여전하다. 나도 헨리 나우웬의 책을 좋아한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영성은 항상 나에게 잔잔한 감동과 경외감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 또한 버릴 수 없는데, 그것은 법정 스님의 책을 접할 때에도 비슷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내가 법정 스님이나 신영복 교수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얻는 효용 때문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란 존재는 감옥에서 힘겹게 몇십 년간을 복역한 적도 없고, 모든 소유를 버리고 산에서 기름 한 방울 없이 살아본 적도 없다. 더욱이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 삶을 통해서 내가 대신 경험한 지식으로 내면을 좀더 풍성하게(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풍성해 보이게) 만들고, 저자들과 동일한 깨달음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만 있었을 뿐이다. 내가 꿈꾸던 부흥이 영적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당시 우연한 기회로 하게 된, 몇 개월간의 공장 막노동 생활을 통해서였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철저하게 불의했고, 내가 철저하게 겸손하지도 거룩하지도 선하지도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단순히 종교 문화 속에 있을 때에만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단 몇 개월 만에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 전까지 내가 헌신된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칭하며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았다고 굳게 확신했던 일들은, 소그룹 멤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찬양인도를 ‘극적’으로 하며 기도회를 인도하는, 소위 아주 ‘영적인’ 일들이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때까지 나는 모임 장소에서 걸레질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삶을 되돌아보관대, 내 삶은 ‘실제로는’ 전혀 영적이지 않았다. 나의 영성은 전혀 내 생활과 관련이 없음을 깨달은 셈이다. 선교단체에서 ‘보여지는’ 일들을 제외하면 나는 세속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때까지 전혀 내 신앙과 삶 사이의 괴리감을 깨닫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선교단체의 제자도 가운데 내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함에 있어 철저하게 싸워야 할 상황이 전혀 강조되지 않아 왔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세상을 부정하고 엑소더스를 꿈꾸지만, 그 안에서 현실에 깊게 뿌리를 내린 채로, 치열하게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며 끊임없는 영성의 훈련들을 해나가는 것은 강조되지 않은 채 일확천금을 노리고 복권을 구입하듯이,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꾸준한 하루하루 생활의 성실함 없이도 자신을 완전하게 바꿔주실 것을 기대한다.

헨리 나우웬의 <제네시의 일기>나 <아담>과 같은 책을 통해, 그리고 내가 그간 겪은 일들을 통해, 나는 ‘영성’이라는 것이, 말씀을 읽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무리 지속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현실과 우리의 기저가 되는 일상에 뿌리를 박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한 영성의 관념을 정리시켜주는 책들을 통해 느끼는 심정적 자위책(自慰策)으로서가 아닌,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푸대자루를 나르고 본드칠을 하며, 접시를 닦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 - 불신자이건 학교를 다니지 않았건 장애인이건 상관없이 - 과 지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에 그들의 삶 속에 깊게 관여하고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온전하게 섬기는 삶을 살아보지 않는 한, 우리가 이야기하는 부흥과 영성은 영적 허구에 불과하며, 그것은 지적인 허영이자, 관념 속에 맴도는 섬김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가정의 변화를 원하지만, 가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캠퍼스 복음화를 외치지만 과에서는 섬김보다는 아웃사이더의 삶에, 혹은 다른 학우들과 똑같이 경쟁하고 부정행위를 하며, 수업에도 충실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낮아짐의 설교는 몇 번씩 듣고 섬김을 주제로 한 수련회는 줄곳 다녀오지만, 정작 사회에서 가난과 고통으로 외면 당한 사람들의 사정과 현실은 모른 채로, 하향적 삶은 우리의 관념 속에서 맴돌다가는 이내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가운데 캠퍼스의 문제, 우리 나라의 문제, 세계적인 문제들은 더더욱 우리의 관심에서 사라져간다. 우리에게 부흥은 철저히 ‘박제’된 개념인 셈이다.

<실천의 장은 없는가>

“1970-80 년대 남미국가들은 좌파혁명에 시달리고 있었다. 각 국가들은 부정과 부패로 파산하기 시작했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캠퍼스 젊은이들마저도 무력혁명에 가담하거나 대부분 운동권 세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무력혁명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도 총기를 소유하고 때로는 강의실까지 들어와 자신들의 혁명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상황이니 교수들도 그들이 두려워 방관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당시 대학 안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하고 있던 복음주의 학생들은 이러한 상황에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먼저 교수님을 찾아가 정식으로 학생들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그들은 강의실로 들어가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됐다. 학생들은 말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룹을 만들어 빈민가로 찾아갔다. 당시 남미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정부의 부패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외면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학교 안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과격 무력운동권에 질려있던 학생들이 이 모임에 관심을 보였고, 곧 성경공부 모임은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무력혁명권 학생들을 자극했다. 성경공부 모임 리더들은 테러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다. 결국 한 리더의 약혼자인 자매가 테러로 죽임을 당하게 됐다.

이런 희생을 치른 결과 남미의 기독학생모임은 대학 안에서 점차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복음이 그들이 처한 가난과 부패라는 상황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남미의 학생운동은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고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대륙으로 바뀌었다.”
(한철호,“국경 없는 캠퍼스의 증인들”, IVF 격월간지 대학가 1999년 7월호에서)


이것은 당시 남미 기독학생운동의 간사였던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의 이야기이다.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의 저자인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는 <물 한모금, 생명의 떡> (이상 IVP)이란 그의 또다른 책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사역을 결합한 총체적인 선교현장의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다. 나의 느낌이었을까. 사이더는 복음주의권에서도 그러한 사역이 ‘절실’하며,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회심이후에 Prison Fellowship을 이끌고 있는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이것이 교회다> (홍성사)에서 부흥을 통해 임한 하나님의 교회가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는지에 대한 2년여간의 귀한 자료들에 감동을 더하는 대각성 운동의 신학적 살을 붙였다.

기독교 세계관이 한국에 보급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우리의 현장에서는 왜 부르짖는 부흥만큼의 열매가 없는 것인가. 물론 부끄럽게도 나 스스로가 문서사역을 통해서 변화가 된 많은 학생들이 집단적 행동을 해나갈 때에야 현장으로 뛰어들고 싶어하는 유사(pseudo) 복음주의자며 나와 같은 부류의 기독인이 많기 때문인 면도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 각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이 각성하고 실천의 장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일과 더불어, 진정 함께 해나가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이유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학복협에서 세미나가 있었고, 그곳에서 같은 분과 포럼이었던 이은창 간사(새벽이슬)가 이 문제에 대해 지적했던 부분은, 우리가 지적 허영에만 빠져있지 실제로 현장에 뛰어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동의한다. 나 또한 그런 문제에 봉착해 있음을 안다. 하지만, 대부분 캠퍼스 선교단체의 경우, 그러한 현장 실천에 장애가 되는 것은 개인적인 죄성에 기인한 문제보다는 제자도에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회심의 열매를 허구적인 영성에 기반을 두는 것이 문제이며, 그것은 현장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진정한 회심의 열매라는 사실을 뼈속 깊숙이 각인시켜 주는 교육이 선교단체의 제자도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애초부터 회심이 ‘헌신의 기쁨’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의 대가’를 가늠해 보고, 자신의 삶의 작은 부분에서 몸부림쳐 본 이후에야 그것이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기쁨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기름부음 받은 이후에 작은 무리의 양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소중하게 섬기면서 그 현장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다윗과,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든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 가운데에서 성실함과 온유함으로 영성의 깊이를 더해갔던 요셉의 삶을 돌아보라. 갑자기 하나님께서 들어서 영웅처럼 세우시는 것에 감동 받는, 우리들이 보기에 형편없고 무료해 보이기만 했던 그분들의 길고도 낮은 위치의 ‘현장’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실천의 장이 필요하다. (끝)


2002년 1월.
2002/01/01 23:05 2002/01/01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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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 5 : 강보선 님의 글에 답함

/김용주


<강보선 님의 글에 답함>

안 녕하세요? 강보선 님. 님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사실 복음과상황 홈페이지(www.goscon.co.kr)의 게시판에서 님의 글을 먼저 읽었습니다만, 당시에는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글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님의 글에는 꼭 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오프라인에 실린 글을 대하게 되어 참 반가운 마음이었습니다. 게다가 저와 같은 선교단체에서 지내는 것이 저로 하여금 좀더 편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도 지적할 부분은 지적하겠지만.글을 쓸 때는 좀더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실제로는 제가 속한 선교단체와 캠퍼스의 상황이 많이 드러나는 것 또한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님과의 논의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며, 글을 쓰면서 좀더 일반화 시켜서 좀더 많은 사역자들, 학생들과 나눌 수 있는 내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앞으로 쓰는 글은 편의상 반론의 형식을 취하겠습니다
 

<왜 문제의 핵심은 지나치는가?>

지 난 번 내가 썼던 ‘비유’라는 글의 간략한 요점은, 기독 공동체가 복음의 진리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실패하여 많은 학생들이 보화를 보화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다른 도구에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그 도구는 다름아닌 세상적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율방식’이며 이러한 감시와 처벌에 따라 기독 공동체가 구성원들을 통제하게 될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진단이었다. 지난 번 글이 비유적인 내용으로 채워져서 반론을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어쩌면 내겐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이를 통해 잘못된 생각들은 바로잡고 오해들은 일소할 수 있었으면 한다.강보선 님은 내가 쓴 글이 “리더들이 후배들에게 복음의 귀한 가치를 가르쳐주지 못하고 당위와 군기로 후배들을 붙잡고 있다는 비판”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런데 모든 문제의 근원을 리더들과 공동체에 돌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고려하지 않은 내용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1. 회의하는 개인에 대한 책임
2. 선교단체의 존재 목적

사실 이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강보선 님은 ‘리더들이 복음의 귀한 가치를 가르쳐주지 못’하여 생기는 문제에는 쉽게 그냥 비켜갔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강보선 님의 글에서는 너무 부족하다. 강보선 님이 나의 이전 글을 언급한 것으로 볼 때, 내가 이제까지 <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에서 진단한 문제의 핵심은 ‘선교단체의 신앙 교육’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강보선 님의 의견을 어느 정도는 언급하는 것이 좋았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고등학교 때인가, 보충수업 시간이었다. 보충 수업 때 들어오는 수학 선생님은 두 분이셨는데, 한 분은 정말 성실하게 수업을 준비하는 분이셨고 다른 분은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준비가 부족하셨던 분은 학생들에게 체벌을 심하게 주시는 분이었다. 한 번은 학생들이 일제히 책상을 든 채로 준비가 철저하신 수학 선생님의 수업에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일이 일어나게 된 문제의 핵심은 수업의 내용이었다. 물론 학생들이 버릇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변적인 문제였다. 결국 이 사건은 학생들의 버릇없음에 대한 체벌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담당 선생님이 수업 준비에 열심을 보임으로 긍정적인 해결을 보았다. 내 지적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회의하는 개인, 기다리는 공동체>

강 보선 님은 기독 학생들이 공동체에 들어오는 이유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중에 아주 소수만이 주님의 나라를 위해 공동체에 들어온다고 보면 아마 정확’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기에 이들이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히 다르며, 대부분은 공동체가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것인지에 많은 관심’이 있음을 경계했다. 그러다가 ‘공동체가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불만이 많이 생기’며 그렇게 떠나가는 후배들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들이 혹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기도하며 인내함으로 섬기겠다는 결단이 무엇보다 필요하며, 강보선 님의 선교단체의 경우 2년간을 손실을 감수하면서 기다려 준다고 말하였다.나아가 강보선 님은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그들의 회의감이 ‘그들 자신이 보다 적극적으로 회의를 풀려고 노력해야 하며, 답을 제시해 주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스스로 그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을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밭에 감추인 보화는 결국 자기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물론 나는 강보선 님과 같은 선교단체에 있기 때문에 2년간 막연히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의 글 자체를 인용하자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지금 글을 쓰는 본인 조차도 공동체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내가 기독 공동체의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강보선 님이 회의적으로 이야기했던, 그저 그런 이유에서였다.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 배워서 교회에서 활용하려고, 외로워서…) 나는 그들의 필요 또한 절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성경에서 조차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제자들을 본다. 나는 성경에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오랜 시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면서도 오히려 영광 중에 그 분의 좌우에 앉기를 원했던 야고보와 요한을 본다. 3년을 공동체 생활을 했음에도 누가 더 높은 지에 대해 논쟁하는 제자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같은 본문에서, 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섬김을 본다. 나는 진리를 확증한 순간, 공동체의 후배들의 개인주의적이고 가시적인 필요로부터 마음 중심에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제자들에게는 어떤 권위의 행사가 아니라 발을 닦아주는 낮아짐과 섬김의 본이 그들을 변화시켰음을 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낮아짐의 본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내 모습에 심하게 좌절하며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그들의 회의감은 그들의 등에 올려 놓을 성격의 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도, 제자도, 선교의 균형이 필요>

“공 동체는 서로 서로에게 편안하고 아늑한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선교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하기에 선교를 위해서는 모두의 입장을 고려해줄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명의 지체가 공동체에 들어왔다고 가정해봅시다. 10명은 주님의 나라에 관심이 있고, 나머지 10명은 관심이 없다면 제 생각에는 관심 있는 10명에게 더 많은 섬김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 없는 10명에게 무관심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도록 사랑과 인내로 도와주어야 하지만, 섬김의 우선 순위는 관심 있는 10명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청년부와 선교단체의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단체는 선교를 위해 모인 특수한 단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과상황 11월호, 강보선 ‘선교단체는 교회와 다르다’)

만일 강보선님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선교단체는 제자도가 결여된 곳일 가능성이 크다. 강보선 님과 내가 속한 선교단체는 중점 전략으로 EDM, 즉 전도(Evangelism)와 제자도(Discipleship), 선교(Mission)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 목표들은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기보다는 이 세 가지가 균형 있게 공동체 안에서 담아져야만 한다. 강보선 님은 선교단체의 존재 목적을 선교적 측면에서만 파악하고 있고, 그럼으로 인해 본인이 언급한 제자도의 문제를 부차적이고 도외시 될 수 있는 부분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나는 ‘교회 청년부’가 선교의 사명에서 제외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게다가 무엇보다 ‘섬김의 우선순위가 관심있는 10명’에게 더 많은 섬김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심한 거부감이 생긴다. 이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볼 때, 기독 공동체를 세워가는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효율적인 수단과 방법을 논의하는 것은 오히려 기독 공동체에도 경제 논리가 동원된 형태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면서: 사족>

강보선 님은 글을 마치면서 ‘님의 말처럼 조직의 효율화를 위해 등급을 매기고,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지만 공동체의 목적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후배들에게 합당한 성경적인 권위’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공동체의 목적으로 이루기 위한 ‘성경적 권위’는 무엇인가? 이것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일 수 있다. 아마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보선 님이 지적한 성경적 권위가 ‘세상적 기율방식’과 구별되는 것임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공동체의 방향성에 끝까지 동의를 하지 못하는 이들은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서로에게 덕이 된다고 봅니다. 캠퍼스의 공동체는 4년을 주기로 변화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회의로, 불만으로 가득 찬 지체를 받아줄 수가 없습니다.” (복음과상황 11월호, 강보선 ‘선교단체는 교회와 다르다’)

강 보선 님은 ‘김용주님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저의 공동체인 것 같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리의 어떤 약점을 꼬집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글을 읽게’ 된다고 했다. 분명 강보선 님의 공동체가 내가 속한 공동체고, 나아가서 한국의 기독 공동체의 문제임에 분명하다. 강보선 님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공동체의 문제는 쓰리고 아프다. 좀더 나은 구조를 세우고, 보다 많은 학생들이 진리로 자유케 되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확증하되 그 안에서 다양성을 누리며 은사들을 발휘하는 공동체로 발전하며, 그 안의 개인들이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를 정말 간절히 원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수고로 하나님의 나라가 한 걸음 더 가까워 오기를 소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발 ‘떠나는 것이 서로에게 덕이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2004년 10월.
2001/12/01 23:04 2001/12/0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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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상] 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4: 비유

/김용주


<밭에 감추인 보화>

한 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멀리서 보화처럼 보이는 물건의 일부분을 발견했다.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꽤 가치가 나갈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사람이 밭을 사려고 계산을 해 보니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야만 살 수 있었다. 부담을 느낀 그는 주변 인맥들을 불러다가 밭에 보화가 있으니 우리가 돈을 합하여 그 밭을 사자고 이야기했다. 주변 인맥들이 확신을 못하고 증거를 보이라고 재촉하자 그가 밭으로 가서 보화의 반짝이는 일부분을 먼 발치에 서서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쳤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저거 보화 맞지? 이제 저 밭만 사면 우린 부자라구!"



요 즘 후배들을 만나면서 하는 비유 중에 많이 쓰는 것이다. 좀 엉성하긴 해도 이 사이비(似而非) 비유에 등장하는 남자와 같은 기독학생들은 꽤 많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처음 선교단체에 들어와서 약간의 훈련을 받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대한 개략적인 청사진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미심쩍긴 하지만 자신이 본 것을 보화라고 생각하기로 '결단'한다. 행여라도 보화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은 교만한 행동이며 믿음이 부족한 이유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쉽사리 보화에 가까이 가서 만져본다든지 제대로 확인해 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제자로의 부르심'은 전적인 헌신에 있다는 사실인데, 비유에서처럼 전 재산을 팔아야만 하기 때문에 주변 동역자들과 고통을 분담하여 그 부담을 좀더 줄이고자 하는 노력들을 하게 된다. 이제는 보화인지 아닌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화라고 믿고 함께 재산을 처분할 동지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언젠가 한 친구가 기독 공동체를 떠나면서 기독교는 '다단계'(피라미드식 판매구조)같다는 말을 했다. 이 친구는 전에 다단계 판매조직에 연루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말인즉슨, 그 안에서는 그 말이 진짜 같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계속 엮어가면 뭔가 될 것 같았는데, 그 안에서 힘들게 빠져 나온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완전한 사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가면서 공동체가 '다단계'같다고 얘길 했으니 나로선 여간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토착화는 한국적 민주주의(?)>

' 다단계'는 나와보니 사기였지만 기독교는 거기에서 나왔어도 여전히 진리임을 확증해야 하는데, 기독 공동체에 있다가 나와보니 이것도 '사기'란 생각이 들었다면 이건 보다 심각한 문제이다. 이른바 '보화 확인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의 신앙교육이 어느 정도 당위적이고, 수동적이며 반지성적이라는 진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주변에서도 지적 탁월함은 '교만하다'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쓸 때가 많고, 토론과 비판 문화에 대한 반응은 '깐깐함'과 '인격의 부족함'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지식이 있는 기독학생들이 보다 낮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비판을 하는 가운데에서 어느 정도 과격한 스타일을 보인 이유도 있다. 하지만 지적인 성실함은 신앙훈련에 있어서 중요하며, 그런 부족한 부분에 있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후배에게라도 배우고자 하는 성실함이 동일하게 필요하다. 지난 호에도 언급되었던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라는 책은 그리 새로운 내용의 책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기독학생들에게 그런 책은 두려움으로 다가오며, 섣불리 그 책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회의는 곧 불신앙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하여 경계하는 것이다.

이렇게 피라미드식 판매구조와 다를 바 없는 신앙을 이제는 계속해서 유지 시키려면 무엇보다 강한 유대와 운동성을 위한 동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쉽게 권력화와 통제로 번질 위험이 있다.

어 릴 때, 초등학교 시험에 '유신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양의 민주주의를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새롭게 고안한 ( ) 민주주의이다'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이 문제의 답은 "한국적"이었으며, 엄청난 암기교육 탓에 그 당시 거의 모든 아이들이 그 문제의 답을 맞추었다. 유신정권이 독재정권인 줄 알게 된 건 그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 사회는 박정희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이른바 헝그리 정신이란 말들이나 "독재자가 때려야 우리 민족은 발전한다"는 논리가 그런 류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도 토착화라는 주제로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이른 바 '박정희 신드롬'같은 것을 토착화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재정을 임의로 사용하지만 많은 평신도들은 '목사님이 우릴 위해 얼마나 수고하시는데 그 정도는…'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는 일차적으로 영적 지도자의 문제지만, 함께 조금이나마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은 스스로가 '왕 같은 제사장'임을 망각한 대부분의 평신도들도 자신들과는 완전히 차별적인 영적 지도자가 나타나서 강권적으로 끌어주는 것을 열망하고 그것에 익숙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책임을 평신도에 돌리는 게 아니라 현실을 어느 정도는 직시하자는 얘기다. 내가 속한 캠퍼스에도 이런 문제들이 고스란히 기독 학생들에게 남아 있다. 리더들은 회의감을 가진 멤버들을 정죄하기 쉽고, 또한 그 회의감을 없애기 위해 멤버의 삶을 통제하려고 한다. 멤버들 스스로가 생각하고 성숙할 수 있는 훈련을 통해 자발성을 살리는 방향보다는, 당위적이고 회의감 자제를 정죄하는 권위적이고 강권적인 방법으로 신앙 훈련을 해 나간다.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한창 포스트모더니즘에 관심이 있을 때, 풋내기 독자인 나의 눈에 호감을 가져왔던 내용은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말한 "감금 사회"였다. 이 책을 쓴 미쉘 푸코(Michel Foucault)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사회 질서유지의 그 근본뿌리를 "교도소"에서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 기구들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교도소의 운영방식을 알아보면 당장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현대 사회의 많은 조직들, 이를테면 병원, 학교, 공장-의 억압적인 형태는 감옥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율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범법자들을 외부 세계와 차단해, 감금시켜 놓고, 엄격한 감시와 규율로 교정하는 방법을 학교, 병원, 공장과 같은 다른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아주 흥미로웠던 부분은 학교의 생활기록부와 병원의 환자기록부, 그리고 회사의 인사관리카드의 뿌리를 감옥에서 죄수들의 명부에서 찾았던 것, 그리고 이 모두는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고 그에 따라 객관적인 수치로 규정 지어버리는 것이었다. 장황하게 얘기했지만, 사실 나는 요즘 그 내용이 자주 떠오르곤 한다. 자크 엘룰도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인의 내적 증거인 '회심'이 단순한 외적 표지인 '세례'로 대체되면서 중세 기독교의 타락상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이 한국 교회에도 팽배해 있음을 돌아보게 되는 일도 있다.

또한 캠퍼스의 선교단체들에서도 그런 경우를 찾아보게 되는 수가 있다. 리더들은 멤버들을 규정지으려하고 그 결과. 각각의 멤버들에게 등급을 매긴다. 이 멤버들에 대한 신상과 생활 기록은 리더들이 작성하고 이 기록과 리더들의 한 주간 동안의 생활과 시간표는 복사하여 이들을 관리하는 그 위의 리더들에게 제출된다. 기독학생들은 모임에 빠진 일수와 경건의 시간(QT)과 같은 기본적인 개인영성훈련 과제(?)를 지키지 못한 날들을 계산하여 그 기준에 다다르지 못했을 때, 섬김의 위치가 제한되며, 심한 경우 제명되기도 한다.

솔 직히 내가 쓰긴 했지만, 내 생각에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좀 오버인 것 같다!(웃음) 사실 학생들의 경우, 그들의 신앙의 성숙도에는 제각기 차이가 있기 마련이며, 그에 맞게 학생들을 돌보고 신앙훈련을 돕고자 이런저런 정보들을 듣고 기록하고 함께 기도해주는 일들은 그 자체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조심스럽게나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수가 많아지고 조직의 효율성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서로를 규격화하고, 등급을 매기고, 후배들을 제 임의대로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감금의 공동체'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떠나는 개인주의자, 남은 충성된 종>

요 사이 선교단체의 기독학생들의 수가 줄고 있다. 기연운동도 그렇고, 주변에서 보는 선교단체의 기독학생들도 그런 추세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뜨내기 기독학생들 수가 늘어났다고 하는 게 맞겠다. 선배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요즘 애들이 개인주의적이다, 자기만 안다, 이기적인 세대다 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예전에는 선배들이 수련회를 가자고 하면, 군소리 없이 따라가야 했고 공동체를 섬기면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죽도록 충성을 다했다'는 식의 푸념을 늘어 놓는다. 나도 그런 선배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나도 조만간 후배들에게 물어봐야 되겠다)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자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군기를 잡으려고 한다.



이 런 선배들 앞에서, 보화가 보화인지 모르는 후배 개인주의자들은 두려움에 전전하다 결국 '감금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자기가 있었던 공동체가 '다단계'라고 얘기한다. 남은 '충성된 종'은 별다른 회의감없이 지칠 때까지 죽도록 공동체에 충성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근본주의자'이다. 나는 이 두 부류 모두 비난할 마음이 없다. 어쩌면 지금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이들 모두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며, 또한 내 신앙의 여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자에게는 냉소적인 태도가 후자에게는 끊임없는 마음의 상처가 남는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해야 할 이들에게 보화가 보화인 것을 확인시켜줘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자발적인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도록 '감시'가 아닌 '섬김'과, '처벌'이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룬다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요일4:12) 이제 캠퍼스의 영적 허구(Spiritual Fiction)는 영적 실재(Spiritual Reality)의 '보화'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는가! **


2001년 12월.
 
2001/12/01 23:03 2001/12/01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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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 3: How should we ‘then’ live?

/김용주


<한국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친 한 후배와 <목회와 신학>이란 잡지를 보면서 느꼈던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 잡지가 마치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한국판과 같다는 생각이었다. 한국 교회의 거의 대표격인 신학잡지의 절반 이상이 외국-주로 미국-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그 터전 속에서 일구어진 상황으로 즐비한 모습이었던 것이 많이 아쉬웠다. 물론 우리 둘 다 신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록 전문적인 입장에서의 관찰은 아니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양희송 편집위원도 지난 호의 브리스톨 통신을 다음과 같이 맺지 않았던가.

이 글이 한국 복음주의자들에게 건강한 신학적 자극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 복음주의는 이런 국제적 복음주의 신학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혹은 기대 받고 있을까?…(중략)…그러나, 아쉬운 것은 여전히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목소리들을 그 논의에서 실제로 찾아볼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복음과 상황 7월호, 77면)

몇 년 전 즈음에 마크 놀 교수(Mark A. Noll)가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스스로 복음주의자라는 사실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터였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책은 나의 생각을 많이 교정 시켜 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책에서 마크 놀 교수는, 복음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며 진단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와 제안들을 내어 놓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작업이 늦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글의 성격상 범위를 좀더 좁혀서 이제는 캠퍼스로 돌아가 보자. 작년 여름에 선교단체에서 조장으로 수련회를 갔었다. (올해는 졸업논문과 시험으로 가지 못했다!) 그곳에서 조장들은 같은 숙소에 묵었고, 쉬는 시간마다 서로의 조원이 어떤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등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수련회에서도 뒤쪽에 북테이블이 설치되었는데, 사실 해를 거듭할수록 책은 적게 팔리는 실정이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신앙서적으로 넘어갔고, 나는 이내 많은 조장들이 지성을 요구하는 책들을 기피하는 것을 알았다.


‘그 책은 너무 어렵게 쓴 거 같아.’

‘지식 쌓기에 골몰하다 보면 정작 하나님의 초자연적 일하심을 경험할 수 없다니까.’

‘내용을 읽어도 느낌이 안 와.’

조 장들이 읽기 힘들어 하는 책은 유감스럽게도 저학년 필독서였고 솔직히 난 좀 허탈했다. 많은 조장들이 정말 많이 수고하고 기도하고, 조원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크게 감동한 한 주간이었지만, 그들에게 듣게 되는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많은 판단과 생각들은 솔직히 대화하는 내내 좀 불안했다. 성경적이거나 기독교 세계관적이라기 보다는, 몇 년 동안 겪어 온 기독교 ‘문화’ 속에서 터득한 어떤 코드(code)가 그들의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많은 리더들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신학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나는 우리가 복음주의 지성의 미래이고,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한국 복음주의의 스캔들’이란 생각을 했다!
 

<대안 없는 비판(?)>

이제까지 캠퍼스 안에서의 SF(영적 허구)에 대한 나름의 비판적인 이야기들을 풀어 보았다. 실제로 글을 쓰면서는 여러 반응들을 접한다. 거의 대부분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선교단체 학생들의 것들이다. 캠퍼스 사역자들의 생각들도 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아직 별 의견이나 조언을 들을 수 없었다. 각종 수련회와 많은 사역으로 인해 여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래 학생들 가운데에서는 여러 반응들을 듣게 되는데, 가장 감사한 것은 충실한 반론을 들을 때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 보면 미처 생각치 못했던 많은 것들을 서로가 얻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또 다른 감사의 경우는, 본인의 비판적 시각에 공감하고 고민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대안들을 생각해 보자고 연락하는 이들이다. 물론 가끔은 당혹스러운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기존 선교단체에 안티(anti-)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주류로 들어갔으면 한다. 그리고 힘들겠지만, 그곳에서 가장 낮은 본을 보이며 섬김의 삶을 살아 가길 기대한다.
 

솔직 히 나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지적할 때, 반드시 대안까지 고려되어야만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분석하기 시작했다면 그 이후부터는 쉐퍼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강일 편집위원이 1998년 8, 9월호 <복음과상황>에 실었던 “기독 신세대의 신앙교육”이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내용이 어느 정도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기사의 전문은 복상 홈페이지의 자료실에서 검색할 수 있다.)
 

신앙 훈련의 내용

1. 복음주의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2. 한국의 역사와 사회현실을 가르쳐야 한다.

3. 통합적이고 일상적인 복음주의의 영성을 훈련시켜야 한다.

4. 개인주의적 특성을 교정 시킬 수 있는 공동체적 실천의 장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5. 말씀을 연구해서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눈을 길러야 한다.


효과적인 기독 청년들의 교육 조건

1.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복음설교가 지속되어야 한다.

2. 일관성 있는 교과과정이 확정되어 학생들 스스로가 배울 내용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3. 학생들의 인격적, 신앙적 스승으로서 멘터(mentor)가 구비되어야 한다.

4. 대학 내에 가족과 같은 기독공동체가 튼튼히 서 있어야 한다.


<몇 가지의 경험적 대안>

많이 부족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교회 청년부와 선교단체에 있으면서 경험했던 몇 가지의 대안들을 나누고 평가를 하는 것으로 글을 정리해야겠다.


1. 이원론의 탈피, 총체적 복음을 신앙훈련 처음부터 조명해준다.

선 교단체나 교회에서 사회참여가 복음전도와 함께 총체적 복음의 한 쪽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에 기인하기도 했고, 내가 속한 선교단체(IVF)의 상처이기도 했다. 또한, ‘이원론적 신앙관의 탈피’에 관한 문제도 그러했는데, 이것은 교회에서 더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봉사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생기는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교회에서 임원들과 함께 임원모임 때 스터디를 해보았으나 솔직히 별 효과가 없었다. 이미 굳어진 신앙 성격과 그것에 대한 익숙함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 형성에 아직 별 다른 기초가 없이, 고등부를 갓 마치고 청년부에 들어온 학생들을 몇 그룹으로 모아서 반 학기 정도 따로 성경공부를 해 보았을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었다. 성경공부 교재는 복음의 핵심에 관한 것을 4주 과정으로, 그리고 송인규 목사님이 복상에 연재했던 평신도 신학강의를 선별(?)해서 4주정도,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간단한 책 나눔과 토론으로 4주정도, 그리고 귀납적 성경연구(inductive Bible study)를 임원들이 강의하고 함께 그룹별로 공부하고 나누는 것으로 4주정도하고 특강으로 ‘로잔 언약’이나 창조진화논쟁 같은 것으로, 모두 3~4개월 정도를 하고 나서 기존의 청년부 소그룹을 다시 편성해 보았다.(물론, 공부만 한 건 아니고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하고 MT도 갔다!) 그 결과, 다행스럽게도 조금은 이질적인(?) 그룹이 형성되었다. 아마 이들이 임원이 되면 공동체는 좀더 변화될 것으로 생각된다.


2. 복음주의 역사를 조명함으로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대 부분의 학생들은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s)과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에서의 신학 협의회를 통해 복음주의권에서 사회참여라는 이슈가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마닐라 선언(Manila Manifesto)을 통해 은사주의자들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많은 학생들이 그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리고 그러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신앙이 어느 정도는 결정되고 있음에도, 정작 스스로는 그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채로 생활한다. 시대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면,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의 차이점과 그로 인해 생기는 신앙의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화란의 개혁주의나 독일의 경건주의, 웨슬리와 메쏘디스트를 알지 못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서 지금도 일하시는 그 분의 인도하심을, 실상 별반 인식하지 못한 채로 생활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많은 기독학생들이 불트만(R. Bultmann)을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물론 많은 기독학생들이 불트만을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들 사고의 밑바닥에는 오히려 신앙의 역사성을 무시했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서일까… 요사이 과거에 비해 복음주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이 약해졌고 그에 따른 복음주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부족함을 경험하고 있다. 한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어느 때보다 자료집과 좋은 책들은 많이 번역되고 있지만, 정작 사역의 현장에서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런 것들을 외면하게 된다.


되 도록 많은 리더들이 스스로 체득한 복음주의 역사를 자신의 소그룹 멤버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것이 어렵다면 스터디 모임을 단기간 동안만이라도 가지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내가 속한 선교단체의 경우, 스터디 모임을 통해서 종교개혁과 대각성 운동, 그리고 복음주의 신학의 흐름과 그에 따른 시대별 세계관 파악, 로잔 언약과 마닐라선언의 특징,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사역에 대한 간략한 공부를 하였다.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과 함께 스터디를 할 수 있었고 대부분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좀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3. 복음주의적 전문인을 양성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선 교단체에 있으면 고시 준비를 한다든지 혹은 공과대에 속해있는 학생들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 이들은 정죄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지만, 공동체에 전적으로 시간과 정열을 쏟을 수 없는 이들의 상황을 공동체가 받아들여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정죄하고 공동체에서 상처받은 채로 떠나게 되는 것을 방관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온전한 복음주의적 전문인을 키울 수 없는 곳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공동체를 떠나지 않도록 하면서, 그들의 상황과 형편에 맞는 구조를 세우고 그 안에서 그들이 전문인으로 양육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선교단체의 많은 리더들이 고학년으로 갈수록 전임사역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공동체 사역의 목적이 일정부분은 왜곡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이 많은 시간을 공동체에 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없는 것은 반복적인 모임에 계속적으로 시간을 보냄으로 생기는 정체 현상인 듯 하다. 이는 앞서 지적했기 때문에 각설(却說)하고 대안을 생각해 볼 때, 동질의 모임들이 어느 정도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비슷한 형태의 모임들이 줄어들고 차별적이고 대안적인 모임들이 활기를 띨 때 학생들의 자발성과 역동성, 그리고 전문성 등을 고취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2001년 8월.
2001/08/01 23:01 2001/08/0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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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 (2): 닮음꼴

/김용주


"기독교 복음이 사회를 새롭게 하는 데는 우리 마르크스 철학보다 더 강한 무기임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당신들에 대하여 승리할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말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동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획득하는지도 안다.

어떻게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의 최상의 가치를 믿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그것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것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것을 위해 시간도 돈도 희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 리는 공산주의의 메시지를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당신들은 가족과 함께 휴일을 야외에서 즐긴다. 하지만 우리는 휴일뿐만 아니라 주말의 시간까지도 당을 위해 바친다. 우리는 큰 즐거움으로 기름때를 만지지만 당신들은 손에 흙 묻히는 것조차 괴로워하고 있다..."

(한 공산주의자의 공개도전장)


지 난 달에 GT를 읽다가 위와 같은 '공개도전장'을 받았다.(GT 3-4월호, 99면 인용) 처음엔 그냥 쉽게 읽고 넘겼는데 한 달 내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찜찜하고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내심 이 도전에 응할 수 없는 나와 내 공동체의 형편들을 생각하면서 시작된 마음의 짐 때문이었으리라.

지난 4월에 실린 필자의 글은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꽤나 냉담한 반응을 접했다. TNT논쟁 때 보여졌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의견을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메일로 받았던 것을 돌아볼 때, 이번에는 지극히 조용한 한 달을 보냈다. 간신히 접한 글이라고는, 복상 게시판의 논객인 Gramsci님이 5월호에 쓴 독자의 글로 주된 내용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제발 절망하라'는 Gramsci님 특유의 글은 내게 '절망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쓰디 쓴 교훈을 주었다. 이 묵은 실타래들을 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나또한 절망 가운데에 있음을 자각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문제들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의 기독인들의 현실을 돌아본다. Gramsci님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부끄러움을 안고.


<닮음꼴 하나: 대집회 장소와 콘서트 홀>

복 상에서 전혀 반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연중기획으로 시작된 <SF가 판치는 교회>는 지난 달에도 교회 중심의 시각을 회복하려는 글들이 많이 선보였고, 그 중에는 내가 속한 캠퍼스에 적용될수 있는 류의 도전적인 글도 있었다.

' 하지만 저들은 왜 저곳에서 멈추지? 왜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지 아니하는 것이지? 또 저 탁월한 영성(?)의 찬양 인도자는 저곳에서 항상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그곳을 위해 중보기도는 하지만, 왜 자신의 직장과 현장에서 불의에 항거하고 또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게로 나아가라고 말하지는 않는 거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교제를 나누었을 자신의 사랑하는(?) 동역자들이 행하는 교회 세습, 헌금 유용 등 - 예컨데 서울의 거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악한 죄악을 두고는 기도하지 않는 거지? 왜 음란을 위해 기도하면서 스포츠투데이 같은 신문의 폐간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는 거지?'...(중략)...돌아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합법적인 대우 자동차 정리 해고 집회를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중략)...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찬양 인도자는 연약한 민중들의 피 흘리는 그곳에서 "기독청년이여 깨어나라! 하나님의 백성이여 깨어나라!"라고 말하지 않는지,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복상 5월호, 김채완 "가까운 곳에 있는 영적 허구", 98-99면)

김채 완님의 이와같은 언급은 나로 하여금,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찬양 집회에 갔을 때의 느낌을 상기하게 만든다.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려면 잠시 하나의 프로그램과 비교해야 하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찬양집회의 세상적(?)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열린 음악회>가 될 것 같다. 가사는 대형 화면으로 전달되어 손쉽게 따라부를 수 있다. 애창가요와 최신가요, 그리고 가요와 클래식의 분배를 적절하게 함으로써 세대간의 벽을 허물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음악이란 매개물로 하나라는 정서를 승화시킨다. 이들은 마치 진정으로 옆사람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며, 통일을 노래하면 통일을 이룬 것 같고, 사랑을 노래하면 사랑이 서로의 마음 속에 풍성한 것 같지만. 공연이 끝나고 세트장을 정리하게 되면 항상 출구는 서로 나가려는 사람들의 이기심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돌아가는 발걸음 가운데엔 어느새 한 바탕 잔치를 하고난 허전함이 찾아온다. 다음날 시작되는 일상은 변함이 없으며 그들은 허구적인 공연 뒤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다시 다음 공연장소와 날짜를 다이어리에 기록해 둔다.

난 며칠 전 또다시 꽤나 유명한 찬양예배 광고지를 받았다. 이번엔 찬양예배 가운데 삶을 고취시키려나...절망 속에 또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회 날짜를 다이어리에 적어둔다.


<닮음꼴 둘: 성령체험의 코드화와 주술적 행위>

고 등학교 시절, 고등부 임원회에 속해있던 시절에 우리는 그 시절에 <두란노 경배와 찬양>의 찬양 스타일을 흉내(?)내곤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찬양예배 시간에 찬양 인도자의 멘트(?)를 똑같이 따라하는 임원들이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어린 시절과 비슷한 일이 한국 교회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씁슬해 한 적이 있다. 찬양과 치유사역이 맞물리는 빈야드교회의 찬양을 교회와 선교단체가 흡수하면서 겪었던 일이 그것인데,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빈야드교회의 신학은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예배의 스타일만을 차용하여 적용시켰던 일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감수해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러한 모조적인 행태는 내가 속한 캠퍼스에 들어오면서도 꽤나 괴상한 모습으로 변질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영적 체험의 코드(code)화이다. (특별히 명명(命名)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던 차에 <바이블 코드>라는 책을 '구경'하면서 생각했던 그 '코드'를 떠올려 보았다) 특히, 이것은 찬양 인도자나 중보기도 인도자가 이야기하는 가운데에 가장 자주 보여지며, 때때로 함께 기도하는 기독학생들 사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들은 특정한 기독교적인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영적 체험의 코드화는 마치 신접하는 행위나 주술적인 행동들과 비슷하게 보일 때가 있다. '성령의 임재',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같은 말들로 시작하여 모두가 눈을 감고 그런 단어들을 되내이면 신이 내려오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느낀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 찾아오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죄에 대한 회개와 각성이 아니라, 현상적인 치유와 능력, 이적과 기사들의 현현을 기대하는 수가 많다. 그런 현상이 없거나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순서가 되바뀐 게 심각한 문제다. 간혹 사역자들 중에서도 로이드죤스의 <성령세례>는 좋아하면서,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경계하는 것들을 공공연히 프로그램화하는 이들을 본다. 특정한 코드를 되내이며 램프를 문지르면 능력이 임한다? 경계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닮음꼴 셋: 선교단체와 JMS>

99년에 TNT논쟁을 하는 가운데 기숙영님의 글에 대한 반론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개 인주의적인 20대의 특징은 자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 또한 핵가족화된 가정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친밀한 공동체를 원한다.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잘해주며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맡길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접어두고서라도 그 단체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이단 단체에서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 바람직한가?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집단적 행동에 대해 '바른 교리'라는 진리의 지성적 영역에서 일깨워주어야 할 부분이 있지는 않는가 하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했다. 첫째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실패하여 많은 기독청년들을 이단 단체에게 넘겨준 것. 둘째는 그들에게 세계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않고, 지성의 영역에서 복음을 이해하는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것. 여기에서 두 번째 문제에 대해 지금의 30대가 20대에게 도전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여기에 대한 선교단체의 사역방향이 이단단체와 똑같이 맹목적으로 잘해주는 공동체의 형성에만 치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와 이단의 구분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처사임에 분명하다. 그들의 개인주의적 성향 이면에 존재하는 왜곡된 집단성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 않는가. (복음과상황 1999년 9월호, 73면)

난 요즘 선교단체를 대하면서 "선교단체의 사역방향이 이단단체와 똑같이 맹목적으로 잘해주는 공동체의 형성에만 치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와 이단의 구분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처사임에 분명하다"라고 했던 이야기를 곱씹어 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내 주변에는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할 수 없는 많은 기독학생들을 본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구분을 못한다기 보다는 서로를 진리의 영역이 아닌 패거리의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기독학생들을 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들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며, 코드화 된 기독교적 표현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무지한 편이다. 그러나 '빈번한' 공동체 생활이나 수련회에서 너무나 친밀한 나눔을 통한 집단적 결속력과 유대가 강해지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자신의 학과에서는 부실한 참여로 아웃사이더가 된지 오래며, 자신이 속한 선교단체를 나오면 학교 내에서 관계를 맺고있는 인맥의 거의 전부를 버려야만 한다. 그러한 결단을 할 수 없는 많은 기독 학생들이 공동체에서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의무감에 신앙을 지켜간다. 어느 정도 중세의 카톨릭적이며, 좀더 심하게 말하면 JMS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계속...)


2001년 6월.
2001/06/01 23:00 2001/06/0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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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캠퍼스보기 1>: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라!

/김용주


항상 글을 쓸 때면 머리 속에서 뭔가 잘 정리가 되어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때때로 항상 생각이 맴도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을 제대로 언급조차 못할 때가 많이 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있다.

복음과상황에 99년 12월부터 연재가 되고 있는 본인의 글(세상보기)은 솔직히 말하자면 매번 나의 마음을 아주 힘들게 만든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부끄러움이다. 집으로 배달된, 발송하느라 수고를 했을 법한 무명의 독자들과 논고개 분들의 애정어린 손길이 담긴 복상을 받고 목차에서 내 글을 발견할 때면 심히 얼굴이 붉어지고 무안해지는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목차를 볼 때 느끼는 또하나의 불편함은 목차 왼편에 열거된 우리나라의 대표격인 분들의 이름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이 잡지사에는 왜 기자 한 명조차 충원이 되지 않나하는 아쉬움이다!) 물론 누구나 글을 써 본 사람은 자신의 글에 대한 열등감을 어느정도는 느낄 줄로 안다. 나또한 예외는 아니며 그런 종류의 부끄러움도 물론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의 '부끄러움'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정작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으로 상황을 조명하는' 이 잡지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꼭지의 넌센스 때문이다.

한 동안 복상에 이전까지 보여왔던 상황(context)의 부재와 그로인해 잡지의 날카로움이 예전에 비해 다소 무뎌졌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독자모임에서도 1년동안 그런 류의 지적들은 자주 있어왔고 정당한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복상에서 발로뛰는 글을 쓰는 이들은 극히 소수이다. 현장성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게다가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거의 30대를 넘어서고 있으며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캠퍼스의 현장성이 담겨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내가 갖는 불편함은 이런 복상의 '상황'에 기인한다. 발로 뛰는, 현장성을 담보로 한 긴장감있는 글들이 30대에서 나오고 있는데,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20대의 철부지 기독학생이 삶이 어떠니 묵상이 어떠니 하는 류의 글을 쓰고 있는 이 '상황'이야말로 정말 이해될 수 없는 넌센스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의 부끄러움은 바로 이 철모르는 학생이 현장성없는 사색적인 글을 건방지게 쓰고 있다는 불편한 심기에 기인한 것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캠퍼스다. 또한 요즘 한창 '잘나가는' 선교단체의 리더이며, 필요성 때문에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기독학생연합회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 워낙 체육 쪽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또한 그로인해 주변 지체들에게 핀잔도 많이 듣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대학생이다. 처음에 얘기했듯이 나는 동시대의 모든 캠퍼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 모두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고 느낀다. 또한 어떤 뾰족한 대안을 가진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한지 혹은 적절한지조차도 의심하는 수준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주변의 현장성을 담보로 한 글을 쓰고싶다는 생각은 늘 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너절한 내용이나마 펼쳐놓아보고 싶었다. 그래야 20대의 또다른 누군가가 고민하고 또한 고민했던 이들은 보다 나은 접근과 토론과 대안을 제시하고 실제 현장도 변화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패거리주의적인 성향>

2000년 3월에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다. 물론 많이 달라진 캠퍼스와 학생들을 보면서 많이 신기해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캠퍼스 사역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는 어떤 모토가 공동체를 형성하게 만드는 원천이었지만 지금은 친밀함이 그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대자보'가 중요했고 그 대자보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가 중요했다. 지금은 선교단체도 대자보를 읽고 오는 이들보다는 인맥을 통해 교회 선후배들의 소개로 연결이 되는 수가 극히 많다. 대다수 이들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어떤 목적과 모토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으려는지에 민감하지 못하다. 그들의 중심은 항상 주변 관계성에 기인하며 그 공동체의 목적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유보되어질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신들이 수정해 갈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아가 이렇게 마련된 공동체를 통해 캠퍼스 안에서 집단우월주의적인 성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모더니즘을 경험하지 못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한 우리 시대의 한계이자 폐해라고 보는 편이다. 이는 진리성 여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후기현대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일하게 긴장점도 느낀다. 사실 이런 후기현대주의적 사상의 흐름은 특정한 식자(aUiº)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쉽게 전달이 되는데, 영화가 가장 중요한 매개물이 되고 있다. 진리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며 또한 그것은 힘의 논리에서 강자가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포장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는 이러한 관점은 <LA 컨피덴셜>이나 <pay back>과 같은 영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 시 캠퍼스 이야기로 돌아오면, 많은 학생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보다는 "누가" 혹은 "어떤 집단"이 그 이야기를 하는지에 크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PD수첩에서 대형교회 문제를 건드렸다는 보도를 들었을 때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보다는 MBC가 예전부터 교회 문제에 부정적이었다, 혹은 방송(PD수첩)이 너무 비난위주라는 식의 반응이 기독학생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온다. 광림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침례교에 대한 장로교쪽의 비판문제로 환원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뉴스엔조이에서 <전병욱 비판적 읽기>라는 책이 발간되었는데 그 책을 대하는 주변 기독학생들의 반응이 "뉴스엔조이가 뭐하는 놈들이야"는 식이었다. 텍스트는 사라지고 모든 문제는 단지 집단적 이권싸움 내지는 패거리나누기 식의 문제로 환원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아주 순결한 부류도 있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 흐려짐>

이 렇게 학생들이 모든 문제를 집단의 이권다툼식으로 보는 것은 물론 상황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때문이며 그것은 너무 여러 정보들 사이에서 가라지들을 가려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상 너무나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우리는 파뭍혀 있고 그런 많은 정보 중에서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무래도 광고의 효과가 뛰어난 것들이다. 물론 광고는 돈의 문제이고 이 가치중립적(?)인 돈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에게는 맘몬적 능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쉽게 정리하자면 캠퍼스의 대학생들에게 전달되는 많은 정보 중 결국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전달되어지는 정보는 끊임없이 광고를 해댈 수 있는 돈을 가진 집단으로부터 나오며, 그 집단은 대다수 성경적이지 않은 과정을 통해 힘을 갖게 된 집단임에 틀림없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리고 자본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깔끔한 포장으로 다가오는 정보들을 우리는 쉽게 '사실'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런 정보들은 텍스트가 충실하다기 보다는 피상적이며 문제를 단순히 흥미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상 대형교회의 목회세습문제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소수에게는 큰 희생이 따르고 있으며 이 문제는 캠퍼스에서 접하는 피상적인 것, 흥미위주의 것 이상이다. 당사자들에게는 삶을 담보로 한 운동임에도 그런 것들은 쉽게 잊혀지게 된다. 주변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매체들을 본다. 조선일보가 그렇고 스포츠투데이가 그렇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정치건 경제건, 종교건 모두가 썩었고 진흙탕이니 관심갖지 말자는 식의 홍보효과를 노리는 것 같다. 그래야 밤의 대통령도 유지되고 기득권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할테니...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깊이 있는 대화를 꺼려하는 것 같다. 토론 부재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나는 '썰렁하다'는 말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의 토론문화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얼굴을 진지하게 고쳐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일 것라고 생각한다. '썰렁하다"는 말이 유행하기 이전에는 모든 대화는 텍스트 위주였다. 비록 재미없는 이야기라 할 지라도 그 말을 끊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못했던 탓에 나를 비롯한 많은 90년대 중반 학번들은 지루하기 짝이없는 선배들의 세상 이야기와 신앙 이야기를 인내와 연단(?)의 마음으로 듣곤 했다. (물론 그런 탓에 나는 관심도 없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내 신앙의 색깔도 많이 넓어지는 풍요함을 경험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 안에 퍼져든 이 '썰렁함'이란 단어는 우리의 대화체계를 순식간에 바꿔 버렸다. 케이블 TV의 수많은 채널들이 조금이라도 식상하거나 정적인 화면을 못참게 만들었다면, 이 썰렁하다는 말은 모든 대화 안에서의 텍스트를 '재미'가 있냐 없냐의 문제로 바꿔 놓았고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면 쉽게 말을 끊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썰렁하다는 단어가 그런 상황을 가져왔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얘기가 재미가 없어서 썰렁하다는 딱지를 받게 될까 두려워 해야하며 그렇게 각인된 사람은 대화에 주격으로 참여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점점 짧고 코믹하거나 심지어 엽기적이어야 수용된다.

물론 토론의 장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캠퍼스는 비교적 많은 세미나와 좌담회 등이 이뤄지고 있고, 미미하게나마 기독학생들 속에서도 사회참여적인 움직임들이 진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들을 본다. 하지만 그들은 엄연한 소수다.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는 소수인 셈이다. 또한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있어 그것은 골수분자, 혹은 흔히들 하는 말로 '매니아'나 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또한 거시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 개인의 기호로 치부되며 파편적 선택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악순환이다.


<청년 사역자들의 책임>

이 즈음에 와서는 선교단체 사역자들의 책임 문제가 나와야만 한다. 모순처럼 들릴 지는 모르지만 내 주변에서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고 흐름을 읽어낼 줄 아는 기독학생들은 기존의 선교단체의 제자도로 키워진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혼자 습득하고 고민한 부류의 학생들이 더 많은 관심과 움직임들을 보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것은 두 가지의 문제를 말해준다. 먼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선교단체의 제자훈련이 철저히 '상황'을 배제한 채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캠퍼스 내에서 선교단체는 마치 지하조직과 같다. 모두가 강의실 구석에 숨어서 모임을 가지며 이 집단들은 대개 학내 문제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통일 문제, 노근리 사건, 고엽제, 신자유주의, 노동 문제, 장애학우들의 복지문제 등 부지런한 운동권 학생들이 끊임없이 화두를 던져대며 아우성을 쳐도, 기독학생들은 스스로 참된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배우며 그것들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대다수의 학생들처럼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캠퍼스에, 그리고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너무 익숙한 모습이다. 그런 학내 문제가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며 정말 '익숙한' 우리의 모습이다.

물론, 이들이 캠퍼스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도 가끔 있다. '예수대행진'이라 불리는 이 행사는 "세상이 알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이 "행진"을 통해 기독학생들 내부는 더욱 견고하게 뭉쳐지며 구성원들 간에는 일방적 승리감을 얻게 되는 반면, 일반 학우들에게는 그들과의 괴리감을 증가시키고 캠퍼스 내에서는 기독학생들을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 집단으로 규정짓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진단이 나만의 과장된 생각인가.

두 번째는 시간의 문제이다. 까놓고 얘기해서 선교단체에 있는 리더급 학생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어 보인다. 학사의 삶을 살고 있는 동역자의 입을 빌리자면 어느 단체든 그 공동체는 구조적으로 그 구성원들을 그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이용하게 된다는 말을 했다. 조직에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고 더 견고한 공동체성의 확립을 위해 구성원들은 소진되는 수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비단 기업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선교단체에서도 보여지는 일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학생들의 경우 그 충성과 헌신은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전적인 헌신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전적'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대상으로 생각하는 수가 많다. 기연활동을 예로 들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학생 연합은 각 선교단체의 '리더 빼가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대표자 모임에서 '고통 분담'이라는 말을 쓰기까지 하니 더 할 말은 없는 셈이다. 캠퍼스는 고사하고 선교단체조차 조망할 수 없이 자신의 단체에서 소진되고 있는 리더들이 어떻게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다시 여기에서 선교단체들의 구조조정(?) 문제를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이 얘긴 99년에 TNT사이버 방담 때에도 나누었던 부분이다.)

솔직히 나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알지 못한다. 구조는 너무 견고하고 우리네 학생들은 너무나 세상에 대해 보수적이며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피상적이다. 변화 자체를 싫어하는 성향도 느낀다. 더 깊이 고민하고 더 많이 기도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더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내내 글 모양새가 너무 조잡하고 진단이 나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비판할 거리들도 많을 것이고, 또한 나와는 다른 캠퍼스의 상황을 이야기해 줄 동역자들도 있을 줄로 안다. 나의 부족한 글이 그런 많은 숨겨진 기독학생들을 자극하고 목소리를 높이게 할 수 있었다면 일단 그것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침묵하지 말고 이 불씨를 살려 주었으면 한다. 냉정한 비판이나 논리적인 반론도 좋다. 그리고 그럴듯한 대안이나 이미 과정 중에 있는 좋은 운동의 본이 소개된다면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복상의 20대들도 기나긴 겨울잠에서 이제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2001/04/01 22:59 2001/04/01 2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