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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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두 교황>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다가 교황 베네딕토16세가 교황직을 내려놓겠다는 내심을 알게되자 프란체스코가 이런 저런 이유로 불가함을 항변하던 도중 베네딕토 교황이 소리친다. "사일런스!" 넷플릭스 자막에는 "조용히 하시오!"라고 번역되었지만 정확히 표현하자면 "신이 내게 침묵하고 있소!"가 될 것이다. 더이상 신이 기독교의 수장, 교황인 자신에게 아무런 뜻도 보이지 않는 상태임을 라이벌인 동료에게 고백한 것이다.

엔도 슈사쿠의 책 <침묵>은 한층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17세기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된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들은 그곳에서 많은 고초를 겪는다. 일본의 권력자들은 예수의 성화를 밟게 만들고는 밟지 않으면 고문을 가했다. 성도들이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던 페라이라 신부는 결국 배교자가 되었고, 그를 찾아온 로드리게즈 신부도 내적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배교의 길을 걷는다. 성도들이 고통을 받는 중에도 기독교의 신은 침묵했다. 이 소설에서 엔도 슈사쿠는 신의 침묵과 인간의 신앙을 '내재화'라는 관점에서 상징성을 부여했고 신의 침묵이 침묵이 아니듯, 인간의 배교가 배교가 아님을 은연 중에 드러냈다.

2.
유대인들은 성전이 허물어지고 난 후에도 몇 차례의 재건을 꿈꿨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나님의 처소는 회복되지 못했고, 20세기 홀로코스트를 통해 자신들의 신이 침묵하고 있음을 더 정확하게 이해했다. 가톨릭 또한 로마 황제에 의해 종교 자체가 제국의 국교가 된 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번창했지만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많은 오명도 함께 얻었다. 당시에도 하나님은 십자군의 편에 서지도 십자군을 벌한 존재로 서지도 않는, '침묵하는 존재'였다.

구약의 하나님은 그 백성들과 함께 했고, 즉각적으로 분노를 표하고 심판을 일삼고 자신의 의중을 항상 그 언약을 맺은 백성에게 전달하는 구체적인 신이었다. 그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응답하였고, 원한다면 자신의 뒷모습마저 보여주셨다.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고 그 백성은 흩어졌지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었고 그가 떠나면서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였고 그 언약은 성취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도 회심과 함께 그의 영을 받고 신의 뜻을 알고 신의 뜻대로 행할 능력을 얻었다.

3.
하지만, 성령의 시대가 열린 이후로 기독교는 정확한 신의 뜻을 알 수 없는 역사적 흐름 속에 놓여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주후(After Christ) 시대'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로마권력의 종교가 되는 것도 가능했고, 신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개신교는 병존이 가능했다. 루터와 칼벵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정작 칼벵의 제네바에서는 괴상한 신권 정치가 행해졌고, 그것이 제압되거나 정죄되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유럽은 신구교간에 수백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같은 신의 이름으로 다투고 죽어갔지만, 정작 하나님은 침묵했다.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못해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다는 교회의 입장이 강하게 드러났지만, 정작 밀레니엄을 넘기자 선교가 기독교의 중차대한 임무라던 입장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거나 명상, 일상사역, 카르페디엠 같은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마치 처음부터 기독교는 (내세지향적이라기 보단) 그런 세속적 입장이었다는 듯 아무런 이슈나 논쟁거리가 없다는 듯 성경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3-1.
한때 은사주의 운동이 교회를 휩쓸기도 했다. '능력대결'이라는 용어도 성행했다. 이는 종종 원시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지만, 문명화된 대도시의 교회에서도 가능한 형태라고 굳게 믿었고 그런 뉴스들이 종종 교계 안팎에 떠돌곤 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성령세례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내주하는 성령님의 형태와 별개로 '기름부음'의 경험을 구분하여 사용했고 청교도의 후예를 자처하는 계열의 목회자들은 종종 그런 상태를 은유적으로 때론 물리적으로도 표현하기도 했지만, 정작 교회를 한 방향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분석하는 교회의 입장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메타담론으로서의 구속사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교회 자신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평하면서 기독교의 그런 처지를 드러낸 셈이다. 구약처럼 명약관화한 방식으로 신이 그 백성을 이끌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미시사적 의미 속에서 성도들은 각개격파 내지는 몇몇 종파와 조직으로 각자의 경험적 신앙으로 신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그것을 저지하거나 혹은 지지, 비평할 거대담론으로서의 메인스트림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밀레니엄을 20년 넘긴 현재는, 마치 기독교가 진보사회와 결을 같이 하는 것이 세련되고도 '정치적으로 옳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기독교는 예전의 야만성에서 많이 벗어났다. 이제 ‘성전’이나 ‘마녀사냥’은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고 근본주의 기독교는 쇠퇴하고 있으며 '원숭이 재판'이나 '틈새의 신' 논란은 구태의연한 사건이 되었다. 오히려 가톨릭은 프란체스코 신부 체제가 되면서 개신교보다 더 인기있는 종교로 변화하고 있는데 여성의 권리, 낙태, 동성애 등에 대한 입장의 재천명은 어찌보면 신의 침묵 속에서 부단히 옳은 길을 모색하는 교회(인간)의 노력이기도 하다.

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이, 성도들이 제각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떠들어대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행한대로 자신의 뜻을 명시적으로 밝히거나 특별한 간섭으로 정죄하지 않는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메타담론, 거대담론처럼 하나의 통일된 교회체를 일사분란하게 이끌지도 않는다. 내가 아는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비교적 명백하고도 명확한 교회사, 구속사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쳤지만. 오랜 역사를 돌아본 지금, 나는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과신했다고 믿고 있다.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베네딕토 교황에게만, 일본 선교사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이후를 사는 교회를 향해 자신의 얼굴을 가리셨다. 왜 그런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지금은 거울을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가 되면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다. 하지만 '지금'(not yet)은 그렇지 않다. 교회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며, 그분의 침묵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이 지금은 대놓고 참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부활절에, 코로나19라는 전지구적 재난이 임한 이 땅에서, 조용히 내 낡은 신앙을 주장하지 않고 그분의 침묵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2020/04/20 22:16 2020/04/2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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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큰 그림으로 읽기를 멈추자 소소한 변화가 생겼다. 성경의 각 본문들은 이른바 메타담론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 본문이 그 자체로 독해되지 않고 다른 본몬과의 통일성 안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닌 구약적 배경에서의 '그 단어'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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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각 성경의 서브텍스트들은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바라봐야 하고 메타담론으로서의 성경은 신적인 의미에서의 하나의 큰 그림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분히 보수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 나는 대체로 동의한다. 교리의 중요성, 거룩한 경전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 서로 충돌하지 않는 온전한 그림을 그리는 신학자들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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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구하는 실존적 성경읽기는 그런 의미에서 신학과 교리의 큰 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 작은 그림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와 같다. 적절한 비유가 있다면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를 성경의 큰 그림으로 본다면 내가 추구하는 성경읽기는 <본 레거시>로 치부할 수 있겠다. 제이슨 본과 국가 간의 음모를 다루는 큰 그림의 내러티브가 있다면, 그 큰 그림 안에서 메인스트림이 아닌 이들이 겪는 소소한 로컬 내러티브가 <본 레거시>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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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구속사가 예수와 주요 제자들, 그리고 구약의 특정 왕들과 예언자들의 담론, 그리고 굵직한 행위에 대한 추적이었다면 그 안에 속한 소시민적 백성, 시민, 선교여행을 떠나지 않은 제자들,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신자들의 관점에서 메타담론을 바라보는 셈이다. 그것은 그 큰 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좀더 상상력과 직관, 실용적, 실존적인 측면에서 성경을 독해하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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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들은 개별 인간사의 소소한 질문들에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연역적이면서도 우주적인 관점에서 개별 인간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접근한다. 악은 왜 존재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질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준의 거대담론을 들이민다. 자잘한 생각들, 교리를 침해하는 이야기들은 부차적으로 치부되거나 배제되고 원리와 원칙으로 한발 물러나거나, 그 이면에는 우리가 명시적으로 알 수 없는 신적인 의미가 있다는 모호함으로 변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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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적 모호함을 유지하면서 성경을 소시민적으로 읽고 텍스트 간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읽는 것. 성경의 영웅들, 주인공들이 아닌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제자들의 이웃, 형제, 부모, 혹은 그 이후 이천년이 지난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예수의 길과 내 삶의 연속성, 불연속성, 죽음의 의미, 하나님 나라... 이런 생각들이, 다분히 새롭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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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난 로컬 내러티브 안에서 성경을 읽는 중이다.
2016/11/04 20:28 2016/11/0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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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성경읽기라고 할 때 가장 큰 이슈는 내 삶의 목적성이다. 내 삶의 의미와 신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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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구원을 선포하고 재림을 약속한 후 초대 교회 시대를 지나 중세, 근대, 현대의 이시점까지 흘러왔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행위, 예수를 영접함, 영혼 구원, 타 종교와의 영적, 육체적 대결 자체에 집착했던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참여, 앙가주망, 인격적 사귐, 통전적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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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의 함수에 기인한 것 같기도 하다. 예수가 메시아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언은 '운동', '전략'으로서의 기독교에서 이천년을 지내면서 '삶의 양태'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고민으로 전환되었다. 타자(비기독인)로 하여금 믿음의 가부를 결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믿음의 본을, 믿음의 삶을 정착시키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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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타문화에 대한 긍정, 존중, 그리고 서구의 세속화에 따른 재복음화 필요성 대두 등 복음화라는 이슈는 개념이 넓어지고 그만큼 집중력은 약해졌다. '무식한 추동력'은 '사려깊은 주춤함'으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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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신앙인들은 타문화권 복음전도를 위한 선교사로서의 사명이 본인에게 있다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게 정말 시급했다면 교회 자체가 자기 몸불리기 신학을 고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는 자기가 속한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다움'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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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세상의 방식과는 구별된 자로 (하지만 세상 안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니고 사회에서 성취를 하고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거나 발전시키면서 살아간다. 자동차를 만들고 태블릿을 사고 인터넷을 이용하고 영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감동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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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예수의 초림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위치한 우리 세대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향유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이 상태를 지속시키는 신적 의미는 무엇일까. 분쟁, 전쟁, 정치적인 불의함, 차별, 사람들 사이의 소외, 마음이 닿지 않음... 이 부족함을 견디어야 하는 실존적인, 나아가 신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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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여기'를 강조할수록 불완전한 세상에서 이천년을, 그 이상을 살아야하는 당위에 관한 신학은 흔들린다. 이것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에 대치시킨다면 우리는 삶의 양태를 바꿔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온전함으로 신적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이 중간기가 담고있는 신적 의미에 대해 더 깊은 질문과 이해를 필요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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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후자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6/10/03 15:22 2016/10/0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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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통, 세상의 고통.
이것들이 인식될 때마다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들이 들 때가 있다. 예수가 구원을 이야기한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속사. 그 어딘가에 태어난 나, 우리.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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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선교사명, 선교명령은 새 밀레니엄이 오기 전에 땅끝, 즉 10/40창에 속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이 들어가야만 선교과업이 완성된다고 믿었고 그 연장선 상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미전도 종족이 사는 곳으로 파송되었다. 그 와중에도 선교명령에 부합하지 않는 곳에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선교라는 이름으로 타문화 속에 제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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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already but not yet'이란 구속의 표준 교리를 알고 있었지만 '이미' 보다는 '아직'에 방점을 찍은 천국을 바라보며 지금은 충분치 못한 현실에 대한 헌신, 절제를 미덕으로 삼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카르페디엠'이 우리의 신앙 모토 '지금 여기'로 둔갑했고 '이미'의 신앙이 더 중요한 미덕이라는 사실을 무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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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은 선교사명을 약화시킨다. 구조-방향 모델은 복음전도, 즉 선교의 당위성을 희석시킨다고 느꼈고 그것을 당대의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 진영과의 논쟁, 화해 속에 양날개 이론, 그 중에 복음전도의 우월성을, 다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을, 나아가 총체적 복음, 통전적 복음이라는 개념으로 정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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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가 구별되지 않는다, 이른바 '전략', '운동'과 '삶'은 같은 얼굴을 가진다는 통찰에 기인한 반성이자 어느 정도의 혜안이었다. 하지만 통전적 복음이 '이미'쪽으로 옮겨온 순간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상사명이었던 선교의 동력은 금새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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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밀레니엄을 넘긴 시점에서 사명은 늦춰졌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애매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혹은 아예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기술은 진보하여 오지에서조차 인터넷망과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기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선진국에서 파송하기 전에 선진국으로 다국적의 비기독교인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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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이 고달픈 사람들은 고달픈 대로, 나 같이 죽음 이후의 삶? 그 다음 단계에 대한 묵상,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실존적 신앙의 고민이 늘어간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떠드는 근본주의적 교회 집단 외에는 이제 천국, 하나님 나라, 내세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는 기독교 특유의 목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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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이, 통전적 복음이 현대적 문화 풍조와 콜라보를 이뤄 '지금 여기'의 신학으로 자리잡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연속선 상에서 악이 소멸되는 형태로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재림의 임박을 알린 정경의 메시지와 달리 왜 이천년 동안 우리는 악이 소멸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이 땅에서 얼마나 더 버티고 있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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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버틴다는 표현을 다수의 인간이 쓸 수는 있는지도 모르겠다. 괄목할만한 진보와 기술발전, 수명의 연장, 덕질의 향연과 극단적 쾌락과 엑스터시를 즐기면서, 언젠가는 도래할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며 사는 건 아닌지. 갑자기 엄습한 죽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종교가 내세의 희망을 손짓할 때, 그 모든 종교에 기대는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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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이천년이라는 시간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 혹은 우리는 우리의 삶, 죽음에서 기독교 자체를 소외시킨 건 아닌지를 말이다. 말과 삶의 일치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듯 내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과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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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체험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은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하지만 그 이상을 믿는 것이다. 살면서 믿음에 대해 교조적, 논리적, 확신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살면서 교리에, 세상문화에, 기독 전문가 집단에 번번이 신앙의 권위를 내어주곤 했다. 그 권위 안에서 내 신앙의 논리와 체험을 통합하고 정립시키려고 애쓰곤 했다. 물론, 그 권위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모든 게 나 자신과 일정 부분은 소외된 채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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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거칠게 쓰자면, 내 생각은 이렇다.
2016/10/03 15:21 2016/10/0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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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나를 인식한 시기부터 기독교인이었다. 초기의 내 신앙, 즉 유년기, 청소년기에는 성경이 내겐 신비로운 책이었고 어려운 책이었고 무서운 책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내 신앙은 재편되었지만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시작되었고 - 그 때에는 나름 진지했던 - 타종교와 기독교의 비교, 기독교의 정합성 등에 빠져 지냈다.

이후로는 보수적인 교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권'으로 대변되는 신학적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다. 귀납적 성경연구 방법이 가장 성경을 연구하는데 흥미를 자극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 바닥의 교리와 주석에 대부분 의존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때 '렉시오 디비나'가 지적인 분석에 충실했던 복음주의권 내부에서도 크게 호응이 일어 나름대로는 성경을 보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고 나도 그 유행에 합류했었다.

대략 30년 이상을 성경을 읽어왔지만 최근에 나는 살면서 한번 정도는 이 모든 배경, 즉 내게 주어진 교리와 내 종교적 배경 안에서의 주석과 강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해석에서 벗어나 내 실존적 질문들과 씨름하는 성경 읽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런 성경 읽기가 어떤 방식이다 라고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냥 통칭하자면 허세 없는 성경 읽기,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적인, 실존적인, 내재성으로만 신적 의미를 찾는 성경 읽기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설명이 충분치는 않지만, 일단 그렇게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다.
2016/10/03 15:21 2016/10/0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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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의 다름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매번 겪어도 좀처럼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우울감이 찾아오는데 감정의 깊은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글을 쓸까 말까 고민했다. 글이란 게 덧없다는 생각...
요즘 더더욱 많이 하기에. 조금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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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뉴스앤조이에
이재철 목사 "세월호 유족들 우상시하면 안 돼"라는 기사가 떴다. 
읽었다.
내용은 목회자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에서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의 강의 및 질의응답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다.
질의 응답 중에 세월호 관련 내용이 있었고 그 워딩은 '적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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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김종희 전대표가 해당 강의의 동영상을 올렸다.
60분 질의응답 중 3분이 할애되었고 그 영상에서 이목사는
슬픔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이 없다고 전제한 뒤 문제의 워딩을 말했다.
물론 그 외에도 회자된 20대 이야기도 기사로 읽었다.
이에 대한 내 지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고 모두 내가 느끼기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반응들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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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목사와는 사적인 관계는 없다.
그저 20년 가까이 글과 책으로, 그의 주변에서 들은 풍문으로 
정리한 내 입장은, 소위 말해 존경하는 목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양화진을 둘러싼 갈등 관계의 이야기를 듣고 2주간 자료를 모아
이 목사를 옹호하는 기사를 뉴스앤조이에 쓴 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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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100주년기념교회의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이 목사의 평소의 생활습관, 타인을 대하는 모습, 
얼마전 암에 걸렸을 때의 행동, 자녀가 결혼했을 때의 이야기
그런 변변찮은 이야기들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보다 더 뜨거운 이 '3분의 워딩'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페북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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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지인인 뉴조의 편집장은 페북에
언론의 역할이 깔놈은 까고 칭찬할 놈은 칭찬하는 것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글에도 당연히 호불호가 갈렸고, 
나는 특유의 어정쩡한 태도로 그 스탠스가 나와는 맞지 않으나 
언제나 '그'는 지지할 거라고 댓글을 남겼다.
입장이 다르더라도 친분이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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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이 다르다'...
나는 매사에 깔놈을 까고 칭찬할 놈을 칭찬하는 언론이... '싫다'.
한때 나는 진중권을 싫어했는데,
그가 한겨레를 깔 때와 조선일보를 깔 때의 수준이 같아서였다.
알파고가 연일 핫이슈다. 인공지능, 지능형OO라고 말하는
기계, 프로그램도 이제 산수나 논리만으로 다음 단계의 출력을 내지 않는다.
'기계적으로'라는 말이 냉정함, 정없음, 어쿠스틱의 배제를 의미했다면
나는 최근 점점더 '기계적'인 인간들을 대면하는 기회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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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란으로 올라온 댓글 중 반복적으로 접한 글 중,
'이 목사도 이제 맛이 갔다', '은퇴나 하시라'는 류의 글을 읽었다.
물론 페북이나 인터넷 기사의 댓글은 비슷한 성향을 갖는다.
실언을 하면 그 사람은 금새 쓰레기가 되고 퇴출 대상이 된다. 
물론 간간이 좋은 기사엔 멋지다, 짱짱맨 등, 과한 찬사도 보인다
이것이 대체로 항상 분노가 쌓여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터넷 정서다.
솔직히, 백보 양보해서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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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페북에서 교회 테두리 안의 지인들이, 
얼굴을 맞대기도 했고 함께 깔깔거리며 농담을 주고받고, 
맛집 음식을 함께 먹거나 사진을 나누며 병맛돋는 글과 말들을 하던 
지인들, 그리고 눈팅으로 알던 그들의 친구들이.
마치 모두 레알 친구인 것 같던 이들이 이재철 목사에 대해
해대는 말과 글들의 수위가... 솔직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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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모든 매체의 후원을 끊었다.
생각의 차이겠지만 나는 학생들, 아이들 후원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기독교 관련 후원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하지만 두 매체, 뉴스타파와 뉴스앤조이는 여전히 후원한다. 
물론 금액은 적다. 그냥 상징적인 의미다. 
'뉴스앤조이는 후원할만한 매체다'라는 상징적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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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뉴스앤조이를 후원할 매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 판단의 9할 이상은 그동안,
깔놈을 사정없이 까지 않고, 빨아줄 놈을 무턱대고 빨아주지 않은
김종희 대표의 데스크 판단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선택은 공평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았지만,
매번 자신의 진정성있는 해명이 있었고, 분노가운데에도 정이 느껴졌다.
정통 기독 비판 매체지만 뉴스앤조이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나는 안철수가 정치에 입문한 후
4년을 지켜보기로 했고, 꽤많은 실망 속에 그를 욕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치판에 첫 발을 들여놓게 만든 게 국민들이므로 국민이 책임져야 한다...
나라도 그렇게 살자, 뭐 이런 나이브한 생각. (솔직히 아직도 한다.)
뉴스앤조이의 새 술과 새 부대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기독 매체를 나는 언젠가 버릴 것이다.
매체를 만드는 사람은 사랑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
서두에도 밝혔듯 이 글은 고민 끝에 쓴 글이다. 
그리고 이 글은 김종희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쓴 글이다.
2016/03/12 20:35 2016/03/1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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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edm 찬양 관련 ivf 사과문은 적절했다고 본다.
해당 논란에 대해서는 열린 토론을 유도하되 절차상의
미흡함과 편견 섞인 기성 교회의 우려에 대한 사과,
무엇보다 행사를 준비한 이를 위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
어느덧 시간이 훌러 비판의 날을 세우던 대학생 신분에서 
중년 어디 즈음으로 정체성이 변해가는 나를 본다.
솔직히 내게는 그닥 본이 될 만한 교회의 어른을 찾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방황했다. 내가 본이 되겠다고 설쳐보기도 했다.
.
대부분의 꼰대들은 그저 보수적이거나 침묵을 지켰다.
그 와중에 몇몇은 공감대 없이 설치다가 조용히 사라져갔다.
.
내 세대의 신앙의 선배들이 할 일은 
(한때 우리가 그랬듯이)
비판의식 충만한 신앙을 가진 청년들에게
계속 그 길을 탐구하고 달려갈 수 있는 공적인 장을
지켜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대의 기성세대가 '다름'을 '옳지않음'이라고 쉽게 정죄할 때
미안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자고 
이해를 구하고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
설령 앙쪽이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중재라 하더라도
논쟁이 부정적으로 과열될 때 적극적으로 
모두가 고려된 해명을 통해 담론의 장을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역할은 그런 지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신속한 개입을 통한 중재는 하되 학생 자발성에는
간섭하지 않고 기독문화의 지향점을 지켜보는 태도가 적절하다고 봤다.
.
물론 이건 나의 결핍에서 오는 긍정적 평가임에 분명하다.
내가 겪은 신앙의 어른들은 청년들의 도발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급이 맞지 않는다며 우회적인 훈계를 일삼고 
논란이 증폭되면 설명없이 활동과 조직을 아예 없애는 방식으로
대처해왔다. 그런 생태계에서는 냉소와 몰이해만을 키워갈 뿐이었다.
.
난 edm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밥 만세-_-)
하지만 다른 장르와 동일하게 edm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ccm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궁서체로 쓰긴 싫었는데...어쩌다 여기까지 왔다.
그대들의 시대가 곧 올 것이다. 그때까지 이쁘게 봐 주시라.
뿌.잉.뿌.잉.
2015/07/19 20:45 2015/07/19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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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릴레이에 관한 짧은 생각.

이 릴레이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막연하게나마 아이스버킷 릴레이와 유사하게 3명을 지명하는 트렌드를 따르는 것 같고, 나도 최근 페친들을 통해 이 릴레이를 간간이 접하고 있다. 주변을 보면 릴레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분들도 있고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는 분들, 자신의 생각대로 다소 변형하여 동참하는 분들, 이 정도로 나뉘는 듯 하다.

내 생각을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감사를 공적 릴레이로 끌고 가는 것에 대해 우려감을 갖고 있다.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흔히 주변에서 가끔씩 자신 혹은 주변에서 일어난 성공이나 다행스러운 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분들을 본다. 당연하다. 우리는 범사에 창조주에게 감사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오늘 먹은 맛있었던 식사나 만났던 친구와의 행복했던 대화, 자녀의 건강, 나아가 명문대를 입학하거나 큰 돈을 벌거나 치명적인 질병에서 낫거나 가족에게 경사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그것이 성도에게 혹은 대중에게 드러내 놓고 하나님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릴만한 일인지 따져볼 필요도 있는 부분이다. 누군가의 자녀는 명문대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다면 명문대에 낙방한 부모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열차 사고나 공공장소에서의 위협에서 누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만 누군가는 그냥 목숨을 잃기도 한다. 누군가의 가족은 병에서 회복되지만 누군가의 가족은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실제로 4월 이후로 우리의 주변은 세월호 참사의 자장에서 직간접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나또한 유감스럽게도 이 상황 가운데서 도저히 감사를 표할 수 없다.) 

이렇듯 어떤 성공이나 특정한 구원이 신자들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현실 앞에 우리는 특별히 우리에게 임한 특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면 누군가는 배제됨의 저주를 하나님께 돌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렇게 되면 고전적인 욥의 문제, 나의 고통과 나의 실패는 모두 나의 죄성에 기인하는 것인가. '나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타 성도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은 왜 나에게는 임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된다. (혹은 욥과 같이, 합당한 탄식과 저주가 상황과는 무관하게 범사 감사하지 않음에 대한 불신앙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사실상 예수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러 왔기에 기독교는, 불평등한 상황 가운데 특혜받는 성도를 표지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은 모든 사람을 예수의 구원 안에 두고자 하는 종교다. 이렇듯 불행히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많은 사례들은 '범사 감사'의 특수 사례를 넘어 기독교의 본질을 뒤흔든다. 또한 실제로 그 영광에 가려진 성도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물론,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므로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허나 동일하게 인간은 주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타인을 더 좌절하게 만드는 감정 표현을 절제할 필요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감사는 내밀한 침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고 느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4/09/13 21:22 2014/09/1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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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정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사라는 집단에게 창조진화나 동성애, 나아가 사회구조나 우리나라의 역사, 기술의 폐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물어보거나 답을 들으려 애쓰지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가끔 교수가 신문에 칼럼을 쓸 때도 느끼는데 특정 분야의 좁은 전문지식을 가진 교수가 역사나 정치 이슈, 사회 전반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느끼는 당혹감, 주관적인 논지, 감정적 스타일이 존재하는데 목사들에게는 이 모든 것에 더해서 '하나님의 뜻'까지 버무려서 말할 특권을 주는 건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

사실 나는 초중고 시절에 배운 세계사와 국사 외에 몇백권에 달하는 역사책과 특정 학자들의 역사관과 그들의 입장에 대해 검토하고 나서야 지금의 내 스탠스를 정했고 ...그 안에서 내 신앙과의 연관성을 찾고 있다. 사실 그 스탠스 마저도 나는 확정적이지는 않은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과거와 달리 권력이 다양화, 음성화, 고도화된 사회에서 특정 사안과 특정 분야에서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나아가 대안을 내세울 때 물리적으로 많은 분석과 정교한 논리,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고민이 요구된다. 부끄럽게도 학문적으로 충실하지 않은 비전문적 종교인들이 '베지밀반, 분유반'을 적당히 섞어서 대충 그럴 듯하게 설교를 먹이려는 경향을 자주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여전히 목사들에게서 어떤 해답을 들으려고 턱을 괴고 앉아 있는 형국이다.

한때 한국사회는 목사로 대변되는 교계 지도자들이 사회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정교 분리를 투철하게 지키며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집중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안이 명확한 상황에서도 침묵하거나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이 만연했고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양립가능성을 타진해야 했다.

물론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서 공적신앙에 대한 담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허나 여기서도 잠재된 문제는 작금의 목사들로 대변되는 비전문 종교인들이 너도나도 나라를 걱정하며 해대는 아마추어 사회비평에 피로감이 몰려와 몸살이 날 지경이다.

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줍잖게 성경구절 몇개로 정치, 사회, 역사, 퀴어담론 등을 끼고 싶다면, 되도록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신앙적인 표현에 버무려서 자기 영향력 아래 있는 성도들을 구워삶을 생각을 버리고 신학공부 하듯 제대로 성실하게 논지를 전개할 필요(책임)이 있다.

최소한 두 세 마디를 말하더라도 그 전후 논리가 좀 매칭이 되는 수준은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정말 신앙과 논리의 비약, 그 널뛰기에 현기증이 날때가 많다. 약사와 의사가 다르듯 목사라는 존재에게도 너무 많은 '짐'을 지워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목사의 구원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그 짐을 걸거나 나눠질 필요가 있는 듯 하다...



첨언하며)
전문가 집단에게만 전문분야에 권위를 주어 담론을 말할 수 있게하는, 이른바 엘리트주의적 접근에는 당연히 반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문가집단을 옹호하는 토마스쿤보다는 아나키스트적인 파이어아벤트에 가까운 입장이다.

내가 목사의 비전문성을 비판하는 근저에는 비전문가의 입을 막고 싶다기보다는 비전문가에게 너무 많은 언로를 주고 그 입장에 과한 의미부여를 하는 행태에 방점을 찍고 싶은 마음이다. 비전문가가 더 냉철하고도 깊이있는 통찰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목사 특유의 아우라는 벗었으면 좋겠다는거다.
2014/07/02 23:05 2014/07/02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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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에 대한 대체적인 접근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언행불일치, 알고보니 나쁜 놈이었더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 류의 절망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살아가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종교심에 기대어 그저 사람을 (신뢰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불신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누군가에게 실망감, 배신의 불안감을 품고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원론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이 '입장'도, 나는 현실적으로는 인간 자체에 대한 환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본다. 계속 뒷통수를 맞으면서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자학적인 행위다.

 

사물의 '선악미추'의 잣대가 극명하면 입장 정리가 쉽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 참 좋아'라고 말하는 평가에는 다양한 함의가 숨어 있고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 전 인격적인 부분에서가 아니라 시간 궤적의 판단에서도 그렇다. '저 사람 쓰레기야'라고 말할 때는 어떤 시점의 어떤 행위에 의해 판단된 단일 행위, 혹은 특정 상황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갖게된 평가이기도 하다.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나는 한번 잘못한 사람, 혹은 여러번이라도 특정한 영역에서 잘못된 행위를 하는 이들에 대해 신뢰냐 불신뢰냐의 on/off(모 아니면 도)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잣대에 반대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대단히 복잡하고 또 섬세한 존재라서, 어떤 명확한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도 절망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그 선택을 후회하고 다시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악행을 할 수 있다. 그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행한 지독한 잘못들을 돌아본다면, 혹은 내가 성공하여 더 많은 권력과 힘이 있었다면 '할 수도 있었을' 잘못을 추측컨데 나는 누군가에겐 흔적도 없이 제거되었으면 좋았을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나또한 누군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길 소원했던 적이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비출 때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과 연마에 의해 신을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선물처럼 주어지는 신과의 사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이 성취가 아닌 '구원'이고 '은혜'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조차 어떤 악인에 대해 악행을 넘어 그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지구 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느낄 정도로 가혹하게 비난하는 것에 반대한다.

 

'사람을 신뢰하면 안 된다'는 말에는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부정적인 정서, 느낌이 덧입혀져 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매사를 '인지'하며 살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는 은근히 누군가가 날 이해해주고 기대하지 않게 날 배려해주고 도와주고 지지해주길 기대한다. 때로 드물게 그런 경험을 하면 배신의 고통 속에 몸부림 치던 기억들이 눈녹듯 상쇄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에 대한 절망감으로 가득찬 삶을 산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
 
레 미제라블의 감동은 '용서'의 힘이다. 잘못된 선택을 한 그 사람에게 한번 더 '신뢰'하기로 결정해주는 마음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경험이다. '넌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야'... 모든 악행에는 이유가 있고 악인은 그 악행이 습관으로, 나아가 전 인격으로 바뀐 히스토리가 있다. 그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개별 인간들은 타인을 신뢰/불신의 on/off 평가 대상으로 치환하고 상대와 연결된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내가 다치지 않도록, 내 마인드콘트롤을 할 방법을 찾는다. 덮어놓고 사랑해주거나, 언젠가 너도 날 배신하겠지 라고. 어쨌건 그 판단 주체는 '너와 나'가 아닌 '오직 나'에 국한된다.
 
외롭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옆에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적어도 내게 필요한 종교심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서도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의 마음을 잃지 않고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2/28 22:56 2013/02/28 2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