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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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다수의 남성들은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좀더 깊이있게 말한다면 다수의 남성들은 이 영화가 함의하는 변화의 조짐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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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레알 여성이 아니므로 페미니즘을 관찰자의 눈으로 읽는다. 지적인 영역에서 분석하고 그 패러다임에 놀라움을 표하고 그저 변화의 코드들을 주워다 읽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나는 사이비로서는 꽤 성실한 관찰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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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를 봤다. (이제부턴 스포일러 모드)
일단 놀란 것은 그간 어떤 의미에서건 '아름다움을 연기'하던 손예진이란 배우의 정형화된 연기 패턴이 깨졌다는 사실이었다. 손예진의 연기를 보면서 이 영화의 감독은 절대 남성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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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와 딸의 행방불명. 
이 두 사건을 풀어가는 영화의 내러티브의 시작은 다분히 남성적이다. 아내의 내조 속에 권력의 치밀한 조작과 거래들이 남발하고 딸의 행방불명은 객관적 단서를 찾는 경찰과 선거라는 큰 그림 속에서 상대진영의 행동을 의심하는 거대한 비밀, 음모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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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주검이 되어 돌아온다. 
아내는 갑자기 실성한 듯 이상한 이름과 이상한 전화번호로 경찰을 헷갈리게 만들고 선거 중인 남편의 캠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무례하게 군다. 
역시 냉정함을 잃지 않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남자들의 사회가 이 문제를 정리할 것이다. (해결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사건 '정리'는 할 것이다) 그러니 딸이 걱정은 되겠지만 아줌마는 그저 기다리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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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이상한 행동들은 이내 실타래에 구슬을 꿰듯, 어려운 퍼즐이 그 윤곽을 드러내듯, 사건을 재해석해내고 연관성을 찾아간다. 다음단계와 그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추리과정은 남자들의 세계, 그 투박한 상황 판단과 정리로는 담을 수 없는 미세한 끈을 따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이의 노트, 노랫말, 인터넷 메일, 친한 친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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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들은 세상에 무례한 모습이 되었지만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을 하고 관계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고 자신의 위선과 싸운다.
엄마는 그간 자신이 생각하던 아이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아이에 대한 신뢰 사이에서의 자신의 편견과 감정을 끊임없이 걷어낸다. 다른 (남자) 사람들은 그 아이의 행실, 의도, 그간의 일탈 횟수를 통해 객관적, 통계적인 추론에 이르고 섣불리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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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흘러흘러 비밀에 다다른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남편의 불륜이라는 '비밀'의 허망함에 있었다. 거대한 정치판에서의 암투와 그 사이에 발생한 아이의 죽음, 그것을 둘러싼 상대진영에 대한 의심, 그 와중에도 아이의 실종과 죽음을 놓고 펼쳐지는 언론플레이. 판세의 역전...그런 거대한 이야기, 남자들의 거친 암투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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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남자들의 가벼움, 남자 세계의 시시함이랄까. 
아이가 죽어도 영영 찾아내지 못하는 '냉철하고', '논리적인' 남자들, 그나마 착하고 멀쩡해보이는 이 남자가 결국 자기 불륜 따위를 막겠다가 사람을 사서 자기 딸을 죽인 결말이 드러난다.
그 과정을 광기어린 침착함으로, 혹은 과열된 집요함으로 엄마이자 아내는 묵묵히 사건을 해석하고 풀어내고, 마지막으로 심판한다. 그것도 남자들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피끓는 복수가 아닌 합리적인 댓가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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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페미니즘 '관찰자'로서 본 이 영화의 뛰어남이다. 나는 그렇게 봤다.
2016/07/16 11:42 2016/07/1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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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오빠 비와이에 대한 교회 진보 아재들의 우려가 많다.
가사에 비춰진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걱정스러운 듯
도리어 교회오빠 비와이가 추구하는 힙합의 세속화를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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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생각 자체가 좀 낡았다는 느낌...
그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기독교적 요소를
차용했을 때 그 메시지를 형식에서 구별하려는 욕망이 
여전히 교회 아재들에게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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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CCM은 세속 음악에 기독교적 메시지를 얹어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구현해왔다. 
그런 경험으로 음악을 이해하는 교회 아재들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음을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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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이의 랩 퍼포먼스에서 메시지를 세속화시키면
퍼포먼스 자체의 아우라가 사라진다. 
이른바, 미디어가 메시지인 셈이다.
낡은 틀로 새 포도주를 담으려 하지 말라. 
우리가 가진 생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시대는 가고 있다.


#2.
비와이. 기독교세계관 랩을 개척한건가.^^
그냥 몇가지 생각이 들어서 끄적이자면.
비와이 나이에 나는 어떤 생각을 했나 돌아보면
그의 가사에서 오는 기독교적 오글거림은 받아들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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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나는 비와이를 지저스웨거로 부르면서
문화선교의 첨병으로서의 기대감을 비추는 교계 분위기에는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단순히 '기독교적인 컨텐츠'가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 
무리없이 자리잡는 부분에 있어서는 CCM을 넘어선 또다른
분위기가 감지되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는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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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힙합씬에서 기독교적 메시지를 통해
힙합씬 자체에 자기들이 말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겠다,
끼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방식은 단적으로 말해 
기독교 담론을 문화영역의 메타담론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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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으로 본다면 메타담론으로서의 기독교 컨텐츠는
결국 비기독교 컨텐츠를 대립, 정복, 변혁의 대상으로 본다.
그럴 경우, 
각각의 로컬담론으로서의 컨텐츠는 신의 반대영역으로 설정되고
결국 신의 창조물 자체에 대한 반대, 정죄가 이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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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비와이 만을 지지하는 자로
제한되고 그 하나님은 힙합씬과 대적하는 신으로 전락한다.
아마도 이 논리적 흐름이 지저스웨거 지지자들의 결말이 될 것이다.
2016/07/16 11:38 2016/07/1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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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빌워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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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원작<시빌워> 시리즈에 환호했던 우리는, 영화화된 <왓치맨>에 환호할 수 있었지만 이번 <캡틴아메리카: 시빌워>는 다소 불편할 법한 각색이 즐비했다.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즉각적으로 원작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드러낸 비판글을 썼으나 댓글들을 보니 마블 원작의 '세계관'에 그다지 관심 없는 지금 세대들에게는 평론으로 포장된 꼰대질, 평론가의 자격지심, '그냥 잘난 척'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의 평론을 그렇게 대하기엔 부족함이 있어서 그의 논의 중심으로 시빌워의 감상기를 풀어보련다. 그의 글은 아래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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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허지웅의 평대로 영화의 스케일에 대해서는 이제 마블 시리즈에서 굳이 폄하할 부분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게다가 얼마전 수퍼맨과 배트맨이 모여서도 이렇게 비주얼로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해서 그런지, 더더욱 그 흥망의 대조는 크게 느껴진다. 문제는 내러티브, 스토리라인인데, 원작에 열광한 나로서도 허지웅의 비판에 공감하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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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그의 말대로 세계관의 스케일이 줄어들었다. 스티브는 어벤저스 멤버들로 국한되지 않은 무수한 초인들의 신분과 자유를 보장하려는 '캡틴'으로서의 숭고함은 사라지고 새 친구 '토니'보다 옛 친구 '버키'를 편애하는 인간으로 전락했다. 시빌워(내전)는 구색만 갖춘 채 대충 싸우는 어벤저스의 내분이 되었고, 정작 진지했던 전쟁은 부모를 잃은 토니와 친구를 보호하려는 스티브의 사적 복수극으로 달려간다. 게다가 토니가 '소코비아 협정'에 동의하려는 동기는 아이언 수트를 안 입어야 페퍼포츠와의 관계가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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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워의 원작은 10년전에 만들어졌다. 이른바 '초인등록법'에 대한 찬반에 의해 갈라진 무수한 초인들의 입장 차이를 가지고 마블코믹스는 자기들이 수십년 전부터 보유해온 초인들을 어른들의 눈높이에 맞춘 정치사회적 내러티브로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DC가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와 <저스티스 리그>를 통해 재도약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면, 마블은 <어벤저스>와 <시빌워>의 내러티브를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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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를 관통하는 코믹스의 세계관은 '진영' 논리였다. 초인들을 한 곳에 모은 후 진영을 나누고 그 각각의 입장에 대한 내러티브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베이비붐 세대를 겪은 중년층들은 열광했다. 그들이 경험한 냉전시대에 대한 추억, 그 이후에 이뤄지는 세상의 진영논리를 기반으로, 어릴적 하나씩은 가지고 놀던 초인 영웅들이 화려하게 '재'등장하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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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각설하고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지금 세대, 그리고 마블이 나아갈 세대의 영화는 원작의 세계관과는 구별될 것이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캡틴 아메리카> 1편에서 3편을 관통하는 세계관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비판적 메타포로 대변된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의 착한 시민들은 왜 세계가 우리나라를 미워하는지 의아해했고, 이 재난에 대해 오히려 냉대받는 이유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 미국적 스탠스는 영화 속 '어벤저스'로 대변되는, 특히 애국심 돋는 '캡틴 아메리카'로 상정된 인물에 의해 극도로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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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경구 수준이 되어버린 '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른다(스파이더맨)'는 말은 이제 '큰 힘을 가진 자의 의무감을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둘 수 없다', '큰 힘에는 견제될 통제 영역이 필요하다'는 말로 대체되었다. 마블 영화 속 초인들은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할 수도 없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할 수 없고, 정보는 (더 높은 권한을 가진자에 의해) 공유되지 않는다. 나아가 거대담론(제국)은 미시담론(소수부족)을 무시하고 개별, 개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그 안에서도 몇십만 명을 살리기 위해 수십 명의 희생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혹은 그럴 수 없다는 입장 차이가 발생한다. 그 와중에도 많은 미시사적 개별 복수극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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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더 큰 힘은 또다른 도전을 낳는다'는 비전의 대사는 일면 타당하다. '개별적, 미시적 복수극을 감내해야 하는가', '큰 힘은 견제와 통제 아래 둬야 하는가' 사이에서 고민하고 분리의 조짐을 보이던 초인들 자신들이 급기야 복수극에 휘말린다. 초반과 중반, 후반에 반복되는 교통사고는 생체실험이라는 거대담론에서 내 부모의 죽음이라는 개별 미시사로, 돋보기의 한 점처럼 편광된다. 그 모인 한 점의 섬광이 종이를 태우듯, 두 초인은 자신의 미시사적 이해에 근거한 혈투로 치닻는다. 원작의 격돌이 매크로 스케일의 무게감으로 다가왔다면, 영화 속 격돌은 마이크로 스케일의 마음 속 사무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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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이것이 세계관의 스케일이 작아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내가 허지웅의 비평에 공감할 수 없었던 대목은 이 지점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이야기하듯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만약 이 영화의 주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마블이 기획한 세계관의 '영화적 변주'라면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이 세계관이 왜 세계가 '우리-초인-제국-미국'을 싫어하는가에 대한 자성과 고민을 담고 있다면 나는 매크로 스케일로 '진영 논리'를 불태운 원작에서 비껴나간 영화적 내러티브에 환호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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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세계 평화는 진영의 승리, 패배와 같은 조직 논리가 아니라 미시사의 복수극의 고리를 끊는 '블랙 펜서'의 선택으로부터 변화한다는 것이 이 세계관의 결론이라면 나는 더더욱 영화판에 공감한다. 레미제라블과 같은 고전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문제, 인류의 구원은 복수가 아닌 용서에 기인한다는 주제의식에 공감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블의 변형된 세계관은 '시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러러 보던 거대담론,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 세계 자체가 시시한 복수극의 현현일 따름이다. 결국 우리 중 누군가가 '발톱'을 접어야 세상의 복수가 멈출 것이라고 <시빌워>는 말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렇게도 잘 나가는 '제국'의 영화를 굳이 내가 또 지지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하다. (끝)
2016/05/05 23:56 2016/05/0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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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나는 내 주변 페친들과 정치성향이 일치한다. 하지만 분명 다른 지점이 있었지만 선거가 끝나기 전까지는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긴 호흡으로 풀어내야 하는 논지일텐데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는 다분히 오해와 감정의 낭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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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가 흥미롭게 읽은 책은 김욱 교수의 <아주 낯선 상식>과 강준만 교수의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이다. 국민의당에 대한 다수의 생각이 부정적이므로 진보진영 내에서조차 이야기를 풀어내기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책을 인용하기 위해 장문의 내용을 타이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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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국민의당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최소한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의 분열을 꽤하면서도 개혁적인 스탠스를 유지했던 유시민 전장관의 레토릭에 대해서도 동일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재인에 대한 내 개인적인 호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남'에 대해, '호남의 세속화'에 대해 비판할 수 없는, 나아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음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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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야기해도 누군가에겐 어차피 공감받지 못할 내용이라 판단하기에 서민 교수의 서평으로 내 생각을 대신한다. 아울러 김욱 교수의 책의 몇몇 부분을 길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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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낯선 상식>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챙겨간 건 경향신문에서 이 책에 대한 고종석 선생의 글을 봤기 때문이었다. 거의 ‘올해의 책’이라며 추천을 하셨던데, 정말 그럴 만했다. 유익한 책에 대한 내 기준 중 하나가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바꿔주는 책인데, 이 책은 호남정치에 대한 내 알량한 생각을 바꿔 놓았다! 
“(친노로 대변되는) 영남의 개혁세력이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적극적 청산의지도 없이 자신들이 앞장서야만 대권을 잡을 수 있”(187쪽)다며 호남에게 계속 표를 달라고 우기는 것이 현 상황이고, 그게 노무현 대통령의 분당 이후 벌써 십수년째 계속되고 있다면, 호남이 더 이상 ‘개혁성’을 기치로 한 투표를 하는 대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소위 ‘세속적 투표’를 하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이 주장이 이해가 안된다면 그건 내가 설명을 잘 못한 탓이다).
호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난 호남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고,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그들의 몰표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호남을 빼고는 한국정치를 논할 수 없다는 저자 김욱의 논리에 난 완전히 설득당했다. 이 책 덕분에 난 호남에서 문재인의 지지율이 왜 떨어졌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으며, 지난 재보선 때 새누리 이정현을 뽑은 그들의 선택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고종석 선생이 왜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도 수긍이 갔고 말이다. 
- 서민 교수(마태우스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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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문제는 호남 정치인을 호남과 분리시키는 ‘분리 이데올로기’가 노무현 이데올로기로 변주되어 새정치민주연합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이데올로기란, ‘허구적 지역주의’ 현실 속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대통령선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남에서 득표력이 있는 영남후보를 내세워 호남몰표로 뒷받침해야 하고, 그렇게 당선된 영남 대통령은 ‘민주성지 ’ 호남의 정신적 양해 속에서 세속적인 영남을 물질적으로 유혹해 지역주의를 구조적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은폐된 투항적 영남패권주의’에 입각한 위선적 정치공학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지배받는 사람이 바로 친노다. 예컨대 이런 노무현 이데올로기를 지고지선으로 알고 있는 이화여대 교수 조기숙은 “DJ시대로 돌아가자는 건 호남이 영원히 소수가 되는 지역주의 정당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라고 공공연히 호남을 겁박한다. 이런식의 겁박에 주녹든 호남은 기약없이 파괴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동일화’를 전략으로 삼는 새누리당의 영남패권주의 이데올로기와 ‘지역타파’를 내세운 노무현 이데올로기는 쌍생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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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역시 일당독재 상황이지만 박근혜는 대구 달성에서만 4선을 한 뒤 비례대표를 지내고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김영삼은 거제에서 첫 당선된 뒤 부산에서만 7선, 비례대표 1선을 하고 대통령 에 당선됐다. 현재 다음 대선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김무성 또한 부산에서만 무려 5 선을 했다. 반면 김대중의 경우눈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에서 첫 당선되고 목포에서 2선된 이후에는 비례대표만으로 3선을 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정동영의 경우는 전주에서 2선을 했는데 대통령 낙선 후 다시 고향출마를 한다는 이유로 이데올로기적 총공세를 당하기도 했다. 다선의원 고향 제거는 새누리당에서도 종종 있는일 이지만 호남의 그것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새누리당의 그것은 수뇌부의 영남패권주의를 위한 지역관리의 차원이지만 호남에서의 그것은 오히려 ‘분리 제거'라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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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는 대한민국의 욕망이었다. 물론 광주의 욕망도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광주학살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전두환과 그 일당에 무감각해진 채. 그들이 만든 정당을 지지하며 이제 대 한민국이 민주화됐다고 믿는 사람들과 광주는 화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원 없이 실현해가고 있을 때, 광주는 한마음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거두고 그들과 수십 년간을 정치적으로 척지며 살 수밖에 없었다. 광주는 그것이 아직 오지 않은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광주는 고립되었고, 욕망은 거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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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에게 몰표를 던져 대통령까지 만들었을 때도 자신들은 단순한 지역적 욕망이 아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분을 찾았다. 그래서 그 유명한 노무현의 발언 "호남 사람들이 니를 위해서 찍었나요. 이회창이 보기 싫어 이회창 안 찍으려고 니를 찍은 거지"라는 말은 그만큼 큰 상처가 됐다. 호남은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투표행위에서까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대신 어떤 의무감 속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히는 것이다... "‘전략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광주는 순정한 ‘몰빵’을 하고도 두려움과 슬픔에 온몸이 우는 서러움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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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흔들리고 있다. 욕망을 거세당한 채 ‘신성 광주’를 믿고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잃어버린 욕망을 찾아 ‘세속 광주’를 회복해야 하는는가? 예수나 부처가 아닌 인간들이 살아가는 도시인 광주는, 호남은 유사 이래 존재했던 다른 모든 세속 도시들처럼 욕망을 표출하며 살아갈 권리가 없는 것인가? 그렇게 똑같이 살면 다른 지역민들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지만 호남만은 죄를 짓는 것인가?
기억 속의 ‘신성 광주’에 대한 그런 찬양이야말로 ‘세속 광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호남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란 점도 자명하다. 물론 그 압박감을 이용하려는 정치세력에겐 ‘신성 광주’야말로 더 없이 훌륭한 세속적 욕망의 온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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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건 타의건 5 '18은 굉주가 욕망을 거세당한 근원이다. 나는 욕망을 거세당한 광주가 그 욕망을 다시 찾기를 바란다 “허기를 느끼며 음직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에 더 이상 치욕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광주가 욕망만으로 살기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욕망 없이 살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호남은 할만큼 했다. 죽은 사람들만큼은 아니라도 산사람들로서는 할 만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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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과정 속에서 발현된 것만을 따져도 그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연대-분열은 가장 유명하다. 3당합당 이후에도 계속된 김대중과 (3당합당을 거부한 1990년, 새정치국민회의를 거부한 1995년) 꼬마민주당의 연대 ·분열, 노무현의 집권 이후 벌어진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연대 분열, 그리고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노와 친노의 연대·분열, 이 현상은 결코 우연한 내분이 아니다. 이는 수십 년간의 뿌리 깊은 족보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정치사의 숙명적 연대·분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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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남 친노세력은 영남권 지지를 토대로 극우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는 새누리당을 거부한 정치인들이다. 반면 호남세력은 극우까지는 아니어도 성향상 상당히 보수적인 정치인들부터 개혁적인 정치인들까지를 모두 망라한다. 따라서 그 이미지가 영남 친노세력보다는 다소 보수적인 느낌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단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친노/비노의 분열을 무슨 진보/보수의 분열처럼 포장하는건 의도를 가진 대중적 이미지 조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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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하면 진다’는 겁박이 통하려면 최소한 ‘분열히지 않으면 이긴다’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승리를 통해 분열하지 않은 세속적 대가를 얻을 수 있아야만 한다. 위선 떨지 않고 밀한다면 호남이라는 지역단위로 투표했으므로 호남도(영남이 수십 년을 악착같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출신) 단위의 대가를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분열하면 진다’는 주장은 문자 그대로 한낱 부질없고 비겁하고 위선적인 겁박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면, 즉 ’분열하면 진다’는 주장이 ‘호남은 세속적 이익과 무관하게 지역단위 전체가 새누리당이라는 절대악에 맞서야 할 의무로만 새정치민주연합에 투표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그 주장은 호남의 욕망을 거세하는 부도덕한 정치적 선전구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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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선기간 때, 영남사람 노무현이 보기에 “호남-충청-강원지역 이 연대해서 영남지역을 포위하면 이길 수 있다는 지역 분열구도"(충청의 이인제 후보에 대한 호남의 권노갑 지원)는 “민주당의 자기정체성을 부정하는” 악이었다. 그리고 2007년엔 호남 정치인이 출마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한다고 강변한다. 그의 정동영에 대한 태도를 보면 심지어는 호남정치인이 출마해 동서대결 자체가 되는 것조차 싫어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대한민국 정치는 딩연히 (친)영남후보가 나설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과 역시 영남후보가 나서야만 하는 열린우리당의 양대산맥이 되어야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식 선진적 지역주의 해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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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은 김대중에게 어느 한때 잠시 몰표를 던진 것이 아니다. 호남은 그가 출마한 1987년 대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1997년 대선까지 3번의 대선과 3번의 총선에서 상상을 초월히는 몰표를 던졌다. 이 몰표에 대한민국은 기가 질렸다. 1980년 광주학살 이후 1997년 대선 승리 때까지 영남패권주의 대한민국에서 호남을 대변하는 김대중이 받은 정계은퇴 압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호남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히는가. 영남의 비새누리당세력, 개혁·진보세력, 여타 잡다한 모든 정치세력들이 호남을 대변하려는 정치적 욕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통합추진회의 노무현이 ‘양비론(3김청산론)'을 앞세워 김대중을 제거하는 전략을 포기하고 ‘김대중당’에 참여하는 굴복을 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한마디로 김대중을 제거하려는 세력에 대해 호님은 ‘우리는 김대중이 죽을 때까지 김대중을 몰표로 지지할 테니까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하든지 말든지 선택하라’고 요구한 셈이었다. 유사 이래 최초의 반영남 패권주의 정권교체는 그렇게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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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때마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행사지만, 정동영의 사례는 자못 상징적이다. 정동영은 1996년(15대)과 2000년(16대)에 전주 덕진구에서 재선된다. 그는 2004년(17대) 총선 때는 전주 지역구에 출마하지 못하고 비례대표 후보가 되지만 이른바 ‘노인펌훼’ 발언으로 사퇴한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정동영은 민주당 출범 뒤인 2008년에 전주가 아닌 서울 동작을에 출마할 수밖에 없었고, 낙선한다. 2009년 4월 재보궐선거 때는 전주에 출마하려 하지만 불출마 압박을 받는다. 그는 탈당해 전주 덕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지만 2010년 2월에서야 겨우 복당을 허락받는다. 그는 2012년(19대)에 역시 호남지역구에서 축출돼 강남을에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한마디로 그는 세계 정치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호남출신 중진의원은 호남지역에 출마하면 안 된다’는 반민주적 이데올로기의 흔하디 흔한 희생양 중 한명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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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민주당과의 법통을 끊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영남에 분명한 매시지를 보냈다. 열린우리당은 호남당이 아니니 지지해달라는 것이었다. 신기남은 "호남 소외론이 더 확산되고, 구주류가 신주류를 더 공격해야 한다. 호남쪽이 흔들흔들해야 영남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다'"고까지 노골적으로 발언했다. 그는 나중에 이 벌언에 대해 호남표 줄어들까봐 전전긍긍히는 분들도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런 분들에게 한 말이었다"고 명확히 설명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선대본부장을 맡은 그는 심지어 “민주당이 호남에서 지분을 가지길 개인적으로 바란다”면서 “그것이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에 맞다”고 주장하는 등 선거역사상 남의 당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는 초유의 선거본부장 역할까지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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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이데올로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열린우리당을 통한 지역문제 해결은 난관에 부딫힌 셈이었다. 열린우리당의 실패가 감지되자 열린우리당 정치인들은 현실적 대안을 내놓기 시작한다. 민주당과의 합당이었다. 부질없는 시도를 끝내고 합당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분열 을 막고 득표력을 키울 것이라는 극히 이해타산적 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2006년 5월 지방선거 당시 문재인은 민주당과의 합당을 절대 반대하는 노무현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한 바 있다... 노무현의 그 의지는 완전히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 흔적도 없이 좌초했다. 한데 아이러니한 것은 현재 문재인 등 친노세력은 어쨌든 그런 노무현의 신념을 이어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이어받기는커녕 호남에서 정당간 경쟁을 시도하려는 말만 나와도 그들은 기를 쓰고 분열이라고 외치거나 호남당을 만들 생각이냐며 매도한다... 난 이제 호남이 반드시 복수정당제를 쟁취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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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단언컨대 김대중(지지자)과 노무현(지지자)의 이념은 근원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즉 명 백히 ‘김대중 정신'과 '노무현 정신’은 같지 않다고 본다. 우선 김대중은 ‘ 영남패권주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반영남패권주의 지역연대인 DJP 연대를 통해 집권했다. 반면 노무현은 ‘영남패권주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실제론 실망스러웠지만) 영남의 표를 확장시켜 당선되기를 원했다. 당선 후 김대중은 자신의 약한 지역적 지지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민주당을 기반으로 영남에 많은 정치적 지분을 할애했다. 반면 노무현은 자신을 공천해 준 민주당의 법통을 끊고 열린우리당을 창딩해 영남의 지지를 받으려 했다. 김대중은 야당인 한나라당과 타협적이었을 망정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주는 차원의 대연정 같은 제안을 하지 않았다. 반면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역사적 정당성을 공인하고 정권을 내주는 차원의 대연정을 제안하며 한나라당과의 ‘양대산맥’을 지향했다. ‘햇볕정책’ 때문에 김대중은 노무현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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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욱 <아주 낯선 상식> 중에서
2016/04/16 14:43 2016/04/1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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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D 전공을 하면서 컴퓨터그래픽스 분야에서
처음 들은 이름은 존 라세터였다.
그는 당시 아이의 모션을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내용의 발표를 했고 그것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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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스토리가 개봉했을 때 그의 이름을 다시 접했다.
장편 애니메이션은 흥행했고,
픽사로 대변되는 특유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은
이전에 그가 하던 작업의 발전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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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흥미로웠던 건,
그가 뛰어난 애니메이션 프로그래밍의 대가이면서도
컴퓨터그래픽스를 활용한 장편 애니메이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스토리라인"을 꼽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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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픽사의 흔한 흥행사이지만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한 후
존 라세터는 디즈니-픽사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주토피아 또한 그가 제작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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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5 20:41 2016/04/0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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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성모성지
2016/03/27 20:43 2016/03/27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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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꼭 보고 싶었는데 조조시간이 안 맞아서 명동까지 올라와서 봤다.

덕분에 명동칼국수도 오랜만에 먹고.
예상대로 영화를 보다가 또 울었다. (왠지 울거 같았다...)
별로 슬픈 장면은 아니었는데 뭔가 내 마음을 건드리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변에서 평들이 하도 많아서 공통적인 부분은 뻬고 이야기한다면,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크게 다가오는 걸 느꼈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의 결단, 용기, 실천 같은 인물 중심의 행보에 관심이 갔다면 요즘은 '조직', '시스템'이 더 눈에 들어왔다.

보스톤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직자들의 아동성추행 사건을 다루는 방식.
거대 조직 내에 만연한 잘못을 해결하는 암묵적 시스템.
신임 편집장이 언급하기 전까지는 기성 시스템이 발견해내지 못한 이 사건.
기성 조직의 관성이 배제된 지시사항. 하지만 관성대로 진행된 업무방식이 만들어낸 엄청난 분량의 심층 취재.

조직은, 공동체는 어떻게 관성을 갖게 되는가, 관성을 깨게 되는가.
제대로 된 관성이 어떻게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제대로 되지 않은 관성은 어떻게 파행으로 치닫게 되는가.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주말 내내 영화 때문에 맴도는 생각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최근, 무슬림 관련 역사책을 파다가 십자군에 의해 멸망하는 비잔티움 제국 이야기에도 꽂혔다. 왜 이 사건이 나를 뭉클하게 만드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튼. 최근 마음 속이 유리 같다. 세게 치면 부서질 것 같은. 요즘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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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0 20:26 2016/03/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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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좋은 영화에 설명을 덧붙이는 게 참 별로라는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30년전에 본 영화의 시리즈가 부활했다는 사실 자체에 같은 세대의 키덜트들은 많이 감동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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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할 때 스타워즈 로고라거나 시작 스토리를 화면에 띄우는 부분에서부터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ㅠㅠ
많이 언급된 대로 스타워즈의 새 시리즈는 흑인과 여성의 '깨어난 포스'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이미 전작의 시대정신을 넘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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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영화는 전작 내러티브의 반복과 향수를 되살리면서 여전히 4-50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지금봐도 디자인이 훌륭한 밀레니엄 팔콘과 저항군 전투기, 그리고 늙었지만 여전히 젊은 시절의 아우라를 그대로 간직한 한 솔로, 레아 공주, 그리고 루크 스카이워커의 등장은 여전히 그들이 동시대에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통해 4-50대의 관객도 위로를 받는 한편, 그들이 이제 젊은 제다이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또다른 아쉬움과 슬픈 정서의 자극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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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가 디즈니를 통해 다시 부활하게 된 건 무엇보다 시대를 넘어서는 일종의 집단무의식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스타워즈의 주된 내러티브는 성장기 소년이 겪는 '아버지와의 갈등'이다.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루크 스카이워커가 그랬고 이제는 한 솔로와 벤 솔로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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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제거와 극복을 꿈꾸기도 하고 복종과 화해를 꿈꾸기도 한다. 이른바 '아버지의 이름'은 라깡의 정신분석에서도 중요한 테마이다.
또한 오비완과 아나킨, 벤과 루크의 사제 관계도 비슷한 갈등의 반복을 통해 내러티브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 모든 갈등에는 종교성으로 대변되는 선과 악의 대립과 조화, 그리고 우주 에너지의 신화화 요소인 '포스'가 그들을 추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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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특별히, 뭐랄까...
광선검에 매혹되었던 초등학교 꼬마가 불혹이 되어 같은 시리즈를 접하게 되는 기분은, 겪어봐야만 알 것 같다. 물론, 앞으로의 세대들은 더욱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되겠지만...
개인적으로도 참 기억에 남을 시리즈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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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한 솔로와 추바카의 등장씬도 어찌나 추억이 돋던지, 참 뭉클하게 하더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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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 22:01 2016/01/0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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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2권을 꼽아 보았습니다.
예전엔 평을 길게 썼는데, 
다... 의미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걍 땡기면 읽으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며. (제이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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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 비비안 마이어
: 그녀의 사진, 그 무게감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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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무의식의 방 - 김서영
: 15년에 김서영 교수를 알게된 건 큰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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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중섭 편지 - 이중섭
: 이중섭의 편지 사이사이에 그의 부성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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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격의 대학교 - 오찬호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이후 진격의 저자, 오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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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 다니엘 튜더
: 익숙하지만 미세하게 낯선 이방인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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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프로이트 패러다임- 맹정현
: 프로이트의 내러티브적 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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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복과 반전의 순간 - 강헌
: 무려 강헌 선생이 책을 쓰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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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기적 섹스 - 은하선 
: '그놈'의 섹스만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주옥같은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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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담론- 신영복
: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책'이 아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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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메시지 완역본 - 유진 피터슨
: 올해 손꼽는 신앙서적. 올해 성경 '대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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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쩌다 한국은 - 박성호
: 물뚝심송님의, 간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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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페이스북 심리학 - 수재나 플로레스
: 이건 페친을 위한 보너스. 중독증세가 있으면 가볍게 일독을.
2015/12/31 22:52 2015/12/3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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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읽기의 특이점은.
생각보다 엄청난 양의 책을 샀으나
끝까지 읽은 책은 생각보다 아주 적더라는 점.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책을 많이 안 읽었으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한번 잡은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은 건 내 평소의 
독서 습관에 비추어 보면 꽤 낯선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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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책에 대한 기대, 맹신, 집착 그런 게 없어졌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
단적으로 책에는 좋은 말들이 가득하고, 저자들은
정말 기똥찬 아이디어가 넘치고 지식의 깊이가 헤아릴 수 없으나
... 정작 레알 월드에서는 그닥 '쓸모'가 없더라는 편견이
해를 더해갈수록 나를 누르고 있다.
물론 그 '쓸모'라는 표현이 책읽기가 어떤 효용성이나 실용성을 
함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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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뭐야, 결국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변죽을 울리고 500페이지나 넘게 주절거린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서문에 혹하여 책을 읽다가 초반을 축지(독)법으로
넘기고 중반에 잠시 홀렸다가는 후반으로 가면서 흐지부지 책을
덮게 되는 경우가, 올해는 꽤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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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게을러진건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부터 독서의 매력이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건지.
정직하게 말하자면 책읽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드는 
낯선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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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올해의 책 10권 정도를 고르려고 구매한 책과 읽은 책을 
정리하다보니 추천할 10권을 고르는 게 너...무... 힘들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2-30권 내외의 책들을 놓고 혼자 선별하느라 
애를 먹으며, 그또한 즐거워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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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예전에 비해 글쓰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이랄까
환상, 아우라 같은 게 사라진 것 같다.
TED, 팟캐스트, 세바시, SNS, 허핑턴 찌라시 등, 수많은 독립 매체들을 통해
수많은 컨텐츠가 쏟아지면서 글쟁이 고유의 정보력, 분석력, '덕후'력이
더 이상 '수퍼히어로'들만 가진 능력으로 보이지 않게 됐다.
(솔직히 집에서 쓱싹쓱싹, 갑자기 뙇! 가구를 만들어내는 아내가 더 경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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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요즘은 그런 글이 더 눈에 들어온다.
대단치 않더라도 개인이 직접 경험한 독특한 이야기, 가감없는 실패담,
글보다는 사람 자체에 더 호감이 가는 글,
그것도 아니면 희귀한 자료들을 오랜시간 추적하여 잘 정리한 글들이 좋다.
무엇보다 글뒤로 숨지 않고 정직하게 가감없이 자기를 드러낸 저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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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년에는 책에 대한 애정이 더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책은 여전히 가까이 두고, 많이 사고 적절하게 읽을 것이다.
여전히 난 자신의 짧은 삶의 궤적과 경험이 전부인 양,
간접 경험과 삶의 다양성을 견지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해버리는 부류를
다분히 경계한다.
하지만 그녀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첫사랑의 기억이
점점 무의미해지는 것처럼 책에 대한 나의 맹신, 추종도 
그렇게 옅어지고 흐려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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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을 고르다가 문득 이런저런 잡생각을 끄적여본다..
2015/12/30 22:06 2015/12/30 2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