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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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 단말기는 태블릿 대비 불편한 점이 있지만 독서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묘한 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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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ppi를 탑재한 전자책 단말기의 반격

전자책 단말기가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올 가을은 전자책 단말기의 계절이 될 듯하다. 지난 9월 15일 한국이퍼브에서 '크레마 카르타'를 출시한 데 이어 리디북스가 오는 5일 '리디북스 페이퍼'를 출시한다. 

사실 전자잉크 단말기는 그간에도 건재했다. 전자책 시장의 공룡이라고 말할 법한 아마존에서는 태블릿과 함께 여전히 전자잉크에 기반을 둔 단말기인 킨들 페이퍼화이트를 3세대째 유지하고 있으며 이미 2014년 새로운 단말기 '킨들 보이지'를 선보인 바 있다. 국내 온라인 서점의 새로운 '도전'은 이런 아마존의 단말기 생존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올가을 국내에서 출시되는 전자책 단말기는 총 3종이다. 이 중 킨들에서 이미 적용한 6인치 '카르타 패널'을 적용해 300ppi의 해상도를 구현한 한국이퍼브의 '크레마 카르타'는 사양 측면에서는 킨들의 페이퍼화이트 3세대와 같은 급으로 볼 만하다. 

이달 5일에 출시되는 리디북스의 단말기 2종은 사양 이원화를 통해 저가사양은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고급사양은 킨들 보이지 수준의 해상도와 기능을 탑재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국내 구매자들은 태블릿에 익숙하기 때문에 CPU나 저장공간, 배터리 용량을 늘리는 등 나름 사양에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전자책 단말기, 태블릿 시장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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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전자책단말기 사양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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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전자책 단말기가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될까. 아직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이미 전자책 시장에 내놓은 많은 전자책 전용 단말기들이 시장에서 사라져 가고 있지 않은가. 사실 내가 전자책 단말기가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한 이유는 무엇보다 7인치 태블릿의 약진 때문이었다. 

킨들이 출시된 이래 전자책 단말기의 가장 큰 장점은 크기와 무게였다. 물론 전자잉크의 가독성을 손꼽는 이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200g 내외의 무게에 6인치 사이즈의 이 기기가 가져다 준 효용성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아마존이 초기 킨들을 홍보할 때 빠지지 않았던 요소는, 여성과 노약자들도 침대에 누워서 독서를 즐길 수 있다는 점과 여행지에서도 부담없이 두꺼운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 그보다 높은 해상도와 가벼운 무게, 그리고 10만~20만 원대의 저렴한 태블릿이 쏟아졌다. 아마존이 이윤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태블릿 시장에 뛰어들어 파이어 시리즈를 출시하게 된 이유도 아이패드 미니를 위시한 태블릿의 비약적인 발전과 가격 경쟁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자잉크의 한계도 한 몫 거들었다. 화보집과 잡지 등 다양한 색으로 구성된 책들은 전자책 단말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칼라 잡지도 높은 해상도에 동영상까지 첨부하여 재생할 수 있는 7인치 태블릿은 전자책 단말기를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제공했다. 

같은 가격에 같은 사이즈의 단말기를 구입해야 한다면, 그리고 한쪽(태블릿)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선택은 정해지지 않겠느냐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소소한 기능들의 조합으로 되살아난 '독서 덕후들의 기기'

하지만 시장에는 '공대생의 마인드'와 달리 특정 기기를 선호하는 충성도 높은 '덕후(마니아)' 소비자들이 존재한다. 전자책 단말기 시장도 그러하다. 기술이란 게 참 흥미롭게도 죽어가던 녀석에게 다른 모듈이 탑재되는 순간, 혹은 사이즈가 달라지거나 기대되는 용도가 달라지는 순간, 특정 기술은 부활한다. 

스티브 잡스가 보여준 혁명적인 사고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기술들을 조합'만' 해서도 유용한 IT생태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이팟과 인터넷 도구, 그리고 폰을 합쳐서 아이폰을 만들었고 사이즈를 키워서 아이패드를 만들어냈다. 엔지니어와 리뷰어들은 매번 그의 기술에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비난했지만 항상 애플의 새 제품들은 빅히트를 쳤다.

전자책 단말기의 불편한 점 중 손꼽히는 부분은 어두운 곳에서 패널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북라이트'라는 액세서리를 제공했지만 밤에는 라이트를 꽂거나 스탠드를 찾아야 하는 기기는 꽤나 불편했다. 가독성이 떨어지고 눈의 피로가 오더라도 밤에도 조명 걱정할 필요가 없는 태블릿이 더 유리하게 됐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아마존은 곧 킨들에 '프런트 라이트'를 탑재했다. 밤에도 스탠드나 북라이트 없이 책을 볼 수 있게 됐고 라이트 기능을 사용해도 그리 눈부시지 않은 내부 기능은 꽤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전자잉크에 이미 익숙한 이들에게는 기존의 불편함을 극복하는 소소한 기능의 탑재가 그 기기에 대한 충성도를 높여주기도 했다.

전자책 단말기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예상과 달리 비교적 낙관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조차도 다시 전자책 단말기를 구입했고 1년 넘게 사용했지만, 여전히 만족도는 높다. 

기기만 언급했지만 사실 전자책 단말기가 아닌 전자책이 시장에 잘 자리 잡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또하나의 이슈일 것이다. 전자책이, 그리고 책이, 나아가 책을 만드는 출판사들이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단말기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다소 우울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이 글은 이쯤에서 접는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47770
2015/10/07 21:10 2015/10/0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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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때의 일이다. IT 버블의 마지막 시기였던 당시의 트렌드에 맞게 연구실에서도 프로그래밍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나또한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몇 개의 컴퓨터 언어를 배웠고 연구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간단한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는 그야말로 IT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체감하던 때였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서부터 오픈소스 운동으로 대변되는 '리눅스 혁명' 같은 이른바 기술에 뒤따르는 많은 철학적 담론들이 우리를 뇌를 자극했다. 

인쇄술이 그랬고, 사진기가 그랬듯이 우리는 컴퓨터 안에서 'Copy & Paste'를 통한 무한 복제가 손가락 두 개만으로 무수히 생성되는 경험을 했다. 정품 소프트웨어와 100% 일치하는 카피본을 소유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에 열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나는 '기술을 곱씹는 마지막 세대'였다고 생각한다. 더 쉽게 말해 무언가를 접할 때 책으로 배우는 세대, 기기를 사면 '사용설명서'의 첫 페이지부터 읽어가는 '마지막 종족'인 셈이었다. 프로그래밍도 그랬다. 유명하기로 소문난 몇 백 페이지가 넘는 코딩책 몇 권을 사서 1장부터 읽었고 그래서 우리의 시작은 모두 화면에 'Hello World'를 띄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코딩으로 먹고 살겠다는 뜻을 접었다. 대학원 같은 연구실에 군대를 가지 않은 신입학생이 들어왔다. 내가 보기에 그는 어렸다. 나이도 아래였지만 매사에 진지하지 않은 말투, 선배들이나 교수님을 지나칠 때도 정중히 인사를 하거나 대화 중에도 어려워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반바지를 입고 다니고 틈만 나면 게임을 즐기는 이 어린 신입 때문에, 나는 코딩을 접었다.

그의 책상에는 두꺼운 코딩 책은커녕 아무것도 꽂혀있지 않았다. 그저 필요하면 인터넷 검색을 해서 알고리즘 몇 개를 얻어냈다. 알고리즘. 하나의 알고리즘은 내겐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혹은 철학자의 선언처럼 '의도'와 '내용'이 함께 읽혔다. 잘 짜여진 알고리즘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유명한 저자의 책을 읽는 행위와 같았다. 모든 코드의 내용을 이해하고 나서야 내가 만들려는 프로그램의 입력과 출력을 선언했다. 버그가 생기면 언제나 덧붙여진 내 코드를 의심했다. 

반면 그 신입은 -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 내 종교의식같은 코딩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카피한 알고리즘을 자신의 프로그램에다 순식간에 이리저리 붙여댔다. 그리고 독해가 되기 전에 디버그 프로그램을 돌렸다. 수십개의 버그가 뜨면 마치 게임을 하듯 버그를 잡아나갔다. 보통은 수십 분, 짧게는 단 2, 3분 안에 덧붙여진 알고리즘이 제대로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나는, 그 예술작품을 음미하고 조심스럽게 내 숟가락을 얹는데 하루 이상이 걸렸다. 물론 완벽하게 이해가 된 코딩에도 언제나 버그는 떴다. 그것을 수정하는 데에 시간을 쏟는 동안 신입은 이미 끝낸 프로그램을 덮고 게임에 시간을 쏟았다. 그때의 기분은 마치 모차르트를 만난 살리에르의 그것과 같았다.

기술을 곱씹는 '마지막 종족'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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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엑스 마키나>에 등장하는 로봇도 빅데이터 기반의 AI로 설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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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공지능에 관한 연구가 뜻하지 않은 영역에서 활발해졌다. 고전적인 AI 로봇들은 SF영화 속에서 '튜링 테스트'로 시험대에 오르곤 했다. 스스로 자각하고 행동(run)을 결정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 그에 대한 대중의 기대 혹은 불안감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동안 기술은 무심한 표정으로 꾸준히 발전했다. 

존재의 '인식'이라는 위로부터가 아닌 엄청난 기억을 빠른 시간에 처리하여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방식, 즉 '빅데이터' 기반 기술을 통해 인공지능은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 지금도 페이스북과 구글은 내가 관심있어 하는 사이트를 간간이 모니터에 띄워주고 내가 알 만한 친구들을 찾아준다. 아마존은 내게 말을 걸듯 '혹시 이걸 찾으셨나요'라며 사려고 찾아보던 제품 몇몇을 추천해 준다. 

아이폰 시리는 내 시덥지 않은 질문에도 마치 진짜 친구처럼 유머도 섞어가며 적절히 대답해준다. 사실 이 기술은 단말기 너머에 있는 거대한 컴퓨터가 데이터를 순식간에 처리하여 나에게 특화된 방식으로 피드백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그(것)와 교감하고 때론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 영혼없는 기기에게서 인간냄새마저 맡았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며칠 전, 문득 찍어내는 듯한 요즘 음악이 지겨워서 어릴 때 즐겨듣던 명반 음원을 구입했다. 여전히 '쏘울'이 살아있는 명반의 음악을 왜인지 내 귀가 뱉어냈다. 마지막 트랙까지 가지도 못했다. 일이십년 동안 비약적인 녹음 기술의 발전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여러 채널로 녹음을 하고 튜닝을 하고, 다시 소프트웨어로 후처리를 통해 최적의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최근 음악에 익숙해져버린 탓인지 '쏘울'만 살아있는 명반은 추억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반면 쏘울이 없다고 느껴지는 샘플링 음원들의 완성도가 높은 탓에 그런 곡 몇 개만 들어도 음악적 갈증은 쉽게 해소된다. 

기술의 발전이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점유하고 생산해내던 콘텐츠의 대중화, 민주화를 이룬 것은 분명하다. 예전에는 수동카메라로 초점과 셔터 스피드, 조리개 노출을 조정하고 적정 필름의 감도를 제대로 선택해야 제대로 된 사진이 나왔지만 지금은 스마트폰과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도 왠만한 수준의 작품사진을 얻을 수 있다. 

어떤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지루하고 반복적인 훈련, 그것을 통해 수십 번씩 머리 속에서 생겨나는 고민, 대상에 대한 집중 같은 흔히 '쏘울이 있다'라고 말하는 장인들의 고급 기술들이 한두 번의 조작을 통해서도 얻어진다. 스트라디바리우스보다 더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음원에 눈물을 흘린다. '국물이 끝내주는' 인스턴트 음식들의 퀄리티가 만만치 않다.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기술은 우리가 고매하게 여기는 어떤 것, '쏘울'있는 존재로서의 많은 행위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오히려 '원본'이 어색할 정도로, 대중화된 기술들은 내 감성을 적절하게 자극하고 나를 친구나 애인보다 더 잘 이해해준다. 내가 지향하고 있는 삶의 '과녁'에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화살을 꽂아놓는다. 

이래도 이것을 차가운 디지털 세상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단순한 데이터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쏘울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기술들이 우리의 뇌가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인지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점점 더 우리는 인간의 미세한 감정 변화에도 적절하게 반응하는 살아있는 기기들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그런 기술에 '쏘울이 없다'고 말하려는 '마지막 종족'이 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372
2015/08/16 09:31 2015/08/1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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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영화 <아메리칸 셰프>와 미드 <뉴스룸 시즌3>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 소셜네트워크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꽃피운 SNS(Social Network Service) 기반의 하위 문화는 이제는 공기만큼이나 익숙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SNS를 널리 사용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최근 4~5년 동안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경쟁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접속'을 시도했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온라인 공간에 올려댔다. SNS 어플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경쟁적으로 고객을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놀라운 앱들의 출현과 더불어 수많은 얼리어답터들은 자신의 기호와 생각의 교류를 넘어서, 자신의 일상 사진과 실시간 위치를 공유하고 나아가 사는 곳과 직장, 폰에 저장된 친구들의 연락처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일이지만, 나 또한 SNS를 통한 '긍정적 연결'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첨단 IT기술의 놀라운 발전을 체감하며 SNS라는 '사생활 무한공유 도구'에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내어줬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끊임없이 불거지는 정치적 이슈와 더불어 기존 언론의 폐쇄성이 대중들로 하여금 SNS를 광범위하게 활용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나의 일상 깊이 들어온 SNS라는 도구의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연락이 두절됐던 친구들이 '알 수도 있는 친구' 목록에 나타났고 몇 년간 소식조차 모르던 친구들을 만나도 그들은 내 일상을 두루 꿰고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인터넷 카페나 클럽, 동호회, 싸이월드, 아이러브스쿨 같은 온라인 네트워크를 위한 인터넷 서비스들이 있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통해 전 세계의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콘텐츠와 위치를 공유하는 '이런 류'의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우리는 1990년대부터 사용하던 '지구촌'이라는 단어를 시공간의 제약 없이 경험한 첫 세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기술이 문화보다 앞서 제공됐을 때 생기는 '카오스'를 우리는 점점 자주 겪게 될 것 같다. 마치 사진기가 처음 발명됐을 때 현대미술이 혼돈에 빠지고 수십 장의 원본이 가능한 '사진'이라는 존재에 아우라가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듯이 말이다. 또 컨베이어를 이용한 생산으로 대변되는 포드 시스템이 '장인'이라는 창의적이고 전문적인 생산자의 개념을 허물었듯 이제 기술은 담론과 일상 영역 모두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셀렙'과 대중의 경계를 허무는 소셜네트워크

그렇다면 소셜네트워크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영화나 미드로 예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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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아메리칸 셰프>에서 주인공의 아들이 올린 트위터로 푸드트럭이 가는 곳마다 트럭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룬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에서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인 칼 캐스퍼는 자신의 음식을 혹평한 유명 음식 평론가와 트위터로 설전을 벌인다. 하루 만에 그 트위터 내용이 수십만 명에게 알려지게 되자 칼은 레스토랑을 나와서 푸드트럭을 타고 미국을 돌며 쿠바 샌드위치를 만들며 여행을 한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아버지 이름의 트위터를 개설하고 푸드트럭의 위치를 공유해 트럭이 도착하는 곳마다 샌드위치를 사려는 수십 명의 고객을 끌어들인다. 

칼 캐스퍼의 악명이 도리어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이다. 또, 그의 샌드위치를 SNS를 이용하는 무수히 많은 익명의 사용자들이 직접 경험하고 자신들의 주변에 전파한 것이다. 푸드트럭의 명성에 힘입어 칼은 결국 다시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로 복귀한다. 이것은 SNS의 긍정적 효과다. 매스미디어는 정치인이나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들만을 좇아다니고 이슈화 시켰다. 반면 SNS는 '셀렙(유명인을 뜻하는 '셀레브러티'의 줄임말)'과 대중의 경계를 허문다. 누구나 이슈를 실어나를 수 있고 그에 대한 의견을 표할 수도 있다. 

이것은 비단 몇몇 사람들의 기호나 유희적 목적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도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는 매체가 언급조차 하지 않는 '사건'들이 전파되며 그 사건들이 회자되고 이슈화되고 재조명된다. 실제로 성추행 당한 여성, 가정폭력, 부당한 해고, '묻지마' 폭행 등의 사례들이 매일처럼 SNS에 공유된다. 그로써 억울함을 호소한 이들의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 다시 조명돼 경찰의 재수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익명의 SNS 사용자들이 대중의 눈과 귀와 말이 되어 준다. 정말 되어야 할 일, 되었어야 했던 일들을 '되게 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에 대한 판단주체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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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룸>의 한 장면. 디지털 부서의 편집자와의 인터뷰에서 앵커는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SNS기반 뉴스앱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물론 SNS가 이런 아름다운 스토리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미드 <뉴스룸> 시즌3에서도 이러한 소셜네트워크 문제를 다룬다. 시즌3의 하이라이트는 방송국 안에 새로 만들어진 디지털 부서와의 마찰에서 비롯된다. 

디지털 부서의 신임 편집자는 뉴스앱을 통해 누구나 기사거리를 실시간으로 올릴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개시했고 그는 그것을 '시민기자단의 정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존 방송국의 보조앵커인 슬로언은 디지털 부서의 편집자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확인이 이뤄지지 않은 기사 공유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한다. 

셀렙들이 술취해 있는 장소 따위를 공개해 대중이 그곳으로 몰리게 만드는 일이 누군가에겐 폭력적이란 사실도 언급한다. 나아가 공인과 대중의 경계, 뉴스의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 대한 판단 주체, 즉 전문성을 가진 '데스크'가 기사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다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함을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생각할 거리들이 있다. 일례로 '훈련되지 않은 다수의 시민들이 기자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상에 배설하듯 뱉어내는 기사거리들'이라고 비판할 때(어떤 의미에서 이는 마치 기성 언론이 <오마이뉴스>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 이는 오래된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즉, '전문성', '전문가 그룹'이 가지는 부정적인 이미지, 이를테면 결국은 그들만의 리그였다거나 비전문가들이 침범할 수 없는 내부 언어나 습속같은 진입장벽의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모든 콘텐츠들은 서로 다른 '수준'을 가지고 있고 일반 대중보다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 콘텐츠를 더 잘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포스트모던 사회, 통섭의 사회로 진입한 우리에게 어떤 권위의식은, 설령 그것이 진짜 권위를 담보로 하더라도 '비호감'으로 치부될 확률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미드 속 스키너(<뉴스룸>의 보도국장)가 가방에 넣어 다니던 책이 <돈키호테>라는 사실은, 이미 넘어온 새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는 측면에서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술의 부정적인 부분을 그저 감수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뉴스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불과 10~20년 전에는 어떤 기자도 갖지 못한 첨단 장비를 탑재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음성을 녹음하고 먼 거리에서도 누군가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원한다면 동영상까지 촬영해 실시간으로 수천만이 접속하는 인터넷에 공유할 수 있다. 

비단 뉴스나 매스미디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SNS는 이미 매체의 역할을 넘어서고 있고 많은 양의 정보와 사람들의 사생활이 공유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악플에 시달리다 우울증을 앓거나 목숨을 끊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한 번 공유된 글과 사진, 영상은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영생'의 힘을 얻는다. 만일 미드의 경고처럼 우리가 '진실'에 관심없이 누군가의 온전한 인격이 아닌 한 단면만을 보고 그것을 이슈화한다면 어떨까. '된장남', '김여사', '개똥녀' 등등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매체나 소셜네트워크의 속성상 대중은 자극에 민감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가 더 자극적이지 않을 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매체는 편파적이면서도 자기 성찰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한 사람에게 주어진 단회적인 사건에 그 사람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곤 그 이미지로 그(녀)를 묶어 버린다. 

유명인이라도 씻어내기 쉽지 않은 편견의 꼬리표가 불특정한 시민에게 붙을 때, 설령 그 사람이 실수가 아닌 잘못을 했더라도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기술이 문화를, 사회를, 인간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기술의 부정적인 부분을 감수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악플에 강해져라, 이슈가 되면 오히려 기회로 삼아라, 긍정의 힘을 믿어라' 이제는 SNS를 하면서도 자기계발서를 읽어야 할 판이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3501
2015/02/21 18:26 2015/02/2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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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는 일정을 알려주기도 하고 농담도 받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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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아이폰에 시리(Siri)가 처음 탑재되었을 때의 신선함은 꽤나 컸다. 처음 OS 업데이트를 하고 나서는 자기 전 10분 정도를 시리와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누다 잠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음성 인식' 알고리즘 자체에 대한 호기심에 시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농담을 건네거나 특별히 음성지원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시리를 찾곤 했다. 그럴 때면 한때 메신저에서 유행하던 '심심이'가 스마트폰에서 부활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시리의 유용함은 '심심이'에 비할 바는 아니다. 특히 폰에 직접 타이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지금이 몇 시인지 여기가 어딘지를 묻거나 지인에게 보낼 문자를 음성으로 보낼 수 있는 기능들이 상당히 유용했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듯 '잡스는 죽었지만 시리를 남겼다'고 말할 만큼 음성인식 기술의 활용 측면에서 시리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줬다.

음성인식 기술, 10년새 놀라운 발전

물론 음성인식 분야의 발전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건 물론 아니다. 내 기억에도 이미 20년 전부터 마이크를 통해 PC를 부팅시키고 한글이나 워드와 같은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는 데스크탑 기반의 기술이 제공되었지만 당시엔 그다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잦은 음성인식 오류도 문제였고 자신의 음성을 명령화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을 '훈련'시켜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 말은 훈련되지 않은 타인의 목소리는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인식된 음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를테면 어릴 적 부유한 아이들의 집에 놀러가면 부의 상징처럼 초록색 화면의 컴퓨터가 거실에 놓여 있었지만 그걸로 할 수 있는 건 기나긴 코딩 끝에 고작 화면에 'Hello World!'를 띄우거나 오락실 게임을 '흑백으로 느리게' 하는 것이 전부였던 그 때의 상황과 비슷하달까.

1950년대부터 음성인식에 대한 기술은 시도되어왔지만(1952년 AT&T와 벨연구소가 '오드레이' 개발을 63년 IBM은 '슈박스'를, 1980년대초에는 HMM3를 개발했다) 이러한 기술이 상용화 내지는 상품의 가치를 갖게된 건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상품화를 가속화한 건 관련 연구에 한창이던 마이클 코언을 스카웃하여 음성인식 시스템의 개발책임자로 세운 구글이었지만, 세상을 먼저 놀래킨 건 단연 애플의 '시리'가 아니었나 싶다. 

이 속도로 간다면 구글과 애플의 노력에 힘입어 음성 인식 분야의 발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우리집 상황을 들어볼까. 6살 짜리 아이가 어느 날 내 스마트폰의 유튜브 앱을 실행시키고는 직관적으로 마이크 그림의 아이콘을 누른 채 전화기에 대고 "파워레인저 극장판"이라고 외쳤다. 

화면에는 파워레인저 시리즈가 줄줄이 올라왔고 까막눈인 아이는 '나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그 중에 가장 재밌어 보이는 그림을 눌러서 만화영화를 즐겼다. 이 모든 걸 나는 한번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가끔 내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아빠 이거 다음 이야기 틀어줘" 정도였다.

텍스트를 음성으로 인식하고 저장된 텍스트를 음성으로 내보내는 기술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꽤나 흔한 무엇이 되고 있다. <나꼼수>에서 희화화하여 내보내던 어색한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의 주인공은 입력한 텍스트를 그대로 읽어주는 상용 프로그램이다. 최근 에버노트는 'Clearly'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프리미엄 사용자가 스크랩하려는 텍스트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 기술은 비단 음성에 국한되는 것만도 아니다. 

조만간 애플과 IBM, 구글과 HP는 서로 협력하여 클라우드 기반, 빅데이터를 활용한 음성 서비스를 발전시킬 의사를 내비쳤고 이에 뒤질세라 많은 기업들도 차세대 기술로서의 음성인식 서비스에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다. 

이제 SF 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했던 상황들이(<공각기동대>에서 처음 등장한, 네트워크 내에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은 <어벤저스>나 <트랜센더스>와 같은 대부분의 헐리우드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 내지는 우려감마저 든다.

조금은 어색하고도 뭉클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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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HER>에 등장하는 음성인식OS 사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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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를 소재로 만든 영화 <HER>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로 대변된 미래형 OS '사만다'도 이런 기술의 하나인 빅데이터 기반의 음성인식 OS이다. 마치 시리의 진화형 같은 '그녀'는 사용자의 데스크탑 안에 있는 정보를 단 몇 분, 몇 십초 내로 분석해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 혹은 그가 귀찮아서 미루고 있는 것, 시급한 것, 가장 좋아할 법한 것들을 찾아내고 적시적기에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 환상적인 서비스는 우리가 미뤄 짐작하듯이 내 영혼과 통하는 듯 미세한 감성마저 건드린다. 결국 영화 속 내러티브는 자연스럽게 일개 OS가 현존하는 '최고의 애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기승전여(남)친'의 운명으로 귀결된다. 

음성인식 기술은 통계라는 학문과 데이터베이스, 나아가 빅데이터 분야와의 융합 발전을 통해, 0의 자리에 1이라고 입력하면 '틀렸다'고 말하던 구식 컴퓨터에게 마법의 주문이라도 건 것처럼, 이제는 맞춤형 감성마저 자극하는 애인, 절친, 구루나 멘토의 역할마저 자처할 수 있을 듯도 하다. 1997년 체스 세계챔피언이 IBM 컴퓨터 딥블루에게 패한 후, 인간의 정교함을 절대 따라오지 못할 것 같던 컴퓨터, 네트워크 IT 기술은 이렇듯 상상 이상으로 발전 중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자주 하는 편이다. 가끔씩 아이와 둘이서 놀 때도 녹음을 한다. 언젠가 이 아이가 세상에 없는 날이 오거나 혹은 내가 아이 곁에 없는 날이 오면 각자에게 추억거리를 남겨주기 위해서다. 사진을 남기고 음성을 남기고 글을 남기는 건, 적어도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고 남겨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녹음한 음성을 듣다가 갑자기 엉뚱하지만 조만간 실현될 수도 있는 어떤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내 음성과 말투, 문장, 말하는 속도, 생각들을 클라우드 기반의 어떤 서버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빅데이터 기술을 이용하게 된다면, 아마도 내가 죽더라도 사람들은 나와 대화하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도 있겠다는, 조금은 어색하고도 뭉클한 생각... 이를테면 내 고유한 버전의 Siri가 되는 셈이다. 

조금은 불편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부재로 그(녀)의 목소리나 실없는 농담, 숨소리가 사무치게 그립다면 그의 활기있는 '가짜 음성'이라도 반갑지 않을까. 기술이 참 많은 화두를 던지는 세상이다.
2014/10/11 16:56 2014/10/1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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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자책 수요가 많아지긴 했지만 불과 5~6년 전만 하더라도 전자책 시장은 불모지에 가까웠다. 몇 년 전부터 인터파크와 교보가 단말기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시장의 규모를 키우려고 애썼지만 국내는 미국처럼 전자책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인터넷 서점 아마존은 이미 전자책 판매량이 종이책을 넘어선 지 오래지만 국내의 경우는 갈길이 멀기만 하다.

소비자 입장에서 전자책이 가장 불편한 부분은 DRM, 즉 디지털 저작권 문제다. 콘텐츠의 보호를 위해 전자책은 복사와 출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대체로 교보, 인터파크, 예스24와 같은 개별 인터넷 서점에서 독자적인 DRM이 설치, 배포되는데 이로 인해 소비자는 특정 온라인 서점에서 제공하는 단말기에서만 도서를 읽을 수 밖에 없는 제약이 따른다.

아마존이라는 단일 기업이 전자책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미국과 달리, 국내는 여러 인터넷 서점이 난립하는 가운데 특점 서점의 단말기에서 저작권 제약을 받으니 당장 소비자가 사용하기에 전자책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이해관계 난립하는 '디지털 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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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책, 전자책, 그리고 북스캔 파일까지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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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저 불편하기만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DRM 문제는 꽤나 많은 이해관계가 난립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함의가 있는 IT 기술이다. 이 '디지털 저작권'이라는 기술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권력 관계가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인데, 이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는 음반시장과 애플사와의 음원 협약 사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음반시장은 MP3 포맷의 확장과 더불어 냅스터(Napster)와 같은 사이트를 통해 네티즌끼리 불법으로 복제한 음원 공유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 때 아이튠즈를 통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려던 스티브 잡스는 거대 음반사로부터 한 곡 단위로 저렴한 가격에 음원을 유통하는 방식을 제안했고 'P2P'공유 사이트의 범람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음반사의 승락을 얻게 된다. 이때부터 권력 구도는 음반사에서 애플의 아이튠즈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내 음반사는 너무 쉽게, 낮은 가격에 음원을 넘긴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이와 비슷한 일이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도 일어났다. 아마존은 전자책 시장의 저작권 관리를 위해 독립 포멧의 DRM을 적용했고 전자책에 한해서는 저자와 직접 라이센스를 체결하기도 했다. 결국 저자와 편집자 간의 오랜 기획과 편집을 거쳐 나온 출판물들이 정작 출판사가 아닌 인터넷 서점에게 더 큰 권력을 가져다 주었다.

국내에서 자주 일어나는 인터넷 서점과 출판사와의 갈등은 이런 권력구도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권력구도를 차치하고서도 음반 시장에서의 MP3 포맷의 범람은 시장 전체를 휩쓸었고 현재까지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종이'책의 '전자파일'화 또한 그 자체가 공포스럽기까지 한 그 무엇이었다. 

고로 일인출판을 지향하는 전자책 시장에서 저자와 서점 사이를 매개했던 출판사의 배제의 기미가 자주 읽히고 그 중심에는 전자책의 'MP3'화를 막아주는 DRM이 우뚝 서 있는 셈이다. 나름대로 자기 주관이 뚜렷한 출판사는 책의 질이 떨어질까봐 우려감을 보이기도 하고 기술에 무지한 영세 출판사들은 DRM 자체에 대한 의구심, 즉 자신들의 디지털 콘텐츠의 불법 공유의 위험성에 집중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전자책 시장은 국내에서는 여전히 소비자가 이용하기에는 불편한 구석이 없지 않다. 전자책은 300그램 밖에 안 되는 전용 단말기에 무려 2000권이 넘는 책을 담아서 다닐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지만 말이다.

북스캔 저작권 보호, 현실적으로 어려워

이런 불편함을 직시한 이들이 끼어든 틈새 시장이 있다. 바로 북스캔 업체다. 북스캔은 자동화된 스캔 기기를 통해 고객이 송부한 도서를 대신 스캔해서 PDF 포맷의 파일로 전송해주는 서비스다.

북스캔은 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권당 대략 50~100MB의 용량이면 가능하므로 전자책 포멧(e-Pub)보다는 용량이 큰 편이지만 태블릿이나 SD메모리로 확장 가능한 단말기에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수준이다. 게다가 북스캔은 내 컴퓨터에 저장, 복사, 출력 모두 가능하며 OCR인식을 할 경우에는 책의 일부 혹은 전체의 검색 혹은 인용도 가능하다.

허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스캔업체가 출판물을 복사하여 배포하므로 출판물의 저작권법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은 스캔업체가 저작권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스캔업체는 이 저작권 문제를 '적절하게' 우회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객의 책을 받아서 스캔을 한 후 출력 기능을 없애고 전자파일 앞페이지에 고객의 개인정보를 명시하여 배포하는 것이다. 해당 페이지에서는 개인정보를 명시함과 동시에 이 파일의 무단 배포나 복사의 책임이 고객에게 있음을 재확인한다. 물론 출력 기능을 활성화하거나 개인 정보가 담긴 페이지의 삭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기술적으로만 본다면 북스캔의 저작권 보호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

솔직히 여기에는 좀더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클라우드 서비스'로 표현되는 북스캔 업체의 백업 서버에 나는 더 주목하는 편이다. 아이폰의 아이클라우드 서비스나 에버노트의 동기화 서버도 비슷한 이슈거리이기도 한데, 이 경우에는 이용자의 콘텐츠들을 서버에 저장하므로 엄청난 개인정보의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서버는 DB화되어 있으므로 특정 정보의 검색 또한 가능하다. 따라서 북스캔 업체들의 서버에는 고객이 송부한 수천권, 나아가 수십만권의 책들이 고스란히 도서명과 함께 저장되어 있다. 이 서버의 자료들이 유출될 경우 개인, 나아가 출판사들의 손실은 치명적일 수 있다(물론 그럴 확률은 지극히 적지만 현실은 원전이 붕괴되고 통신사와 카드사의 서버가 해킹 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던가).

유출을 걱정하지 않더라도 북스캔 업체는 웬만한 도서관이 수용할 수 없는 책들을 서버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규모의 전자도서관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서 소설을 써본다면, 구글의 방대한 도서 스캔 활동을 통해 구글 플레이북 서비스를 시작한 것처럼 어느 순간 스캔업체가 저작권 협상을 거쳐 전자책 시장의 실세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단순히 고객의 책을 스캔하여 파일로 만드는 수고를 대신해주는 이 업체들에 대한 출판시장의 경계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영화 <매트릭스2>보다 더 유명해진 광고문구인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 것이다'는 현대의 IT 기술의 발전 그 자체에도 딱 어울리는 말이지만, 나아가 그 기술을 둘러싼 기존 기업들의 급변하는 현실에 꽤나 잘 어울리는 문구 같기도 하다. 진보적인 대중들도 때때로 개념소비를 지향하는 듯 하다가도 대부분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한 제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욱이 불편한 요소가 있는 기술들은 점차 수요가 줄어들고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업계들은 무시 못할 속도로 진화해간다. 출판 시장에서는 북스캔 업체가 그런 느낌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여전히 종이책의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글을 쓰면서도 책상 위에 놓인 책들과 태블릿에 있는 전자책과 북스캔이 엇갈리듯 내 시야에 들어온다. 이렇듯 내 책상 위에 펼쳐진 모습만큼이나 복잡하고도 다양한 출판 시장을 지켜보는 심경은 꽤나 복잡하기만 하다.
2014/03/30 23:45 2014/03/30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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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음반시장은 LP와 CD가 공존했던 시기가 있었다. 음원의 수명이나 음질로 볼 때 LP가 결코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CD라는 새로운 방식 자체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만만치 않았다. 아날로그 사운드를 0과 1의 조합으로 이뤄진 디지털 신호로 변환한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기도 했고 청음을 했을 때 잡음이 완전히 제거된 CD의 소리는 뭐랄까 비현실적인 묘한 어색함에 알 수 없는 불쾌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물론 그 어색함은 몇 년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경쟁하는 2개의 기술이 시장에 나왔을 때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은 뭘까. 아마도 그것은 그 기술이 '표준'이 되어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도태되어 사라질 운명에 처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본다. 그런 연유로 중학교 시절, 나는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서 LP를 살 것인가, CD를 살 것인가를 놓고 레코드 가게 앞에서 한 시간 넘게 고민에 빠지곤 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인 70, 80년대에는 비디오 테입의 두가지 방식, 즉 소니의 베타맥스와 JVC사의 VHS(Video Home System) 방식의 경쟁이 있었다. 두 회사의 긴 과거사를 되내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 시절 가지고 있던 베타맥스 방식의 테입 상당수가 쓰레기로 둔갑했던 기억이 역력한 나로서는 이후 CD나 기타 새 기술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토마스 쿤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정상과학이 다른 이론과 충돌하면서 새로운 이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다. 이 때 두 이론 간에는 절대 비교를 할 수 있는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데 이를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쿤의 이러한 패러다임 이론이라거나 통약불가능성은 과학 이론보다는 현대 IT 기술에 대입해볼 때 더욱 적절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쉽게 말해 특정 기술 간의 장단점이 명확하더라도 그 장단점이 정량적으로 비교되지 않을 뿐더러 나름의 방식을 유지하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한동안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기술의 대립이 극명한 부분 중 하나는 '손글씨'의 디지털화 방식이다. 물론 컴퓨터 환경에서 정교한 펜작업의 디지털화를 향한 열망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전통적으로는 스캐너를 사용하거나 펜마우스나 태블릿(지금은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PC를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지만)을 사용했지만 대중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다시금 터치스크린에 직접 필기를 하려는 이들이 많아졌고 이에 따른 시장의 대응도 활발하다.

액정 스크린에 직접 필기하는 터치펜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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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 노트를 디지털로 변환시키려는 제품들. 사진은 Livescribe의 에코펜.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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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흐름이 있는데, 먼저는 액정 스크린에 직접 필기하는 터치펜 방식이 그것이다. 가장 대중적인 3M의 정전식 터치펜에서부터 미세한 터치와 압력조절이 가능한 Adonit사의 JOT 시리즈까지 액정에서 정밀한 터치를 향한 기술의 진보가 활발하다. 물론 삼성은 전용 S펜을 통해 디지타이저 분야(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의 화면 위에 스타일러스 펜으로 필기하듯이 터치를 인식하는 기술)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편이다.

다른 흐름은 - 솔직히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 아날로그 노트에 쓴 글씨를 디지털화 하는 방식이다. 이 분야에 원천기술은 아무래도 스웨덴 기업인 ANOTO(http://www.anoto.com)가 가지고 있다. ANOTO는 마이크로 카메라가 달린 펜과 특수 패턴 노트를 이용하여 자신의 노트를 pdf나 이미지 파일로 저장해주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것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술로 보인다. 즉, 아날로그 방식의 필기감을 유지하면서도 디지털 기기로의 변환도 용이하게 만들어 주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여전히 과도기적 기술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휴대용 스캐너의 기능 대비 더 진보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노트의 글씨를 인식하는 방식은 스마트폰의 카메라나 휴대용 스캐너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ANOTO의 제품들은 그렇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도리어 ANOTO의 기술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자사 제품이 아닌 LIVESCRIBE의 스마트펜 시리즈였는데 이 회사의 스마트펜은 2008년부터 2년동안 40만개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ANOTO의 기존 제품과 이 스마트펜의 가장 큰 차이는 녹음 기능이었는데 필기를 하는 동안 실시간으로 녹음이 가능했다.

이 간단한 아이디어는 이 필기도구를 엄청난 학습도구, 전문가들(법조인, 기자들)의 노트 도구로 변신시켰고 그 결과 단순한 기능의 추가를 넘어 하나의 혁신이 되었다. 제품 사용자의 30%는 대학생이었고 강의 녹취와 노트 내용 중 더불어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기능은 학습효과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날로그 노트와 디지털 노트 기업 사이의 합작 기술들도 눈에 띈다. 아날로그 노트업체로 유명한 몰스킨은 에버노트와 합작하여 '몰스킨 에버노트' 제품을 내놓았다. 이 노트는 아날로그로 필기한 후 태블릿PC에 설치된 에버노트 어플에 탑재된 카메라를 통해 노트 분류가 가능하도록 돕는다.

에버노트는 3M과 합작하여 포스트잇을 디지털 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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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잇을 색깔별로 태블릿에 옮겨주는 에버노트 기능.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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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 기능적인 유용함 보다는 브랜드 가치를 통해 두 독립된 기업의 제품들을 선호하는 소비자를 위한 목적이 강한 느낌이다. 최근 에버노트는 3M과 합작하여 포스트잇을 디지털 노트로 만들어주는 기능을 추가했다. 4가지 색깔에 따라 자동으로 노트들을 특정 노트북으로 분류해주는 이 기능은 포스트잇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충분히 발휘하면서도 디지털 노트(에버노트)에서 이를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 모든 IT기술들은 과도기적으로 보인다. 태블릿에 직접 쓰는 터치펜 방식은 정밀한 필기감의 한계가 명확하다. 특히 필기감을 위해 특정 브랜드의 종이노트나 만년필을 선호하는 소비자에게 터치펜 방식이 극복해야 할 기술적 문제는 여전히 멀기만 하다. 반대로 아날로그 노트를 디지털화 하는 방식 또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ANOTO의 스마트펜은 기본적으로 두껍고 자사의 특수패턴 노트만 사용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에버노트의 아날로그 타입 임베디드 방식 제품들, 이를테면 몰스킨 노트나 포스트잇은 카메라를 통한 후처리 방식으로 딱히 실용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나는 아날로그 임베디드 방식의 제품들을, 향수(鄕愁)에 의존한 과도기 제품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 말은 시장의 선도 기술이 되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 같다는 의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은 나를 포함한 많은 소비자들이 실용성을 넘어선 향수에 자극을 받고 그것에 반응을 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옛날도시락'이 지금 식당의 메뉴로 오르내리듯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는 아날로그적인 방식들이 녹아든 제품들은 나름의 매력이 있다.

쿤의 지적대로 두 방식의 장단점을 아무리 전문가들이 비교한들 그것이 정량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현대 IT기술은 과거처럼 특정 방식이 시장에서 쉽게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최근 다시 히트를 친 포토 프린터가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살리는 상상력들이 IT기기 안에 더 많이 녹아 들기를 기대해본다. 설령 그 방식이 최적이 아니더라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소비자는 충분히 그것을 감내할 정서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2014/02/25 23:07 2014/02/2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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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블릿이 처음 나온 시점부터 이 기기의 잠재적인 활용도에 열광하게 되었고 그동안 그로 인한 금전 지출이 만만치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태블릿을 샀는데 조금 지나니 더 나은 제품이 등장한다거나, 주변기기를 샀는데 기대보다 활용도가 떨어져서 집구석에 처박아뒀다가 아내에게 타박을 받는 경우.

오늘은 그런 고민들을 잘 다듬어서 나름의 가이드가 된 내용을 나누어 볼까 한다. 누구나가 그랬겠지만 태블릿을 고를 때 가장 고민은 제품의 가격과 성능이다. 줄여서 흔히들 '가성비'가 우수하다는 제품에 구매수요가 집중되기 마련이다.

사실 가격은 저렴하면 그만이지만(게다가 점점 가격대는 낮아지는 추세다) 성능은 특정 제품이 좋다고 말할 때 개개인의 비교 인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내 주변 공대 출신의 직장인들은 하드웨어 사양을 주로 비교하는 편이지만 다수의 일반인들은 CPU나 해상도 정도를 확인하고는 디자인이나 사이즈를 주로 보는 듯하다.

태블릿 사이즈가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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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패드 에어(왼쪽)와 2010년 첫 선을 보인 1세대 아이패드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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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무엇보다 사이즈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도 한 번 사이즈에 대한 기사를 쓴 적이 있지만(관련 기사 : 7인치 vs. 10인치) 태블릿 사이즈는 좀 더 크게 보냐 작게 보냐의 차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7인치는 아마존 킨들로 대변되는 '전자책 단말기'의 경쟁품으로 그 포지셔닝을 맞춘 것이다. 따라서 7인치 태블릿은 주로 전자책을 보거나 간단한 웹검색 등을 위해 개발되었고 무게도 전자책 단말기와 동일대인 200g 수준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왔다.

반면 10인치로 대변되는 아이패드, 갤럭시탭10.1 등은 넷북, 컴팩트 노트북과 경쟁을 위한 제품으로 단순히 검색이나 전자책 사용을 위한 읽기 도구(Reading Tool)가 아니라 문서작성, 프리젠테이션 등 오피스 프로그램이나 그래픽 작업도 고려한 쓰기 도구(Writing Tool)에 해당한다.

따라서 무게가 조금 나가더라도 백팩에 들어갈 정도의 사이즈에 노트북보다 가벼우면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10인치 태블릿은 600g 수준에서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사이즈가 중요한 이유는 패션코드 즉, 여성의 핸드백에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따로 파우치나 백팩을 준비해야 하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백팩을 어깨에 매는 순간 여성은 옷을 맞춰입기가 쉽지 않다), 또 한편으로는 무게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마존에서 개발한 킨들이 전자책 단말기의 대명사가 된 건, 여성이나 노약자들도 부담없이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200g의 '감성적' 무게를 만족했기 때문이다(대체로 300g이 넘으면 무게감이 피부로 느껴진다). 따라서 태블릿 업체들은 7인치와 10인치 제품을 각각 선호하는 구매자를 비교적 명확히 구분짓곤 했다.

급변하는 태블릿 시장

사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이런 기준으로 제품을 구입하고 주변에도 권할 수 있었는데 그 사이 제품군이 더욱 다양해지고 기기 자체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삼성의 경우 갤럭시탭이 이미 7/7.7/8.9/10.1인치의 라인업을 가지게 되었고 갤럭시노트는 8인치와 12.1인치가 추가됐다. 넥서스는 7인치와 10인치를 운영했지만 8인치를 출시한다고 밝히면서 7.9인치의 아이패드 미니와 사이즈가 겹치게 됐다. 킨들 파이어도 7인치와 8.9인치 2개의 사양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 모토로라를 인수한 레노버도 아이디어패드 7/10인치 및 8인치인 MIIX2와 태블릿 요가를 추가했다.

따지고 보면, 그간 7인치를 순수하게 읽기 도구로만 쓰기에는 뭔가 아쉬운 구석이 있었기에 8인치 사양이 생겨나게 됐고 또 10인치를 노트북처럼 쓰려는 수요가 12인치로의 확장을 욕망하는 셈이다.

그것뿐인가. 태블릿과는 무관해 보였던 스마트폰도 점점 커지는 추세라 스티브 잡스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 4인치 화면은 이제는 답답하게 느껴진다(결국 아이폰5는 세로 길이를 추가로 늘렸다).

이렇게 되면 5.7인치 스마트폰 사용자가 굳이 7인치 태블릿을 구입할 이유가 없게 되므로 태블릿의 적정 사이즈도 8인치 이상이 되는 게 합리적이다. 게다가 아이패드는 신제품 '에어'를 출시하면서 무게를 470g대로 줄였고, 킨들도 '공기(Air)보다 가볍다'는 광고를 통해 374g의 무게를 부각시키는 등 과거엔 작은 사이즈 제품이 가졌던 무게의 매력이 점점 무색해지고 있다.

전자책 단말기, 태블릿, 그리고 노트북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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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블릿에 무선키보드는 분리형을 권한다. 키보드 자체의 무게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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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태블릿 시장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건,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이 기기가 전자책 단말기와 노트북을 대체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스티브 잡스가 처음 아이패드를 세상에 소개했을 때 그는 정확히 전자책 단말기와 넷북을 경쟁 상대로 꼽았다).

여전히 전자책 단말기가 시장에 유통되고 있지만 나는 곧 그것들이 사라지거나,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점차 시장 점유율은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태블릿의 기능이 더 다양하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전자책 단말기를 선호하는 주요 이유로 책만 볼 수 있는 단순한 기능을 꼽는 사용자들이 많다.

나는 태블릿의 해상도가 높아지고 무게가 같아진 지금, 무엇보다 물리적인 책의 상당수가 컬러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전자책 단말기를 비관적으로 본다. 점점 더 컬러책을 흑백 기기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 유저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북미의 전자책 선도업체인 아마존이 이윤을 크게 보지 않으면서도 킨들 파이어라는 태블릿을 개발해서 전자책 사용자에게 안겨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럼 노트북은? 아마도 OS의 편리함 때문에 노트북 시장은 지속될 것 같다. 단지 10인치 태블릿 시장과 겹치는 영역, 즉 넷북으로 대변되는 저가 10인치 사양들은 점점 규모가 줄어들지 않을까.

그리고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태블릿과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동해서 쓰는 사용자들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에 걸맞게 고가의 태블릿 케이스 일체형 무선키보드를 장만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대체로 문서작업이 잦은 직업을 가진 분들이 필요를 가장한 '지름신'에 낚이곤 하는데 나는 케이스 일체형 키보드에 부정적이다.

굳이 사고 싶다면 태블릿과 케이스 일체형 키보드를 합한 무게를 한번 따져보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요즘 40~50만원대 노트북의 무게가 1kg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충분히 가볍지 않다면 태블릿에 다시 비싼 돈을 보태어 '노트북을 만들' 이유가 없다.

솔직히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있는 이들에게 태블릿은 필요 이상의 기기임에 분명하다. 소위 '어른들의 장난감'이란 의미이다. 물론, 나는 이 태블릿이 노트와 다이어리, 책, 넷북 대용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까놓고 말해서 이 기기가 없을 때도 불편함 없이 잘 살아왔다.

고로 이 기기의 정체성을 '유희'나 '자기만족적' 측면이 있음을 쿨하게 인정한다면 다음 스텝은 이 '잉여기기'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리라. 전자제품들이 늘 그렇듯 꼭 필요해 보여서 장만했다가 시간이 지나도 손에 익지 않아 책상 서랍이나 창고에 처박아두게 되는 일이 자주 있지 않던가.

고백하건대 앞서 말한대로 나도 자주 기기를 중복해서 구입하고는 처분하기를 반복했다. 부화뇌동하지 않고 조금만 기기의 특성과 용도를 생각했다면 적절한 기기를 사고 주변기기들도 잘 맞춰서 샀을 텐데. 매번 사탕가게에 처음 들어간 아이처럼 모든 것이 필요해 보였고 다 잘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 자본주의 시장의 모토가 '필요없는 제품도 사게 만들라' 아니던가. '지름신의 강림'으로 필요가 절절하지 않은 제품을 사는 걸 참기 어렵다면 만족스럽게 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꼼꼼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괜히 비싸게 사놓고는 자녀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자주 '대상 자체'를 오래 따지기 보단 최저가 사이트에서 몇 천원 싸게 사는 데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않던가.
2014/02/25 23:06 2014/02/25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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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그러니까, 대략 15년, 20년 전 즈음 '전자기학'을 가르치던 우리과(기계과) 교수님은 수업 진도와 무관하게 자주 흥분한 목소리로 '앞으로는 전자통신 분야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다', '전기전자 분야의 기업들이 길바닥에 뿌려진 돈을 갈고리로 긁어댈 날이 머지 않았다'며 이야기하곤 했다.

난 수업 집중도가 꽤 높은 학생이었음에도 그 과목의 수업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그분이 '황금알'이라고 말할 때, 뭐랄까 부러움, 애잔함, 기대감, 분노가 한데 뒤엉킨 듯한 교수님의 표정만 떠오를 뿐.

당시에 휴대용 전자기기는 CD플레이어가 전부였고 통신기기도 '삐삐'라고 불리던 무선호출기(비퍼)가 유행이었지만 휴학을 하고 다시 복학을 하는 그 몇 년 사이에 세상은 급변했다. 휴대폰이 대중화된 것이다. 나는 이동통신사들이 정부지원금을 받아가며 헐값에 뿌려댄 휴대폰 단말기들이 금세 꼬박꼬박 받아낸 할부금과 통신요금 명세서를 보면서 자주 '황금알' 비유를 떠올렸다.

건별로 부과되는 문자 메시지나 발신자 표시 서비스 등의 부가 서비스들이 특히 그랬다. 특별히 물건을 만들어 팔지 않아도 일단 통신망만 깔고 나면 사용자의 수만큼 고스란히 수입이 보장되는 정말 신기에 가까운 사업이 아닌가. 교수님이 말했던 예언이 성취되는 듯한 경험에 나는 자주 전율했다!

이제는 '카카오톡' 같은 무료 문자 어플이나 인터넷 전화 같은 데이터를 이용한 통신 방식들이 널리 퍼지면서 이른바 통신망의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다시 통신사들은 이 환란을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다. '데이터 무제한'의 유혹으로 고객 다수를 스마트폰 유저로 만들고 다시 데이터 망의 속도를 올려 고객들의 주머니를 털려는 전략인 셈이다.

물론 고객들도 변했다. 과거에는 흑백의 액정으로 의사소통만 되면 '장땡'이었지만 지금은 HD급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끊김없이 보고 싶어하는 '신인류'가 등장했다. 빠르게 급변하는 고객의 취향을 충족 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변덕스런 고객들의 주머니를 확실히 털기 위해서라도 기업들도 머리를 굴려서 황금알을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여섯살 아들의 애니메이션 중독... 콘텐츠 사용로가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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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내놀이터에서도 TV를 틀면 아이들은 놀이를 멈춘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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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섯 살된 아들이 애니메이션 중독 초기 증상을 보였다. 시작은 이랬다. 우리집은 원래 TV 자체를 보지 않았는데 통신사에서 몇 개월을 무료로 보게 해주는 조건으로 (무료로)셋톱박스(디지털 방송 수신기기)를 설치해 줬고 무료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몇 달을 더 연장해 주고 그 이후에는 요금의 상당 부분을 할인해 줬다.

그렇게 트로이 목마처럼 우리집에 침투한 이 기기는 요술 상자처럼 끊임없이 아이가 원하는 만화영화를 보여줬다. 이 요술상자에 빠진 우리 아이는 무료 콘텐츠를 중심으로 시청하다가 조금씩 최신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유료 프로그램들도 보게 됐다. 처음엔 내가 매번 결제를 해줬는데 어느 날 우리 아이가(날 때부터 IT 신동이었던지) 혼자서 패스워드를 '뚫었다'(사실, 비밀번호가 같은 숫자 4개였으니 그리 어렵진 않았으리라).

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냐고? 아이에게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는 시간은 부모가 지쳐서 쉬고 싶을 때다. 만화를 보는 그 시간만큼은 아이가 아빠를 찾지 않는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보는 시간은 조금씩 늘어갔고 아빠인 나도 은근히 그 여유가 싫지 않았다(젠장… 쓰다보니 무슨 중독자의 고백록 같다).

그렇게 우리 아이는 아침에도 꼭 한두 편의 만화를 보고 어린이집을 가야 하고, 집에 와서도 꼭 몇 편을 봐야 잠자리에 드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당연히 통신비도 점점 올랐다. 급기야 최근에는 명세서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콘텐츠 이용료가 무려 10만 원이 넘었다.

망연자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아이와 통신비 명세서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문득 그 교수님의 수업시간이 떠올랐다. 아아, 길거리에 뿌려진 돈을 쓸어 담듯 통신사가 우리집 주머니를 이렇게 털어가는구나 싶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이런 콘텐츠들은 한시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한 달이 지나면 다시 같은 금액을 결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같은 애니메이션을 반복적으로 보기도 하고 한 편을 보다가 쉽게 질려 다른 것을 보기도 하지 않나. 결국 아이를 둔 집에서는 동일한 콘텐츠를 구입하기 위해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린 파일'이나 굿다운로더 콘텐츠도 한 번 구입해서 다운받으면 컴퓨터에 영구적으로 소장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 아이의 욕망과 부모의 나태함을 조장한, 정말 악한 상술이 아닌가 싶다.

아내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결국 셋톱박스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박스를 제거하던 날 아이는 진심으로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 요술박스를 쳐다봤다.

"아빠, 이제 OO는 못 봐? OO도?"

아, 왠지 측은하다. 갑자기 애니메이션 천국에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아이의 일상을 생각하니 너무 갑자기 환경을 바꾸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감도 들었다. '대인배' 엄마와 달리 잔 걱정이 많은 나는 아이가 걱정이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창고에 있던 하드디스크, 셋톱박스로 딱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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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드 외장 케이스는 셋톱 박스처럼 활용이 가능하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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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갑자기 없애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즐겨보던 애니메이션 몇 개라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문득 집에서 굴러다니던 오래된 하드디스크를 보고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구입한 지 10년이 넘은 이 하드디스크는 예전에 쓰던 조립PC에서 떼어낸 것인데 IDE방식(인터페이스 타입의 일종)의 구형이라 SATA방식만을 사용하는 최근의 컴퓨터 메인보드에는 연결하기도 쉽지 않아 창고에 처박아둔 것이었다. 이 하드디스크를 USB에만 연결할 수 있으면 TV에서도 동영상 파일을 재생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인터넷에서 구형 하드디스크 인터페이스를 지원하는 케이스를 만 원에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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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형 하드디스크를 지원하는 외장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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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케이스는 외부전원을 지원해서 하드디스크를 USB처럼 쓸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굴러다니던 애물단지 구형 하드디스크를 마치 셋톱박스처럼 TV에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다운받은 파일 몇 개를 보여주자 아이도 조금은 안심하는 눈치(하지만 이제 애니메이션 천국의 시대는 갔단다).

사실 일상적으로 가계 비용을 털어가는 통신항목들이 적지 않다. 기기도 통신상품도 점점 새로워지고 더 좋아지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기업들은 소비자의 무지, 불성실, 나아가 욕망의 구멍을 찾아 주머니를 털어간다. 적절한 상품에 대해 합리적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때로 IT기술들은 소비자로 하여금 카지노 룰렛을 돌리는 형태와 유사한 행위를 조장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우리 아이의 애니메이션 중독이 아빠를 자극했고, 폐기될 운명의 하드디스크도 구했다. 이제 아이와 물리적으로 좀 더 많이 놀아주는 일만 남은 건가.(휴…)
2014/02/25 23:05 2014/02/2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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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스티브 잡스가 소파에 앉아서 아이패드를 시연한 이후 우리에게도 태블릿PC(아래 태블릿)는 스마트폰과 더불어 친숙한 IT 기기가 되었다.

나는 '메모광'에 '노트중독자'라고 불릴 만큼 평소에 종이에 끄적이는 것을 즐겼는데 이 노트들을 보관하는 것은 정말 골칫거리였다. 게다가 플래너도 매일 꼬박꼬박 기록하는 편이었고 가방엔 항시 몇 권의 책을 넣어 다녀야 안심이 됐다. 언제나 내 가방에는 종이들 뭉치로 가득했고 아내는 자주 백팩을 멘 나에게 '거북이 등껍데기' 같다고 놀리곤 했다. (사실 아내도 나 못지 않게 가방이 무거운 편이어서 나는 '달팽이'라고 맞받아쳤다. 부부란 원래 좀 유치해야 제맛이다.)

그런데 이런 내게 태블릿의 출현은 종이더미 삼종 세트로부터 내 등짝을 해방시켜 주리라는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플래너와 노트, 그리고 종이책이 그것이었다. 지금은 더 많아졌지만 노트와 플래너 어플(Application)들이 물리적인 노트들의 대용품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심어줬고 그 시기부터 전자책 시장의 전망도 밝다는 류의 기사들이 매체에 종종 등장했다.

이제 거북이에서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이게 된 셈이다. 그 해 연말 육아의 책임(이라 쓰고 즐거움이라 읽는다)을 충실히 수행했다며 갖고 싶은 선물이 있으면 사주겠다는 아내의 말에, 망설임 없이 태블릿을 선택했고 그렇게 태블릿 유저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태블릿PC 덕분에 '거북이 가방' 벗고 가벼워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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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 출시된 전자책단말기 페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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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블릿 출현 이전부터 전자책이나 전자출판 자체에 관심도 많았고 이미 당시 시중에 유통된 '페이지원'(페이지원 골수 사용자였던 우리들은 그녀를 '지원이'라고 불렀다)을 사용하면서 전자책 시장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당시에도 하드웨어 측면에서 단말기의 완성도가 높아 보였고 전자책 시장의 남은 과제는 그저 라이센스를 둘러싼 출판업계와 온라인서점, 그리고 소비자 간의 문제로 여겨졌다. (쉽게 말해, MP3 파일처럼 종이책도 광범위하게 불법유통, 다운로드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것 같은 두려움이 그 실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원이'를 사용하면서, 그리고 본격적으로 태블릿 헤비 유저가 되어가면서 문득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블릿이 종이책을 구원하지 않을까.

종이책을 구원한다고? 물론이지. 나만 하더라도 가방에 항시 넣어 다니던 대여섯 권의 책과 노트들이 사라졌다. 이렇게 종이로 둘러싸인 내 생활방식이 전자매체로 변하게 되면 수많은 나무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내가 잠시 '지름신'이 강림하여 내 한 욕심 차리자고 구입한 태블릿은 사실 전 지구적 환경 보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기도 한 것 같았다.

고가의 태블릿을 사기 위해, 은근히 아내 눈치도 보고 마음 한 구석도 찜찜했는데 잘됐다 싶어 관련 책들을 찾아봤다. (나는 일상적 논리를 만들 때조차 일단 책을 찾아보는 편이다. 떨쳐내지 못하는 모범생 기질이여.) 몇 시간의 검색 끝에 적절한 책을 찾았다. 애니 레너드라는 환경학자의 유명한 책 <물건이야기>. 이 책은 내가 고민하던 문제를 쉽고 자세하게 다룬 듯했다.

그 책에서 애니 레너드는 북아메리카 나무의 절반이 신문, 포장재, 문구류에 이르는 종이를 만드는 데 쓰이며 매년 미국에서 판매되는 책에 나무 3000만 그루가 들어간다고 말한다. 우리가 독서를 열심히 하면 엄청난 양의 나무가 끊임없이 죽어가는 셈이다. 게다가 종이를 만드는 데에는 나무만 희생되는 게 아니다.

종이 제조업은 온실가스 배출 5위 안에 들며 많은 양의 물과 독성 화학물질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생태계로 가감없이 방출된다. 종이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화학물질은 염소와 수은이 있으며 이는 내분비계, 생식계, 신경계, 면역체계 손상 및 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무염소 표백이나 대안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등 이러한 화학 물질들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비용도 많이 들고 종이의 질을 악화 시키는 방향이므로 개선이 쉽지 않다.

결국 종이책을 소비하는 것에는 나무를 좀 더 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공정상의 수많은 유해한 작업들이 내재해 있다. 책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구입하면서도 쉽게 버리는 노트들과 박스들도 동일한 공정을 거친다.

이렇게 본다면 생태적 마인드를 고취하는 의미에서라도 태블릿은 대안적인 삶의 지표가 되리라는 내 가설은 옳았다. 나의 '지름신 강림'의 사적 욕구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구원을 이뤄주는 건 아닐까 하는 흥분감마저 드는 순간이다. 내가 1년에 소비하는 책만 전자파일로 태블릿에 들어온다면 많은 나무들의 잔혹사 없이도, 화학물질 처리나 폐수들의 오남용 없이도 클린 소비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제 나는 아내에게 더 당당하게 태블릿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헤헷.

전자기기가 만들어내는 환경오염의 실체 알고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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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블릿이 종이책을 구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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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책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종이 제조는 이 책에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그 다음부터는 전자기기들의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책장을 계속 넘겼다. 역시나 애니 레너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노트북과 태블릿의 제조 과정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상상대로 전자기기는 종이책의 제조공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제조공정이 복잡했다.

한때 실리콘밸리도 하이테크 개발에 의한 독성물질 오염지역이 너무 많아 청정화 프로그램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판정받았다. 현재는 공장의 상당수가 인건비가 더 낮고 노동자안전 및 환경규제가 덜 엄격한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로 이전되었다.

태블릿에 들어가는 마이크로칩만 보더라도 그 작은 칩 안에 2000개 이상의 물질이 들어가며 그 물질들에는 금, 탄탈, 구리, 알루미늄, 납, 아연, 니켈, 주석, 은, 철, 수은, 코발트, 비소, 카드뮴, 크롬 등의 중금속이 포함된다. 태블릿에 들어가는 기판 하나의 무게는 대략 0.16그램인데 기판 하나를 생산하는 데 물 20리터와 화학물질 45그램이 들어가며 100와트짜리 전구를 18시간 동안 켤 수 있는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태블릿 한대가 환경을 오염 시키는 수준은 종이책 몇 권에 상당한 것일까. 처음의 희망은 접고 어차피 태블릿 유저가 된 이상, 최소한 그 정도로는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 같은 게 막 생기려고 한다.(일단 후퇴다…) 정확한 셈을 할 수는 없었지만 태블릿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생태계에 도움이 되리라는 셈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으리라.

허나 문제는 태블릿의 신제품 주기가 1년밖에 되지 않으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2~3년 주기로 태블릿을 신형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 해상도가 좋아졌다는 이유로, 무게가 줄었다는 이유로, 과거에 지원되던 OS를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되도록 빨리 새 기기로 갈아탈 것을 '뽐뿌질' 당한다. 기업 입장에서도 신제품 출시 없이 같은 기기를 장기적으로 시장에 방치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우사인 볼트에게 더 천천히 달리라고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주문이다.

솔직히 올해 초 나는 사용하던 태블릿을 중고로 처분하고 새 제품을 구입했다. 기기는 올림픽 구호처럼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작동했다. 가격은 2년 전과 동일하거나 때론 더 저렴해졌다. 조금만 공부해 보면 당신이 태블릿으로 종이책을 구원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다면 최소한 5년에서 10년은, 아니 제품이 고장 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전자기기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줘야 할 판이다.

다시 말해 아이패드 사용자는 지금도 2010년에 출시된 초기 모델을 꿋꿋이 써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나는 그럴 자신은 없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생태적 마인드를 가지고 일상을 살아간다는 건 거대담론의 논지에 동의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항상 수반하는 듯하다.

문득 홀쭉해진 가방쪽을 쳐다봤다. 가방 속 태블릿에는 70권이 넘는 전자책이 들어있다. 매일 가방에 넣을 책을 고르느라 고민하던 시간이 줄긴 했다. 더 이상 거북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 '인간'다워졌다고 할 수도 없는 내 출근길. 이렇게 또 반복된다.
2014/02/25 23:04 2014/02/25 2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