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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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안과 밖 (2001. 5.)
/ 김용주


밖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장대비가 온 땅을 삼킬 듯이 퍼붓고 있습니다.
이중 창문 닫아걸고 현관문 걸어 잠그면 아득한 바깥
비 소리에 젖어 드는 원두커피 향이 감미로운 아늑한 실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가스펠을 즐기며
지금 이 순간 바깥에 있지 않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불안한 축대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어느 집 허름한 지붕을 뚫고 떨어져 내리는 빗물 소리,
이리 저리 휩쓸리는 풀잎들, 벌레들의 비명 소리는
그저 이중창 바깥의 소리일 뿐입니다.

불어난 빗물이 어느 동네 낮은 집들을 삼키는 모습,
비에 젖은 신문지를 이불 삼아 잠을 청하는 노숙자들의 모습
늦은 밤 고단한 몸 흠뻑 젖어 퇴근하는 이웃들의 모습은
다만 현관 철문 바깥의 풍경일 뿐입니다.

지금 밖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고슬고슬한 이불을 깔며 잠자리를 준비합니다.
단지, 내일 아침 출근길을 염려하며 잠을 청합니다.

(기진호, "안과 밖")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버스에 기댄 채 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을까...열린 창문 사이로 새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시끄러운 소음이 피곤함에 못이겨 자고있던 저를 깨웠습니다. 아마 앞에 계신 분이 환기를 시키려고 문을 여신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두 뼘이 채 안되는 공간이 열리면서 차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고요한 정적을 깨고 창밖에서는 다른 차선에서 달리는 자동차 소리, 경적소리, 행사를 하고 있는 장소의 스피커폰 소리들로 요란해졌고 무엇보다 안락하게 느껴졌던 제 자리는 도저히 앉아서 견디기 힘든 속도의 바람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그야말로 버스의 속도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문득 내 삶의 형편과 버스 안의 내 자리가 닮은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일들과 가치들, 그리고 삶으로 담아내야 하는 내 주변을 간과한 채로 평안을 누리고 있는 나의 일상에 대한 반성을 해봅니다. 하루를 살면서도 내가 선호하는 책으로 눈을 가리고 내 입맛에 맞는 음악으로 귀를 막고 내가 원하는 장소들로만 걸음을 옮기는, 보고싶은 것만 보고 느끼고 싶은대로 느끼려는 어리석은 편협함이 어느덧 삶의 한 가운데 깊게 뿌리내려 있음을 봅니다.

너무나 시끄러운 요즘입니다. 두 뼘 남짓한 창문을 열면 안락하지 않은 상황(context)이 즐비합니다. "비 소리에 젖어 드는 원두커피 향이 감미로운 아늑한 실내"에서 "은은한 가스펠"에 평안을 느끼기에는 너무도 치열하고 절박한 "밖"(外)이 있습니다.

새차게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또한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소리와 바깥 소음들을 들으면서 그동안 없다고 생각했던 주변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무시하고 살았던 상황들을 기억해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중창 바깥"으로 나아가서 "이 순간 바깥에 '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2001/05/01 01:00 2001/05/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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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것이 삶에 유익입니다 (2001. 3.)
/ 김용주


"이제까지 어떻게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의 정체성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어."

새로운 학기를 맞으면서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후배가 던져놓은 화두였습니다. 매해 연말이면 '망년회(ØIO´ua)'를 통해 지난 해의 과오들은 잊고 다가올 새 해에는 다시 새로운 각오로 삶에 임하자는 생각은,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이며 이러한 '각오'는 1월과 2월 동안에도 신정과 구정이라는 두 번의 기회를 통해 다시 새롭게 다질 수 있음을 봅니다.

게다가 지난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볼 때 다시 떠올리기 힘들었던, 그렇게 유난히도 어려웠던 시간들을 보낸 이들에게는 더더욱 과거란 잊고 싶은 하나의 단어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것이 단지 한 해의 일이 아닌,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게도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지루하고 건조하기만 했던 시간의 연장이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의 과거란 미래를 설계하고 보다 긍정적인 관점을 갖게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후배의 말을 들으며 그러한 과거들을 돌아볼 때 일면으로는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는 사정을 이해할 만도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 자체만으로 다가올 삶을 준비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잘못이며 비극임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실패한 과거를 인정하지 않음이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함은, 똑같은 문제에 부딫혔을 때 회피하게 되거나 동일하게 뼈 아픈 과거를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비단 한 개인의 일생에서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나아가 한 국가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류를 반복하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설령 그것이 승리와 커다란 업적을 쌓은 기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낙담케 하고 절망 가운데로 몰아넣었던 쓰디쓴 기억이라 할 지라도 그 과거의 기억들을 무시하지 않고 도리어 직시하고, 고민하고, 항상 기억하며 살아갈 때만이 그 길고 긴 저주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중요하며 역사는 항상 고려되어야 함을 기억해 봅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당신의 규칙대로 세상을 내던진 것이 아니라 친히 역사를 주관하심을 신뢰하며 우리 자신의 삶에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의 삶과 나아가 온 세상의 역사를 통해 그분이 이끌어오신 손길들을 되짚어 보며, 또한 그것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며 앞으로도 동일하게 은혜로운 방법으로 인도하실 그 분의 손길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001/03/01 00:59 2001/03/0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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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공동체에 속한 기독학생들에게 띄우는 편지" (2001. 2.)

/ 김용주


<시작하면서...>

지부의 몇몇 가족들에게서 몇 번이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기들이 변했으면 좋겠어요."

" OO가 바뀌도록 기도하고 있어."

" OO는 XX가 부족한 것 같아."

저는 여러분께 조심스럽게 질문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성숙'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그 모습 그대로를 고수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서 사랑을 거두려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질: 하나님이 주신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질'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외적요인, 즉 환경의 영향으로 생긴 후천적 성격이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원죄로 인해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충분히 가치있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환경이란 외적 요인은 이런 개인의 본성을 아름답게 가꿔 갈 수도 있고 - 대다수의 경우처럼 - 과거의 상처로 인해 왜곡된, 그리고 다소 억압된 자아로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상처'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과 함께 아파하셨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주변 사람이 변하길 원하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화'같은 개념과는 의미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과 똑같은 복제품의 영적 존재를 이루어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얼굴과 손발, 심지어 지문까지 다르게 창조한 것은 우리 각각의 생각과 성격조차도 다양함 속에서 하나됨의 풍성함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그렇게 이야기한 분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이들이 똑같이 말하며, 똑같이 생각하며, 똑같이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IVF의 어떤 신앙 프로그램이 몇 년 안에 그것을 이루어 주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필요한 요소일 수 있겠으나 저의 견해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회심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하나님은 어떤 기질의 불신자를 다른 기질의 회심자로 바꾸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기질로 인해 행했던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가졌던 이가 삶에 대해 긍정적이며 감사하게 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옛 성품을 버린다'는 말은 그 본성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다는 뜻이지 자신의 기질이 다수의 Christian의 것으로 적응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기질에 대해 말하길 "우리의 성격과 기질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회심과 신생(新生)에 의하여 변화되지 않습니다....심리학적으로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그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쓴뿌리": 환경을 통해 생성된 상처들과 그로 인한 부정적 성격의 형성>

두번째로 지적할 것은 외적요인으로 인해 생긴 부정적 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흔히 IVF에서는 '쓴뿌리'라고 표현합니다. 가령 과거에 자신의 동생만을 편애하는 가정에서 자랐다거나, 부모가 이혼한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자신의 핸디캡으로 인해 받았던 학대와 같은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어떤 성격적 결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공동체에 있는 모든 가족들이 이런 쓴뿌리들을 하나씩 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하게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일수록 무의식중에 더 상처가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청년 시절 종교에 너무 집착하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시련이 없으면 절대자를 찾기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임 가운데에는 자기만의 "쓴뿌리"를 소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나친 판단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심각한 긴장점이 발생하는데, 그 긴장점은 바로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는 온통 상처를 주고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주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 속의 대화에서도 서로에 대한 상처가 쌓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지체에게 상처를 받고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겐 오직 하나님뿐입니다."라고. 그리고 밖에서는 자신을 보여주고 교제하려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채, 날씨 얘기, 지부의 일정들, 난해한 신앙이야기, 레포트 등으로 분주하게 보이려 애씁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빚댄 듯한 주위의 발언에 대해 "넌 내 입장이 아니니까."라며 아예 대화의 문을 막아 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조차 불안해하던 자신의 결점에 대해 타인이 공격할까봐, 오히려 그것을 확인하는 게 더 큰 고통이기 때문에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한 예로, 제가 처음 신입생을 맞았을 때 저는 내 부족함과 상처들을 한사람, 한사람에게 드러냈습니다. 물론 내 부족함이 드러나면 후배들이 나를 선배로 여겨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집에 오는 길엔 속이 상해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내 얘기에 그들이 침묵할 때, 나는 그들이 나를 판단하고 있다는 비참한 느낌 속에 가슴을 찢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길 바랬습니다. 어차피 내 부족함은 내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드러날 테니. 오히려 후배들이 날 이해해주며 부족한 가운데에도 신뢰해 주길 바랬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려는 형제애가 필요>

정리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의 약함과 결점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의 결점을 비판하거나 행여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의 결점은 감싸주라고 있는 것이지 찔러서 더 큰 상처를 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충고를 했을 경우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용납되었다는 감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판에 대처하는 법"에서 제람 바즈 교수는 평생 그 사람의 문제로 자신이 그 멍에를 함께 질 수 있을 때에만 비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이야기를 맺으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고유한 본성이 있으며 환경으로 인해 왜곡된 모습 또한 본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의 자유함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 자신에게도 같은 상처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상대방에게 용납되길 바라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대방을 용납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솔직할 때 그 누구도 자신의 모습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까지" 제자들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분은 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형벌대인 십자가에서 파격적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있는 모습 그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그분의 은혜, 그 자체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Christ)의 제자(Christian)로서 가족인 지체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수 없겠습니까? 지체의 급변(?)을 위해 조바심을 내며 섣불리 비판하기보다는 그가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인내하며, 인내로써 교제하여 죽기까지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갖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원리가 아닌 역사 속에 실재했던 그분의 사랑의 본이기 때문입니다. 입보다는 귀를 여십시오. 그리고 함께 아파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입니다.**
2001/02/01 00:59 2001/02/0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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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순수함'은 변하지 않을 때 아름답습니다 (2000. 8.)
/ 김용주


조카가 난 지 6주 정도가 지났습니다. 한 식구가 더 늘어난 이유로 집안은 전보다 더 분주해진 요즘입니다. 천진난만한 조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전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생명에게는 많은 주의가 필요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아울러 지금의 나 자신이 스스로의 공덕이 아닌 어머니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바로 설 수 있었음을 돌아보면, 그 동안 가졌던 저의 짧았던 생각들에 얼굴이 절로 숙여집니다.

요사이 자주 조카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합니다. 어쩌다 함박 웃음을 지을 때면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다 지닌 듯, 세상의 순수함은 모두 그 아이가 가진 듯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와 동시에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어지럽게 스쳐갑니다.

그 웃음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다름 아닌 세상과 격리된 그 아이의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낸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 아이가 자라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장성하여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어도 그 웃음이 한결같길 바라는 조바심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조카가 그 웃음을 지켜가기엔 삶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은 이유에서입니다.

"참 순수하던 사람이었는데..."

관공서에서 군복무를 하던 때에, 갓 승진한 동료 직원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다못한 주변 사람들이 내뱉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특유의 낙관적 생각들이 무너지고, 삶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 처음의 좋은 모습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일은 정말 너무 힘들고 현기증을 느끼도록 마음이 상하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 사람과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순수함이었나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그렇다면 순수함은 한 사람이 사회에서 군림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지 않을 때에만, 그가 아무런 악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그런 낮은 자, 여리고 힘없는 자의 위치에서만 유지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자신없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그건 아니라는 의미의 고개를 저어 봅니다.

조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 보며 이 아이가 평생을 창조주가 이 땅에 보내신 뜻대로, 그 분의 형상대로 이 척박한 땅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살아가길 바라는 기도를 해봅니다. 또한 이 아이가 자라서는 좀더 좋은 터전에서 나의 세대보다는 더 좋은 여건에서 살 수 있도록 지금부터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선한 경주를 마치고 조카와 마주서서 서로의 변치않는 웃음을 보여주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2000/08/01 00:57 2000/08/01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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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사랑의 목적은 사람 '그 자체'입니다 (2000. 8.)

/ 김용주


한 공동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몇 개의 작은 성경 공부 모임이 있었고, 각자의 모임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이들이 따로 모여서 함께 공부도 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누고 기도도 하는,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나누는 이야기들 중에서는 모임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 날은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타인에게 먼저 상처주는 말을 하여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의 행동으로 인해 모임의 몇몇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모임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지 않게 되었고 어느새 그 자신도 서서히 모임에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날 모임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연락을 하여 다시 그가 모임에 나오게 하기로 어렵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났습니다. 그 사람은 갑자기 모임의 사람들에게 많은 연락을 받게 되었고, 그 모임의 사람들의 격려와 함께 그가 자신에게도 참 소중한 사람이라는 고백들을 듣게 되자 그의 마음은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락을 해 준 사람들이 너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이지요. 그는 모임에 있는 다수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가치있는 대접을 받고 있는 것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얼마 후 다시 모임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다시 모임에 나오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시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애정어린 말들을 하던 사람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없게 되자 그 사람은 당황하였습니다. 모임을 떠나 있었을 때 그렇게 애타게 자신을 기다렸던 사람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얼마 후에 그는 모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행동들은, 자신이 없을 때 그 모임에서 결정했던 하나의 '사안'이었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목적은 '그 사람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아니라 '그 모임에 나오게 하는 것' 자체였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더 큰 좌절감과 상처를 가지고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신영복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진실되지 않은 위로는 또다른 절망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영혼을, 그 영혼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조직의 논리만을 앞세운 공동체는 종교라는 굴레를 넘어서서 보더라도 하나의 큰 재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공동체에서 동료로부터 그런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곤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나를 끼워 주는 것 같아. 나를 진정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곳에 속해있기 때문에 대접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아."

오래 전에 다니던 공장에서는 한 친구가 손을 다쳤었습니다. 그 때 그 공장의 관리부장이라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빨리 나아야지. 자네가 일을 비우면 공장이 얼마나 손해를 보는데. 오래 쉴 거면 다른 사람을 구할테니 왠만하면 나오라고."

바로 나 자신의 주변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발견합니다. 나에게 효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가까이 가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며, 내가 속한 하나의 모임에서도 그 모임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한 '수단'으로 동료들을 대하고 있는, 정작 진정한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버린 저의 인간 관계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아가 그러한 그릇된 사고의 시작이, 사람을 단순한 효용적 잣대로만 평가하여 결국에는 장애인을 무시하고 소외된 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그릇된 사회 구조를 와해시키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그런 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잘못된 밑거름이 되리라는 생각에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창조주가 가치있게 창조하신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000/08/01 00:56 2000/08/01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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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낮아진다는 것..." (2000. 5.)
/ 김용주


요사이 많이 분주한 편입니다. 우리 기관에 새로운 기관장이 부임했기 때문입니다. 기관장이 묵을 "관사"를 삼일 째 수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속실은 새로운 기관장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합니다. 청의 깨끗한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많은 부서들도 근무 외에 많은 시간을 환경 정리에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기관 앞에는 항상 경구를 앞에 써 붙이곤 합니다. 청소를 하다가 문득 눈 앞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라!"

마치 얼핏 보면 성경의 한 구절과도 같은 이 말은 나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습니다. 이 말에 새겨진 그릇된 가치관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한 숨을 쉬게 됩니다.

'이 말은 많은 관료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말의 이면에는, 종국에는 군림을 하려는, 평안과 향락이라는 삶의 목표를 위해 지금은 고생하라는 그릇된 논리가 숨어있음을 발견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끊임없는 노력과 낮은 자로의 삶이 그 자체로서가 목적이 아닌, 더 형이하학적이고 소인배적인 이기를 위한 권력사용의 수단임을 말하고 있는 이 시대의 그릇된 경구가 나를 몹시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항상 가장 낮은 곳에 있어야 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자리는 결코 높을 곳을 오르기 위한 발판도 아니요,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가치 뿐인 곳도 아닙니다. 낮은 자로의 삶. 항상 낮은 자리에 있음으로 주변의 어려움을 읽어낼 줄 알며 그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려는 "더불어 삶"을 위한 낮아짐이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막 노동을 해 본 사람만이 그 일의 어려움을 알며, 집안 일을 도와주는 가장만이 아내의 수고를 아는 법인 것 같습니다. 또한 주변의 어려움을 아는 이들만이 진정 서로를 위한 작지만 소중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나의 삶도 더 높은 고지를 바라보며 주변의 인간 관계를 "수단화"하는 것이 아닌, 권력 지향적이며 목표 중심, 업적의 성취 중심으로써의 삶이 아닌, 내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아파하고 더불어 웃을 수 있는 삶을, 나의 직업과 나의 성취한 일련의 업적들이 모두 그들에게 환원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더 친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관계론"적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2000/05/01 00:55 2000/05/0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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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모조미학 (模造美學) (2000. 4.)
/ 김용주


얼마 전 할머니께서 조화(造花)를 만드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홀로 지내셔야 하는 적적함을 견디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라는 생각에 어머니와 함께 마음 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할머니가 손수 만드신 꽃을 보내 오셔서 오랜 만에 집안에 꽃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걸음만 뒤에서 본다면 마치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세련된 꽃의 생기있음에 자주 놀라곤 합니다.

하루는 방 안을 정리하다가 너무나 삭막해져 있는 내 주변을 보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와 그 주변 도구들, 전화기, 그밖의 여러 전자 제품들, 그리고 난해한 책들로 수북히 쌓여있는 제 방에서 인간의 정서를 느끼기엔 너무 모자람이 많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제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다름아닌 가짜 꽃들이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 꽃꽂이를 해 놓으면 내가 원하는 임의대로의 완벽한 미(美)를 갖출 수 있고 물을 주지 않아도 되고 시간이 지난다고 지지도 않는 꽃을 생각하니, 작은 노력으로도 좋은 볼거리를 제공할 그것의 효용에 마음이 "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 분주히 꽃을 놓을 자리를 생각하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나의 어리석음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방 안에 인간적 정서를 회복하기 위해 기껏 궁리한 것이 모조품이라는. 그 희한한 모순성을 가지고도 스스로에게 흐뭇해함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생화와 모양이 비슷하면서 어떠한 정성없이도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을 탐하였다는 생각, 매일 정성을 들여 물을 주고 햇볕을 쬐여 주어야만 되는, 그 "당연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꽃가꿈의 기본적 소양없이 그 결과적 미학만을 추구하였던 저의 속물 근성에 저를 심하게 질책하였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인의 습성에 많이 젖어들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현대적 사고가 모두 이기적이고 기계적이고 냉정하다는 식의 극단적 사고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간혹 아무런 여과없이 베여드는 현대적 가치들은 수시로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닌지. 특히나 이른바 모조미학이라는 이름아래 우리가 얻고자하는 극단적 효용론과 속도로 대표되는 그 내부적 가치의 간과성은 비판이라는 이름아래 재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관계란 것도 수많은 관심과 대화 속에서 그 소중함을 체험하게 되는데 적은 투자로 큰 가치를 누리려는 현대의 어리석은, 그러나 당연시되고 있는 그 모순적 철학들을 이제는 지양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닌지...

어릴 적 화단에 꽃을 심은 적이 있습니다. 그 씨앗부터 심어서 줄기가 자라고, 어느 덧 꽃대가 나온 뒤, 그 기나긴 여정의 끝에 만나게 된 꽃의 만발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조바심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투정하듯 '내일은 꽃이 필까'라는 중얼거림 속에 기다림을 배우고 매일 그 꽃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사랑으로 보살핌이 종국에 그 원색적 아름다움을 안겨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 쏟은 정성들과 하루하루의 진일보했던 시간들을 통틀어 얻게 된, 나의 정성에 대한 "꽃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더 큰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었다 하겠습니다.

오랜 만에 꽃씨를 사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00/03/31 00:53 2000/03/31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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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도서관 속의 "창백한 지성" (2000. 2.)
/ 김용주


"이런데서 책이나 실컷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가까운 공과 대학원생과 함께 도서관을 갔다가 나오면서 내뱉은 그의 말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비전(vision)이라기 보다는 하소연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대학원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진로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그였기에 비록 그의 말이 저의 생각에 반(反)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끝내 마음 속에 있던 생각들을 그 앞에 속시원히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동상이몽이라 했던가, 함께 길을 걸으면서 저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들이 그의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서관 안에 있을 거라면 책은 무슨 필요인가?'

그는 편안한 의자에서 지적 유희를 즐기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밖에 있는 어렵고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문학과 사상이라는 심오하고 고풍스런 사고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타인에게 자신의 독서량을 자랑하며 상대의 지식을 자신의 화려한 문체로 누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까지 비약하지는 않더라도 도서관의 공무원처럼 앉아서 그 곳을 관장하고 틈틈히 책읽는 문화 생활을 즐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의 책 읽기가 그러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의 짧은 대학 생활은 그야말로 독서를 위한 독서, 지식을 위한 지식쌓기에 골몰하였던, 철없고 목표없는 학생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영복 교수가 감옥 생활을 하던 중의 이야기입니다. 집짓는 일을 하던 노인과 대화할 일이 있어서 한참을 얘기하는 도중 그 분이 집을 그리는 것을 보고 신영복 교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고, 기둥을 그리고, 문짝을 그리고, 주춧돌을 그리는 것에 익숙해 있었지만 그 분은 바닥에 주춧돌부터 그림으로 집을 완성해 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신 교수는 그 분이 지붕을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그림이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면서 말하길, 아무도 집을 지을 때 지붕부터 만들지 않음에도 꽤나 '먹물'이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그 기본적인 이해없이 집을 마구 그려내는 것이, 하나의 위선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신영복 교수는 그 무식하지만 "집그리기를 바로 하는" 노인을 통해 이제껏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지성, 그야말로 창백한 백면서생의 어설픈 지식을 자각하는 하나의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현대는 책으로 지식을 얻는 일에 힘쓰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한 달에 평균적으로 0.8권의 책을 읽는다는 최근의 통계를 접할 때, 우리의 지식과 목표들이 희미해져감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자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적 유희로서의 이른바 '도서관 속에 갇힌 창백한 지성'으로서의 책 읽기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독서가 종국에는 우리의 정서를 바르게 가꾸어 주고, 또한 탁월한 지적 업적들을 섭렵함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그 지식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어야 하리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더불어 그 지식의 소산들은 모두가, 정작 그 효용들을 누려야 할 당사자인 '사람'을 소외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진단처럼 생산물이 그것을 생산한 사람과 소외되어 결국 인간들 사이에 소외를 조장하는 냉정한 현대 산업화의 쓴 열매들을 거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테크놀로지의 부작용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자문도 해봅니다. 신이 주신 삶과 그가 창조한 모든 창조물들이 서로 인격적으로 사귀고, 그 안에서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의미에서의 지식의 진보와 향유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아닌가... 깊이있게 되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2000/02/01 00:52 2000/02/0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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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매일 부딪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2000. 1.)

/ 김용주


얼마 전 용무가 있어서 의료보험 관리공단에 갔었습니다. 용무란 것이, 아는 분의 동생이 직장을 그만 두어서 그 분의 의료보험에 편입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에 지역의료보험과 공무원 의료보험관리공단이 통합된 데에다가 부분적인 파업이 이루어져 사무실 안은 밀린 민원인들로 가득하였습니다. 뒤에서 줄을 서 있는데 앞에서 작게 다투는 듯 하였습니다. 민원인은 관공서가 하나같이 불친절하다는 식으로 비난하였고 담당자도 얼굴이 붉어진 채, 화를 삭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구비 서류를 다 챙겨오지 않아서 발급이 되지 않자, 꽤 멀리서 온 민원인이 허무한 감정과 답답한 마음에 던진 하소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장 한 가운데에 온 것처럼 시끄러운 가운데 모두가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가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0여분 즈음 지났을까...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담당하시는 여자분은 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간단히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사람을 대할 때, 약간의 장난기가 있는 저는 물끄러미 그 분을 쳐다보았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빨리 대답을 하지 않자 그 분은 얼굴을 들어 저를 잠시 바라보았고, 우리는 미소섞인 눈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것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요...이 분이 얼마 전에 직장을 그만 두셨거든요..."
"아 예, 가져오신 서류 좀 주시겠어요?"

조금은 흥분했던 얼굴이 가라앉는 듯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용무로 어떤 장소를 방문하여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일이 이루어지는 동안 침묵하곤 합니다. 아마 대개는 어서 빨리 일을 처리하고 그 장소를 나올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득, 그 분의 앞에 있는 푸른 빛의 녹차 잔을 발견했습니다. "녹차 좋아하세요?" 웃으면서 물어보자 그 분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가 이내 같이 웃으며, "아니요, 감기 때문에요"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감기 걸린 지 오래 되셨어요?"
"아 예, 한 3주 정도..."
"학원에서 선생님이 그러는데 오렌지 쥬스를 자주 마시고, 충분하게 잠을 자는 게 가장 중요하대요. 민간요법이라나...물론, 녹차도 좋지만..."
"아...예"

그 때 잠시 서로를 쳐다 보았습니다. 아마 우리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은 저를 민원인이 아닌 한 사람 그 자체로, 저도 그 분을 제 일을 처리하기 위한 담당자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임을 발견한 것이겠지요.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이 처리되는 동안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이 유쾌한 대화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언젠가 '소외'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는 관계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목적 중심, 과업 성취 중심의 사회란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그 쌀 한톨 한톨 정성스레 수확한 농민의 수고를 잊었고, 내가 하는 일들의 혜택을 입을 사람들은 정작 소외시킨 채 단지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아저씨는 단지 나를 목적지로 이동시켜주는 도구이며, 수퍼마켓의 카운터에 서 있는 점원은 내가 산 물건을 계산해 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던 것이지요. 하루에도 수백명의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도 그들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마치 장애물 피해가듯 길을 걷고 있는 제 모습에 크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한 동네에 사는 이웃과도 같은 길을 걸어 내려 오면서도 한 마디조차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속에 진정한 삶의 가치가 있을까하는 반성도 해봅니다.

그렇게 그 건물 밖을 나서면서 다시 한 번 저 자신에게 소리쳐 보았습니다.

"매일 부딪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버스에 오르면서 문득 기사 아저씨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의 작은 용기와 더불어 입을 떼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내리는 길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내리는 저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
2000/01/01 00:51 2000/01/01 0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