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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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8)
- 신앙과 삶, 그 갈증에 대하여

 

 

신앙과 삶
내게 기독교는 말과 글의 종교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나는 목사님의 설교와 주기적으로 읽는 성경에 매우 익숙하다. 내가 회심을 하게 된 계기 중 하나도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면서였다. 나는 그가 말하는 하나님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고 남은 부분들을 읽기도 했었다. 사실 교회를 나가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목사님의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서임을 부인할 수 없다. 목사님의 설교가 좋으면 주일 하루가 뿌듯하고 가슴이 뭉클하지만, 설교가 성경을 벗어나거나 빈틈이 보인다 싶으면 마음이 무겁고 하루가 심란하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기독교는 내 머리 속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영적인 종교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하지만 내가 껄끄럽게 느끼는 나의 종교성은 한국 기독교의 그것과 흡사하다.

한동안 나는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일까 고민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앙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고 설교도 많이 들었다. 사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는데 지식, 지각의 영역이 신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신앙과 삶, 즉 신앙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대충 설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전히 갈증이 난다. 왜일까.


논쟁 속 사람들, 공동체 속 사람들
글을 쓰다 보면, 특히 반론이나 논쟁 글을 쓰다 보면 반대 의견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흥분하여 망발을 하거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신의 말을 반복하곤 한다. 난 그런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면 비판의 대상이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논리임을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다. 때로는 그런 노력들이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때론 평행선을 달리기도 했다. 몇몇의 심한 경우에는 권위를 내세워 협박을 하기도 했고, 때론 비열한 방법으로 대응을 해대기도 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교양이 없는 건지, 사람들이 보수적이라서 그런 건지. 어쨌거나 나는 감정이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글쓰기에 충실 하려고 노력했고 그 이상은 내 영역이 아니겠거니 했다.

글뿐이겠는가. 여러 종류의 공동체에 속해있다 보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교회에서는 어떤가. 처음에는 상냥하게 웃음으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면서 왕래를 하며 친절을 베풀다가도 진보, 보수와 같은 신앙의 색깔이나 성격, 정서적인 이유로 패가 갈리기도 한다. 한 번 벌어진 서먹함은 이내 깊게 골을 만들고 어느덧 ‘우리들’에서 ‘그들과 우리’로 지칭하는 단어들이 바뀐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주중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야 하는 직장인들 입장에서 그들의 ‘인간 관계’는 회사의 입사, 퇴사의 주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학생 때는 몰랐는데 회사에 들어오니 별별 정말 희한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흔히 하는 말이다. 회의를 하면 엄한 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해 비위를 건드리는 사람들도 있다. 아랫사람을 교묘한 방식으로 괴롭히는 상사도 있고 윗사람에게 잔머리를 굴려가며 뒤통수를 치는 조수들도 있다. 가족은 또 어떤가. 가장 소중하게 다뤄져야 할 구성원들 서로가 진저리를 치며 속속들이 알고 있는 서로의 약한 부분을 비난하거나 원망하기가 더 쉽다. 그래서 가족은 ‘웬수’라고 했던가.


스탠다드, 예절, 에티켓
나는 사람들의 행동에 어떤 표준(Standard)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예절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에티켓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흔히들 말하듯 전화 예절, 화장실 예절, 지하철 예절처럼 인간 예절 혹은 대인관계의 예절 같은 것이 표준처럼 작동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겐 너무 명확해 보이는 선악의 문제가 세세한 일상과 인간 관계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표준을 제시하고 숙지시킬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오만한 생각 말이다.

한때 과학철학을 공부하다가 흥미롭게 읽은 글 중에 빈학파(Vienna Circle)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을 읽고 학문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다. 그래서 학문의 구획을 정함에 있어서 논리적, 과학적이지 않은 명제들을 제외시키고 검증된 진리들로만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우리가 주지하듯이 결국 그들은 이러한 구획의 문제(Demarcation Problem)을 명쾌히 해결하지 못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의 가설을 수정하였는데, 그는 말년에 언어도 구체적인 맥락에서 쓰여질 때 의미가 있고, 마치 게임처럼 상황과 규칙에 지배를 받는다는 이른바 ‘언어게임 이론’을 전개하였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인간 행동에 대한 어떤 표준이 있다는, 혹은 있어야 한다는 나의 이상적인 생각-사람들의 행동에서 바른 것과 그른 것을 쉽게 골라내려 했던 생각-을 버렸다.


기독교의 본질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내게 있어서 기독교는 말과 글의 종교다. 나는 말과 글에 의해 종교성을 학습했고 그러한 말과 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단하곤 했다. 때때로 나는 주변 사람들의 과한 말과 행동을 불쾌하게 여겼고 그들을 성경의 틀, 혹은 내가 가진 가치관의 틀에 맞춰서 변화시키고 싶어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소신과 종교적 잣대에 걸맞게 산 것도 아니었다. 난 몸을 사리고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나의 기준대로 잘 살아온 것 같진 않다. 그런데도 나는 이러한 이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자체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사람은 모두 죄를 짓고 살아가고 화를 잘 내고, 상처를 받으면 왜곡된다. 부모와 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또한 쉽지 않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특수성을 외면하고 어떤 잣대에 의해 사람들을 규정하려 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조금씩 발견해간다.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고 회복하기 힘든 상처들이 있다. 내가 쉽게 재단하고 싶은 타인의 모습 속엔 그런 나약함과 상처, 그리고 왜곡되었지만 자신에겐 익숙한 습관들이 숨겨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기대에 합당한 모범적 인간들을 양성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모나고 부족한 사람들이 타인의 죄를 용서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이 매일 일어나는 천국의 현현(顯現)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러한 고백이 토론과 논쟁 등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려 진리로 다가가려는 열망의 의미 없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진리와 지성의 추구는 합당하지만 기독교는 그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특별히 나는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있음을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살다 보면, 마음 속으로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생긴다. 또한 반대로 절대 용서받을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되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은 머리 속에서만 굴러다니는 망상이 아니라 살면서 겪게 되는 관계의 발자취이자 쓰디쓴 결과들이다. 내게 있어 기독교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그들의 상처와 한계, 그리고 환경들을 깊이 공감하며 그들과 동행하는 일이리란 생각이 든다. 또한 나와 다른 부분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나에게 행한 악행들을 용서하며 나또한 나의 부족한 행동들을 매순간 고백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리라. (끝)


**월간 복음과상황 12월호 기고글.

2008/12/01 00:09 2008/12/0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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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7)
- 언행 일치와 언행 해체 사이에서

/김용주


두 사람에 관한 기억
시간이 지나 교제는 끊어졌지만 가끔씩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 한 분은 <복음과상황>에서 일하시다가 지금은 청년목회자연합(Young2080)의 문서출판본부의 이은섭 팀장이다. 한창 복상 독자모임이 활발하던 시절, 그 분 집에서 모임을 했던 적이 있었다. 잡지와 교계에 대해 한참을 열심히 토론을 하다가 밤이 늦었다. 간단한 다과를 한 후라 정리를 급하게 하고 가려고 주섬주섬 음식을 정리하고 있었다. 비닐에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데, 그는 내 비닐을 낚아채서는 다시 일일이 분리 수거에 들어갔다. 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 마음이 바쁘기도 했고, 사실 분리수거를 그렇게 철저하게 하며 살 지도 않았던 터라 그의 행동이 조금 낯설고 불편했다. 그는 과일 껍질과 나무 젓가락, 그리고 각종 일회용 접시에 하다못해 프린트물에 박힌 철심까지 다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 그가 내게 해준 환경오염에 대한 다소 투박했던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분리수거가 내게는 낯설게 다가온 사실이 많이 부끄러웠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날 처음으로 나는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 생각과 실제 습관 사이의 괴리감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더 있다. 독자 모임 때 만났던 ‘그람시’라는 아이디를 쓰는 형이었다. 그에 대한 몇몇 기억이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간식을 사 온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좌파였고 신자유주의를 반대했던 그는 간식도 동네 노점상에서 파는 것들을 사왔다. 그 때 그 음식이 뻥튀기였는지 붕어빵이었는지, 혹은 튀김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가 겸연쩍게 웃으며 ‘동네 장사하는 분들의 주머니를 채워드려야 한다’는 말은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퇴근 할 때 나는 당산역에서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역의 오른쪽에는 맥도날드와 롯데리아가 있고 오른쪽에는 포장마차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허기진 날에는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돌아보다가 그를 떠올리며 노점상 쪽을 향하곤 한다.


언행일치? 언행해체!
모 방송 개그 프로그램 중에 ‘언행일치’라는 코너가 있었다. 아내와 즐겨보곤 했었는데 그 코너의 개그 코드는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넘어 몸과 말의 ‘해체’에 가까웠다. 가족으로 분장한 그들은 서로가 대화를 하는 중에도 대화와는 전혀 상관 없는 몸개그를 선보였고 그런 그들의 스타일이 참 기발하단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포스트모던’한 개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요즘의 우리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어떤 독립적인 결정자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스스로를 여러 가지 단편적인 경험과 정보, 그리고 습속의 조합 내지는 혼합유기체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특별히 고민하고 살지 않은 많은 개인들은, 어찌 보면 ‘몸개그’에 가까운 이른바 ‘언행해체 현상’을 자주 경험하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일례로 이제는 그 논의가 시들해졌지만 ‘보보스’ 논쟁이 그랬다. 강준만에 따르면, 데이빗 브룩스가 그의 책에서 처음 언급한 보보스(Bobos)는 미국의 부르주아이자 좌파-엘리트 그룹으로 권력과 금력을 누리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 ‘리무진 진보주의자’라고도 불린다. 좌파-엘리트인 그들 대부분인 명문대학을 나오고 유복한 생활을 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나 소수 세력의 대변자로 행세하여 ‘좌파처럼 생각하고 우파처럼 생활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자본주의 축복을 한껏 즐기면서 혁명 투사 체 게바라를 좋아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그들은, 그 존재 자체가 일종의 퓨전 현상이다. 나는 그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영향으로 인해 이들에 대한 평가가 유보되거나 혹은 매체가 나서서 구매의 주체인 그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현상이 신기했다. 대외적인, 그리고 거시적인 자신의 주장이 소외된 사회 계층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소신과 상반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런 삶 자체가 어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 나라의 젊은 부자들은 그들의 ‘관(觀)’보다는 ‘스타일’을 흉내낸다는 것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들의 삶이 어떤 의미에선 퓨전이라기 보다는 ‘해체’에 가깝지 않은가.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마음이 씁쓸해진다. ‘언행일치’의 몸개그에 한껏 웃으며, ‘보보스’같은 좌파 엘리트들을 위선자라며 정죄까지는 안 해도 어느 정도 불편하게 여기는 나도 사실은 여전히 환경 문제에 둔감하고, 가격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슈퍼마켓과 납품업체들의 목을 조여대는 대형할인매장에서 별 고민 없이 물건을 구입한다. 그 뿐이랴. 버거킹 햄버거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외국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을 즐기며,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드라마에 열광하며 살아간다. 좌파 지식인들처럼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며 살 자신은 없어도 김진석의 책 제목처럼 이른바 ‘기우뚱한 균형’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름의 비판적인 잣대를 들이대보려 하지만, 내 미시적인 삶 가운데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파편적인 기호들과 습속들은 지속적으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일상 속의 일정 부분은 통일된 자아를 소유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일정 부분은 내 의도와 기대와는 달리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잔존한다.

꿈은 해결되지 않은 현실의 문제가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것이라고들 한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은 교제조차 없어진 과거의 사람들을 회상하고 자꾸 돌이키는 건 지금의 내 모습에 대한 불편함과 부끄러움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내면 때문일 것이다. 때로 내뱉는 주변 사람들의 한 마디가 그 사람의 일관된 오랜 습관처럼 느껴질 때 나는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된다. 설령 그가 바른 삶을 살지 않을 때조차도 자신의 말과 원칙에 자신의 삶을 길들이는 사람들을 통해 나는 자주 나를 반추한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개중에는 부러울 만큼 많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도 있고 멘토로 삼을 만큼 존경할만한 선생도 있다. 하지만, 가끔씩 회사에서 프린트물에 박힌 철심을 떼어낼 때마다, 퇴근길에 맥도날드와 호떡집 골목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그 두 사람이 떠오르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끝)

*월간 <복음과상황> 08년 11월호 기고글.
2008/11/01 00:07 2008/11/0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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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6)
- ‘나쁜 그리스도인’

/김용주


 
<나쁜 그리스도인>을 읽고
제 목부터가 눈에 확 띄는 책이었다. 그간 기독교 비판서적들은 참으로 많았다. 예수 출생의 비밀을 캐낸다거나, 역사 속의 기독교 죄악들을 담은 책들로부터 최근에는 안티 기독교 카페에서 출판한 책까지, 기독교를 비판하는 책들은 호기심에 사서 읽기는 했어도 큰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해왔다. 물론 이 말이, 내가 몸담고 있는 복음주의권을 향한 세상의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읽게 된 <나쁜 그리스도인 Unchristian>은 내가 그간 헛다리를 짚은 듯이 느꼈던 복음주의권 비판이 제대로 이뤄진 책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곧 교계에서 계속해서 들을 듯 하니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몇 부분만 인용할까 한다.

“외부인들은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가장 큰 반감을 보였다. ‘복음주의자’라는 표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주의자’에 대해 유별날 정도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40쪽) “외부인들이 그리스도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에게 반감을 느끼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어떤 신학적 입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잘난 척’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외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41쪽) “이번 조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봉사와 온정과 겸손과 용서와 인내와 친절과 화평과 기쁨과 선함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61쪽)

아직 절반도 채 읽지 않은 이 책이 내겐, 송곳이 심장을 향해 깊이 박힌 듯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다. 이번에는 내가 할 변명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아내를 심하게 학대를 하면서도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아내 사랑을 말하는 남편, 미혼모에게 남편 없음을 지적하며 매사에 충고를 하지만 그 충고대로 살지 못하는 교인들, 침례를 고집하다가 좋은 조건의 장로교회로 이직한 후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으로도 세례가 가능하다고 말을 바꾼 목사를 경험한 비기독교인들의 인터뷰 내용도 등장한다. 이는 비단 미국의 복음주의권이 이야기만이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라고 다른가.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복음주의권이라고 다른가. 그 안에 속해 있는 나의 신앙은 또 얼마나 구별되는가.


보수 기독교를 넘어
나 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다. 교회의 목사님은 항상 ‘국어대사전’만한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셨고, 그냥 자기 곁을 지나가는 학생들에게는 “넌 담임목사님에게 인사하는 법도 모르냐? 너 누구네집 아들이니?”라고 호통을 치곤 했다. 당시에도 흔하지 않던 외제차를 몰고 다녔고 자녀들은 모두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신학생이 되어 돌아왔다. 교회 안에서는 소그룹 성경공부를 하는 교구가 있으면 말씀을 함부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고 그룹의 리더를 교회에서 쫓아냈고, 매년 열리는 부흥회에서는 강사들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사랑하셔서 건축의 마음을 주셨다”며 헌금을 강요하기도 했다. 지교회뿐만이 아니었다. 이 나라의 기독는 조찬기도회에서 축복기도를 드릴만큼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옹호했고 그 울타리 안에서 많은 유익을 누리며 급성장해왔다.

그런 배경 때문에 나는 내가 ‘복음주의자’로 거듭난 것을 너무나 다행스럽게 여겼다. 복음을 개인구원의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분의 통치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기독교 세계관과, 로잔 언약으로 대변되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이른바 ‘양날개론’은 그간 나의 신앙의 갈증들을 말끔히 해소해 줄만큼 시원했었다. 프란시스 쉐퍼로 시작된 기독교 사상가들의 지성은 나의 지적 갈급함과 신앙적 회의, 의심을 긍정하고 진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만큼 복음주의는 내게, 과거 부정적 환경 속에 편견으로 다가왔던 기독교를 구원시켰다. 그 때부터 나는 신학과 정치, 그리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고, 특히 마음이 맞는 이들과 신학공부도 하고 발제도 하면서 사회와 교계에 쓴소리와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한국의 복음주의자는 다른가
하 지만 나는 내 비판 의식에 조금씩 회의감이 들고 있다. 그 본질적인 원인을 솔직히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바로 보게 되었다. 그것은 앞서 책에서도 말한 복음주의자들의 ‘잘난 척’이다. 내가 자랑하는 복음주의는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벗어나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 비판의식 자체에 안주하고 그것만을 즐기며 타인에게,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신학과 사상의 난해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잘난 척을 일삼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내가 경험하는 복음주의권의 모습은 그렇다. 이전에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 간신히 제본하여 읽던 책들도 이제는 번역의 질을 따질 정도로 완성도 있게 출판되는 축복을 누리지만, 또한 책이 출판되자마자 여기 저기서 회자되어 예리하고 창의적인 분석의 글들이 실시간으로 온라인 사이트 여기저기에 올라오지만, 사실상 그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아예 그 이야기 자체를 알아들을 수 있을만한 비그리스도인은 별로 없다. 나의 신앙에 관심을 가졌던 한 지인은 내가 이야기하는 복음주의나 기독교 세계관의 난해함에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나는 이제 스터디 모임을 하지 않는다. 기독교 서적도 잘 읽지 않는다. 난 요즘 어떤 기독교 사상가나 매체보다, 김용택 시인 같은 이의 책이 좋고 김장훈 같은 연예인의 기사가 좋다. ‘말’에 지나치게 경도된 복음주의자인 내가 부끄럽다. 기독 지성은 중요하지만 나부터가 비판의식과 사고에 함몰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향기’, ‘사랑’, ‘은혜’보다는 ‘날카로움’, ‘탁월함’, ‘잘남’, ‘해박함’에 경도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본다. 비그리스도인들이 보수 기독인들을 냉소적으로 대할 때, 같은 목소리로 그들을 비판하는 나를 그들은 어떻게 볼까. 보수 기독인과는 구별된 복음주의자로 칭찬할까. 의문이다. 그냥 행함보단 말이 많고 까칠하고 잘난 척하는 비슷한 류로 보지는 않을까. (끝)


*월간 <복음과상황> 10월호 기고글
2008/10/01 00:07 2008/10/0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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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5)
- 직장인과 기독인 사이에서

 


어느 날 상사가 내게 주말엔 뭘 하고 지내냐고 묻길래 별 생각 없이 일요일엔 교회를 간다고 했다. 그러자 대뜸 실눈을 뜨며 "너 그런 것도 하냐?"라며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반응으로 인해 하루 종일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단순히 생각하자면 교회에는 뭐하러 귀찮게 다니냐고 물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나 같은 부류가 교회를 다닐 거라는 건 좀 의외라는 반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상사는 나 같은 부류는 어떤 부류라고 생각한 걸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는 술자리를 마다 않는 부류로 생각했을까? 아님, 식사 시간에 밥을 앞에 두고 잠시 묵념조차 하지 않는 부류로? 솔직히 그런 것보다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삶에서는 별로 티가 나지 않는 부류로 보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덜컥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분은 기독인에 대한 안 좋은 면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다. 해서 그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곤 했는데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했으니 내가 유별나 보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비친 기독인은 어떤 모습일까.

 

때로 주변을 보면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부류의 직장인들을 만난다. 같은 선교단체 출신의 학사들을 만나면 주일성수나 경건생활을 규칙적으로 못한 지 오래되었다며 학생 때보다 망가져서 산다는 푸념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주일에 교회에도 잘 가고 회사에서 신우회 활동도 열심히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식사 시간을 쪼개어 말씀을 나누고 퇴근 버스 안에서도 성경을 읽는다. 하지만 나만의 느낌일까. 난 교회를 다닌다고 자처하는 많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혹은 교회의 지체들에게서 뭐라고 딱히 꼬집을 수 없는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이기적이라고 할까, 혹은 냉정하다고 할까. 아무튼 그들은 쉽게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동료들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법이 없다. 주변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하겠다는 말로 슬쩍 발을 빼기는 해도, 즉시 달려가 살펴봐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인색한 경우가 많다. 또한 사내의 불합리한 구조적인 문제나 집단 행동에 있어 자주 방관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업무를 하는 데에 있어 책임감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종종 듣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내가 안 좋은 면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나는 내 눈보다 더 부정적으로 기독인들을 대하는 직장의 동료들, 상사들과 함께 사회 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를 다닌다고 말한 그 날 이후로 나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정작 그 분에게 교회 다니는 후배 사원인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 날 이후로 나는 회사생활 5년 만에 처음으로 먼 발치에서 나란 사람을 돌아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눈살을 찌푸리는 많은 기독 직장인들과 구별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가. 사실 자신이 없다. 물론 나는 튀는 사원임에는 분명하다. 회사에서 있었던 진급자 회식날, 여성 도우미들이 나오는 유흥주점에서 한 턱을 크게 내라는 회식 분위기에서 가족과 자녀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식사 모임으로 하지 않으면 회식비를 안 내겠다고 우겨서 결국 진급자 축하 회식날 상사들의 가족들과 함께 주말 식사를 했던 적도 있었고, 회의 때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의사 결정에는 굳이 나서서 따져대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내에서 경조사가 생기면 항상 어디든지 가서 경사면 축하해주고 조사면 위로해주는 동료들도 많은데 나는 자주 그러지 못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늦게까지 일을 마치지 못해도 나는 내 업무가 끝나면 언제고 별 고민 없이 퇴근했다. 솔직히 그간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어필은 많이 했어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를 희생해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비교적 진보적인 신앙인들은 역으로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세속적인’ 직원들을 오히려 직장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부류로 취급하기도 하니, 사실 그간에는 회사 생활에서 한 발을 적당히 빼고 지내는 게 올바른 행동 같았다. 이 세상 집은 내 집 아니듯 이 직장도 내 진정한 삶의 터전이 아니리라!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서 이는 회사에 대한 희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일터에 속한 공동체 일원들에 대한 희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체 속에서 기독인인 나의 자리 매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초 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많은 이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생활을 보며 때론 놀라고 때론 칭송하며 그 무리를 따르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공유했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예수의 도를 따라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낼 필요 없이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높은 도덕성과 헌신, 그리고 사랑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내 일터, 내가 속한 지역 사회는 어떤가. 그들은 내가 전도를 하고 다니지 않아도 신앙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나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나의 높은 도덕성으로 인해 매 순간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불합리한 업무에 또박또박 불만을 토로하기는 잘 하지만, 여러 일들로 힘들어 하는 주변 동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는 노력 없이 이름만 몇 번 불러대는 형식적인 기도로 불편한 마음을 털어버리곤 하는 나와 같은 기독인에게서 진정 복음을 발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신앙은 삶이자 일상,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예배당에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매일 묵상하고 여기 저기에서 큰 소리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한다 해도, 직장이나 지역 사회, 가정과 같은 일상의 구석 구석에서 섬기며 희생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 서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한 행위임을 실감한다. 굳이 식사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예수에 대해 마치 보험을 팔 듯 입으로 상대방을 설득하지 않아도 기독인의 주변을 통해 그들을 따를 수 있는 신앙의 현장성이 우리 기독 직장인에게는 부족하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교회 다닌다는 나의 고백에 누가 됐든 또다시 내게 “너 그런 것도 하냐?”는 물음을 던질 것이다. (끝)

 

 


*월간 <복음과상황> 08년 8월호 기고글

2008/08/01 00:06 2008/08/0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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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4)
- 직업과 소명 사이에서


예 전에는 더 많이 들었지만 지금도 간간이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듣는 질문이 있다. 자동차회사가 적성에 맞느냐는 거다. 이런 류의 질문은 대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과 친구들도 자주 묻곤 했다. "넌 공대생 같지 않아" 사실이 그랬다. 나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세계관과 기독교 문서운동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교회 목사님은 내가 신학을 할 거라고 생각했고, 선교단체 사람들은 내가 문서사역 내지는 기독 출판계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나 또한 전공필수 과목 외의 선택 과목은 과학철학이나 논리학, 미학 같은 공대생들이 거의 듣지 않는 과목에 시간을 쏟고 있었고, 때때로 기독교 단체들 주변을 기웃거리곤 했다. 내겐 그런 일들이 더 신앙적인 것으로 느껴졌고 다른 무엇보다 더 가치가 있어 보이곤 했다. 물론 전공이 싫었던 건 아니다. 장학생은 아니었지만 매주 해야 하는 과제들은 나름 재미가 있었다. 단지 믿는 사람들이 소위 이야기하듯 이 일이 내 소명은 아니라는 생각,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전공에 몰입할 수 없었고 졸업을 앞두고는 최선을 다하는 일에 자주 머뭇거리곤 했다. 졸업할 시기가 되어 진로를 고민하다가 문득 4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살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옳은 일인지 갈등이 되었다. 나의 신앙적 기준으로 볼 때 나 같은 사람은 대학을 다니면 안 되었다.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학교를 다니지도 못했으면서 4년간 써먹지도 않을 공부를 한 것이니 말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국 나는 대학원을 가기로 했다. 대학원 진학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내겐 4년간의 학문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필요했고 졸업 후, 6년간의 투자에 맞는 전문직을 얻어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그 시간이 내겐 중요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원 생활은 유익했다. 유익했다는 말이 좋았다거나 즐거웠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론에 충실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것에 익숙했다. 글을 쓸 때에도 스토리에 관심이 있지 통계치나 디테일한 부분을 그리 잘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내가 들어간 연구실은 주로 전산설계를 하는 곳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프로그래밍에 할애하곤 했다. 프로그래밍은 흥미로웠다. 사실 내게 모든 학문은 흥미로웠다. 특히 개론 과목들은 언제나 나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석사 1년차에 나는 첫 세미나를 하게 되었고 논문과 책에 나온 자료 구조(data structure)와 컴퓨터 그래픽 알고리즘(algorithm) 몇 가지를 발표했다. 새로운 개념들이 즐비한 논문들에 나는 매혹되었고 발표하는 내내 내가 요약한 발표 자료들과 힘있는 내 목소리가 한 곡의 클래식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갑자기 박사과정 선배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매우 디테일한 질문들이었다. 프로그래밍 환경은 어떤 것인지, 코딩 시에 인터페이스는 어떻게 구현되는지, 데이터가 초과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등등 지금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그런 질문들이었다. 당시에 나는 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게 뭐 대수냐는 류의 대답을 우회적으로 했던 것 같다. 선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해봤어?" 난 논문에 나온 결과들을 다시 읊었고 선배는 다시 되물었다. "네가 직접 코딩해봤냐고." 결국 한 주 뒤에 프로그램을 짜서 다시 발표를 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더 많은 것들을 공부할 수 있을텐데 사소한 코딩에 시간을 쏟는 것이 아까웠지만, 못 믿겠다는 선배의 표정을 바꿔놓고 싶어졌다.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났지만 코딩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방법도 아니고 10여년 전에 이미 완성된 논문 속 알고리즘을 짜는데 한 달이 걸렸다. 알고리즘은 간단해 보였지만 컴퓨터 환경 안에서 구현해야 하는 알고리즘들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윈도우즈 환경에서 입출력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UI(유저 인터페이스)를 구성해야 했고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메모리 관리를 해야 했다. 내 프로그램이 메모리 부족으로 다운되지 않으려면 다른 프로그램의 동작들을 자주 방해했기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과 컴퓨터 메모리를 효과적으로 나눠 쓸 수 있도록 자료 구조를 설계해야 했다. 물론 지금은 컴퓨터 환경이 더 좋아졌고 반복적인 코딩 작업들은 자동화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컴퓨터 안에서 직선 몇 개를 보여주는 데에도 알아야 하는 그래픽 관련 함수들이 많았다. 더욱 당혹스러운 건 한 달 후 시연을 보인 프로그램은 돌발 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갑자기 마우스를 더블 클릭을 한다거나 보이는 창의 사이즈를 키우거나, 데이터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입력하는 경우 프로그램은 오작동했다. 그러한 돌발 상황에 대한 에러 처리 코딩을 매번 해 줘야만 완벽한 프로그램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난 한 달 동안 이 허접한 프로그램과 씨름하고 나서야 박사과정 선배의 "해봤어?"가 마음으로 와 닿았다. 안 해보면 모르는 거다. 난 모르고 있었다.

실행 의 중요성에 대한 맛보기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이론과 개론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내게 대학원 2년이란 기간은 충분치 않아 보였다.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나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결국 나는 2만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했고, 그 2만개의 부품 중 몇 개의 아이템을 설계하는 일을 맡았다. 처음 개발회의에 들어간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회의실에 온 연구원들은 부품들의 배치를 놓고 의견 조율을 하고 있었다. 말이 의견조율이지, 까놓고 말하자면 자기가 설계하고 있는 부품들 간의 간격을 확보하기 위해 대놓고 싸우고 있었다. 자동차 안의 공간은 정해져 있는데 개발 컨셉트에 따라 그 공간 안에서 부품들은 서로의 간격을 정해진 규칙대로 확보해야 한다. 신입 연구원인 나에게 그 회의 광경은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5~6밀리미터 정도의 간격 때문에 머리가 하얀 아저씨들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듯 언성을 높여가며 다투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 키보다도 훨씬 큰 자동차에서 손가락 한 마디조차 안 되는 길이를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 날 나는 사수에게 흔히 하는 말로 엄청 깨졌다. 자기 부품이 못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내 모습에 화가 난 것이다. 그 날 나는 과거 대학원 시절 선배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부품의 치수들은 내 어림짐작보다 더 중요했다. 5밀리미터 간격을 더 두느냐 안 두느냐에 따라 차량 주행 중에 소음이 발생하곤 한다.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도 내가 그렇게 쉽게 생각했던 손가락 한 마디보다 짧은 간격으로 인해서다. 그 뿐이랴. 3D모델로 정교하게 설계하더라도 실제 부품을 만들 때는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금형(金型)에 쇳물을 부어서 식힌 후에 빼내어 완성되는 대부분의 자동차 부품들은 금형의 뽑기 방향에 따라 크기가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이도 반드시 설계자가 고려할 부분이다. 공차 관리도 해야 한다. 0.2밀리미터까지 도면으로 관리하는 공차에 따라 볼트나 너트가 들어가기도 하고 안 들어 가기도 한다. 이런 설계자의 작은 실수들로 인해 부품지원이 늦어져서 결국 차량 제작이 몇 주씩 늦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성능은 배제한 순수 부품의 조립만을 고려한 것이다!

MBTI 성격유형에 따르면 나는 ENTJ(지도자형) 혹은 ENFJ(언변능숙형)에 속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는 가능성 있어 보이는 일들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로 논리를 세우는 일들을 곧잘 했던 것 같다. 창피한 일이지만 때때로 나는 실행해보거나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도 대략 감만 잡히면 마치 모든 것을 겪어본 것처럼 과장하기도 했다. 난 가끔 내가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하여 공과대학으로 진학하지 않았다면, 더욱 허풍이 세져서 말을 과장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내 본성이 그랬다는 말이다. 난 경험하지 않은 일에 있어서조차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는 말을 곧잘 하지만, 사소한 것들을 꼼꼼히 챙기고 작은 일에도 책임감 있게 끝까지 그 일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서툰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상당 부분에서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직업은 최소한 나의 모난 성격을 다듬어 주고 있다. 특히 말단 연구원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마치 내가 CEO라도 된 것처럼 큰 방향이나 설정하고는 사소한 일들에는 의미를 좀처럼 부여하지 않는 내 부족한 모습을 직시하고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내 직업이 천직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내 직업은 공학에 호감을 가지고 전공으로 선택한 데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선택한 직업은 이렇듯 나를 바꿔놓고 있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자리는 내 인격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이며 작은 일에서조차 최선을 다해야 하는 곳임을 조금씩 깨닫는다. 앞으로 펼쳐질 삶의 많은 여정 가운데 나의 선택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떠하든지 말이다. (끝)


*월간 <복음과상황> 7월호 기고글.
2008/07/01 00:05 2008/07/0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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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 (3)
- 손으로 쓴 편지


요즘은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더 이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설가 김훈처럼 연필을 깎아서 원고지에 글을 쓰지 않으며, 굳이 연필로 글을 써야만 고상해 보인다는 생각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음악도 그렇다. LP판으로 듣기를 고집했던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도 CD나 SACD와 같은 진보된 기술에 마음을 열고 있다. 그 뿐인가. 휴대폰은 버스 안에서도 내 위치를 알려 줄 수도 있게 되었고, 이제 영상을 보면서 통화를 하는 시대가 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고속철도로 2-3시간이면 이동이 가능하다. 처음 인터넷에 접속했을 때, MIT나 칼텍 같은 유명한 대학교의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원서로만 보았던 교수의 이름과 수업 커리큘럼, 그리고 참고 도서나 강의안과 같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물론 그 당시의 인터넷 속도는 너무 느려서 문서 파일을 받는 데에만 몇 분이 걸렸지만,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또한 전자메일이 보편화 되어 지방에 있는 친구들이나 미국에 사는 이모에게도 실시간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나는 급속도로 빨라지는 기술의 발전에 비교적 호의적이다. 공학 전공자로서 이전에는 기술이 없어서 구현하지 못했던 많은 현실적인 제한들이 이제는 무의미해졌음을 절감한다. 상상력만 있다면 그것을 실현하기는 오히려 쉬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빠르고 저렴한 방법으로 주변 사람들과 연락할 수 있는 많은 도구들이 생겨나는 것에 감사하기까지 하다. 내 할머니 세대의 어른들은 자식이 이민 가던 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마중을 나선 길에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주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이모나 사촌 동생들을 블로그나 인터넷 공간에서 매일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사진이나 글들을 읽으며 마치 옆에서 그들을 대하듯이 느끼고 경험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친척이 지방에 내려가서 살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용건만 간단히 전하고 끊었고, 더 길게 이야기할 사연이 있으면 편지를 썼다. 편지는 답장을 받는 데에만 열흘이 남짓 걸렸다. 지금은 길을 걷다가도 생각만 나면 부산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대화할 수 있다. 편지를 쓰고 싶다면 인터넷의 우체국 사이트에서 쓴 글을 봉투에 넣어 하루나 이틀 사이로 배달까지 해준다.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지인들의 생일이나 경조일, 그리고 기념일들도 저장해두면 매년 잊어버리지 않고 나에게 그 날짜를 정확하게 알려주기도 한다.

 

허나 이런 기술의 최첨단 시대에도 문제는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연락도구들은 점점 발달하고 있는데 나는 이전보다 더 인간관계가 삭막하게 느껴지고 외로움과 고독감을 심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 익숙한 것들에 더 무심해지기 때문일까. 처음에 환호했던 이메일이나 인터넷 블로그에는 상업적인 글들만 즐비하고 이젠 안부를 이메일로 묻는 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는 기술적 우월성은 사람을 더욱 나태하고 가볍게 만드는 듯 하다.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으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제한된 종이에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허락 받고는, 엽서에 글을 쓰기 전까지 쓸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지극히 절제된 글을 가족들에게 썼다. 그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여건에서 썼던 글들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엽서>를 통해 다시 읽어 보아도 한 줄 한 줄 가슴을 울린다. 내가 매일같이 소리의 속도보다 빠르게 지구의 반대편을 향해 날려보내는 많은 이메일과 정보들 중에도 이런 절제와 진중(鎭重)함이 있었던가. 마치 우리가 제사장 직분을 허락 받은 이후로 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싫어하고 죄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처럼, 더 편해지고 가치 있어 보이는 ‘연락 도구들’은 우리를 서로에 대해 더 무관심한 존재로 만드는 듯 하다.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본 지가 10년이 넘은 것 같다. 아니 특정한 용건 때문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사람을 기뻐하여 사람을 위해 편지를 써 본 지가 참 오래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우정을 나눈 벗들에게. 매일 수많은 말들을 내뱉지만 그것들은 이내 허공으로 사라지고 그런 수많은 말들을 아끼고 아껴서 어떤 공간 안에 빼곡히 담았다가 전해주는 일이 그립다. 우리는 그리운 지인들이 생각나면 단축번호를 눌러서 안부 몇 마디에 수화기를 끊고는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자주 들어가는 인터넷 공간 상의 짧은 댓글들 속에서 그 사람의 인격과 온기를 경험하기도 쉽지 않다. 때때로 지나친 편안함은 도리어 무심함을 가져온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과 속도의 진보는 내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영혼과 사람됨에 해를 끼치는 듯 하다.

 

언제든 손을 뻗으면 어디나 누구에게나 닿을 법한 첨단 환경 속에서도 절제와 진중함을 훈련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한 편의 글을 쓸 때에도 탈고하기 전까지 읽고 고치고 또 읽는 일을 반복하듯,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거는 일도 좀더 준비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묵상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적 여유 속으로 충분히 빠져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성 싶다. 매번 연락 가운데 그런 기다림과 성실함이 마음 속 깊숙이까지 전달된다면, 조금은 드문 지인들의 연락에도 세상살이가 덜 외롭다고 느껴지지 않겠는가. (끝)


*월간 <복음과상황> 2008년 6월호 기고글.

*김용주 님은 현대기아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선행차량의 부품설계 및 해석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블로그(http://myjay.net)를 통해 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꾼다. 그동안 <복음과상황>에 '회색지대 보고서', '도발적인 캠퍼스보기', '세상보기' 등을 연재한 바 있다.
2008/06/01 00:04 2008/06/0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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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2)
- 겸손과 관대함 사이에서


신입사원 시절, 나에게는 '작업복'에 관한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현장 실습을 할 때마다 우리는 작업복을 지급 받았는데, 사내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출근 후에는 그 작업복을 입어야 했다. 대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침에 따라 간부부터 사원까지 동일한 작업복 차림을 한 모습들이 나는 참 좋아 보였다. 물론 작업복 차림이라고 해서 노사간의 위화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게다. 오히려 작업복이 그런 것을 덮기 위한 얄팍한 미봉책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당시에는 ‘현장경영’이라는 모토 아래 직원 모두가 같은 작업복을 입는다는 상징적 의미에 크게 매료되었던 것 같다.


실습 교육이 끝나고 드디어 나는 연구소로 '입성'했다. 팀 배치를 받자 서무 직원이 신입사원들의 상의 사이즈를 다시 쟀고, 당일 저녁 새 작업복이 지급되었다. 거기에는 '기술 연구소'라고 쓰여 있었다. 이는 그 작업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연구소 직원임을 의미했다. 그 날 공교롭게도 내 차례에서 작업복이 바닥났고, 새 작업복을 지급받으려면 최소 1주일은 걸린다는 서무 직원의 설명에 나도 모르게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인식하지 못한 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다른 신입사원들은 모두 연구소용 작업복을 입고 돌아가는데 나만 구별된 작업복을 못 입는다는 사실에 순간 속이 뒤틀렸던 것 같다.


머리 속으로는 '현장경영'이란 모토와 작업복 차림에 큰 의미를 부여했지만, 공장 라인을 탈 때도 영등포시장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판촉 활동을 할 때도 서비스 센터에서 오일을 갈며 기름 때를 묻히고 있을 때에도, 나는 이 일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짧은 기간 동안 단순 반복적인 바닥 일의 맛만 보고 나면 종국에는 보다 중요하고 고차원적인 일을 하는 연구소로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말하기 부끄럽게도 나는 혹여 연구소를 돌아다닐 때 석, 박사 출신의 연구원들이 나를 현장직이나 영업직, 혹은 정비직 사원으로 볼까봐, 그게 그렇게 싫었던 것이다. 대학에 대학원 공부에, 그런 것들이 뭐 대수냐고 말하면서도 내 혈관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미 대접받고 싶었던 것이다. 내 사탕 발림 같은 겸손, '낮아짐'과 같은 단어의 형이상학적 지향성이 실제 삶 속에서는 내 신앙을, 내가 믿는 예수의 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고 내 속의 이런 저런 나쁜 생각을 곰곰이 들여다보니 참으로 부끄러웠다.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싶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세상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엔 내가 최고지/
겸손, 겸손은 힘들어/ 겸손, 겸손은 힘들어/겸손, 겸손은 힘들어/ 겸손은 힘들어”

조 영남 노래 중에 ‘겸손은 힘들어’라는 노랫말이다. 맞는 말이다. 유독 배운 게 많은 사람일수록, 아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겸손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많다. 특히, 요즘과 같이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추면 더욱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과장하거나 속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자기가 가진 것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도록 요구 받는다. 어느 날 팀장님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XX씨, 영어 좀 하나?”라는 질문에, 과장해서 잘난 티를 내야만 외국 업체와 회의 때 주도적인 역할이 주어지는 직장인들에게는, 매사에 겸손하라는 목사님의 설교와 실재 일상의 처세술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점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만 만만하게 보이면 자기 업무조차 마구 떠넘기는 회사의 고참 동료들 사이에서, 자동차 접촉 사고에서 먼저 미안하단 말을 꺼내면 이를 악용하는 상대 운전자들 사이에서, 인터넷을 설치하거나 물건을 환불 받는 등의 서비스 업무를 볼 때 내가 먼저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면 혜택들을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 직원들 사이에서 과연 눈물을 머금고 ‘겸손’해야 하는지 슬슬 갈등이 된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일상에서도 ‘내가 좀 어리버리해’, ‘내가 많이 부족하지’하며 자신의 단점들을 내세워 몸을 낮추면 가까운 사람들조차 말을 쉽게 옮기고 비웃기 일쑤다. 이런 일들을 계속 겪으며 맘 고생을 하는 이들이 결국 못 참고 불쾌해하면 농담이었다고 애써 무마하려 하거나 ‘쿨’하지 못하다고 도리어 비난 하기 일쑤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은 그의 책 <마음 미술관>에서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한 사람을 꿈꾸고 있’다고 말한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기를 낮추는 마음을 갖는 ‘겸손함’보다는, 나를 긍정하고 나를 높이면서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심정으로 ‘관대함’을 갖는 것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의미일 게다. 내가 남보다 못났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우리에게, 조금만 억울한 일이 생기거나 무시를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대로 내면에 축적되어 속병을 앓거나 반대로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갚아주게 되는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의사의 처방인 셈이다. 그녀의 글에 동의가 된다. 잘 되지도 않는 겸손을 체화하려고 속을 썩느니 관대하게 타인을 용서하는 ‘가진 자’의 마음을 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타인에게는 동일한 행동처럼 보일 것이고 내적으로는 죄책감에서도 해방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 마음 한 켠이 껄끄럽다. 그건 지금도 여전히 겸손의 미덕을 발휘하는 이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을 떠나서조차 겸손히 행하는 이들에게 결국 감동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총각네 야채가게'로 유명한 이영석씨가 매사에 겸손과 성실로 하루하루 일하는 모습에 많은 CEO들조차 감동받으며, 가수 김장훈의 자랑하지 않는 묵묵한 선행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또한 나의 불편함은 여전히 예수의 도를 좇아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무엇보다 성경은 겸손을 ‘마음의 변화’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도의 성자’라 칭송 받는 선다싱이나 ‘하나님 손에 있는 연필’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테레사 수녀, ‘작은 예수’라 불린 장기려 선생 같은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 속에는 타인에 대한 ‘가진 자’의 관대함과 같은 내면의 타협점이나 처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내 기대와는 달리 매 순간 겸손과 관대함 사이에서 줄타는 듯한 나의 일상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들에 비하면 여전히 작은 일에서조차 대접받고자 얼굴을 붉히는 내 속 사람이 부끄럽다. 서른의 중반으로 치닫고 있는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음이,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말만 늘고 미래에 대한 약속과 비전만을 궁색하게 둘러대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내 삶과 글 사이에 있는 거품들을 줄여가야 함을 절감한다. 그리고, 마치 신용카드를 사용하듯 말부터 뱉어내고 나중에 행하면 된다는 식으로 신앙에 있어서도 더 이상 채무자의 자세로 살지 않고, 더 늦기 전에 현금 내지는 직불카드를 사용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교정해가야 할 성 싶다. 천국의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끝)


*본 글은 <복음과상황> '08년 5월호 기고글입니다.

2008/05/01 00:03 2008/05/0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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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1)
- ‘소비되는 것들’에 대한 단상

 

 

결혼하고, 그러니까 아저씨가 된 이후로 체중이 많이 불었다.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 운동량은 부족하고 피로는 쌓인데다 잦은 회식자리 등의 이유로 한 번 불어난 내 체중은 줄어들 줄을 모른다. 해서 최근에는 식사를 하다가 음식을 남기는 경우가 잦았다. 아내의 조언대로 되도록 육식은 줄이되 채식을 많이 하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식사를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런 연유로 회사에서 자율 배식으로 먹는 식사는 가져온 만큼을 다 먹지 않고 버리기 일쑤다. 그것도 내심 욕심대로 다 먹지는 않았다는 뿌듯한 마음을 가지면서. 하루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잔반을 국그릇에 담고 있던 중 어릴 적 아버지가 ‘쌀 한 톨도 버리지 말라’고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간혹 내가 남긴 밥그릇 위쪽에 남아 있던 밥풀을 보면서 일장 연설을 늘어 놓으시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남긴 한 톨의 쌀을 만들기 위해 농민들의 한 해 수고가 있었음을 상기시켰고 그럴 때면 나는 죄책감에 숟가락 소리가 심하게 날 정도로 밥그릇을 비우곤 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음식을 배에 버리지 말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 요즘 세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덧 내 건강을 위한다는 핑계로 아무런 의식 없이 음식을 먹다가도 쉽게 버리게 된 셈이다. 사실 마트에서 얼마의 돈을 주고 쌀 몇 킬로그램을 사면 농민의 노고가 밥을 먹는 내게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쌀과 농민의 소외, 쌀과 나와의 소외, 나아가 쌀을 경작한 농민과 쌀밥을 먹고 있는 나와의 소외가 발생하는 것이다. 누군가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그 면전에서 버리기는 어렵다. 그 사람의 수고와 애정이 나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한 끼의 식사조차 물질로, 얼마의 돈을 지불하면 살 수 있는 무엇으로 여기기 때문에 금전적 여유만 있다면 그 물질을 살 수도 있고 필요하면 쉽게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제는 모든 것들이 자동화, 인스턴트화 되어서 쉽게 똑같은 음식들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도 있다. 그러한 음식들은 포드자동차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누가 만들었는지조차도 불분명하게 흐르는 과정 속에서 기계적인 반복작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음식들은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대량으로 소비되고 대량으로 버려지고 있다. 이러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사이클 안에서 보릿고개를 겪은 아버지 세대의 구태의연한 ‘쌀 한 톨의 미학’이 자리잡을 틈이 없음은 자명하다.

비단 음식뿐 아니다. 주어진 모든 사물들의 가치를 금전적 잣대로 바라보는 나는, 물건 귀한 줄을 모르고 산다. 어릴 때는 양말에 구멍이 나면 꿰매 신기 일쑤였고 우산이 고장 나면 수리를 해서 썼다. 솔직히 나이 스물이 넘어서는 옷을 헤질 때까지 입거나 낡아져서 버린 일이 거의 없다. 촌스러워져서 혹은, 스스로 지겹다고 생각되면 쉽게 옷을 버렸다. 중고책방에서 꼼꼼히 살피다가 책을 건지기도 했던 나는 어느새 돈을 벌면서부터는 헌 책이 있더라도 깨끗하고 반질반질한 책을 손에 넣는 것에 쾌감을 느껴 개정판이 나오면 같은 책을 다시 사기도 한다. 그런 책 몇 권 정도 살 형편은 되니까, 옷 몇 벌은 백화점 옷은 아니더라도 시장이나 마트에서 사 입을 형편은 되니까 옷이 멀쩡해도 내가 질리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 비슷한 류의 물건을 '상쾌한 마음으로' 사대곤 한다. 이런저런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니 그 동안 나의 소비행태가 분명하게 보인다. 과한 욕심으로 사고 나서는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 쓰지도 않고 버릴 날만을 손꼽고 있는 많은 물품들이 즐비하다.

복상 편집위원인 박총 형이 자주 언급하는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란 책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되는지를 소상히 알려준다. 커피, 햄버거, 신발, 신문, 자동차와 컴퓨터까지 그것의 재료가 생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의 부담과 가공과정에 관련된 많은 노동착취, 그리고 그 물건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이 소상히 적혀있다. 그런 일련의 전지구적 환경, 노동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물건을 사고, 쓰고 버리는 일련의 나의 일상은 전혀 정상적이지 않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런 일상에서의 윤리관이 없는 채로 사회 참여나 운동, 그리고 복지나 윤리에 관한 말들을 참 많이 내뱉고 산다. 누군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참으로 두렵다. 나의 거창한 생각, 나의 인생, 나의 기도 속에서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이는 악한 일상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녹 색평론을 정기구독하고 교계에서 실무자로 활동하는 후배가 있다. 비교적 검소하게 사는 그녀는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웃으며 '적게 벌고 적게 쓰는 게 체질에 맞다'는 얘기를 했더란다. 사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사실 난 많이 벌어 적게 쓸 궁리를 했었는데, 그건 결국 따지고 보면 많이 벌어서 적게 쓰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내 속내를 감춘 것이었다. 수입에 여유를 두고 싶은 것은 어느 정도의 물질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심 감추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이런 내 속내를 쉽게 이기지 못할 성 싶다. 하지만 이제는 노력하고 싶다. 내 미시적인 삶이 정화되지 못한다면 내가 자주 말하는 거시적인 삶의 윤리적 토대는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가면을 쓰지 않는, 일관된 삶을 살고 싶다. (끝)

**월간 <복음과상황> '08년 4월호 기고글.

2008/04/01 00:02 2008/04/01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