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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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떤 분에게 약속 확인 문자 보내는데 말미에 "확인사살...^^"이라고 썼다. 쓰고보니 무시무시한 말. 사실 우리가 쓰는 말 중 군사용어들이 참 많다. 하다못해 평화주의자를 자청하는 기독인들도 성경에 나와있다며 전쟁, 전투, 싸움 등등 쉽게 군사적인 용어들을 남발한다.

 

그러고 보면 엔터테이닝 같은 축구도 전쟁이고 나가수도 가수왕들의 전쟁이고 수퍼스타K 같은 서바이벌 프로도 전쟁이다. 그것 뿐이랴, 회사 생활도, 자녀교육도 죄다 전쟁이다. 뭐 다 갖다붙이면 일상의 소소한 일들부터 큰 결정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존 자체가 전쟁이고 타자와의 피터지는 싸움이다.

 

나는 말과 삶의 일치를 꿈꾸는 편이지만 삶의 형편들이 말로 터져나옴과 동시에 말의 오염이 삶을 오염시키기도 한다고 믿는 편이다. 내가 삶 일체를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순간 내 모든 감정과 감각기관, 세포 하나하나가 긴장하기 마련이다. 약속 확인 하나조차 사살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2013/01/18 22:04 2013/01/1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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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펑크락'이 유형했던 시기가 있었다. 국내에서도 삐삐밴드나 이후 일부 아이돌 그룹들이 펑크락을 구사했는데. 펑크락은 맥락이 중요하다.

1.

한동안 록음악은 스튜디오 녹음기술, 전자기기 등의 발전과 더불어 그 사운드 스케일이 풍성해지다 못해 점점 난해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개인 테크닉의 절정인 기타 속주나 곡의 복잡함으로 달려간 프로그레시브록, 사운드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오케스트라 수준의 편곡들은 점점 대중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어느 순간 록밴드 자신들도 장르적 식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모던, 얼터너티브에 이어 펑크록이 90년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는 앞서말한대로 이전세대의 난해한 음악, 기교적인 연주의 식상함에서 비롯되었다. 연주의 대가들이 제대로 칠 수 있는 독주... 부분도 과감히 '연주하지 않고' 단순 코드만 심플하게 퉁퉁 퉁겨내고 보컬도 기교를 버리고 무성의하게 노래를 불러댔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 코드 진행, 단순 연주, 무성의한 보컬로 록음악을 펑크, 펑키 스타일로 변질시켰지만 그 이면에는 록의 이전 역사에 대한 '저항', 새로운 시도에 대한 갈급함이 숨겨져 있었다.

재밌게도 이런 장르적 변화로 인해 록음악계는 이제 '개나 소나' 밴드를 하게 되었다. 이전 장르에서 록음악은, 고수들 실력의 향연이었다면 펑크는 기타만 칠 줄 알면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단순함'이 록음악의 외연을 키웠다. 문제는 저항의 의미로 실력을 보여주지 않던 이들과 원래 실력이 없어서 단순 연주밖에 못하는 이들의 혼재된 상황. 하지만 후자는 펑크의 유행이 다하자 자연스레 록계에서 사라져갔다.

2.
나는 개인적으로 경구류의 단문이나 알맹이 없이 글쓰기 자체를 논하는 글들이 불편하다. 경구의 경우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거나 반대로 동의되지 않는 수많은 반론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은 이것들이 대체로 '펑크록'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펑크록이 감동을 주는 건, 그 대상이 록음악이라는 무림의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떤 의도된 단순 코드는 그들(고수)이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것이지 '그들'이 아닌 이들이 연주하는 단순코드들은 그냥 '하수'들의 그렇고 그런 연주들에 불과하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습작을 하는 많은 이들이 경구 쓰기에 치중하거나 글쓰기론을 설파하는 것에 자주 아쉬움 내지는 유감스러운 마음이 든다.

베스트셀러 작가나 학계가 인정하는 고수, 아니면 '아브라함 링컨'(오늘은 초류향이라고 하려다 참음) 같은 위인이 아닌데 너무나도 당연하거나 혹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단문들을 쓰는 사람들에게 나는 좀더 열심히 자기 생각을 풀어쓰는데 시간과 정성을 들이기를 권하고 싶다. 차라리 문법이나 논리가 잘 안 맞더라도 성실하게 자신의 정서나 논리를 서술해간 글들이 나는 '사랑스럽다'. 그런 글들에는 그 '질'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정말 애정이 간다.

20년을 감옥에서 복역한 신영복 교수의 '나는 걷고싶다'라는 단 한마디의 말이 영혼 깊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박범신 같은 작가가 기고한 짧은 칼럼으로도 그 이상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듯. 경구 한두줄의 힘은, 오랜 기간동안 성실함으로 갈고 닦아진 글과 삶의 궤적이 보장되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내가 펑크록을 바라보는 씁쓸함의 이유이기도 하다.
2013/01/14 22:03 2013/01/1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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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남편의 육아 분담에 대해 희생 내지는 헌신이라는 말을 하지만. 나는 때로는 가부정적 성역할이 남성에게 육아의 짐을 덜었다기 보다 오히려 어떤 '결핍'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편이다.

내가 요리한 음식은 아이의 입에 먹여줄 때의 느낌, 한 숟갈 입에 넣고 아이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최고!"라고 소리를 지를 때 묘한 성취감.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면 아이들 속에서 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놀던 장난감들을 다 내려놓고 달려와서 작은 팔로 목을 끌어안아줄 때.

토닥여 주며 재울 때 하던 옹아리들, 이제는 단어들, 문장들. 그 시시콜콜함에 가끔 빵터지는 웃음. 숨쉴 때 몸의 오르내림. 까딱이는 손가락, 꿈을 꾸는지 뭘 먹기도 하고 뭐라고 입모양을 만들다가 내 겨드랑이 속으로 얼굴을 파묻기도 할 때 그 작은 몸뚱이의 촉감.

수시로 변하는 얼굴표정과 발달 단계에서 보이는 특유의 말들. 아이가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고 듣는 것을 듣고 세상을 인식하는 순서대로 세상을 인식하는 경험들 일체를 아버지는 박탈당하는 셈이다.

사랑은 금전적 후원이나 관조적인 행위로 결코 깊어지지 않는다. 아빠와 아이의 사랑 또한 그러하다.

2013년 1월 13일.
2013/01/13 01:19 2013/01/13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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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페친분들의 포스팅을 받지 않고 있지만 가끔 다른 페친의 좋아요로 그 분들의 포스팅이 쓰리쿠션 찍고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도 교계에 스타급 목사님의 포스팅이 그렇게 내 담벼락에 떠서 할 수 없이 읽었다... 페친의 상당수가 목사님이라 자주 지적(질)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목사님들의 포스팅을 보면 그분들의 '욕망' 같은 게 읽힌다. 이른바 설교 욕구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나름의 정체성, 자신감 같은 것도 생겨서인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부분에 있어 거침이 없다.

 

흥미로운 건 글의 도입에 자신에 대한 약점 내지는 험담을 툭 던지는 게 상례인데 중반 이후를 읽다보면 그 약점에 대한 고백은 장대한 피날레를 위한 하나의 예화, 혹은 에피타이저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난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라는 내러티브가 사례들을 바꿔가며 반복된다.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것이 흡사 미국드라마의 시즌2, 3로의 진화를 보듯 흥미진진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런 글들을 보면 조금 씁쓸하다.

 

어림잡아 개신교인 반, 비개신교인 반의 친구를 가진 내 입장에서 그런 글들이 반대쪽 분들에게 어떻게 읽힐까를 생각하면 좀 오글거릴 때가 있다. 기온차가 너무 크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 구획(교계내) 안에서는 좋아요 작렬이니... 그 프레임이 깨질리는 없겠으나, 내가 기대하는 포스팅은 좀 다른 것들이다. 페북의 특성상 좋아요를 유도하는 글들이 요구된다. 목사님들은 된장남처럼 자기가 입고 먹고 마시는 것들을 자랑하지는 못하니 주로 자신의 거룩한 생각, 행실, 선행사례들을 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유명 목사님들의 회개거리, 실수, 분노, 망가짐,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고백들을 읽은 적이 별로 없다. 하다못해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놓고 '하등한' 일반 성도들에게 기도부탁하는 글도 본 적이 없다. 요즘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이 극도의 갈등을 겪는 게 적나라하게 표현되는데(배트맨은 허리까지 부러지지 않던가) 우리네 유명 목사님들은 죄지을 틈도 없이 성공만 하시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초류향이나 레밍턴 스틸같은 실력자(?)이셨는지 전혀 일상사에 어려움이 없이 성도들에게 모범 사례들만 설파하신다.

 

아무래도 페북이, 목회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부족해요', '실패했어요' 같은 버튼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2013년 1월 3일

2013/01/10 21:58 2013/01/10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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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회 사역자들이 한국교회의 세속화에 대해 비판한다. 대체로 나는 그 목소리에 공감하지만 때때로 목회자들이 세속/비세속을 정말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고 주식도 안 하고 룸싸롱도 안 가는 다수의 목회자들에게 있어 성/속 개념은 명확할 것이다. 물론 기업의 CEO급 목사들은 술도 먹고 주식도 하고 부동산도 사고 룸싸롱도 가고 바람도 피우시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런 분들은 다수가 정죄하니 오늘은 대상에서 제외하고. (물론 드러나지 않은 몇몇 분들의 루머들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검증도 오늘은 제외) 대신, 자신이 처음부터 근처에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세속의 금을 그을 줄 아는 이들의 자기의에 대한 이야기다.

 

예수는 길을 가다가 우물가에서 이방 여인에게 수작을 건다. 알고 보니 여인은 남편이 다섯인 부정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긴 대화를 주고 받다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복음과 그 메시야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요한복음 4장)

 

대체로 목회자들은 후반에 드러난 교훈에 꽂힐테지만 나같은 세속인은 초반에 예수님이 수작을 걸면서 주고받는 언어유희와, 그 대화를 지켜보는 제자들의 초조함(기이히 여김)에 꽂힌다. 땡볕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누가봐도 '문제의 여자'임을 알텐데 예수는 겁도 없이 그녀에게 무장해제의 자세로 대화를 시도한다.

 

예를 들면 한 목사가 길을 가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들어간 곳이 알고보니 영등포 집창촌 골목이었다고 치자. 아마 그는 깜짝 놀라 그곳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혹은 물을 달라고 했다가 물을 가져온 여인의 옷차림, 행색이나 말투를 경험하고는 대화를 시도하지 않거나 반대로 그 길에서 벗어나라고 무섭게 훈계했을 수도 있다. 솔직히 나라면 훈계까지는 아니라도 그곳을 피했거나 어쩔 수 없이 물만 얻어먹으면서도 불결하다는 느낌을 은연중에 표했을 것 같다.

 

예수의 뛰어남, 고결함은 자신이 구원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 대한 존재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이슈를 접했을 때 자동적으로 하게되는 성속에 대한 판단 '이전'부터 자리잡은 그 영혼 자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 같은 것 말이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친일파 앞잡이 같은 존재인 삭개오의 집에가서도 밥을 먹으며 희희낙낙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물론 모범시민, 모범목회자들에게 알아서 악의 길로 달려들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모범적 성장 배경에서 배제시킨, 이른바 자기의에 기준한 판단으로 세속을 규정짓고 세속적인 삶에 불결함을 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세속주의를 비판하는 상당수의 종교인들, 특히 개신교 배경의 목회자들에게서 예수의 얼굴보다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살던 탕자의 형의 얼굴이 자주 오버랩된다.

 

보수진영의 목회자들이 동성애자, 불신자, 미혼모, 혼전 동거관계에 대해 강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진영의 목회자들도 쉽게 보수파 정치인과 논객들, 기업, 언론인들의 삶을 불결하게 여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또 가진자의 악행의 규모면에서 분명 동의되는 지점이 있지만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그 개별적인 인간 자체에 성속의 선을 너무 짙게 그어버리는 건 아닌가 우려감도 든다.

 

목회자 뿐 아니다. 만인이 제사장이라 믿는 개신교인 모두가 예수의 삶을 따른다면. 적어도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가지고 '자기의'로 삼는 일을 그치고 자신이 걸은 길에 대해 겸손히 동참을 호소해야 하지 않을까. 세속주의에 대해 묵혀뒀던 나의 생각은 그렇다.

 

2013년 1월 7일

2013/01/07 22:02 2013/01/07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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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에게.

 

불과 6-7년전만해도 너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느덧 엄마 아빠가 '아들바보'가 되어 있구나. 삶이란 게 참 신기하지. 새해가 밝고 니가 아빠에게 "이제 나 다섯살이야. 아빠 나한테 까불지마"라고 말해서 엄마랑 한참 어이없게 웃었어.ㅎㅎ 빨리 크고싶어하는 네 동심 가득한 모습을 함께 해서 참 재미있고 기쁘다.

 

작년보다 더 말을 잘하는 너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는 아빠를 보며, 엄마는 아들의 '똘마니'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가끔 아빠는 네가 이제 다섯살 밖에 안 되었으니 아빠의 이 지극정성을 니가 기억도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좀 아쉽다. 기록으로라도 남겨서 묵혀두었다가 네가 철들면 생색을 낼까 싶다.

 

내 아버지는 나를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하셨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나의 곁에 없었기에 함께 웃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오래된 앨범이나 생일 카드들을 보면 지금도 그 글에는 시를 쓰는 내 아버지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지만, 솔직히 그건 아버지가 글솜씨를 뽐내기 위한 것이지 아들의 소소한 일상을 깊이 관여한 글이 아니란 생각에 조금은 씁쓸하기도 해.

 

너에겐 그런 글자랑하는 아빠가 아니고 좀더 가까이에서 살을 부비며 웃어주는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럴려고 한다. 한해도 건강하게 자라주어 고마워. 성하라는 아름다운 영혼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 너의 똘마니 아빠가

 

 

2013년 1월 5일

2013/01/05 00:04 2013/01/0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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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저녁부터 어제 조금 일찍퇴근해서까지 성하와 같이 지내다보니

 육아스트레스에 빠진 나... 어제는 아내에게 "아... 성하가 지겨워...ㅠㅠ"라고 했더니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가식적으로 지어보인다.ㅎㅎㅎㅎ

이후에 부부가 모여서 성하 험담 삼매경.ㅋㅋㅋㅋㅋ

 만화영화 노래부르면서 좀 컸다고 가오잡고 노래한다는 둥, 지가 왕자인 줄 안다,

내 자식이지만 때때로 재수없다는 둥 한참을 뒷다마를 까댔다.^^

오늘은 다시 모범 아빠로 변신해서 잘 해줘야지. 롤롤롤~

 

 

2013년 1월 3일

2013/01/03 00:03 2013/01/0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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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에 자다가 성하가 잠꼬대 하는 소리에 깼다.

귀엽게 옹알거리기에 귀기울여 들어보니 '추.... 추워...'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나는 이불을 누에고치처럼 돌돌 말아서 자고 있고

성하는 옆에서 웅크리고 자는 중;;;;;;;;;;;;

히잉. 아빠가 미안하다. 흙흙 ㅠㅠㅠㅠ

(회사 와서도 계속 맘에 걸리네...)


2013년 1월 2일

2013/01/02 00:02 2013/01/0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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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를 읽다가 이렇게 뭉클하긴 처음이다...
 
"연애지침서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공략 대상으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 방법을 설파하느라 여념이 없다. 성공적인 연애를 위해 구사할 전략들을 나열하고,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흉내내기,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모방, 사랑을 가장한 목표 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 루티 교수가 말하듯이 사랑은 요령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수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의 어린 날의 경험들, 노동 조건, 삶의 조건, 살아보고 싶은 삶의 모습, 욕망과 소망, 그리고 또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디테일들, 웃는 모습, 찡그리는 모습, 손의 느낌, 걷는 모습, 잠든 모습.
 
이 시대에, 이 고독하고 우울한 시대에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와는 마음을 나누고,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 그에게 만큼은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신비롭다고 할 만한 최초의 매혹에 끌리는 경험.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해보는 경험. 너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 말하고 그것을 간절히 꿈꿔보는 경험. 상실과 결핍, 방황 끝에 충만함을 맛보는 경험. 한 사람을 통해 세계를 맛보는 경험. 한 사람을 사랑한 덕에 세계가 달라지는 경험. 온전히 이해받아 보는 경험. 자신을 벗어나보는 경험. 다른 사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는 경험.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경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이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들여다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우리에겐 무엇이 빠져 있는가. 사랑은 우리 삶에 일어난 시끌벅적한 사건이다. 조금은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사건이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불가능했을 어떤 세계가 태어나는 사건이다."
 
- 정혜윤, <하버드 사랑학 수업> 추천사 중에서.

2012년 12월 27일

2012/12/27 23:22 2012/12/2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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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이천년전 식민지 땅에서 태어난 예수.
나면서부터 제국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갈릴리라는 변두리 시골땅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
제국에 대항하는 자들과 제국에 동조하는 자들 사이에서
그 출신 성분이나 성별, 진영을 가르지 않고
제자를 삼아 새 하늘과 새 땅의 진리를 선포한 사람.
 
함께 이동 중에도 걸음을 멈추고 
질병 가운데 고통받는
 이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인간 대접 받지 못하던 아이들을 가까이 두며
모든 사람들이 아이들 같이 되야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던 순수한 사람.
누구보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위로한 사람.
 
나는 그가 단 하나의 희망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이다.
 
그를 희망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기득권이 되고
여성을 비하하고 아이들과 노인들의 복지를
 
사회적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사회 개독교의 신자다.
예수의 길. 그 순수한 청년이 걸은 길을
걷지 않고 
성경을 읽되 이해조차 못한 채
말로만 고상하고 예배시간에만 헌신된 한국 교회.
이미 그리스도가 잊혀진 그리스도교의 부끄러운 신자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역설 속에 올해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당신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회개한다고.
당신의 교회가 속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시민으로 회개한다고.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당신의 도를 우리가 다시 몸으로 받게 해달라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
제국의 힘에 저항하거나 동조하던 이스라엘 시민들처럼
우리도 세상의 큰 흐름에 때로 저항하고 때로 동조한다.
역사가 때로 우리의 편인 것 같은 날도 있고
적의 편인 것 같은 날도 있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편이라고 생각했던 날들조차
어두운 곳에서는 흐느끼는 슬픔이 있었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는 나는 예수의 길을 믿는다.
현대의 많은 불가지론자들, 무신론자들 사이에서도
나는 그가 단 하나의 희망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이다.
 
이천년전 제국의 압제 속에 중동땅에서 태어난 예수란 청년의 길.
그 시작을 기념하며.
우리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2012년 12월 25일
2012/12/25 21:58 2012/12/25 2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