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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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다수의 남성들은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좀더 깊이있게 말한다면 다수의 남성들은 이 영화가 함의하는 변화의 조짐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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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레알 여성이 아니므로 페미니즘을 관찰자의 눈으로 읽는다. 지적인 영역에서 분석하고 그 패러다임에 놀라움을 표하고 그저 변화의 코드들을 주워다 읽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나는 사이비로서는 꽤 성실한 관찰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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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를 봤다. (이제부턴 스포일러 모드)
일단 놀란 것은 그간 어떤 의미에서건 '아름다움을 연기'하던 손예진이란 배우의 정형화된 연기 패턴이 깨졌다는 사실이었다. 손예진의 연기를 보면서 이 영화의 감독은 절대 남성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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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와 딸의 행방불명. 
이 두 사건을 풀어가는 영화의 내러티브의 시작은 다분히 남성적이다. 아내의 내조 속에 권력의 치밀한 조작과 거래들이 남발하고 딸의 행방불명은 객관적 단서를 찾는 경찰과 선거라는 큰 그림 속에서 상대진영의 행동을 의심하는 거대한 비밀, 음모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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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주검이 되어 돌아온다. 
아내는 갑자기 실성한 듯 이상한 이름과 이상한 전화번호로 경찰을 헷갈리게 만들고 선거 중인 남편의 캠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무례하게 군다. 
역시 냉정함을 잃지 않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남자들의 사회가 이 문제를 정리할 것이다. (해결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사건 '정리'는 할 것이다) 그러니 딸이 걱정은 되겠지만 아줌마는 그저 기다리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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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이상한 행동들은 이내 실타래에 구슬을 꿰듯, 어려운 퍼즐이 그 윤곽을 드러내듯, 사건을 재해석해내고 연관성을 찾아간다. 다음단계와 그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추리과정은 남자들의 세계, 그 투박한 상황 판단과 정리로는 담을 수 없는 미세한 끈을 따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이의 노트, 노랫말, 인터넷 메일, 친한 친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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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들은 세상에 무례한 모습이 되었지만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을 하고 관계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고 자신의 위선과 싸운다.
엄마는 그간 자신이 생각하던 아이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아이에 대한 신뢰 사이에서의 자신의 편견과 감정을 끊임없이 걷어낸다. 다른 (남자) 사람들은 그 아이의 행실, 의도, 그간의 일탈 횟수를 통해 객관적, 통계적인 추론에 이르고 섣불리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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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흘러흘러 비밀에 다다른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남편의 불륜이라는 '비밀'의 허망함에 있었다. 거대한 정치판에서의 암투와 그 사이에 발생한 아이의 죽음, 그것을 둘러싼 상대진영에 대한 의심, 그 와중에도 아이의 실종과 죽음을 놓고 펼쳐지는 언론플레이. 판세의 역전...그런 거대한 이야기, 남자들의 거친 암투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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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남자들의 가벼움, 남자 세계의 시시함이랄까. 
아이가 죽어도 영영 찾아내지 못하는 '냉철하고', '논리적인' 남자들, 그나마 착하고 멀쩡해보이는 이 남자가 결국 자기 불륜 따위를 막겠다가 사람을 사서 자기 딸을 죽인 결말이 드러난다.
그 과정을 광기어린 침착함으로, 혹은 과열된 집요함으로 엄마이자 아내는 묵묵히 사건을 해석하고 풀어내고, 마지막으로 심판한다. 그것도 남자들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피끓는 복수가 아닌 합리적인 댓가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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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페미니즘 '관찰자'로서 본 이 영화의 뛰어남이다. 나는 그렇게 봤다.
2016/07/16 11:42 2016/07/1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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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빌워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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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원작<시빌워> 시리즈에 환호했던 우리는, 영화화된 <왓치맨>에 환호할 수 있었지만 이번 <캡틴아메리카: 시빌워>는 다소 불편할 법한 각색이 즐비했다.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즉각적으로 원작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드러낸 비판글을 썼으나 댓글들을 보니 마블 원작의 '세계관'에 그다지 관심 없는 지금 세대들에게는 평론으로 포장된 꼰대질, 평론가의 자격지심, '그냥 잘난 척'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의 평론을 그렇게 대하기엔 부족함이 있어서 그의 논의 중심으로 시빌워의 감상기를 풀어보련다. 그의 글은 아래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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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허지웅의 평대로 영화의 스케일에 대해서는 이제 마블 시리즈에서 굳이 폄하할 부분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게다가 얼마전 수퍼맨과 배트맨이 모여서도 이렇게 비주얼로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해서 그런지, 더더욱 그 흥망의 대조는 크게 느껴진다. 문제는 내러티브, 스토리라인인데, 원작에 열광한 나로서도 허지웅의 비판에 공감하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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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그의 말대로 세계관의 스케일이 줄어들었다. 스티브는 어벤저스 멤버들로 국한되지 않은 무수한 초인들의 신분과 자유를 보장하려는 '캡틴'으로서의 숭고함은 사라지고 새 친구 '토니'보다 옛 친구 '버키'를 편애하는 인간으로 전락했다. 시빌워(내전)는 구색만 갖춘 채 대충 싸우는 어벤저스의 내분이 되었고, 정작 진지했던 전쟁은 부모를 잃은 토니와 친구를 보호하려는 스티브의 사적 복수극으로 달려간다. 게다가 토니가 '소코비아 협정'에 동의하려는 동기는 아이언 수트를 안 입어야 페퍼포츠와의 관계가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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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워의 원작은 10년전에 만들어졌다. 이른바 '초인등록법'에 대한 찬반에 의해 갈라진 무수한 초인들의 입장 차이를 가지고 마블코믹스는 자기들이 수십년 전부터 보유해온 초인들을 어른들의 눈높이에 맞춘 정치사회적 내러티브로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DC가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와 <저스티스 리그>를 통해 재도약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면, 마블은 <어벤저스>와 <시빌워>의 내러티브를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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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를 관통하는 코믹스의 세계관은 '진영' 논리였다. 초인들을 한 곳에 모은 후 진영을 나누고 그 각각의 입장에 대한 내러티브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베이비붐 세대를 겪은 중년층들은 열광했다. 그들이 경험한 냉전시대에 대한 추억, 그 이후에 이뤄지는 세상의 진영논리를 기반으로, 어릴적 하나씩은 가지고 놀던 초인 영웅들이 화려하게 '재'등장하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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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각설하고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지금 세대, 그리고 마블이 나아갈 세대의 영화는 원작의 세계관과는 구별될 것이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캡틴 아메리카> 1편에서 3편을 관통하는 세계관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비판적 메타포로 대변된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의 착한 시민들은 왜 세계가 우리나라를 미워하는지 의아해했고, 이 재난에 대해 오히려 냉대받는 이유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 미국적 스탠스는 영화 속 '어벤저스'로 대변되는, 특히 애국심 돋는 '캡틴 아메리카'로 상정된 인물에 의해 극도로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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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경구 수준이 되어버린 '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른다(스파이더맨)'는 말은 이제 '큰 힘을 가진 자의 의무감을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둘 수 없다', '큰 힘에는 견제될 통제 영역이 필요하다'는 말로 대체되었다. 마블 영화 속 초인들은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할 수도 없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할 수 없고, 정보는 (더 높은 권한을 가진자에 의해) 공유되지 않는다. 나아가 거대담론(제국)은 미시담론(소수부족)을 무시하고 개별, 개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그 안에서도 몇십만 명을 살리기 위해 수십 명의 희생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혹은 그럴 수 없다는 입장 차이가 발생한다. 그 와중에도 많은 미시사적 개별 복수극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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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더 큰 힘은 또다른 도전을 낳는다'는 비전의 대사는 일면 타당하다. '개별적, 미시적 복수극을 감내해야 하는가', '큰 힘은 견제와 통제 아래 둬야 하는가' 사이에서 고민하고 분리의 조짐을 보이던 초인들 자신들이 급기야 복수극에 휘말린다. 초반과 중반, 후반에 반복되는 교통사고는 생체실험이라는 거대담론에서 내 부모의 죽음이라는 개별 미시사로, 돋보기의 한 점처럼 편광된다. 그 모인 한 점의 섬광이 종이를 태우듯, 두 초인은 자신의 미시사적 이해에 근거한 혈투로 치닻는다. 원작의 격돌이 매크로 스케일의 무게감으로 다가왔다면, 영화 속 격돌은 마이크로 스케일의 마음 속 사무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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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이것이 세계관의 스케일이 작아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내가 허지웅의 비평에 공감할 수 없었던 대목은 이 지점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이야기하듯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만약 이 영화의 주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마블이 기획한 세계관의 '영화적 변주'라면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이 세계관이 왜 세계가 '우리-초인-제국-미국'을 싫어하는가에 대한 자성과 고민을 담고 있다면 나는 매크로 스케일로 '진영 논리'를 불태운 원작에서 비껴나간 영화적 내러티브에 환호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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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세계 평화는 진영의 승리, 패배와 같은 조직 논리가 아니라 미시사의 복수극의 고리를 끊는 '블랙 펜서'의 선택으로부터 변화한다는 것이 이 세계관의 결론이라면 나는 더더욱 영화판에 공감한다. 레미제라블과 같은 고전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문제, 인류의 구원은 복수가 아닌 용서에 기인한다는 주제의식에 공감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블의 변형된 세계관은 '시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러러 보던 거대담론,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 세계 자체가 시시한 복수극의 현현일 따름이다. 결국 우리 중 누군가가 '발톱'을 접어야 세상의 복수가 멈출 것이라고 <시빌워>는 말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렇게도 잘 나가는 '제국'의 영화를 굳이 내가 또 지지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하다. (끝)
2016/05/05 23:56 2016/05/0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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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D 전공을 하면서 컴퓨터그래픽스 분야에서
처음 들은 이름은 존 라세터였다.
그는 당시 아이의 모션을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내용의 발표를 했고 그것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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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스토리가 개봉했을 때 그의 이름을 다시 접했다.
장편 애니메이션은 흥행했고,
픽사로 대변되는 특유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은
이전에 그가 하던 작업의 발전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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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흥미로웠던 건,
그가 뛰어난 애니메이션 프로그래밍의 대가이면서도
컴퓨터그래픽스를 활용한 장편 애니메이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스토리라인"을 꼽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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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픽사의 흔한 흥행사이지만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한 후
존 라세터는 디즈니-픽사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주토피아 또한 그가 제작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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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5 20:41 2016/04/0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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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꼭 보고 싶었는데 조조시간이 안 맞아서 명동까지 올라와서 봤다.

덕분에 명동칼국수도 오랜만에 먹고.
예상대로 영화를 보다가 또 울었다. (왠지 울거 같았다...)
별로 슬픈 장면은 아니었는데 뭔가 내 마음을 건드리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변에서 평들이 하도 많아서 공통적인 부분은 뻬고 이야기한다면,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크게 다가오는 걸 느꼈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의 결단, 용기, 실천 같은 인물 중심의 행보에 관심이 갔다면 요즘은 '조직', '시스템'이 더 눈에 들어왔다.

보스톤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직자들의 아동성추행 사건을 다루는 방식.
거대 조직 내에 만연한 잘못을 해결하는 암묵적 시스템.
신임 편집장이 언급하기 전까지는 기성 시스템이 발견해내지 못한 이 사건.
기성 조직의 관성이 배제된 지시사항. 하지만 관성대로 진행된 업무방식이 만들어낸 엄청난 분량의 심층 취재.

조직은, 공동체는 어떻게 관성을 갖게 되는가, 관성을 깨게 되는가.
제대로 된 관성이 어떻게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제대로 되지 않은 관성은 어떻게 파행으로 치닫게 되는가.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주말 내내 영화 때문에 맴도는 생각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최근, 무슬림 관련 역사책을 파다가 십자군에 의해 멸망하는 비잔티움 제국 이야기에도 꽂혔다. 왜 이 사건이 나를 뭉클하게 만드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튼. 최근 마음 속이 유리 같다. 세게 치면 부서질 것 같은. 요즘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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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0 20:26 2016/03/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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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좋은 영화에 설명을 덧붙이는 게 참 별로라는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30년전에 본 영화의 시리즈가 부활했다는 사실 자체에 같은 세대의 키덜트들은 많이 감동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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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할 때 스타워즈 로고라거나 시작 스토리를 화면에 띄우는 부분에서부터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ㅠㅠ
많이 언급된 대로 스타워즈의 새 시리즈는 흑인과 여성의 '깨어난 포스'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이미 전작의 시대정신을 넘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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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영화는 전작 내러티브의 반복과 향수를 되살리면서 여전히 4-50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지금봐도 디자인이 훌륭한 밀레니엄 팔콘과 저항군 전투기, 그리고 늙었지만 여전히 젊은 시절의 아우라를 그대로 간직한 한 솔로, 레아 공주, 그리고 루크 스카이워커의 등장은 여전히 그들이 동시대에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통해 4-50대의 관객도 위로를 받는 한편, 그들이 이제 젊은 제다이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또다른 아쉬움과 슬픈 정서의 자극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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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가 디즈니를 통해 다시 부활하게 된 건 무엇보다 시대를 넘어서는 일종의 집단무의식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스타워즈의 주된 내러티브는 성장기 소년이 겪는 '아버지와의 갈등'이다.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루크 스카이워커가 그랬고 이제는 한 솔로와 벤 솔로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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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제거와 극복을 꿈꾸기도 하고 복종과 화해를 꿈꾸기도 한다. 이른바 '아버지의 이름'은 라깡의 정신분석에서도 중요한 테마이다.
또한 오비완과 아나킨, 벤과 루크의 사제 관계도 비슷한 갈등의 반복을 통해 내러티브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 모든 갈등에는 종교성으로 대변되는 선과 악의 대립과 조화, 그리고 우주 에너지의 신화화 요소인 '포스'가 그들을 추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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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특별히, 뭐랄까...
광선검에 매혹되었던 초등학교 꼬마가 불혹이 되어 같은 시리즈를 접하게 되는 기분은, 겪어봐야만 알 것 같다. 물론, 앞으로의 세대들은 더욱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되겠지만...
개인적으로도 참 기억에 남을 시리즈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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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한 솔로와 추바카의 등장씬도 어찌나 추억이 돋던지, 참 뭉클하게 하더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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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 22:01 2016/01/0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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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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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에 봤다지만 영화속 설정처럼 정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꼭 봐야할 영화에 항상 오르고 최근에는 재개봉도 했다기에 다시 본 이 영화에 대한 내 기억은 망각, 그 자체였다. 막연하게나마 기억이 나는 내 인상비평은 '이별에 관한 기억이라는 메타포를 신선하게 풀어냈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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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다시 곱씹으며 새삼 깨달은 건 영화에 대한 인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란 사람의 변화였달까. 11년 전의 나는 잘 정돈된 내면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람을 겪을 때도 어떤 거대한 DB에 주요 태그들로 하부구조를 생성하고 거기에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는 느낌. 내 뇌가 그/그녀(에 대한 정보)를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해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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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 갈급했기에 수많은 책을 읽었던 것처럼 인간관계의 갈급함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고 사실상 그 시기엔 인간관계도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더 깊이 분석할수록 세상을, 사람을, 여자를, 그 안에서 생기는 복잡한 감정을 다 알게될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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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화두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제거'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은 자주 가장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기인하기도 한다. 기억을 제거하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윤리적으로도 옳고 내 남은 삶을 버티기에 합리적이고도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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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커스틴 던스트)의 입을 통해 영화의 제목이자 알렉산더 포프 시의 한구절이 낭송된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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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고통에 해매던 주인공들은 기억의 제거를 통해 '영원한 햇살'을 얻으려 하지만, 정작 제거할 기억들을 되내이면서 그 기억들을 붙잡기 위해 망각에 저항하는 처지가 된다. 더 나아가 이 기억 하나만은 보존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마저 생긴다. 그리고 제거해야 했던 기억의 되내임은 어느덧 서로의 종국을 알면서도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용기마저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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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에는 스토리조차 기억나지 않던 이 영화가 문득 내게도 강하게 다가왔다. 더 정교하게 정리되어야 할 기억들. 잘 정리된 하부 구조를 만들고 그 기억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는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내 머리와 가슴, 손끝과 눈빛, 정서 하나하나에 뿌리를 내린 이 기억이란 신기루가, 사실 삶의 '영원한 햇살'이라는 사실을. 더디게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2015/12/13 19:24 2015/12/13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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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민자>를 봤다.
상당히 훌륭한 영화였다.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 제레미 레너라니.
그 연기만으로도 이미 영화는 하늘로 올라선다.
이미 <투 러버스>에서 보여준 감독의 독특한 느와르적
분위기도 좋았고.
그런데, 뭔가 불쾌하다. 뭔가가...
그 뭔가를 찾기 위해 며칠을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영화의 장면들을 이리저리 복기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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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단 이 영화는 1920년대 미국으로 입국하려던 한 여성의
한없는 추락을 소재로 삼고 있다. 
보는 내내 그 여성, 마리옹 꼬띠아르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 여성, 끝내주게 예쁘다. 예뻐서 더 안타깝다. (원래 그렇다..)
내가 그녀를 구해주고 싶을 정도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영화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부르노역의 남성은
이 이민 여성을 소유하려들고 클럽에서 춤을 추게하고 
결국 매춘에까지 끌어들인다.
하지만 '나쁜 남자' 부르노마저도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녀가 떠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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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년대 미국의 암울한 밤거리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한없이 추락하는 내러티브.
흥미롭게도 그 많은 댄서들과 매춘부들 중 영화 속에서
그녀만이 누드장면이 없다. 
그리고 다른 여성의 벗은 몸은 야하다기 보다는 
불편함 나아가 불쾌함마저 유발하지만, 
유독 '예쁜' 그녀는 왜인지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다는 듯
벗은 몸으로 목욕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침실에 눕지도 않는다.
그저 2달러에 그녀가 팔리고 있다는 대사가 그녀의 몸을 대신한다. 
물론, 
마리옹 꼬띠아르의 뛰어난 연기가 그 영화적 어색함을 무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녀만이 안타깝고 그녀만이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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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 자주 영화를 평가하는 나만의 잣대로 
영화 속 등장인물 중 특히 주변 인물들을 
감독이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하는가에 집중하는 편이다.
특정 인물을 절대선 혹은 절대악으로 배치한다거나
주인공에게 전적인 내러티브를 내어주는 경우
대체로 나는 그 영화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결국 내가 불편한 지점은 그런 거였다. 
'이민자'가 이민자'들'이 아닌게 불편했다. 
밑바닥 매춘부들로 전락한 
이민 여성들의 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지나갈 때 모든 남성들이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빼어난 외모의 
여성 한명의 몰락에만 몰입하고 애틋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그 구도가, 또다른 소극적 '마초성'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하는 불편함.
...
며칠 지난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15/10/02 22:28 2015/10/02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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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를 봤다.
솔직히 영화는 30분전에 끝났어야 했는데
필름이 남았던 걸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영화가 아주 나쁘진 않았지만,
영화의 소재와 주제의식? 뭐 그런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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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꽤 많은 여성들이 울며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꽤나 의외라고 생각했다. 만약 반대로 고부간의 갈등을 
아름답게 다룬 영화를 봤다면 도리어 남성들은 감동하며 
영화를 즐길 수 있었겠지 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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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기대하는 왕의 지위와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도록 질책받으며 자라난 아들의 비극. 
살아남기 위해 타협한 영조와 그 아들이 해야하는 처세.
영화 시작부터 머리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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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에 가서는 간간이 나타나는 아버지의 값싼 눈물,
그리고 그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 감동적인 자식사랑의 독백이.
꽤나 현실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너를 죽여서라도 세워야 할 대의와 명분이란 게 있다.' 
내 아버지가, 내 선생님들이, 내 나라의 지도자들이
내 집안의 어른들이 하던 수많은 말과 행동과 맞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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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그런 값싼 동정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에 난 공감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가족주의의 그물에 걸린 우리의 자화상이랄까.
왜 굳이 추석에 이런 영화를 개봉하여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가.
왜 굳이 그것을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현혹시켰는가. 왜.


2015. 9. 28.
2015/10/02 22:22 2015/10/02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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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 영화도 스릴러도 아닌 이 영화. 하지만 보는 내내 긴장감과 불편함이 이어진다. 이윽고 기나긴 갈등 국면 끝에 앤드류의 신들린 드럼 연주가 울려 퍼지고, 연주가 끝나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자리를 뜰 수가 없는 압도감, 뒤이어 긴장했던 온몸으로 전달되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해방감이 찾아온다. 

하지만 영화를 본 누구도 선뜻 이 영화가 '좋은' 영화였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플렛처 선생이 너무 가혹하다', '결국 앤드류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훌륭한 드러머가 됐으니 잘 된 것 아닌가', '앤드류의 성공 욕심에 버림받은 여자친구가 안 됐다', '꼭 뺨을 때려야 했나', '또 한 명의 찰리 파커가 되기 위해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살아야 하나' 등등 영화 전반에 걸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두 주연의 행보 때문에 몸(감성)이 반응한 마지막 10분의 감동을 머리(이성)가 눌러댄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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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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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러티브를 복기해보면, 사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서로의 관계에서 처세라고 할 법한 우회적인 소통이 없다. 이 지점이 평소에 그렇게 남의 눈치를 살피며 사는 우리에게는 꽤 낯설다. 우리 대부분은 관계를 맺을 때 상대에 대한 배려를 통해 친분을 쌓고 관계가 깊어지는 동안 '그 정도면 좋아!'라고 말하며 발전해간다.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욕망을 표현하기 보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어떤 윤리적 판단이 선행해야만 어떤 사건과 어떤 관계를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플렛처 교수는 윤리적 하자가 많은 캐릭터다. 학생을 매번 극한으로 내몰고 실력 없는 이들에게는 모멸감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고 뺨을 때리기도 한다. 그의 교수법의 피해자로 보이는 제자의 죽음 앞에서도 현실을 외면한 채 제자의 연주만을 칭송한다. 

이런 욕망은 약자인 앤드류에게도 뚜렷하다. 플렛처에게는 일개 학생이지만, 플렛처가 밴드의 다른 드러머인 라이언이 아닌 자신을 인정해줄 때마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다.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애써 사귄 여자 친구에게 '성공에 방해가 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매정한 말로 결별을 통보하기도 한다. 

극단으로 내몰린 앤드류는 결국 대회에서 연주를 못하게 되자 급기야 분노가 폭발하고 플렛처 교수에게 린치를 가한다. 나아가 플렛처 교수를 파면하기 위한 학생 증인 요청을 수락한다. 플렛처뿐 아니라 앤드류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에너지, 이기적인 감정의 표현들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 사회에서 매순간 그런 욕망을 꼭꼭 숨기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도 누구나 한 번쯤은 나보다 뛰어난 학생이 실수할 때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먼저 승진하는 동료가 미워지거나, 절친의 멋진 애인에 질투심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던가.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고 싶지만, 육아를 위해 포기하거나 부모나 배우자의 건강 문제로 꿈이 좌절됐을 때도 우리는 그 감정을 '어른스럽게' 숨겨야 했고 그에 더해 성공한 이들을 축하해 주거나 도와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매사에 너무도 쉽게 인륜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이 남자들은 뭐냔 말이다.

정글의 법칙, 경쟁의 긴장감 일깨운 또 다른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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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렛처는 학생들을 매번 극한으로 내몰고 실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모멸감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고 뺨을 때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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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곳곳에서 앤드류에게 드럼의 의미가 각별하다는 것을 자주 보여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드럼에 재능이 있었고 대학에서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주말에 아들과 팝콘을 먹으며 옛날 영화를 보며 시간 보내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가 편하고 무난한 삶을 살길 바란다. 사실 어머니가 없는 앤드류에게 아버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고 해를 가하려는 거친 세상에서 몸을 던져 그를 보호해주는 존재, 그의 거친 훈련과 성취욕을 격려하기보다는 걱정하는 존재로서의 아버지는 정서적 모성의 상징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없는 앤드류에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수컷의 냄새를 내기 시작한 이 아이는 열여덟 살의 나이에 경쟁이란 걸 체험한다. '더블타임 스윙'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엄밀하게 평가하는 매정한 선생을 경험한다.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고 그 정글의 법칙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채찍질(whiplash,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해주는 '남자 아버지'인 플렛처 선생. 

그는 모멸감을 주는 언행은 기본이고 의자를 집어던지거나 자신의 템포를 가르쳐 준다며 뺨을 사정없이 때리기도 한다. 그는 '그 정도면 됐어'라는 모성의 세상에서 알을 깨고 '찰리 파커'처럼 비상하고 싶은 순수한 욕망의 화신이다. 너의 재능을 증명하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해, 더 빨리, 더 빨리. 

영화에서 '템포'로 대변되는 것은 다름 아닌 능력의 증명이다. 정글이 인정하는 플렛처, 그의 템포에 적합한 연주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그에게는 진정한 부성애이자 세상을 향한 비상이다(그런 의미에서 앤드류의 친부가 플렛처에게 가졌던 감정은 분노가 아닌 일종의 질투심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플렛처의 템포, 그리고 앤드류의 템포 

결국 이 긴박감 넘치는 두 사람의 갈등은 이 영화의 백미인 마지막 10분, 앤드류가 '자신의 템포'를 고집하며 둘 사이의 주도권이 뒤바뀌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는 언제든 자신을 안아주고 감싸줄 아버지를 뒤로한 채 자신을 재즈 음악계에서 다시는 발 붙일 수 없게 만들려는 플렛처 술수를 알면서도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 '그의 템포'가 무대를 압도한다. 혹자는 이것이 앤드류가 플렛처를 이겼다고, 플렛처의 템포를 파기하고 앤드류가 자신의 템포를 주도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때문에 이 영화를 청출어람, 제자의 복수극, 젊은 승부사의 비상이라는 코드로 읽어 마치 무협 영화의 전형적인 플롯을 대입하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마지막 장면의 진정한 감동은, 두 사람의 승부에 있다기 보다는 예술로 승화된 '찰나의 순간' 그 자체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앤드류는 여전히 플렛처의 템포 안에 있다. 'CARAVAN'이라는 곡의 틀 안에서 앤드류는 자신의 즉흥 연주를 통해서 그의 템포, 자신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다.

만약 그가 플렛처와 제대로 된 승부를 원했다면 찰리 파커처럼 조 존스를 뒤로한 채 돌아가 자신만의 화려한 데뷔를 꿈꿨을 것이다(그것이 플렛처와 앤드류가 그토록 신봉하는 재즈 신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앤드류는 플렛처의 템포로 돌아왔다. 도리어 플렛처의 밴드라는 제약 안에서 자신의 템포를 점유하려 한다. 이는 플렛처의 템포 아래에서 자신의 템포를 보여주려는 앤드류에게 있어 여전히 플렛처가 중요한 존재임을 반증한다. 그토록 미워하던 플렛처의 연주가 있는 재즈바를 서성이던 그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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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렛처 뿐만 아니라 앤드류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에너지, 이기적인 감정의 표현들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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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플렛처와 무관한 승부에는 관심이 없다. 정글의 세계를 열어준 '남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는 그의 집요한 노력이 이 영화를 스릴러에 버금가는 긴장감을 조성해준다. 당신이 말한 바로 '그' 찰리 파커는 내가 되어야 한다. 보는 내내 우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이 내러티브의 말미가 극적인 감동을 가져다 주는 이유는 플렛처와 앤드류 두 사람 모두가 인정하고 공유한 연주의 절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학교에서 쫓겨나게 만든 제자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싶었던 이 냉정하고 잔인한 플렛처는 앤드류의 연주를 듣다가 어느 지점에서 자기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그의 템포에 빠져든다. 앤드류는 또 어떤가. 뺨을 맞고 차 사고에 퇴학까지 당하게 만든 당사자가 다시 자신의 음악 인생을 종치게 만들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주에 몰입하다가 어느 순간 그의 템포에 자신의 템포를 맞춘다. 서로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의 연주에 플렛처가 미소를 보낸다. 앤드류도 마치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다. '이 남자들, 좀 모자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이런 경험은 남 일이 아니다. 대가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종종 겪는다. 밤 새워 선배와 야근을 하면서 마친 일이 회사에서 채택되는 순간, 무명 가수가 신곡을 만들어 리허설 끝에 연주자, 엔지니어와 제대로 녹음을 마친 순간, 하다 못해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와 입을 맞춰 자장가를 함께 부르는 순간에도 이런 '찰나의 상승' 경험은 존재한다. 

그 경험이 힘들거나 인간 관계마저 어긋날 때 도리어 그 찰나의 시간이 빛나는, 다소 씁쓸한 인생의 진실이 이 영화에 담겨있기 때문일까. 사실 살면서 자주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그 정도면 됐어'가 아니라 '바로 그거야'를 말해줄 누군가를 열망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복잡하고 불안한 관계를 넘어선 '결정적 템포'의 미학이,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 아닐까.


*기사 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91731
2015/03/25 20:40 2015/03/2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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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1.
국제시장을 봤다.
극장에서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권해서 봤다. 참고로 아버지는 평생에 내게 뭘 하라고 압력을 준 적이 별로 없었기에. 가족과 함께 보러가라고 했지만 가족 대표로 나만 봤다.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몇몇 장면에서는 눈물을 쏟았다.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은 소년의 죄책감. 그리고 네가 이제 가장이니 가족을 보살피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평생 한 소년의 어깨를 짓눌렀으리라는 부분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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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버지세대의 평범한 가장들이 부모나 가족을 잃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전쟁 후의 비정상적인 삶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국제시장은 그런 평범한 한국의 아버지세대의 미시사를 관통하고 있다.논객 허지웅으로 인해 이슈가 됐던 대목 "이 어려운 시대를 내 자식들이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부분도 맥락에서 충분히 공감이 갔다. 주인공은 가족에 헌신적이어야 하는 자신의 삶을 팔자처럼 받아들이고 아내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 아들이 겪는 것보다 낫지 않냐라고 위로하는 맥락의 말이었다.

정작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준엄하게 가오잡고 훈계하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처럼. 그저 뜬금없이 욕을 하거나 대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뒷걸음질친다. 그런 디테일들이 잘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2.
하지만 정작 이 영화를 대작의 반열에 놓을 수 없는 부분은 논란이 된 세대 갈등이나 보수-진보갈등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겐. 이 영화의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영화가 IT기기로 치자면 '샤오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플 짝퉁.

영화가 끝날 때 나는 이 영화가 <포레스트 검프>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국판이란 비평만 남았다. 백인이 입어서 사랑받은 옷을 아시아인에게도 입혀본 느낌. 뭐 옷이 좋으면 아시아인도 멋져보이는 그런 느낌. 깃털이 나비가 되고 존 레논이 남진이 되고, 애플이 현대건설로, 이만기로 대체되고 마지막에 아버지를 떠올리며 우는 장면은 라이언 일병이 죽은 상사의 무덤 앞에서 우는 장면과 정확하게 교차했다.

흥행을 위해 영화도 흥행을 담보하는 규칙을 세워서 공용가능한 플랫폼을 짜고 모듈을 만들어서 한국인의 컨텐츠에도 옷처럼 영화를 입히는구나. 게다가 그게 대중에게 먹히기까지 하는구나. 뭐 이런 생각 때문에 진영논쟁, 세대논쟁에는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건 예술인가 상품인가. 어쨌든 짝퉁도 많이 팔리면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씁쓸함이 흘린 눈물을 무색하게 만든다.
2015/02/21 19:56 2015/02/21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