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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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어린이집이나 주일학교를 가보면 문제 아동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산만하고, 선생님을 괴롭히고 친구들에게 폭력을 쓰거나 모임을 방해한다. 부모를 보면 참 멀쩡한데 아이는 아닌 경우 난 원인이 참 궁금했다.

나도 아이를 키우고 아이의 곁에서 혹은 모임에서 아이를 지켜보며 또 육아서적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아이들의 문제 행동의 배후에는 대체로 그 부모에게 문제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이는 대체로 부모의 행동을 모방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스트레스를 그대로 방출한다.

문제의 가정이 아니더라도 아동발달단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부모는 때때로 성인의 잣대로 아이를 다루는 오류를 범한다. 교회에서 직장에서 혹은 내가 속한 집단에서 나는 얼마든지 친절할 수 있고 가면을 쓰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가정은 다르다. 내 본성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공간이며 아내와 불화가 생겨도 가정 안에서 그 불화를 처리해야 한다.(집을 나가거나 이혼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 아이들은 노출되고 때로는 피해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나도 내 몸이 힘들거나 스트레스가 심할 때 아이를 힘으로 제압한다.

우리 가정은 아이에게 매를 들거나 때리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지만 아이가 나름의 의견을 이야기할 때 그 과정을 무시하고 아이를 끌고 가거나 억지로 목욕을 시키거나 정신없이 보고 있는 TV를 꺼버리거나 장난감 가게에서 팔을 잡아 끈다. 그러면서 자꾸만 '얘는 왜 이러지? 누굴 닮아서 저러니?'라고 아이를 꼴통취급한다. 실제로 그 부모나 가정환경이 꼴통 수준일 확률이 90% 이상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밖에서 사고치면 부모 얼굴에 먹칠하는 거니까 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알고 살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이 말에 소름이 돋는다. 자식은 나와 아내, 그리고 가정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한 CCTV와 같다. 아이가 때로 문제행동을 보일 때 일단 나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참 아이를 통해 배우는 게 많다.



*facebook 노트: 2011년 9월 22일
2011/09/22 23:28 2011/09/2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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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까지 뒤척이는데 옆에서 아이가 쌔근거리는 숨소리에 울컥한다. 네 숨소리가 아빠에겐 너바나나 글렌굴드, 키스 자렛보다 아름답게 들린다. 이런 네가 자라서 나처럼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내품을 떠나면 참 서운할거 같아.. 우습게도 난 자주 그 생각을 하는데, 막상 그때가 돼도 난 잘해내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날 창피해하지말길..

 

- 사랑하는 아빠가

 

 

'11. 9. 16

2011/09/16 23:39 2011/09/16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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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건강검진 보내놓고 성하랑 놀면서 기도했다.
아픈 곳 없게 건강하다는 결과 나오게 해달라고.
아내 사랑하는 마음이 이런 때 드러나는구나 생각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미 환자들로 가득한 병원에서 검진받는 아내만
무사하길 기도하는 내가 하늘나라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잠시 생각해봤다.
'거.. 누구라도 자기 아내 먼저 기도하는 법입니다.. 험험'
조용히 중얼거린다.

오늘 밤은 여러 병원에 흩어진 환자분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11. 9. 14

2011/09/14 23:39 2011/09/14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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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1:8-14)

시심 본문 중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때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맙시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을 반대하기 마련입니다"라는 적용 문구는 현실에 맞지 않다.

장로 대통령님을 모시고 고.소.영 인사가 회자되며 강남 한복판에서 무리하게 건물을 세우고 뉴라이트 정신에 입각한 짝퉁 정당을 창설하려는 지금은 오히려 요셉의 생전의 시대가 우리 현실에 더 맞을 것이다.

내가 기독교를 믿고 세상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당한 적이 있나 생각해본다. 감옥에 갖힌 적도 없고 바울처럼 돌에 맞거나 매질을 당한 적도 없다. 군대에서도, 입사할 때도 불이익을 당하긴 커녕 종교활동을 적극 권장받았다. (도리어 담임목회세습 반대 시위에 참여했더니 장로, 집사라는 분들의 육두문자와 신변을 위협하는 메일을 받았고 시위장에서는 교인에게 비난을 당하고 멱살을 잡혔다!) 도대체 이 본문을 현재 기독인으로서 우리 삶의 고난으로 연결시키는 이유가 뭔가.

물론 불교집안에서 종교로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개독교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강한 권력이 나의 인권을 훼손할 정도의 고통을 사회전반에 행사한 적은 없다.

우리 솔직해지자. 우리 시대 기독교는 혼합주의 내지는 정치-종교의 일치 시대에 살고 있다. 기독교가 험한 길이라면 신학생들과 목사들이 이렇게 넘쳐나고 밤거리에 붉은 십자가로 도시 가득히 도배되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경제 등 사회 전반에 이렇게 기독교 간판을 걸고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할 것이다. 괜시리 성경묵상 적용 문구를 보니 기독교인인게 더 부끄럽다.
2011/09/12 21:21 2011/09/1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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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4:11~22)

가끔 아동성폭행범 뉴스가 나올 때면 쥐도새도 모르게 범인을 잔인하게 죽일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의 원수에서부터 지하철에서 성희롱을 즐기는 직장인까지. 악행을 범하려는 그 자리에서 손목이 잘라졌으면 좋겠다.

그 뿐이랴, 개인적으로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거나 모멸감을 주었던 일들로 인해, 나는 너무 억울해서 밤새도록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상황을 곱씹고 있는데 당사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잘 지내며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 그 만행이 만천하에 까발려지길 매순간 고대한다.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진정 존재한다면 나는 매일매일 소원을 빌 것이다. 한번에 여러 사람을 해치울 수 있게 소원을 조직적으로 Grouping할 것이다! 까먹거나 빠져나가게 되는 악인이 존재하지 않도록 전심을 다해 문구들을 만들어 '바람돌이'에게 빌 생각이다.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다윗'으로 추정되며 그의 노년의 지혜를 풀어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만을 하며 평화를 찾기까지 힘을 다하라고 권한다. 주님의 얼굴이 악한 자를 노려보시고 그들의 기억을 이땅에서 지워버리신다고 말한다. 의인의 부르짖음을 주님이 반드시 들어주시고 재난에서 건져주신다고 약속한다. 악인은 끝내 죽음을 맞고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처음 이 메시지를 듣던 청년시절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감격의 눈물이 아닌 내 혈기를 막아서는 세력에 대한 분함 때문에. 왜.. 왜 나를 막아서는 건가, 당신은 악인들을 그대로 놔두면서,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때때로 그들이 회개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용서해 줄 마음도 있으면서. 지금 왜 나의 이 울분을 참으라는 건가.

솔직히 지금도 나는 그런 생각에 자주 사로잡힌다. 평화로운 겉모습과 다르게 매사에 불의한 일들에 심기가 불편하다. 때때로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고, (아내만 인식하는) 이마가 붉어지면서 온유한 말투로 뼈있는 소리를 내뱉는다.

사실, 살면서 누군가는 나로 인해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내가 참지 못한, 나쁜 감정에 휩싸여 잘 처리하지 못하고 내달린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고 밤에 잠을 설칠 정도로 내 행동에 이를 갈았을 것이다. 몇몇 기억은 분명히 그러하리라고 확신하며 몇몇 기억은 뚜렷하진 않지만 분명 나는 그 당시 내가 되고싶은 올바른 모습이 아니었음에 분명하다.

강간범, 살인범 등 범죄자의 대부분은 부모로부터 유기되었거나 심한 학대와 폭행, 구타를 당했던 이들이거나 사회에서 심한 차별과 모멸감, 불합리한 대우를 받은 경우가 많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이런 경험으로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행동에 어두운 원인이 있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나쁜 기억과 에너지가 시간의 축을 따라 흘러간다. 누군가 술에 취해 쇠망치로 내 머릴 내리쳤고 나는 요람에서 방긋 웃기만 해도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는 대,신 내가 보호받아야 할 부모로부터 칼에 찔리고 강간을 당하고 소년원으로 보내졌다면, 나는 누군가가 되었건 손에 잡히는 어떤 이에게나 똑같이 갚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악행의 인과응보.

"주님의 얼굴이 악한 자를 노려보시고 그들의 기억을 이땅에서 지워버리신다"는 그 분의 약속은 이 고리를 끊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내가 악인의 팔다리를 잘라서는 그 악행의 인과응보를 끊을 수 없다. 누군가는 자신의 환경탓에 나에게 복수하려 들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은 나를 해하려는 이들에게 또다른 악한 마음의 씨앗을 심겨줄 것이다.

"평화를 찾기까지 힘을 다하라" 평생 전장의 피흘림, 집안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의 연속, 부하를 죽이고 아들의 칼을 피해 돌아다닌 다윗은, 말년에 그 악행의 인과응보의 고리를 끊는 "샬롬"의 선언이 정말로 시급하고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악이 사람을 통해 만연한 것을 싫어하시고 그들의 고통스런 기억과 행동을 이땅에서 축출해버리고자 하신다. 그 뜻이 이뤄지기 전에 우리는 악한 마음과 행동을 해결하지 못한다.
2011/09/12 21:20 2011/09/1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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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3:13-22)

아주 어릴 적 하나님이 계속 나를 지켜보며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마치 매순간 119 구급차 내지는 엄마아빠가 출동대기조처럼 내 근처에 있다는 생각. 그 상상만으로도.

나이가 들고 사춘기 시절이 되고 하나님은 항상 내 근처에 있다지만 나에게는 환난과 고통이 찾아왔다. 입시때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는데 원하던 대학에 낙방하고, 몸은 하나님이 천사를 둘러서 바이러스의 침투조차 막을 수 있을진대 한달 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뭐냐 이건..

나이 서른이 넘자 매순간 하나님이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는 게 조금 씁쓸할 때가 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내가 하는 생각들, 말들, 그리고 지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조차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내 맘속 동기들을 누군가 아무런 스크린없이 똑바로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미드에나 나올 법한 최첨단 수사대가 내 내밀한 범죄를 캐러다니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는 나이에 따라 달랐고 지금도 마냥 좋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 분 입장에서도 내가 피조물의 기대치에 한참 못미치는 일을 버젓이 하면서, 마치 윤리적으로 '청정인간'인냥 주변에 그럴싸한 말을 해댈 때면 분명 그분은 어깨를 들썩이며 이마를 찌푸릴 것이다. 내가 성하에게 무서운 눈으로 '한번만 더 그러면 아빠한테 혼나!'라고 아주 먼 공간에서 소리치고 계실지도 모른다.

시편의 저자는 군대를 데리고 전쟁을 하던 경험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는 전쟁 가운데 장수가 뛰어나다고 해서 혹은 병사들의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전쟁이 항시 넉넉히 이기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저자는 그 정확한 순간에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명확히 경험했다. 그는 구원의 순간을, 마치 미운 짓하던 내 자식도 결정적 위기의 순간에 뛰어들어 구해주는 엄마의 급한 손길처럼 느꼈을 것이다.

일상의 순간순간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심한 애증이 교차한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자주 나는 '나라는 피조물'을 버리고 싶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창조-피조 관계 속에서 얽힌 혈연? 창연?은 정말 다급한 순간에 '미운 피조물 새끼'를 구원하는 그분의 손길을 경험하고 살아왔다. 시편의 기자는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 같고 나또한 그에 심하게 동의한다.

2011/09/05 21:20 2011/09/0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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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교육감의 2억 전달 건 관련하여, 일부 진보진영의 우려감과 당시의 정황을 고려한 감싸기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후보 단일화와 당선 이후 2억을 전달해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진보진영에서는 '관행' 내지는 현실적으로 눈감아줘야 하는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게 솔직히 불편한 마음이다.

만일 '곽노현'이 아니고 '정형근'이나 '오세훈'이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면서 2억을 나눠주고 그것이 선거의 대가성이 없는 돈이었다고 말했다면 과연 진보진영에서는 문제삼지 않았을까. 결국 이것이 진영논리가 되어 나는 착한 편이고, 착한 편의 마키아밸리즘적 정치 행보는 때때로 배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건 현실 정치를 이전투구의 장으로 만드는 격이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나는 곽교육감의 정치 성향과 그의 교육 정책을 지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태로 더 마음이 아프고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심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건, 진보보수 사이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곽후보의 감싸기와 까기로 일관하는 두 극단적 반응에 심한 무기력함을 느낀다.

이 사건은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경선을 포기한 후보에게 당선 후 당선자가 위로금(이 됐건 대가성이 됐건, 어려움에 처한 이에 대한 배려가 됐건 간에)을 직접 금전적으로 보상하게 만든 경선 시스템의 불합리함에 있다. 그렇다면 그 불합리함, 부정행동에 대한 자성과 그 시스템의 개정에 여당, 야당, 시민단체, 국민이 모두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고민하여 개선책을 찾고자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일개 교육감 한명의 부정행위에 여야가 이전투구식 입장표명을 해대기에 앞서, 최소한 그 부분을 먼저 이야기해야하지 않냔 말이다. 그 구조의 문제를 다루면서 곽후보의 2억 전달의 선의나 억울함을 정상참작하며 그 배경도 따져보고, 반대 입장에서 위법행위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해야 하지 않을는지. 한편으로는 진보측에서도 마치 자신이 교육감 경선에 나서면 현실정치의 관행과는 상관없이 독야청청할 것처럼 곽교육감을 비난하는 것도 탐탁치만은 않다.

곽 교육감도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그에 대한 원론적 비판을 거둘 셈인가. 진보 진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조금이라도 먼지가 묻으면 야쿠자처럼 할복하는 문화를 강요하는 건 아닌지. 선거에 있어 여야 후보 모두가 공정하게 부정함 없이 당선되는 중립적 구조에 대한 고민 없이 이런 진영논쟁의 진흙탕 싸움에 이제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내가 생각하는 곽 교육감 사건에 대한 생각은 이러하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오후 5:27

2011/08/31 21:19 2011/08/3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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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회 관련해서 자끄 엘룰 등을 언급하며 기술에 비판적인 이들 가운데에는 서울공화국에 살면서, 자동차를 몰고 노트북과 스마트폰, 타블릿 PC를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적극적으로 기술의 진보를 흡수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일상영역에서 기술 발전과 적극 동행하는 현실 대비 기술문명에 대한 이상적 비판 사이의 간극이 생기는 것이다. 이럴 경우 실상 당사자들은 언행의 불일치, 더 나아가서 자신은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지적 우월감을 행사한다는 비난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부터 일상과 괴리된 비판에 자신이 없어졌다. 한동안 거대도시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고가의 가전제품을 쓰지는 않아도 대체로 기술사회의 혜택을 적극 수용하는 나에게 있어, 인생의 상당 시간을 귀농하여 농부였던 엘룰이나 문명을 전적으로 거부했던 니어링 부부, 멕시코 전쟁에 항의하여 오두막 생활에 전념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삶은 피부에 와 닿지 않게 참 멀기만 하다.

내가 기술사회를 비판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들의 삶처럼 일상의 알맹이가 있을 때가 될 것이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오전 9:11

2011/08/30 21:17 2011/08/3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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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무상급식을 지지하고 투표 자체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오세훈 시장과 무상급식 관련된 진보진영의 반응에는 어느정도 반감이 들었다. 일부 과격한 표현도 그렇고 특정 정치인의 지지여부와 복지정책을 1:1로 연결하는 단순구도가 그러했다.

물론, 무상급식 찬반투표를 오세훈 시장이 자신의 승부수로 던진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보수성향 시민들이 오세훈을 구하기 위해 투표에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영조의 큰 치적은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자기 백성과 정치인 모두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은 때로 좌파우파 논쟁을 상식-비상식 구도로 가져가면서 자주 보수진영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극우 정치인들이 아닌, 보수 성향 국민들을 그런 선악 구도로 몰고 가는 부분이.. 내심 불편하다. 김두식 교수님의 말처럼 SNS 안에서 진보 과잉 현상이 겨우 찻잔 속 폭풍에 불과하겠지만, 그 과잉 공간 안에서 좀더 예의와 겸손으로, 또한 깊은 묵상으로 채워지면 좋겠다.

나의 선행은 나의 바른 성품에 기인하는 것이지, 타인의 악행으로인해 나의 도덕성이 높아진다고 생각치 않는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24일 수요일 오후 8:40

2011/08/24 20:35 2011/08/2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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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새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성하랑 자려고 누웠는데 번개가 번쩍 하자 성하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게 뭐야?"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 사진찍을 때처럼 번쩍하지? 아빠랑 같이 사진찍자"라고 둘이서 사진찍는 흉내를 냈다.

옆에서 듣던 아내가 그게 무슨 사진찍는 거냐며 아이에게 거짓말한다고 어이없게 웃더니 "성하야,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쿵쿵 소리나는 건 구름들이 서로 박치기를 해서 그래. 구름이 쎄게 박치기 하면서 번개도 치고 천둥소리도 나는거야"라고 설명한다. 성하는 한동안 별 반응이 없이 누워있었고, 그렇게 여러차례 천둥번개가 쳤다. 난 그게 뭐 대수냐며 같이 멍하게 누워 있는데, 성하가 가만히 천둥번개 소리를 듣다가 "구름이 너무 많이 박치기 해서 머리에 피나겠다"고 혼자 웃으며 말했다. 아내와 나도 더불어 웃었다.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내뱉는 말들이 아이의 동심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의 '교정'은, 3살난 아이가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 웃긴 말로 떼우려는 내 가벼운 생각 이상으로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른들이 그들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적 생각들을 가로막는 일들이 비단 이뿐이랴. 아이에게 아내같은 엄마가 있어 참 감사하다.


(페이스북 2011년 8월 17일)
2011/08/17 23:27 2011/08/17 2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