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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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고난 거짓말쟁이일 경우,
만우절에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혹은,
거짓을 말할 의도를 가지고 만우절에 거짓말을 할 경우
그것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선의를 가진 거짓에 거짓만이 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거짓 최면을 걸며
인간관계를 맺고 대화하고 있지 않다고 누가 명백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과연 이게 다 웃기려고 하는 말이란 사실에,
흔쾌히 공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늘이라는 특이 상황에서 참을 말하려는 건가 거짓을 폭로하려는 건가...
2014/04/01 23:44 2014/04/01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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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최근에 우연한 기회로 김두식 교수님을 만났다. 만나는 내내 마치 옆에 창비 책다방 팟캐스트를 틀어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ㅋㅋ 개인적으로 평하기로는... 소심한 듯 날카롭고 어눌한 듯 세련된 톤이었다.^^

#1.
사실 교수님은 기억을 못할 수도 있지만 김두식 교수님에 대한 복잡한 심경은 15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김교수님은 기독 진보매체인 <복음과상황>의 간판 필진이었다. 지유철(당시에는 그렇게 불렸으므로) 전도사님, 유재희 간사님(우린 그렇게 불렀다) 등과 더불어 내가 가장 애정하는 연재글 필진 중 하나였다.

당시(1999년~2000년 즈음)는 한창 독자모임이 이뤄지고 몇몇 대형교회에서 담임목회직 세습반대 운동이 한창이었던 지라 교계 안에서... 안티적인 발언을 하는 이들이 복상 필진과 독자 사이에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김대중 정권 시절이니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담론들이 꽃을 피웠고 안티 조선 운동과 같은 내거티브 운동들이 한창이었다.(내 정서 상으로도 당시엔 누군가를 '까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분위기에서 김교수님은 그닥 어떤 운동성있는 발언이나 참여에 미온적이었기에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운 마음이 항상 있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김교수님은 연재글의 후반 즈음에 내거티브 운동 자체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본인은 내거티브 운동으로 세상을 바꾸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차라리 그 정력이면 포지티브 운동에 힘을 싣는게 낫지 않겠냐는 류의 논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온라인 게시판에다 그런 김교수님의 반응에 실망했다는 류의 까칠한 글을 썼다. 헌데 김교수님이 직접 내 글에 자신의 솔직한 댓글을 달아주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래, 맞다 나는 비겁한 사람이고 내거티브 운동 자체가 불편한 사람이다, 너무 기대하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 실망감이 사라지지 않았고 이후로 그의 연재는 탐탁치 않은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재미있어 하며 계속 읽곤 했던 기억이 난다.-_-;;; 물론 우리가 알다시피 그 이후로 김교수님은 연재글을 모으고 다듬어서 책을 내기 시작했고 그의 글의 상당 부분은 양심적 병역거부, 동성애 문제 옹호, 법조계의 비리 지적 등 교계를 넘어서서 한국사회에서 독특한 정화지점을 만들어냈다. 뭐 지금은 굳이 내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결국 어느 순간 불편했던 과거의 기억을 그저 그렇게 지웠다. 아니 지웠다기 보단 너무 쉽게 잊혀져 버렸다.

#2.
오늘. 문득 페북을 보다가 한종호 목사님이 공유한 신영복 선생의 유투브 강의를 클릭했다. 한시간이 넘는 강의인데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찌릿한 느낌으로 선생의 강의를 봤다. 사실 나는 오랜 시간 신영복 선생님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김두식 교수님에게 가졌던 내 불편한 마음과 어느 정도는 비슷한 것이었다. 하다못해 나는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의 추천사를 신영복 선생이 쓴 것도 어느 정도는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내 안에 이분법처럼 작동하던 사회참여의 어떤 기준을 준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대목이기도 했고, 보수세력에 대한 내거티브 운동, 혹은 그에 상응하는 발언, 그것도 아니면 그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어떤 행동이 이루어졌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내 판단의 분수령이기도 했다.

사실 오늘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다 표현하지 못할 것 같은 어떤 느낌, 생각이 안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사실 나는 항상 신영복 선생의 글과 그 분의 삶을 사랑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표현대로 신영복 선생이 자신의 위치에 계속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위로와 힘이 된다는 사실에 상당 부분 공감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내 잦은 불편함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작위적이고 내 안에서 기인하지 않은 때로 나조차도 불편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기도 했다.

#3.
이 정서를 누군가가 공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김두식 교수도, 신영복 선생도 내면 깊이 좋아했다. 내가 실망했다고 말하고 다니던 그 시절조차도 그랬다. 상당히 오래 주절거렸지만, 정작 그 말이 하고 싶었다.
2014/03/09 23:39 2014/03/0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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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내가 실내놀이터에서 모여있는 엄마들 대화 중에 남편에 대한 호칭 문제를 지적받았다는 얘길 했다. 흥미로운 건 그 얘길 처음부터 한 게 아니라 한참을 사귄 지금에서야 꺼냈다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은 친해지면 무례하게 개입해도 된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하는 것 같다. 이런 오지라퍼들...

 

신혼초부터 아내는 나를 두고 자주 '용팔이'라고 불렀다. 뭐 '오빠'라고도 부르고 '여보야'라고도 부르지만 나도 '배뱅'이라고도 부르고 '여보야'라고도 부르니 쌤쌤인 셈.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내가 남편의 별명을 불러댈 때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대체로... 여자가 여전히 철없다 여긴다.

 

남편은 가장이니 집에서 둘이 어떻게 부르건 간에 대외적으로는 남편을 어른 대접, 집안의 대장 대접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체로 실내놀이터에서 엄마들을 지켜본 바로는 다들 모여서 남편욕을 해대다가는 남편이 나타나면 예의를 갖추는 행동, 미친듯이 씹어대다가 저녁시간이 되면 따신 밥을 지어주려고 허둥지둥 귀가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내가 회사에서 상사를 대하는 태도와 아주 유사하다.

 

전형적인 가부장제 사회의 일원 역할을 여성이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마음이 그렇지 않아도 그 룰을 확실히 따르면서 주위에도 그 룰을 어기는 여성에게 지적질을 해대는 경지에 이른 셈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페르조나가 얼굴에 완전히 들러붙은 경우랄까. 실내놀이터에 죽돌이처럼 앉아 있다 보면 집에서도 거대한 가부장제 기업의 말단 사원 노릇을 하고 있는 착한 며느리 직원들이 많다.

 

살아보니 아내의 솔직함이 좋다.(때론 쪼꼼 과할 때도 있다.-_-;;;) 아내에게 내가 '용팔이'이기 때문에 용팔이라고 부르는 거지 오빠의 위치에, 좀더 먼 위치에 내가 서 있었다면 아내는 절대 나를 그렇게 친근하고 만만한 말투로 부르지 못했을 것을 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친구라고 말했다. 스승이자 주인의 서열에서 오는 두려움을 해소한 자만이 친구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진정한 관계에 자신이 없는 많은 이들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저 정치적 관계의 설정을 유지하고 타인에게도 강요한다. 그 결과 피상적인 관계만이 남는다. 팀원은 팀장의 뒷담화를 까고 앞에서만 그 룰을 지킨다. 아내들도 가부장 기업 안에서 그 행동을 답습한다.

 

진정한 관계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로 나아간다. 부부가 진정한 친구가 되고 나면 서열과 피상적인 대접의 눈치가 필요 없어진다. 진정한 존경은 상호 친밀함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떤 행동을 피상적으로 강요하고 그것을 학습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로, 나는 아내의 '용팔이' 호칭을 지지한다! (주먹 꽉지고...-_-v)

2014/03/09 23:38 2014/03/0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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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가장 크게 느낀 건 대학생들이 문화소비자의 위치로 전락한 때부터였다. 학생들은 대자보로 의견을 말했고 문화의 밤이나 동아리 축제, 대학축제 같은 공간에서 컨텐츠의 생산자로 자리매김했다. 언제부턴가 대학교의 대자보는 기업들의 홍보지로 가득차게 되었고 학교의 축제도 엄청난 돈을 들여 아이돌 그룹을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됐다.

 

캠퍼스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를 소비하는 곳, 아니 문화와 무관하게 취업준비에 집중해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담론을 생산하던 많은 지식인들도 어느덧 도매상을 자처하거나 문화비평, 이를테면 음악평, 영화평, 서평에 몰두하는 모습도 이제는 익숙하다. 대중은 맛집 비평, 대기업 상품평에 자신의 노하우와 지식의 깊이를 내보이며 뛰어난 제품들의 간접 홍보자를 자처한다.

 

어느덧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보여주는 행위가 되었다. 문화생산자는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과 권력, 인프라가 갖춰져 있는 프로페셔널한 영역에 국한되고 그 영역에 들어가려면 엄청난 경쟁력을 뚫어야 할 뿐 아니라 들어가서도 '저녁이 없는 삶'을 담보로 한 야근과 노력, 경쟁구도에 순순히 자신의 청춘을 바쳐야 한다. 그 청춘의 녹을 먹고 그 안에서 선별된 글로벌 경쟁력이 보장된 컨텐츠만이 살아남게 되고, 다시 그 양질의 컨텐츠를 지친 대중은 찬양하고 열광해하며 쉼을 얻는다.

 

백설공주를 상상하면 월트디즈니 만화의 최적화된 캐릭터가 떠오르고 커피나 마카롱만 검색어에 쳐도 최고의 브랜드를 찾아준다. 조금만 어설퍼도 우리는 채널을 돌리고 음식점에서 먹다말고 뛰쳐나와 인터넷에 악평을 단다. 소비자가 일상에서조차 생산 구조 자체를 제로섬게임으로 내몰면서도 대중은 책에서, 뉴스에서 읽는 신자유주의 유령만을 비난한다. 사실상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본주의를 찬양하며 일상적으로도 경쟁을 부추기며 일상적으로도 차별에 찬성한다.

 

아이들 재롱잔치는 내 아이이기 때문에 감내해도 남의 아이의 어설픔에는 하품을 해대고 제품의 하자는 고쳐지길 기대하기보단 그 제품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기도 한다. 그러한 긴장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이미 컨텐츠를 생산해내던 행복한 아마추얼리즘을 잃었다. 교회에서 밤 늦은 저녁, 청춘남녀가 모여 낭송하던 자작시나 클래식 기타를 뜯으며 화음을 맞추던 어설픈 듀엣곡들은 없다. 자신의 창의성을 뽐내기 보다는 프로페셔널들의 컨텐츠를 평하며 그것에 안주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나또한.
자주 그 장단에 춤을 추다가도 가끔씩은 이런 일상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를 떠올리곤 한다. 한때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였고 겁없이 무대에 나서곤 했다. 서로를 글로벌 잣대로 냉정하게 평가하기 보다는 어설든 매력에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향평준화됐지만 그런 사실마저도 행복해했다. 가끔 겁나게 잘난 녀석이 나타날 때면 시샘을 하면서 속으로 열광하기도 했다. 지금의 삶이 지옥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가끔 어설프게 주변에서 만들어내던 컨텐츠들이 그립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14/03/09 23:37 2014/03/09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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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ront Loading 프론트 로딩
차주 월요일 임원 주간업무 회의를 위해
금주 화요일 파트주간업무회의, 수요일 팀주간업무,
목요일 센터주간업무, 금요일 최종 수정한다.
결국 월요일 회의를 마친 다음날 차주 업무보고를
준비하는 셈. 진정한 프론트로딩이라 하지 아닐 수 없다.

2. Concurrent Engineering 동시공학
1항에서 언급한대로 업무보고서를 한주 내내 써야 하기
때문에 보고서만 쓰고 있으면 일은 언제하냐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다. 고로 하지도 않은 일을 주초부터 할 것처럼
보고서를 쓰는 것과 더불어 진짜로 일도 같이 해야 한다.
이른바 예측보고서를 쓰면서 실행보고서로 업데이트 하기.
진정한 동시공학의 꽃이라 칭할 수 있겠다.

3. Reverse Engineering 역공학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의 제품을 가져다가 뜯어보고
그대로 카피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따라잡는 기법이다.
이 기법이 가장 잘 활용되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보고서쓰기.
임원 보고 및 결재가 잘 되는 보고서를 입수하여 색깔, 폰트,
배치, 문구들을 그대로 재활용한다. 이 기술력을 내재화하면
템플릿을 만들어서 숫자와 상황에 따른 단어만 조금 수정해도
뛰어난 성과를 보장한다... 진, 진짜다.
2013/12/06 23:33 2013/12/06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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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서 뭐가 될까'

여전히 고민한다고 어디에선가 툭하고 던진 말이
회자가 되었다. 아직도 그런 생각하냐고...
얼마전 강의로 만난 윤태호 작가도 장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조금 놀랐고,
며칠 전 아는 분이 '그래, 너는 커서 뭐가 될거니'
라고 말해서 한참을 웃었다. 마음이 통했달까.

요 며칠 사이, ...
여전히 꿈이야기,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는 글들을
페북에서도 종종 읽었다.
여전히 내가 어떤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유아기적
욕망 때문이 아니다.
반복되는 그저그런 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안주하지
않는 삶. 익숙한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일부러 불편하게
만드는 삶의 태도랄까 방향성이랄까.

아직 다 가지 못했다고 느끼는 어떤 방향을 향해
여전히 갈급함을 느끼고.. 예전같지 않은 나,
그 존재의 현실을 살짝 잊는 것, 혹은 잃는 것...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를 보면서 나의 늙어감에
기죽지 않는 것.

그렇게 오늘밤도 나는 커서 뭐가 될까를 고민한다.
2013/12/02 23:32 2013/12/02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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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택배가 주말에도 온다. 주중에 해결이 안 되는거다. 부끄럽게도 택배가 밤에 오면 기뻤다. 퇴근하고 좀 있으면 기다리던 물건을 갖다주니 희희낙낙이다.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 나라에서 내 상품을 가져다 주기 위해 누구네 집 아빠는 밤늦게까지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인터넷을 고치고 전자제품 A/S를 한다. 사실 같은 직장인으로서 퇴근시간 이후에는 방문 서비스가 야근임을 직시해야 하는데 그게 잘 연결이 안 된다.

손학규 전 후보의 모토 '저녁이 있는 삶'... 아빠~ 하며 달려나와 아이가 안아주고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오늘 같은 날 함께 빼빼로나 입에 물고 동화책을 읽고 싶은 평범한 가정생활을. 총알배송이니 당일수리니 하는 매직같은 이야기를 현실화시켜 그것을 대한민국의 경쟁...력으로 담론화하려 한다.

편하면 싱글벙글하게 되는 우리네 삶이 아니, 내 삶이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진행되고 있다. 나또한 그것을 위해 불철주야 일한다. '내 저녁'을 버리는 것이 경쟁력이 되어버렸다.

'총알배송이고 나발이고.'

이 나라는 '타인의 저녁'을 서로가 배려해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각박하고도 견고한 사회구조가 갖춰졌다. 누군가가 해주려는 과한 서비스에 눈쌀을 찌푸릴 수 있는 시민의식이 필요할 정도로 말이다.

30분 이내에 음식을 배달해야 하는 청소년들의 알바 스쿠터들이 도로에서 부딫혀 나뒹굴고 누군가가 괴로워 자살을 해도, 빠름빠름~ 노래할 수 있는 너와 나의 멘탈... 자국민이 힘들어하면 타국민을 시켜서라도 동일한 성과를 내고자하는 글로벌 시장.

책으로만 읽던 이야기. 정서적으로, 머리속 망상 속에서만 좌파행세를 하면 되던 시기를 지나 이제 이 담론들은 점점 내 일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내 양심과 정서가 더 무뎌져야 한다고 속삭인다.

오늘도 나는 내 택배가 오고 있나 인터넷을 뒤져봤다. 어떤 사람이 내 택배를 들고 있는지, 어디쯤 내 택배가 오고 있는지, 내 택배를 든 사람의 휴대폰 번호가 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정말 우리 나라 좋은 나라지? 젠장.
2013/11/13 23:30 2013/11/1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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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요즘 젊은 사람들 스마트폰만 본다고 삿대질을 한다. 나는 이것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뭘하는지 무슨 이유에서 스마트폰에 몰입하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것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에 마냥 비판적이다.

물론 부정적인 영향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비판이 있으면 깊어져야 할 담론이 너무 간단하게 끊긴다. 만약 젊은 것들이 요목조목 스마트폰의 활용을 설명한다면 아마도 건방지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어른이 말하면 네 해야지 어디서... 한국사회의 담론은 이렇게 지위와 서열, 나이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 까라면 까야지 변명질이나 해대고 있어?

이렇게 건강한 논쟁은 어리고 지위가 낮고 서열이 아래인 사람의 구차한 변명이 되고 담론은 '비판이 가능한 서열의 존재'가 정한 이슈에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체화해야 하는 로고스로 전락한다.
2013/10/22 23:29 2013/10/22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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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의 친구들은 대체로 가짜들이다.' 페북에 정말 정성을 들이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 솔직히 유감스럽긴 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내 페친 중 오랜시간 아내의 병간호를 하신 목사님이 계시다. 대체로 내 주변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얼마나 오랜시간을 아내의 병간호로 자책과 어려움의 시간을 보냈는지 안다. 내가 그분의 책을 읽지 않고 그 분의 포스팅을 자주 보지 않는 이유는 그 고통이 나에게 전이될까봐서다. 그 일상의 어려움에 마음을 뺏기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얼마 전 그 분이 아내를 요양소로 보낼 결정을 하셨다. 더 나은 돌봄도 이유이고 목사님을 비롯한 가족이 지쳐서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결정에 대한 상당수 페친들의 반응이다. 한 줄, 두 줄의 글로 '그러시면 안 돼요', '...아내를 더 돌보셔야죠', '사모님을 그런 곳으로 보내지 마세요', '더 힘을 내세요'.

그런 직관적인 댓글을 다는 이들에게 그 목사님이 오랫동안 경험했던 일상을 넘겨주면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는 쉽사리 댓글을 쓸 엄도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음이 힘드시겠습니다...정도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써지지 않았다.

페북의 친구들은 이슈가 되는 인물들에게 자신이 바라는 이상형을 투사한다. 그리고 그가 그 이상형을 계속 유지하길 바라고 응원하고 댓글달고 칭찬하고 지지하고 아름답게 미화한다. 하지만 그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우울해하고 힘들어하고 다수가 보기에 실망스러운 행동을 할 때 더이상 '친구'일 수 없다. 때론 말 한마디를 듣고는 친구관계를 정리한다.

네 말은 쓰레기야. 네 그 한마디만 봐도 네 정체를 알겠어...
30년 넘게 살아온 내 정체를 나도 모르는데 친구라는 이름의 불특정 다수들은 어찌나 나를 잘 아는지 그 사람을 잘 아는지 모두가 인간 심리, 인간 존재의 전문가들이다. 좋아요의 남발만큼 싫어요가 아닌 넌 내 친구도 아냐의 남발이 성행한다.

페북의 친구들은 함께할 때 성장할까. 나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내 생각에 이는 마치 영어회화 학원을 다닌다고 영어가 늘지 않는 것과 같다. 회화반 수업시간에는 공부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공부한 영어가 유효한 영어인지를 네이티브를 통해 검증받을 순 있다. 그룹이 서로 대화하며 내 영어가 통하는지를 확인받을 수 있다.

페북은 공개된 공간에서 나의 사적 영역을 오픈한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하다. 내 내면이 잘 정리되어 있어야 사적공간들이 공개된 SNS에서도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단어로도 상대를 심한 좌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스스로도 자주 친구아닌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이것이 예의의 문제인지 실존적 문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페북의 친구는 상당수가 '가짜'같다. 그렇게 밖에는 그 충격적 댓글들을 이해할 수 없다.
2013/10/20 23:28 2013/10/20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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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를 하다보면 공부가 필요할 때가 많다. 특히나 답이 없는 문제들이 다반사이므로 그 답을 찾기 위해 봐야할 고전적인 문헌부터(내 경우엔 이를테면 기계진동학, 동역학 같은) 최신 기술논문, 기술동향을 알 수 있는 잡지 등

물론 루틴하게 업무를 반복적으로 처리하는 경우에도 답을 찾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단회적이거나 그 시스템에 한정된 해결책일 뿐 그 근본 귀인, 메카니즘의 이해가 없으므로 지식의 축적에는 기여하지 않는다.

대체로 내가 맡은 시스템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쓰는 시간 중 순수 공부를 하는 물리적인 시간은 얼마나 될까. 대략 맨아워의 1/5정도를 쓴다. 물론 이 분야에서 10년 가까이 일을 했으니 예전에는 더 많은 시간을 해답을 찾기 위해 썼으리라.

어쨌든. 나머지 4/5의 시간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행위 시간'이다. 내 경우엔 내가 맡은 설계 부품의 시뮬레이션과 단품, 실차 평가간의 상관성, 개선 여부, 데이터의 정리, 보고서 작성을 포함한다. 특히, 보고서는 보고 받은 이에 맞게 가공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입증된 하나의 개선안은 exemplar가 된다. 그리고 유사한 문제에 이 개선 사례를 적용하여 동일한 해결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대안이 된다. 그 대안에 의해 문제는 개선되고 시스템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종종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문제를 분석하는 것에 지나친 의의를 두는 것 같다. 혹은 날카로운 분석에 이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어떤 시스템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그 길을 누군가 죄꼬리만큼이라도 걸어가야 그것은 하나의 실행가능한 exemplar가 된다. 그 길을 누군가가 걸어가줘야 하고 스스로는 관행의 비판과 분석, 대안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물론 모든 담론은 대안이 있어야 하고 또한 스스로가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 없다. 메타 비평이나 정치 비판도 어떤 의미에서 주체나 전문가가가 아닌 이들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메타 비평도 지평을 넘나들 때 exemplar를 필요로 한다. 정치 비판에서도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본인이 걷지 않았더라도 성실히 누군가가 걸은 exemplar를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자주 담론은 스스로가 앙가주망(참여)을 요구한다.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공부하는 이들이 분명 더 나은 해답을 발견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exemplar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공부는 구조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점점더 exemplar주의자가 되어간다.
2013/09/13 23:26 2013/09/13 2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