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지나가는 미국인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은 모양이다. 예전에 박노자 교수의 글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듯이, 한국인들은 지나가는 미국인들을 보면 자신이 친구가 되어 주겠다며, 그 대신 자신에게는 영어를 가르쳐주고 미국인에게는 자신이 한국 문화나 생활을 위한 가이드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곧잘 한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박노자 교수를 미국인으로 오해하여 길거리에서 이런 황당한 ‘친구 거래'를 제안한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버스에 타고 있던 제3세계에서 온 노동자가 옆에 있던 아이에게 귀엽다고 손짓을 했다가 더러운 병에 옮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 아이 어머니의 반응에 서러움을 토로한 기사를 얼핏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버스에 탔던 제3세계에서 온 노동자가 만약에 해럴드나 타임즈를 들고 있는 미국인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나 혹은 백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한다고 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백인들 옆에서 함께 웃으며 대화하는 자신을 상상하기는 쉬워도 스크린에서 남미, 혹은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왠지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대하듯 쉽게 타자화시키면서 말이다. 이런 현상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북미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서도 자주 보여지는 현상인 듯 하다. 이런걸 두고 옥시덴탈리즘이라고 칭하는 건가.
서론이 길었다. 내가 열과 성을 다하여서 소개하고 싶은 본서 「벽을 넘어 열방으로」(원제 : A Time for Mission)는 한국에 소개된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의 유일한 책이다. 서론에서 이미 감지했겠지만, 나는 본서의 탁월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독자들로 하여금 본서의 저자에게 되도록 집중하게 만들고 싶다.
본서의 저자인 사무엘 에스코바는 페루 태생의 입지전적인 신학자로 1974년 로잔세계복음화대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본서의 서문에서 선교한국의 상임총무인 한철호 총무는 그를 가리켜 “남미 출신으로 오랫동안 국제기독학생회(IFES) 간사와 선교운동 지도자로 사역했고 현재는 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 서구와 2/3세계를 모두 잘 이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전 세계적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평했다. 하지만 사실상 한철호 총무의 에스코바를 향한 관심은 훨씬 이전부터였던 듯 하다. IFES World Assembly가 한국에서 열렸던 1999년 한국기독학생회의 소식지인 <대학가 >를 통해서 이미 한철호 총무는 에스코바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 남미국가들은 좌파혁명에 시달리고 있었다. 각 국가들은 부정과 부패로 파산하기 시작했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혁명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캠퍼스 젊은이들마저도 무력혁명에 가담하거나 대부분 운동권 세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무력혁명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도 총기를 소유하고 때로는 강의실까지 들어와 자신들의 혁명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상황이니 교수들도 그들이 두려워 방관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당시 대학 안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하고 있던 복음주의 학생(IVF)들은 이러한 상황에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먼저 교수님을 찾아가 정식으로 학생들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그들은 강의실로 들어가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됐다. 학생들은 말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룹을 만들어 빈민가로 찾아갔다. 당시 남미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정부의 부패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외면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학교 안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과격 무력운동권에 질려 있던 학생들이 이 모임에 관심을 보였고, 곧 성경공부 모임은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무력혁명권 학생들을 자극했다. 성경공부 모임 리더들은 테러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다. 결국 한 리더의 약혼자인 자매가 테러로 죽임을 당하게 됐다.
이런 희생을 치른 결과 남미의 IVF학생모임은 대학 안에서 점차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복음이 그들이 처한 가난과 부패라는 상황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남미의 학생운동은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고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대륙으로 바뀌었다. 당시 남미 IVF의 간사였던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는 현재 미국의 남침례교신학교 교수면서 IFES 국제 총재이다." (1999. 7. 대학가, "국경 없는 캠퍼스의 증인들" 중에서 / 한철호)
본서를 통해서도 에스코바는 기존의 선교 관련 서적과는 다른 접근 태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20세기 후반부터 변화된 2/3세계 선교사들의 증가에 주목한다. 그는 오늘날은 까만 눈에 갈색 피부를 가진 라틴 아메리칸 혼혈을 의미하는 페루인 '메스티조(mestizo)'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있고 있으며 자신이 몸담았던 선교연구센터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제 미국인들이 아니라, 나이지리아에서 의료 사역을 하거나 아마존 밀림에서 교회개척 사역을 하던 한국 선교사들과, 인도네시아에서 신학교 사역에 종사하던 일본인 선교사들, 또 방글라데시에서 경제 개발에 참여하던 필리핀 선교사들이었음을 주목하며 본서를 시작한다.
그는 선교가 세계화 물결을 타는 데만 급급하다가는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경고했으며, 르네 빠디야가 1974년 로잔복음화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인용하여 수많은 선교 기관들이 기독교 선교라는 이름으로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근대의 서방적인 가치관(미국적인 생활 방식)과 전적으로 동일시라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특히 그는 레슬리 뉴비긴이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문화적인 요소를 복음의 본질과 혼동하게 되었고, 그 결과 상대적일 뿐인 자신들의 문화가 마치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잘못 전달하게 되었다"는 표현을 인용하며 복음을 전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문화의 강요 문제에 주목한다
또한 에스코바는 회심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회심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음을 지적하며, 복음주의자들의 회심 초청은 사람들의 문화적 순전성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책에 언급했듯이 그는 1988년에 이 주제를 고려하기 위해 소집된 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로잔위원회의 공동 대회는 "회심에 관한 홍콩 선언"(Hong Kong Call to Conversion)을 발표하면서 내린 결론을 서술했다.
"선교는 너무나 빈번히 복음과 함께 낯선 문화를 수출해 왔으며, 교회들은 때때로 성경보다는 오히려 문화의 노예가 되어 왔다"(제10항)고 상기시킨다. 홍콩 선언은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회심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존재하는데, 회심자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행26:18)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또한 "회심은 회심자들을 '탈문화적'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성경의 계시와 모순되지 않는 가치들은 가능한 한 유지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회심자들은 선교사의 문화로 '전향'할 것을 강요 받아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무엇보다 그는 선교에 있어 성경의 자국어 번역과 전통 문화의 수호에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 선교지의 중심에서 얻어낸 실제 현상임을 증명한다. 그는 “원주민 교회를 세우고 토착 신학을 장려하려는 노력과 아울러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세계화 과정의 불가항력적인 압력을 거슬러서, 지역적이고 토착적인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했으며 수년 전 아프리카 대륙의 무수한 독립 교회들이 놀랍게 발전하는 과정을 깊이 연구하였던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의 선교학자 데이비드 바레트가 지적한 대로 아프리카의 복음화 과정에서 자국어 성경의 존재가 독특한 역할을 하였음을 언급했다.
에스코바는 선교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서구 문화에서부터 기인한 지나친 효용성이나 기술적인 부분 그리고 목표지향적인 접근을 경계한다. 그는 종교성이 포스트모던 문화의 상징물로 재등장한 이 시점에서, 선교를 위한 기도조차 그 교육과 방법론이 포장되어 판매되는 하나의 산업으로 전락하였고, 선교사들 또한 사람들을 '비인격화'하여 그들은 단지 복음전도의 '목표물'로 간주하고 '미전도 대상'으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이런 식으로 하면 '미전도 대상'은 우리가 계획을 성취하고, 우리 전략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데 사용하는 얼굴 없는 대상물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또한 사람들을 다루는 일에서 과학적 정확성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한 일종의 '기술'로 전락하기 쉬우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서구 사회와 또 서구화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란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무엇보다 본서의 큰 유익이 있다면 에스코바는 선교에 관한 본서를 서술하면서 로잔대회의 연장선 상에서 정립된 복음주의의 유산들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켜온 커다란 흐름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974년 이래 제창되어 온 로잔언약을 평가의 시금석으로 삼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적 진리에 비추어서 그리고 새로운 선교적 도전을 감안하여 정직한 평가를 시도함으로써, 선교적인 순종의 새로운 모델을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하 중략….
선교의 열정과 행동주의는 이따금씩, 마치 선교가 인간의 계산으로 다 될 수 있는 순전히 인간적인 사업인 것처럼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세계에 흩러져 있는 복음주의 공동체의 비전을 대변하는 로잔운동은, 이 복음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선교과업을 감당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하나님의 선교 목적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 복음주의 정신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예배의 자세와 헌신적인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본서의 탁월함과는 별개로, 어떤 의미에서 로잔세계화대회의 핵심 인물이며 IFES의 회장을 역임했던 사무엘 에스코바가 한국 복음주의권에서는 회자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빌리 그레엄이나 존 스토트, 월버포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북미나 유럽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열광하면서 남미나 2/3 세계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지적, 문화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마치 미국인들을 보면 귀찮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친구 거래'를 일삼으며 2/3 세계 노동자들의 미소 어린 손짓에는 불쾌해하는 오만함이 우리의 신앙, 혹은 우리의 복음주의라는 울타리 안에도 깊게 배어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