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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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들은 주말내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다가 출근을 하고 일상이 시작되니 하루 업무에 적응하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선생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지만. 그냥 미뤄뒀던 <담론>을 읽으면서 뼈속 깊이 자리잡은 그분의 자리를 돌아보려고 한다. 너무 무겁거나 너무 슬퍼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선생의 글들을 돌아보고 싶다.

2016. 1. 19.
2016/01/24 10:25 2016/01/2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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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위터와 아이폰의 조합은 온라인 생태계를 바꿔놓았다. 트위터에 연결되어 있으면 거의 실시간으로 우리나라 곳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국회에서, 시위 현장에서,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행동들에서부터 셀렙들이 출몰하는 장소까지... 회사에 앉아 있는 내게 트위터는 고급 정보를 전달했고 나는 현장에 없어도 그 정보를 공유하고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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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타임 '아고라'로서의 존재감도 드러냈다. 아침에 터진 이슈에 대해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수많은 유명한 논객들과 파워 블로거, 기자, 트위터리안들이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하고 트위터 안에서 수십번 수백번 리트윗을 거쳐 그 논지를 쉽게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로 인해 생긴 부정적인 영향도 컸다. 오보에 대한 의견들이 한동안 잦아들지 않아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고 원치 않게 사생활이 공개되어 고통받는 이도 생겼다. 그럼에도 당시 트위터는 순기능이 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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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인터넷에서 논쟁을 즐기던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처음으로 논쟁의 묘미를 느꼈던 <인물과사상>은 3개월에 한번 발간되는 강준만의 일인저널룩. 당연히 논쟁의 속도는 더뎠다. 당시 진중권과 홍세화, 유시민 등 걸출한 논객들이 논쟁에 참여했지만 우린 다음 반론을 읽기 위해 3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이후엔 월간 인물과사상을 통해 월간 논쟁으로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한달 간을 기다려 읽었던 반론글을, 무슨 논술 공부하듯 읽고 또 읽고 원글을 찾아 읽고 다시 반론글을 읽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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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게시판 논쟁은 그 속도가 훨씬 빨랐다. 게시판에는 붙박이 대표 논객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게시판의 공기를 주도했다. 갑자기 치고 올라온 뉴페이스는 자신의 지식을 어느 정도 입증해야 했기에, 약간의 허세삘 글들 몇 편을 쏟아내는 수고를 해야 했다.(일종의 레벨 테스트? ㅋ) 어쨌거나 게시판에서 일어나는 논쟁에는 일정한 룰이 있었다. 이슈가 발생하고 그곳의 주류 논객이 글을 쓰면 그것의 조회수가 급증한다. 하루이틀이 지나면 드디어 누군가의 반론이 올라온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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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에는 비슷한 형식이 있었는데, 일단 반론자는 처음 쓴 글의 텍스트를 분석해야 했다. 상대의 텍스트를 해석하여 짚어주고 그 오류를 풀어가는 형식. 이때 뒤집히는 상대의 텍스트가, 딱지 뒤집히듯 휘청거리면 독해의 쾌감이 상당했다. 그렇다고 당시에도 논쟁이 신사적이었던 건 아니다. 마지막에 사족처럼 덧붙이는 말에 상대를 비꼬거나 인신공격성 멘트를 우아하게 덧붙여서 한껏 반론을 도발하며 끝맺었다. 스웩. 상대가 고수라 재반론에 들어가면 게시판 유저들은 하루이틀 뒤에 그 즐거운 독해를 다시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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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제부턴가 난 논쟁을 멈추었다. 모르겠다. 표면적으로는 페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가 논쟁에 적합한 플랫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굳이 SNS에서가 아니라 블로그에서 할 수도 있고 게시판이나 다른 매체를 활용할 수도 있을텐데 표면적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엇보다 내가 논쟁의 '속도'를 못 따라가겠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인 것 같다. 텍스트를 음미할 시간이 없다. 아침에 불거진 이슈는 당일에 일면식없는 수많은 논객들의 물량 공세에 이미 과식 상태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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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논쟁은 '분노의 표출'인 경우도 많았지만 대체로 텍스트 독해의 즐거움, 소화한 텍스트에 대한 해체의 더 큰 즐거움, 뒤집기의 쾌감이거나 때론 정-반-합에 이르는 묘미. 이 모든 것이 타인의 사고와 글쓰기에 대한 기대, 어떤 의미에서의 리스펙? 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 왜냐면 인터넷은 공각기동대의 대사처럼 방대한 공간이라기 보단 또다른 (말 통하는) 한 무리의 게시판 공동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의 인신공격은 라임을 맞추거나 힙합의 훅 같은 느낌적인 느낌도 있었다.

논쟁의 속도. 속도를 논하는 사람은 이미 지나간 사람이다. LP판을 회상하는 사람들은, 정서적인 공감은 받지만 음악계의 대세와는 무관한 흔적같은 존재일 뿐이다. 난 속도감있는 지금의 논쟁이 싫다. 물론 이미 5-6년전부터 몇몇 공간에서 상대를 대놓고 하수나 쓰레기처럼 대하는 정서가 싫었다. 그리고 다시 강산의 절반이 변하고는 혼잣말이나 하고 싶은 소.박.한. 중년사람이 되었다. 요즘은 어떤 이슈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이 더 깊어져서 어느덧 과잉 담론은 흘러가게 두고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이 그렇다.
2015/11/09 21:32 2015/11/09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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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 글을 쓴지 일년 만에 다시 고백할 게 하나 있다.
솔직히 몇년 전까지 나는 '여성 글쟁이'의 글을 즐기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로 그다지 잘 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뭐랄까 약간의 배려차원? 여성이 저평가되고 있다는 인식, 
여성을 도와야 한다는 또다른 차원의 , 여성폄하 혹은 맨스플레인이랄까.
의무감에 의한 봉사나 후원, 뭐 그런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다.
.
2.
페미니즘 담론에 깊이 빠져들게된 최근 2-3년간
나는 독해의 방식, 담화자의 스탠스, 담론의 가치, 
뭐 이런 거창하게 말할 수 있는 '읽기 습속'이 급속도로 변했다.
예전에 즐겨읽던 책들이 지루해졌고 
책제목을 외우고 본문마저 인용하던 많은 책들이 시시해졌다.
반면, '희생과 봉사'의 심정으로 읽던 여성 저자들의 책들은
남성 저자 특유의 지식 도매상이 유통하는 
'상품들'보다 더 본질적이었고 
가벼운 주제에서조차 인간을 깊이 파고드는, 
하지만 분석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은 스타일의 그 무엇을 전달했다.
.
3.
'여성 글쟁이'에 대한 내 입장 변화도 컸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게 만든 계기가 있었는데,
연초에 있었던 강헌 선생의 "음악사 속의 여성" 강의 덕분이었다.
사실 나는 강헌 선생의 스타일에서 약간의 마초성을 읽곤 했는데,
그의 강의에서 잠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마저 들었다.
역사 속에서 남성(성)이 해온 많은 것들의 허망함, 초라함, 어이없음.
뭐 그런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스쳐갔다.
.
4. 
이 이야기의 끝이 기승전-여성, 여성짱, 
뭐 이런 글을 쓰려는 건 아니다.
그저 여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편견을 경험하지 않은 
남성의 입장에서 통용되는 지식, 
통용되는 글쓰기 스타일, 통용되는 사회적 가치,
이런 것들에 대한 편견을 털어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그런 편견을 걷어냈을 때 얼마나 많은 다양성을 보게되는지
뭐, 그런 류의 이야기를 '새삼' 하고 싶었다.
.
5.
오늘 <여배우들, 2009>을 봤다.
그 영화가 무언가를 계몽하진 않았지만,
그리고 그 영화의 내러티브에 어떤 암시도 없었지만.
그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런 글을 풀어내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http://myjay.byus.net/tc/614
2015/10/10 21:25 2015/10/1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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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미더머니의 승리다. 내 관전평은 그랬다.
그 중심에는 물론 '블랙넛'이 있었다.
내 촉으로는 만약 1번의 경선이 더 있었다면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는 룰을
깰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정도.
내 식으로 말한다면 '착한편'(우리 진영) 논객들은
초반부터 블랙넛의 인성을 문제삼았다.
'일베'스러운 블랙넛을 쇼미더머니가 잘 활용하고 있다고
그의 과거 쓰레기같은 랩을 거론하고 공연에서 보여주는 저질 퍼포먼스에
냄비처럼 타올랐다.
.
2.
다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쇼미더머니의 승리다.
아마도 시스템은 블랙넛이 악동으로 부각될 때부터 그의 스토리를 털었으리라.
(난 마이크로닷이 실제로 만난 블랙넛에 대한 호감을 표할 때 복선을 읽었다.)
처음부터 기획되진 않았겠지만 쇼미더머니는 블랙넛을 악동 캐릭터로 
몰고가는 것을 방기, 혹은 유도하다가 그의 고단했던 과거를 통해 
인간 김대웅을 이해하도록 내러티브를 구성했고, 그것은 진정 판을 뒤집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YG등딱지 뗀다던 송민호는 태양의 후광아래 이겼지만 작아보였고 
블랙넛은 인간 드라마를 완성하고, 그간의 비호감 캐릭터를 털고 하차했다.
.
3. 
블랙넛의 후회와 찌질한 랩에는 진정성이 있다.
과거의 고단한 삶과 방황했던 시간들에 대해, 쓰레기 가사들에 대한
비난에 대해 아이돌 스타처럼 즉각 사과하는 치밀함과 신속함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렇다고 이해해 달라고 징징대지 않고
찌질했던 자신을, 그저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음악으로 전달한다.
.
난 여전히 그가 탐탁치 않다. 
가사를 절어서 탈락한 피타입, MC 메타, 하다못해 힙합의 가오를 말하다
아쉽게 하차한 릴보이에 비해 그의 철학?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하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랩은 참 훌륭하다. 플로우를 타는 감각, 딜리버리,
무엇보다 에너지넘치는 다른 래퍼들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능력, 집중력이 남다르다. 
욕하면서도 음악에 고개를 흔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
4.
하지만 나처럼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많은 비판자들은
앞으로도 생각해볼 지점들이 있다.
블랙넛을 비판하던 담론, 이른바 여성혐오, 막장을 즐기는 시스템,
가족주의를 통해 쥐어짜는 감동으로 얼버무리려하는 
저 자본주의에 찌든, 힙합정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쇼미더머니 어쩌고.
.
그 돈에 찌든 시스템이 나같은 정의로운 논객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호소력 있는 내러티브를 주고 있다.
왜냐면 시스템이 김대웅이라는 개인을 우리보다 더 깊이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
'쓰레기 랩이나 내뱉는 인성에 문제 있는 놈'이라고, 그렇게
우린 한 개인을 우리의 담론, 진영, 바른 삶과 행동이라고 규정짓는 사고로
어떤 한 인간의 결과물을 판단하고 비평하고 결론짓는다. 
SNS가 생겨난 이후로는 섬광과 같은 속도로 한 사람의 인생을 저주한다.
.
5.
텍스트 비평이 유효하던 시기가 있었다.
텍스트만 가지고 떠들던, 그래야 했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담론에 의해, 그리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텍스트 너머의 발화자, 담론의 주체,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을 보게 만들었다,.
사이버수사대와 SNS, CCTV가 발화자, 컨텐츠 생산자의 
신상, 과거와 현재, 일상의 모습 그 모두를 털 수 있게 됐다.
.
정의와 사회참여를 외치는 진보교수의 자녀는 해외유학을 나가 있고
사교육을 비판하는 집단은 모두 사교육으로 인서울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고
자비와 사랑을 노래하는 종교인들은 비싼차를 몰고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그 부를 세습하고 성추행을 일삼는데도 건제하고,
김대웅은 지옥같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끄적인 쓰레기 같은 가사를
20대에 읊었다는 이유로 그의 '인성'이 회복불가 수준의 사이코 취급을 받는다.
.
6.
물론 블랙넛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적어도 이것은 구분하고 싶다.
무릎팍도사나 힐링캠프에 나와서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려던 연예인들은
이미 정점에 놓였던 '가진자'였다. 인생이 고단했던 20대의 젊은 래퍼를 까려면 
최소한의 형평성은 맞춰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
최소한 나는 블랙넛이라는 인간 자체의 판단은 조금 더 유보하고 싶다.
인성을 거론하려면 40까지는 기다리고 싶다.
솔직히 블랙넛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뱉어낸 말과 행동에
대해 너무 명확한 구획과 판단이 가혹하리만큼 빠르게 이뤄지지 않았으면 한다.
....그게 내가 자본주의의 쓰레기 방송 쇼미더머니의 승리라고 단언하는 지점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2015/08/24 22:53 2015/08/24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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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불편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나는 연인과 부부, 가족의 문제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어느 정도는 확신하고 있다. 살면서 그런 경우를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순수한 피해자가 아닌 경우도 있고 반대로 가해자도 마찬가지였다.

일례로(물론 이건 가정이다) 아내와 내가 갈라설 경우 대략 10년간의 관계에서 아내가 서운했던 큰 몇 장면들을 추려서 공론화시킨다면 나는 금새 개쓰레기로 전락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될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대략 명확한 선악구도가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명확한 선이 어떤 각도에서는 반전 지점으로 돌변하는 영역 또한 존재한다. 일례로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안 좋은 기억들이 대체로 지배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내게 특별히 악행을 저지른 구석은 없다. 오히려 긴 세월동안 아버지는 나에게 안락한 환경을 조성해 준 좋은 부모다. (좋은 남편이 아니었을 뿐.)

사실 우리가 자신의 사적 영역을 허물면서 받아들이는 일련의 관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잦다. 사적 영역이 허물어지면 서로 간에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 무례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한다. 그게 '스킨십'이 됐건 '과한 농담'이 됐건 '무리한 책임을 지우는 상황'이 됐건 간에 말이다. (물론 폭행, 사기, 강간 등 극단적 범죄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관계에서 자주 권력구도가 발생하고 그럴 경우 '을'이 피해를 입는 일이 생긴다. 게다가 이런 관계가 지속될 경우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를 입었음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요구되고 공론화가 필요하고 사회 구성원의 윤리적 판단이 개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쉽게 타자들의 연인, 부부, 가족처럼 깊은 관계에 자신의 경험을 투사하여 단정짓고 누군가에게 객관적인 사실 이상의 혐의를 씌우고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자신처럼 비판하지 않는다고 주변 사람들마저 한통속으로 몰아가는 반응들은, 적어도 내게는 꽤나 무례하고도 위험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대체로 약자의 편에 서는 용기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공론의 장에 가해자로 추정되는 이가 서 있더라도 갑을 관계 외에 우리가 고려해야 할 당사자 간의 깊은 영역에 존재하는 진위 문제를 따져볼 생각의 여유가 필요하다. 언제나, 역사 속에서 매번 단정적인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영이나 권력구도를 초월한 영역이기도 했다.
...최근의 몇몇 사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2015/07/21 21:02 2015/07/2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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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edm 찬양 관련 ivf 사과문은 적절했다고 본다.
해당 논란에 대해서는 열린 토론을 유도하되 절차상의
미흡함과 편견 섞인 기성 교회의 우려에 대한 사과,
무엇보다 행사를 준비한 이를 위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
어느덧 시간이 훌러 비판의 날을 세우던 대학생 신분에서 
중년 어디 즈음으로 정체성이 변해가는 나를 본다.
솔직히 내게는 그닥 본이 될 만한 교회의 어른을 찾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방황했다. 내가 본이 되겠다고 설쳐보기도 했다.
.
대부분의 꼰대들은 그저 보수적이거나 침묵을 지켰다.
그 와중에 몇몇은 공감대 없이 설치다가 조용히 사라져갔다.
.
내 세대의 신앙의 선배들이 할 일은 
(한때 우리가 그랬듯이)
비판의식 충만한 신앙을 가진 청년들에게
계속 그 길을 탐구하고 달려갈 수 있는 공적인 장을
지켜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대의 기성세대가 '다름'을 '옳지않음'이라고 쉽게 정죄할 때
미안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자고 
이해를 구하고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
설령 앙쪽이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중재라 하더라도
논쟁이 부정적으로 과열될 때 적극적으로 
모두가 고려된 해명을 통해 담론의 장을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역할은 그런 지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신속한 개입을 통한 중재는 하되 학생 자발성에는
간섭하지 않고 기독문화의 지향점을 지켜보는 태도가 적절하다고 봤다.
.
물론 이건 나의 결핍에서 오는 긍정적 평가임에 분명하다.
내가 겪은 신앙의 어른들은 청년들의 도발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급이 맞지 않는다며 우회적인 훈계를 일삼고 
논란이 증폭되면 설명없이 활동과 조직을 아예 없애는 방식으로
대처해왔다. 그런 생태계에서는 냉소와 몰이해만을 키워갈 뿐이었다.
.
난 edm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밥 만세-_-)
하지만 다른 장르와 동일하게 edm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ccm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궁서체로 쓰긴 싫었는데...어쩌다 여기까지 왔다.
그대들의 시대가 곧 올 것이다. 그때까지 이쁘게 봐 주시라.
뿌.잉.뿌.잉.
2015/07/19 20:45 2015/07/19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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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보고서를 빨리 쓰는 편이다. 
초안은 대략 하루, 이틀 정도면 쓴다.
대체로 주변을 보면 5일 정도를 쓴다.
물론 이 보고서는 임원급 보고서를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내 보고서의 퀄리티가 높다고 생각한다.
(허세 쩐다.ㅋㅋㅋㅋ)
.
2.
보고서에서 중요한 지점,
대체로 보고 대상이 높을수록 
보고서의 결론은 최종보고자인 팀장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 내용과 향후 계획은 실무를
집행해야 하는 실무자가 가지고 있다. 
보고서에서 소요되는 5일은 
팀장이 기대하는 결론에 대한 실무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간의 반복이다.
시켜서 해보니 궁합이 안 맞다. 잘 안될거 같다.
혹은 설득을 위한 데이터가 부족하거나
정당한 반대 질문에 대한 변명, 대안이 궁색하다.
결국 실무자가 가진 데이터로 대충 초안을 만들고는
이런 저런 이유로 본론에 의해 서론과 결론이 
자주 흔들리고 그것을 조율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
3.
솔직히 보고서를 빨리 쓰지만 
작성 전까지 내가 소요하는 시간은 하루 이틀이 더 든다.
결국 초안 완료까지 최장 4일이 걸리니 
빨리 쓰는 게 아니다. 그저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이
짧으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
최초 보고서 작성 지시를 받은 후
나는 하루이틀을 멍 때린다. 어떤 때는 무려 칼퇴근한다.
물론 그동안 그 보고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다.
머리 속에 3-4페이지 본문이 대략 배치가 될 정도로
그리고 팀장의 결론과 실무적인 방향이 조화를 찾을 때까지
좋은 아이디어가 없는지 혹은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내러티브가 설득력을 갖는지 머리 속에서 본문을 가지고
충분히 '논다'. 
내러티브 내러티브 하는데, 사실 보고서도
그 내러티브의 구조가 서야 키보드를 친다. 
머리 속에서 완성된 보고서를 풀어내니까
당연히 초안이 빨리 나온다.
보고서에서 중요한 건 보고 시점이다.
자주 하는 말로 피보고자를 불안하게 만들면 안된다.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면 항상 초안 일정을 알려야 하고
되도록 그 시점 이전에 보고서를 들이밀어야 한다.
그 시점에 나는 반드시 멍 때리는 시간을 포함시킨다...
.
4.
이 허세 넘치는 글을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멍 때리는 시간. 
그 시간이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머리 속에 여유를 주면 버퍼링에 효율이 높아져
그 이슈에 대해 다분히 여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상상도 더 많이하고 관조적으로 몇 걸음 뒤에서 
실무자가 아닌 팀장이나 경영진의 입장을 따져보고
반대로 협력업체의 일을 덜어주는 방향이나 
결국 실무자인 내가 더 뺑이치지 않을 결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시간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멍 때림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이다.
실제로 주변의 혹자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탱자탱자 놀다가 '데코' 쩌는 보고서를 쓰는 놈.
보고서에 손이 빠르면 더 열심히 더 늦게까지 하면
더 높은 퀄리티의 보고서가 나올텐데 
바쁜 사무실에서 여유를 가지면서 허세부리는 놈.
직장이 지옥은 아니지만 나름 냉정한 구석이 있다보니
대놓고 나에게 직설을 날리는 이들도 있다. 
빨리 끝냈으면 더 열심히 하란말이야! 더더...
.
5.
솔직히 그 편견을 깨 줄 생각은 없다.
누가 내게 멍 때리는 시간을 뺏는다면 
나는 회사가 덜 효율적인 결정을 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슬프게도 멍을 때려보지 못한 사람에게
멍 때림의 효용성을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멍 때림은, 
하나의 신앙이자 종교적 신비함이 그안에 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성도들도 있다.
맨인블랙 보지 않았나.
인간인 줄 알았는데 외계인인 능력자들이 많지...
나는 그 영화가 <멍 때림 신도>을 향한 오마쥬였다고 들었다.
얼마전 서울시에서 있었던 멍때리는 행사 하지 않았나.
거기에서 회자된 아이가 강북지방 대표간사라는 의혹도 있다.
주변에 멍 때리는 사람을 돌아보라. 그리고 당신도 우릴 찾아오라.^^
2015/06/30 00:00 2015/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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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내와 육아, 가사분담을 고민하다가 어느덧 이 모든 문제가 이 나라의 가부장제로 거슬러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페미니즘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아이가 크면서는 내 안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아이에게 한없이 투사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심리학을 더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부모의 교육열기가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 입시를 넘어 석박사에 취업까지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면서 한국사회 전반에 경쟁구도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 모든 문제가 엮여있고 한쪽만 봐서는 그 실타래가 풀리지 않거나 일개 부모 한두명, 문제아이 한두명의 미시 사건으로 전락한다. 게다가 심하게 잘난 남성들은 육아와 자녀교육 같은 하위 담론은 시시하다 여기거나 관심 자체가 없다.


#2.
이른바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에 국한된다는 생각, 혹은 남성성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생각은...여전히 지지부진한 여성인권 측면에서는 일말 옳은 면이 없지 않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운동을 오히려 좁은 구석으로 내모는 느낌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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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에 따르면 여성주의가 진정으로 해방시키는 것은 가부장제에 갇힌 여성과 남성 모두이다. 페미니즘은 사실상 힘, 폭력, 권위의식, 규율, 경제성, 효율성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원시적 남성성으로부터 남성을 해방시키는 역할도 수행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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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아이와 소꼽장난을 하며 뒹구는 남성, 아빠, 아들, 권위의식으로 까라면 까야했던 분위기에서 다과나 차를 마시면서 맞담배를 피우며 느슨하고 창의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남자들의 회사 회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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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의 결단이라며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을 감수하던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벗어나 아이를 위해, 소외된 자를 위해 버려진 동물들을 위해, 어딘가에서 파괴되고 있는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보존하기 위해, '작은 것'을 잃으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항변할 수 있는 '남성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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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페미니즘은 엠마 왓슨이 말하는 ‪#‎HeForShe‬ 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의 인권을 넘어 남성이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도 반드시 공유해야 할 이론이자 운동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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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글을 읽다가 당시에는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을 끄적여봄.

15. 6. 13.
2015/06/13 23:17 2015/06/13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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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그건, 사람을 판단하는 확고한 기준이자 내 청년시절 열정을 쏟아부은 하나의 방향성이기도 했다. 그 근성은 내 세포 속 어딘가에 남아서 여전히 내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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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욕심, 글의 완성도에 대한 칩착, 글쟁이에 대한 엄밀한 잣대.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좋지 않은 글을 좋다, 맘에 들지 않는 글을 맘에 든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거절하기 어려운 서평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고 긍정적인 평을 기대했던 가까운 사람들의 글에 무반응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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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어떤 기준을 가지고 단호한 자세를 유지한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럴 처지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냥 그랬다. 초대받은 식탁에서 친구의 엄마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맛이 어때 라고 웃으며 물을 때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고 입술이 떨리는, 그러나 절대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최고라고, 하얀 거짓말을 결코 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아이의 그 무엇이 나에게 있었다고... 이해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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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람들과 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솔직히 나는 예전보다 더 글을 칭찬할만한 사람을 손 꼽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예전보다 더 뛰어난 '촉'과 '썰'을 가진 사람들이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글'판'에서는 엄지를 추켜세울만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너무나도 당위적인 이야기, 정보를 조합하여 정리한 지식봇, 과거의 영광에 기댄 허세썰, 니가 틀려서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진영이 분명한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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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내가 변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런 글을 며칠째 끄적이고 있는 걸 보면 내 코가 석자이면서도 누군가의 글에 쉽게 덕담을 해대지 못하는 내 피노키오의 코와 같은 난감함을 혼자 삭히지 못하는 이유에서일 수도 있겠다. 엄밀히 말하자면 글은 그 사람과 공동운명체인 것 같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답지 않을 때 그 글도 빛이 바래는 것을 경험한다. 물론 그렇기에 글에 목숨을 걸고 주둥이를 놀렸던 나는 참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지나쳤고,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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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글에 대해, 사람에 대해. 냄새가 섞인 글을 끄적이고 싶었을 뿐.

2015. 6. 7.
2015/06/13 23:11 2015/06/1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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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한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사회인이 되기까지 이십년, 혹은 삼십년동안을 우리는 교육받는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고 주변 친구들과 경쟁하고 놀이도 교제도 연애도 미룬 채 좋은 제품으로 사회에 출시되기 위해 분투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동일하게 내 아이가 사회에 나가기까지 전심으로 아이를 양육한다. 이 양육이라는 것은 '자기계발'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뒤쳐지지는 않는지, 발육상태와 IQ, EQ, 조기교육에 글로벌시대의 인재가 되기 위해 해외여행, 어학연수까지. 한번 쳐지면 2등 시민, 3등 사회인, 꼴찌 인생이 되는 것처럼 다들 달리고달리고...달린다.

2. 
사회는 기본적으로 불규칙적이다. 의도된 반칙과 예기치 않은 재난들이 한 사회를 쓸고 다닌다. 천재지변으로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기도 하고 불합리한 이유로 그 재난이 가중되거나 극복되기도 한다. 원치 않았지만 장애가 있는 아이를 얻기도 하고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자폐나 ADHD,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받기도 한다. 열심히 일했지만 파산하거나 해고되거나 타국에 가서 살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사회적 불규칙성에 의해 모두가 '온전한' 사회 구성원이 되려는 기대와 달리 소수자, 약자가 생겨난다. 반대로 정당하게, 때로는 불합리하게 강자와 메이저 계급 또한 생긴다.

3. 
그런 의미에서 한 사회가 정작 '온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이삼십년 동안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나의, 내 자식의 역량 강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를 '폐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함께 공생하며 서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한다. 사회생활을 위한 라이센스가 있다면 그건 '자기계발'이 아닌 '공동체 속의 공생' 노하우를 숙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장애를 얻게 되었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가졌을 때 사회는 나에게 장애를 가지고 사는 법을 교육시켜줘야 하고 내 이웃들이 나를 잘 대할 수 있는 에티튜드와 사회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정신장애를 가진 아이를 다른 친구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어린이집에서 퇴출시키기 보다는(최근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 아이를 공동체에서 없애기 보다는 그의 문제를 경험하게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미 자라면서 그런 소수자, 약자를 폐기하는 방식에 익숙한 아이들은 성장하면 자연히 괴물이 되기 마련이다. 요즘 애들 문제라지만 그 아이들을 만든 사회는 그 부모와 부모 세대의 세계관(교육) 결과인 셈이다.

4.
우리 주변에도 사회의 불규칙성은 편재하다. 신체 및 정신장애, 질병, 산재, 실직과 실업, 미취업, 싱글,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외모와 학력 컴플렉스, 미혼모, 입양, 성소수자, 버려진 반려동물들, 왕따,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슬프게도 우리는 이런 약자와 소수자 문제에 일상적으로 제대로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강자와 권력자는 관심이 없고 좌파와 진보는 지식만 깊다. 정작 사회는 '그게 무슨 국가가 할 일이냐, 사회가 부담할 비용이냐, 빨갱이냐' 라는 망발들이 합리적이고도 시크한 생각인듯 구성원들을 계몽한다. 뒤쳐지기 싫으면 너나 잘해라.

5.
우리가 배워야 할 기본적 소양을 배우지 못한 이유로, 우리는 소수자, 약자와 함께 사는 방법을 몰라 당황하고 허우적 대다가 소수자를 더 내몰고 지옥으로 보내면서 어설픈 웃음을 짓는... 멍청한 인간들로 전락했다. 내가 그런 처지가 아니면 다행이고, 잘못해서 그렇게 되면 깊은 좌절과 우울감에서 그 누구도 건져내어 줄 수 없는 그런 자조사회가 되었다. 우울증과 강박증 중에 하나를 선택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인 셈이다.

6.
올해들어 조촐하게 진행하는 세미나를 '소수자와 공생하는 법'을 함께 배워가는 방향으로 잡았다. 시작은 '입양'이다. 물론 이 방향성에서 중요한 방점은 '소수자'이기도 하지만 '공생'이기도 하다. 이는 소수자만을 위한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권력자와 강자를 비판하기 위한 교과서적인 네거티브 스타일도 아니다. 리얼 월드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느 한쪽을 배제, 폐기하거나 어느 한쪽을 악마취급해서는 온전한 사회구성원이 될 길은 소원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5/03/19 23:37 2015/03/19 2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