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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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위해 헬스장을 찾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제자리 걸음으로 뛰기를 하고, 일부러 무거운 무게의 철물을 들었다 놨다 한다. 물론 헬스장의 취지는 운동을 위해서지만 헬스장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커피만을 위해 스타벅스를 찾지 않는 이치와 동일한 이유로 그곳에서 땀을 뺀다.

흥미롭게도 현대인들은 일상 노동에 대해서는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것을 회피하려고 애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기 돌리는 것도 귀찮아서 로봇청소기를 사고 설거지는 설거지기기가 이동은 자동차 같은 탈것류가 도와주고 건물 안에 들어서면 엘리베이터가 옮겨준다.

손하나 까딱 안하고 빈둥거릴 수 있는 여유를 얻은 사람들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맛집을 전전하며 탐식을 즐기다가. 이윽고 물렁해진 몸을 단단하고 슬림하게 만들기 위...해 돈을 내고 '노동판'으로 뛰어든다. 맞춤형 노동판에는 친절하게 노동을 하면 단련되는 근육부와 하루에 달음질쳐야 하는 거리, 몸에서 써야 하는 에너지, 즉 칼로리를 계산해준다.

'노동 관리자'가 섬세하고 친절하게 그들의 노동을 관리해준다. 사람들은 걸레질이라도 한번 하면 퇴근 후 스트레스가 배가되는 느낌이건만, 비용을 지불한 노동판(헬스장)에서 쓴 에너지를 떠올리면 건강해졌다고 뿌듯해한다.

최근에는 성하랑 놀거나 씻기거나 장난감을 정리하면서 짜증을 내다가 문득 이거 운동되겠다... 싶었다. 설거지나 걸레질, 쓰레기를 버리는 과정도 비슷하다. 며칠전부터 엘리베이터 이용을 자제하고 있다. 무림 고수들이 제자들을 10년간 허드렛일로 단련시키는 게 이런 취지였던가.^^

해서 나는 요즘 (내가 추구하는 일상적 글쓰기에 덧붙여서) '일상적 운동' 방식에 대한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한다. 허드렛일들, 가사 노동, 업무 노동을 통해서 몸을 단련하는 어떤 '방식' 혹은 가이드를 만드는 것이다. 문명화 이전의 사람들은 항상 몸을 움직여야했기에 몸 자체로만 보면 지금보다 훨 좋지 않던가.

편한 도구들에 의지하고 노동을 줄여나가는 대신 일상의 노동을 '운동', '건강'의 범주로 끌어내는 어떤 원리?, 자세? 방법을 찾는 것이다.ㅋㅋ '가사 노동, 이렇게 하면 날씬해진다', '다이어트는 허드렛일로 시작하라' 뭐 이런 제목의 책이 나와서 좀더 운동의 관점에서 서술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사실 운동을 일상적으로 혹은 집에서조차 어떤 운동기구로는 하지 못하고 헬스장이나 대형 공간에서 진행하는 주된 이유는 다분히 '감성적'인 이유에서다. 즉 또다시 '뽀대'의 문제로 환원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허나, 설령 그들이 그런 이유(뽀대의 완성)가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는 별 고민없이 '비용을 지불하는 노동판'으로 가게 되어 있다.

추가로. 이런 엉뚱한 생각이 우려되는 한가지 지점이 있다. 이는 가사노동, 허드렛일을 몸의 건강과 연결시켰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계급이 있다는 점. 즉 피고용자(노동자)와 여성(엄마, 아내)이다. 그들은 노동을 조직에 '공급'하면서도 그것이 웰빙 혹은 건강, 다이어트란 이름으로 정당화, 고착화될 수 있다. 고로 내가 주장하는 '허드렛일 운동법'은 계급과 성별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해야 할 것 같다.
2013/02/27 22:54 2013/02/27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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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아직도 글을 쓸 때 연필을 깎아서 원고지에 쓰기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주 이야기하던데 사실 나는 별로 감흥이 없다. 여러 차례 말한대로 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 세대다. 처음 기고글을 썼을 때도 나는 자판을 두들겼고 지금도 노트에 글을 쓰기보다는 휴대폰이나 전자기기에 키버튼을 입력하는게 편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다.(자아비판적 의미에서...ㅠㅠ) 전자책 단말기나 태블릿 PC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간혹 관련된 글도 쓰고 기기 사용기나 최적 사양에 대해 고민하기는 하지만 나는 디지털 기기가 하나의 도구라는 점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가끔 '나는 내가 먹는 그것이다'라거나 그 유명한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어느정도 환원주의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너는 네가 구매한 그것으로 규정지어진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팽배하다.

아이패드가 내 생활패턴을 상당히 바꿔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패드가 없던 시절보다 내가 훨~씬더 생산적인 일을 하거나 에버노트 없이 종이노트를 쓰던 때보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나는 그것이 없던 시절에도 글을 썼고 일을 했고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도 지인들과 효과적으로 연락을 했고 메시지를 남겼고 은행업무를 전화로 봤다. 정작 업무의 생산성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스마트기기를 업무용도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회사보안 정책상 불편한 요소도 많지만 정작 회사 메일이나 업무 LOAD를 퇴근 후까지 가져오고 싶지는 않다!

냉정하게 말해서 IT기기의 효용에는 상당한 거품이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냥 '어른들의 장난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것도 고가의 장난감.. 우리회사 이사님이 내 아이패드를 보더니 게임만 잔뜩 깔려있는 거 아니냐고 추궁했다. 물론 게임만 잔뜩 있는 건 아니지만(그래서 살짝 버럭했지만) 사실상 아이패드가 유희적 용도가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그 지적의 의도는 옳다.

고가, 고성능 전자기기를 구입한 사람들은 하드웨어 사양이 높아서 반응속도가 빠르고 용량이 커지고 해상도가 높아졌다고들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기기적 진보가 개개인 '생각의 진보'를 도와주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2초 기다리던 게 1초가 되었다고 그 1초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6G가 32G가 되었다고 2배의 가치있는 자료들을 저장할 수 있을까. 그저 빨리 돌아가는 기기가 뽀대나게 느껴지는 것 그 자체를 즐길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희적, 자기만족적 소비의 과잉이 현대 기술의 진보에 선순환이 되고 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또한 그 선순환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입장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런 도구 없는 아날로그 방식이 더 좋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고 산 기기들에 대한 기대치와는 달리) 나라는 존재, 나의 생각의 깊이, 창조적 아이디어, 사색적 묵상 같은 것들은 아날로그건 디지털이건 간에 대체로 '도구-의존적'이지 않다는 거다. 사실 그런 일은 도구와 상관없는 별도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문제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지는 것 자체를 마치 이것과 동일시하는 정서에 있다.

나를 여전히 어린애 취급하는 어떤 아버지같은 존재가 있다면 내가 구매하는 많은 제품들에 대해 '네가 그게 왜 필요한데?'라고 물을 것이다. (나이가 드니 그런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잘만 포장하면 고급 장난감을 생산성을 돕는 도구라고 '구라'칠 수도 있다. 그런 기기들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업그레이드해주지는 않는다. 최근 몇년간 '스마트-'가 유행이다.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스마트-펜 등. 하지만 어떤 스마트- 뒤에 붙는 도구를 소유한다 하더라도 정작 본인의 '스마트'는 담보되지 않는다. 내 오랜 경험 상 그렇다.
2013/02/20 22:49 2013/02/2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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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의 칼럼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는 좋은 글이다. 반나절이 지나도 계속 그 글을 곱씹게 되고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는 측면에서 그렇다.(이 글은 15일 점심에 썼음)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나는 발화자의 맥락 또한 그 글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정희진은 알다시피 여성학자이다. 그녀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은 내가 작년에 읽은 책 중 단연 으뜸이라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책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책의 서문에도 썼듯이, 그리고 그 책에 대한 평가 중 자주 나오는 얘기가 정작 일반 여성들조차 그녀가 쓰는 여성학 글쓰기를 어렵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젠더 이론이나 페미니스트들의 글이 전반적으로 일반 여성들에게 외면당하는 것도 하나의 안타까운 현상이다.

 

대체로 내 주변 사람들은 정희진의 이 칼럼을 글쓰기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혜안으로 이해하겠지만 맥락으로 이해해 볼 때 이 칼럼은 정희진이라는 발화자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전개하는 여성학 담론의 난해한 글쓰기 '스타일'에 대한 자기변호다. 그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그런 맥락을 짚고 난 후에. 나는 살짜쿵 그 칼럼에 '딴죽'을 걸고 싶다. 정희진 선생이 칼럼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진정 쉬운 글은 내용(콘텐츠)과 주장(정치학)이 있으면서도 문장이 좋아서 읽기 편한 글을 말한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과 기존 형식이 일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글은 매우 드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쉬운 글은 없다. 소용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있을 뿐이다. 어려운 글은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글은 없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 개념어의 남발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쓴 글, 즉 잘 쓰지 못한 글이 있을 뿐이다."
 
이 본문은 1.새로운 내용과 기존 형식이 일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2.어려운 글은 어려운 게 아니라 소용이 없거나 소통의 문제가 있는 글이며 이는 잘 쓰지 못한 글이다 라는 두 가지의 명제를 갖는다. 엄밀히 말해 이 둘은 거짓이기도 하다.
 
첫째로, 새로운 내용을 기존 형식으로 쓰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여러 차례 언급한대로 (내가 아는 선에서) 강준만, 김두식, 리차드 파인만이 그런 필자 부류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내용'이라는 개념 또한 모호하다. 사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원조'는 없다. 엄밀히 말해 정희진 선생이 추구하는 소수자로서의 여성주의적 접근은 새로워서가 아니라 소수자를 옹호하고 그 안에 숨겨진 권력구도를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조차도 '새롭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새로운 형식으로만 서술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더더욱 회의적이다.
 
둘째로 어려운 글은 어려운 게 아니라 소용이 없거나 소통의 문제가 있는 글이라는, 나아가 잘 쓰지 못한 글이 어렵다는 건 정희진 선생의 '재정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어려운 글은 화자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타인의 표현이나 어구를 차용하고 그것이 불필요하게(어렵게) 독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잘 못쓴 글이 어렵다'.

 

이에 반해 내가 정의하는 '어려운 글'은 이른바 지식을 뽐낸 글이다. 비교적 단순한 주장을 하면서도 그 주장을 했던 북미, 유럽 지식인의 이름이나 개념들을 복잡하게 나열하고 각주를 달고 그 사대주의적인 정서의 도움으로 아주 단조로운 주장을 포장하는 글이다. 아주 힘들게 독해를 하고 났을 때 짜증이 밀려오는 글이다. 혹은 고사성어나 현학적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글이다. 과거 조선일보 같은 보수 신문 칼럼에 글을 쓰는 노교수들이 그런 스타일을 고수했다. 노교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영(young)교수들도 마치 자신이 노교수인 양 그런 스타일을 흉내내는 것은 더더욱 불편했다.
 
사실 '어려운 글'은 그냥 어려운 글이다. 엄밀히 말해 '어려운 글'에 어떤 부정적 이미지를 덧입히는 행위는 발화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재정의하고 싶을 때 그 표현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것이다. 결국 '쉬운 글'도 그냥 '쉬운 글'이다. 가치판단은 발화자의 맥락 속에서 생성된다. 고로 정희진 선생의 글은 짧지만 많은 생각들을 끌어내 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글이지만 정작 '쉬운 글'에 대한 일반론이라기 보다는 '정희진표' 페미니즘을 정작 어렵다고 외면하는 여성들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자 하는 국지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하나더.

정희진 선생의 글과 책들을 더 많은 여성들이 '어렵더라도' 읽기를 권한다. 그녀가 '쉬운 글'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다시 주장하지 않도록 말이다.

 

 

*정희진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2142125025&code=990100

2013/02/16 22:48 2013/02/1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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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livescribe라는 회사의 echo펜은 원래 anoto라는 스웨덴 기업의 기술이다. anoto사는 광학 카메라가 격자무늬 패턴의 노트를 통해서 정보를 읽어들이는 방식을 통해 손글씨를 디지털화하는 기술의 원 발명 기업으로 그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모든 스마트펜은 다 그 회사에 라이센스비를 지불해야 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 기술의 탁월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광학펜과 도트 격자노트로 손글씨를 디지털화하려는 기술을 개발한 것 자체가 탁월한 발명이기는 하지만 손글씨를 디지털 방식으로 입력하는 장치는 타블렛, 펜마우스 등 여러가지의 방법이 있다. 최근에는 갤럭시 노트의 경우, 자체개발한 정전식 펜으로도 손글씨를 정밀하게 쓸 수 있다.

아래의 동영상을 보면 내가 정작 지적하고 싶은 대목을 알 수 있다. livescribe사는 기개발된 스마트펜을 가지고 다른 목적, 용도에 더 적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펜에 보이스레코더를 장착하고 그것과 디지털펜을 실시간으로 싱크를 맞추면서 녹음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기할 때 외부 음성이 모두 녹음이 되고 그것을 다시 재생하거나 특정 기록 부분의 음성만 선별적으로 들을 수도 있다. 노트 필기 순서대로 음성이 따라가며 재생되는 형태로 판서 강의를 동영상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교육공학 분야에서 livescribe의 스마트펜은 획기적인 결과를 냈다. 하위 20%의 학생이 이 스마트펜을 통해 수업을 리뷰하고 나서 상위 20%의 학생으로 탈바꿈했다. 노트필기만으로 기억하지 못했던 강의를 녹음된 형태로 복습하면서 그 학업효과가 괄목할만큼 좋아진 것이다. 아래 동영상에서도, 인터뷰하는 해당 수학 교수는 100명의 학생에게 일일이 문제를 풀어주던 과거와 달리 1번의 녹음+필기로 만든 파일을 100명에게 이메일로 보냄으로써 똑같은 문제를 100번 풀지 않아도 되는 이 마법같은 펜을 극찬한다.
 
livescribe가 녹음 싱크를 맞출 생각을 하지 않았던 때의 이 스마트펜은, 그저 손글씨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회사는 이 디지털펜을 기억을 되살리는 효율적인 툴로 뒤바꿈시켜놓았다. 이것이 anato보다 livescribe가 더 탁월한 기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요소다. livescribe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대학생들을 비롯 저널리스트, 법조계, 영업 등 전문 직업인들에게 모두 400,000대의 스마트펜을 팔았다. 반면 anoto는 그간에는 노키아, 로지텍, HP, livescribe 등에 기술을 라이센싱했고 최근 ADP시리즈 제품을 내놓았다. 물론 여전히 레코딩 기능은 없었다.

ps. thanks to @Jaejin Choi

 

http://www.youtube.com/watch?v=LF1RT5OKoUU

2013/02/06 22:37 2013/02/0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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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아내가 마트에서 앵무새를 한 마리 더 사왔다. 퇴근하고 보니 아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는 게 아닌...유령같은 존재.ㅎㄷㄷ)

상황은 이랬다. 앵무새를 키우고 나서부터 청계천이나 마트에서 파는 앵무새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새끼들 수만 불려서는 파는 시스템의 희생물이란 걸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마트에 가도 애완동물(금붕어, 앵무새, 토끼 등) 코너는 피해다녔다. 그런데 지난 주에는 성하가 하도 보러가자고 해서 갔더니 앵무새가 코가 막힌 채로 그렁그렁 소리가 나는게, 겉보기에도 감기로 죽어가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

아내는 넋이 나가서 그 녀석을 단숨에 사왔고 집에서 자세히 상태를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 판단하여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에서는 X레이 등 여러 검...사를 한 후에 감기에 의한 폐렴이라고 했고, 진단서를 만들어 줄테니 병원비를 요구해보라고도 했다. 마침 그 병원에 온 사람 중 하나도 비슷한 경우를 겪었는데 마트를 상대로 이런 소동(?)을 피워도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도 전해들었다.

그 사람이 경험한 케이스를 설명하기를. 병원 치료기록을 가지고 마트에 가서 이런 애들을 가둬놓고 팔아도 되냐고 항의했더니 직원이 다른 앵무새로 바꿔주겠다고 했단다. 흠 없는 다른 '상품'으로... '다른 상품'... 그리고 마트 안에는 그런 망가진 애들(동물들)을 보관하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고 했단다. 아내는 당일 하루종일 울었고 그 앵무새를 집에 데리고 와서 지금까지 약과 끼니를 정성껏 먹여서 살리려고 애쓰는 중이다.

마트에서 파는 앵무새는 농장 같은 곳에서 직거래를 하는 것보다 40% 정도 비싸다. 게다가 그 병든 앵무새를 데리고 두번 병원을 방문했는데 그 앵무새의 비용의 몇 배가 병원비로 들었다. 지금도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상황으로 인해 아내는 나에게 계속 미안해하고 있다. (오늘도 아내는 '이혼해줄까?' 라는 문자로 사과+협박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음;;;)

아내가 '아픈 애들을 다른 걸로 바꿔주겠다고 했대'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대목에서 나도 감정이 동했다. 아내는 장기적으로 청계천이나 기타 열악한 조건에서 죽을 확률이 높은 상품들을 대량 생산해내는 곳에서는 동물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이상적으로는 동물을 '거래'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자 한다.

개가 아프면 병원에 간다. 하지만 병원비가 만만치 않다. 보험이 되지 않는 관계로 간단한 다리 수술만 해도 대략 백만원 정도가 든다. (이런 사실을 알고 길거리에 반려견들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 금붕어는 어떤가. 금붕어가 아프면 우리는 그저 지켜본다. 금붕어가 죽으면 건져내서 버린다. 토끼는 어떨까. 앵무새는?

물론 어떤 종은 살리고 어떤 종은 내버려두는 데에는 상대적인 입장 내지 가치관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큰 동물일수록 지능이 높은 녀석일수록 살리고 싶어한다. 또한, 개인의 정서 혹은 반려동물을 키워본 경험에 따라 어떤 동물은 큰 비용을 치루면서도 살리거나 고치고 싶고 어떤 동물은 그렇지않은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려동물이라는 상품을 내놓으면서 '반려'의 의미, 가치와는 무관하게 마치 장난감이나 종이컵처럼, '아 기스가 났네요. 저기 가시면 새걸로 바꿔드립니다' 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시스템 속에 고통받는 '생명체'의 아픔이 크게 다가온다. 아내에게 그랬고 이제는 나에게도 그러하다. 우리 바바는 포메라니언이라는 상품이 아니다. 프로나 이트(우리집 앵무새들)도 모란앵무라는 품종의 상품이 아니다.

지난 주에 우리집으로 온 이 앵무새도 그렇다. 부디, 이 녀석이 아내의 도움으로 건강이 잘 회복되길 기도해본다.
2013/02/06 22:33 2013/02/0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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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략적인 사람이지만 때로 황당한 실수를 해서 주변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다. 갑자기 기억난 에피소드 하나. 돈 없던 대학교 시절. 학교에 도착하여 주머니를 뒤져보니 수중에 천원이 있었고, 통장 잔고는 9,800원. 젠장. 고민하다가 천원을 입금하고 만원을 뽑으면 되겠다는 잔대가리를 굴려서 현금인출기에 천원을 넣고 만원을 뽑았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영수증을 분쇄기에 넣는다는 걸 그만 영수증은 지갑에 넣고 만원짜리를 분쇄기에 넣었다.-_-;;; 황급히 지폐를 당겨보았지만 분쇄기는 마치 내게 '지금 장난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배권 빌려서 수업 끝나자마자 집에 가서 밝은 대낮부터 잠을 청한 기억이. 아... 난 그 때부터 그랬구나.
2013/01/29 23:03 2013/01/29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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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 티베트 속담

애정하는 페친(이진오 목사님)님의 담벼락에 올라온 이 티베트 속담이라는 말을 아침부터 묵상 중이다. 쉽게 말해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없으니 너무 걱정말라는 말이다. 나름 위로가 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걱정은 '하는' 행위가 아니다. 걱정은 증상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걱정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스치듯 본 간판이나 무심결에 받은 전화, 부모의 말 한마디, 회사에서 전달된 공지, 친구의 행동... 이런 것이 내 머리 속을 복잡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현상, 증상이다.

이러한 걱정은, 심리학이 줄곳 떠들어대서 이제는 희화화되는 우리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다. 부모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고 자라면 서 주위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이들은 외부 자극에 대해 취약하지 않다. 반대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서 항시 내가 주도적으로 내 정서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다짐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쉽게 말해 후천적으로 환경에 잘 훈련된 사람들도 스트레스를 비교적 잘 이겨낸다.

이 두 극단을 제외하고나면 대체로 과거에 어떤 스트레스에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일반인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타인보다 걱정을 많이 하게되는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은 뭘 그리 걱정하냐고 걱정도 팔자라고, 과민반응하는 나를 대수롭지 않게 대하지만 유독 나는 그 걱정에서 벗어나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내면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 반대로 티베트의 속담에 기대어 걱정을 내 주도적 행위로 인식하고 걱정을 차단하려고 들면 상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 생활이 가능해진다. 매순간 자기 체면을 건다. 속은 썩어들어가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식은 땀이 나는 날도 있지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걱정이 생겼을 때 그 걱정거리에 침잠하는 것은 당연히 정신적으로 좋지 않다. 걱정거리에 돌직구를 날려 걱정하는 것은 늪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외부 자극에 평소와 달리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 경우에 내가 그것에 유달리 취약하게 느끼는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 따라서, 내 생각에 걱정을 해결하는 바른 방법은 그 이슈에 내가 평소같지 않은 '그 원인'에 돌직구를 날리는 것이다.

질병은 취약해진 몸상태로 인해 생기는 것이지 질병에 유독 집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리적인 해결은 척척인 사람들이 마음은 미봉책을 자주 쓰려고 한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 티베트 속담은 당의정과 같다. 달콤한 힐링 속에 쓰디쓴 고통만 반복될 여지를 남긴다. 내 생각은 그렇다.
2013/01/29 22:09 2013/01/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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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속 어딘가로 치워둔 일들은 해결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나를 괴롭힌다. 괴롭힌다는 말이 적절하지 않은 건 내가 의식적으로 그 일들을 꺼내지 않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롭힌다는 표현을 쓰는 건 무의식 중에, 길을 가다가 불쑥, 혹은 몇년 만에 관련된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늪에 빠진 듯 허우적대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이틀동안 좀 그랬다. 나는 자주 무의식과 대면하길 기대하는데 이번엔 몇년간 묵혀둔 감정들을 처리하느라 하루가 좀 침울했다. 어떤 면에서 늪에 빠진 듯이 가라앉는 이 감정은 타인의 죽음과 연관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런 정서 속에 방황하는 내 입장에서 언제나 글쓰기는 내게 치유다. 예전엔 내 글쓰기가 누군가를 계몽한다고 믿었다. 고로 모든 사람이 공감할만한 좋은 글을 쓰려는 것이 내 삶의 한 축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계몽된다기 보다는 자기 생각의 강화를 위해 멘토를 찾고 기사와 책을 읽는다. 이미 어떤 seed 같은 게 그 사람에게 이미 뿌려진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다. 다만 지금의 글쓰기는 내 정서와 내 이성과의 교감이며 매순간 나도 모르게 나를 흔드는이 이상한 정서들을 말과 글로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크다. 그런 의미에서 머리속 어딘가로 치워둔 많은 것들은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의 정직한 글쓰기가 요구된다.

이틀동안 속앓이를 하다가 속된 말로 멘붕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 나는 참 유쾌한 사람인데, 개그감을 회복하기는 쉽지가 않다. 물론 개그감이 원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과는 끝장토론을 할 준비까지는 되었다.
2013/01/29 22:09 2013/01/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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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가 2월부터 10만원대 전자책(e북) 전용 단말기 출시와 함께 회원제 e북 서비스 ‘샘(sam)’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일단 칼라 e-ink 단말기 실패 이후 변화를 위한 발빠른 행보가 고무적이다. 특히 이제까지 교보가 내놓은 전자책 시장 상품들 중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전자책 소비자들의 상당수가 소설, 에세이류에 집중되고 있고 그런 책들은 소장용이 아니기 때문에 가격의 매력이 있는 회원제가 전자책 시장의 파이를 키울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 괜찮은 서비스라고 생각하나, 여기에도 몇가지의 우려감이 있다.

첫째는 10만원대의 단말기가 흑백일 거란 추측. 당연히 태블릿을 쓰는 이들이 칼라 서적을 일단 보고나면 태블릿을 '더' 선호하게 될 것 같다. 결국 '샘'이란 서비스는 태블릿에서 앱으로도 제공되어야만 그 기대대로 시장에 먹힐 것이다.

 

둘째는 소장 욕구다. 사람들이 도서관만 이용하지 않고 책을 구입하는 이유는 특정한 책은 읽고 나서도 보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책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고 논문이나 칼럼을 쓸 때 참조를 위해서 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필요할 때마다 책을 대여해야 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있다. 결국 회원제로 운영할 때 한번 구입한 전자책은 종신토록 보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이 두가지가 잘 해결된다면 회원제 전자책 서비스는 (아마존 같은 공룡 온라인 업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전자책 시장의 표준 서비스가 될 수도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예견해본다.

2013/01/18 23:27 2013/01/18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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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사람들을 '욕망-억압 모델'로 이해하려는 편이다.
아내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크고, 최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방향이기도 하다.

진보-보수, 자본가-노동자, 기독인-비기독인 등 다양한 차연이
가능하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사 속에서 축적된 욕망과 좌절,
억압과 분출의 서사... 그 또한 참 중요한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사회학적으로도.
가끔 페북을 보면서도 사람들의 욕망-억압의 다양한 표현들을
접한다. 무엇보다 나는 내 모습을 본다.

나는 한번 포스팅한 글이나 댓글은 어지간하면 잘 지우지 않는다.
...귀찮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를 욕망-억압 모델로 관찰하다보면,
내가 실수로, 혹은 무의식 중에 썼다가 지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글들이 있다. 라깡은 말실수나 반복에 의미부여를 하던데.
참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요즘 나는 지우고 싶은 글이나 말이 생기면 그냥 지우기보다는
그 글을 없던 걸로 하고 싶어하는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편이다.
의외로. 그 짧은 시간의 짧은 돌아봄 속에서 얻는 게 쏠쏠하다.

어차피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없듯,
한번 포스팅은 영원한 포스팅이 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가끔 글들로 내 욕망과 억압을 반추한다. 요즘, 좀 그렇다...

사족.
현대기술이 내 흔적을 반복적으로 copy하는 이유도 있다.
내가 인터넷 어딘가에 끄적이는 낙서들이 메타 사이트에서
한두번의 검색만 거치면 지웠던 글도 먹지를 대고 배껴내듯
...나타난다.

 

2013/01/18 22:05 2013/01/18 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