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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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선생의 그림을 좋아하던 차에 기회가 닿아 <이중섭 편지>를 읽었다. 소 그림으로 유명한 그의 편지와 소소한 가족 그림들을 보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커졌고 말년의 비극적 삶에 약간의 의아함이 남았다.
가족과 함께하길 그렇게 원했는데 왜 혼자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죽었나...
그러고는 또 바쁘게 일상이 돌아가면서, 그 의아함은 잠시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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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무심결에(취미가 중고책 검색이다) 이중섭 선생의 책을 더 찾아보다가 전인권 선생이 쓴 책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을 발견했다.
전인권은 가수가 아니라(ㅋㅋ) 정치학자로, 몇 년 전 아내의 추천으로 읽은 그의 <남자의 탄생>은 내 심정적 변화의 한 획을 그은 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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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아주 사적인 고해성사가 담긴 이 책은 본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인권 선생 자신의 '건강한 자아상'에도 놀랐지만 사적 담론을 시대정신으로 확장시키는 흐름 또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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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은 아직 읽고 있는 중이지만 그가 화가 이중섭에게 꽂힌 대목이 '소그림'이 아닌 '군동화'(아이들그림)라는 대목에서부터 나는 이미 그의 시선에 몰입이 되어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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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 선생은 정치학자로 박정희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미술평론으로 신촌문예에 당선이 되었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서전에서는 본서 <아름다운 화가 이중섭>이 한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흥미롭게도 박정희와 김대중에 관한 책을 썼고 두 인물을 조명하는 과정에서 각각 인물의 명암을 객관적으로 드러냈다는 평을 들었다고도 한다. 극과 극의 인물에 대한 명암이라니. 더더욱 흥미를 유발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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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하여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전인권 선생의 책이 집에 쌓여있다.
뭐,,, 나는 중고책 사냥꾼이 아니던가...-_-
언젠가부터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글쟁이에게 강한 호감과 공감을 갖게된 나를 발견한다. 그 변화가 내심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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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 선생

2016/12/31 20:07 2016/12/3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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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큰 그림으로 읽기를 멈추자 소소한 변화가 생겼다. 성경의 각 본문들은 이른바 메타담론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 본문이 그 자체로 독해되지 않고 다른 본몬과의 통일성 안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닌 구약적 배경에서의 '그 단어'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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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각 성경의 서브텍스트들은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바라봐야 하고 메타담론으로서의 성경은 신적인 의미에서의 하나의 큰 그림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분히 보수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 나는 대체로 동의한다. 교리의 중요성, 거룩한 경전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 서로 충돌하지 않는 온전한 그림을 그리는 신학자들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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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구하는 실존적 성경읽기는 그런 의미에서 신학과 교리의 큰 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 작은 그림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와 같다. 적절한 비유가 있다면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를 성경의 큰 그림으로 본다면 내가 추구하는 성경읽기는 <본 레거시>로 치부할 수 있겠다. 제이슨 본과 국가 간의 음모를 다루는 큰 그림의 내러티브가 있다면, 그 큰 그림 안에서 메인스트림이 아닌 이들이 겪는 소소한 로컬 내러티브가 <본 레거시>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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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구속사가 예수와 주요 제자들, 그리고 구약의 특정 왕들과 예언자들의 담론, 그리고 굵직한 행위에 대한 추적이었다면 그 안에 속한 소시민적 백성, 시민, 선교여행을 떠나지 않은 제자들,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신자들의 관점에서 메타담론을 바라보는 셈이다. 그것은 그 큰 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좀더 상상력과 직관, 실용적, 실존적인 측면에서 성경을 독해하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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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들은 개별 인간사의 소소한 질문들에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연역적이면서도 우주적인 관점에서 개별 인간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접근한다. 악은 왜 존재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질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준의 거대담론을 들이민다. 자잘한 생각들, 교리를 침해하는 이야기들은 부차적으로 치부되거나 배제되고 원리와 원칙으로 한발 물러나거나, 그 이면에는 우리가 명시적으로 알 수 없는 신적인 의미가 있다는 모호함으로 변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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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적 모호함을 유지하면서 성경을 소시민적으로 읽고 텍스트 간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읽는 것. 성경의 영웅들, 주인공들이 아닌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제자들의 이웃, 형제, 부모, 혹은 그 이후 이천년이 지난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예수의 길과 내 삶의 연속성, 불연속성, 죽음의 의미, 하나님 나라... 이런 생각들이, 다분히 새롭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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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난 로컬 내러티브 안에서 성경을 읽는 중이다.
2016/11/04 20:28 2016/11/0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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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성경읽기라고 할 때 가장 큰 이슈는 내 삶의 목적성이다. 내 삶의 의미와 신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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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구원을 선포하고 재림을 약속한 후 초대 교회 시대를 지나 중세, 근대, 현대의 이시점까지 흘러왔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행위, 예수를 영접함, 영혼 구원, 타 종교와의 영적, 육체적 대결 자체에 집착했던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참여, 앙가주망, 인격적 사귐, 통전적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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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의 함수에 기인한 것 같기도 하다. 예수가 메시아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언은 '운동', '전략'으로서의 기독교에서 이천년을 지내면서 '삶의 양태'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고민으로 전환되었다. 타자(비기독인)로 하여금 믿음의 가부를 결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믿음의 본을, 믿음의 삶을 정착시키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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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타문화에 대한 긍정, 존중, 그리고 서구의 세속화에 따른 재복음화 필요성 대두 등 복음화라는 이슈는 개념이 넓어지고 그만큼 집중력은 약해졌다. '무식한 추동력'은 '사려깊은 주춤함'으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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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신앙인들은 타문화권 복음전도를 위한 선교사로서의 사명이 본인에게 있다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게 정말 시급했다면 교회 자체가 자기 몸불리기 신학을 고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는 자기가 속한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다움'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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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세상의 방식과는 구별된 자로 (하지만 세상 안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니고 사회에서 성취를 하고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거나 발전시키면서 살아간다. 자동차를 만들고 태블릿을 사고 인터넷을 이용하고 영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감동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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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예수의 초림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위치한 우리 세대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향유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이 상태를 지속시키는 신적 의미는 무엇일까. 분쟁, 전쟁, 정치적인 불의함, 차별, 사람들 사이의 소외, 마음이 닿지 않음... 이 부족함을 견디어야 하는 실존적인, 나아가 신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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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여기'를 강조할수록 불완전한 세상에서 이천년을, 그 이상을 살아야하는 당위에 관한 신학은 흔들린다. 이것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에 대치시킨다면 우리는 삶의 양태를 바꿔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온전함으로 신적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이 중간기가 담고있는 신적 의미에 대해 더 깊은 질문과 이해를 필요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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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후자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6/10/03 15:22 2016/10/0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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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통, 세상의 고통.
이것들이 인식될 때마다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들이 들 때가 있다. 예수가 구원을 이야기한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속사. 그 어딘가에 태어난 나, 우리.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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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선교사명, 선교명령은 새 밀레니엄이 오기 전에 땅끝, 즉 10/40창에 속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이 들어가야만 선교과업이 완성된다고 믿었고 그 연장선 상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미전도 종족이 사는 곳으로 파송되었다. 그 와중에도 선교명령에 부합하지 않는 곳에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선교라는 이름으로 타문화 속에 제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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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already but not yet'이란 구속의 표준 교리를 알고 있었지만 '이미' 보다는 '아직'에 방점을 찍은 천국을 바라보며 지금은 충분치 못한 현실에 대한 헌신, 절제를 미덕으로 삼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카르페디엠'이 우리의 신앙 모토 '지금 여기'로 둔갑했고 '이미'의 신앙이 더 중요한 미덕이라는 사실을 무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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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은 선교사명을 약화시킨다. 구조-방향 모델은 복음전도, 즉 선교의 당위성을 희석시킨다고 느꼈고 그것을 당대의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 진영과의 논쟁, 화해 속에 양날개 이론, 그 중에 복음전도의 우월성을, 다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을, 나아가 총체적 복음, 통전적 복음이라는 개념으로 정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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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가 구별되지 않는다, 이른바 '전략', '운동'과 '삶'은 같은 얼굴을 가진다는 통찰에 기인한 반성이자 어느 정도의 혜안이었다. 하지만 통전적 복음이 '이미'쪽으로 옮겨온 순간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상사명이었던 선교의 동력은 금새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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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밀레니엄을 넘긴 시점에서 사명은 늦춰졌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애매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혹은 아예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기술은 진보하여 오지에서조차 인터넷망과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기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선진국에서 파송하기 전에 선진국으로 다국적의 비기독교인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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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이 고달픈 사람들은 고달픈 대로, 나 같이 죽음 이후의 삶? 그 다음 단계에 대한 묵상,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실존적 신앙의 고민이 늘어간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떠드는 근본주의적 교회 집단 외에는 이제 천국, 하나님 나라, 내세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는 기독교 특유의 목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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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이, 통전적 복음이 현대적 문화 풍조와 콜라보를 이뤄 '지금 여기'의 신학으로 자리잡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연속선 상에서 악이 소멸되는 형태로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재림의 임박을 알린 정경의 메시지와 달리 왜 이천년 동안 우리는 악이 소멸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이 땅에서 얼마나 더 버티고 있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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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버틴다는 표현을 다수의 인간이 쓸 수는 있는지도 모르겠다. 괄목할만한 진보와 기술발전, 수명의 연장, 덕질의 향연과 극단적 쾌락과 엑스터시를 즐기면서, 언젠가는 도래할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며 사는 건 아닌지. 갑자기 엄습한 죽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종교가 내세의 희망을 손짓할 때, 그 모든 종교에 기대는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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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이천년이라는 시간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 혹은 우리는 우리의 삶, 죽음에서 기독교 자체를 소외시킨 건 아닌지를 말이다. 말과 삶의 일치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듯 내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과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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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체험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은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하지만 그 이상을 믿는 것이다. 살면서 믿음에 대해 교조적, 논리적, 확신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살면서 교리에, 세상문화에, 기독 전문가 집단에 번번이 신앙의 권위를 내어주곤 했다. 그 권위 안에서 내 신앙의 논리와 체험을 통합하고 정립시키려고 애쓰곤 했다. 물론, 그 권위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모든 게 나 자신과 일정 부분은 소외된 채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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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거칠게 쓰자면, 내 생각은 이렇다.
2016/10/03 15:21 2016/10/0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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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나를 인식한 시기부터 기독교인이었다. 초기의 내 신앙, 즉 유년기, 청소년기에는 성경이 내겐 신비로운 책이었고 어려운 책이었고 무서운 책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내 신앙은 재편되었지만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시작되었고 - 그 때에는 나름 진지했던 - 타종교와 기독교의 비교, 기독교의 정합성 등에 빠져 지냈다.

이후로는 보수적인 교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권'으로 대변되는 신학적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다. 귀납적 성경연구 방법이 가장 성경을 연구하는데 흥미를 자극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 바닥의 교리와 주석에 대부분 의존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때 '렉시오 디비나'가 지적인 분석에 충실했던 복음주의권 내부에서도 크게 호응이 일어 나름대로는 성경을 보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고 나도 그 유행에 합류했었다.

대략 30년 이상을 성경을 읽어왔지만 최근에 나는 살면서 한번 정도는 이 모든 배경, 즉 내게 주어진 교리와 내 종교적 배경 안에서의 주석과 강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해석에서 벗어나 내 실존적 질문들과 씨름하는 성경 읽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런 성경 읽기가 어떤 방식이다 라고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냥 통칭하자면 허세 없는 성경 읽기,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적인, 실존적인, 내재성으로만 신적 의미를 찾는 성경 읽기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설명이 충분치는 않지만, 일단 그렇게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다.
2016/10/03 15:21 2016/10/0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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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메갈리아, 정의당, 레진코믹스.
연이어 이슈들이 진행되고 있는 듯.
이 시점에서 논리를 말로 잘 풀어내지 못하면
누군가에겐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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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에게 왕자가 필요없다는 문구에 동의한다. 
또한, "만약 80년대에 어떤 정당이 '전대협을 지지한다'거나, 
90년대 야당이 '한총련을 지지한다'고 했다면 
"대학교를 불태우고 경찰을 때린 게 잘했다는 거냐", 
"집회 쓰레기는 너희가 치워라" 등등의 온갖 비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라는 기사의 논조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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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모든 불평등에 대한 저항들은 항상 기득권자들의 
엄중한 룰에 의해 가차없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했다. 
메갈리아를 향한 엄중한 잣대는 어떤 면에서는
그 잣대를 들이대는 세력이 '진보적'이었던 게 아니라 그저
현재의 '비'기득권일 뿐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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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말을 아껴야 한다.
왜냐하면 정작 말 몇 마디 때문에 혐오를 일삼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될 것 같아서다.
솔직히 나는 생각의 다름이 나아가 입장의 다름을 만들고
나와 너의 구획을 긋는 것으로 귀결되는 모든 방향, 지향에서 멀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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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상당수는 설령 생각이 다르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동무를 하고 비싸지 않은 골목 맛집에서라도
얼굴을 맞대고 숟가락을 들고 싶어 한다.
우리 중 상당수는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과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동네의 구석구석을 걷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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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 중 몇몇은 생각을 넘어 다수와 취향과 삶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그들과 공존하고 사랑을 받으며 함께 어울려서 각자의 고유한 색깔대로
지지를 받으며 그 방식이 다수의, 기득권의, 익숙한 무엇이 아니더라도
주변과 함께 일상을 나누고 싶어한다. 
나또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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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 모든 것들이 매순간의 이슈마다 각자의 생각으로 구획을 나누고 
그 생각의 '진영'에 서서 상대에게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일 민족이라 굳게 믿는 우리는 비슷한 겉모습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사상 검증을 점점더 타인의 '말'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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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써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규정짓는 것에 점점 회의적이 되어가는 나는.
말을 아껴야한다. 앞으로는...
2016/07/28 23:18 2016/07/2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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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여성 저자들의 책과 글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여러차례 말했듯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된 후에도 한참동안을 여성 저자들의 글에 별로 호감을 갖질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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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가장 큰 변화는 남성들 특유의 '가오잡는' 문어체가 인터넷에서 사라지고 나아가 출판계에서도 구어체, 말글이 점차 대세를 이루면서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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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논문에서나 볼 법한 문어체 글쓰기 스타일이 불과 10-20년 전까지 출판시장 전반을 차지했었다. 글 꽤나 쓰던 사람들은 누구나 입에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한자까지 병행하여 쓰면서 자신의 가오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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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서 가오를 살렸다기 보다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렇게 글쓰기를 배웠고 그 흐름대로 룰을 따랐을 뿐이다. 지금은 흔한 강준만식 글쓰기도 당시에는 쉽게 읽히는 잡글이라며 기성 논객들은 그를 폄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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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게시판이 글로 범람하고 인터넷 소설이 등장하고 온라인 속 컨텐츠 포화 상태를 경험하면서, 어쩌다보니 오프라인에서조차 부지불식간에 구어체 문장들이 익숙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글쟁이의 판세는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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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내가 여성 저자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던 건, 그 시절 문어체 문장의 룰이 가부장제의 수컷냄새를 내지않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종종 어설프게 사용되거나 혹은 그들이 원하는 담론의 형태로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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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내에서도 훈계하는 식자층 교회 오빠들의 현란한 글쓰기와 그것을 소비하며 감탄하는 자매층이 있었고, 자매들의 글쓰기는 '가오의 룰'을 갖추지 못한 관계로 폄하되거나 담론과 논쟁의 영역에서 배제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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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갑자기 2016년의 내 독서편력을 돌아보니 이전에 그렇게 좋아해서 '엄지척'하던 교회 오빠들의 글은 어느새 허세와 자화자찬, 고답적인 스탠스에서 오는 형식적인 측면의 불편함 같은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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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갑자기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언니들'의 글은 자신의 경험이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어서는 어느덧 무협지스러운 과장없이도 전지구적 거대담론에 이르는, 그러면서도 독해의 불편함 없는 구어체 문장의 매력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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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 남성 저자들의 글에서는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정형화된 형식'이 자주 나를 불편하게 만들곤 하는데 몇 가지를 예를 들자면,
- 대가들의 이름과 책을 나열하거나 다른 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급을 과시하려는 시도
- 본론을 말하기 전에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서론을 과하게 부풀리는 허세  (일례로 삼국지에서 관우가 나타나기 전에 키는 몇 자에, 그가 쓰는 창이 일반인 키의 세 배인데 수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의...)
- 자신이 사용하는 용어가 일반적인 그 용어와는 다르다는 기나긴 설명.
- 이 얘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이 사람도 이 얘기를 하고 저 사람도 하더라는 설명으로 책의 절반을 소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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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은 책 한권을 털어내면, '이 얘기를 하나 전달하려고 이렇게 많은 말을 했나'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점점 TED 15분짜리 아이디어를 400쪽에 담으려는 분들이 눈에 많이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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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한 이야기인 거 같나. 서점에 가서 여성이 쓴 책과 남성이 쓴 책을 대충 읽어보시라. 예전엔 난해하게 써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구어체로 여전히 수컷의 가오를 잡는 이들이 많아서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거다. 아마 몇몇 책들은 읽다보면 축지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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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룰이 바뀌었다. 고로, 여성 저자들의 약진을 앞으로도 기대하는 바다.
2016/06/12 15:19 2016/06/1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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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MMPI, 에니어그램을 공부하고 
최근에 강헌 선생 덕분에 명리학을 '독학'(?)하면서 느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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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마치 서양의학과 한의학처럼 겉마음과 속마음으로 나눈다면 
MBTI와 MMPI는 겉마음을 다루는 외과적인 접근을 취하고
에니어그램과 명리학은 속마음을 다루는 내과적 접근을 취하는 것 같다.
일례로,
MBTI나 MMPI가 자신이 외적으로 반응하는 마음을 정리, 분류하여 
개별 인간의 성향을 규정한다면,
에니어그램과 명리학은 좀더 근본적인 영역의 마음의 동기를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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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루는 이 도구들은 모두 특정 이론을 근거하여
임상적인 과정을 거쳐서 통용되어 왔는데
MBTI는 융의 심리적 유형론(1921)에서 정리된 개념에 토대를 두었고,
에니어그램은 고대 중동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지혜'에 근거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20세기에 들어서부터 점차 활성화되었다.
에니어그램은 머리, 가슴, 장형으로부터 9가지의 유형을 분류한다.
개인적으로는 에니어그램을 인간의 원초적 죄성(욕망)에 의한 분류체계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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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주팔자로 알려진 '명리'는 중국의 당나라 이후에 체계화된
동양의 음양오행을 가지고 인간을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오행은 세상의 질료인 나무, 불, 물, 쇠, 흙의 기운으로 분류되며
열개의 천간과 열두개의 지지를 조합하여 사람의 마음과 길흉화복을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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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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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의 흥미로운 지점은 오랜 임상에 의해 정립된 통계적 구조이다.
사실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리를 다루는 도구는 어떤 가설과 이론에 근거한다.
프로이트는 자아, 초자아, 이드라는 개념의 토대위에서,
칼 융은 융 나름의 심리 유형을 가지고, 
에니어그램은 머리, 가슴, 내장을 형상화하여 
오랜 임상의 축적을 통해 이론을 체계화한 것처럼,
명리 또한 그 오랜 시간의 임상의 무게를 통해 음양오행이라는 동양적 전제로
인간의 내적인 영역을 풀어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모든 각각의 개념들은 
보이지 않는 것(마음)을 형상화한 나름의 접근 방법인 셈이다. 

그런 연유로 입문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명리는 내 기대보다 훨씬 정교했다.
(사주에 대한 안 좋은 경험이 많고 한자울렁증이 있어서 
사실 처음에는 명리 자체에 부정적이었지만.-_-)
널리 알려진 MBTI, MMPI 등은 20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로 
사실 임상적으로는 상당히 더딘 축에 속한다고 평가한다면,
명리학은 이런 서양의 도구들보다 임상적으로도 훨씬 강건하며
아직 그다지 깊이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나를 이해하는데 더 강력하게 도움을 주는 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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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건 우리가 익히 아는 '신살'에 혹하거나 
혹은 결혼 시기를 짐작하거나 복권을 사거나 
부적이나 작명을 통해 오행의 부족함을 채운다거나 
흉한 기운을 내보낸다는 접근과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저 인간의 심리, 마음을 이해하는 여러 도구 중에 하나로
곰곰이 살펴보면 나에 대한 생각보다 많은 통찰들을 얻게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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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40일 가량 겉핥기를 해본 소감은 여기서 접고,
'만인의 위한 명리학'을 시도한, 강헌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2016/06/11 00:29 2016/06/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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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의 다름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매번 겪어도 좀처럼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우울감이 찾아오는데 감정의 깊은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글을 쓸까 말까 고민했다. 글이란 게 덧없다는 생각...
요즘 더더욱 많이 하기에. 조금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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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뉴스앤조이에
이재철 목사 "세월호 유족들 우상시하면 안 돼"라는 기사가 떴다. 
읽었다.
내용은 목회자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에서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의 강의 및 질의응답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다.
질의 응답 중에 세월호 관련 내용이 있었고 그 워딩은 '적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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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김종희 전대표가 해당 강의의 동영상을 올렸다.
60분 질의응답 중 3분이 할애되었고 그 영상에서 이목사는
슬픔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이 없다고 전제한 뒤 문제의 워딩을 말했다.
물론 그 외에도 회자된 20대 이야기도 기사로 읽었다.
이에 대한 내 지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고 모두 내가 느끼기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반응들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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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목사와는 사적인 관계는 없다.
그저 20년 가까이 글과 책으로, 그의 주변에서 들은 풍문으로 
정리한 내 입장은, 소위 말해 존경하는 목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양화진을 둘러싼 갈등 관계의 이야기를 듣고 2주간 자료를 모아
이 목사를 옹호하는 기사를 뉴스앤조이에 쓴 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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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100주년기념교회의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이 목사의 평소의 생활습관, 타인을 대하는 모습, 
얼마전 암에 걸렸을 때의 행동, 자녀가 결혼했을 때의 이야기
그런 변변찮은 이야기들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보다 더 뜨거운 이 '3분의 워딩'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페북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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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지인인 뉴조의 편집장은 페북에
언론의 역할이 깔놈은 까고 칭찬할 놈은 칭찬하는 것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글에도 당연히 호불호가 갈렸고, 
나는 특유의 어정쩡한 태도로 그 스탠스가 나와는 맞지 않으나 
언제나 '그'는 지지할 거라고 댓글을 남겼다.
입장이 다르더라도 친분이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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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이 다르다'...
나는 매사에 깔놈을 까고 칭찬할 놈을 칭찬하는 언론이... '싫다'.
한때 나는 진중권을 싫어했는데,
그가 한겨레를 깔 때와 조선일보를 깔 때의 수준이 같아서였다.
알파고가 연일 핫이슈다. 인공지능, 지능형OO라고 말하는
기계, 프로그램도 이제 산수나 논리만으로 다음 단계의 출력을 내지 않는다.
'기계적으로'라는 말이 냉정함, 정없음, 어쿠스틱의 배제를 의미했다면
나는 최근 점점더 '기계적'인 인간들을 대면하는 기회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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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란으로 올라온 댓글 중 반복적으로 접한 글 중,
'이 목사도 이제 맛이 갔다', '은퇴나 하시라'는 류의 글을 읽었다.
물론 페북이나 인터넷 기사의 댓글은 비슷한 성향을 갖는다.
실언을 하면 그 사람은 금새 쓰레기가 되고 퇴출 대상이 된다. 
물론 간간이 좋은 기사엔 멋지다, 짱짱맨 등, 과한 찬사도 보인다
이것이 대체로 항상 분노가 쌓여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터넷 정서다.
솔직히, 백보 양보해서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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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페북에서 교회 테두리 안의 지인들이, 
얼굴을 맞대기도 했고 함께 깔깔거리며 농담을 주고받고, 
맛집 음식을 함께 먹거나 사진을 나누며 병맛돋는 글과 말들을 하던 
지인들, 그리고 눈팅으로 알던 그들의 친구들이.
마치 모두 레알 친구인 것 같던 이들이 이재철 목사에 대해
해대는 말과 글들의 수위가... 솔직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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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모든 매체의 후원을 끊었다.
생각의 차이겠지만 나는 학생들, 아이들 후원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기독교 관련 후원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하지만 두 매체, 뉴스타파와 뉴스앤조이는 여전히 후원한다. 
물론 금액은 적다. 그냥 상징적인 의미다. 
'뉴스앤조이는 후원할만한 매체다'라는 상징적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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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뉴스앤조이를 후원할 매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 판단의 9할 이상은 그동안,
깔놈을 사정없이 까지 않고, 빨아줄 놈을 무턱대고 빨아주지 않은
김종희 대표의 데스크 판단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선택은 공평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았지만,
매번 자신의 진정성있는 해명이 있었고, 분노가운데에도 정이 느껴졌다.
정통 기독 비판 매체지만 뉴스앤조이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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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나는 안철수가 정치에 입문한 후
4년을 지켜보기로 했고, 꽤많은 실망 속에 그를 욕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치판에 첫 발을 들여놓게 만든 게 국민들이므로 국민이 책임져야 한다...
나라도 그렇게 살자, 뭐 이런 나이브한 생각. (솔직히 아직도 한다.)
뉴스앤조이의 새 술과 새 부대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기독 매체를 나는 언젠가 버릴 것이다.
매체를 만드는 사람은 사랑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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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도 밝혔듯 이 글은 고민 끝에 쓴 글이다. 
그리고 이 글은 김종희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쓴 글이다.
2016/03/12 20:35 2016/03/1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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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올린 글에 대한 댓글을 읽고
그 글을 타임라인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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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과 말이 나에게 호의를 보여준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걸 직접 설명할 정도로, 우려를 표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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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을 뒤로하고도 내가 고집할만큼
글이나 말이 그리 중요한가, 관계성보다
그게 더 큰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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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있다.
꽤 오래 잡글을 쓰다보니 특정대상이
원하는 글이 무엇인지 어느정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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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입장의 동일함' 때문에 그 입장의 재확인을
위해 내 글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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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때때로 달라진 내 입장에 대해서는,
그 다름으로 인해 조만간 '나'라는
인터넷 공간 안의 하나의 '계정'에 대해
쉽게 규정짓거나 폐기 삭제할 준비가 된 
많은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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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글을 향한 불특정 다수의 댓글 경험에서,
혹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어떤 온라인 지인들과
어느날 더이상 친구관계가 아님을 알게 된 순간.
마음 속 씁쓸함을 털어내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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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내가 별 생각없이 누군가에게 
쉽게 내뱉은 말들이 (나쁜 면에서) 큰 의미로
전달될 때 자책을 넘어선 깊은 좌절감 같은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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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쏟아낸 글과 말에 대한 심한 회의감.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는 동떨어진 어딘가로 나를
계속 이끌어가는 듯한 어두운 어떤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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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오후.
회사 사무실에서 밀린 업무를 털어내는 동안.
내 머리 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고 있다.

2016. 2. 14.  페북글.
2016/02/16 21:23 2016/02/16 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