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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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부르면 젠더 논쟁이 될 소지가 있겠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부르건, '음과 양'으로 부르건 간에 일단은 이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해야겠다. 심리학을 공부하다보면 프로이트에서 융으로 넘어갔다가 라깡으로 옮겨가서는 머리에 쥐가 내리도록 지성적으로 파고들게 되는 지점이 있다. 물론 융에게 갔다가 라깡에게 갔다가,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정작 깊이는 없이 방황하는 시간도 길었지만.ㅠ 아무튼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물론 융심리학 배경의 이야기다.

지금도 나는 사회적인 영역에서 페미니즘에 공감하고 필요하면 그런 방향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풀어내고 싶어하지만, 언젠가부터 페북을 포함하여 사적 영역에서 남녀 대립각을 세우는 논쟁 등에는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다. 지금은 시간과 내공 모두 부족하여 섬세하게 풀어낼 자신이 없지만, 우리 각자의 사적인 영역에서 페미니즘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와는 별개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니만큼..)

융은 '온전성', 혹은 '개성화 과정'을 인간 성숙의 척도(궁극적 자기실현)로 보았는데 그 시기는 최소 중년 이후로 보았다. 중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그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이나 삶의 태도를 고집하면서 돌파할 수 없는 시점이 오는 것 같다. 남성성이 강한 남성, 여성성이 강한 여성들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일례로 퀸카나 여신 같은 여성이 중년 이후에도 여신 같은 모습과 행동을 유지할 수 없게 되거나, 반대로 남성은 힘 빼면 시체인 싸나이 중의 싸나이 혹은 직장에서 추진력 하나로 밀어붙여 성공한 남자가 중년 이후에도 자신의 힘을 내세우거나 부하직원의 감정을 묵살하듯 관계를 지속하려 해도 잘 안 되는 경우가 그렇다. 더욱이 어느 지점에서인가 자신도 지치고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없음, 우울함, 그에 따른 긴장감마저 생긴다.

융은 오랜 임상 끝에, 남성에게도 무의식적 여성성이 존재하고 여성에게도 무의식적 남성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른바 아니무스와 아니마가 그것이다. 직장에서 화통하고 넉넉한 상사였던 남자가 집에서는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거나 사소한 일로 아내를 닥달하거나, 평소에 싹싹하고 온화한 여성이 부부싸움이 커지거나 논쟁 끝에 주변사람들이 불편해질 정도로 단호하고 냉정하게 말하기도 한다. 자신의 무의식적 속에 있던 남성성, 여성성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차이에 의해서 자신을 타자와 구분짓는다. 이런 차이가 구별, 차별화를 낳게 되고 그 구별은 대립을 만든다. 남자와 여자의 젠더와 섹스가 적절히 섞인 채로 각자의 스탠스에서 타자를 바라보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걸맞는 문화적인 옷을 입는다. 사실 이십대에는 이러한 대립구도와 구별짓기가 자연스럽고 오히려 권장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 하는 영역, 타자가 칭찬하고 잘해내길 원하는 영역에서 최대치를 끌어내고자 노력하는 과정, 훈련의 과정, 습득과 재능 발현의 과정이 분명히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남성성, 혹은 여성성을 대변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하지만 중년 이후부터는 대립으로 치닫는 것으로 충분치 못하다. 내 안의 그림자와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겠지만 내 안의 다른 성, 무의식적 남성성, 여성성을 이해하고 친해지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장 단적으로 연애를 하는 커플이나 부부가 처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성적 매력에 의해 관계가 유지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남녀는 서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이성, 즉 남자의 여성성과 여자의 남성성을 깊게 대면하는 시점이 온다. 이 시점에서 4명(남성, 남성의 여성성, 여성, 여성의 남성성)은 서로 간의 투사, 그에 따르는 대립과 반사를 멈추고 의식과 무의식적인 조화를 이루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융은 말한다)

중년 이후부터 이성은 서로 '경쟁'하거나 '대립'하거나, 혹은 서로를 '유혹'하는 타자로 보는 것에 한계에 직면하는 것 같다. 또는 강하게 '의존'적인 관계이거나 '주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서로 대립을 하는 것과 서로 유혹하는 것은 에너지의 준위상으로는 동일한 상태이다. 반대로 의존과 주도는 성적 불평등의 고착이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야 한다. 대립각을 세우던 무의식적 이성과 의식적인 조화,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쉬운 예로 이효리가 더이상 히로인이 아닌 '페밀리가 떴다'의 국민여동생 혹은 민박집 주인의 조화를 추구하는 면이나, 노주현, 이순재 같은 근엄하고 강인한 남성적인 배우들이 시트콤에 나와서 망가지는 모습으로 변신을 하는 것은 무의식의 완충, 혹은 조화로운 방향 추구 노력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속에서 페미니즘의 필요를 체감하고 그 이론의 메타담론적 특성을 경험하긴 했지만, 때때로 이 이론은 나의 중년의 온전성, 음양의 조화로움에 있어서 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종종 대립적 요소로 작용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 안의 여성성을 이해하고 화해해야 하는데 젠더적 여성성에 대한 구조적 모순에 천착하게 된다거나 여성 안에 존재하는 남성성을 화해와 조화의 대상이 아닌 주적이나 가부장제의 현현으로 바라보는 상황들이 그러하다. 

아무튼, 체화가 덜 되서 말이 투박하여 담백하게도 못 쓰고 있지만..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고 산다. 시간이 지나면 좀더 다듬어서 제대로 말해보련다. (흙)
2017/10/07 23:04 2017/10/07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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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원가정을 향한 향수가 있다. 원가정이 좋았냐 나빴냐 깨졌냐 유지되었냐에 상관없이, 원가정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동경 같은 게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해가 저무는 저녁 보글보글 끓는 찌개소리, 밥그릇과 수저 놓는 소리, 얘들아 밥먹어라 엄마 혹은 아빠의 무심한 톤의 목소리를 들으며 식탁에 오손도손 앉아서 먹는 밥. 대단한 일은 없었지만 건조하게 풀어놓는 하루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어 라고 말하고 일어나는 저녁 식사 자리.

돌이켜보면 내 원가정의 저녁식사 시간이 그렇게 행복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자주 없었거나 만취 상태로 들어오면 우릴 깨우지 않고 곱게 잠들길 바랬다. 지친 어머니의 모습, 원망섞인 말들, 사춘기를 지나 점점 모이지 않게된 식사 시간, 결혼 후에는 딸이라고 말하면서도 딸처럼 대하지 않는 며느리, 내 딸 고생시킨다며 속으로 원망하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는 매형. 결혼, 취직을 못 했으면 인생과업을 달성하지 못한 듯한 시선, 시선을 넘어선 무례한 말들. 사실상 원가정의 식사 자리가 즐겁고 행복하다는 건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가정에 대한 향수를 떨쳐내지 못한다. 차라리 혼자가 좋다고 대충대충 선을 지켜가며 스스로의 심적 공간에 숨어서는 외로움을 넘어선 어떤 결핍의 슬픔에 잠긴다. 선을 넘어 내미는 손들, 영화나 노래 가사에서 그 비슷한 정서를 느낄 때 잠시 그 따뜻함을 머리에, 가슴에, 눈가에, 그리고 내 소중한 세포들에 꼭꼭 심어놓는다.

일상. 지루한 노동, 자식에게 퍼주는 사랑. 삼십대 후반에 느꼈던 지루함과 분노, 무료한 삶의 반복들은 마치 내 인생이 꺾여서 내리막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난 여전히 재밌고 가치있고 찌릿찌릿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무료한 일상, 그것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는 가치가 있겠지만 난 거기에 매몰되어 노잼의 삶으로 인생을 마감하진 않겠다.. 생각했다.

요즘 나는 밥을 한다. 사실 계속 했었다.ㅋㅋ 뽀대 안 나면 재미없어서 칼도 사고 후라이팬도 샀다. 요리를 마치면 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요즘 나는 그냥 밥을 한다. 원가정의 향수를 떠올리며 밥을 한다. 보글보글 국 끓는 소리를 듣는다. 그릇과 수저를 놓는 소리를 내며 곧 밥먹으러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무심하게 밥먹어..라고 말도 해본다. 늦게 오면 핀잔도 주고 의미없는 대화들을 던져보기도 하고. 요즘은 아이의 아재 개그를 듣는다. 원가정의 항수에 빠져있었는데 어느덧 내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나는 이 시기가 길지 않음을 알고 있다. 곧 이런 소소한 식사시간은 붕괴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상처입은 듯 향수를 느끼며 다음 단계의 삶을 항할 것이다.

지금은 부산에 간다. 가족이 모여도 우린 각자 이미 독립했고 원가족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우린 오늘 모여서 한두끼의 식사를 할 것이다. 의미없는 말들도 주고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향수를 도발하던 부족한 자리마저 향수가 될 것이다.

그 향수에 미리 머물러 가고 있다, 나는.

2017. 10. 2

2017/10/02 23:03 2017/10/02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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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가사육아 분담이 명확하여 내가 집에 있는 동안은 내 몫이고 그 외에는 아내가 한다. 십여년 하다보니 약간씩 서로 미루게 되었는데 미루는 것을 잘 참지 못하는 내가 점점 더 많은 가사일을 하게되는 느낌적인 느낌...

그러던 차에 올초에 아내가 친구네 집들이에 갔다가 3좀 세트를 보게 되었고 나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성삼위일체 아니고 삼종세트는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빨래건조기.. 써본 결과 둘은 정말 좋았다. 식기세척기는 이사오면서 저럼한 것을 하나 구입했고 빨래건조기는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얼마전 중소기업에서 만든 가성비 좋은 녀석을 모험삼아 장만했는데.. 현재 대만족이다.

뭐랄까.. 집안일 도와주는 로봇들이 내 지시를 따라 척척 허드렛일을 처리하는 느낌. 나는 첵을 보거나 딴짓을 하다가 삐삐 소리가 나면 가서 그릇 정리를 하고, 건조기에서 다림질 한 것 같은 수준의 마른 빨래들을 바로 옷장에 넣어주기만 하면 된다.ㅠㅠ 서로 미루기만 하던 집안일을 누가 해주니 아내와 사이도 쫌 좋아지는 듯.ㅋㅋ 게다가 뭔가 시간을 맞춰서 일을 해치우니 스케줄링 덕후인 나는 이 시스템에 더 빨려드는 것 같다.

 

이 시스템의 단점이 있을까. 물론 있다. 기기를 저렴하게 샀어도 이것에게 일을 시키려면 에너지가 든다. 전기 에너지.. 당연히 전기료가 더 든다. 그 외엔 딱히 단점이 될 만한 요소들은 없는 듯. 아, 전기에너지 얘기가 나와서 이건 딴 얘긴데 차세대 자동차로 EV를 꼽는데 이건 좀더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본다. 배터리나 모터 등 전기부품들의 제작 공정이 ‘클린’하지 않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도.

만약 모두가 화석연료가 아닌 전기에너지로 차를 쓴다면 천가구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에는 밤새도록 천여대의 자동차에 고압 충전기를 돌려야 할 것이다. 그것도 하루이틀만 완충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일주일 내내 수백대의 차를 충전하는데 아파트 전기에너지의 상당수를 소비하게 된다. 여름에는 정전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고 아파트 주거가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전기난에 허덕일 소지가 있다. 어쩌면 모자라는 전기에너지로 인해 핵발전소의 증축 논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런 연유로 아직은 하이브리드 정도가 유효한 차량의 연료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전기를 덜 쓰는 게 지구 보존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빨래건조기는 써야할 거 같다. (식기세척기도.. ㅠㅠ) 오랜만에 기차를 타서 이런저런 쓰잘데기 없는 글을 쓰고 있다.

2017/10/02 23:01 2017/10/02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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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무생각없이 버스를 탔는데
타고 보니 충전 카드 잔액 부족...
그것도 몇 백원 정도 모자라는 상황.
지갑을 보니 만원짜리뿐.
기사님에게 양해를 구하니 
다시 기사님이 동전으로 받아도 되겠냐고
내게 양해를 구함.
네.. 라고 말하자마자 쏟아지는
칠십여개의 백원짜리를 받느라
지대로 민폐캐릭 등극...ㅠㅠㅠㅠㅠㅠ
2017/09/30 23:00 2017/09/3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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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도 2년 이상 해본 적 없는 나는 결혼을 했고
그 결혼이 5년이 지나고 7년, 10년, 12년이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긴 시간동안 함께 지내야 하는지 몰랐다.
알았지만 그 시간의 길이를 가늠하진 않았던 것 같다.

7년 즈음, 우리는 
더이상 2005년의 두 사람이 아니란 깨달음에 
놀라기도 했고 자주 다투기도 했다.
뒤늦게 시작된 각자 자기만의 이슈에 침잠해 있기도 했고
가사, 육아, 그리고 서로에 대한 호불호를 토로하기도 했다.

7년 즈음, 나는
우리가 정말 이혼이라도 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아내는 이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우리 중에 내가 뒤로 물러서는 게, 조금씩 멀어지는 게
'우리'로 살아가지만 '우리'가 아닌 상황을 더 걱정했다.

12년이 된 지금. 나는,
이혼이 두렵지 않게 됐다. 부모가 내게 남겨준 두려움..
아내와 더이상 '우리'가 아닐 때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더이상 우리일 수 없을 때 '나'와 '너'로 존재할 수 있기를.
두려움을 은폐하고 일상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 주어진 시간을 더 잘 누리자, 생각하게 됐다.

12년이 된 지금. 나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더이상은 '내가 더 노력할게'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하게 됐다.
그간 살면서 나는, 
아끼는 타자들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사람이었다.
한번도 도저히 안 되겠어, 라고 말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나란 존재로서는 더이상 좋아질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여전히 힘들다. 12년은 여전히 짧다.

농담처럼 극적으로 결혼 1년 연장 타결이 됐다고 말했지만,
다음 1년 동안, 아내와 보낼 행복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40년을 살고도 다시 40년을 더 살 가능성이 높아졌고
12년의 세 배 이상의 시간이 남았지만..
결혼상태의 '유지'가 아니라, '지금' 행복에 더 많은 가치를 둔다면
적어도 두렵거나 후회는 없는 세월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7. 9. 24
2017/09/24 22:58 2017/09/24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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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환영 회식.
끝나고 굳이 관리과장이 2차를 가자고 해서
모처럼 자리를 옮겨 또 술을 처먹었다. 

신입사원과 나의 나이차이는 15년.
그들은 좋은 인상을 보이려고 애쓰고
부서배치가 잘 된 건지 선임은 잘 만난건지
자기가 과연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불안함과 가능성을 함께 타진하는 듯 보였다. 

나와 관리과장은 입사시기가 비슷하여
줄거워보이지 않는 신입사원들을 앞에 두고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늙었나, 한탄했다.
뭐든 할 수 있겠다 싶었던 청년은 
나이가 들어 이제 정말 안 될 것 같은, 
혹은 못할 것 같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안타까움, 때론 자신감을 잃었다는 느낌을 넘어
이제 그 상태로라도 꿋꿋이 버텨내자, 
할 수 있는 건 하고 할 수 없는 건 받아들이자,
처음부터 내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받아들이자.
그리고 다음 걸음으로 나아가자고 그렇게 다짐한다.

말로 천냥빚을 갚는다지만 인간 양심상 그건 
가능성이 넘칠 때나 발행하는 일종의 어음과 같다.
남은 시간은, 갚을 수 있을만큼의 깜냥대로
천냥빚을 묵묵히 갚다가, 그렇게 곱게 죽으면 그만이다.

취기가 남았나. 
아무튼 이런 늙은티 코스프레 글은 마지막인걸로.

2017. 9. 15
2017/09/15 22:55 2017/09/15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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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직장 성희롱 관련 팟캐스트를 하다가 왜 최근에 아재개그가 유행하게 됐는지에 대해 깨달은 사실이 있다. 그동안 모든 직장, 사업장 등등 남성들 중심의 공간에서 모든 농담은 성희롱에 해당하는 음담패설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페미니즘의 약진이 있었고 성희롱 교육이 퍼지면서 직장에서 언어적 성희롱은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렇게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회식자리에서 왁자지껄하게 음담패설로 웃길 수가 없게 됐다.
갑자기 웃음의 소재가 고갈되자 우리 아재들은 당장 매우 저급한 유머만 급한대로 주절되게 되었다. 아.재.개.그. 한번도 고차원 개그를 위해 머리를 쓰지 않고 음담패설에 의존해온 종족의 일시적 퇴행현상이랄까.

2017. 9. 10
2017/09/10 22:54 2017/09/1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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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선생의 그림을 좋아하던 차에 기회가 닿아 <이중섭 편지>를 읽었다. 소 그림으로 유명한 그의 편지와 소소한 가족 그림들을 보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커졌고 말년의 비극적 삶에 약간의 의아함이 남았다.
가족과 함께하길 그렇게 원했는데 왜 혼자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죽었나...
그러고는 또 바쁘게 일상이 돌아가면서, 그 의아함은 잠시 잊어버렸다.
.
며칠 전 무심결에(취미가 중고책 검색이다) 이중섭 선생의 책을 더 찾아보다가 전인권 선생이 쓴 책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을 발견했다.
전인권은 가수가 아니라(ㅋㅋ) 정치학자로, 몇 년 전 아내의 추천으로 읽은 그의 <남자의 탄생>은 내 심정적 변화의 한 획을 그은 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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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아주 사적인 고해성사가 담긴 이 책은 본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인권 선생 자신의 '건강한 자아상'에도 놀랐지만 사적 담론을 시대정신으로 확장시키는 흐름 또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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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은 아직 읽고 있는 중이지만 그가 화가 이중섭에게 꽂힌 대목이 '소그림'이 아닌 '군동화'(아이들그림)라는 대목에서부터 나는 이미 그의 시선에 몰입이 되어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
전인권 선생은 정치학자로 박정희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미술평론으로 신촌문예에 당선이 되었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서전에서는 본서 <아름다운 화가 이중섭>이 한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흥미롭게도 박정희와 김대중에 관한 책을 썼고 두 인물을 조명하는 과정에서 각각 인물의 명암을 객관적으로 드러냈다는 평을 들었다고도 한다. 극과 극의 인물에 대한 명암이라니. 더더욱 흥미를 유발하는 느낌.
.
그렇게하여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전인권 선생의 책이 집에 쌓여있다.
뭐,,, 나는 중고책 사냥꾼이 아니던가...-_-
언젠가부터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글쟁이에게 강한 호감과 공감을 갖게된 나를 발견한다. 그 변화가 내심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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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 선생

2016/12/31 20:07 2016/12/3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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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메갈리아, 정의당, 레진코믹스.
연이어 이슈들이 진행되고 있는 듯.
이 시점에서 논리를 말로 잘 풀어내지 못하면
누군가에겐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여자에게 왕자가 필요없다는 문구에 동의한다. 
또한, "만약 80년대에 어떤 정당이 '전대협을 지지한다'거나, 
90년대 야당이 '한총련을 지지한다'고 했다면 
"대학교를 불태우고 경찰을 때린 게 잘했다는 거냐", 
"집회 쓰레기는 너희가 치워라" 등등의 온갖 비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라는 기사의 논조에 동의한다. 
.
역사적으로 모든 불평등에 대한 저항들은 항상 기득권자들의 
엄중한 룰에 의해 가차없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했다. 
메갈리아를 향한 엄중한 잣대는 어떤 면에서는
그 잣대를 들이대는 세력이 '진보적'이었던 게 아니라 그저
현재의 '비'기득권일 뿐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
하지만 나는 말을 아껴야 한다.
왜냐하면 정작 말 몇 마디 때문에 혐오를 일삼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될 것 같아서다.
솔직히 나는 생각의 다름이 나아가 입장의 다름을 만들고
나와 너의 구획을 긋는 것으로 귀결되는 모든 방향, 지향에서 멀어지고 싶다.
.
우리 중 상당수는 설령 생각이 다르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동무를 하고 비싸지 않은 골목 맛집에서라도
얼굴을 맞대고 숟가락을 들고 싶어 한다.
우리 중 상당수는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과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동네의 구석구석을 걷고 싶어 한다.
.
또한, 
우리 중 몇몇은 생각을 넘어 다수와 취향과 삶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그들과 공존하고 사랑을 받으며 함께 어울려서 각자의 고유한 색깔대로
지지를 받으며 그 방식이 다수의, 기득권의, 익숙한 무엇이 아니더라도
주변과 함께 일상을 나누고 싶어한다. 
나또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
허나 이 모든 것들이 매순간의 이슈마다 각자의 생각으로 구획을 나누고 
그 생각의 '진영'에 서서 상대에게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일 민족이라 굳게 믿는 우리는 비슷한 겉모습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사상 검증을 점점더 타인의 '말'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 같다.
.
말로써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규정짓는 것에 점점 회의적이 되어가는 나는.
말을 아껴야한다. 앞으로는...
2016/07/28 23:18 2016/07/2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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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여성 저자들의 책과 글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여러차례 말했듯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된 후에도 한참동안을 여성 저자들의 글에 별로 호감을 갖질 못했었다.
.
내 생각에 가장 큰 변화는 남성들 특유의 '가오잡는' 문어체가 인터넷에서 사라지고 나아가 출판계에서도 구어체, 말글이 점차 대세를 이루면서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
이제는 논문에서나 볼 법한 문어체 글쓰기 스타일이 불과 10-20년 전까지 출판시장 전반을 차지했었다. 글 꽤나 쓰던 사람들은 누구나 입에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한자까지 병행하여 쓰면서 자신의 가오를 살렸다.
.
엄밀히 말해서 가오를 살렸다기 보다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렇게 글쓰기를 배웠고 그 흐름대로 룰을 따랐을 뿐이다. 지금은 흔한 강준만식 글쓰기도 당시에는 쉽게 읽히는 잡글이라며 기성 논객들은 그를 폄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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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게시판이 글로 범람하고 인터넷 소설이 등장하고 온라인 속 컨텐츠 포화 상태를 경험하면서, 어쩌다보니 오프라인에서조차 부지불식간에 구어체 문장들이 익숙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글쟁이의 판세는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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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내가 여성 저자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던 건, 그 시절 문어체 문장의 룰이 가부장제의 수컷냄새를 내지않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종종 어설프게 사용되거나 혹은 그들이 원하는 담론의 형태로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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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내에서도 훈계하는 식자층 교회 오빠들의 현란한 글쓰기와 그것을 소비하며 감탄하는 자매층이 있었고, 자매들의 글쓰기는 '가오의 룰'을 갖추지 못한 관계로 폄하되거나 담론과 논쟁의 영역에서 배제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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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갑자기 2016년의 내 독서편력을 돌아보니 이전에 그렇게 좋아해서 '엄지척'하던 교회 오빠들의 글은 어느새 허세와 자화자찬, 고답적인 스탠스에서 오는 형식적인 측면의 불편함 같은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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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갑자기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언니들'의 글은 자신의 경험이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어서는 어느덧 무협지스러운 과장없이도 전지구적 거대담론에 이르는, 그러면서도 독해의 불편함 없는 구어체 문장의 매력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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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 남성 저자들의 글에서는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정형화된 형식'이 자주 나를 불편하게 만들곤 하는데 몇 가지를 예를 들자면,
- 대가들의 이름과 책을 나열하거나 다른 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급을 과시하려는 시도
- 본론을 말하기 전에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서론을 과하게 부풀리는 허세  (일례로 삼국지에서 관우가 나타나기 전에 키는 몇 자에, 그가 쓰는 창이 일반인 키의 세 배인데 수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의...)
- 자신이 사용하는 용어가 일반적인 그 용어와는 다르다는 기나긴 설명.
- 이 얘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이 사람도 이 얘기를 하고 저 사람도 하더라는 설명으로 책의 절반을 소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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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은 책 한권을 털어내면, '이 얘기를 하나 전달하려고 이렇게 많은 말을 했나'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점점 TED 15분짜리 아이디어를 400쪽에 담으려는 분들이 눈에 많이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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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한 이야기인 거 같나. 서점에 가서 여성이 쓴 책과 남성이 쓴 책을 대충 읽어보시라. 예전엔 난해하게 써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구어체로 여전히 수컷의 가오를 잡는 이들이 많아서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거다. 아마 몇몇 책들은 읽다보면 축지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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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룰이 바뀌었다. 고로, 여성 저자들의 약진을 앞으로도 기대하는 바다.
2016/06/12 15:19 2016/06/12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