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가끔 보고서를 쓰다보면 결과물이 좋지 않을 경우에 내용이 더 길어지고 첨부가 많이 붙는다. 변명거리를 찾는다는 말이다. 왜 실패했나, 왜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나에 대한 반성, 혹은 고찰 같은 '그럴듯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

일상적으로도 그런 류의 변명을 찾는 때가 많다. 이스라엘에 무기개발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스타벅스나 일본 우파를 후원하는 유니클로, 아사히 등 기업들을 선호하는 이들의 변명이 그렇다. 문제를 알고 나면 꺼림찍한 '그 무엇' 때문에 T셔츠 한장을 사거나 커피 한잔을 마셔도 뭔가 '그럴듯한' 부연 설명을 한다.

성경-특히 '열왕기상/하'나 '역대상/하'-을 읽다보면 한 사람(주로 왕)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평가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간결하지만 명확한 평가, 아니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평가... '신이 보기에 옳은 길로 갔거나 옳지 않은 길로 갔다'는... 그 인생에서 자잘한 사건들이 있었겠지만 그 사람 인생을 통틀은 어떤 순종의 방향성으로, 실패와 성공을 가로지르는 분수령이 읽혀진다.

살면서 여러가지 문제들에 직면한다. 유해한 일들을 하지 않는 삶, 이를테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등 보수적인 기업들의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직장생활에서의 업무적인 불의나 밤문화에 물들지 않는 것 등. 우리는 실패로 판단되는 일들을 방어 내지는 변명하기 위해 참 많은 힘을 쏟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것을 '하지 않는 것', 어떤 것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변명하는 일로는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평가를 돌릴 수 없다. 작은 걸음이라도 어떤 것을 '하는 삶', 사소한 것이라도 바르게 '행하는 삶', 사소한 도움이라도 주는 삶의 축적이 종국에는 '객관적이고도 명확한 한 마디의 인생 평가'에 기여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보면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에너지를 실패를 포장하는 일에 허비하는 건 아닌지.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2013/05/29 23:05 2013/05/29 23:05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오늘은 스승의 날.

한때 특별한 스승없이 혼자 컸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 지적 여정에 도움을 준 유명인사(주로 책으로만 만난 분들)나 똑똑하다고 정평이 난 이들을 내 나름대로 내 '선생'이라고 칭하고 다니곤 했다. 교제가 없던 분들도 안면만 있으면 '당신에게 도움을 많이 받아서 난 당신을 내 선생이라고 생각한다'는 류의 메일도 보내곤 했다.

물론 본인에게 '선생' 대접을 해드려서인지 대체로 회신이 왔다. 두세줄 정도의 간단한 답장.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간결하고 건조한 답장. 그때는 그런 답장마저도 소중했다. 그렇게 나의 멘토들은 내 안에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유령 선생들을 붙들게 된 건 내가 성장하면서 만난 선생들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으리라. 초중고 선생님들의 기억이 대체로 ...그리 좋지 않고 입시학원 선생님은 더할나위가 없다. 대학에서 만난 선배, 선교단체 간사, 목사님들은 딱히 흠잡을 데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배울 구석도 마땅히 없어 보였다. (그 때는 그랬다.)

결국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아이들이 남의 집 아빠, 엄마를 동경하듯 나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남의 집 부모를 내 부모라고 부르고 싶은 욕망을 '선생'의 영역에서는 실행해 옮긴 셈이다. 내 주변에는 변변한 선생이 없으니 내 지적 여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은 분들을 줄을 세워 위치시킨 후 그들의 인가를 받는 방식.

이십대에는 그런 '너 내 선생님이야' 놀이가 재밌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게 무슨 선생님이냐 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년에 한번도 만나지 않고 서신조차 교환하지 않는, 요즘같이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도 실시간으로 카톡을 주고받는 시대에, 아무런 인격적인 교제 없는 책 속의 주인공 혹은 내 지식의 한 프렉탈만을 차지하는 인물과의 지식 교환을 과연 사제지간으로 볼 수 있나 하는 회의감에 빠졌다. 이건 전형적인 왕따의 골방 놀이에 다름아니지 않나.

부끄럽게도, 이십대에 즐겼던 놀이 중 이른바 '알고 보니 너도 쓰레기군' 놀이가 있었다. 당시 구루의 지위에 올려 놓았던 3-40대의 활동가, 저자, 교계 인사들을 존경하는 인물pool에 상정했다가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거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나면 '쓰레기'로 간주하는 것이다. 은근 쾌감이 있었다.

'너 내 선생님이야'와 '알고 보니 너도 쓰레기였군'놀이는 내 왜곡된 스승의 개념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다. 그리고 30대 후반에 나는 이 놀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내가 나이가 들수록 선생 혹은 쓰레기로 상정했던 그들의 얼굴과 내 얼굴이 겹친다. 누군가에게 나도 선생과 쓰레기 사이를 오가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좋은 사제지간은 인생 여정에서 자주 교류하고 손도 잡아보고 팔짱도 껴보고, 식사를 같이 하다 웃으며 밥풀도 흘려보는 관계가 인.간.적.이란 생각이 든다. 사제간에도 서로의 허물을 지적할 줄도 알고 그럼에도 신뢰를 잃지 않는 관계. 내가 뽀대나는 선생을 지명하고 어떤 이상적인 컬렉션을 모으는 것처럼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그저 자기 욕망의 충족을 위한 자위행위에 다름 아니란 생각.

탁월하고 현학적인 어떤 이상을 걷어내고 보면, 내 인생에도 많은 선생이 있었다. 내가 세운 높은 기준을 충족하지는 못했지만 나를 아끼고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준, 활자화된 글로서가 아니라 나를 여러차례 찾아오고 연락하고 조언해 준 많은 인생의 선배들. 때로 그들이 '틀린 생각'을 했을 때도 그들은 나를 걱정해주었지만, 나는 그들을 떠났고 종국엔 기억에서 지웠다.

스승의 날. 나이를 먹을수록 당의정의 단맛이 사라지며 이내 찾아오는 씁쓸함을 감내하듯 내 흥미로운 놀이들의 뒷감당을 하느라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자주 한다. 아침에 문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생각들이 똬리를 튼다...
2013/05/15 23:04 2013/05/15 23:04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이마트에서 아이패드 미니 30%할인 소식에 개장 2시간전부터 줄선 행렬이 뉴스기사로 났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자본주의의 노예라기 보단 할인주의의 노예가 아닌가 하는.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옛말처럼 할인이라면 동공이 커진다. 조건반사? 필요없는 물건도 50%면 다시 쳐다보고 사야할 논리를 단 몇초만에 만들어낸다. 사야할 물건이라면 단돈 200원이라도 싼 곳을 찾아 웹서핑을 한다.

그 지극정성으로 기사 한 개를 썼다면 나는 200원 이상을 벌 수 있었겠지만 할인주의의 노예인 나는 자주 최저가 할인혜택의 시장을 찾아 헤매는 외로운 소비자가 되는 것을 즐긴다.

문제는 한 인간의 생산성을 할인주의에 매몰되어 결국은 소비행위에 상당 부분 사용하게 되는 악순환의 구조다. '나 어제 이거 샀다'는 제1원칙이지만 보다 중요한 제2원칙은 '이거 얼마에 샀게?"에 대한 내 '할인주의'적 존재감의 증명에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말은 상당히 거대담론적으로 들리지만 꼼꼼하고 섬세해진 현대사회에서 한 개인의 가치관은 200원을 깎기 위해 나는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나 에서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나부터.
2013/05/07 23:04 2013/05/07 23:04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나는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사람을 세울 때 대놓고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낸다 교만하다는 이유로 추천하지 않고 조용히 기도생활하고 무관심한 듯 있는 이에게 무익한 종 이미지를 덧입혀서 혹은 하나님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겸손 코스프레'를 시키는 관행들이 불편하다.

그 위치에서 정작 재능을 발휘할 사람에게 그 일을 주지 않고 조용하고 인품(종교심)이 좋은 비전문가에게 맡기니 교회의 특정 영역들이 개선되거나 발전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특히 소규모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비일비재하다.

무익한 종이이었던 교인들은 맡은 일을 열심히는 하지만 고민해보거나 관심분야가 아니었던 관계로 어떤 이상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흥미있게 그 일을 추진하지 않는다.

혹은 일을 하지 않았던 때와는 달리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세상'에서 보여주던 실적중심, 승부사 근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때에는 다시 주변 성도들과 '일'에 의한 의견대립이 커지고 공동체는 혼란이 휩싸인다. 그렇게 되면 대체로 공동체는 '그 일 자체'를 접는다. 구조를 악으로 치부하는 셈이다.

고로, 나는 신앙고백이 교리와 일치한다면 의지있는 사람에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그 일을 위임하는 공동체가 건강하다고 본다. 특히 교회는 여성이 교사가 되거나 설교를 하거나 교회 전면에 나서는 것에 대한 강한 회의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데... 안 그러면 좋겠다.

여성 뿐만 아니다. 형기 왕성한 청년들에게도 좋은 훈련의 장이나 시험적인 모임들을 운영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고 교회 허드렛일 봉사로 소진시키는 관행이 못내 아쉽다. 썩어지는 밀알이 되라는 것은 어떤 자신의 색깔 자체를 버리고 우울증 환자 겸손을 넘어선 자학과 무기력을 강요하는 건 아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2013/05/07 23:03 2013/05/07 23:03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얼마전 오마이뉴스에 쓴 <아내가 지금껏 이런 일을 해왔단 말인가> 기사 반응을 보면서 느낀 점 몇 가지.

 

일단 반응이 뜨거웠다. 페북 좋아요 500회를 넘겼고 기사 점수도 <닥치고 정치> 서평 다음으로 높았다. 무엇보다 시민 5명에게 원고료도 받았다. (몇달 전에 기고한 기독매체 원고료는 아직도 무소식인데)
 
반면, 우는 소릴 자주 했듯 댓글들은 마치 조선일보나 일베에서 볼 법한 내용이 많았다. 정리하자면 여성들은 뭔가 시원함을 느낀 것 같고 반면 남성들은 공감하는 분들도 있었겠지만 뭔가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그 불편함은 이런 게 아닐까. 남성도 '지금도 충분히 고생을 하고있고 힘든데 가부장제의 원흉처럼 취급받는다'는 일종의 역차별 내지는 피해의식 같은 거다. 과거에 가부장제가 어떤 고압적 규율에 의존했다면 지금의 가부장제는 이런 류의 조금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는 것도 같다.
 
각설하고. 나는 남성이지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스스로 여성성을 확장시키고, 공공연하게 유사페미니스트 내지는 '언니'라고 칭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성주의 운동가들과 달리 나는 성해방운동의 주체로서 남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남성이 행위의 주체이자 동반자가 되어야 현실적으로 풀리는 문제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남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와 상황으로 어떤 '설득'을 하고 싶은 거다. 여성동지들 안에서 어떤 포퓰리즘을 일으키고 싶은 게 아니다.-_-;;;; (뭐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헌데 이 기사를 쓰면서 나는 내가 남성과 점점 불통의 단계로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진.심.으.로.
 
가끔 나는 두란노아버지학교(기독교에서 하는 자상한 남편 교육 프로그램인데 다분히 가부장적이다)에 대항마로 여성주의관점의 아버지학교와 세미나를 만드는 상상을 한다. (주위에서 부채질도 하고) 근데 요즘은 아내의 협박에 못이겨서 똥씹은 표정을 하고 들어오는 남편들이 떠오를 때가 많다. 이,,,, 이건 아니다 싶다.
 
결국 오늘 미생 123회 이야기처럼 부모가 모두(성차별없이) 행복해야 자녀가 행복하고 자녀가 행복해야 그들이 다음 세대에 빛을 발할텐데 그 조건으로 볼 때 여성이 불행할 만한 요소가 한국사회에는 너무 많고 그것을 조정하고자 하는 노력은 남성도 행위 주체자로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 글은 남성에게 공감을 주는 부분에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본다.

 

사실 그런 생각이 있다. 남성-여성, 구도를 보수-진보, 비전라도-전라도, 백인-흑인에 대치시켜도 공감대가 될 만큼 여성문제는 치명적이지만 너~무 시시콜콜, 째째, 미시적, 가정사적이라 글꽤나 쓰는 논객들이 쳐다보지 않는 영역이다. 그도 누군가의 남편일테니 그럴 수도 있고.

 

그런 대결 혹은 이항 구도를 탈피해야만 가능한 남성-여성 주체적 행위로서의 여성운동을 꿈꾸면서 이 벽을 더 높게 쌓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암튼 며칠동안 많이 배웠다. ...벌써 주말이다.^^

2013/04/26 23:02 2013/04/26 23:0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오늘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날씨에 걸맞게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흘러나왔다.
음악에 한참 젖어드는데 내릴 때가 됐다.
근데 아저씨가 목적지를 지나쳐서 계속 달리신다.

나: 아저씨 저 여기 내려야 하는데...
아저씨: 아... 죄송합니다. 노래듣다가 정신을...
나: 네. 여기 그냥 세워주세요.
아저씨: 네.
...
나: 노래가 참 좋죠?
아저씨: 웃음.
...
목적지를 한참 지나쳤지만 나는 다시 돌아가자고 하고 싶지 않았다.
몇백원의 거스름 돈도 받지 않았다. 그저 아저씨와 노래를 조금더 듣다가 내렸다.
적당히 젖어있는 감상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삶의 묘미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많은 당위적 행동들 가운데에서도,
틈틈이 흘러나오는 '비처럼 음악처럼'을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닐까.
오늘 내 생각은 그렇다.
2013/04/07 23:00 2013/04/07 23:00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아버지 칠순 기념 모임 낭독글.

 

제목: [아버지]

아버지가 벌써 칠십 세가 되셨다는 것이 사실 저는 믿기지 않습니다. 솔직히 제가 곧 마흔이 된다는 게 더 믿기지 않지만 말이지요. 아버지는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도 저보다 달리기가 빨랐습니다. 한번은 산책길에 달리기 경주를 했는데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를 했고 제 기억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저보다 두배는 빨리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전해 듣기로도, 젊은 시절, 아버지는 20대1로 싸워서도 지지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1:1로 싸워도 자주 지고 오는 아들이었고, 때로는 깡패에게 옷을 뺐기고 오는 저를 보며 속으로는 참 한심해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한번도 내색한 적은 없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저는 여느 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살가운 정이 좀 없는 편입니다. 저는 어머니는 여전히 엄마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중고등학교 즈음부터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저희 집안도 전인권씨가 쓴 유명한 책 <남자의 탄생>에서 묘사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자주,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고 어머니의 정서적 애인 역할을 하던 아들은 아버지 편이 아닌 엄마편일 경우가 잦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어느정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우리 자녀들에겐 먼 존재이기만 합니다.

한번은 가족이 부산에 내려갔는데 제 아들이 할아버지를 곧잘 따르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아이가 유독 할아버지를 좋아하더군요. 할아버지가 손자와 손을 잡고 앞서가는 모습을 보는데 아빠인 제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모를 뭉클함이 전해졌습니다. 그래, 저 사람이 내 아버지다.

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쓴 시집을 읽다보면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생사기로의 피난길에 동행이 어려워 떨구고 가게된
할머니의 호신용으로 낙점된 일곱살 배기 소년이
아우성 난리통에 온 가족과 생이별한 채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이라는 두메산골에서
홀로 할머니를 보살피며 시련의 한 계절을 겪고 있었다
밤낮으로 총소리 대포소리 요란했던 무서운 6.25 때."

아버지는 성인인 되어서도 심지어 노년에 들어서면서도 스스로를 소년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 중에 버려진 소년인 셈이지요. 재능이 남다르고 그나이에 물동이를 지고 다닐만큼 책임강이 강했던 소년, 냉정한 현실 세계에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남자, 씩씩한 가장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정작 당신은 평생동안 남모를 아픔과 연약한 정서를 가진 소년의 이미지로 자신을 형상화 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주변사람들, 저를 포함한 가까운 가족들 조차도 자주 아버지가 과거에 사로잡혀서 했던 얘길 반복하거나 설교조의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겨웠던 거죠. 올해 제 아들이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내후년에는 일곱살이 됩니다. 저는 제 아들의 이년 후를 상상하며 아버지가 전쟁 중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홀로 남은 일곱살 소년의 공포를 체감합니다. 한참 부모형제 앞에서 재능을 뽐낼 나이에 아버지가 감내해야 했을 책임감, 고독, 외로움들을 다섯 살 아들을 가진 이제는 조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제 기억에 아버지는 평생동안 독서광이셨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첼로와 붓글씨를 배우셨고 스포츠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회사 내의 여러 친선 경기에서 트로피를 휩쓸곤 했습니다. 십년 전부터는 시를 쓰시더니 시인 등단까지 하셨고 얼마 전까지도 아마추어 성악가로서 수차례 연주회를 가져왔습니다. 칠순을 맞은 오늘 이 자리 또한 작은 음악회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대부분의 일정을 계획하고 준비하셨습니다. 대단하신 분이죠?

이렇게 표현하는 게 칠순을 맞은 제 아버지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됩니다만 저는 오늘 이 자리를 이렇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소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소년이 재주를 뽐내는 장기자랑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오늘은 이 소년의 마음의 부모가 되어 그의 재능을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애정을 담아 기뻐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제 아버지를 기억해주시고 사랑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들, 김용주.

2013/04/01 22:59 2013/04/01 22:59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클라우드 기술이 유행이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핵심 개념은 이를테면 이런 거다. 고사양의 수퍼 컴퓨터가 물리적인 '어딘가'에 있는데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저가의 단말기를 통해 수퍼 컴퓨터를 빌려쓰는 것이다. 기업에서는 전직원에게 고가의 컴퓨터를 주지 않아도 되니 이득이고 IT업계에서는 무선망으로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어서 어느곳(기기)에서나 동일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최대 단점은 트래픽이 수퍼컴퓨터에 몰린다는 점이다. 매순간 수십명 수백명의 접속자들이 동일한 컴퓨터에서 작업을 하니 당연히 부하가 걸린다. 만일 수퍼 컴퓨터가 죽기라도 하면(나는 의도적으로 죽는다는 표현을 썼다) 다른 단말기들은 그냐말로 깡통이 된다. 그외에도 보안 문제가 있다. 여러 은행에 돈을 분산...관리하지 않고 한곳에 몰려있으면 도둑이 한곳을 집중해서 털면 되니까...

#2.
교계 조직 혹은 시민단체들이 대기업의 피라미드식 서열구조를 비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특히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영적을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이유에서 교계의 조직들은 대기업의 여러단계에 걸친 보고체계를 비웃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 비웃음에 동의할 수 없다.

내 경험상, 직장에서 보고체계가 여러 단계인 건 맞다. 하지만 적어도 실무자( 여기에서는 설계자)는 대리직급의 연구원이라 하더라도 회의에 나가서 자신이 방향성을 결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면에 자기 이름이 박히며 이는 최악의 경우 차량 리콜시에 책임이 그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면밀히 따져보고 검토한 자료를 토대로 결정하는 일개 대리의 방향을 특별한 이유없이 자기 팀이나 회의에 참석한 타팀의 파트장급이나 팀장이 뒤집을 수 없다.

#3.
애석하게도 내가 경험한 교계 조직들의 실무자들은 그들이 비판하는 대기업 조직보다 못한 재량권을 행사한다. 머리가 허연 분들도 교계에서는 2세대니 3세대니 하는 가신그룹에 속한다. 간사급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국장급 정도 되어도 관련 협의를 하자고 하면 나와서는 대표님에게 전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라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하다못해 문건 하나를 만들어도 국장이 쓴 문구 하나하나를 대표가 개입해서 고치는 경우도 몇번 봤다.

그런 이유로 종종 나는 교계 조직을 볼 때마다 클라우드 컴퓨팅 구조가 떠오른다. 진짜는 하나뿐 나머지 중간 관리자나 실무자는 그저 단말기에 불과하다. 아주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만을 시키고 정작 실무자, 담당자로서의 재량권은 주지 않는다. 클라우드처럼 실시간 무선 통신이되면 그나마 좋겠지만 돌아가서도 보고하고 지침을 듣기까지 꽤 오랜시간이 걸린다. 지침 자체도 두루뭉실한 경우에는 회의의 본 뜻마저 훼손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논의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4.
교계 조직의 문제는 뭔가. 말한대로 실무자들을 위시한 조직의 직급체계에 합당한 재량이나 결정권이 없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다. 담당자에게 책임을 지게하는 만큼의 재량권을 주라. 회의에 보내면 결정하게 만들라. 그게 아니라면 국장이니 차장이니 하는 명목상 직급명칭을 떼고 팀제도(팀장-팀원)로 전환하고 팀장급이 모든 결정을 주도하는 구조로 가는 게 차라리 낫다. 표리부동한 직급별 업무분장은 실무자들에게 잦은 분란과 좌절감만을 안겨준다.

물론 더 큰 문제가 있다. 교계의 대표자들은 아쉽게도 수퍼컴퓨터가 아니다. 박원순 시장이나 김성근 감독 같은 부류가 아니다. 게다가 수퍼컴퓨터가 죽거나 은퇴라도 하면 조직은 큰 혼란상황에 휩싸인다. (이는 지금도 많이 경험하는 바다.) 최선과 차선 모두 현실에 부합하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2013/03/09 22:58 2013/03/09 22:58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최근 몇년간 20대 청춘들에게 '멘토'와 '힐링'이란 말이 유행했다. (힐링이란 말에는 몇몇 비판적인 이야기도 접했지만 대세를 뒤집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책도, (읽지는 못했지만) 결국 청춘들이 세상에서 부딫히고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며 그런 행위 자체를 긍정하고 지지하겠다는 의도였으리라.

#2.
직장생활 가운데 상당히 얍쌉한 전략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거다.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내 업계를 예로 들면) 차량을 개발하면서 설계 단계에서 문제점이 발견된다. 실차 평가 시에 무리없이 넘어갈 수도 있지만 문제가 터질 수도 있는 아리까리한 케이스가 발생한다. 허나 설계 초기단계에는 놓치고 뒤늦게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하면 결정권자의 '까임'을 당하기쉽다.

그래서 잔머리를 굴린다. 프로토타입의 차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험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보고서를 가지고 원인을 규명하고 개선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전자는 게으르다 혹은 무능하다고 치부되지만 후자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윗사람이 살짝 걱정이 되려는 찰나에, 척척 치밀한 분석에 개선안까지 1주일 안에 진행하면 그 사람은 무능력자에서 단번에 능력자로 탈바꿈된다! (당신이 웃거나 황당해한다면 이(직장) 바닥을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치열한 경쟁이 판치는 중원 고수들의 tip이다!

#3.
'힐링'이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직장생활의 얍쌉 꼼수를 예로 든 건 둘 사이의 어떤 연관 관계가 보이기 때문이다. 내 독학의 통찰로 보기에 힐링은 기성세대의 꼼수다. 여기에 나를 포함시켜도 상관 없다. 기성세대는 청춘들이 다치고 부서지고 깨질 것을 명약관화하게 예측하면서도 그냥 지켜본다. 왜 예측가능하냐고? 자신들도 그렇게 세상을 배웠고 그 안에서 아프고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힐링'의 지점을 잘 알고 있다.

과거의 멘토들은 군대 상관 내지는 직장 상사 같은 이들이었다. 김성근 감독처럼 자기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자기의 멘티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채찍질하여 키워내던 이들이다. 그 고통을 견뎌내면 철인이 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다수는 그런 '스파르타 주민들'이 아니다. 더욱이 무한경쟁에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더 가혹한 구조가 스파르타 주민들이 되어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과거에 반해, 우리 시대의 멘토들은 공감과 소통으로 무장했다. 세련되게 '우쭈쭈..'할 줄 안다. 그가 쓰러질 그 자리에 서서 손을 잡아준다. 그리고 그가 쓰러진 이유를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설명해준다. 때론 구조의 문제를 읊조리며 굿윌헌팅의 상담 선생님처럼 'it's not your fault'라고 다독여준다. 이 지점이 나는 못내 불편하다. 청춘들이 죽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숨어서 실눈 뜨고 지켜보다가 넘어지는 청년들에게 나타나서 감언이설로 위로하는 게 솔직히 껄끄럽다. 
 
#4.
 차라리,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멘토'는 청춘들에게 정직하게 무릎을 꿇고 사과할 줄 아는 기성세대의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너에게까지 고통을 안겨줘서 미안하다고.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선배로, 선생(먼저 태어난 이)으로 너희들이 아파하고 흔들림을 반복하는 문제들을 알면서도 대항하거나 고치려고 애쓰지 못하고 너희 세대에 동일한 문제를 떠넘겨서 정말 미안하다고 무릎꿇고, 혹은 머리라도 긁적이며 사과하는 이가 진짜 '멘토'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파르타식 멘티 훈련법'에서 벗어난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얍쌉한 스탠스를 '힐링'이라는 포장으로 위로하고 다니는 '멘토'들을 보면 직장 강호에서 인정받는 분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에 기분이 좀 씁쓸하다. 이 시대의 멘토들 모두가 꼼수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기성세대의 잘못을 사죄하는 겸손한 인격들도 거의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5.
 그런 이유로.. 내가 하고픈 결론은 이것이다. 기성세대가 청춘들에게 '멘토'로 인기를 얻으려 하기 전에 선배로서 겸손히 사과의 마음을 전하자. 얍쌉한 현실분석과 과장된 감정표현은 기성세대의 상사나 윗사람에게나 계속하고, 청춘들에게는 솔직하게 말하자. 나도 딴에는 열심히 살았지만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건 쉽지 않더라고, 그렇게 정직히 말하자.

정말 '멘토'가 되고 싶다면 말이나 책, 강연뿐만 아니라 그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소박하더라도 보다 직접적인 수고를 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3/09 22:57 2013/03/09 22:57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오늘 서랍정리를 하다가 책도장을 발견했다. 한때 나는 모든 책에 내 이름이 각인되어있는 책도장을 찍었다. 불과 5-6년전만 해도 책을 읽는 것과 더불어 책을 소유하는 것 자체도 어떤 자극 내지는 즐거움을 주었다.

제레미 리프킨은 자신의 책 <age of access>에서 현대가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논증한 바 있다. 그만큼 제품과 자원의 순환속도가 빨라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주변의 모든 물건들을 일시적으로 소유하는 일이 잦아지고 중요하지 않은 물건들이나 제품들, 특히 s/w들은 라이센스를 연장하는 방식으로 '대여'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리프킨은 access, 즉 '접속'이라는 용어를 차용했다.

당시에도 끄덕이던 그의 분석과 예견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이제는 책...도장을 찍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책이 서재에 꽂혀있길 기대하지 않고 이제는 중고로 팔거나 주변 사람들과 돌려보거나 자료활용도가 높으면 스캔업체에 보낸다. 그 어떤 경우에도 책에 내 이름을 새기고 싶은 욕구는 반감되고 결국 책도장은 내 서랍 속에서 몇 년간 방치되어 있었던 셈이다.

요즘도 전자기기들이나 사무용품, 노트, 펜 등에 각인 서비스를 해준다. 처음에는 추가비용을 들여서라도 각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자 기기들의 경우에는 2년 주기로 model year가 교체되고 그 즈음에 나는 기기들을 중고시장에 내놓는 편이라 각인이 유효한지 혹은 옳은지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현재까지의 결론은 순환재 즉 일시적인 기간동안 사용하는 물건들에 내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말자는 생각이다. 책도장을 들고 유심히 보다가 든 생각을 조금 끄적여본다.
2013/03/09 22:56 2013/03/09 2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