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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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사회인이 되기까지 이십년, 혹은 삼십년동안을 우리는 교육받는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고 주변 친구들과 경쟁하고 놀이도 교제도 연애도 미룬 채 좋은 제품으로 사회에 출시되기 위해 분투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동일하게 내 아이가 사회에 나가기까지 전심으로 아이를 양육한다. 이 양육이라는 것은 '자기계발'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뒤쳐지지는 않는지, 발육상태와 IQ, EQ, 조기교육에 글로벌시대의 인재가 되기 위해 해외여행, 어학연수까지. 한번 쳐지면 2등 시민, 3등 사회인, 꼴찌 인생이 되는 것처럼 다들 달리고달리고...달린다.

2. 
사회는 기본적으로 불규칙적이다. 의도된 반칙과 예기치 않은 재난들이 한 사회를 쓸고 다닌다. 천재지변으로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기도 하고 불합리한 이유로 그 재난이 가중되거나 극복되기도 한다. 원치 않았지만 장애가 있는 아이를 얻기도 하고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자폐나 ADHD,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받기도 한다. 열심히 일했지만 파산하거나 해고되거나 타국에 가서 살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사회적 불규칙성에 의해 모두가 '온전한' 사회 구성원이 되려는 기대와 달리 소수자, 약자가 생겨난다. 반대로 정당하게, 때로는 불합리하게 강자와 메이저 계급 또한 생긴다.

3. 
그런 의미에서 한 사회가 정작 '온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이삼십년 동안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나의, 내 자식의 역량 강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를 '폐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함께 공생하며 서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한다. 사회생활을 위한 라이센스가 있다면 그건 '자기계발'이 아닌 '공동체 속의 공생' 노하우를 숙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장애를 얻게 되었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가졌을 때 사회는 나에게 장애를 가지고 사는 법을 교육시켜줘야 하고 내 이웃들이 나를 잘 대할 수 있는 에티튜드와 사회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정신장애를 가진 아이를 다른 친구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어린이집에서 퇴출시키기 보다는(최근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 아이를 공동체에서 없애기 보다는 그의 문제를 경험하게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미 자라면서 그런 소수자, 약자를 폐기하는 방식에 익숙한 아이들은 성장하면 자연히 괴물이 되기 마련이다. 요즘 애들 문제라지만 그 아이들을 만든 사회는 그 부모와 부모 세대의 세계관(교육) 결과인 셈이다.

4.
우리 주변에도 사회의 불규칙성은 편재하다. 신체 및 정신장애, 질병, 산재, 실직과 실업, 미취업, 싱글,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외모와 학력 컴플렉스, 미혼모, 입양, 성소수자, 버려진 반려동물들, 왕따,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슬프게도 우리는 이런 약자와 소수자 문제에 일상적으로 제대로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강자와 권력자는 관심이 없고 좌파와 진보는 지식만 깊다. 정작 사회는 '그게 무슨 국가가 할 일이냐, 사회가 부담할 비용이냐, 빨갱이냐' 라는 망발들이 합리적이고도 시크한 생각인듯 구성원들을 계몽한다. 뒤쳐지기 싫으면 너나 잘해라.

5.
우리가 배워야 할 기본적 소양을 배우지 못한 이유로, 우리는 소수자, 약자와 함께 사는 방법을 몰라 당황하고 허우적 대다가 소수자를 더 내몰고 지옥으로 보내면서 어설픈 웃음을 짓는... 멍청한 인간들로 전락했다. 내가 그런 처지가 아니면 다행이고, 잘못해서 그렇게 되면 깊은 좌절과 우울감에서 그 누구도 건져내어 줄 수 없는 그런 자조사회가 되었다. 우울증과 강박증 중에 하나를 선택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인 셈이다.

6.
올해들어 조촐하게 진행하는 세미나를 '소수자와 공생하는 법'을 함께 배워가는 방향으로 잡았다. 시작은 '입양'이다. 물론 이 방향성에서 중요한 방점은 '소수자'이기도 하지만 '공생'이기도 하다. 이는 소수자만을 위한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권력자와 강자를 비판하기 위한 교과서적인 네거티브 스타일도 아니다. 리얼 월드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느 한쪽을 배제, 폐기하거나 어느 한쪽을 악마취급해서는 온전한 사회구성원이 될 길은 소원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5/03/19 23:37 2015/03/19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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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의 글은 시대를 가르고 있다.
적어도 '내 세계'에선 그렇다.
.
'태초에' 강준만이 있었다면 
구원은 (만약 구원이 존재한다면)
정희진 선생을 기점으로 시작되고 있는 듯 하다.
.
그녀는 항상 페미니즘을 여성만을 위한 학문이나 철학, 
세계관이 아니라고 한다. 
내가 그녀를 다른 페미니스트와 구별짓는 가장 단호한
지점이 이것인데 그녀는 사회 안에서의 다양성이라는 
화두, 평화학(항시 그녀는 자기분야를 그렇게 소개한다)
에 이르는 '문'으로 여성학을 치부한다.
.
정선생은 짧은 글에서조차 '진영논리'와 '거대사-미시사',
'당위'와 '윤리'를 허문다. 
그것이 그녀가 페미니스트로서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
2015/03/08 23:19 2015/03/08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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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면서 상당기간을 비판글을 썼다.
자음과 모음들을 모아 춤을 추게 만들었다.
실명으로, 텍스트를 쪼개가며 글쓰는 것,
쓰여진 글을 풀어서 되돌려 주는 것.
굴욕적인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
더 강한 답글을 만나면 살짝 흥분되기도 했다.
.
2.
글에 레벨을 따지지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의 '관'을 세우는 것보다) 쉬운 경우가 잦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바둑이나 장기를 옆에서 훈수 두듯이 당사자에게
안 보이는 것들이 옆에선 매직아이처럼 도드라진다.
.
3.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더이상 누군가에게 비판글을 쓰지 않게 됐다.
전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주에 한두명은 거론했던 과거에 비해
나는 참 글에 있어서는 평화주의자가 된 거 같다.
솔직히 요즘은,
싫어하는 누군가를 비판하기 보다는
좋아하는 누군가를 옹호하는 컨텐츠를 만들고 있다.
.
4. 
사실 그 작업은 비판글을 쓰는 것처럼 쉽지 않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오해의 소지도 있고, 일정부분 정치적인 타협도 필요하다.
나아가 정작 당사자가 원치 않을 때도 있다.
내가 누군가를 부정하는 일은 비교적 쉽게 
주변에서 받아들여지지만(적어도 '다름'을 인정받지만)
내가 누군가를 긍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의심의 눈초리와 부정적인 반응,
박쥐, 회색인간, 양다리 등등
냉정하게 말해 나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곤 한다.
.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를 긍정하는 일,
좋아하는 누군가를 옹호하는 것을 내 지향점으로 삼는다.
그것은, 내게 어떤 거룩한 소명이라거나 
큰 그림에서의 의무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여러가지 이유로 비판글을 쓰지 않게 되었기에
불구자의, 대안적인 몸부림에 가깝다. 
마치 조폭이나 강력계 형사가 칼이나 피를 보면
몸이 굳어버려 더이상 '영업'을 못하게 된 것과 유사하다.
.
6.
물론, 
여전히 비판적인 문구들이 유희처럼 머리속을 맴돌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유희를 넘어선 현기증이 나를 누른다.
글쓰기가 내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면 나는 살기 위해
평화주의자'연' 해야 한다. 그렇게 걸어가야 한다.
.
7.
김성근 감독.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내게도 그는 참 높아 보였다.
각설하고 내가 꽂힌 그의 고매한 리더십은 바로,
'내 선수 중에 버릴 사람은 한명도 없다. 모두 쓸모가 있다.'
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었다. 인간은 모두 쓸모가 있다.
사실 '쓸모'라는 것은 인격체에 부여된 최소한의 효용성이다.
내가 그에게서 취한 화두는,
나에게만 보이는(그런 류가 존재한다면)
그 효용성이라는 것을 힘.써. 드러내자는 거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내 글쓰기의 즐거움을 되찾기 위해.
...
요즘 그런 생각하고 산다. 
뭐... 그런 생각하느라 글은 별로 안 쓰고 산다.
2015/01/28 20:43 2015/01/2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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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회에서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과 마주하면서 생기는 '설렘'에 관한 단상이다. 물론 요즘 불거진 사건이 화두를 던져줬지만 딱히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나아가 그 사건에 대한 윤리적, 법적 판단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그리고 일상적인 중년 아저씨의 관찰기다.

사실 젊은 여성과의 관계의 발전을 통해 설렘을 경험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롤리타 같은 소설에서부터 데미지나 연인 같은 영화. 그리고 매일 보게되는 포탈 뉴스에서, 직장에서, 동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 하나둘은 일상적으로 듣게 된다. 흥미롭게도 나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중년 남성의 대부분이, 참 평범한 사람들이란 느낌을 자주 받는다. 여자를 특별히 밝힌다거나 평소에 업소에 드나든다거나 질퍽한 농담을 일삼았던 이들이 아닌. 

대체로 포탈에서 기사화되는 사건에서 많은 여성들은 문제의 남성을 변태로 치부하거나 가정있는 남자의 파렴치한 일탈, 욕망으로 치부하는데, 나는 많은 경우 그런 단순한 도식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중년 남자의 복잡한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변 다수의 여성들은 아빠 오빠 빼고 모든 남성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일정부분 그건 사실이다) 아무튼 앞서 말한 것을 '평범한 남자의 복잡한 욕구'라고 정의하자.

신정아가 쓴 <4001>을 보면서도 느꼈고 이번에 공개된 문제의 카톡 문자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사회에서 만난 젊은 여성에게 설렘을 느끼는 중년 남성의 욕구는 크게 3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물론 '몸'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남성들이 젊은 여성의 몸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남성은 마치 노년까지 사춘기시절의 성적 욕구를 가진다고 치부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많은 경우 주변 남성들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두번째는 '젊음'에 관한 것이다. 많은 중년, 나아가 노년의 남성들도 마음만은 젊은 줄 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이십대 여성이 '아저씨'라고 부를 때, 사회에서 친구처럼 대하고픈 여성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많은 중년의 피터팬들은 심정적 지옥을 경험한다. 주고받은 대화나 문자에서 젊은 여성이 허울없이 대할 때, 서로 반말을 주고받거나 친구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 중년 남성은 '설렌다' (사실 나는 이 '젊음'에 대한 욕망이 몸에 대한 욕망보다 크다에 내 오른팔을 건다.^^)

마지막은 '도와주고 싶은' 욕구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여성에 비해 남성은 존경받고 싶은 욕구, 도와주고 나서 고맙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나는 이것이, 사회적 욕망이 높은 젊은 여성과 도와주고 싶은 중년 남성의 니즈가 통하는 지점이라고 본다. 소림사에 갓들어온 동자승, 키다리 아저씨, 사조수 관계 등 남성은 자신이 미숙한 어떤 존재를 다듬어가는 과정에 희열을 느끼는 부분이 분명 있다. 가르치면서 통제하려는 욕구, 그것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같은 것 말이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모범생으로 커온 평범한 남성들의 일상적인 욕구의 자제, 직장생활에서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의 스트레스, 표현의 억압 등의 이슈들이 있다. 뭐, 그런 이야기는 김두식 교수님의 책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충분히 이야기된 바이니...

나는 이 '설렘'의 존재에 대해 양자가 인지하는 것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인지하는 '설렘'은 자연스럽게 욕망의 본질에서 빗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지하게된 복잡한 욕망은 그 감정, 행동의 방향성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게 만들므로 그 설렘의 최종 책임을 지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정서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삿대질하는 포탈 뉴스에서 경험하듯. 

뭐,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잠간 해봤다...-_-;;;

페북. 2015. 1. 21.
2015/01/21 23:00 2015/01/2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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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초반까지를 애늙은이처럼 지낸 이유로.
'토토가'에 나온 가수 대부분을 방송에서 본 적이 없다.
가수 뿐이겠나. 스포츠와 드라마, 음악프로그램 등.
TV 자체를 제대로 보지 않았으니 토토가 자체가 생경하긴 했다.

하지만 나왔던 가수들의 나이가 비슷하다 보니,
그 시절에 내가 지나쳤던 또래문화가 저랬구나, 저 문화가
내 20대를 지나쳤구나, 뭐 그런 생각에... 잠시 뭉클했다.

내게 90년대는 한없이 많은 책을 읽고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많은 지식들에 목말라하며
인터넷에서 내 지식을 무기삼아 논쟁을 벌이며 나름의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ㅎㅎ 그게 뭐라고.

내 취향이 그 시절 대중의 기호와 다르다는 걸 입증하려는 듯,
영화와 음악도 독특한 스타일을 찾아가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런 게 정말 활활 타오르던 시기였고.^^

오랜만에 무도를 보면서.
당대를 살았으나 솔직히 공감할 수 없는 컨텐츠를 보면서도
내심 감정이 흔들리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아마도 그런 이유이겠지. 

지금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몇년째 계속 늘어가는 
느낌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_-;;;
2015/01/02 11:32 2015/01/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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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쓰는 행위에 익숙한 나에게
올해처럼 글쓰기에 흥미가 떨어진 적도 없었다.
아무리 하소연을 하고 괴롭다 말해도
내심 쓰는 행위 '자체'가 내겐 나름 즐거움이었는데
올해는, 솔직히 꽤나 힘들었다.
.
내 속에 들어가보지 않고는 공감할 수 없을 듯한
주기적인 이 미묘한 감정의 늪이랄까.
연필에 무게추가 달린 듯
손가락에서 키보드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고
매일같이 떠오른 생각의 실타래를 좇아가다
단어 하나를 치고는 페북을 끄적이다가
이 책 저 책을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단어 몇 개만 노트에 적고는 잠을 청했다.
.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죽 훑어보면서 
쓰고 싶던 글감들을 끄적인 메모들이 눈에 띄었다.
정말 쓰고 싶은데, 정말 지금은(그때는) 쓰고 싶지 않았던
그 모순적인 감정을 복기해냈다.
내년에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
당위적인 담론, 인지도를 높이고 싶은 욕망, 지적 허세,
그런 것들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상관없이
글이라는 페르조나(만약 있다면) 이전에 존재하는
나만의 놀이로서의, 나와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서의
본연의 쓰는 행위에서 다시금 편안함, 행복함이 얻어지면 좋겠다.
부디, 내년엔.^^
2015/01/02 11:28 2015/01/0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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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그래가 맷 데이먼처럼 맨몸으로 이국 요르단에서 추격전을 펼치고 건물 사이를 뛰어넘고 차량에 부딪히는 액션 연기가 쉴 틈 없이 펼쳐져 보는 쾌감이 있었다. 그런데 왜소하고 힘없고, 액션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장그래는 언제 갑자기 이런 액션맨이 됐을까. 또 영어 울렁증이 있던 그는 언제 영어를 능숙하게 하게 됐을까. 그런 장그래의 모습은 대기업상사에서는 정규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작은 회사에서도 그가 단기간에 슈퍼맨처럼 성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해 씁쓸함을 안겨줬다."

뭐... 원래 기사의 퀄리티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좀 왜곡이 아닌가 싶었다. 이 최종회가 '작은 회사에서도 수퍼맨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는 건 좀 지나치다. 걍... 마지막회에 돈을 좀 쓰고 싶었나보지.ㅋㅋ 만약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오차장이 대기업에 다시 들어가고 싶냐는 물음에 나를 홀려보라는 장그래의 농담을, 정색을 한 채로 '입장이 뒤바뀐 두사람'이라고 독해한다 해도 그건 또다른 오독인 셈이다.
그냥 나는 원작보다 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상사맨의 뜨거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돈도 쓰고 화면 좋은 곳에서 멋있는 말도 몇 마디 던지면서. 그게 원작을 오히려 망친 방향이라 하더라도 19번의 즐거움을 준 드라마를 욕할 이유는 아닌 것 같다. 걍... 마지막에 일찍 정을 떼게 해주려는 배려라고 생각했다.ㅋㅋ

어쨌거나 나름 리얼리티가 살아있던 원작에 비해 강전무, 오차장의 대결구도에서 '장그래 일병구하기'로 맞짱뜬 드라마는 결국 라인에 따라 살아남는 '인맥의 전설'로 마감했다. 고로 여기서 불편한 지점은 자신을 알아봐준 직장 상사가 라인을 끌어주니 체력도 영어도, 업무능력도 수퍼맨이 된 장그래의 화려한 마무리가, 그리고 영업3팀 끈끈한 인맥이 뭉쳤다고 회사에서 서로 끌어안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장면이... 그러려니 하려다가도 껄끄러운 묘한 어색함을 줬다. 그런 의미에서 최종회는 기자의 오독에도 불구하고 씁쓸하다는 건 좀 과하고 그런 면이 불편했을 따름이다.


12. 21. 페이스북 글.

*관련 기사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01251
2015/01/02 11:25 2015/01/0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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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동안 여성주의 시각으로 SNS나 강의에서 강한 논조로 가부장제, 혹은 성평등 이슈에 많은 말들을 했었다. 언젠가부터 그 빈도수가 줄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기 보다는 한번 뜨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일상적으로 지적할 부분은 넘쳐나고 그것을 일일이 이슈를 삼는다는 것 자체가 대중에게, 혹은 주변에조차 어떤 내성을 심어줄 것 같은 불안함마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때 이런 류의 내거티브 운동 자체에 마냥 긍정적일 수는 없는 게 현실 같기도 하다.

2.
내가 SNS에서 비판적인 논조로 말하고, 그 말의 수위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정부에서 국가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을 탄압하기 위해 개인신상을 털지 않은 다음에야 그건 그저 스스로의 자위책으로 그칠 확률이 높다. 물론 SNS는 순식간에 전파되므로 이슈를 선점하고 확산시킨다는 관점에서는 좋은 플랫폼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가부장제, 성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지점은... 어떤 의미에서(일상생활에서조차 깊이 체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작 동성애논쟁보다 지지받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3.
오늘 팟캐스트를 함께하는 간사님으로부터 통계자료를 받았다. 개독교, 한줌 개신교 선교단체의 방송의 한자락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솔직히 겉으로 오바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한국에서 기독교인임이 자랑스럽다거나 기쁘다거나.. 전혀 그런 맘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팟캐스트에서 '언니들'을 꽤 많이 섭외했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긴 했다. 감사하게도 다들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고 언제나 기대이상의 강의를 해주었다. 은근히 교계 안에 팽배한 어떤 편견... 여성 리더십, 여자 강사의 말빨은 왠지 비논리적이고 불안해 보인다는 의구심을 불식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4.
결국 사람은 자기가 떠드는 이야기에 걸맞은 걸음을 걸어가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전보다는 더 성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면에는 내 삶과 말 사이의 보조를 맞추고 살아야겠다는 나름의 반성도 있다. 이젠 소박하게나마 내게 주어진 기회가 생길 때 내 말에 걸맞는 적절한 걸음을 걷고 싶을 뿐이다. 사람들은 공감하지도 않는데 내 입으로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는 건... 웃길 생각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것도 같다.

팟캐스트 통계를 보며 이런저런 감사한 생각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얘길 먼저 하고 싶었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2014/12/22 20:30 2014/12/2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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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때로 나는 여성의 평등 혹은 어떤 면에서는 남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입장을 가졌음에도(나는 자주 자끄 엘룰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이 인간이고 그 중에도 여성이라는 점을 흥미롭게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여성 저자를 추천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솔직히 당시에 몇몇 이름난 여성의 책을 일부러 읽어보았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저자)에 대한 내 생각과 현
실 사이의 거리감 같은 게 솔직히 없었다고 할 수 없다.

2. 
불과 몇 년 사이에 나는 혼자 있을 때조차 자주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의 여성 저자들을 많이 접하고 있다. 물론 그 동안 내 책읽는 스타일의 변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내적 변화와 별개로 몇 년 사이에 걸출한 여성 글쟁이들이 여러 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들어 어떤 (남성) 논객들에게서도 큰 배움을 얻지 못했다고 '자부'(?)했는데 그런 여성들의 관점과 스타일 모두에서 나는 참회의 눙물을 흘리곤 했다. 

3.
여성을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흥미로운 점도 있다. 남자들을 글을 쓸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정량의 허세가 글 전반에 배치가 되어 있다. 지식의 양을 자랑하거나 인맥을 자랑하거나 문화자본을 자랑하거나. 대놓고 자랑하거나 두괄식으로 자랑하거나 '퍼기깔대기'를 들이대거나, 하다못해 '추신'으로 자랑하거나... 어쨌든 허세를 부린다. 그게 어떤 모종의 글쓰는 방법처럼 익숙했고 나도 은연 중에 그런 '허세 운율'을 따르곤 했다.

4.
그런데 정말 재밌게도 내가 좋아하는 다수의 여성 저자들은 그런 허세가 없다. 물론 더러는 자학성 겸손이 몸에 밴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면에서조차 나는 배우는 부분이 많다. 여전히 허세문법이 나에겐 중요한 부분인데 여성 저자들의 글에 젖어들다보니, 글을 쓸 때마다 마치 은연 중에 'ㅎㅎ 지금 너 무협지 쓰니? 허세 쩐다'라고 말하는 듯한 환청마저 들린다. 흥미롭게도 이런 성찰 아닌 성찰은 남성들의 글쓰기 공간, 장 안에서는 전혀 인지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P.S
오늘도 정희진 선생의 토요 칼럼을 읽으며 행복한 마음에 몇 자 끄적여본다. 허세 없는 담백한 글쓰기를 꿈꾸며.
2014/09/21 15:15 2014/09/2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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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글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물론 여전히 애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허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내가 썼던 글들에 대한 집착, 애착이 심했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고 쓴 글은 거의 대부분 PC나
 블로그에 정리해두곤 했다.
그리고 자주 글로 사람을 평가했다.
서로 비교를 일삼기도 했고 글의 수준이 높지
않은 경우에는 마치 글과 사람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물론.
머리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신영복 교수가 어떤 강연에서 했던 말씀처럼
 집을 짓는 목수는 그림을 그릴 때 지붕의 기와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소위 지식만을 쌓은 자신과 같은 백면서생들의 문제를
 감옥에서 충격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일화들.

한국의 많은 교회들,
유독 많은 신학교와 넘쳐나는 신앙 양서들.
그것들을 소비하고 더 정화된 더 날카로운 지성.
거품을 걷어낸, 지나친 신비주의나 지나친 개인주의,
물질주의, 사회와 격리된 신앙을 경계하는 양질의 설교들.
그 정교하고도 옮은 말들, 글들.

그것들의 홍수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침몰해가고.
많은 논객과 글쟁이들의 담론 속에서도 사회는 후퇴한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말과 글의 힘을
 담론의 힘을 너무 맹신했거나 우상시했던 건 아닐까.

글이나 말로 사람을 판단하는 습속을 버리면서
 나는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발견한다.
이 어둡고 막막한 세상속에서도 여전히 가슴뭉클하고
 애정을 갖고 싶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대하고 판단했던 내 작은 우주가 허물어지는 느낌.
아마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이 느낌을
전적으로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어떤 정서가 생겼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글과 말들에 대한 과했던 어떤 애착.
그것을 자제하려는 노력을 넘어선 심드렁함...
어느덧... 부지불식간에 내게 그런 정서가 생겼다.
물론 부지불식간이라고 하기엔
 기억나는 몇몇 사건들과 몇몇 사람들이 있다.
내 우상들이 무너져 내리게 만든 따뜻하고 성실한 인격들이.

2014/07/28 23:48 2014/07/28 2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