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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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회에서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과 마주하면서 생기는 '설렘'에 관한 단상이다. 물론 요즘 불거진 사건이 화두를 던져줬지만 딱히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나아가 그 사건에 대한 윤리적, 법적 판단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그리고 일상적인 중년 아저씨의 관찰기다.

사실 젊은 여성과의 관계의 발전을 통해 설렘을 경험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롤리타 같은 소설에서부터 데미지나 연인 같은 영화. 그리고 매일 보게되는 포탈 뉴스에서, 직장에서, 동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 하나둘은 일상적으로 듣게 된다. 흥미롭게도 나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중년 남성의 대부분이, 참 평범한 사람들이란 느낌을 자주 받는다. 여자를 특별히 밝힌다거나 평소에 업소에 드나든다거나 질퍽한 농담을 일삼았던 이들이 아닌. 

대체로 포탈에서 기사화되는 사건에서 많은 여성들은 문제의 남성을 변태로 치부하거나 가정있는 남자의 파렴치한 일탈, 욕망으로 치부하는데, 나는 많은 경우 그런 단순한 도식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중년 남자의 복잡한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변 다수의 여성들은 아빠 오빠 빼고 모든 남성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일정부분 그건 사실이다) 아무튼 앞서 말한 것을 '평범한 남자의 복잡한 욕구'라고 정의하자.

신정아가 쓴 <4001>을 보면서도 느꼈고 이번에 공개된 문제의 카톡 문자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사회에서 만난 젊은 여성에게 설렘을 느끼는 중년 남성의 욕구는 크게 3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물론 '몸'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남성들이 젊은 여성의 몸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남성은 마치 노년까지 사춘기시절의 성적 욕구를 가진다고 치부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많은 경우 주변 남성들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두번째는 '젊음'에 관한 것이다. 많은 중년, 나아가 노년의 남성들도 마음만은 젊은 줄 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이십대 여성이 '아저씨'라고 부를 때, 사회에서 친구처럼 대하고픈 여성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많은 중년의 피터팬들은 심정적 지옥을 경험한다. 주고받은 대화나 문자에서 젊은 여성이 허울없이 대할 때, 서로 반말을 주고받거나 친구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 중년 남성은 '설렌다' (사실 나는 이 '젊음'에 대한 욕망이 몸에 대한 욕망보다 크다에 내 오른팔을 건다.^^)

마지막은 '도와주고 싶은' 욕구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여성에 비해 남성은 존경받고 싶은 욕구, 도와주고 나서 고맙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나는 이것이, 사회적 욕망이 높은 젊은 여성과 도와주고 싶은 중년 남성의 니즈가 통하는 지점이라고 본다. 소림사에 갓들어온 동자승, 키다리 아저씨, 사조수 관계 등 남성은 자신이 미숙한 어떤 존재를 다듬어가는 과정에 희열을 느끼는 부분이 분명 있다. 가르치면서 통제하려는 욕구, 그것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같은 것 말이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모범생으로 커온 평범한 남성들의 일상적인 욕구의 자제, 직장생활에서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의 스트레스, 표현의 억압 등의 이슈들이 있다. 뭐, 그런 이야기는 김두식 교수님의 책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충분히 이야기된 바이니...

나는 이 '설렘'의 존재에 대해 양자가 인지하는 것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인지하는 '설렘'은 자연스럽게 욕망의 본질에서 빗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지하게된 복잡한 욕망은 그 감정, 행동의 방향성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게 만들므로 그 설렘의 최종 책임을 지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정서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삿대질하는 포탈 뉴스에서 경험하듯. 

뭐,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잠간 해봤다...-_-;;;

페북. 2015. 1. 21.
2015/01/21 23:00 2015/01/2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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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초반까지를 애늙은이처럼 지낸 이유로.
'토토가'에 나온 가수 대부분을 방송에서 본 적이 없다.
가수 뿐이겠나. 스포츠와 드라마, 음악프로그램 등.
TV 자체를 제대로 보지 않았으니 토토가 자체가 생경하긴 했다.

하지만 나왔던 가수들의 나이가 비슷하다 보니,
그 시절에 내가 지나쳤던 또래문화가 저랬구나, 저 문화가
내 20대를 지나쳤구나, 뭐 그런 생각에... 잠시 뭉클했다.

내게 90년대는 한없이 많은 책을 읽고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많은 지식들에 목말라하며
인터넷에서 내 지식을 무기삼아 논쟁을 벌이며 나름의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ㅎㅎ 그게 뭐라고.

내 취향이 그 시절 대중의 기호와 다르다는 걸 입증하려는 듯,
영화와 음악도 독특한 스타일을 찾아가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런 게 정말 활활 타오르던 시기였고.^^

오랜만에 무도를 보면서.
당대를 살았으나 솔직히 공감할 수 없는 컨텐츠를 보면서도
내심 감정이 흔들리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아마도 그런 이유이겠지. 

지금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몇년째 계속 늘어가는 
느낌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_-;;;
2015/01/02 11:32 2015/01/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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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쓰는 행위에 익숙한 나에게
올해처럼 글쓰기에 흥미가 떨어진 적도 없었다.
아무리 하소연을 하고 괴롭다 말해도
내심 쓰는 행위 '자체'가 내겐 나름 즐거움이었는데
올해는, 솔직히 꽤나 힘들었다.
.
내 속에 들어가보지 않고는 공감할 수 없을 듯한
주기적인 이 미묘한 감정의 늪이랄까.
연필에 무게추가 달린 듯
손가락에서 키보드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고
매일같이 떠오른 생각의 실타래를 좇아가다
단어 하나를 치고는 페북을 끄적이다가
이 책 저 책을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단어 몇 개만 노트에 적고는 잠을 청했다.
.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죽 훑어보면서 
쓰고 싶던 글감들을 끄적인 메모들이 눈에 띄었다.
정말 쓰고 싶은데, 정말 지금은(그때는) 쓰고 싶지 않았던
그 모순적인 감정을 복기해냈다.
내년에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
당위적인 담론, 인지도를 높이고 싶은 욕망, 지적 허세,
그런 것들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상관없이
글이라는 페르조나(만약 있다면) 이전에 존재하는
나만의 놀이로서의, 나와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서의
본연의 쓰는 행위에서 다시금 편안함, 행복함이 얻어지면 좋겠다.
부디, 내년엔.^^
2015/01/02 11:28 2015/01/0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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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그래가 맷 데이먼처럼 맨몸으로 이국 요르단에서 추격전을 펼치고 건물 사이를 뛰어넘고 차량에 부딪히는 액션 연기가 쉴 틈 없이 펼쳐져 보는 쾌감이 있었다. 그런데 왜소하고 힘없고, 액션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장그래는 언제 갑자기 이런 액션맨이 됐을까. 또 영어 울렁증이 있던 그는 언제 영어를 능숙하게 하게 됐을까. 그런 장그래의 모습은 대기업상사에서는 정규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작은 회사에서도 그가 단기간에 슈퍼맨처럼 성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해 씁쓸함을 안겨줬다."

뭐... 원래 기사의 퀄리티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좀 왜곡이 아닌가 싶었다. 이 최종회가 '작은 회사에서도 수퍼맨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는 건 좀 지나치다. 걍... 마지막회에 돈을 좀 쓰고 싶었나보지.ㅋㅋ 만약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오차장이 대기업에 다시 들어가고 싶냐는 물음에 나를 홀려보라는 장그래의 농담을, 정색을 한 채로 '입장이 뒤바뀐 두사람'이라고 독해한다 해도 그건 또다른 오독인 셈이다.
그냥 나는 원작보다 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상사맨의 뜨거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돈도 쓰고 화면 좋은 곳에서 멋있는 말도 몇 마디 던지면서. 그게 원작을 오히려 망친 방향이라 하더라도 19번의 즐거움을 준 드라마를 욕할 이유는 아닌 것 같다. 걍... 마지막에 일찍 정을 떼게 해주려는 배려라고 생각했다.ㅋㅋ

어쨌거나 나름 리얼리티가 살아있던 원작에 비해 강전무, 오차장의 대결구도에서 '장그래 일병구하기'로 맞짱뜬 드라마는 결국 라인에 따라 살아남는 '인맥의 전설'로 마감했다. 고로 여기서 불편한 지점은 자신을 알아봐준 직장 상사가 라인을 끌어주니 체력도 영어도, 업무능력도 수퍼맨이 된 장그래의 화려한 마무리가, 그리고 영업3팀 끈끈한 인맥이 뭉쳤다고 회사에서 서로 끌어안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장면이... 그러려니 하려다가도 껄끄러운 묘한 어색함을 줬다. 그런 의미에서 최종회는 기자의 오독에도 불구하고 씁쓸하다는 건 좀 과하고 그런 면이 불편했을 따름이다.


12. 21. 페이스북 글.

*관련 기사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01251
2015/01/02 11:25 2015/01/0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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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동안 여성주의 시각으로 SNS나 강의에서 강한 논조로 가부장제, 혹은 성평등 이슈에 많은 말들을 했었다. 언젠가부터 그 빈도수가 줄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기 보다는 한번 뜨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일상적으로 지적할 부분은 넘쳐나고 그것을 일일이 이슈를 삼는다는 것 자체가 대중에게, 혹은 주변에조차 어떤 내성을 심어줄 것 같은 불안함마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때 이런 류의 내거티브 운동 자체에 마냥 긍정적일 수는 없는 게 현실 같기도 하다.

2.
내가 SNS에서 비판적인 논조로 말하고, 그 말의 수위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정부에서 국가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을 탄압하기 위해 개인신상을 털지 않은 다음에야 그건 그저 스스로의 자위책으로 그칠 확률이 높다. 물론 SNS는 순식간에 전파되므로 이슈를 선점하고 확산시킨다는 관점에서는 좋은 플랫폼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가부장제, 성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지점은... 어떤 의미에서(일상생활에서조차 깊이 체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작 동성애논쟁보다 지지받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3.
오늘 팟캐스트를 함께하는 간사님으로부터 통계자료를 받았다. 개독교, 한줌 개신교 선교단체의 방송의 한자락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솔직히 겉으로 오바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한국에서 기독교인임이 자랑스럽다거나 기쁘다거나.. 전혀 그런 맘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팟캐스트에서 '언니들'을 꽤 많이 섭외했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긴 했다. 감사하게도 다들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고 언제나 기대이상의 강의를 해주었다. 은근히 교계 안에 팽배한 어떤 편견... 여성 리더십, 여자 강사의 말빨은 왠지 비논리적이고 불안해 보인다는 의구심을 불식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4.
결국 사람은 자기가 떠드는 이야기에 걸맞은 걸음을 걸어가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전보다는 더 성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면에는 내 삶과 말 사이의 보조를 맞추고 살아야겠다는 나름의 반성도 있다. 이젠 소박하게나마 내게 주어진 기회가 생길 때 내 말에 걸맞는 적절한 걸음을 걷고 싶을 뿐이다. 사람들은 공감하지도 않는데 내 입으로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는 건... 웃길 생각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것도 같다.

팟캐스트 통계를 보며 이런저런 감사한 생각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얘길 먼저 하고 싶었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2014/12/22 20:30 2014/12/2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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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때로 나는 여성의 평등 혹은 어떤 면에서는 남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입장을 가졌음에도(나는 자주 자끄 엘룰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이 인간이고 그 중에도 여성이라는 점을 흥미롭게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여성 저자를 추천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솔직히 당시에 몇몇 이름난 여성의 책을 일부러 읽어보았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저자)에 대한 내 생각과 현
실 사이의 거리감 같은 게 솔직히 없었다고 할 수 없다.

2. 
불과 몇 년 사이에 나는 혼자 있을 때조차 자주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의 여성 저자들을 많이 접하고 있다. 물론 그 동안 내 책읽는 스타일의 변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내적 변화와 별개로 몇 년 사이에 걸출한 여성 글쟁이들이 여러 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들어 어떤 (남성) 논객들에게서도 큰 배움을 얻지 못했다고 '자부'(?)했는데 그런 여성들의 관점과 스타일 모두에서 나는 참회의 눙물을 흘리곤 했다. 

3.
여성을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흥미로운 점도 있다. 남자들을 글을 쓸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정량의 허세가 글 전반에 배치가 되어 있다. 지식의 양을 자랑하거나 인맥을 자랑하거나 문화자본을 자랑하거나. 대놓고 자랑하거나 두괄식으로 자랑하거나 '퍼기깔대기'를 들이대거나, 하다못해 '추신'으로 자랑하거나... 어쨌든 허세를 부린다. 그게 어떤 모종의 글쓰는 방법처럼 익숙했고 나도 은연 중에 그런 '허세 운율'을 따르곤 했다.

4.
그런데 정말 재밌게도 내가 좋아하는 다수의 여성 저자들은 그런 허세가 없다. 물론 더러는 자학성 겸손이 몸에 밴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면에서조차 나는 배우는 부분이 많다. 여전히 허세문법이 나에겐 중요한 부분인데 여성 저자들의 글에 젖어들다보니, 글을 쓸 때마다 마치 은연 중에 'ㅎㅎ 지금 너 무협지 쓰니? 허세 쩐다'라고 말하는 듯한 환청마저 들린다. 흥미롭게도 이런 성찰 아닌 성찰은 남성들의 글쓰기 공간, 장 안에서는 전혀 인지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P.S
오늘도 정희진 선생의 토요 칼럼을 읽으며 행복한 마음에 몇 자 끄적여본다. 허세 없는 담백한 글쓰기를 꿈꾸며.
2014/09/21 15:15 2014/09/2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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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글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물론 여전히 애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허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내가 썼던 글들에 대한 집착, 애착이 심했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고 쓴 글은 거의 대부분 PC나
 블로그에 정리해두곤 했다.
그리고 자주 글로 사람을 평가했다.
서로 비교를 일삼기도 했고 글의 수준이 높지
않은 경우에는 마치 글과 사람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물론.
머리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신영복 교수가 어떤 강연에서 했던 말씀처럼
 집을 짓는 목수는 그림을 그릴 때 지붕의 기와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소위 지식만을 쌓은 자신과 같은 백면서생들의 문제를
 감옥에서 충격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일화들.

한국의 많은 교회들,
유독 많은 신학교와 넘쳐나는 신앙 양서들.
그것들을 소비하고 더 정화된 더 날카로운 지성.
거품을 걷어낸, 지나친 신비주의나 지나친 개인주의,
물질주의, 사회와 격리된 신앙을 경계하는 양질의 설교들.
그 정교하고도 옮은 말들, 글들.

그것들의 홍수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침몰해가고.
많은 논객과 글쟁이들의 담론 속에서도 사회는 후퇴한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말과 글의 힘을
 담론의 힘을 너무 맹신했거나 우상시했던 건 아닐까.

글이나 말로 사람을 판단하는 습속을 버리면서
 나는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발견한다.
이 어둡고 막막한 세상속에서도 여전히 가슴뭉클하고
 애정을 갖고 싶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대하고 판단했던 내 작은 우주가 허물어지는 느낌.
아마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이 느낌을
전적으로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어떤 정서가 생겼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글과 말들에 대한 과했던 어떤 애착.
그것을 자제하려는 노력을 넘어선 심드렁함...
어느덧... 부지불식간에 내게 그런 정서가 생겼다.
물론 부지불식간이라고 하기엔
 기억나는 몇몇 사건들과 몇몇 사람들이 있다.
내 우상들이 무너져 내리게 만든 따뜻하고 성실한 인격들이.

2014/07/28 23:48 2014/07/2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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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좀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의 위너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듯 하다. 이는 마치 민주주의적인 방식을 통해 일반인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이를 발굴하는 값진 프로그램처럼 보이지만 정작 재능을 단기간에 고갈시키는 일종의 포이즌이라고도 볼 수 있다.

1등은 재능도 확인받고 상금도 받고 게다가 엔터테인먼트사와 계약까지 체결하는 일타삼피를 누리는 게 아니다. 몇개월동안 이뤄지는 살떨리는 경합 속에서 개별 참가자는 자기의 능력의 최고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 그 집중력 때문에 대중은 주목하고 프로그램은 매주 뜨겁게 달아오른다. 마치 불꽃놀이를 한번에 터뜨리듯 그 순간은 다들 눈을 떼지 못하지만 그 이후에는 느슨한 속도나 작은 섬광에는 반응하기가 쉽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오디션 프로그램은 숨은 재능인을 찾아내서 그의 전부를 몇개월 안에 전소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을 가졌다. 그 엄청난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소비한 대중은 대부분 그 이후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본 참가자들에게 관심을 갖기가 어려워진다. 특히나 1위나 상위 참가자들은 마치 중견 연예인을 보듯 그의 모든 쇼맨십을 이미 다 겪은 듯한 착각마저 갖는다. 대중문화 속 연예인들은 재능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어필하는 신선함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한의 경쟁이 사라진 공간,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능을 전소해버린 무대에서 오디션 위너들이 경험해야하는 이른 피로감, 무력감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관성적으로 느끼는 즐거움 가운데에는 사실상 상당히 악의적인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설령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것은 기어 이빨들이 척척 물려돌아가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망가뜨린다. 이렇듯 우린, 재능이 있는 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타 없어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있다. 문득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2014/06/30 23:05 2014/06/3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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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하나의 떠다니는 생각 중 하나는 최근 김보성과 비락식혜로 불거진 '의리'에 대한 것이다.

대체로 나와 정치적 성향을 공유하는 많은 이들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이른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인맥 사회구조에 질색했다. 지식인, 지성인이라면 혈연, 학연과 같은 조직논리와는 구별되게 언제든 정화를 위한 내부 고발도 결단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치부됐다. (실상 삶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았지만)

내 기억으로 '의리'가 전면에 부상하고 그것이 어색하지 않게 된 시점은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김어준의 의리(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것으로 비롯된 나꼼수의 진영정체성이었다.(난 사실상 나꼼수가 박원순시장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 시점부터 곽노현 교육감 이슈 등에서 논리 이면에 숨겨진 더 큰 음모론을 까발리고 진영 사이에서 의리를 지켜내는 것이 어색하지도 않고 나아가 진보진영에서도 권장되는 조직, 공동체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상황.

곽노현 교육감의 사건 때만 해도 그의 편을 드는 지점에 찬반이 분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김보성의 의리 광고를 정서적으로 불편함 없이 즐긴다.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지점에서도 풀어야 할 매듭이 나는 조금 있다고 본다. 이것도 언제가 썰을... (이렇게 대충 막 써대는 건, 하루 지나면 막 다 까먹어서. 나중에 기억 안 날까봐서다.ㅠㅠ)


#2.
주변에 몸도 마음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자제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갈등도 사실 많이 커졌다. 특히 페북에서는 웃는 일, 노는 일, 먹는 일 등 그 순간순간 일어난 일들이 타임라인으로 정리된 내 페이지와 댓글을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사회참여나 운동, 정치적 입장, 이슈에 대해서는 양립가능하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지만...

지인이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그들이 속한 공간에서 나는 흔쾌히 농담을 하고 즐거워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야 하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곁에 있다면 난 가만히 웃거나 시덥잖은 농담을 위로삼아 말할 수 있겠지만... 기쁜 일보다는 슬프고 우울한 일이 많은 요즘. 이대로 지속된다면 아마도 조만간 난 페북을 접을 지도 모르겠다.

삶의 모든 영억이 잿빛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일로 그런 가운데 있거나 계속 어둠 속을 헤매는 분들이 참 많다. 구원은 언제일까. 그 날이 속히 오면 나는 더 행복하게 sns를 할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간절한 오후.


#3.
우리에게 어른세대는 '힘'을 가진 세대였다. 그래서 우리세대는 힘을 통한 군대식 상명하복에 피로감을 느낀다. 반면 우리세대는 합리적 논쟁, 즉 '말'을 가진 세대였다. 아마도 우리 아래세대는 불행히도 우리의 말에 피로감을 느끼게 될 것같다.

2014/06/25 21:13 2014/06/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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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말과 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말이나 글과 그 담화자의 인격과의 연관성에 대한 생각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예전보다는 말로 사람을 평가하려는 습관을 버리려고 애쓴다. 말과 사람 사이의 연관성이 그리 견고하지 않은 까닭이다.

극단적인 예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은수연씨는 아버지에게 유년시절부터 성폭행을 당했는데 그 아버지란 사람은 교회 목사였다. 은수연씨가 집에서 도망쳤다가 아버지에게 잡히면 길거리에서건 경찰서에서건 그 목사 아버지는 말로 주변 사람들을 구워삶았고 세상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은수연씨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곤 했다고 한다.

2.
그 반대로 말로 자주 오해를 사게 만들고 말만 하면 그 의도나 진정성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있다. 고 노무현 전대통령도 그런 사람이었다. 김어준 총수는 유시민 전장관이 말 때문에 피해를 입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종종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인이나 연예인들(이 두 그룹은 구분되어야한다는 생각이다)의 한 두 마디에 그 사람의 사활을 거는 감정적 평가들, 그 극단적 비난에 회의적이다.

그런 단회적인 말 몇마디로 그 사람의 인격 전체의 퍼즐을 맞추려는 시도들은 대체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사람이 어떤 말을 했든지 그 사람을 10년, 20년 주시하고 그 사람이 어디를 가는지 어디에 돈을 쓰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는지를 지켜보다보면 그 사람이 정작 마음에 두고 있는 바를 자연히 알게 된다. 말은 자주 사람을 속인다.

3.
안타깝게도 우리는 한 사람을 10년씩 지켜볼 아량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사실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내 관심에 엮여있는 사람들이 내 가치관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지, 반대하는지, 혹은 배신의 언사를 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단기간에 한 인간의 숨은 속내를 찾기 위해 드러난 말로 퍼즐을 맞추려고 애를 쓴다.

그렇다고 말과 글이 그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건 너무 멀리 나아가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푹빠져서 허우적대다가 지향점마저 잃어버리는 모습이랄까. 대체로 우리는 누군가 말을 하고 글을 쓰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고 가정하는 편이 옳다. 물론 말과 인격은 자주 어긋나고 결을 맞추려다 실패할 확률이 항상 존재하겠지만...

4.
나는 말과 글을 한 인격을 단기간에 평가하는 도구나 잣대로 활용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말과 글을 통해 그 사람의 균열점, 숨은 속내를 훔쳐볼 수 있는 하나의 보조구로 사용하는 것에는 적극 찬성한다. 말과 말 사이에 끼어드는 실수들, 헛나온 말, 행간에 독립적인 어색한 문장들. 그 속에서 정작 담화자의 민낯을 추정해볼 수 있다.

멀쩡하던 설교자가 어떤 사건을 접하고는 이전과는 공유할 수 없는 어떤 주장을 뜬금없이 할 때,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질타에 오해라고 손사레를 지을 때. 우리는 그의 안정된 일상 속 잘 정돈된 담화에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어떤 속내를 경험하게 된다. 그 말(실수)가 말하는 사람의 전부를 규정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균열지점을 통해 적어도 그 인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생긴다. 전에 했던 말과 글, 그의 정치, 종교적 스탠스를 새롭게 해석해 볼 필요성 말이다.

...그런 생각, 잠시 끄적여본다. (졸려서, 쓰다가 급마무리.)


2014. 5. 30. 페북 담벼락.

2014/05/31 09:27 2014/05/31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