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꽤 많은 연애드라마를 보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연애를 해보았지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상대가 열심히 말을 하는데
갑자기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진다거나 뽀샵처리가 된 영상이
소리없이 흘러가는 느낌 같은 걸 경험한 적은 없었다.
오늘. 성하를 재우느라 누워있는데 그가 쉴새없이 내게 이야기를 했다.
찰진 두 볼살과 긴 속눈썹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정겨운 톤으로
쫑알쫑알 조그만 입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순간 입모양만 보이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갑자기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나는 막 하하하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젠장, 또 우는거냐)
"아빠 내 말 듣고 있어?"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웃었다.
난, 이 아이 참 사랑하는 거 같아.ㅠㅠ
릭 워렌이나 빌 하이벨스를 나는 존경한다. 내가 꿈도 꾸지 못하던 사역을 할 뿐 아니라, 오늘의 문화에 젖어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획기적인 프론티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목사가 청바지를 입고 설교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그들의 용기를 높이 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책을 보아 그 배경에 로버트 슐러가 숨어있다고 나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다. 놀라울 정도로 로버트의 좋은 점들을 목회의 밑거름이 되게 만드는 재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립 얀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부탁하는 것은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52쪽)
아버지는 가톨릭에 대해 일반적인 개신교 목회자와는 달리 매우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테레사 수녀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큰 교회에 '어느 정도' 화목한 가정까지 남들 보기에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죄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90쪽)
2007년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평양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맡은 아버지는 그날 수술후 당신의 몸 속에 남아 있는 한 개의 폐마저 터져나갈 듯이 '주여 살려 주시옵소소!'라는 메시지를 간절하게 외쳤습니다. 그 설교는 가장 큰 죄인인 나부터 용서해달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교인들을 잘못 가르친 목사, 나부터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오로지 비주류의 목사만이 할 수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옥한흠 목사가 죄를 지었나이다.
주여! 죄를 회개하오니 살려주시옵소서!
한국 교회가 타락한 것이 이 목사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시여!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옥한흠 목사가 죄를 지었나이다.
주여! 죄를 회개하오니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가 타락한 것이 이 목사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시여!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가 세계 제일의 교회가 되고 새벽예배가 많은 것은
목숨을 아까지 않고 충성하는 목자와 평신도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입으로만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주여주여 설교하는 목회자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모두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입니다.
거짓 목회자들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 2007년도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회 설교 중에서
그 날 집회 후 아버지의 설교를 향해 일부 사람들의 노골적인 불평이 이곳 저곳에서 들려왔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죄인인 나를 용서해 달라는 아버지의 메시지는 기독교 주류의 메시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주류의 쓴 소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류를 불쾌하게 만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115쪽)
그로부터 무려 이십 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던 아버지의 그 당혹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라지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목회 전반에 대한 깊은 고민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 고민의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아버지가 지향하고 붙잡은 자신의 교회론과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오는 교회의 현실이 서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교회는 커졌고 사람들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자신이 믿고 붙잡고 가던 ‘교회론’에 걸맞은 결과를 교회 속에서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 말입니다. (137-8쪽)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너무 키워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목회가 교회론과 제자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것은, 양이 많아져 버리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제가 은퇴할 때 사랑의 교회가 주일 출석 장년 교인수 이만 삼천 명, 전체 등록 교인수 오만 명, 벌써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어찌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제자훈련의 선두주자로서 교회론으로 볼 때, 그 정신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또, 교회론의 본질에서도 위선자적인 입장에 빠질 수 있어 고민이 됩니다.” (143쪽)
아버지가 목회를 하시며 내내 교회가 커지는 고민 속에서 하나의 돌파구로 붙잡은 길은 목숨을 건 설교 준비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나날이 늘어나는 성도가 주는 내적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길, 그나마 많은 성도들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설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45쪽)
“흔히들 나를 보고 매주마다 수만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느냐고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설교가 나에게 보람은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교의 부담감 때문이었다. 설교에 실망하고 돌아가는 숨은 군중들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강대상에 서고 싶지 않을 때가 없지 않았다." (146쪽)
아버지는 어쩌면 단 한번도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제대로 전달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은퇴할 당시 어느 방송에서 고백했듯이 자신의 부족한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설교를 통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데 대하여 성도들에게 미안해하고 하나님 앞에 송구해 했습니다. (148쪽)
아버지는 목사로서도 또 인간으로서도 고독했습니다. 무엇보다 설교자라는 점을 숙명적으로 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은혜에 대한 갈급함은 그를 필연적으로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고독은 아버지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였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알지 못해 그 큰 은혜를 사람에게서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사람들과 어울려 놀 여유를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무겁고 크며 거룩한 존재일수록 설교는 그에게 엄중하며 생명을 다루는 문제였습니다. 항상 자신은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말하던 아버지는 하나님과 단 둘이 대면하는 인간적 고독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채찍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기 위해 찾은 답이 어떤 의미로 아버지에게는 ‘고독’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이런 목회자의 고독을 ‘날마다 죽는 목회자’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150쪽)
인공호흡기를 낀 아버지는 어제 간신히 손에 들린 펜으로 이렇게 쓰셨습니다.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아마도 아버지의 진심은 이것이었을 듯 합니다. “성도들에게 미안하다.”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성도들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깊이 더 넓게 보여주지 못하는 설교자로서 미안함 뿐 아니라, 자신의 교회론과는 달리 너무도 커버린 교회 때문에 또한 성도들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아버지의 이 미안함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의 관심을 받고 있는 사랑의교회 건축 과정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교회론에 걸맞게 좀더 제대로 목회했다면 결코 더 큰 겨교회 건물을 지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더 큰 교회 건물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했습니다. (159쪽)
가끔 성하와 놀다보면 "아빠, 그냥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라고 말할 때가 있다. 과자를 많이 먹거나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나는 즉시 물러선다. "어.. 그래" 사실 나는 상하의 놀이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몹쓸 모범생 기질 때문에 정해진 룰을 성하에게 강요할 때가 종종 있다.
원치않게 정형적인 방식을 부드럽게 강요하다보면 눈치가 9단인 다섯살의 아이는 그 제약을 감지하고 아빠에게 항의한다. 아빠는 이게 바른 방법이라고, 혹은 더 재밌는 방법이라고, 혹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아이를 교정하며 그렇게 아이는 위축되고 재량은 줄어든다. 외부세계에 주어진 룰부터 찾으려고 하며 눈치를 보며 불안해한다.
결국 아이는 놀이에 주도권을 잃게 되고 아빠가 노는 걸 지켜보다가 정작 본인은 흥미를 잃고 만다. 아빠주도형 놀이의 탄생이랄까. 이 모든 것을 나는 드러나지 않게 체화시키길 기대하며 은근히 아이에게 강요하는 편이다. 난 그렇게 커왔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그렇게 내 DNA를 전수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주장을 분명히 해주는 성하가 신기하고 고맙다. 그는 조용히 마치 혼자말을 하듯 내게 말을 한다. "내가 하고싶은대로 하게 해줘" 주의깊게 듣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을 정도의 소리로. 오늘도 나는 한걸음 물러서서 대답한다. "아, 미안. 네가 해바바"
어제 아내가 준비한 모임이 잘 끝난 모임이다.
내심 내 일처럼 기쁘기도 했지만... (전환)
어제도 산더미같은 일거리를 초인적인 힘으로
처리하고 성하 픽업해와서 밥 해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나니 아내가 자정이 넘어서 집에 왔다.
모임 참석자들 몇 그룹을 집까지 태워주고 왔단다.
오늘은 어제의 피로와 긴장이 풀린 아내 떡.실.신.
성하는 사슴과 같은 눈망울로 놀이터에서 눈사람
을 만들자고 조르고. 나는 나대로 휘곤휘곤.
하지만 한번 똘마니는 영원한 똘마니가 아니던가.
따라 나가서 열심히 눈사람 만드는 거 방관+도움.
(그래도 오늘은 루돌프 사슴은 안 했다. 날이 풀려서
눈이 많이 녹았더라. 씨바... 날씨 겁나 고마우이.)
아내는 저녁에 잠시 일어나서 간단히 요기하고
다시 떡실신.ㅠㅠㅠㅠ
성하도 장호삼촌네서 너무 열심히 놀았던지 잠시
짜증작렬하다가 어느 순간엔가 코골고 자는 중.
...
아... 이제서야 우리집은 평화가 찾아왔건만.
나도 미친듯이 피곤하고 졸립다... 안돼...ㅠㅠ
일단 일어나서 책상에 앉았는데 거 되게 졸립네. 쩝.
엄마들이 집에서 자기개발 못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빨래나 마저 널고 자야겠다.
교보문고가 2월부터 10만원대 전자책(e북) 전용 단말기 출시와 함께 회원제 e북 서비스 ‘샘(sam)’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일단 칼라 e-ink 단말기 실패 이후 변화를 위한 발빠른 행보가 고무적이다. 특히 이제까지 교보가 내놓은 전자책 시장 상품들 중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전자책 소비자들의 상당수가 소설, 에세이류에 집중되고 있고 그런 책들은 소장용이 아니기 때문에 가격의 매력이 있는 회원제가 전자책 시장의 파이를 키울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 괜찮은 서비스라고 생각하나, 여기에도 몇가지의 우려감이 있다.
첫째는 10만원대의 단말기가 흑백일 거란 추측. 당연히 태블릿을 쓰는 이들이 칼라 서적을 일단 보고나면 태블릿을 '더' 선호하게 될 것 같다. 결국 '샘'이란 서비스는 태블릿에서 앱으로도 제공되어야만 그 기대대로 시장에 먹힐 것이다.
둘째는 소장 욕구다. 사람들이 도서관만 이용하지 않고 책을 구입하는 이유는 특정한 책은 읽고 나서도 보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책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고 논문이나 칼럼을 쓸 때 참조를 위해서 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필요할 때마다 책을 대여해야 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있다. 결국 회원제로 운영할 때 한번 구입한 전자책은 종신토록 보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이 두가지가 잘 해결된다면 회원제 전자책 서비스는 (아마존 같은 공룡 온라인 업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전자책 시장의 표준 서비스가 될 수도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예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