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밀리언 *'모쿠슈라'(mokulsha)

1.
게일어로 '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키가 한 대사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감독으로 열연한 그는 매번 선수들에게 훈련생 이상의 애정을 쏟고 선수가 잘못되었을 때 심한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캐릭터다.

그의 마지막 선수였던 매기에게 이 모쿠슈라라는 단어가 쓰여진 옷을 입힌다. 그 말뜻을 아는 관중들은 매번 열광하곤 했다. 시합에서 이길 때마다 마치 어린이이가 아빠를 향해 장난치듯 웃음짓는 매기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영화.

그녀가 경기 도중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어 입원한 상태에서 그녀의 명성을 듣고 뒤늦게 가족들이 들이닥친다. 그 가족들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왔다가 그녀의 몰골과 엄청난 병원비에 실망...하며 돌아선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녀의 곁에는 가족이 아닌 프랭키만이 남는다.

2.
오늘 장윤정의 가족들이 방송에 나와서 10억을 탕진한 게 아니라는 해명을 구구절절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갑자기 이 영화의 매기가 떠올랐다. 물론 장윤정은 다행히도 매기의 처지가 아니고 가족사의 디테일은 알지 못하는지라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판단이 쉽지 않다.

난 그저... 돈이 사람을 망친다는 반응에 대해 돈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을 굳이 하고 싶을 뿐이다. 가난하게 살 때는 문제가 없다가 돈이 많아지면 가족관계에 금이 가고 오히려 불행해진다는 이야기들. 물론 돈이 그 비극적 방향성에 촉매가 될 지언정 그 비극적 서사의 시작은 이미 그 안에 고스란히 있었던 게 아닐까.

매기의 가족이 매기가 가난했을 때에도 행복했던가. 남의 가족사를 건드려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지금 장윤정의 가족은 그녀가 성공하기 전의 가족과 정말 달랐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덜 불행했던 관계가 어떤 이익이 개입할 때 더 불행한 관계로 치닫는다는 생각. 그와 더불어 '모쿠슈라'는 대부분 실질적 혈연, 지연과 무관한 경우가 많더라는, 혹은 오히려 가장 가까운 가족, 친척들이 가까이에서 서로를 괴롭히는 주범이 되기도 하더라는 현실.

3.
그래서 가족주의의 굴레는 자주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개별 인간사에 비극을 가져다준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타부시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딸을 겁탈하거나 어머니가 자녀를 돈벌이에 떠밀어도 친척간에 재산다툼으로 남남보다 더한 언사와 폭행을 행사해도... 우리 사회는 '우리가 남이가'라며 가정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여긴다.

그 영화가 개봉했을 때 20대 중반의 한 미국강사와 대화하다가 그 영화가 과대평가된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더란다. 매기를 바라보는 프랭키의 눈빛. 그 자체가 '모쿠슈라'의 현현으로 보였던 내게 그의 수박 겉핥기식 인상비평은... 그의 젊은 나이를 고려하더라도 좀 아쉬웠다.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모쿠슈라'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가족주의의 굴레에 빠진 이 사회에서 정작 해야할 중요한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아침. 조금 우울하지만 굿모닝...
2013/06/02 23:06 2013/06/02 23:06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1.
성하와 놀이터에서 있다가 맞은 일몰. 아이들은 하나둘 제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서운함을 못내 얼굴에 드러낸다. 나도 그랬지... 초등학교 시절 하교길에 책가방을 집에다가 던져놓고는 해가 질 무렵까지 정신없이 뛰어놀곤 했다. 그 땐 뭐 대단한 장난감도 없었는데, 친구들 서너명만 모여도 놀이터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무언가에 몰두하다가 맞는 어둠...

아이들의 엄마들이 밥먹으러 들어오라고 부르는 소리, 아쉬움에 손을 흔들며 방금전까지 정신없이 만들던 모래성, 접던 딱지들이 순간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들이 되는 경험. 왠지 모를 울컥함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으로 들어가지만 이내 모든 걸 잊고 식사가 끝나면 누나와 아이스크림 쟁탈전에 빠지던 기억들.

2.
중고...등학교 시절 원종수 권사님이라는 분의 간증테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입소문이 교회마다 퍼져서 어머니도 어딘가에서 복제 테입을 구해오셨다.. 간증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머리카락이 쭈삣하게 설 정도로. 예수를 믿으면 내가 마치 육백만 달러의 사나이나, 앤드류같은 남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 같은 느낌. 한번 본 교과서는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어떤 페이지는 그림 속 인물들 숫자까지도 기억이 나더라던 원권사님의 고백은, 지금으로 따지면 마치 아이언맨의 수트를 손에 넣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의 간증 마지막 부분에 천국에 대한 소망을 언급하면서 해질녘 아이들의 딱지치기를 예로 들었다. 딱지를 많이 딴 아이나 적게 딴 아이나 해가 질 무렵에는 모두 부모에 손에 이끌려 집에 가기 마련이고, 그러고 나면 그렇게 열심히 모은 딱지도 그냥 종이조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그의 진지한 음성.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 아니겠냐며,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다 그런 아이들의 딱지치기에 다름아니라는.

3.
시간이 흐를수록 원 권사님의 간증은 내게 있어 판도라의 상자처럼 한번 생각의 꼬리가 똬리를 틀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순의 사유들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인생이 딱지치기라면 왜 우리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훌륭한 사람은 서울대에 들어가고 권력자들이 사위삼으려고 노력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나야 하나. 그걸 마다하는 즐거움을 위해 우리는 앤드류나 수퍼맨을 꿈꾸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나는 내 유년기의 가장 즐거웠던 순간인 해질녘까지의 놀이를 한순간 무의미, 무가치한 행위로 만들어버린 그의 비유가 싫었다. 신앙이 일원론이냐 이원론이냐를 논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시절의 모든 기억들, 친구들, 하다못해 해질녘에 느꼈던 울컥하고 멜랑꼴리했던 내 정서마저도 내게 있어 유의미한 어떤 본질의 뭉태기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무가치로 여기고 천국으로 떠나야 한다.

4.
아마도 그때 막연하게나마 신앙은 내게 어떤 류의 즐거움이나 소중한 정서들을 빼앗아가는 어떤 '타부'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생각이 자리잡았던 것 같다. 내가 어떤 기쁨을 느낄 때마다 비슷한 수준의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부정적 종교성의 시작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오늘 성하와 마주한 놀이터에서의 일몰을 보며 문득 그 죄책감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분투했던 신앙적인 갈등들을 되내어 보았다.

'아빠, 우리 이제 집에 가야돼?'
'더 놀고 싶어?'
'응, 5분만...'
'그래, 오늘은 10분 더 놀다 들어가자.'
'이히히...'

성하를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는 놀이터의 즐거움에 어떤 어두움을 안겨주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 하면서 앉아 있었다. 오늘은, 굿이브닝...
2013/06/02 00:18 2013/06/02 00:18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1.
어제도 10시에 성하와 함께 떡실신했다가 아침일찍 눈을 떴다. 요즘 아내가 미드 <한니발>과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 꽂혀 있는 게 생각이 나서 시리즈 잘 정리된 파일을 다운 받아서 아이패드에 옮겨주고 쓰다듬 당하면서 출근.ㅋㅋ 강아지처럼 혓바닥도 내밀고 싶었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실행하진 않았다.

2.
시카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 나의 소심함, 조바심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이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다. 걱정이 되거나 무서운 건 아닌데 그 불안함의 끝을 보고나서야 잠을 청한다. 그 끝이란 게 내가 죽고 아내와 성하가 내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없이 하다보면 아.. 이것만은 하고 죽어...야 하는데 하는 안타까움이... (아... 이런 얘기 너무 솔직히 하다가 싸이코취급 받을텐데..ㅠㅠ)

3.
출장 중에 시간이 없어서 성하 옷만 간신히 샀다. 꽤 많은 옷과 신발을 샀는데 결재는 78불. 옷들도 세련된 아빠의 안목이 빛났(다고 믿고 싶)다. 아내에게는 바빠서 성하옷만 간신히 샀다고 문자를 보낸 상태였지만 출장 마지막 날 맘에 드는 시계가 있어서 아내 선물도 이미 준비가 끝났다.^^ 문제는 비행기가 뜨는 마당에 이 모든 게 생각이 났고 비행기가 추락하면 성하는 내 센스돋는 옷선물을 받지 못하고, 아내는 내가 선물을 준비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는 사실이 못내 나를 괴롭혔다.ㅠㅠㅠㅠ

4.
아... 아내 선물 샀다는 사실을 알릴 길이 없나, 성하 선물은 비행기가 추락해도 누가 좀 전달해줄 수 없을까... 비행기는 한참 잘 날아가고 있는데 나는 이미 시작된 생각의 꼬리를 자를 수가 없는 상태...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아내는 평소에도 종종 내가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는 걸 답답해한다. 그 반대급부로 어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일상에 대해 내 까칠함을 빛을 발하고 그런 압박에 대해 아내는 분노할 때가 더러 있다. 아내는 이 모든 게 내가 여전히 부모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상당 부분 그건 사실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라깡이 언급하는 이른바 '아버지의 이름'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부모의 언어가 내 언어가 되고 부모의 기대가 나의 기대인 양 무의식 중에 전가된 어떤 무거운 의무감, 꼭 해야하는 부모노릇, 아들노릇, 사원노릇... 통칭하여 누구나 그러해야만 하는 사람노릇.

5.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부모의 불편한 옷이 아닌 나라는 사람 자체의 욕망 중에 하나로서 베품의 기쁨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 차이는 인지할 수준인데 주로 부모에게 전가된 의무감을 하고나면 불안함이 사라지고 안심이 되는 정도로 끝나지만, 누구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 드는 어떤 카타르시스랄까 그 자체로서의 기쁨이 나름의 자기만족을 가져온다. 나쁘게 보자면 그것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의 또다른 얼굴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곧죽어도 아내 선물을 산 걸 알리고 싶을 정도로 그 부분의 욕망이 큰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해야 하는 (옳은) 일에서 어떤 만족감을 찾던 시기를 지나 하고 싶은 일에서 어떤 옮은 방향을 찾고 그것을 향해 내달리는 삶에 관심이 더 간다. 내 적성과 천성에 맞는 옷을 입고 그것으로, 나다움으로, 세상과 교감하는 삶. 세상과 공존하는 삶,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
일단,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았고, 성하는 내가 산 옷과 신발을 신고 뛰어다니고 있고, 아내는 내가 선물을 샀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시계도 차고 있고, 오늘 동영상도 아이패드에 넣어 놓았다는 사실이. 꽤나 유쾌한 아침이다. 모두 굿모닝.^^
2013/06/02 00:17 2013/06/02 00:17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가끔 보고서를 쓰다보면 결과물이 좋지 않을 경우에 내용이 더 길어지고 첨부가 많이 붙는다. 변명거리를 찾는다는 말이다. 왜 실패했나, 왜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나에 대한 반성, 혹은 고찰 같은 '그럴듯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

일상적으로도 그런 류의 변명을 찾는 때가 많다. 이스라엘에 무기개발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스타벅스나 일본 우파를 후원하는 유니클로, 아사히 등 기업들을 선호하는 이들의 변명이 그렇다. 문제를 알고 나면 꺼림찍한 '그 무엇' 때문에 T셔츠 한장을 사거나 커피 한잔을 마셔도 뭔가 '그럴듯한' 부연 설명을 한다.

성경-특히 '열왕기상/하'나 '역대상/하'-을 읽다보면 한 사람(주로 왕)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평가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간결하지만 명확한 평가, 아니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평가... '신이 보기에 옳은 길로 갔거나 옳지 않은 길로 갔다'는... 그 인생에서 자잘한 사건들이 있었겠지만 그 사람 인생을 통틀은 어떤 순종의 방향성으로, 실패와 성공을 가로지르는 분수령이 읽혀진다.

살면서 여러가지 문제들에 직면한다. 유해한 일들을 하지 않는 삶, 이를테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등 보수적인 기업들의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직장생활에서의 업무적인 불의나 밤문화에 물들지 않는 것 등. 우리는 실패로 판단되는 일들을 방어 내지는 변명하기 위해 참 많은 힘을 쏟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것을 '하지 않는 것', 어떤 것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변명하는 일로는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평가를 돌릴 수 없다. 작은 걸음이라도 어떤 것을 '하는 삶', 사소한 것이라도 바르게 '행하는 삶', 사소한 도움이라도 주는 삶의 축적이 종국에는 '객관적이고도 명확한 한 마디의 인생 평가'에 기여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보면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에너지를 실패를 포장하는 일에 허비하는 건 아닌지.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2013/05/29 23:05 2013/05/29 23:05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오늘은 스승의 날.

한때 특별한 스승없이 혼자 컸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 지적 여정에 도움을 준 유명인사(주로 책으로만 만난 분들)나 똑똑하다고 정평이 난 이들을 내 나름대로 내 '선생'이라고 칭하고 다니곤 했다. 교제가 없던 분들도 안면만 있으면 '당신에게 도움을 많이 받아서 난 당신을 내 선생이라고 생각한다'는 류의 메일도 보내곤 했다.

물론 본인에게 '선생' 대접을 해드려서인지 대체로 회신이 왔다. 두세줄 정도의 간단한 답장.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간결하고 건조한 답장. 그때는 그런 답장마저도 소중했다. 그렇게 나의 멘토들은 내 안에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유령 선생들을 붙들게 된 건 내가 성장하면서 만난 선생들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으리라. 초중고 선생님들의 기억이 대체로 ...그리 좋지 않고 입시학원 선생님은 더할나위가 없다. 대학에서 만난 선배, 선교단체 간사, 목사님들은 딱히 흠잡을 데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배울 구석도 마땅히 없어 보였다. (그 때는 그랬다.)

결국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아이들이 남의 집 아빠, 엄마를 동경하듯 나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남의 집 부모를 내 부모라고 부르고 싶은 욕망을 '선생'의 영역에서는 실행해 옮긴 셈이다. 내 주변에는 변변한 선생이 없으니 내 지적 여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은 분들을 줄을 세워 위치시킨 후 그들의 인가를 받는 방식.

이십대에는 그런 '너 내 선생님이야' 놀이가 재밌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게 무슨 선생님이냐 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년에 한번도 만나지 않고 서신조차 교환하지 않는, 요즘같이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도 실시간으로 카톡을 주고받는 시대에, 아무런 인격적인 교제 없는 책 속의 주인공 혹은 내 지식의 한 프렉탈만을 차지하는 인물과의 지식 교환을 과연 사제지간으로 볼 수 있나 하는 회의감에 빠졌다. 이건 전형적인 왕따의 골방 놀이에 다름아니지 않나.

부끄럽게도, 이십대에 즐겼던 놀이 중 이른바 '알고 보니 너도 쓰레기군' 놀이가 있었다. 당시 구루의 지위에 올려 놓았던 3-40대의 활동가, 저자, 교계 인사들을 존경하는 인물pool에 상정했다가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거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나면 '쓰레기'로 간주하는 것이다. 은근 쾌감이 있었다.

'너 내 선생님이야'와 '알고 보니 너도 쓰레기였군'놀이는 내 왜곡된 스승의 개념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다. 그리고 30대 후반에 나는 이 놀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내가 나이가 들수록 선생 혹은 쓰레기로 상정했던 그들의 얼굴과 내 얼굴이 겹친다. 누군가에게 나도 선생과 쓰레기 사이를 오가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좋은 사제지간은 인생 여정에서 자주 교류하고 손도 잡아보고 팔짱도 껴보고, 식사를 같이 하다 웃으며 밥풀도 흘려보는 관계가 인.간.적.이란 생각이 든다. 사제간에도 서로의 허물을 지적할 줄도 알고 그럼에도 신뢰를 잃지 않는 관계. 내가 뽀대나는 선생을 지명하고 어떤 이상적인 컬렉션을 모으는 것처럼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그저 자기 욕망의 충족을 위한 자위행위에 다름 아니란 생각.

탁월하고 현학적인 어떤 이상을 걷어내고 보면, 내 인생에도 많은 선생이 있었다. 내가 세운 높은 기준을 충족하지는 못했지만 나를 아끼고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준, 활자화된 글로서가 아니라 나를 여러차례 찾아오고 연락하고 조언해 준 많은 인생의 선배들. 때로 그들이 '틀린 생각'을 했을 때도 그들은 나를 걱정해주었지만, 나는 그들을 떠났고 종국엔 기억에서 지웠다.

스승의 날. 나이를 먹을수록 당의정의 단맛이 사라지며 이내 찾아오는 씁쓸함을 감내하듯 내 흥미로운 놀이들의 뒷감당을 하느라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자주 한다. 아침에 문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생각들이 똬리를 튼다...
2013/05/15 23:04 2013/05/15 23:04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올해들어 성하가 어린이집을 옮겼다.
원래 다니던 집은 가정집이었는데 원장선생님이
좋았고 성하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
5살반이 없는 관계로 성하는 어린이집을 옮겼는데
가끔 이전 어린이집 친구들 이름을 떠올리며
그 애들을 추억한다.

성하 입장에서는 첫 이별 경험이랄까.
얼마 전 동네에서 예전 어린이집 친구를 만났는데
정작 만나서는 서먹해하다가 돌아왔다.
... 사실 그 친구들은 특정 장소, 특정 시간에
함께 있는 어떤 익숙한 '경험'의 향수인 셈이다.

해질녘 붉게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왠지 모를
따뜻함에 눈시울마저 붉어지는 경험을 누구나 한다.
그 짧은 시간의 온기와 색감에 젖어 떠오르는
추억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불행히도 나는 유년기 시절의 어떤 추억거리가
남아있지 않다. 그저 어떤 친구들과 어떤 동네,
어떤 명확하지 않은 이미지에 기대어 추억할 뿐.

성하와 앉아서 옛날 어린이집 친구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스마트폰에 받아적었다.
어린이집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서
성하의 첫 공동체 친구들의 이름을 같이 적은 후
육아일기 한 페이지에 넣어둘 생각이다.

성하에게 간간이 보여주며
나의 추억에는 없는, 선명한 이미지를 남겨주고 싶다.
나도 안다. 이런 것들이 성하에게 의미가 있다기 보단
나의 어떤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가 깔려있다는 걸.
그래도, 성하가 나이가 들어 너다섯 살을 추억할 때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르면 나도 기쁠 것 같다...
2013/05/15 00:16 2013/05/15 00:16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이마트에서 아이패드 미니 30%할인 소식에 개장 2시간전부터 줄선 행렬이 뉴스기사로 났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자본주의의 노예라기 보단 할인주의의 노예가 아닌가 하는.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옛말처럼 할인이라면 동공이 커진다. 조건반사? 필요없는 물건도 50%면 다시 쳐다보고 사야할 논리를 단 몇초만에 만들어낸다. 사야할 물건이라면 단돈 200원이라도 싼 곳을 찾아 웹서핑을 한다.

그 지극정성으로 기사 한 개를 썼다면 나는 200원 이상을 벌 수 있었겠지만 할인주의의 노예인 나는 자주 최저가 할인혜택의 시장을 찾아 헤매는 외로운 소비자가 되는 것을 즐긴다.

문제는 한 인간의 생산성을 할인주의에 매몰되어 결국은 소비행위에 상당 부분 사용하게 되는 악순환의 구조다. '나 어제 이거 샀다'는 제1원칙이지만 보다 중요한 제2원칙은 '이거 얼마에 샀게?"에 대한 내 '할인주의'적 존재감의 증명에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말은 상당히 거대담론적으로 들리지만 꼼꼼하고 섬세해진 현대사회에서 한 개인의 가치관은 200원을 깎기 위해 나는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나 에서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나부터.
2013/05/07 23:04 2013/05/07 23:04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나는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사람을 세울 때 대놓고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낸다 교만하다는 이유로 추천하지 않고 조용히 기도생활하고 무관심한 듯 있는 이에게 무익한 종 이미지를 덧입혀서 혹은 하나님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겸손 코스프레'를 시키는 관행들이 불편하다.

그 위치에서 정작 재능을 발휘할 사람에게 그 일을 주지 않고 조용하고 인품(종교심)이 좋은 비전문가에게 맡기니 교회의 특정 영역들이 개선되거나 발전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특히 소규모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비일비재하다.

무익한 종이이었던 교인들은 맡은 일을 열심히는 하지만 고민해보거나 관심분야가 아니었던 관계로 어떤 이상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흥미있게 그 일을 추진하지 않는다.

혹은 일을 하지 않았던 때와는 달리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세상'에서 보여주던 실적중심, 승부사 근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때에는 다시 주변 성도들과 '일'에 의한 의견대립이 커지고 공동체는 혼란이 휩싸인다. 그렇게 되면 대체로 공동체는 '그 일 자체'를 접는다. 구조를 악으로 치부하는 셈이다.

고로, 나는 신앙고백이 교리와 일치한다면 의지있는 사람에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그 일을 위임하는 공동체가 건강하다고 본다. 특히 교회는 여성이 교사가 되거나 설교를 하거나 교회 전면에 나서는 것에 대한 강한 회의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데... 안 그러면 좋겠다.

여성 뿐만 아니다. 형기 왕성한 청년들에게도 좋은 훈련의 장이나 시험적인 모임들을 운영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고 교회 허드렛일 봉사로 소진시키는 관행이 못내 아쉽다. 썩어지는 밀알이 되라는 것은 어떤 자신의 색깔 자체를 버리고 우울증 환자 겸손을 넘어선 자학과 무기력을 강요하는 건 아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2013/05/07 23:03 2013/05/07 23:03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한밤중에 성하가 옆에서 코를 파다가 손이 허공에 있는 채로 다시 잔다.ㅋㅋㅋ 완전 귀여워서 한참을 입고리를 올리고서 쳐다보는 중이다. 이 아이가 정녕 내 아들이란 말인가... 참 귀엽다. 노동절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에 갔다가 내 부주의로 문틈에 성하 손이 끼었다.

 

한참을 울고는 이후로 계속 칭얼대기 시작, 몇 차례 주의를 주다가 저녁 즈음에는 나도 도저히 참지 못해 화도 내고 1분동안 벌도 세웠다. 저녁에 씻기려는데 아침에 문에 낀 손이 퉁퉁 부어있었다. 얼핏보고 피부가 조금 까졌구나 생각했는데 엄살이 아니었구나... 내일 병원에 가봐야하나...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손가락은 잘 움직이는데, 잘 움직이는데 그때부터 자학이 시작되었다.

미안함이 쏟아지는 밤. 둘이 누워서 책을 읽어주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나: 오늘 손가락이 많이 아파서 기분이 안 좋았었구나 성하는...
 성하: (고개 끄덕)
 나: 기분 많이 안 좋았어?
 성하: 아니, 기분 좋아.
나: ...
 성하: 아빠도 좋아.
 
눈물이 핑 돈다. 아빠도 좋아. 오늘 내가 성하에게 칭얼대지 말라고 했던 경고와 벌을 세운 기억도 고스란히 돌아온다. 넌 그래도 내가 좋구나. 흠...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많았다. 지금도 그 정서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서서히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30년 넘게 헤어나오지 못한 아버지탓. 성하에게 그런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 정말로. 하지만 이제 갓 5살이 된 아들에게 나는 원치 않게 잘못을 한다. 뒤늦게 알게되면 오늘처럼 밤잠을 설친다. 퉁퉁부은 손가락을 얼음주머니를 갖다대고, 잠자는 아이의 손가락을 몇차례 확인한다.
 
나는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그건 양육이나 자녀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아이를 다치게 하거나 상하게 만들까봐 두렵다. 물론 이건 엄살이다. 매순간 나는 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노라 자만한다. 하지만 그만큼 이 아이와 살을 부비고 살아가는 일상의 잘못들이 쌓이는 게 무섭기도 하다. '아빠 좋아'가 아니라 '아빠 미워'라고만 했어도 지금쯤 나는 숙면을 취했을텐데...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운전실수로 교통사고가 났고 나는 눈썹이 찢어지고 어깨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다. 물론 그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아버지는 괜찮니? 미안하다...라는 살가운 말을 해주지 않았다. 평생 아버지는 자녀에게 빈말이라도 자기 잘못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 내가 아비가 되고 보니 매번 사과는 하겠는데, 그것보다 내 아들이 되어서 내 실수로 인해 아이가 고통받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생긴다.
 
코를 파다가 허공에 떠 있는 성하의 손을 보며 간절히 기도했다. 오늘 문에 낀 손가락이 빨리 낫게 해달라고. 우습지만 진지하게. 어제 많이 자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잠이 안 와서 다시 일어났다. 미뤄둔 일을 하는 중간중간에도 기도 중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나같은 트리플A 성격은 애 하나 키우기도 버겁다...

 

'13. 5. 2.

2013/05/02 00:16 2013/05/02 00:16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얼마전 오마이뉴스에 쓴 <아내가 지금껏 이런 일을 해왔단 말인가> 기사 반응을 보면서 느낀 점 몇 가지.

 

일단 반응이 뜨거웠다. 페북 좋아요 500회를 넘겼고 기사 점수도 <닥치고 정치> 서평 다음으로 높았다. 무엇보다 시민 5명에게 원고료도 받았다. (몇달 전에 기고한 기독매체 원고료는 아직도 무소식인데)
 
반면, 우는 소릴 자주 했듯 댓글들은 마치 조선일보나 일베에서 볼 법한 내용이 많았다. 정리하자면 여성들은 뭔가 시원함을 느낀 것 같고 반면 남성들은 공감하는 분들도 있었겠지만 뭔가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그 불편함은 이런 게 아닐까. 남성도 '지금도 충분히 고생을 하고있고 힘든데 가부장제의 원흉처럼 취급받는다'는 일종의 역차별 내지는 피해의식 같은 거다. 과거에 가부장제가 어떤 고압적 규율에 의존했다면 지금의 가부장제는 이런 류의 조금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는 것도 같다.
 
각설하고. 나는 남성이지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스스로 여성성을 확장시키고, 공공연하게 유사페미니스트 내지는 '언니'라고 칭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성주의 운동가들과 달리 나는 성해방운동의 주체로서 남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남성이 행위의 주체이자 동반자가 되어야 현실적으로 풀리는 문제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남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와 상황으로 어떤 '설득'을 하고 싶은 거다. 여성동지들 안에서 어떤 포퓰리즘을 일으키고 싶은 게 아니다.-_-;;;; (뭐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헌데 이 기사를 쓰면서 나는 내가 남성과 점점 불통의 단계로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진.심.으.로.
 
가끔 나는 두란노아버지학교(기독교에서 하는 자상한 남편 교육 프로그램인데 다분히 가부장적이다)에 대항마로 여성주의관점의 아버지학교와 세미나를 만드는 상상을 한다. (주위에서 부채질도 하고) 근데 요즘은 아내의 협박에 못이겨서 똥씹은 표정을 하고 들어오는 남편들이 떠오를 때가 많다. 이,,,, 이건 아니다 싶다.
 
결국 오늘 미생 123회 이야기처럼 부모가 모두(성차별없이) 행복해야 자녀가 행복하고 자녀가 행복해야 그들이 다음 세대에 빛을 발할텐데 그 조건으로 볼 때 여성이 불행할 만한 요소가 한국사회에는 너무 많고 그것을 조정하고자 하는 노력은 남성도 행위 주체자로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 글은 남성에게 공감을 주는 부분에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본다.

 

사실 그런 생각이 있다. 남성-여성, 구도를 보수-진보, 비전라도-전라도, 백인-흑인에 대치시켜도 공감대가 될 만큼 여성문제는 치명적이지만 너~무 시시콜콜, 째째, 미시적, 가정사적이라 글꽤나 쓰는 논객들이 쳐다보지 않는 영역이다. 그도 누군가의 남편일테니 그럴 수도 있고.

 

그런 대결 혹은 이항 구도를 탈피해야만 가능한 남성-여성 주체적 행위로서의 여성운동을 꿈꾸면서 이 벽을 더 높게 쌓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암튼 며칠동안 많이 배웠다. ...벌써 주말이다.^^

2013/04/26 23:02 2013/04/26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