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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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날씨에 걸맞게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흘러나왔다.
음악에 한참 젖어드는데 내릴 때가 됐다.
근데 아저씨가 목적지를 지나쳐서 계속 달리신다.

나: 아저씨 저 여기 내려야 하는데...
아저씨: 아... 죄송합니다. 노래듣다가 정신을...
나: 네. 여기 그냥 세워주세요.
아저씨: 네.
...
나: 노래가 참 좋죠?
아저씨: 웃음.
...
목적지를 한참 지나쳤지만 나는 다시 돌아가자고 하고 싶지 않았다.
몇백원의 거스름 돈도 받지 않았다. 그저 아저씨와 노래를 조금더 듣다가 내렸다.
적당히 젖어있는 감상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삶의 묘미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많은 당위적 행동들 가운데에서도,
틈틈이 흘러나오는 '비처럼 음악처럼'을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닐까.
오늘 내 생각은 그렇다.
2013/04/07 23:00 2013/04/0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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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칠순 기념 모임 낭독글.

 

제목: [아버지]

아버지가 벌써 칠십 세가 되셨다는 것이 사실 저는 믿기지 않습니다. 솔직히 제가 곧 마흔이 된다는 게 더 믿기지 않지만 말이지요. 아버지는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도 저보다 달리기가 빨랐습니다. 한번은 산책길에 달리기 경주를 했는데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를 했고 제 기억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저보다 두배는 빨리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전해 듣기로도, 젊은 시절, 아버지는 20대1로 싸워서도 지지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1:1로 싸워도 자주 지고 오는 아들이었고, 때로는 깡패에게 옷을 뺐기고 오는 저를 보며 속으로는 참 한심해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한번도 내색한 적은 없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저는 여느 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살가운 정이 좀 없는 편입니다. 저는 어머니는 여전히 엄마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중고등학교 즈음부터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저희 집안도 전인권씨가 쓴 유명한 책 <남자의 탄생>에서 묘사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자주,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고 어머니의 정서적 애인 역할을 하던 아들은 아버지 편이 아닌 엄마편일 경우가 잦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어느정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우리 자녀들에겐 먼 존재이기만 합니다.

한번은 가족이 부산에 내려갔는데 제 아들이 할아버지를 곧잘 따르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아이가 유독 할아버지를 좋아하더군요. 할아버지가 손자와 손을 잡고 앞서가는 모습을 보는데 아빠인 제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모를 뭉클함이 전해졌습니다. 그래, 저 사람이 내 아버지다.

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쓴 시집을 읽다보면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생사기로의 피난길에 동행이 어려워 떨구고 가게된
할머니의 호신용으로 낙점된 일곱살 배기 소년이
아우성 난리통에 온 가족과 생이별한 채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이라는 두메산골에서
홀로 할머니를 보살피며 시련의 한 계절을 겪고 있었다
밤낮으로 총소리 대포소리 요란했던 무서운 6.25 때."

아버지는 성인인 되어서도 심지어 노년에 들어서면서도 스스로를 소년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 중에 버려진 소년인 셈이지요. 재능이 남다르고 그나이에 물동이를 지고 다닐만큼 책임강이 강했던 소년, 냉정한 현실 세계에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남자, 씩씩한 가장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정작 당신은 평생동안 남모를 아픔과 연약한 정서를 가진 소년의 이미지로 자신을 형상화 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주변사람들, 저를 포함한 가까운 가족들 조차도 자주 아버지가 과거에 사로잡혀서 했던 얘길 반복하거나 설교조의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겨웠던 거죠. 올해 제 아들이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내후년에는 일곱살이 됩니다. 저는 제 아들의 이년 후를 상상하며 아버지가 전쟁 중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홀로 남은 일곱살 소년의 공포를 체감합니다. 한참 부모형제 앞에서 재능을 뽐낼 나이에 아버지가 감내해야 했을 책임감, 고독, 외로움들을 다섯 살 아들을 가진 이제는 조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제 기억에 아버지는 평생동안 독서광이셨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첼로와 붓글씨를 배우셨고 스포츠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회사 내의 여러 친선 경기에서 트로피를 휩쓸곤 했습니다. 십년 전부터는 시를 쓰시더니 시인 등단까지 하셨고 얼마 전까지도 아마추어 성악가로서 수차례 연주회를 가져왔습니다. 칠순을 맞은 오늘 이 자리 또한 작은 음악회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대부분의 일정을 계획하고 준비하셨습니다. 대단하신 분이죠?

이렇게 표현하는 게 칠순을 맞은 제 아버지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됩니다만 저는 오늘 이 자리를 이렇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소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소년이 재주를 뽐내는 장기자랑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오늘은 이 소년의 마음의 부모가 되어 그의 재능을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애정을 담아 기뻐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제 아버지를 기억해주시고 사랑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들, 김용주.

2013/04/01 22:59 2013/04/0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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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
성하가 자기는 파워레인저 XX가 너무 좋은데 우리 집에는 OO와 OO만 있단다. 내가 말하길 너 요즘 파워레인저 아니고 포켓몬스터를 더 좋아하지 않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막 우기면서 XX를 사달라고 막 졸랐다. 사실 성하 장난감은 칭찬스티커를 다 모으거나 특정한 날에만 사주기로 약속했는데 뜬금 없어서 물어봤다."아빠가 왜 XX를 사줘야 하는데?" 성하가 나를 똑바로 처다보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를... 사랑하니까..."
...
허걱;; 가슴이;;;; 두근두근
...
난 처음 알았다. 왜 많은 여성들이(혹은 남성들이) 상대가 나쁜 사람인 걸 알면서도 큰돈을 달라고 하거나 못되게 굴어도 그걸 뿌리치지 못하는지...ㅠㅠ
차마 안 된다고는 못하고 담에 사주겠다고 얼버무렸다.(그러나 눈은 계속 하트뿅뿅...;;;;;;)
...
아침에 아내에게 이 얘길 했더니 아내가 날보며 한마디 던졌다.
"어이구 (아들) 바보야..."
... 히잉. 나도 내맘을 어쩔 수 없네...ㅠㅠ
2013/03/21 00:07 2013/03/2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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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는 (다행히도) 외모는 아내를 닮았지만 성격은 다분히 나를 닮은 구석이 많다. 성격은 좋고 나쁘고가 없고 그저 다를 뿐이라고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좋은(되고 싶은) 성격도 있고 나쁜(버리고 싶은) 성격도 있게 마련이다.

아들이란 존재는 뭐랄까, 정치적이지 않은(스스로를 포장하지 않는, 페르조나가 형성되지 않은) 나(아빠)의 원초적 모습을 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아들의 성격이 불편하다. 내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다듬어지지 않은 존재가 근처를 돌아다니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나에 대한 고민을 참 많이 했다. 그 '여러가지'를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겠고 그저 많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묻기도 하고 스스로를, 그 의도와 생각, 감정들을 자주 돌아보곤 했고 나아가 정신분석이나 심리학, 상담 분야의 책들도 읽고 공부했다는 정도만 언급하면 될 것 같다.

무엇보다 '결혼' 자체도 나를 돌아보는데 큰 도움을 줬다. 결혼하고 나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는 아내가 내 숨겨진 습관, 습속, 욕망 같은 걸 찾아낼 때 나는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넘어선 분노 같은 걸 느꼈다. 수치스러움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비밀을 알았으니 죽어줘야겠어'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나.ㅋ) 내가 숨기고 싶어하는 성격적 결함(내가 보기에 치명적으로 여겨지는 결함)이 여과없이 드러나니 지적을 해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그래서 교정되지 않는... 힘든 시간들을 겪었다.

내가 아내에게 지적질을 당하고 살았던 몇 년이 없이, 또한 스스로를 많이 돌아볼 시간적 여유가 없이 나를 꼭 빼닮은 아들을 얻게 되었다면... 아마 나는 내 아들을 마음 한구석으로 싫어하고 불편해했을 것 같다. 때로 드러나지 않게 미워했을 수도 있다. 쟨 왜저러냐며 별 일도 아닌데 불같이 화를 내고 벌을 세웠을 수도 있고 '아빠와 하는 짓이 똑같다'고 누군가 농담을 할 때 얼굴을 붉히며 아니라고 정색을 하며 화를 냈을 수도 있다.

부모가 된다는 건 내게 주어진 보호가 필요한 존재에게 어떤 것을 공급해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 이상의 의미 중 하나가 바로 나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성하를 통해 나는 나의 유년기를 돌아보고 또한 지금의 나(직장이나 가정, 공동체, 지인들과의 관계성을 배제했을 때 드러날 법한 나)의 성격을 돌아본다. 그리고 내 성격에 대해 스스로가 시비(옳고 그름)나 미추(아름답고 추함)의 어떤 잣대를 들이대는 일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필요를 느낀다.

그 성글은 잣대가 자연스럽게 내 아들에게도 옮겨가길 바래본다. 그리고 그것이 바른 육아, 자녀교육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3/03/13 00:06 2013/03/1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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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라우드 기술이 유행이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핵심 개념은 이를테면 이런 거다. 고사양의 수퍼 컴퓨터가 물리적인 '어딘가'에 있는데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저가의 단말기를 통해 수퍼 컴퓨터를 빌려쓰는 것이다. 기업에서는 전직원에게 고가의 컴퓨터를 주지 않아도 되니 이득이고 IT업계에서는 무선망으로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어서 어느곳(기기)에서나 동일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최대 단점은 트래픽이 수퍼컴퓨터에 몰린다는 점이다. 매순간 수십명 수백명의 접속자들이 동일한 컴퓨터에서 작업을 하니 당연히 부하가 걸린다. 만일 수퍼 컴퓨터가 죽기라도 하면(나는 의도적으로 죽는다는 표현을 썼다) 다른 단말기들은 그냐말로 깡통이 된다. 그외에도 보안 문제가 있다. 여러 은행에 돈을 분산...관리하지 않고 한곳에 몰려있으면 도둑이 한곳을 집중해서 털면 되니까...

#2.
교계 조직 혹은 시민단체들이 대기업의 피라미드식 서열구조를 비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특히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영적을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이유에서 교계의 조직들은 대기업의 여러단계에 걸친 보고체계를 비웃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 비웃음에 동의할 수 없다.

내 경험상, 직장에서 보고체계가 여러 단계인 건 맞다. 하지만 적어도 실무자( 여기에서는 설계자)는 대리직급의 연구원이라 하더라도 회의에 나가서 자신이 방향성을 결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면에 자기 이름이 박히며 이는 최악의 경우 차량 리콜시에 책임이 그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면밀히 따져보고 검토한 자료를 토대로 결정하는 일개 대리의 방향을 특별한 이유없이 자기 팀이나 회의에 참석한 타팀의 파트장급이나 팀장이 뒤집을 수 없다.

#3.
애석하게도 내가 경험한 교계 조직들의 실무자들은 그들이 비판하는 대기업 조직보다 못한 재량권을 행사한다. 머리가 허연 분들도 교계에서는 2세대니 3세대니 하는 가신그룹에 속한다. 간사급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국장급 정도 되어도 관련 협의를 하자고 하면 나와서는 대표님에게 전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라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하다못해 문건 하나를 만들어도 국장이 쓴 문구 하나하나를 대표가 개입해서 고치는 경우도 몇번 봤다.

그런 이유로 종종 나는 교계 조직을 볼 때마다 클라우드 컴퓨팅 구조가 떠오른다. 진짜는 하나뿐 나머지 중간 관리자나 실무자는 그저 단말기에 불과하다. 아주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만을 시키고 정작 실무자, 담당자로서의 재량권은 주지 않는다. 클라우드처럼 실시간 무선 통신이되면 그나마 좋겠지만 돌아가서도 보고하고 지침을 듣기까지 꽤 오랜시간이 걸린다. 지침 자체도 두루뭉실한 경우에는 회의의 본 뜻마저 훼손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논의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4.
교계 조직의 문제는 뭔가. 말한대로 실무자들을 위시한 조직의 직급체계에 합당한 재량이나 결정권이 없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다. 담당자에게 책임을 지게하는 만큼의 재량권을 주라. 회의에 보내면 결정하게 만들라. 그게 아니라면 국장이니 차장이니 하는 명목상 직급명칭을 떼고 팀제도(팀장-팀원)로 전환하고 팀장급이 모든 결정을 주도하는 구조로 가는 게 차라리 낫다. 표리부동한 직급별 업무분장은 실무자들에게 잦은 분란과 좌절감만을 안겨준다.

물론 더 큰 문제가 있다. 교계의 대표자들은 아쉽게도 수퍼컴퓨터가 아니다. 박원순 시장이나 김성근 감독 같은 부류가 아니다. 게다가 수퍼컴퓨터가 죽거나 은퇴라도 하면 조직은 큰 혼란상황에 휩싸인다. (이는 지금도 많이 경험하는 바다.) 최선과 차선 모두 현실에 부합하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2013/03/09 22:58 2013/03/0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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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몇년간 20대 청춘들에게 '멘토'와 '힐링'이란 말이 유행했다. (힐링이란 말에는 몇몇 비판적인 이야기도 접했지만 대세를 뒤집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책도, (읽지는 못했지만) 결국 청춘들이 세상에서 부딫히고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며 그런 행위 자체를 긍정하고 지지하겠다는 의도였으리라.

#2.
직장생활 가운데 상당히 얍쌉한 전략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거다.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내 업계를 예로 들면) 차량을 개발하면서 설계 단계에서 문제점이 발견된다. 실차 평가 시에 무리없이 넘어갈 수도 있지만 문제가 터질 수도 있는 아리까리한 케이스가 발생한다. 허나 설계 초기단계에는 놓치고 뒤늦게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하면 결정권자의 '까임'을 당하기쉽다.

그래서 잔머리를 굴린다. 프로토타입의 차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험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보고서를 가지고 원인을 규명하고 개선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전자는 게으르다 혹은 무능하다고 치부되지만 후자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윗사람이 살짝 걱정이 되려는 찰나에, 척척 치밀한 분석에 개선안까지 1주일 안에 진행하면 그 사람은 무능력자에서 단번에 능력자로 탈바꿈된다! (당신이 웃거나 황당해한다면 이(직장) 바닥을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치열한 경쟁이 판치는 중원 고수들의 tip이다!

#3.
'힐링'이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직장생활의 얍쌉 꼼수를 예로 든 건 둘 사이의 어떤 연관 관계가 보이기 때문이다. 내 독학의 통찰로 보기에 힐링은 기성세대의 꼼수다. 여기에 나를 포함시켜도 상관 없다. 기성세대는 청춘들이 다치고 부서지고 깨질 것을 명약관화하게 예측하면서도 그냥 지켜본다. 왜 예측가능하냐고? 자신들도 그렇게 세상을 배웠고 그 안에서 아프고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힐링'의 지점을 잘 알고 있다.

과거의 멘토들은 군대 상관 내지는 직장 상사 같은 이들이었다. 김성근 감독처럼 자기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자기의 멘티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채찍질하여 키워내던 이들이다. 그 고통을 견뎌내면 철인이 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다수는 그런 '스파르타 주민들'이 아니다. 더욱이 무한경쟁에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더 가혹한 구조가 스파르타 주민들이 되어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과거에 반해, 우리 시대의 멘토들은 공감과 소통으로 무장했다. 세련되게 '우쭈쭈..'할 줄 안다. 그가 쓰러질 그 자리에 서서 손을 잡아준다. 그리고 그가 쓰러진 이유를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설명해준다. 때론 구조의 문제를 읊조리며 굿윌헌팅의 상담 선생님처럼 'it's not your fault'라고 다독여준다. 이 지점이 나는 못내 불편하다. 청춘들이 죽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숨어서 실눈 뜨고 지켜보다가 넘어지는 청년들에게 나타나서 감언이설로 위로하는 게 솔직히 껄끄럽다. 
 
#4.
 차라리,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멘토'는 청춘들에게 정직하게 무릎을 꿇고 사과할 줄 아는 기성세대의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너에게까지 고통을 안겨줘서 미안하다고.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선배로, 선생(먼저 태어난 이)으로 너희들이 아파하고 흔들림을 반복하는 문제들을 알면서도 대항하거나 고치려고 애쓰지 못하고 너희 세대에 동일한 문제를 떠넘겨서 정말 미안하다고 무릎꿇고, 혹은 머리라도 긁적이며 사과하는 이가 진짜 '멘토'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파르타식 멘티 훈련법'에서 벗어난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얍쌉한 스탠스를 '힐링'이라는 포장으로 위로하고 다니는 '멘토'들을 보면 직장 강호에서 인정받는 분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에 기분이 좀 씁쓸하다. 이 시대의 멘토들 모두가 꼼수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기성세대의 잘못을 사죄하는 겸손한 인격들도 거의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5.
 그런 이유로.. 내가 하고픈 결론은 이것이다. 기성세대가 청춘들에게 '멘토'로 인기를 얻으려 하기 전에 선배로서 겸손히 사과의 마음을 전하자. 얍쌉한 현실분석과 과장된 감정표현은 기성세대의 상사나 윗사람에게나 계속하고, 청춘들에게는 솔직하게 말하자. 나도 딴에는 열심히 살았지만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건 쉽지 않더라고, 그렇게 정직히 말하자.

정말 '멘토'가 되고 싶다면 말이나 책, 강연뿐만 아니라 그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소박하더라도 보다 직접적인 수고를 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3/09 22:57 2013/03/09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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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오늘 서랍정리를 하다가 책도장을 발견했다. 한때 나는 모든 책에 내 이름이 각인되어있는 책도장을 찍었다. 불과 5-6년전만 해도 책을 읽는 것과 더불어 책을 소유하는 것 자체도 어떤 자극 내지는 즐거움을 주었다.

제레미 리프킨은 자신의 책 <age of access>에서 현대가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논증한 바 있다. 그만큼 제품과 자원의 순환속도가 빨라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주변의 모든 물건들을 일시적으로 소유하는 일이 잦아지고 중요하지 않은 물건들이나 제품들, 특히 s/w들은 라이센스를 연장하는 방식으로 '대여'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리프킨은 access, 즉 '접속'이라는 용어를 차용했다.

당시에도 끄덕이던 그의 분석과 예견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이제는 책...도장을 찍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책이 서재에 꽂혀있길 기대하지 않고 이제는 중고로 팔거나 주변 사람들과 돌려보거나 자료활용도가 높으면 스캔업체에 보낸다. 그 어떤 경우에도 책에 내 이름을 새기고 싶은 욕구는 반감되고 결국 책도장은 내 서랍 속에서 몇 년간 방치되어 있었던 셈이다.

요즘도 전자기기들이나 사무용품, 노트, 펜 등에 각인 서비스를 해준다. 처음에는 추가비용을 들여서라도 각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자 기기들의 경우에는 2년 주기로 model year가 교체되고 그 즈음에 나는 기기들을 중고시장에 내놓는 편이라 각인이 유효한지 혹은 옳은지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현재까지의 결론은 순환재 즉 일시적인 기간동안 사용하는 물건들에 내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말자는 생각이다. 책도장을 들고 유심히 보다가 든 생각을 조금 끄적여본다.
2013/03/09 22:56 2013/03/09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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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에 대한 대체적인 접근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언행불일치, 알고보니 나쁜 놈이었더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 류의 절망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살아가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종교심에 기대어 그저 사람을 (신뢰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불신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누군가에게 실망감, 배신의 불안감을 품고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원론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이 '입장'도, 나는 현실적으로는 인간 자체에 대한 환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본다. 계속 뒷통수를 맞으면서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자학적인 행위다.

 

사물의 '선악미추'의 잣대가 극명하면 입장 정리가 쉽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 참 좋아'라고 말하는 평가에는 다양한 함의가 숨어 있고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 전 인격적인 부분에서가 아니라 시간 궤적의 판단에서도 그렇다. '저 사람 쓰레기야'라고 말할 때는 어떤 시점의 어떤 행위에 의해 판단된 단일 행위, 혹은 특정 상황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갖게된 평가이기도 하다.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나는 한번 잘못한 사람, 혹은 여러번이라도 특정한 영역에서 잘못된 행위를 하는 이들에 대해 신뢰냐 불신뢰냐의 on/off(모 아니면 도)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잣대에 반대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대단히 복잡하고 또 섬세한 존재라서, 어떤 명확한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도 절망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그 선택을 후회하고 다시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악행을 할 수 있다. 그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행한 지독한 잘못들을 돌아본다면, 혹은 내가 성공하여 더 많은 권력과 힘이 있었다면 '할 수도 있었을' 잘못을 추측컨데 나는 누군가에겐 흔적도 없이 제거되었으면 좋았을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나또한 누군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길 소원했던 적이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비출 때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과 연마에 의해 신을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선물처럼 주어지는 신과의 사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이 성취가 아닌 '구원'이고 '은혜'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조차 어떤 악인에 대해 악행을 넘어 그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지구 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느낄 정도로 가혹하게 비난하는 것에 반대한다.

 

'사람을 신뢰하면 안 된다'는 말에는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부정적인 정서, 느낌이 덧입혀져 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매사를 '인지'하며 살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는 은근히 누군가가 날 이해해주고 기대하지 않게 날 배려해주고 도와주고 지지해주길 기대한다. 때로 드물게 그런 경험을 하면 배신의 고통 속에 몸부림 치던 기억들이 눈녹듯 상쇄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에 대한 절망감으로 가득찬 삶을 산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
 
레 미제라블의 감동은 '용서'의 힘이다. 잘못된 선택을 한 그 사람에게 한번 더 '신뢰'하기로 결정해주는 마음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경험이다. '넌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야'... 모든 악행에는 이유가 있고 악인은 그 악행이 습관으로, 나아가 전 인격으로 바뀐 히스토리가 있다. 그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개별 인간들은 타인을 신뢰/불신의 on/off 평가 대상으로 치환하고 상대와 연결된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내가 다치지 않도록, 내 마인드콘트롤을 할 방법을 찾는다. 덮어놓고 사랑해주거나, 언젠가 너도 날 배신하겠지 라고. 어쨌건 그 판단 주체는 '너와 나'가 아닌 '오직 나'에 국한된다.
 
외롭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옆에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적어도 내게 필요한 종교심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서도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의 마음을 잃지 않고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2/28 22:56 2013/02/28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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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기독교 교리 관련된 글들이 올라온다. 뭐 내가 기독교 배경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SNS나 일반 사석에서 교리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능력이 안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솔직히 일부러 안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뭐 개신교 특화된 공간, 인터넷 카페, 그룹 같은 곳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일상적으로는 교리에 관해 왈가왈부 내지는 중요하네 안 하네 등등을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은... 개신교에서 교리는 지금보다 더 '내재화'되어야 할 요소라고 본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충분한 논의와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 있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그 유일성을 자랑을 하거나 논증하는 것, 나아가 전도라는 이름을 광고, 홍보하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다.

교리는 이를테면 기본기다. 운동선수의 기본기는 시합에서 자연히 드러난다. 날카로운 슛을 한두번 날리지만 이내 헉헉 거리며 움직임이 둔해지거나 정석의 상황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선수와 그 반대의 선수는 '기본기'라는 이름으로 평가된다.

한 종교의 위대함은 내재화된 교리를 통해 드러나는 공동체 개개인의 삶이다. 약장사처럼 한번만 먹어봐...라고 읖조리지 않아도 명약은 소문으로도 불티나게 팔린다. 내가 느끼기에 개신교 신자들 대부분은 가짜약을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일반인에게 팔아넘기려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더더욱이 한국 개신교는 현실세계에서 어떤 조직이나 세력들 못지 않게 부정부패와 비리, 권력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런 컨텍스트 속에서 아무리 정화된 텍스트를 선언, 선포한 들 그 텍스트가 곧이 곧대로 들릴 리 만무하다. 아닌가. 당신이 무종교인이라면 '신천지'의 행동을 보며 신천지를 정통으로 받아들이겠는가.

나를 포함한 개신교도들은 삶 속에서 철저하게 이단처럼 살고 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가짜약을 팔면서 정품이라고 우기고 있다. 물론 종교는 쓰여진 글(성경)과 종교적 전통(교회)를 통해 그 정신이 일정한 교리로 전승된다. 신앙을 갖고자 할 때 그 교리를 피해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효과없는 약 장수, 경기내내 헉헉대는 선수가 전달하는 '옳은 말'이 무슨 소용인가. 그 옳은 말(교리)이 사이비 취급받지 않겠는가.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그 순수한 의도가 오염되지 않겠는가. 아닌가.

솔직히 내 주변에는 고상한 신앙서적 수십권을 설명하고 매주 교리를 설파하는 대형교회 목사들도 있고 수십편의 야동을 보고 그것들을 회사에서 전파하는 직장 동료도 있다. 솔직히 (내가 아는 어떤) 후자가 더 성실하고 더 주변사람들을 잘 돕고 더 겸손하다. 그럼 교리보다 야동이 나은가. 혹은 아닌가.
2013/02/27 22:55 2013/02/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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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위해 헬스장을 찾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제자리 걸음으로 뛰기를 하고, 일부러 무거운 무게의 철물을 들었다 놨다 한다. 물론 헬스장의 취지는 운동을 위해서지만 헬스장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커피만을 위해 스타벅스를 찾지 않는 이치와 동일한 이유로 그곳에서 땀을 뺀다.

흥미롭게도 현대인들은 일상 노동에 대해서는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것을 회피하려고 애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기 돌리는 것도 귀찮아서 로봇청소기를 사고 설거지는 설거지기기가 이동은 자동차 같은 탈것류가 도와주고 건물 안에 들어서면 엘리베이터가 옮겨준다.

손하나 까딱 안하고 빈둥거릴 수 있는 여유를 얻은 사람들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맛집을 전전하며 탐식을 즐기다가. 이윽고 물렁해진 몸을 단단하고 슬림하게 만들기 위...해 돈을 내고 '노동판'으로 뛰어든다. 맞춤형 노동판에는 친절하게 노동을 하면 단련되는 근육부와 하루에 달음질쳐야 하는 거리, 몸에서 써야 하는 에너지, 즉 칼로리를 계산해준다.

'노동 관리자'가 섬세하고 친절하게 그들의 노동을 관리해준다. 사람들은 걸레질이라도 한번 하면 퇴근 후 스트레스가 배가되는 느낌이건만, 비용을 지불한 노동판(헬스장)에서 쓴 에너지를 떠올리면 건강해졌다고 뿌듯해한다.

최근에는 성하랑 놀거나 씻기거나 장난감을 정리하면서 짜증을 내다가 문득 이거 운동되겠다... 싶었다. 설거지나 걸레질, 쓰레기를 버리는 과정도 비슷하다. 며칠전부터 엘리베이터 이용을 자제하고 있다. 무림 고수들이 제자들을 10년간 허드렛일로 단련시키는 게 이런 취지였던가.^^

해서 나는 요즘 (내가 추구하는 일상적 글쓰기에 덧붙여서) '일상적 운동' 방식에 대한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한다. 허드렛일들, 가사 노동, 업무 노동을 통해서 몸을 단련하는 어떤 '방식' 혹은 가이드를 만드는 것이다. 문명화 이전의 사람들은 항상 몸을 움직여야했기에 몸 자체로만 보면 지금보다 훨 좋지 않던가.

편한 도구들에 의지하고 노동을 줄여나가는 대신 일상의 노동을 '운동', '건강'의 범주로 끌어내는 어떤 원리?, 자세? 방법을 찾는 것이다.ㅋㅋ '가사 노동, 이렇게 하면 날씬해진다', '다이어트는 허드렛일로 시작하라' 뭐 이런 제목의 책이 나와서 좀더 운동의 관점에서 서술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사실 운동을 일상적으로 혹은 집에서조차 어떤 운동기구로는 하지 못하고 헬스장이나 대형 공간에서 진행하는 주된 이유는 다분히 '감성적'인 이유에서다. 즉 또다시 '뽀대'의 문제로 환원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허나, 설령 그들이 그런 이유(뽀대의 완성)가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는 별 고민없이 '비용을 지불하는 노동판'으로 가게 되어 있다.

추가로. 이런 엉뚱한 생각이 우려되는 한가지 지점이 있다. 이는 가사노동, 허드렛일을 몸의 건강과 연결시켰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계급이 있다는 점. 즉 피고용자(노동자)와 여성(엄마, 아내)이다. 그들은 노동을 조직에 '공급'하면서도 그것이 웰빙 혹은 건강, 다이어트란 이름으로 정당화, 고착화될 수 있다. 고로 내가 주장하는 '허드렛일 운동법'은 계급과 성별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해야 할 것 같다.
2013/02/27 22:54 2013/02/27 2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