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날씨에 걸맞게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흘러나왔다.
나: 아저씨 저 여기 내려야 하는데...
아저씨: 아... 죄송합니다. 노래듣다가 정신을...
나: 네. 여기 그냥 세워주세요.
아저씨: 네.
...
나: 노래가 참 좋죠?
아저씨: 웃음.
...
목적지를 한참 지나쳤지만 나는 다시 돌아가자고 하고 싶지 않았다.
삶의 묘미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많은 당위적 행동들 가운데에서도,
'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아버지 칠순 기념 모임 낭독글.
제목: [아버지]
아버지가 벌써 칠십 세가 되셨다는 것이 사실 저는 믿기지 않습니다. 솔직히 제가 곧 마흔이 된다는 게 더 믿기지 않지만 말이지요. 아버지는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도 저보다 달리기가 빨랐습니다. 한번은 산책길에 달리기 경주를 했는데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를 했고 제 기억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저보다 두배는 빨리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전해 듣기로도, 젊은 시절, 아버지는 20대1로 싸워서도 지지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1:1로 싸워도 자주 지고 오는 아들이었고, 때로는 깡패에게 옷을 뺐기고 오는 저를 보며 속으로는 참 한심해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한번도 내색한 적은 없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저는 여느 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살가운 정이 좀 없는 편입니다. 저는 어머니는 여전히 엄마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중고등학교 즈음부터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저희 집안도 전인권씨가 쓴 유명한 책 <남자의 탄생>에서 묘사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자주,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고 어머니의 정서적 애인 역할을 하던 아들은 아버지 편이 아닌 엄마편일 경우가 잦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어느정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우리 자녀들에겐 먼 존재이기만 합니다.
한번은 가족이 부산에 내려갔는데 제 아들이 할아버지를 곧잘 따르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아이가 유독 할아버지를 좋아하더군요. 할아버지가 손자와 손을 잡고 앞서가는 모습을 보는데 아빠인 제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모를 뭉클함이 전해졌습니다. 그래, 저 사람이 내 아버지다.
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쓴 시집을 읽다보면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생사기로의 피난길에 동행이 어려워 떨구고 가게된
할머니의 호신용으로 낙점된 일곱살 배기 소년이
아우성 난리통에 온 가족과 생이별한 채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이라는 두메산골에서
홀로 할머니를 보살피며 시련의 한 계절을 겪고 있었다
밤낮으로 총소리 대포소리 요란했던 무서운 6.25 때."
아버지는 성인인 되어서도 심지어 노년에 들어서면서도 스스로를 소년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 중에 버려진 소년인 셈이지요. 재능이 남다르고 그나이에 물동이를 지고 다닐만큼 책임강이 강했던 소년, 냉정한 현실 세계에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남자, 씩씩한 가장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정작 당신은 평생동안 남모를 아픔과 연약한 정서를 가진 소년의 이미지로 자신을 형상화 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주변사람들, 저를 포함한 가까운 가족들 조차도 자주 아버지가 과거에 사로잡혀서 했던 얘길 반복하거나 설교조의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겨웠던 거죠. 올해 제 아들이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내후년에는 일곱살이 됩니다. 저는 제 아들의 이년 후를 상상하며 아버지가 전쟁 중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홀로 남은 일곱살 소년의 공포를 체감합니다. 한참 부모형제 앞에서 재능을 뽐낼 나이에 아버지가 감내해야 했을 책임감, 고독, 외로움들을 다섯 살 아들을 가진 이제는 조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제 기억에 아버지는 평생동안 독서광이셨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첼로와 붓글씨를 배우셨고 스포츠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회사 내의 여러 친선 경기에서 트로피를 휩쓸곤 했습니다. 십년 전부터는 시를 쓰시더니 시인 등단까지 하셨고 얼마 전까지도 아마추어 성악가로서 수차례 연주회를 가져왔습니다. 칠순을 맞은 오늘 이 자리 또한 작은 음악회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대부분의 일정을 계획하고 준비하셨습니다. 대단하신 분이죠?
이렇게 표현하는 게 칠순을 맞은 제 아버지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됩니다만 저는 오늘 이 자리를 이렇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소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소년이 재주를 뽐내는 장기자랑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오늘은 이 소년의 마음의 부모가 되어 그의 재능을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애정을 담아 기뻐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제 아버지를 기억해주시고 사랑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들, 김용주.
이 주제에 대한 대체적인 접근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언행불일치, 알고보니 나쁜 놈이었더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 류의 절망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살아가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종교심에 기대어 그저 사람을 (신뢰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불신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누군가에게 실망감, 배신의 불안감을 품고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원론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이 '입장'도, 나는 현실적으로는 인간 자체에 대한 환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본다. 계속 뒷통수를 맞으면서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자학적인 행위다.
사물의 '선악미추'의 잣대가 극명하면 입장 정리가 쉽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 참 좋아'라고 말하는 평가에는 다양한 함의가 숨어 있고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 전 인격적인 부분에서가 아니라 시간 궤적의 판단에서도 그렇다. '저 사람 쓰레기야'라고 말할 때는 어떤 시점의 어떤 행위에 의해 판단된 단일 행위, 혹은 특정 상황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갖게된 평가이기도 하다.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나는 한번 잘못한 사람, 혹은 여러번이라도 특정한 영역에서 잘못된 행위를 하는 이들에 대해 신뢰냐 불신뢰냐의 on/off(모 아니면 도)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잣대에 반대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대단히 복잡하고 또 섬세한 존재라서, 어떤 명확한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도 절망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그 선택을 후회하고 다시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악행을 할 수 있다. 그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행한 지독한 잘못들을 돌아본다면, 혹은 내가 성공하여 더 많은 권력과 힘이 있었다면 '할 수도 있었을' 잘못을 추측컨데 나는 누군가에겐 흔적도 없이 제거되었으면 좋았을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나또한 누군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길 소원했던 적이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비출 때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과 연마에 의해 신을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선물처럼 주어지는 신과의 사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이 성취가 아닌 '구원'이고 '은혜'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조차 어떤 악인에 대해 악행을 넘어 그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지구 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느낄 정도로 가혹하게 비난하는 것에 반대한다.
'사람을 신뢰하면 안 된다'는 말에는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부정적인 정서, 느낌이 덧입혀져 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매사를 '인지'하며 살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는 은근히 누군가가 날 이해해주고 기대하지 않게 날 배려해주고 도와주고 지지해주길 기대한다. 때로 드물게 그런 경험을 하면 배신의 고통 속에 몸부림 치던 기억들이 눈녹듯 상쇄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에 대한 절망감으로 가득찬 삶을 산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
레 미제라블의 감동은 '용서'의 힘이다. 잘못된 선택을 한 그 사람에게 한번 더 '신뢰'하기로 결정해주는 마음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경험이다. '넌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야'... 모든 악행에는 이유가 있고 악인은 그 악행이 습관으로, 나아가 전 인격으로 바뀐 히스토리가 있다. 그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개별 인간들은 타인을 신뢰/불신의 on/off 평가 대상으로 치환하고 상대와 연결된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내가 다치지 않도록, 내 마인드콘트롤을 할 방법을 찾는다. 덮어놓고 사랑해주거나, 언젠가 너도 날 배신하겠지 라고. 어쨌건 그 판단 주체는 '너와 나'가 아닌 '오직 나'에 국한된다.
외롭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옆에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적어도 내게 필요한 종교심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서도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의 마음을 잃지 않고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