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성경묵상
*데살로니가후서 1:1-4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1. 점점더 우리는 정부가 하는 말들에 진정성이 없음을 느낀다. 때로 이제 막장으로 달려가는 느낌이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 보도되지 않고 있었던 일이 없거나 희미한 기억인 것처럼 오도된다.

2.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접하는 특유의 말투가 있다. 일단 교회 사람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로 칭한다. 마치 김대리, 이차장처럼 교회에서 불리는 이 용어는 피를 나눈 가족임을 의미하지만 정작 교회를 다니는 많은 이들은 서로의 사생활을 모를 뿐 아니라 금전적으로 엮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3. 또다른 특유의 말투 중에는 '헌신, 순종, 봉사, 순교, 피흘림, 값없는 은혜' 같은 말들이 있다. 기도할 때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이런 용어를 자주 쓴다. 이 말들은 표현대로 정확히 이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주 과장법 내지는 비유법에 속한다.

4. 바울의 표현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주례사 비평처럼 "허허, 성도님들 참 세상 속에서 환난이 찾아와도 은혜로 잘 이겨내시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와 문맥상 일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집트의 시민처럼 죽어갔고 종교로 인해 가정이 찢어지고 국가의 위협 가운데 처했다.

5. 솔직히 비개신교도가 보기에 개신교도의 용어들은 가소롭다. 그 말과 그 현장성이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고 매번 거품이 가득한 맥주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마치 삼국지나 무협지의 한 장면 같은 대화를 구사할 때 개신교의 종교성은 개독교의 허접성으로 추락한다.

6. 비개신교도와 개신교도 사이에 어떤 물리적 불합리함과 어려움이 없고 도리어 개신교도의 사회적 지위가 한국사회의 평균을 웃도는 시대에 개신교의 언어는 더욱 사실묘사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7. 목사님의 설교는 장황했고 물질적이었어요, 집사님과는 사실 대화가 없어서 매주 소원하게 느껴집니다, 회사에서 예수의 도대로 살다가는 퇴사할 것 같아서 대체로 알면서도 그대로 못하고 삽니다, 순교의 위협 때문에 도시 선교지에 자리잡으려는 한계가 저에게 있네요... 등.

8. 우리가 자꾸 우리 자신을 '무협화'하면 우리는 정통을 이야기하는 사이비 교도가 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사이비로 규정하지도 않으면서 고고한 단어들을 무리하게 우리 삶에 가져다 붙인다.

9. 나는 정말 죽음의 위협 앞에 놓인 초대교회의 용어와 기독교가 보편종교가 된 현대 교회의 용어는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단지 단어의 차이가 아니다. 그 용어간의 간격을 마치 우리가 매우고 살고 있는 듯한 망상마저 갖게 되기 때문이다.

10. 최근 몇년간 내가 줄기차게 교회용어들을 고집스럽게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오늘의 묵상에 있다.
2013/08/23 23:21 2013/08/23 23:2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성경묵상
*느헤미야 13장 묵상

1. 바벨론 유수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하까지 이스라엘 민족들을 둘러싼 가장 큰 문제는 영적 혼합주의 문제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느헤미야의 성벽 제건은 그런 의미에서 주의깊게 관찰할 요소들이 있다. 침략의 위협과 굶주림의 위협 속에서 성벽 제건이라는 중대한 과업을 완수하고 말씀이 선포된 이후.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어느정도의 안정을 찾으면서 다시금 싸워야 할 내부의 적이 나타난 셈이다.

2. 외부의 적은 비교적 그 목표가 명확하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과 같은 물리적 공격은 있지만, 외부의 적과 싸울 때는 적어도 심리적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오랜 포로시기에 들어온 세속화는 안정기에 찾아온 내부의 적으로서 그 문화적, 일상적 흐름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은 일상과의 싸움에 직면했다. 이는 적당히 말씀을 이해하려는 매너리즘이라기 보다는 오랜 이방생활에 익숙해진 삶의 방식을, 비교적 짧은 기간에 구별된 삶을 살기를 종용하는 영적 원리들에 충돌했기 때문이 아닐까.

3. 안식일을 지키는 대목을 현대에 끌어와 적용할 때 다소 긴장감이 발생한다. 주일에 금전 사용을 금해야 한다거나 주일에는 교회활동 외에 어떤 '세속적 행동'을 계획하거나 직장에 출근하는 일을 죄악시하는 것들이 그 예다. 구약의 이 배경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원리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구별된 삶을 그 '사회문화적 익숙함'으로 인해 그 습속을 바꾸기 힘들더라도 비교적 빠르게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4. '안식일을 지킨다'는 본문은 세속 문화에 물들지 않고 구별되게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현대의 가장 큰 세속문화는 자본에 의해 사회를 등급화하는 행위이다. 현대 사회가 불가피하다고 인정하고 들어가는 혈연, 지연 친화적 풍토, 사회에서 소외받은 계층에 대한 방기, 사회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세상이 제시하는 자기계발서 방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일련의 삶의 방식들이다.

5. 무엇보다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종교적 행위를 수행하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이 아니다. 성령 임재 이후의 성도의 삶은 보다 내적이고 내밀한, 내 안에서 일어난 혁명이지 공개적으로 신앙을 선포하고 세속사회에서 찬송가를 틀어놓거나 나무 십자가를 보여주거나 대형 집회장에서 쪽수를 과시하며 소리치는 통성기도의 음량이 아니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우리는 말세에 내면적인 '가오'를 지키는 삶을 분투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6. 세상을 너무 교양있게, 세상에서도 칭찬받고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삶. 양 진영에서 두루두루 칭찬받고 싶어하는 내 천성, 성격적 결함들이 때로 영적 원리와 충돌한다. 구약의 내러티브는 교양없게도 자주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즉각적인 구별된 삶'을 요구하고는 영적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피곤한 그 일상마저 흐트러놓는다. 그 원리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이 드러낸 바 구별된 삶, 회심, 돌이킴과 같은 이슈에서 말씀은 기간에 유예를 두지 않는 듯 하다. 고로, 오늘도 나는 내 천성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2013/08/20 23:21 2013/08/20 23:2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메일 정리를 하다가 선교단체와 교회에서
내가 인도했던 소그룹 메일리스트를 발견했다.
나도 참 많은 소그룹을 거쳐왔구나.
솔직히 나는 소그룹을 곧잘 운영해왔다.

한때, 내가 속했던 선교단체의 아는 분이
지성은 상당히 발달했으나 사회성, 공동체성
이 부족한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을
아웃사이더로 내몰지 말고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 부류에 나를 끼워넣은 적이 있는데...

솔직히 날 지성그룹에 넣어주신 건 감사했으나
돌아보건대 내가 조직의 아웃사이더이긴 했지만
단 한번도 소그룹에서 아웃사이더였거나
맡은 소그룹을 말아먹은 적은 없었다...ㅡ,,ㅡ+

헌데 오늘 메일을 읽다보니,
그때는 그렇게 좋았던 소그룹 멤버들과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일주소에 수많은 이름들이 걸려 있는데
딱히 지속적으로 교제를 나누는 이들이... 없다...

당시에는 제2의 가족이라도 된 것 마냥
절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기도를 하고
함께 무언가를 고민하던 지인들은,
설령 그것이 어떤 조직이 원해서 임의로 나누고
일정 기간동안 운영했던 그룹이었다 하더라도
내 가치관에 따른다면 나는 이들과 여전히
절절한 관계여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저 그 당시에 잘 굴러간
십여개의 소그룹의 흔적들만 있을 뿐.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마치 초등학교 아이처럼 조직이 임의로 나누고
시간이 지나면 흩어버리는 시공간 속에서
잠시잠간 웃고 떠들다가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미숙함이 여전히 나를 따라다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SNS는 단절되었던 친구들을
굳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내어주고 친구를
맺어주고 다시 대화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지만
내가 내 인간관계를 자랑할만한 처지는 아닌 듯 하다.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나는 커서 무슨 일을 이룰까.
나는 커서 어떤 친구들과 함께 할까.
조금만 있으면 불혹이 될 나이에
불안정한 내 인격을 마주할 때마다 기분이 언짢다.
2013/07/13 23:12 2013/07/13 23:1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요즘 페북에 팥빙수 사진이 많이 올라온다.
여러 모양의 팥빙수를 보다보니 떠오른 잡생각.
보통 팥빙수는 팥과 아이스크림 그리고
몇몇 데코레이션을 위한 재료들이 얼음 위에
올라간다. 우리집 팥빙수는 이렇게 많은 걸
얹어줘요...라고 쥔장이 말하려는 것 같다.

한번은 갈은 얼음 아래쪽에 팥과 아이스크림을
넣은 사진을 봤다. 겉으로 보기엔 바닥이
짙은 갈아놓은 얼음산 같이 밋밋했다.
... 과연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맛있을까.
이런 얘길 꺼내면 대개는 후자가 포장은 별로
지만 진정한 앙꼬들이 푸짐하여 더 맛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럴 확률이 높다.

팥앙금과 아이스크림이 얼음 위에 있냐 아래에 있냐
하는 문제는 팥빙수의 철학이다.
전자는 재료를 홍보한다. 나 이만큼 올라가 있으니
당연히 섞으면 맛날 것이 아니겠냐...라는 의도다.
후자는 맛을 홍보한다. 팥빙수를 시켰는데
얼음 아래 깔린 재료들은 보이지 않아도 섞으면
이것은 '팥빙수'의 맛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

보여주는 것에서 자신감을 찾는가 보여주지 않고도
자신감을 내비치는가.
혹은,
보고서 믿는가, 보지 않고도 믿는가...의 문제다.
팥빙수의 팥의 위치에서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시각과 미각의 다양한 기호들이 있을 뿐.
하물며 한 사람과 한 집단의 스타일도 그러하지 않겠나.
2013/07/13 23:12 2013/07/13 23:1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야심차게 시작한 프로젝트 변.

며칠전 어린이집에서 앨범 신청하라고 공지글을 보냈다. 앨범가격 무려 육마넌. 나는 그래도 하려고 했으나 아내는 상술이 엿보인다 하여 신청하지 않았다. 가끔 어린이집에서 하는 활동이 고맙기도 하지만 아이의 아이다움을 저해한다는 생각도 든다. 일례로 어버이날 아이가 만든 카네이션에는 엄마 아빠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어쩌고 무슨 북한 방송 같은 이야기를.

우리 성하라면 아마도 아빠 똥꼬나 먹어... 내지는 아빠 스티커 다모으면 큰 장난감도 사줘야돼...같은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ㅋㅋㅋ 문제는 아이의 아이다움에 어른들이 윤리적인 덧칠을 해대는 것이다. 당연히 성장기에 대한 추억들도 천편일률적이다. 그저 수많은 아이들 속의 내 아이. 남들에게 처지지 않게 성장하는 내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장보고서를 나는 경제논리에 따라 비용을 주고 구입해야만 한다.

내 어릴 적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어디에 살았고, 그 때 내 친구는 누구였고 나는 어릴 때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때부터 나라는 존재는 어떤 본유의 모습을 드러냈는지가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자료는 없다. 그저 풍문 속에 전달되는 내 영유아기의 사건들. 그것조차 어른들의 가치관으로 채색된, '넌 어릴 때부터 착했지, 점잖았지, 공부를 잘했어...' 그들의 욕망에 기댄 평가들.

어차피 자료들은 자료를 선별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겠지만 나는 성하가 나중에 자신의 영유아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특징들, 그리고 자라면서 경험한 환경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그것이 10-20대에는 별 의미없는 자료일 수 있겠지만 30대에는 스스로에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유한 성격과 기질은 30대에 꽃을 피운다고 한다. 10-20대에는 여전히 주변의 눈치(환경에 적응)를 보느라 본유적 성격이 죽는 것이다.

아이에게 나는 무엇을 줄 수 있다. 얼마나 이 아이를 보호해줄 수 있나. 얼마나 이 아이가 편하게 고지를 선점하게 만들 수 있나. 그런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만들고 자기 스스로 삶을 개척할 내적인 힘을 길러주는 게 아닐까. 부모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게 해주려면 부모와 사회의 가치관이 덧칠된 기성 성장앨범들이 아닌 부모의 눈으로 자세히 관찰한 내 아이의 특징들을 잘 기록해 주는 게 정작 더 중요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아이의 성장책 첫발을 내딛는다.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 고심하며 뭔가 구조를 짜본 건 연애 이후 처음이다. 가격대 성능비가 가장 나쁜 케이스일 듯.^^ 뭐 이정도 생색을 내본다.
2013/07/13 00:20 2013/07/13 00:20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주목받지 않는 삶의 행복"이라.
페친중 한분이 쓴 표현이 유독 맘에 들었다.
솔직히 나는 살짝살짝 주목받는 삶이 좋다.
비중은 적지만 존재감이 있는 삶이 좋다.
하지만 모 아니면 도를 고르라면 나는
"주목받지 않는 삶의 행복"을 선택할 것이다.

얼마전 온라인 매체에서 내 홈페이지를
링크를 걸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보통은 어떤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편인데
... 이번에는 정중히 거절했다.
불과 5-6년전만 해도 내 블로그의 URL을
내가 출몰하는 많은 사이트에 걸어댔을 것이다.

불과 몇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SNS의 비약적인 확장과 더불어
인터넷을 대하는, 혹은 정보의 유통 자체를
바라보는 내 관점이 바뀌었다.
쉽게 말해 너무 많이 대중에게 노출될수록
구설수에 오르내릴 확률, 어떤 사건에 휘말릴 때
내가 진정성을 가지고 해명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내가 가장 주목했던 건 타블로 사건이었다.
가장 최근에는 작년 대선 때 보수진영의
조직적인 SNS 활동을 보며 그 생각을 굳혔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사적 영역의 노출이 빈번한 SNS에 뛰어든
많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도 감당할 수 없는 주목을 받다가
어떤 계기로 문제가 될 때 그 문제를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 수 없게 될 것이다.

아홉번을 행가레를 당하다가 한번의 패대기로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면 디지털 세대에 한번 "쓰여진 글"은,
아울러 한번 "이슈가 된 사건"은
마치 주홍글씨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주목받지 않는 삶의 행복", 나아가
"주목받지 않을 인간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머지않아...
2013/07/04 23:11 2013/07/04 23:1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어제 성하가 새엄마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엥?....
이유인 즉슨,
할머니, 할아버지도 나이를 먹으면 딴 곳으로 가고
엄마, 아빠도 나이를 먹으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갈테니
자기 혼자 남으면 무섭다는 것.
엄마, 아빠가 딴 곳으로 가기 전에
다른 엄마, 아빠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그런 얘기.
...
... ...
나는, 아빠는 오래 있어야 할아버지가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성하가 잠시 생각하다가,
"내가 여섯살 되면 아빠 할아버지 되잖아..."
....
야!!!!!!!!!!!!!
내년에 나 할아버지 안 된다고!!!!! 이 녀석이!!!!
ㅠㅠㅠㅠㅠㅠ
2013/07/04 00:19 2013/07/04 00:19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요즘 대형마트를 안 다닌지가 수개월이 지났다. 필요한 음식만 농협에서 구입하고 필요한 것들은 소소하게 주문하는 식으로 지내는데... 별 불편함을 모르겠다. 무엇보다 자주 지적되는 불필요한 큰 사이즈의 물건들을 구입하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이번주에 읽어야 하는 책과 읽을 책이 이미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부터 온라인 서점에다가 할인율이 높은 조합으로 책들을 세팅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책읽기가 중요하긴 하나 과잉독서가 내 삶을 바꾸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과도한 독서는 내 삶 자체를 구속한다.

더군다나 독서량과 도서구입량의 비례가 깨진지는 벌써 몇년째이니만큼 사놓고 언젠가 읽겠거니 하며 산 책들을 이제는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해서 오늘부로 스스로에게 다짐해보았다. "읽을 만큼만 책사기" 대형마트를 끊은 건 왠지 그래야할 것 같은 영역이어서였지만 도서구입은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솔직히 좋은 책을 사지 않는 것보다는 의무감으로라도 사서 어서 읽어버리는 것이 미덕 같기도 했다. 결국 그런 압박은 내 삶을 조금씩 조금씩 상아탑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미시적 반성. 오늘 드디어 결단한 "읽을 만큼만 책사기"는 오전내내 곱씹어보건대 내 일상에 긍정적인 신호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남는 돈으로 치맥을 더 먹지만 않는다면...-_-;;;
2013/06/20 23:03 2013/06/20 23:03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푸코의 '감금사회'의 표현처럼 시민들은 알아서 자체검열을 하고 공권력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었다.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부정해도 그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더라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양과 같이 흩어졌고 양과 같이 유순해졌다. 스포츠를 즐기고 주말 쇼프로와 일일 드라마, 놀이동산에서 잠시 현실의 시름을 잊고 다시 거대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 사회의 미시적 공간에 기어들어가 적절히 '기능'하다가 조금 맛나다고 소문난 집에서 연료를 보충하고 조금 일찍 기능을 멈추고 쉬는 행위에 일희일비하며 돌아와서 또다른 부속품이 될 자녀들에게 나같은 부속품이라도 되려면 경쟁에서 뒤지면 안된다고 전심으로 훈육한다.

거대기계는 그렇게 쉼없이 굴러가고 우리 삶의 목표는 이 거대기계가 멈추지 않게 만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다. 스스로가 인지하건 인지하지 않건 간에... 놀랄만한 이슈들 앞에서 무력감을 넘어 피로감마저 느껴지는 현실이 새삼 섬뜩하게 다가온다.

#2.
흥미로운 지점은 이런 것이라고 본다. 한국사회에서 많은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대할 때 역사적으로 전쟁 중이 아닌 시기에는, 조용히 튀지 않고 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나름 살만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소수를 대변하려고 들 때, '조용히 살면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다수를 계몽(enlightenment)하거나 참여(engagement)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벌어지면 관성에 길들여진 다수의 대중은 도리어 이러한 과격한 변화의 방향에 반대세력이 된다.

결국 대중은 침묵한다기보다는 체제유지세력이자 개혁에 반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공권력의 통제가 점점 개인의 시민윤리로 둔갑하고 무의식 중에 체화되는 현대의 규율체제 속에서는 더욱더 그렇게 될 것이다.

진리논쟁이 한창이던 모던사회에서는 진보는 옳고그름의 틀에서 항시 지적 승리를 거둬왔겠지만 포스트모던 담론에서 명약관화한 상황에서조차 옳고그름을 논할 때 논점을 이탈하는 수많은 노이즈들을 해결해야하는 부담이 더해졌다. 그 노이즈들을 털어내면 이미 이슈는 이슈가 아니게 된다.

진보담론에서 과거의 자잘한 승리경험에 기반한 프레임으로 사회문제를 접근하고 전략을 짤 때 나는 더욱더 대중과 멀어지고 고립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MB산성처럼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대하는 극단의 사건들이 생기지 않는 한 대중은 진보의 편이 될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페북에서 북적이는 논란과 달리 거리, 사무실 풍경의 극단적 대비를 체감하며... '우리'로 상정되는 어떤 규모의 사람들이 늪에 빠졌음을 직감한다.
2013/06/18 23:10 2013/06/18 23:10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나는 몇몇 페친들의 글들은 주요 업데이트만 받아보도록 설정해두었다. 내 성격상 친구를 끊는다는 게 참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라 친구아닌 상태가 되기 보다는 페친분들의 잦은 포스팅에 잠시 눈을 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2.
이런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이런거다. 어릴 때 사촌형이 웅변학원엘 다녔다. 정신없이 히히덕거리면서 웃다가도 친척 어른들이 "OO야 웅변 한번 해봐"라고 말하면 그 형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여 이미 외워둔 2분 정도 분량의 글을 힘주어 말했다. 그의 힘있는 목소리는 항상 똑같이 끝났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어른들은 다들 대견한 듯 박수를 보냈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라고 들릴 만큼 확신에 찬 강한 어조의 글인데 나 스스로가 도저히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 나는 그 글들을 보면서 한동안 괴로웠다. 처음엔 댓글을 달아보기도 했지만 워낙 그 주제에 대해 힘차게 외치는 분위기라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페북이라는 플랫폼은 like-centric이지 토론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갠적으로도 스트레스를 풀려고 들어와서 도리어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더.라...

 

3.
사실 오늘 내가 하고픈 이야기의 핵심은 두번째 이유인데, 무엇보다 타인의 사사로운 행위들을 너무 상습적으로 '까는' 글들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자 불편해졌다. 물론. 매체에서도 개똥녀니 OO녀, OO남 등 기괴한 행동을 하는 이들의 사진을 찍어서 공유하고 종국에는 신상을 털기까지 하는 분위기를 내 주변에서도 느끼는 스릴감이 있긴 한데...

 

솔직히 나도 뒷담화 많이 깐다. 하지만 페북에서 소소하게 마주하는 불특정 다수의 기이한 행위에 대해서는, 글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입장 바꿔 보자면 이는 내 헛짓거리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 혹은 배려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매순간을 긴장하며 실수 없이 살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에게는 상처주는 말도 하고 길거리에서 타인과 큰 소리로 떠들기도 했을 것이고 타팀의 누군가는 내 전화 한통, 회의 때 말투 하나에도 불편함을 느꼈을 수 있다.

 

누군가는 그 날(진상짓을 한 날)이 우울증에 허덕여서 걷기조차 힘들었던 날이었을 수 있다. 나를 세게 밀치고 지나간 아저씨는 부모가 급하게 수술실로 들어갔다고 전화를 받고 달려가던 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극단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때로 우리는 나 답지 않게 짜증에 뚜껑이 열리거나 심하게 피곤하여 어떤 부탁도 거절하는 날이 있다.

 

4.
한국은 서비스업종의 천국이다. 아니 인구밀도에 있어서 천국이지만 그 때문에 그 업종 종사자에겐 사실상 지옥이다. 요즘 진보언론에서 자주 회자되는 정신노동자, 백화점이나 식당, 텔레마케팅 업무를 보는 많은 이들. 그들이 한달에 대면해야 할 사람들의 수는 몇 명일까.

 

 '나'는 내 딴에는 참 소중하게 다뤄주면 좋을 존재이지만 그런 수많은 '고갱님'을 상대하는 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인 이들의 진상 행동을 우리는 굳이 지적질하고 SNS에서 사례집처럼 전파해야만 할까. 고객을 호구로 보는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개별 사례들을 모아보면 그들의 노동강도와 급여, 사회적 지위를 돌아볼 수 있다.

 

택배, 음식 배달, 전화응대, 인터넷 장애 수리 등등 하루에 할당량과 건수로 쪼임을 당하는 이들의 일상에서 그 숫자를 '개별 인격'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지 못한다. '그래,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착하게 살아야지, 기본은 지켜야지,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내 상식에 맞춰서 그를 판단한다.

 

5.
서로가 서로에게 기본은 하라고 요구하지만 그 기본이 서로가 정해놓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건드릴 경우 우리는 SNS에서 상대를 까고, 인터넷을 신고를 하고 신상을 털고, 당사자를 '괴물'로 만든다. 때로 나도 누군가에 의해 괴물이 되고 당신도 누군가에 의해 '개새끼'가 된다.

 

살면서 내가 깨달은 건, 내가 정한 정말 관대한 최소한의 룰을 깨는 다수의 사람들에 대해 매사에 지적질을 하고 그것을 이슈로 삼는 것이 참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도 일년에 수십번 넘게 내가 정한 기준대로 못 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의 - 최소 한 몇 년 간의 발자취가 - 어떤 '악한 방향'으로 계속 달려가는 이들에 대해 우리가 더 자주 이야기하고 문제삼아야 하는 게 아닐지. 쉽게 말해 '검증된 놈'을 까야지 길거리나 가게에서 만난 잘 모르는 사회적 약자들의 사소한 진상짓에다가 감정 해소를 해대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

 

 #
오늘도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언니들은 마음에 준비도 되지 않은 나에게 엄청난 속도와 논리로 보험상품을 설명한다. 어쨌든 그게 그들의 생업이다. 그 사람들의 무례함을 이끄는 힘, 그 냉혹한 사회 구조가 있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오늘도 나는 웃으며 전화를 끊고자 용쓴다... 페친들은 이런 나를 도와주시라.^^

2013/06/10 23:08 2013/06/10 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