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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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말한 대로 완전한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내가 존경하고 미국의 역사가 자랑하는 조나단 에드워즈도 내가 보기에는 목회자로서는 한쪽이 비어 있었다고 본다. 현실에서 생존의 싸움을 하고 있는 성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의 잣대를 가지고 나무라고 정죄하는 데 열을 올리는 목회자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빠의 소신이다. 나는 로버트 슐러의 목회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세미나에 참석해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목회 균형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릭 워렌이나 빌 하이벨스를 나는 존경한다. 내가 꿈도 꾸지 못하던 사역을 할 뿐 아니라, 오늘의 문화에 젖어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획기적인 프론티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목사가 청바지를 입고 설교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그들의 용기를 높이 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책을 보아 그 배경에 로버트 슐러가 숨어있다고 나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다. 놀라울 정도로 로버트의 좋은 점들을 목회의 밑거름이 되게 만드는 재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립 얀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부탁하는 것은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52쪽)

 

아버지는 가톨릭에 대해 일반적인 개신교 목회자와는 달리 매우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테레사 수녀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큰 교회에 '어느 정도' 화목한 가정까지 남들 보기에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죄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90쪽)

 

2007년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평양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맡은 아버지는 그날 수술후 당신의 몸 속에 남아 있는 한 개의 폐마저 터져나갈 듯이 '주여 살려 주시옵소소!'라는 메시지를 간절하게 외쳤습니다. 그 설교는 가장 큰 죄인인 나부터 용서해달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교인들을 잘못 가르친 목사, 나부터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오로지 비주류의 목사만이 할 수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옥한흠 목사가 죄를 지었나이다.
주여! 죄를 회개하오니 살려주시옵소서!
한국 교회가 타락한 것이 이 목사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시여!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옥한흠 목사가 죄를 지었나이다.

주여! 죄를 회개하오니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가 타락한 것이 이 목사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시여!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가 세계 제일의 교회가 되고 새벽예배가 많은 것은
목숨을 아까지 않고 충성하는 목자와 평신도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입으로만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주여주여 설교하는 목회자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모두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입니다.
거짓 목회자들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 2007년도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회 설교 중에서

 

 

그 날 집회 후 아버지의 설교를 향해 일부 사람들의 노골적인 불평이 이곳 저곳에서 들려왔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죄인인 나를 용서해 달라는 아버지의 메시지는 기독교 주류의 메시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주류의 쓴 소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류를 불쾌하게 만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115쪽)

 

그로부터 무려 이십 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던 아버지의 그 당혹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라지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목회 전반에 대한 깊은 고민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 고민의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아버지가 지향하고 붙잡은 자신의 교회론과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오는 교회의 현실이 서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교회는 커졌고 사람들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자신이 믿고 붙잡고 가던 ‘교회론’에 걸맞은 결과를 교회 속에서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 말입니다. (137-8쪽)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너무 키워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목회가 교회론과 제자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것은, 양이 많아져 버리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제가 은퇴할 때 사랑의 교회가 주일 출석 장년 교인수 이만 삼천 명, 전체 등록 교인수 오만 명, 벌써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어찌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제자훈련의 선두주자로서 교회론으로 볼 때, 그 정신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또, 교회론의 본질에서도 위선자적인 입장에 빠질 수 있어 고민이 됩니다.” (143쪽)

 

아버지가 목회를 하시며 내내 교회가 커지는 고민 속에서 하나의 돌파구로 붙잡은 길은 목숨을 건 설교 준비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나날이 늘어나는 성도가 주는 내적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길, 그나마 많은 성도들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설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45쪽)

 

“흔히들 나를 보고 매주마다 수만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느냐고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설교가 나에게 보람은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교의 부담감 때문이었다. 설교에 실망하고 돌아가는 숨은 군중들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강대상에 서고 싶지 않을 때가 없지 않았다." (146쪽)

 

아버지는 어쩌면 단 한번도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제대로 전달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은퇴할 당시 어느 방송에서 고백했듯이 자신의 부족한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설교를 통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데 대하여 성도들에게 미안해하고 하나님 앞에 송구해 했습니다. (148쪽)

 

아버지는 목사로서도 또 인간으로서도 고독했습니다. 무엇보다 설교자라는 점을 숙명적으로 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은혜에 대한 갈급함은 그를 필연적으로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고독은 아버지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였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알지 못해 그 큰 은혜를 사람에게서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사람들과 어울려 놀 여유를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무겁고 크며 거룩한 존재일수록 설교는 그에게 엄중하며 생명을 다루는 문제였습니다. 항상 자신은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말하던 아버지는 하나님과 단 둘이 대면하는 인간적 고독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채찍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기 위해 찾은 답이 어떤 의미로 아버지에게는 ‘고독’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이런 목회자의 고독을 ‘날마다 죽는 목회자’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150쪽)

 

인공호흡기를 낀 아버지는 어제 간신히 손에 들린 펜으로 이렇게 쓰셨습니다.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아마도 아버지의 진심은 이것이었을 듯 합니다. “성도들에게 미안하다.”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성도들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깊이 더 넓게 보여주지 못하는 설교자로서 미안함 뿐 아니라, 자신의 교회론과는 달리 너무도 커버린 교회 때문에 또한 성도들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아버지의 이 미안함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의 관심을 받고 있는 사랑의교회 건축 과정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교회론에 걸맞게 좀더 제대로 목회했다면 결코 더 큰 겨교회 건물을 지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더 큰 교회 건물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했습니다. (159쪽)

2013/01/23 23:30 2013/01/23 2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