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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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아직도 글을 쓸 때 연필을 깎아서 원고지에 쓰기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주 이야기하던데 사실 나는 별로 감흥이 없다. 여러 차례 말한대로 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 세대다. 처음 기고글을 썼을 때도 나는 자판을 두들겼고 지금도 노트에 글을 쓰기보다는 휴대폰이나 전자기기에 키버튼을 입력하는게 편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다.(자아비판적 의미에서...ㅠㅠ) 전자책 단말기나 태블릿 PC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간혹 관련된 글도 쓰고 기기 사용기나 최적 사양에 대해 고민하기는 하지만 나는 디지털 기기가 하나의 도구라는 점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가끔 '나는 내가 먹는 그것이다'라거나 그 유명한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어느정도 환원주의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너는 네가 구매한 그것으로 규정지어진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팽배하다.

아이패드가 내 생활패턴을 상당히 바꿔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패드가 없던 시절보다 내가 훨~씬더 생산적인 일을 하거나 에버노트 없이 종이노트를 쓰던 때보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나는 그것이 없던 시절에도 글을 썼고 일을 했고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도 지인들과 효과적으로 연락을 했고 메시지를 남겼고 은행업무를 전화로 봤다. 정작 업무의 생산성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스마트기기를 업무용도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회사보안 정책상 불편한 요소도 많지만 정작 회사 메일이나 업무 LOAD를 퇴근 후까지 가져오고 싶지는 않다!

냉정하게 말해서 IT기기의 효용에는 상당한 거품이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냥 '어른들의 장난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것도 고가의 장난감.. 우리회사 이사님이 내 아이패드를 보더니 게임만 잔뜩 깔려있는 거 아니냐고 추궁했다. 물론 게임만 잔뜩 있는 건 아니지만(그래서 살짝 버럭했지만) 사실상 아이패드가 유희적 용도가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그 지적의 의도는 옳다.

고가, 고성능 전자기기를 구입한 사람들은 하드웨어 사양이 높아서 반응속도가 빠르고 용량이 커지고 해상도가 높아졌다고들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기기적 진보가 개개인 '생각의 진보'를 도와주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2초 기다리던 게 1초가 되었다고 그 1초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6G가 32G가 되었다고 2배의 가치있는 자료들을 저장할 수 있을까. 그저 빨리 돌아가는 기기가 뽀대나게 느껴지는 것 그 자체를 즐길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희적, 자기만족적 소비의 과잉이 현대 기술의 진보에 선순환이 되고 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또한 그 선순환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입장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런 도구 없는 아날로그 방식이 더 좋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고 산 기기들에 대한 기대치와는 달리) 나라는 존재, 나의 생각의 깊이, 창조적 아이디어, 사색적 묵상 같은 것들은 아날로그건 디지털이건 간에 대체로 '도구-의존적'이지 않다는 거다. 사실 그런 일은 도구와 상관없는 별도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문제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지는 것 자체를 마치 이것과 동일시하는 정서에 있다.

나를 여전히 어린애 취급하는 어떤 아버지같은 존재가 있다면 내가 구매하는 많은 제품들에 대해 '네가 그게 왜 필요한데?'라고 물을 것이다. (나이가 드니 그런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잘만 포장하면 고급 장난감을 생산성을 돕는 도구라고 '구라'칠 수도 있다. 그런 기기들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업그레이드해주지는 않는다. 최근 몇년간 '스마트-'가 유행이다.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스마트-펜 등. 하지만 어떤 스마트- 뒤에 붙는 도구를 소유한다 하더라도 정작 본인의 '스마트'는 담보되지 않는다. 내 오랜 경험 상 그렇다.
2013/02/20 22:49 2013/02/2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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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의 칼럼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는 좋은 글이다. 반나절이 지나도 계속 그 글을 곱씹게 되고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는 측면에서 그렇다.(이 글은 15일 점심에 썼음)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나는 발화자의 맥락 또한 그 글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정희진은 알다시피 여성학자이다. 그녀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은 내가 작년에 읽은 책 중 단연 으뜸이라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책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책의 서문에도 썼듯이, 그리고 그 책에 대한 평가 중 자주 나오는 얘기가 정작 일반 여성들조차 그녀가 쓰는 여성학 글쓰기를 어렵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젠더 이론이나 페미니스트들의 글이 전반적으로 일반 여성들에게 외면당하는 것도 하나의 안타까운 현상이다.

 

대체로 내 주변 사람들은 정희진의 이 칼럼을 글쓰기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혜안으로 이해하겠지만 맥락으로 이해해 볼 때 이 칼럼은 정희진이라는 발화자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전개하는 여성학 담론의 난해한 글쓰기 '스타일'에 대한 자기변호다. 그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그런 맥락을 짚고 난 후에. 나는 살짜쿵 그 칼럼에 '딴죽'을 걸고 싶다. 정희진 선생이 칼럼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진정 쉬운 글은 내용(콘텐츠)과 주장(정치학)이 있으면서도 문장이 좋아서 읽기 편한 글을 말한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과 기존 형식이 일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글은 매우 드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쉬운 글은 없다. 소용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있을 뿐이다. 어려운 글은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글은 없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 개념어의 남발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쓴 글, 즉 잘 쓰지 못한 글이 있을 뿐이다."
 
이 본문은 1.새로운 내용과 기존 형식이 일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2.어려운 글은 어려운 게 아니라 소용이 없거나 소통의 문제가 있는 글이며 이는 잘 쓰지 못한 글이다 라는 두 가지의 명제를 갖는다. 엄밀히 말해 이 둘은 거짓이기도 하다.
 
첫째로, 새로운 내용을 기존 형식으로 쓰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여러 차례 언급한대로 (내가 아는 선에서) 강준만, 김두식, 리차드 파인만이 그런 필자 부류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내용'이라는 개념 또한 모호하다. 사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원조'는 없다. 엄밀히 말해 정희진 선생이 추구하는 소수자로서의 여성주의적 접근은 새로워서가 아니라 소수자를 옹호하고 그 안에 숨겨진 권력구도를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조차도 '새롭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새로운 형식으로만 서술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더더욱 회의적이다.
 
둘째로 어려운 글은 어려운 게 아니라 소용이 없거나 소통의 문제가 있는 글이라는, 나아가 잘 쓰지 못한 글이 어렵다는 건 정희진 선생의 '재정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어려운 글은 화자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타인의 표현이나 어구를 차용하고 그것이 불필요하게(어렵게) 독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잘 못쓴 글이 어렵다'.

 

이에 반해 내가 정의하는 '어려운 글'은 이른바 지식을 뽐낸 글이다. 비교적 단순한 주장을 하면서도 그 주장을 했던 북미, 유럽 지식인의 이름이나 개념들을 복잡하게 나열하고 각주를 달고 그 사대주의적인 정서의 도움으로 아주 단조로운 주장을 포장하는 글이다. 아주 힘들게 독해를 하고 났을 때 짜증이 밀려오는 글이다. 혹은 고사성어나 현학적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글이다. 과거 조선일보 같은 보수 신문 칼럼에 글을 쓰는 노교수들이 그런 스타일을 고수했다. 노교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영(young)교수들도 마치 자신이 노교수인 양 그런 스타일을 흉내내는 것은 더더욱 불편했다.
 
사실 '어려운 글'은 그냥 어려운 글이다. 엄밀히 말해 '어려운 글'에 어떤 부정적 이미지를 덧입히는 행위는 발화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재정의하고 싶을 때 그 표현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것이다. 결국 '쉬운 글'도 그냥 '쉬운 글'이다. 가치판단은 발화자의 맥락 속에서 생성된다. 고로 정희진 선생의 글은 짧지만 많은 생각들을 끌어내 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글이지만 정작 '쉬운 글'에 대한 일반론이라기 보다는 '정희진표' 페미니즘을 정작 어렵다고 외면하는 여성들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자 하는 국지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하나더.

정희진 선생의 글과 책들을 더 많은 여성들이 '어렵더라도' 읽기를 권한다. 그녀가 '쉬운 글'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다시 주장하지 않도록 말이다.

 

 

*정희진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2142125025&code=990100

2013/02/16 22:48 2013/02/1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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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목사의 주일 설교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상황을 잘 몰랐다가 오늘 아침 올라온 영상을 보고 하루종일 그 영상을 묵상했다. 아직 다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몇 가지를 풀어본다.

먼저 오정현 목사는 "사안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최근 불거진 논문 표절 문제를 성도들에게 사과했다. 18년전 쓴 논문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된 부분의 출처표기가 안 되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고 어쨌거나 본인의 부족함에 기인한 일이니 용서를 빈다고 했다.

더불어 이 논문 문제를 처음 제기한 분이 직접 찾아와서, 건축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면 논문 문제는 덮겠다면서 48시간 내에 사임하지 않을 시 이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통보했으며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 ...문제를 당회에 처리하도록 부탁했으니 성도들의 중보를 바란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가지가 오정현 목사의 진정한 의도가 회개, 용서라고 하기엔 상당히 껄끄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오 목사는 예배 중 여러 차례 성도들에게 송구스럽다, 죄송하다, 용서를 빈다는 표현을 쓰며 눈물로 사과했다. 힘들지만 이 환란을 잘 헤쳐나가자고 말했고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나는 오정현 목사가 이 문제를 놓고 교인들에게 용서를 구했고 교인들은 용서를 했다고 본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렇다. 사랑의교회가 오정현 목사를 문제삼지 않는한, 혹은 오정현 목사가 자신의 발로 교회를 걸어나가지 않는 한 이제 건축도 잘 이루어질 것이고 오정현 목사도 사임하지(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한국개신교회는 최근 20년간 단 한번도 교회개혁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특히 외부에서 개교회의 세습이나 기타 부정부패를 지적하여 그것이 개교회 내에 영향력을 끼친 적이 없다.

그리고, 보다 원론적으로 본다면 이처럼 담임목사가 자신의 허물을 공개하고 그것에 용서를 구하였는데 그것을 용서해주지 않을 수 없다.(물론 논문 취소와 같은 문제는 차치하고 말이다) 그의 눈물의 진정성에 대해 우리는 추측하여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가 오정현 목사에게 '악어의 눈물'이니 비열하다느니 하는 표현을 쓰게 된다면 차후에 또다른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진정성있는 회개를 해도 교회가 그것을 비아냥댈 여지 내지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나는 이점을 우려한다. 오정현 목사를 비난하기 위해 '공개 회개'에 대한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우리는 당사자가 회개를 해도 계속 그 죄를 비판하는 '외부 성도'가 된다. 이렇게 되면 오정현 목사를 용서한 사랑의교회 개교회 성도와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외부 성도간의 감정 대립과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물론 오정현 목사는 그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개교회 안에서 더 강한 신임을 얻고자 그렇게 유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추측'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최근 사건의 추이로 볼때 점점 오정현 목사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건축문제로 그동안 내우외환이 많았는데 최근 불거진 논문 표절 사건으로 주변에서는 더욱 사임 밖에 대안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사랑의교회를 사임하면 오정현 목사는 건축도 잘못이고 논문도 표절임을 인정하게 된다. 결국 그의 사임은 그 사역 전체의 부정이며 이후 재기 가능성이 희박하다.

오정현 목사는 자신의 처우를 당회에 맡겼고 별 이변이 없는 한 당회는 오목사를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도 이것을 외부에서 막으려들면 교회 내부는 더욱 오목사 사랑이 견고해질 것이며 분열과 상호비방이 커질 것이다. 최근 20년 한국교회의 전통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나는 오정현 목사의 사임이나 건축 반대가 아닌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오정현 목사의 사과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개교회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므로, 오정현 목사가 담임직을 유지하고 이끄는 사랑의교회의 복음주의권 사역들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사랑의교회의 외부 사역들에 대해서는 연합이 축소되어야 마땅하고 주변 교회와 단체들은 오정현 목사와 그 교회가 건강해졌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연합을 유예하는 것이다. 일례로 CTK 발행인을 교체하는 것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은 이 이야기는 사랑의교회에서 나오는 돈을 받지 않겠다는 얘기와 같다. 그 규모가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감수할 다른 대형교회가 필요하다. '배제'에는 '비용'이 따른다. 오정현 목사의 눈물의 사죄가 진심이라면 나또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초반에 언급한 두 가지의 껄끄러움(논문 표절이 경미하다는 해명과 사임을 종용받았다는 고발)이 여전히 내겐 그 분의 사죄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결국 개교회도 그를 용서하고 복음주의권도 그와 사랑의교회를 방기할 것이다. 이번에도 내부 고발자만 축출되고 반대의 목소리만 유명무실해질 것 같다. 내 신앙의 본산, 한국 복음주의의 현실이 그렇다.
2013/02/13 22:47 2013/02/13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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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livescribe라는 회사의 echo펜은 원래 anoto라는 스웨덴 기업의 기술이다. anoto사는 광학 카메라가 격자무늬 패턴의 노트를 통해서 정보를 읽어들이는 방식을 통해 손글씨를 디지털화하는 기술의 원 발명 기업으로 그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모든 스마트펜은 다 그 회사에 라이센스비를 지불해야 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 기술의 탁월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광학펜과 도트 격자노트로 손글씨를 디지털화하려는 기술을 개발한 것 자체가 탁월한 발명이기는 하지만 손글씨를 디지털 방식으로 입력하는 장치는 타블렛, 펜마우스 등 여러가지의 방법이 있다. 최근에는 갤럭시 노트의 경우, 자체개발한 정전식 펜으로도 손글씨를 정밀하게 쓸 수 있다.

아래의 동영상을 보면 내가 정작 지적하고 싶은 대목을 알 수 있다. livescribe사는 기개발된 스마트펜을 가지고 다른 목적, 용도에 더 적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펜에 보이스레코더를 장착하고 그것과 디지털펜을 실시간으로 싱크를 맞추면서 녹음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기할 때 외부 음성이 모두 녹음이 되고 그것을 다시 재생하거나 특정 기록 부분의 음성만 선별적으로 들을 수도 있다. 노트 필기 순서대로 음성이 따라가며 재생되는 형태로 판서 강의를 동영상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교육공학 분야에서 livescribe의 스마트펜은 획기적인 결과를 냈다. 하위 20%의 학생이 이 스마트펜을 통해 수업을 리뷰하고 나서 상위 20%의 학생으로 탈바꿈했다. 노트필기만으로 기억하지 못했던 강의를 녹음된 형태로 복습하면서 그 학업효과가 괄목할만큼 좋아진 것이다. 아래 동영상에서도, 인터뷰하는 해당 수학 교수는 100명의 학생에게 일일이 문제를 풀어주던 과거와 달리 1번의 녹음+필기로 만든 파일을 100명에게 이메일로 보냄으로써 똑같은 문제를 100번 풀지 않아도 되는 이 마법같은 펜을 극찬한다.
 
livescribe가 녹음 싱크를 맞출 생각을 하지 않았던 때의 이 스마트펜은, 그저 손글씨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회사는 이 디지털펜을 기억을 되살리는 효율적인 툴로 뒤바꿈시켜놓았다. 이것이 anato보다 livescribe가 더 탁월한 기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요소다. livescribe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대학생들을 비롯 저널리스트, 법조계, 영업 등 전문 직업인들에게 모두 400,000대의 스마트펜을 팔았다. 반면 anoto는 그간에는 노키아, 로지텍, HP, livescribe 등에 기술을 라이센싱했고 최근 ADP시리즈 제품을 내놓았다. 물론 여전히 레코딩 기능은 없었다.

ps. thanks to @Jaejin Choi

 

http://www.youtube.com/watch?v=LF1RT5OKoUU

2013/02/06 22:37 2013/02/0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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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독교인들이 육아나 운전, 인간관계 등 일상적으로 겪는 이야기들을 적다가 마지막에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로 환원 혹은 유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의 어리석음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 환원하거나 새 한마리를 살리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드는 대목은 죄많은 인간 하나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한 존재가 그들의 죄를 위해 값진 희생을 치르는, 보다 고차원적인 '유비'(analogy)가 된다.

나는 모든 일상을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공의, 정의로 환원하는 신심을 추호도 의심하지는 않으나 사실 자주 이런 글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신심으로 도약하는 모든 '개별 이야기'는 퇴색되기 때문이다. 본론은, 더 고차원적인 의미는, 더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이런 너저분한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다수가 설교욕구가 있다. 어떤 사건의 의미를 신심에 비추어 조명하고 그것을 설파하고자 한다. 그 결과로 그는 신심도 검증받고 대중의 구루 지위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들이 점점 현실의 디테일한 일상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일상을 설교거리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내 작은 일상의 깨달음을 신심으로 환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엔 챙겨서 그런 욕구를 억제한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 신앙은 어떤 고차원적인 의미로 유비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 남루한 일상 자체를 더도 덜도 말고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3/02/06 22:35 2013/02/06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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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아내가 마트에서 앵무새를 한 마리 더 사왔다. 퇴근하고 보니 아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는 게 아닌...유령같은 존재.ㅎㄷㄷ)

상황은 이랬다. 앵무새를 키우고 나서부터 청계천이나 마트에서 파는 앵무새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새끼들 수만 불려서는 파는 시스템의 희생물이란 걸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마트에 가도 애완동물(금붕어, 앵무새, 토끼 등) 코너는 피해다녔다. 그런데 지난 주에는 성하가 하도 보러가자고 해서 갔더니 앵무새가 코가 막힌 채로 그렁그렁 소리가 나는게, 겉보기에도 감기로 죽어가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

아내는 넋이 나가서 그 녀석을 단숨에 사왔고 집에서 자세히 상태를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 판단하여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에서는 X레이 등 여러 검...사를 한 후에 감기에 의한 폐렴이라고 했고, 진단서를 만들어 줄테니 병원비를 요구해보라고도 했다. 마침 그 병원에 온 사람 중 하나도 비슷한 경우를 겪었는데 마트를 상대로 이런 소동(?)을 피워도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도 전해들었다.

그 사람이 경험한 케이스를 설명하기를. 병원 치료기록을 가지고 마트에 가서 이런 애들을 가둬놓고 팔아도 되냐고 항의했더니 직원이 다른 앵무새로 바꿔주겠다고 했단다. 흠 없는 다른 '상품'으로... '다른 상품'... 그리고 마트 안에는 그런 망가진 애들(동물들)을 보관하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고 했단다. 아내는 당일 하루종일 울었고 그 앵무새를 집에 데리고 와서 지금까지 약과 끼니를 정성껏 먹여서 살리려고 애쓰는 중이다.

마트에서 파는 앵무새는 농장 같은 곳에서 직거래를 하는 것보다 40% 정도 비싸다. 게다가 그 병든 앵무새를 데리고 두번 병원을 방문했는데 그 앵무새의 비용의 몇 배가 병원비로 들었다. 지금도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상황으로 인해 아내는 나에게 계속 미안해하고 있다. (오늘도 아내는 '이혼해줄까?' 라는 문자로 사과+협박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음;;;)

아내가 '아픈 애들을 다른 걸로 바꿔주겠다고 했대'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대목에서 나도 감정이 동했다. 아내는 장기적으로 청계천이나 기타 열악한 조건에서 죽을 확률이 높은 상품들을 대량 생산해내는 곳에서는 동물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이상적으로는 동물을 '거래'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자 한다.

개가 아프면 병원에 간다. 하지만 병원비가 만만치 않다. 보험이 되지 않는 관계로 간단한 다리 수술만 해도 대략 백만원 정도가 든다. (이런 사실을 알고 길거리에 반려견들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 금붕어는 어떤가. 금붕어가 아프면 우리는 그저 지켜본다. 금붕어가 죽으면 건져내서 버린다. 토끼는 어떨까. 앵무새는?

물론 어떤 종은 살리고 어떤 종은 내버려두는 데에는 상대적인 입장 내지 가치관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큰 동물일수록 지능이 높은 녀석일수록 살리고 싶어한다. 또한, 개인의 정서 혹은 반려동물을 키워본 경험에 따라 어떤 동물은 큰 비용을 치루면서도 살리거나 고치고 싶고 어떤 동물은 그렇지않은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려동물이라는 상품을 내놓으면서 '반려'의 의미, 가치와는 무관하게 마치 장난감이나 종이컵처럼, '아 기스가 났네요. 저기 가시면 새걸로 바꿔드립니다' 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시스템 속에 고통받는 '생명체'의 아픔이 크게 다가온다. 아내에게 그랬고 이제는 나에게도 그러하다. 우리 바바는 포메라니언이라는 상품이 아니다. 프로나 이트(우리집 앵무새들)도 모란앵무라는 품종의 상품이 아니다.

지난 주에 우리집으로 온 이 앵무새도 그렇다. 부디, 이 녀석이 아내의 도움으로 건강이 잘 회복되길 기도해본다.
2013/02/06 22:33 2013/02/0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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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정현 목사와 작금의 사랑의교회 문제의 모든 책임이 원래 옥한흠 목사에게 있었다는 논지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시련과 문제가 있을 때 부수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 변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신사참배 문제로 나뉜 한국의 기독교 교파나, 흔히 로이드존스와 존스토트의 WCC에 대한 입장 차로 구분되는 복음주의의 분열에서 어느 쪽을 선택했다고 해서 반대쪽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에 나는 반대한다.

사랑의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해 옥한흠 목사는 교회로 온 성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교회를 몇 개로 쪼갤 마음을 먹지 못했다. 그것도 어찌보면 성도들에 대한 그의 애정과 걱정에 기인했다.

그는 일찍 은퇴했고 대형교회 세습 문제를 조기에 털기 위해 일찍 오정현 목사를 세웠고, 오정현 목사가 후임이 된 후 교회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정현 목사의 과는 모두 자기가 그 원인이라고 서슴없이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 나는 무엇보다 그의 '애티튜드'를 본다. 많은 사람들이 말과 글과 논리와 당위로서 어떤 대상을 비판하지만 그 사람이 되어보고 그 사람의 고충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어떤 삿대질이 나는 싫다. 그가 교회를 향해 분투하고 괴로워했던 많은 시간들을 그저 '어쨌거나 그의 책임'으로 돌리는 그 명료함이 싫다.

내가 기독교를 진리로 믿으면서까지 냉정한 결과주의적 목소리를 받아들여야 하나. 결과적으로 옥한흠과 오정현이 사랑의교회를 망치지 않았냐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좌절한다. 정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저, 나는 그 두 사람의 애티튜드가 극단적으로 갈렸다고만 말하고 싶다.

결과적으로 내 삶도 별볼일 없이 끝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신앙적으로 많은 실패와 실망감을 사람들에게 안겨줄 것이다. 굳이 내 삶을 스토킹하지 않아도 된다. 몸부림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쉽게 결과만을 재확인시켜줄 많은 이들과 나는 삶을 공유하고 싶지 않다. 부디 내 곁에서도 떠나주길 바란다.
2013/02/04 22:26 2013/02/04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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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략적인 사람이지만 때로 황당한 실수를 해서 주변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다. 갑자기 기억난 에피소드 하나. 돈 없던 대학교 시절. 학교에 도착하여 주머니를 뒤져보니 수중에 천원이 있었고, 통장 잔고는 9,800원. 젠장. 고민하다가 천원을 입금하고 만원을 뽑으면 되겠다는 잔대가리를 굴려서 현금인출기에 천원을 넣고 만원을 뽑았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영수증을 분쇄기에 넣는다는 걸 그만 영수증은 지갑에 넣고 만원짜리를 분쇄기에 넣었다.-_-;;; 황급히 지폐를 당겨보았지만 분쇄기는 마치 내게 '지금 장난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배권 빌려서 수업 끝나자마자 집에 가서 밝은 대낮부터 잠을 청한 기억이. 아... 난 그 때부터 그랬구나.
2013/01/29 23:03 2013/01/29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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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가장 절실한 건 늦잠이다. 하지만 성하가 날 가만놔두지 않는다. 애들의 심장이나 뇌에 알람시계가 들어가 있는지 7시반이면 어김없이 척척 일어나서 나를 깨운다. "성하야 아직 아침이 아니야. 좀더 자자"라고 구라를 쳐보지만 방안 어두운 커텐의 틈새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아빠 거짓말 하지마. 밖은 밝거든!!!"

대학생 때부터 직장 초반까지 나는 크고 작은 교계 이슈에 참여했다. 특히 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로 몇몇 지방교회와 광림교회, 소망교회, CCC 선교단체의 시위도 나가고 게시판에서 논쟁도 많이 했다. 처음엔 학생들만 집에서 만든 피켓을 들고 나갔다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기윤실이 합류했고 그것을 가지고도 왈가왈부하다가 기윤실에서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떨어져나왔다.

다시 지난 날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도, 나도 한때 나가서 피켓도 들었노라 생색을 내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니다. 내 '명함'으로는 썩소를 날릴 법한 더 훌륭한 분들이 주변에 넘쳐난다. 정작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이거다. 세습반대 이슈는 크게 번졌고 우리도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내가 참여했던 모든 단체의 세습이 이루어졌다. 내 생각에 사랑의교회도 정상적으로 새로운 교회당을 지을 것 같다.

레미제라블을 보며 가장 나를 자극했던 인물은 자베르다. 그도 낮은 신분 출신이며 나름 신앙심 돋는 인물이다. (내 입장에서는) 황당하게도 신의 이름으로 혁명 세력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한다. 결국 혁명을 꿈꾸던 청년 시위대는 모두 죽는다. 시민들은 잠시 그들의 선동에 마음이 동하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집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혁명이 일상과 만나면 동력을 잃는다.

아마도 자베르는 수많은 혁명 세력을 경험하고 그들의 논리나 그들의 비참한 삶의 실체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베르는 한번도 그들의 진영논리에 동화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직업이 신이 주신 소명인 것처럼 움직였다. 아우슈비치에서 유대인을 불태운 교도관들, 이라크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군병,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이스라엘 군인들, 세습이나 건축을 추진하는 교회들의 교역자들.

세상에서 거대화된 조직, 위계질서가 갖춰져 있는, 마치 컨베이어벨트 위를 흘러가는 부품들처럼 자동으로 흘러가는 프로세스를 갖는 많은 거대 구조는 쉽게 '악'으로 향한다. 그것이 '악'한 이유는 언제나 소수약자를 무시하는 방향의 효율성을 내부적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소수이자 약자를 편드는 이들의 목소리는 이미 효율적으로 잘 굴러가는 구조 속에 묻히기 쉽다. '구조'는 언제나 '개별 양심'을 이긴다. 내 짧은 경험이 그렇다.

레미제라블이 고전이 된 건 은혜를 배신하고 도둑질한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쥐어주는 한 신부의 마음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만들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떤 자기합리화나 홍보, 미사여구 등을 붙이지 않아도 타인의 마음을 녹인다. 신부의 사랑이 장발장에게, 장발장의 사랑이 자베르에게 전달되고 자베르는 자기 가치관의 흔들림을 참지 못하고 자살한다.

내가 관심있게 본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혁명의 실존적 주체는 신부요, 장발장의 값없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바꾸어 말한다면 그만큼 진영의 논리, 혁명의 저항으로는 악한 구조를 넘어서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대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가 체 게바라같은 급진적인 정서를 갖지 못한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인간적으로 신부의 용서는 보편 인간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장발장은 감옥으로 돌아가고 자베르는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 손에 피값을 치루어야 한다. 그게 정의이고 개혁이고 법치이다. 그것을 거스르는 레미제라블은 불편한 정서 속에 사람의 마음을 들쑤셔놓는다. (물론 소설의 배경에는 가난, 사회계급, 로맨스 등의 문제가 얽혀있지만) 눈을 크게 뜨고 굵은 라인으로 바라보는 이 소설의 키워드는 '불편할 정도로 값없는 용서'다. 끈질기게 나를 쫓던 적군마저도 돌이키게 만드는.

가끔 성하에게 구라를 치면서도 나는 커텐의 작은 틈을 비집고 새어나온 햇빛을 감지한다. 어둠을 몰아내고자 애쓰지 않아도 조그만 구멍으로 빛이 틈을 내면 어둠은 반전된다. 나는 일어나야 하고 아침밥을 준비하고 성하와 재밌는 아침시간을 보내야한다. 내가 아침이 아니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도 참 많은 자베르들이 있었다. 그들을 두둔하거나 그들이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나에게 적이었던, 나를 괴롭혔던 개인이나 큰 구조속의 무리들에게 나는 신부나 장발장 같은 존재였던가. 자베르가 자베르인 건 내가 그리스도의 빛이 아니기 때문은 아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4-15)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요일2:8-11)
2013/01/29 22:13 2013/01/2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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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 티베트 속담

애정하는 페친(이진오 목사님)님의 담벼락에 올라온 이 티베트 속담이라는 말을 아침부터 묵상 중이다. 쉽게 말해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없으니 너무 걱정말라는 말이다. 나름 위로가 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걱정은 '하는' 행위가 아니다. 걱정은 증상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걱정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스치듯 본 간판이나 무심결에 받은 전화, 부모의 말 한마디, 회사에서 전달된 공지, 친구의 행동... 이런 것이 내 머리 속을 복잡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현상, 증상이다.

이러한 걱정은, 심리학이 줄곳 떠들어대서 이제는 희화화되는 우리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다. 부모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고 자라면 서 주위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이들은 외부 자극에 대해 취약하지 않다. 반대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서 항시 내가 주도적으로 내 정서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다짐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쉽게 말해 후천적으로 환경에 잘 훈련된 사람들도 스트레스를 비교적 잘 이겨낸다.

이 두 극단을 제외하고나면 대체로 과거에 어떤 스트레스에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일반인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타인보다 걱정을 많이 하게되는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은 뭘 그리 걱정하냐고 걱정도 팔자라고, 과민반응하는 나를 대수롭지 않게 대하지만 유독 나는 그 걱정에서 벗어나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내면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 반대로 티베트의 속담에 기대어 걱정을 내 주도적 행위로 인식하고 걱정을 차단하려고 들면 상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 생활이 가능해진다. 매순간 자기 체면을 건다. 속은 썩어들어가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식은 땀이 나는 날도 있지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걱정이 생겼을 때 그 걱정거리에 침잠하는 것은 당연히 정신적으로 좋지 않다. 걱정거리에 돌직구를 날려 걱정하는 것은 늪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외부 자극에 평소와 달리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 경우에 내가 그것에 유달리 취약하게 느끼는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 따라서, 내 생각에 걱정을 해결하는 바른 방법은 그 이슈에 내가 평소같지 않은 '그 원인'에 돌직구를 날리는 것이다.

질병은 취약해진 몸상태로 인해 생기는 것이지 질병에 유독 집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리적인 해결은 척척인 사람들이 마음은 미봉책을 자주 쓰려고 한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 티베트 속담은 당의정과 같다. 달콤한 힐링 속에 쓰디쓴 고통만 반복될 여지를 남긴다. 내 생각은 그렇다.
2013/01/29 22:09 2013/01/29 2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