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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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라우드 기술이 유행이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핵심 개념은 이를테면 이런 거다. 고사양의 수퍼 컴퓨터가 물리적인 '어딘가'에 있는데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저가의 단말기를 통해 수퍼 컴퓨터를 빌려쓰는 것이다. 기업에서는 전직원에게 고가의 컴퓨터를 주지 않아도 되니 이득이고 IT업계에서는 무선망으로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어서 어느곳(기기)에서나 동일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최대 단점은 트래픽이 수퍼컴퓨터에 몰린다는 점이다. 매순간 수십명 수백명의 접속자들이 동일한 컴퓨터에서 작업을 하니 당연히 부하가 걸린다. 만일 수퍼 컴퓨터가 죽기라도 하면(나는 의도적으로 죽는다는 표현을 썼다) 다른 단말기들은 그냐말로 깡통이 된다. 그외에도 보안 문제가 있다. 여러 은행에 돈을 분산...관리하지 않고 한곳에 몰려있으면 도둑이 한곳을 집중해서 털면 되니까...

#2.
교계 조직 혹은 시민단체들이 대기업의 피라미드식 서열구조를 비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특히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영적을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이유에서 교계의 조직들은 대기업의 여러단계에 걸친 보고체계를 비웃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 비웃음에 동의할 수 없다.

내 경험상, 직장에서 보고체계가 여러 단계인 건 맞다. 하지만 적어도 실무자( 여기에서는 설계자)는 대리직급의 연구원이라 하더라도 회의에 나가서 자신이 방향성을 결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면에 자기 이름이 박히며 이는 최악의 경우 차량 리콜시에 책임이 그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면밀히 따져보고 검토한 자료를 토대로 결정하는 일개 대리의 방향을 특별한 이유없이 자기 팀이나 회의에 참석한 타팀의 파트장급이나 팀장이 뒤집을 수 없다.

#3.
애석하게도 내가 경험한 교계 조직들의 실무자들은 그들이 비판하는 대기업 조직보다 못한 재량권을 행사한다. 머리가 허연 분들도 교계에서는 2세대니 3세대니 하는 가신그룹에 속한다. 간사급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국장급 정도 되어도 관련 협의를 하자고 하면 나와서는 대표님에게 전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라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하다못해 문건 하나를 만들어도 국장이 쓴 문구 하나하나를 대표가 개입해서 고치는 경우도 몇번 봤다.

그런 이유로 종종 나는 교계 조직을 볼 때마다 클라우드 컴퓨팅 구조가 떠오른다. 진짜는 하나뿐 나머지 중간 관리자나 실무자는 그저 단말기에 불과하다. 아주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만을 시키고 정작 실무자, 담당자로서의 재량권은 주지 않는다. 클라우드처럼 실시간 무선 통신이되면 그나마 좋겠지만 돌아가서도 보고하고 지침을 듣기까지 꽤 오랜시간이 걸린다. 지침 자체도 두루뭉실한 경우에는 회의의 본 뜻마저 훼손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논의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4.
교계 조직의 문제는 뭔가. 말한대로 실무자들을 위시한 조직의 직급체계에 합당한 재량이나 결정권이 없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다. 담당자에게 책임을 지게하는 만큼의 재량권을 주라. 회의에 보내면 결정하게 만들라. 그게 아니라면 국장이니 차장이니 하는 명목상 직급명칭을 떼고 팀제도(팀장-팀원)로 전환하고 팀장급이 모든 결정을 주도하는 구조로 가는 게 차라리 낫다. 표리부동한 직급별 업무분장은 실무자들에게 잦은 분란과 좌절감만을 안겨준다.

물론 더 큰 문제가 있다. 교계의 대표자들은 아쉽게도 수퍼컴퓨터가 아니다. 박원순 시장이나 김성근 감독 같은 부류가 아니다. 게다가 수퍼컴퓨터가 죽거나 은퇴라도 하면 조직은 큰 혼란상황에 휩싸인다. (이는 지금도 많이 경험하는 바다.) 최선과 차선 모두 현실에 부합하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2013/03/09 22:58 2013/03/09 2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