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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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택배가 주말에도 온다. 주중에 해결이 안 되는거다. 부끄럽게도 택배가 밤에 오면 기뻤다. 퇴근하고 좀 있으면 기다리던 물건을 갖다주니 희희낙낙이다.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 나라에서 내 상품을 가져다 주기 위해 누구네 집 아빠는 밤늦게까지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인터넷을 고치고 전자제품 A/S를 한다. 사실 같은 직장인으로서 퇴근시간 이후에는 방문 서비스가 야근임을 직시해야 하는데 그게 잘 연결이 안 된다.

손학규 전 후보의 모토 '저녁이 있는 삶'... 아빠~ 하며 달려나와 아이가 안아주고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오늘 같은 날 함께 빼빼로나 입에 물고 동화책을 읽고 싶은 평범한 가정생활을. 총알배송이니 당일수리니 하는 매직같은 이야기를 현실화시켜 그것을 대한민국의 경쟁...력으로 담론화하려 한다.

편하면 싱글벙글하게 되는 우리네 삶이 아니, 내 삶이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진행되고 있다. 나또한 그것을 위해 불철주야 일한다. '내 저녁'을 버리는 것이 경쟁력이 되어버렸다.

'총알배송이고 나발이고.'

이 나라는 '타인의 저녁'을 서로가 배려해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각박하고도 견고한 사회구조가 갖춰졌다. 누군가가 해주려는 과한 서비스에 눈쌀을 찌푸릴 수 있는 시민의식이 필요할 정도로 말이다.

30분 이내에 음식을 배달해야 하는 청소년들의 알바 스쿠터들이 도로에서 부딫혀 나뒹굴고 누군가가 괴로워 자살을 해도, 빠름빠름~ 노래할 수 있는 너와 나의 멘탈... 자국민이 힘들어하면 타국민을 시켜서라도 동일한 성과를 내고자하는 글로벌 시장.

책으로만 읽던 이야기. 정서적으로, 머리속 망상 속에서만 좌파행세를 하면 되던 시기를 지나 이제 이 담론들은 점점 내 일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내 양심과 정서가 더 무뎌져야 한다고 속삭인다.

오늘도 나는 내 택배가 오고 있나 인터넷을 뒤져봤다. 어떤 사람이 내 택배를 들고 있는지, 어디쯤 내 택배가 오고 있는지, 내 택배를 든 사람의 휴대폰 번호가 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정말 우리 나라 좋은 나라지? 젠장.
2013/11/13 23:30 2013/11/1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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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요즘 젊은 사람들 스마트폰만 본다고 삿대질을 한다. 나는 이것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뭘하는지 무슨 이유에서 스마트폰에 몰입하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것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에 마냥 비판적이다.

물론 부정적인 영향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비판이 있으면 깊어져야 할 담론이 너무 간단하게 끊긴다. 만약 젊은 것들이 요목조목 스마트폰의 활용을 설명한다면 아마도 건방지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어른이 말하면 네 해야지 어디서... 한국사회의 담론은 이렇게 지위와 서열, 나이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 까라면 까야지 변명질이나 해대고 있어?

이렇게 건강한 논쟁은 어리고 지위가 낮고 서열이 아래인 사람의 구차한 변명이 되고 담론은 '비판이 가능한 서열의 존재'가 정한 이슈에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체화해야 하는 로고스로 전락한다.
2013/10/22 23:29 2013/10/22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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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의 친구들은 대체로 가짜들이다.' 페북에 정말 정성을 들이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 솔직히 유감스럽긴 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내 페친 중 오랜시간 아내의 병간호를 하신 목사님이 계시다. 대체로 내 주변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얼마나 오랜시간을 아내의 병간호로 자책과 어려움의 시간을 보냈는지 안다. 내가 그분의 책을 읽지 않고 그 분의 포스팅을 자주 보지 않는 이유는 그 고통이 나에게 전이될까봐서다. 그 일상의 어려움에 마음을 뺏기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얼마 전 그 분이 아내를 요양소로 보낼 결정을 하셨다. 더 나은 돌봄도 이유이고 목사님을 비롯한 가족이 지쳐서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결정에 대한 상당수 페친들의 반응이다. 한 줄, 두 줄의 글로 '그러시면 안 돼요', '...아내를 더 돌보셔야죠', '사모님을 그런 곳으로 보내지 마세요', '더 힘을 내세요'.

그런 직관적인 댓글을 다는 이들에게 그 목사님이 오랫동안 경험했던 일상을 넘겨주면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는 쉽사리 댓글을 쓸 엄도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음이 힘드시겠습니다...정도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써지지 않았다.

페북의 친구들은 이슈가 되는 인물들에게 자신이 바라는 이상형을 투사한다. 그리고 그가 그 이상형을 계속 유지하길 바라고 응원하고 댓글달고 칭찬하고 지지하고 아름답게 미화한다. 하지만 그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우울해하고 힘들어하고 다수가 보기에 실망스러운 행동을 할 때 더이상 '친구'일 수 없다. 때론 말 한마디를 듣고는 친구관계를 정리한다.

네 말은 쓰레기야. 네 그 한마디만 봐도 네 정체를 알겠어...
30년 넘게 살아온 내 정체를 나도 모르는데 친구라는 이름의 불특정 다수들은 어찌나 나를 잘 아는지 그 사람을 잘 아는지 모두가 인간 심리, 인간 존재의 전문가들이다. 좋아요의 남발만큼 싫어요가 아닌 넌 내 친구도 아냐의 남발이 성행한다.

페북의 친구들은 함께할 때 성장할까. 나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내 생각에 이는 마치 영어회화 학원을 다닌다고 영어가 늘지 않는 것과 같다. 회화반 수업시간에는 공부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공부한 영어가 유효한 영어인지를 네이티브를 통해 검증받을 순 있다. 그룹이 서로 대화하며 내 영어가 통하는지를 확인받을 수 있다.

페북은 공개된 공간에서 나의 사적 영역을 오픈한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하다. 내 내면이 잘 정리되어 있어야 사적공간들이 공개된 SNS에서도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단어로도 상대를 심한 좌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스스로도 자주 친구아닌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이것이 예의의 문제인지 실존적 문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페북의 친구는 상당수가 '가짜'같다. 그렇게 밖에는 그 충격적 댓글들을 이해할 수 없다.
2013/10/20 23:28 2013/10/20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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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 아빠 이제 아무데도 가지마.
(어제 놀다왔더니 심심했던 둣 ㅋㅋ)
나: 아빠 내일 회사가야 되는데?
성하: 회사도 가지마.
나: 음.. 그럼...
성하: 회사는 내가 갈거야. 알았지?
나: ^^ 그래. 성하 회사 가면 아빠 장난감도 사주라.
성하: 어. 알았어. 음, 아빠 무슨 장난감 사줄까.
나: 음... 글쎄. 무슨 장난감 살까.
성하: 아빠.
나: 응.
성하: 아빠가 사고 싶은 거 다 사줄테니까 천천히 잘 생각해봐.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내 레파토리인데)
나: 어,,,, 알았어.
성하: 집에가서 천천히 생각하고 나한테 알려줘.
나: 어,,,, 알았어. (고마워 ㅠㅠㅠㅠ)
2013/09/23 00:21 2013/09/2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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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를 하다보면 공부가 필요할 때가 많다. 특히나 답이 없는 문제들이 다반사이므로 그 답을 찾기 위해 봐야할 고전적인 문헌부터(내 경우엔 이를테면 기계진동학, 동역학 같은) 최신 기술논문, 기술동향을 알 수 있는 잡지 등

물론 루틴하게 업무를 반복적으로 처리하는 경우에도 답을 찾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단회적이거나 그 시스템에 한정된 해결책일 뿐 그 근본 귀인, 메카니즘의 이해가 없으므로 지식의 축적에는 기여하지 않는다.

대체로 내가 맡은 시스템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쓰는 시간 중 순수 공부를 하는 물리적인 시간은 얼마나 될까. 대략 맨아워의 1/5정도를 쓴다. 물론 이 분야에서 10년 가까이 일을 했으니 예전에는 더 많은 시간을 해답을 찾기 위해 썼으리라.

어쨌든. 나머지 4/5의 시간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행위 시간'이다. 내 경우엔 내가 맡은 설계 부품의 시뮬레이션과 단품, 실차 평가간의 상관성, 개선 여부, 데이터의 정리, 보고서 작성을 포함한다. 특히, 보고서는 보고 받은 이에 맞게 가공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입증된 하나의 개선안은 exemplar가 된다. 그리고 유사한 문제에 이 개선 사례를 적용하여 동일한 해결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대안이 된다. 그 대안에 의해 문제는 개선되고 시스템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종종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문제를 분석하는 것에 지나친 의의를 두는 것 같다. 혹은 날카로운 분석에 이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어떤 시스템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그 길을 누군가 죄꼬리만큼이라도 걸어가야 그것은 하나의 실행가능한 exemplar가 된다. 그 길을 누군가가 걸어가줘야 하고 스스로는 관행의 비판과 분석, 대안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물론 모든 담론은 대안이 있어야 하고 또한 스스로가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 없다. 메타 비평이나 정치 비판도 어떤 의미에서 주체나 전문가가가 아닌 이들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메타 비평도 지평을 넘나들 때 exemplar를 필요로 한다. 정치 비판에서도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본인이 걷지 않았더라도 성실히 누군가가 걸은 exemplar를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자주 담론은 스스로가 앙가주망(참여)을 요구한다.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공부하는 이들이 분명 더 나은 해답을 발견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exemplar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공부는 구조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점점더 exemplar주의자가 되어간다.
2013/09/13 23:26 2013/09/13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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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며칠 아내가 내 눈치를 본다. 다친 길고양이들을 병원치료하고 보살피느라 비용도 많이 들었고 시간도 많이 쓰고 있다. 어제는 자려고 들어가는데 한마디 했다.

"미안. 내가 무슨 이효리도 아닌데..."

어제는 흘려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빵터졌다.ㅋㅋㅋ
사실 지난주에 나도 일도 많고 약속도 많아서 주말 내내 아이보랴 집안일하랴 피곤했다. 고양이들 이야기를 해도 솔직히 귀에 안 들어왔다. 날은 덥기만 하고 일 하나 끝나면 마냥 눕고 싶고.

#2.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를 읽으면서 새삼 진보운동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진보정신의 핵심은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 처리는 그 집단이 그저 진보 이데올로기...를 수행하는 '보수집단'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이 문제가 불거지면 극우세력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선거에 패하게 된다. 이건 마치 좌파들이 득세하면 북한이 쳐들어온다, 신자유주의 경쟁에서 뒤쳐지게 된다는 우파의 논리와 묘하게 닮았다.

#3.
아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마트에서 죽어가는 앵무새들, 길을 걷다가 발견한 다리 부러진 고양이들, 그것을 지나치지 못하고 달려들어 돌보고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회복시켜서 입양시키려는 노력들.

그 와중에도 세상의 많은 길고양이들은 여전히 다리를 절고 돌아다니고 로드킬을 당하며 굶어죽기도 한다. 앵무새들과 다른 애완동물들은 마트의 한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박스 속에서 숨을 거둔다.

사실 이 미물들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 나라, 혹은 제3세계의 아이들을 후원하는 일, 홀트나 기타 여러 NGO, 국민TV나 뉴스타파 같은 진보매체의 운동들에 물질과 시간을 들여 참여하는 일.

#4.
자기계발서를 읽어보면 시간사용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은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사소한 일은 미룬다. 더 큰 일을 위해 사소한 일들은 버린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정서가 일상적으로 진보주의 안에서조차 발견된다.

어느 순간 잃어버린 진보 패거리 속의 진보 정신이랄까. 나또한 이 사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략으로서의 이율배반, 적과 싸우기 위해 적의 전략에 동화되는,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조금만 참으면 이루어진다고 '장미빛 미래'의 약속.

#5.
이 모든 일들을 하면서 정작 자신은 전혀 즐겁지 않은 아내. 게다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나에게 미안해하는 아내를 보며 나는 우울하지만 버티며 살아가는 진보정신의 현현을 본다. 더 큰 것을 위해 미물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않는 그 마음을 지지한다는 말이다.

물론 미안함과 더불어 무관심에 때론 서운해하는 아내를 보며 더 자상하게 관심을 가져주지 못하는 내 모습이 또한 미안할 때가 있다. 집에서 아내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물리적으로 소진되는 내 일상 때문에 나또한 정작 아내의 삶에 관심과 공감을 표할 여력이 없다.

아내가 열심히 그 일을 할 수 있게 내가 돕는 것. 아내의 부재를 우리 가정이 느끼지 않도록 돕는 것. 아내가 미안함 없이 작은 생명들을 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현재로선, 그게 내가 아내를 지지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게 진정 진보적인 삶이라고 믿는다.
2013/09/13 23:25 2013/09/13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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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성하와의 잠자기전 대화

성하: 아빠 왜 안경썼어?
나: 어.. 눈이 나빠져서... 왜?
성하: 아빠 결혼할거야?
나: (엥? 이건 뭔소리야? ㅋㅋㅋ)
성하: 아빠... 결혼할 때 안경썼잖아.
나: 맞아 안경 썼었어. 어떻게 알았어?
성하: 사진에서 봤어. 근데 그럼 우리집에 애기 생겨?
나: (야야... 아니거든!!!) 왜...? 아기 있음 좋겠어?...
성하: 응...
나: 너 아기 생기면 아기 더 이뻐할텐데 괜찮아?
성하: 아빠 근데 나 방학이다.
나: (짜식 비겁하게 말돌리긴...-_-;;;) 어, 그래?
성하: 아빠도 방학이지? 나 다 알아...
나: 어... 방학... 그래. (휴가거든!!!!)

이렇게 수다떨며 하루가 간다...
2013/09/13 23:24 2013/09/13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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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아버지 칠순에 낭독한 내 글을 정작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아버지가 본인이 가부장적이었다거나 '어머니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고 했다. 아내는 당일에 아버지에게 들으시면 감동하실 거라고 말했지만 슬프게도 아버지는 내 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아버지와는 사실 말하지 않음으로 이해된 어떤 부자의 정이 있었다. 이를테면 오해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언어를 사용하여 그 오해를 해결했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그렇게 평가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막내 작은 아버지 환갑 때도 술에 취해서는 "용주가 쓴 글은... 그건 아니고"라고 흘리듯 이야기했다. 그건 아니다. 휴가 때 내려가서도 아버지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원래 말을 잘 안 하시지만, 식사 시간에 혼자만의 일장연설을 한시간씩 쏟아내는 당신의 성격 상 전혀 언어화된 자기를 표하지 않는다는 건 나름의 의미,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한번도 자신의 삶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긴 잘못에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부모 자식간 그 흔한 빈말로도 "미안하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물론 그것은 평생 아버지의 이슈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나는 아버지와는 다른 삶, 다른 존재로, 혹은 반면교사의 미덕처럼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아버지와 갈등이 없었던 건 아버지가 나름대로 채워온 나-아버지의 관계의 망상을 그냥 두었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 망상을 내가 언어로 규정지었기에(깨뜨렸기) 아버지는 나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소극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그 받아들이지 못함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후회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언제고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의 삶을 내가 바라보는 시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느꼈다. 물론 아버지가 내 언어를 흔쾌히 받아들여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아내와 더불어 거의 확신에 찬 기대감. 물론 속이 상한다. 그닥 살가운 경험은 없지만 아버지는 세상에서 마음의 문을 닫고 그나마 애정을 쏟은 단 하나의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들, 나였기에. 나도 그것을 알고 있고. 이제 그 희미한 연결고리가 너덜너덜해진 느낌이다.

부자 간의 정서적 고리가 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기질에 의해 서로를 밀어내고 자신을 지켜간다. 피치못하게 너무 강한 에너지로 다가오는 타자에 대해서는 잘라내거나 그것에 압도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나 사이의 너덜너덜함은 서로가 한쪽에 압도되는 것보다 건강하다.부-자.
2013/09/13 23:23 2013/09/1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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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나는 예전엔 말을 잘 했는데 요즘은 말을 잘 못한다는 얘길했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말을 잘 한 적이 별로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말은 많고 잘 하는데ㅋㅋㅋ 강의에 대한 부담감이 큰 편이다.  차라리 글을 쓰는 건 괜찮은데 강의는 극도로 긴장하고 일주일 전부터 아내를 괴롭히고 주변에 설레발을 치고... 답잖게 과하게 징징댄다. (요즘은 이 상황 자체를 좀 즐기는 것 같기도..)

 

사실 나는 이런 류의 강의 공포증의 원인을 내 성격 때문으로 생각했다. 소심하기도 하고 다수가 모여있는 자리에서 무언가를 말해야 할 때 다소 긴장이 심한. 그런데 이 불안함, 어색함을 개선해야겠다고 내 심리상태를 곰곰이 따져본 결과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글을 쓸 때는 상당히 감정적으로 편한 상태다. 오히려 쉼을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내 생각들의 구석구석을 다 끄집어내어 그것을 논리정연하게, 혹은 시간 순으로 혹은 내가 강조할 이슈를 위해 재구성이 가능하다. 내가 모든 걸 보고 있고 내가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으니 그 상황 자체가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셈이다.

 

글과 달리 말은 즉흥적이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때로 말을 많이 하다보면 말실수나 무의식 중에 생각한 바가 툭 튀어나올 수 있다. 나를 이해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상황에 대해 여러 기제를 동원하여 설명? 해명? 할 수 있지만 내가 넣고 빼고 할 수 없이 던져지는 말들에 대해서는...

 

프란시스 쉐퍼 사상의 가장 큰 성찰점은 '자신의 가치관대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고 가정할 때 생기는 결과들을 고려해보자'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강의를 하다가 말실수를 하거나 논점을 이탈하거나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글은 내 논리정연한 완성품을 드러낼 수 있지만 말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 또는 긴장.

 

그 불안함의 이면. 그 끝까지 내려가보면 나는 청중의 기대, 청중의 평가에 신경이 곤두서 있음을 느낀다. 물론 나는 포퓰리즘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내 BEST PRACTICE를 보여주지 못해서 생기는 타인의 평가에 대해 무의식 중에도 상당한 불안해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의 불안함은 내가 후천적으로 습득한 반골 기질과 선천적 혹은 자라온 배경에서 익숙해진 모범생 기질 사이의 갈등과도 연관이 있다. 나는 다분히 어떤 기성 세대나 조직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그들이 내 생각들을 공감해주기를 기대한다. 그 공감 도구로 상당히 다듬어진 날을 쓰기를 원하는데 내게 그 도구는 글인 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말은 생각보다 사용하기가 참 까다로운 도구인 셈이다.

 

사실 강의를 불편해하는 배경에는 강의가 반복될수록 깨닫게 되는 명확한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단순하게 접근하면 소심한 성격 탓이라면 강의를 많이 할수록 더 나아져야 하는데 나는 매번 강의 직전까지 왜 이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할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이 의구심을 계속 파다보니 흘러흘러 여기까지 왔다.-_-;;;;

 

흥미롭게도 이런 생각을 끝까지 주구장창 하다보면 쉐퍼의 유명한 논점과 만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오해받으면 어쩔건데. 사람들이 내 생각을 아주 정교하게 전달받지 못해서 나를 오해하고 내 강의를 폄하하면 어쩔건데... 그러면 나는 살 수 없나. 타인에게 공감을 받지 못하면, 그것도 내 반골기질의 생각들을 타인에게 제대로 어필하지 못하면 내 인생은 멈추나...' 뭐 이런 막장 묵상...^^

2013/09/13 23:22 2013/09/1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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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가 자야할 시간에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나는 늦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림책 한 권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에서 7분. 5분 늦게 잔다고 세상이 뒤집히지 않으므로 사실 그 '금지행위'의 진짜 이유는 아빠의 귀찮음에 있다. 밥먹고 씻고 옷 갈아입고. 그 후에도 조금 놀게 해줬는데 누워서 책까지 보겠다는 아이의 요청이 심히 귀찮고 싫은 거다.(퇴근시간에 일하나 더 받은 느낌? -_-;;;)

어제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쪼잔하게 책 한권가지고... 하는 마음이 들어 흔쾌히 책을 함께 읽었다. 근데 막상 함께 책을 읽고 자기 전에 쫑알쫑알 아이와 대화를 하다보면 그 시간이 좋다. 가끔 나는 생각의 극단을 달리곤 하는데 내가 불치병이 걸려서 곧 죽게된다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장면 중 하나는 이 아이와 이렇게 - 쌍카풀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 잠들기 직전에 쫑알쫑알 나누던 대화 시간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갈대 같다. (성경묵상은 재끼고 아침에 잠간 들었던 생각...)
2013/09/13 00:21 2013/09/13 0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