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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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와 간혹 대화를 하다보면 자꾸 가르치려는 내 대화의 방식을 발견합니다. 뭔가를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자만심 때문이기도 하겠고, 그런 인격이 덜 된 마음이 아니더라도 되도록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때때로 후배가 한 마디만 던져도 두세 마디를 앞서 이야기를 해놓고 후회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나이 이십대에 멋모르고 너무 많은 말들을 뱉어낸 적이 많았다면, 삼십대에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도움이 될만한 말들만을 삼가해서 전하려고 노력하는 데에도 사실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최근에는 후배와 대화하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갑자기 후배의 나이를 떠올려보니 나이 서른. 만으로 스물아홉. 성인이 된 지 10년이고 나와의 나이 차이는 3년. 내가 이 친구의 인생에 뭐그리 자신할 것이 있다고 또다시 조금 아는 이야기들에 불쑥 불쑥 말을 막고 이리저리 입담을 풀어놓는 내 모습이 보였습니다. 혼이 나간 채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저는 제 모습을 이제서야 살펴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한 번 말하고 두 번 들으라는 옛말이 좀처럼 체화되지 않습니다. 책 한 권을 읽어도 여전히 어린 아이들이 또래 아이들에게 장난감 자랑하듯 제 지식을 뽐내고 싶어합니다.

성년을 맞이하던 날. 나는 스스로에게 이제는 나보다 어린 이에게서도 배우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내가 옳은 일은 주장하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장년의 나이에 삿대질하며 '너 몇 살이야?' 추태를 부리던 어른들을 보며, 나이 헛먹었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던 나에게서도 때로는 동일하게 후배들에게 잔소리를 펼치고 싶은 나쁜 마음을 발견합니다.
배움이 체화되면 분명 가르침의 의무를 져야함이 바른 이치이겠으나, 때로는 후배들에게서도, 배움이 모자란 이들에게서도, 경험이 부족하거나 불필요해보이는 잡담을 하는 이들 속에서도, 겸손의 미덕으로 귀담아 듣고 낮은 마음으로 그 생각의 근본을 받아들일 준비가 항시 되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십대에 품었던 그 마음을 곱씹으면서 말이지요.
2008/01/08 19:22 2008/01/0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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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d Not Taken
by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피천득 옮김)

2007/12/22 19:21 2007/12/2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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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어떠셨을까.

때때로 마음에 분노가 일지 않았을까.
사람에 실망하고 외로움에 사무치는 시간들이
일절 없었을까.

인생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죽음의 위협도 받으면서 내분과 외환 가운데에서
자신이 품었던 사람들의 비난 속에 십자가형을
받아야 했던 그에게서도 남다른 눈물과 마음의 상처로
뜬 눈으로 새운 밤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아버지의 알려주신 뜻대로 자신의 삶을
방향지었던 그의 길을, 과연 나는 걸어갈 수 있을까.
2007/12/12 19:17 2007/12/1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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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난 네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네 모습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언제나 밝고 다정다감했던 너의 낙천적인 성격.
사람들의 고민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진지하게 돌아보던 너의 모습은
항상 도전이 되곤 했다.

무엇보다 난 너의 열정이 부러울 때가 있다.
좌충우돌하긴 했지만,
항상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너의 도발적인 행동이
때론 불안정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미 나에겐 사라져버린 모습이라
더더욱 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난 너와는 다른 내 모습을 본다.
어린 왕자와 같은 순수함도
삶에 대한 열정도
이젠 내 안에서 찾기 힘든 무엇이 되어 버렸다.
항상 무언가를 재어 보고,
어떤 일이든 일단은 냉소적으로 반응하고,
사람들을 대할 때
내 선입관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인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제 난 너에게 없는 것들이 생겼다.

힘들 때마다 자주 사라져버리고
쉽게 포기했던 너와 달리
난 긴 시간동안 참아내고
시작한 일은 마무리를 짓는 집요함이 생겼다.

낙천적이고 밝은 모습은 없지만
슬픔을 광대같은 웃음으로 포장하지 않고
힘겨움과 고통을 피하려는
나약함의 그늘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지만
권위에 굴종하지 않고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함부로 말하지 않는 만큼 내 말에 책임을 지게 되었다.

난 네가 그리울 정도로
많이 어두워졌고 그만큼 나약해졌지만
그런 만큼 거짓과 잦은 포기에서 멀어지고 있다.

(2004년 어느날.)

2007/07/24 19:12 2007/07/2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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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셨다?"
/김영봉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


대학교에 다닐 때, 종종 종교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때문에 기독교에 관심이 있었지만,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질문이었습니다.

가끔 기회가 되면 저는 그 친구에게 예수님을 믿어 보라고 권하곤 했는데, 그가 한 번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야, 너희 기독교인들은 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갖다 붙이냐?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지 않니? 우리 어머님을 보고 느끼는 점인데, 밤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채어 넘어져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니, 도대체 나는 이해를 할 수 없다.” 그 때 제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궁색한 답변에 제 스스로가 멋쩍었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소식이 끊겼었는데, 몇 년 전 우연히 연락이 되어 만나 보니, 감사하게도 신앙의 길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던졌던 질문이 지금도 제 뇌리에 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너무나도 자주 만나기 때문입니다. 대화 중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입에 올릴수록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에게 갖다 붙여 해석해야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제가 만났던 한 선교사께서는 거의 매 문장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제게 믿음이 부족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얼마나 듣기에 거북하던지요!

질병에 걸리면, “하나님이 병을 주셨다”거나, “하나님이 치셨다”고 말합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셨다”거나 “하나님이 시험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몇 년 전 거대한 쓰나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을 때도,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석했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이 응답을 주셨다”,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 주셨다”, “하나님이 보여 주셨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몇 년 전에 만난 어느 부인이 생각납니다. 시카고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그 여인을, 저는 그 모친의 장례식에서 만났습니다. 처음 만나는 동양인 목사에게 그 여인은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겉으로는 유복한 중산층 백인처럼 보이는 그 여인은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여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몇 년 전에 에이즈(AIDS)로 잃었습니다. 그 아들은 동성애자였는데, 수년 동안 에이즈로 고생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엄마로서 그 고통을 견디기에 얼마나 어려웠을까 싶어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친지들이 내뱉는 위로의 말이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이 고통을 주신 겁니다”라는 위로의 말이 제일 싫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라고, 정색하며 대들곤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말 습관에 큰 불편을 느낍니다. 첫째, 많은 경우 사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질병을 앓아 보아 압니다만, 병은 대부분 저의 잘못된 생활 습관이 키우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어 무리해 놓고 병이 났는데, 왜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겁니까?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사업 확장을 해 놓고, 그로 인해 부도를 냈을 때, 왜 “하나님이 시험을 주셨다”고 말하는 겁니까? 경황없이 허둥대며 살다가 자동차 사고를 냈을 때,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느냐?”고 말하는 겁니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도 탓할 사람이 없어 하나님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압니다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렇게 어려움을 자초했을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잘 극복해 내면, 고난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혹은 “고난이 내게 오히려 유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게 병을 주셨습니다”라고 비약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삶을 오해하게 됩니다. 이 어법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조정하는 인형과 같아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되, 로봇처럼 혹은 인형처럼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용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과 방향을 가지고 계시지만, 억지로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만 인간이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는 어법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것인지요! 그런데 믿음 좋다는 사람이 이 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 생활에 대해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 영성 생활이라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손에 들린 인형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대 극단도 진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계신 것처럼, 그리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이나 우리 자신의 선택 만으로 말미암았다고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다만,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며, 그 관계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자유의지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살게 되는 동시에 가장 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나 사고 혹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우리에게 유익하게 변모됩니다. 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집트의 총리로서 형들을 만난 요셉이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 45:8). 매사를 하나님께 갖다 대는 ‘믿음 좋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맞아,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긴 것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 것도, 누명을 쓰고 감옥에 떨어졌던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거야”라고 단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형들을 시켜서 자신을 팔아넘기게 하고, 보디발의 아내를 조종하여 자신을 유혹하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악행이지만, 요셉이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때, 인간들이 그에게 행하는 모든 악행들을 하나님이 이용하셔서 결국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 내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토마스 켈리(Thomas Kelly)는, 믿는 사람은 인간사가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Testament of Devotion). 한 차원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인간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그것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 차원은 신적인, 영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하므로”(고후 5:7) 그런 차원이 있음을 믿어 알고 있습니다. 가령, 제가 어느 사람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서 더욱 중요한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저는 세례 의식에 마음을 쏟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고 해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끝마다 “하나님이…”를 반복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제3계명(“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대화 중에 최대한 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만의 독특한 어법이 생겼습니다. ‘신적 수동’(divine passive)라는 것이 그것인데, 대화 중에 하나님이 주어가 될 경우,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두지 않기 위해 수동태로 만드는 어법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셨어!”라고 말하고 싶으면, 수동태로 바꾸어, “내가 위로 받았어!”라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주어로 두고 말하다가, 혹시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 싶어 마음을 썼던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혹시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한국 교회에 신적 수동의 어법이 회복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IVP BOOKNEWS, 2007년 7-8월|제15권 제23호 통권75호)

2007/07/15 18:28 2007/07/1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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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많은 선생이 있다.
지금도 연락이 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 시점 이후로는 완전히 관계가 단절된 분들도 있다.
군복무를 병무청에서 했는데
그 때 총무과장님이 내겐 그런 분이다.

지나고 보면 참 공무원들에 대한 안좋은 감정이 많았다.
문서수발을 하던 나는 짬이 날 때마다 책읽기를 즐겼는데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고
그것을 가지고도 트집 잡는 이들이 있었다.
군대생활 쉽게 한다는 둥, 그렇게 할 일이 없냐며
노가다나 개인 심부름을 악착같이 시키는 등
괴롭히는 이들에도 여러 부류가 있었다.

그 와중에 총무과장님이 새로 전근을 왔다.
다른 과장보다는 직급이 높았으나 아직 과장을 하던 때였다.
한 며칠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보시다가
어느날 나를 불렀다.
나는 근무 시간에는 정도껏 봐라, 너 군대 생활 맞냐 하며
또 나를 괴롭힐 것이라 예상했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 반감이 이 때에도 있었던 듯..^^)

과장님이 입을 열었다.
"네 나이 때는 되도록 두꺼운 책을, 그리고 되도록 고전을 봐라.
내 나이가 되면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아.
지금은 나도 너 보는 정도의 책은 쉽게 보지만 두꺼운 책들은 이젠 볼 시간도 능력도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냐?"
과장님은 잠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다시 원복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일 봐"

이후로도 과장님은 나를 가끔씩 부르셔서
짧게 짧게 말들을 많이 해주었다. 경상도 분들 특유의 방식으로..
난 병무청에서 2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한 분량의 책들이 500페이지가 넘는 책들로
읽으면서도 고통스러운 인문학 고전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과장님의 조언이 떠오르곤 했다.
내가 대학생이라면
교양서로 추천된 인문한 고전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그 때 생겼다.

한 번은 내가 젊은 혈기로 인해 정말 난감한 경우에 처했을 때도
그 분은 친히 내 편을 들어주었고, 그 문제로 나에게 특별히 충고하지 않았다.
군복무 기간동안 그 분에 관한 이야기는 몇 개가 더 있는데 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워낙 무뚝뚝한 분이었고 또 금방 과가 바뀌어서 잊고 지냈는데
오늘 회사에서 짬을 내서 책을 읽다가 문득 책 페이지를 세는데 그 분 생각이 났다.
책 두께를 보면 생각나는 분, 내 지식의 기저를 만드는 동기를 부여한 분..
2007/06/16 19:11 2007/06/1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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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영 간사.
나는 그 사람을 복상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98년도에 복상에 쓴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썼고 나는 그에 대한 재반론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지강유철 전도사님의 제안으로 복상 독자모임을 하게 되었고 처음 모임 공지에 기숙영 간사님과 내가 지강유철 전도사님 댁으로 찾아갔다. 그렇게 기숙영 간사님과는 처음 만나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처음 나를 만나서는 내 글에 대한 좋은 말들을 해 주셨다. 사실 나는 기분은 좋았으나 당시에 나는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터라 인사치레이거니 하며 그냥 흘려 들었다.

그 이후로 담임 목사직 세습 문제로 복상도 뜨거웠고 독자 모임도 제법 많은 숫자가 모였었다. 독자 모임을 하는 동안 자주는 아니었지만 나는 기숙영 간사와 몇몇 지인과 친해져서 몇 번 정도 따로 만나서 함께 놀기도 했다. 당시 기숙영 간사님은 사랑의교회에서 선교부 간사로 섬기고 있었고 복상독자모임을 하던 시기에 연애와 결혼을 해서 한 번은 그녀의 신혼집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었다. 사실 자주 만났다거나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내게 기숙영 간사님은 청년 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겐 각별한 생각이 드는 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내가 학부 학생 때에 기숙영 간사님을 만났고, 다행히 그 분은 나를 좋은 후배로 본 것 같았다. 하루는 모임을 끝나고 나가는 참이었는데 그 분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러고는 주먹을 내게 내밀면서 "꼭 주고 싶으니 그냥 받아. 책 사서 많이 읽고 훌륭한 청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학생인 나로서는 큰 돈이었다.) 나는 극구 말렸으나 결국은 그 돈을 받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면 사람들은 오바라고 여기겠지만, 나는 그 때 나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다. 마치 정말 무가치해보이는 내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은혜처럼 그녀의 호의도 그렇게 느껴졌다. 내 생각에 기숙영 간사님이 그 당시에 무슨 그런 돈의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복학 시절에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더 여유 없이 사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고 나는 기숙영 간사님이 굳이 내게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큰 무게감을 느꼈다. 물론 나는 왜 그렇게 이 일에 큰 의미를 두는지 안다. 그 시기의 나를, 내 마음 속을, 내 내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난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복상을 위시한 교계를 기웃거리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책도 읽고 공부도 해왔고 또한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느라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배운 것들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글로든 행동으로든 무언가 큰 짐을 진 사람처럼 노력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난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기숙영 간사님의 행동에 기인한 영향이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잘난 척하기 좋아했던 나의 철없던 그 시절에, 나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내게 애정을 갖고 나에게 기대감을 가졌던 선배로서의 기숙영 간사님에 대한 자리가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로 인해 내겐 은혜를 입은 사람이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느끼는 그 정서가 심장에 박혀 있다.

이후로 나는 기숙영 간사님의 소식들을 간간이 접했다. 반갑기는 하지만 소식을 들으면 갑자기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그렇게 넘기다가 연락이 뜸해진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사실 내 인맥들이 다 그렇다. 물리적으로 점점 멀어져가고 있고 나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있다. 아니 사실, 요즘은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목표, 성취, 이름값, 영향력, 리더십과 같은 것들에 참 많이도 치중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오랜 시간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던 제자들이 생각난다. 예수님이 죽기 전까지 그의 의중을 몰랐던,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제자들과 그들을 사랑한 예수.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준 예수는 도대체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 나이가 들수록 더 그 무게감이 커지고 있다.

때때로 나는 내 글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이들이 다 내 글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혹여 내 글에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있다면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사실은 기숙영 간사라고. 부족하나마 내 손에서 쓰여진 글은 그와  같은 선배들이 베푼 후배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은 사모님이 되었고, 그 때는 숙영 누님이라고도 불렀는데 역시 간사님이 가장 익숙하다.
2007/05/21 19:05 2007/05/2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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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청구회'의 정체와 회원의 명단을 대라는 추상 같은 호령 앞에서 나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떠한 과정으로 누구의 입을 통하여 여기 이처럼 준열하게 그것이 추궁되고 있는가. 나는 이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8월의 뜨거운 폭양 속에서 아우성치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만 듣고 있었다. 나는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아득한 그리움처럼 손때 묻은 팽이 한 개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답변해주었다. '국민학교 7학년, 8학년 학생'이라는 사실을.

그후 나는 서울지방법원 8호 검사실에서 또 한번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청구회 노래'인가?"검사의 반지 낀 손에 한 장의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거기 내가 지은 우리 꼬마들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
어깨동무 동무야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밟아도 솟아나는 보리싹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
배우며 일하는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여기서 '주먹 쥐고'라는 것은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추궁을 받았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끈질긴 심문이었다.

내가 겪은 최대의 곤혹은 이번의 전 수사과정과 판결에 일관되고 있는 이러한 억지와 견강부회였다. 이러한 사례를 나는 법리해석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 그 자체의 가공할 일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는 특정한 개인의 불행과 곤혹에 그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성이 복재(伏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군법회의에서 이 '청구회 노래'의 가사를 읽도록 지시받고 '청구회'가 잡지사 '청맥사'를 의식적으로 상정하고 명명한 이름이 아니냐는 '희극적' 질문을 '엄숙히' 추궁받았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2007/04/15 18:22 2007/04/1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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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
살면서 나름대로 세운 법칙이 있다.
스스로 "도박의 법칙"이라고 이름 붙인 이 삶의 원칙은 간단하다. 조금이라도 후회하게 될 거라 생각되면 모든 걸 잃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끝까지 간다. 하지만 후회 없이 완전히 털어버리고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시작, 혹은 중간이라도 완전히 포기하고 다시는 돌아보거나 떠올리지 않는다.

가끔 내 기질이 T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이러한 원칙을 세운 후부터 줄곧 잘 지켜오고 있기 때문이다. 난 상당히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생활 기록부를 보면 어릴 땐 책임감도 약했던 것 같다. 해서 항상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마다 머뭇거리며 피하려고 하여, 결국에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일들이 많이 있었다. 어릴 땐 비겁하게도 착하고 여려서 그렇다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만들어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선택의 문제에서 잘 대처하지 못했던 나는 매사에 항상 뒤끝이 안 좋았고, 매사에 후회라는 사슬이 나를 얽어 매곤 했다.

대학교에 들어와 처음 책을 읽으면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내면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겐 새롭기도 했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너무 절실한 것이기도 했다. 어쨌건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의 삶의 태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떤 일을 마치고서 후회하게 되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깨끗이 털고 나올 수 없는 일은 후회가 남지 않게, 바닥이 보일 때까지 가서 미련이 없게 하여 후에 다시 돌아본다 해도 앙금이 남아있지 않다. 반면 마음이 어렵더라도 나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정직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부터, 내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는 어느 때라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생기고 있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절대자의 고유한 영역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삶을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하나의 과정에 대한 묘사에 불과하다. 삶에 있어서의 선택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관된 생각을 '결단'과 '의지'로 드러내도록 하는 도구인 것 같다. 자신의 생각은 선택이라는 '행동'을 통해 그 사람에게 육화(肉化)된다. 결국 그 사람의 일관성, 가치관, 삶의 진리, 태도, 미학, 헌신과 같은 소중한 것들은 그 사람이 어떤 것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의해 증명된다.
2007/04/08 18:51 2007/04/0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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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난 좌파가 아니다. 물론 나는 좌파 이론에서 동의하지 않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에 좌파가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나는 좌파가 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좌파로서의 삶을 감당할 수 없다는 한계에서 온 것이었다.

난 자본주의를 부정할 수 없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본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내 바로 앞까지 침투한 햄버거만큼이나 달콤한 것이었다. 난 버거킹의 와퍼나 스타벅스의 모카커피를 좋아한다. 아웃백의 스테이크 만큼이나 피자헛의 피자를 즐긴다.

나에게서는 좌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기지촌 지식인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만 삶의 위안을 삼을 뿐이다. 하지만, 중도우파로 자리를 잡은 나는 이제 조금씩 나의 삶을 정리해 나가려고 한다. 비판의식 못지않게 실천적 삶 또한 중요하다. 내가 신자유주의와 다국적 기업의 자본을 부정하지 못하듯이 난 여전히 삶에서 돈 냄새가 물씬 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좌파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 조금씩 그 노력을 더 해갈 것이다. 그게 내가 맥도날드 햄버거에서 포장마차 호떡으로 기호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포장마차에서 장사하는 분들은 이미 삶의 질고의 끝에 선 분들이 많다. 내가 당일에 사먹은 호떡과 오뎅의 수가 그분들의 생계에 실제적으로 절실한 수입이 된다. 요즘 자주가는 포장마차는 내 어머니 나이 정도이신 분이 장사를 하신다. 패스트푸드 점에서는 어떻게든 싸게 먹기 위해 할인카드를 챙기고 쿠폰을 모았다. 더 내는게 아까웠다. 하지만, 포장마차는 다르다. 배가 부른데도 한 개를 더 입에 넣고 되도록이면 넉넉히 드리고 싶어진다. 살이 찔 것 같다.**
2007/04/08 18:46 2007/04/08 1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