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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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교회 문화에 익숙하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밀양’은 솔직히 불편한 영화였다. 개봉 첫 주에 아내와 함께 달려가서 본 이창동 감독의 신작은 앉아 있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단지 ‘교회’를 말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은 냉소적인 시각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보여줬고 그 객관적인 잣대가 오히려 ‘교회 안’의 나를 뒤흔들었다. 극중 신애와 약국 김집사가 특히 내겐 불편한 인물이었다. 아마 내 신앙의 여정에 많지는 않아도 몇몇 ‘신애’가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김집사’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밀양’이 개봉된 이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썼다. 교계에서도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와싱톤한인교회의 김영봉 목사도 그간의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잠시 미룬 채, 이 영화를 놓고 4주간 동안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그 내용을 보충하여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한국 교회 이야기, 그리고 숨어계신 하나님, ‘비밀 햇볕’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神觀)를 풀어나간다.

먼저 저자는 ‘밀양’이라는 영화가 ‘한국 교회에 대한 뼈아픈 고발’이라고 고백한다. 특히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이청준씨가 ‘값싼 용서’를 비판하고 싶었던 점에 집중하며, 진정한 용서는 당사자의 회개와 보상, 그리고 개혁으로 이어져야 함을 지적한다. 또한 신애의 주변에 있던 교인들을 통해 한국 교회 문화에 편만한 ‘조급성’과 ‘피상성’을 직시하며 기독교인들의 친절하게 포장한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당신은 멸망할 사람이라는 전제’가 오만한 모습으로 깊게 배어 있음을 비판한다. 저자는 하나님을–한국교회의 선전과는 달리-비밀 햇볕처럼 ‘온화하게, 따뜻하게, 드러나지 않게 차분하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게,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활동하시기를 더 좋아하는 분’으로, 고난에 처한 자녀들이 그것을 회피하게 만드는 위약(僞藥)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 고난의 현실을 끌어안고 당신과 함께 그 고난을 변모시키기를 원하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과잉친절과 피상적인 모습으로 신애에게 다가간 약국 김집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상처 입고 방황하는 신애가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그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고 함께해 준 종찬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인다.

책을 놓은 지금도 한 대목이 머리 속을 맴돈다.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김 집사의 말은 진실에 가깝습니다. 다만 고난을 끌어안고 하나님과 함께 그 고난을 변모시키고 난 후에만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의 마음에 못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 아픔을 만난 사람에게 “다 주님의 뜻이야”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나를 신애에, 종찬에, 그리고 저자에 대입시키기는 쉬웠다. 하지만 ‘밀양’을 볼 때의 불편한 심기처럼 적어도 물리적 교회 안에서, 직장에서, 삶의 터전에서의 나는 ‘김집사’에 가까울 때가 많다. ‘형제’, ‘자매’, ‘하나님의 사랑’, ‘낮아짐’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의 피상성과 조급성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 문화에 젖은 내 안의 ‘김집사’가 이 책을 읽고 변화되기를 기도해 본다.(끝)

*IVP BOOK NEWS 2008년 5/6월호 기고글.

2008/05/01 01:40 2008/05/01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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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셨다?"
/김영봉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


대학교에 다닐 때, 종종 종교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때문에 기독교에 관심이 있었지만,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질문이었습니다.

가끔 기회가 되면 저는 그 친구에게 예수님을 믿어 보라고 권하곤 했는데, 그가 한 번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야, 너희 기독교인들은 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갖다 붙이냐?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지 않니? 우리 어머님을 보고 느끼는 점인데, 밤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채어 넘어져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니, 도대체 나는 이해를 할 수 없다.” 그 때 제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궁색한 답변에 제 스스로가 멋쩍었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소식이 끊겼었는데, 몇 년 전 우연히 연락이 되어 만나 보니, 감사하게도 신앙의 길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던졌던 질문이 지금도 제 뇌리에 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너무나도 자주 만나기 때문입니다. 대화 중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입에 올릴수록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에게 갖다 붙여 해석해야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제가 만났던 한 선교사께서는 거의 매 문장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제게 믿음이 부족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얼마나 듣기에 거북하던지요!

질병에 걸리면, “하나님이 병을 주셨다”거나, “하나님이 치셨다”고 말합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셨다”거나 “하나님이 시험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몇 년 전 거대한 쓰나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을 때도,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석했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이 응답을 주셨다”,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 주셨다”, “하나님이 보여 주셨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몇 년 전에 만난 어느 부인이 생각납니다. 시카고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그 여인을, 저는 그 모친의 장례식에서 만났습니다. 처음 만나는 동양인 목사에게 그 여인은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겉으로는 유복한 중산층 백인처럼 보이는 그 여인은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여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몇 년 전에 에이즈(AIDS)로 잃었습니다. 그 아들은 동성애자였는데, 수년 동안 에이즈로 고생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엄마로서 그 고통을 견디기에 얼마나 어려웠을까 싶어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친지들이 내뱉는 위로의 말이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이 고통을 주신 겁니다”라는 위로의 말이 제일 싫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라고, 정색하며 대들곤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말 습관에 큰 불편을 느낍니다. 첫째, 많은 경우 사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질병을 앓아 보아 압니다만, 병은 대부분 저의 잘못된 생활 습관이 키우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어 무리해 놓고 병이 났는데, 왜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겁니까?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사업 확장을 해 놓고, 그로 인해 부도를 냈을 때, 왜 “하나님이 시험을 주셨다”고 말하는 겁니까? 경황없이 허둥대며 살다가 자동차 사고를 냈을 때,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느냐?”고 말하는 겁니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도 탓할 사람이 없어 하나님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압니다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렇게 어려움을 자초했을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잘 극복해 내면, 고난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혹은 “고난이 내게 오히려 유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게 병을 주셨습니다”라고 비약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삶을 오해하게 됩니다. 이 어법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조정하는 인형과 같아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되, 로봇처럼 혹은 인형처럼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용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과 방향을 가지고 계시지만, 억지로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만 인간이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는 어법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것인지요! 그런데 믿음 좋다는 사람이 이 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 생활에 대해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 영성 생활이라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손에 들린 인형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대 극단도 진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계신 것처럼, 그리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이나 우리 자신의 선택 만으로 말미암았다고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다만,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며, 그 관계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자유의지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살게 되는 동시에 가장 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나 사고 혹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우리에게 유익하게 변모됩니다. 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집트의 총리로서 형들을 만난 요셉이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 45:8). 매사를 하나님께 갖다 대는 ‘믿음 좋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맞아,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긴 것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 것도, 누명을 쓰고 감옥에 떨어졌던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거야”라고 단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형들을 시켜서 자신을 팔아넘기게 하고, 보디발의 아내를 조종하여 자신을 유혹하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악행이지만, 요셉이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때, 인간들이 그에게 행하는 모든 악행들을 하나님이 이용하셔서 결국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 내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토마스 켈리(Thomas Kelly)는, 믿는 사람은 인간사가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Testament of Devotion). 한 차원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인간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그것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 차원은 신적인, 영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하므로”(고후 5:7) 그런 차원이 있음을 믿어 알고 있습니다. 가령, 제가 어느 사람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서 더욱 중요한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저는 세례 의식에 마음을 쏟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고 해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끝마다 “하나님이…”를 반복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제3계명(“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대화 중에 최대한 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만의 독특한 어법이 생겼습니다. ‘신적 수동’(divine passive)라는 것이 그것인데, 대화 중에 하나님이 주어가 될 경우,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두지 않기 위해 수동태로 만드는 어법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셨어!”라고 말하고 싶으면, 수동태로 바꾸어, “내가 위로 받았어!”라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주어로 두고 말하다가, 혹시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 싶어 마음을 썼던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혹시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한국 교회에 신적 수동의 어법이 회복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IVP BOOKNEWS, 2007년 7-8월|제15권 제23호 통권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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