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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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축하한다. 항상 행복하렴.
- 누나

 

생일축하해~~ 잘 지내는거냐?? 축하콜라 한잔 해야지!!
- 상국 옹

 

생일축하해요~ 교육 중이라 기쁨 두 배 겠구만!!ㅋㅋ
생일턱은 언제 낼꺼야? ^^
- 김장호&이동욱

 

아도라 생일을 추카추카 한단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라. 마니마니 사랑해.
- 어머니

 

근데 거북이가 죽었대. 불쌍하고 섭섭하네.
- 어머니2

 

용주군 해피버스데이투유라네^^
마눌님 미역국은 먹었남?
- 가가

 

아니 형님~!!!!!!!
이리 좋은 날 태어나셨습니까^^
덕분에 우리가 기쁨을 누립니다~~
- 진숙

 

형 생일축하해요
요즘 자주 못 뵈어서 안타깝네요ㅋ
명희 누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 창서

 

형 생신 축하드립니다~ㅋ
건강 잘 챙기시고 담에 함 바여~ ^^
- 태종

 

생일축하해요.
아가 키우느라 외출 못하는 아줌마 위로 방문 좀 해주지.ㅋ
가깝고도 먼 이웃^^
- 종임

 

오라버니 어제 연락한다는게 깜빡했네.
쪼꼼(?)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으흐흐 ^^
- 정은

2008/04/05 22:31 2008/04/0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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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머리 속에서 무언가 끄집어내려 하지만
아무 것고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나올 것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공허한 머리. 공허한 생각.
복잡해 보이는 내 머리 속은 엉킨 건지, 텅빈 건지.
2008/03/16 19:56 2008/03/1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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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간다.

바람이 분다.
시린 한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린다.
여름 끝에 선
너의 뒷모습이 차가웠던 것 같아. 다 알 것 같아.

내게는 소중했었던
잠 못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2008/03/15 18:59 2008/03/1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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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호: <그 놈 목소리>를 통해 공소시효의 문제를 제기하셨는데요. 공소시효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감독님도 "범인이 잡혀야 이 영화가 끝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박진표: "범인이 잡혀야 이 영화가 끝난다"는 말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 잊지 않을 것이다, 밝혀여야 한다, 자수해야 한다, 잡혀야 된다' 등의 굉장히 많은 의미가 들어 있다는 거죠.
천인공노할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한을 연장하거나 폐지하자, 공소시효가 지나더라도 소급입법을 시켜서 소급할 수 있도록 하자는 등의 다양한 주장들이 있는데요. 외국의 경우 공소시효가 없는 나라도 있더군요. 대부분 25년, 30년 이렇게 굉장히 길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40년대엔가 일본법을 가지고 와서 했다는데, 일본조차도 살인죄는 25년으로 늘렸죠. 우리나라가 재일 짧아요. 그거라도 늘려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구요. 그런 움직임이 이미 2년전부터 시민단체 중심으로 일어나 국회에 계류 중이에요.
이 영화의 궁극적인 목적이 공소시효에 관한 거에요. 조만간 통과되지 않겠나 싶은데, 그러면 반은 목적을 이루는 거죠. 그게 제 영화적 실험이기도 하고, 사회적 실험이기도 해요.

(인물과사상, "그놈 목소리" 감독 박진표 인터뷰 중에서)


** <죽어도 좋아>, <너는 내 운명>과 같은 영화에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거론하는 박진표 감독의 인터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런 사회 참여적인 감독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2008/03/15 18:59 2008/03/1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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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가 오리같은진 몰라도 오리 흉내는 잘 내는 편이지.
어떨 땐 너무 극단적인 것 같아.
대체로 사기꾼들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감추거든.
하지만 오리로 치면 매우 신용있고 정력적이지."

"그가 염려되세요?"

"염려된다고 말하진 않았어.
상대 마음을 읽는다고 착각하는 귀찮은 여자가 아니면 좋겠어.
그래,. 사실은 걱정돼."

"뭐가요?"

"마이크가 내가 가졌던 것들을 가졌으면 하고 바래.
난 운이 좋아서 늘 원하는 걸 잘 알지."

"이젠 가정을 꾸리잖아요."

"마이크는 자기가 백조인 줄 모르고 추한 오리로 사는 것 같아.
그앤 자신이 오리인 줄 알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겠지.
..백조를 만날 때까지.."

"백조를 찾았는지도 모르죠."

"그래.. 그런 상대를 찾았겠지."
2008/03/15 18:57 2008/03/1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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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영 간사.


나는 그 사람을 복상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98년도에 복상에 쓴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썼고 나는 그에 대한 재반론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지강유철 전도사님의 제안으로 복상 독자모임을 하게 되었고 처음 모임 공지에 기숙영 간사님과 내가 지강유철 전도사님 댁으로 찾아갔다. 그렇게 기숙영 간사님과는 처음 만나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처음 나를 만나서는 내 글에 대한 좋은 말들을 해 주셨다. 사실 나는 기분은 좋았으나 당시에 나는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터라 인사치레이거니 하며 그냥 흘려 들었다.

그 이후로 담임 목사직 세습 문제로 복상도 뜨거웠고 독자 모임도 제법 많은 숫자가 모였었다. 독자 모임을 하는 동안 자주는 아니었지만 나는 기숙영 간사와 몇몇 지인과 친해져서 몇 번 정도 따로 만나서 함께 놀기도 했다. 당시 기숙영 간사님은 사랑의교회에서 선교부 간사로 섬기고 있었고 복상독자모임을 하던 시기에 연애와 결혼을 해서 한 번은 그녀의 신혼집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었다. 사실 자주 만났다거나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내게 기숙영 간사님은 청년 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겐 각별한 생각이 드는 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내가 학부 학생 때에 기숙영 간사님을 만났고, 다행히 그 분은 나를 좋은 후배로 본 것 같았다. 하루는 모임을 끝나고 나가는 참이었는데 그 분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러고는 주먹을 내게 내밀면서 "꼭 주고 싶으니 그냥 받아. 책 사서 많이 읽고 훌륭한 청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학생인 나로서는 큰 돈이었다.) 나는 극구 말렸으나 결국은 그 돈을 받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면 사람들은 오바라고 여기겠지만, 나는 그 때 나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다. 마치 정말 무가치해보이는 내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은혜처럼 그녀의 호의도 그렇게 느껴졌다. 내 생각에 기숙영 간사님이 그 당시에 무슨 그런 돈의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복학 시절에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더 여유 없이 사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고 나는 기숙영 간사님이 굳이 내게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큰 무게감을 느꼈다. 물론 나는 왜 그렇게 이 일에 큰 의미를 두는지 안다. 그 시기의 나를, 내 마음 속을, 내 내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난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복상을 위시한 교계를 기웃거리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책도 읽고 공부도 해왔고 또한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느라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배운 것들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글로든 행동으로든 무언가 큰 짐을 진 사람처럼 노력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난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기숙영 간사님의 행동에 기인한 영향이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잘난 척하기 좋아했던 나의 철없던 그 시절에, 나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내게 애정을 갖고 나에게 기대감을 가졌던 선배로서의 기숙영 간사님에 대한 자리가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로 인해 내겐 은혜를 입은 사람이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느끼는 그 정서가 심장에 박혀 있다.

이후로 나는 기숙영 간사님의 소식들을 간간이 접했다. 반갑기는 하지만 소식을 들으면 갑자기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그렇게 넘기다가 연락이 뜸해진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사실 내 인맥들이 다 그렇다. 물리적으로 점점 멀어져가고 있고 나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있다. 아니 사실, 요즘은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목표, 성취, 이름값, 영향력, 리더십과 같은 것들에 참 많이도 치중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오랜 시간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던 제자들이 생각난다. 예수님이 죽기 전까지 그의 의중을 몰랐던,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제자들과 그들을 사랑한 예수.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준 예수는 도대체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 나이가 들수록 더 그 무게감이 커지고 있다.

때때로 나는 내 글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이들이 다 내 글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혹여 내 글에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있다면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사실은 기숙영 간사라고. 부족하나마 내 손에서 쓰여진 글은 그와  같은 선배들이 베푼 후배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2008/03/12 00:00 200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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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박스 오피스와 아카데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쾌거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찜찜했는데 얼마전 KINO라는 잡지에 실린 글이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아래에 길게 인용한 글에서 발견할 수 있겠지만 스필버그의 영화는 상황이라는 보다 광범위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 혹은 일인의 영웅화라는 전형적 미국 통속극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일인의 혁신적 행동으로 문제의 본질을 축소시키고 마치 그런 것이 현실의 다반사인 것처럼 미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그가 보여주는 사실성이란 그의 테크닉적인 차원에서의 '사실같음'이라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하고 또한 많은 현실이 그랬듯이 소수 권력의 동요가 아니라 대중의 바른 의식이 진정한 사회 개혁을 이루었다는 점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스필버그에 대한 영화잡지 KINO의 평을 들어보자.


 
피터팬 구하기, 또는 스필버그의 통과제의 (장훈 기자)
스필버그는 거의 종잡을 수 없는 술래잡기의 명수이다. <E.T>와 <칼라 퍼플>, <쉰들러 리스트>와 <쥬라기 공원>으로 우리를 완전히 따돌리는 듯 싶었던 스필버그는 이번에는 '한심한' <잃어버린 세계>가 끝나자마자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내놓았다. 스필버그는 유행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기꺼이 자기가 만든 소비의 가속도에 편승하면서 순진하고 낭만적인 휴머니즘과의 행복한 밀애를 꿈꾸었고 이것은 한 개의 꼭지점에서 그 상반된 양편으로 향하는 수직선과도 같았다.

스필버그가 가까운 미래, 공룡들의 습격이라는 하이테크 환타지에서 미국의 기원의 시대인 1800년대까지 올라가 아미스타드호 흑인반란의 역사적 사건으로 옮겨간 것은 너무나도 느닷없는 제스추어였다. 이것은 그가 93년 쥬라기 테마파크의 아수라장에서 유태인들을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부터 구해낸 한 독일인의 자서전으로 옮겨가면서 박스 오피스와 아카데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았을 때와는 또다른 문제였다. <아미스타드>의 소재가 된 아미스타드 사건은 스페인 선적인 라 아미스타드 호에서의 노예들의 선상반란으로부터 촉발되었고, 결국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의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스필버그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으면서 환타스틱한 세계들을 창조해 낸 것처럼 좀 더 진지한 영화들을 찍으면서는 무게있는 역사적 배경위에 영화를 놓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역사적인 사건의 저변에 깔려있는 권력의 역학관계 속에서 아미스타드 호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구속과 자유의 단순한 이분법 위에서 숭고한 정신을 갖춘 한 인간(강하고 지적이며 타고난 지도자로서의 싱크의 모습은 어느새 쉰들러를 닮아 있다)의 감동적인 투쟁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도식적인 구분 속에 흑백모순은 건국신화의 일부로 서로 뒤섞이며 <아미스타드>는 휴머니즘 통속극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경쟁자 제임스 카메론은 <타이타닉>으로 그의 생애의 정점에 올라섰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마치 기습을 가하는 복병처럼 다시 복귀하였다. 스필버그가 처음 2차대전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말을 꺼냈을 때 모두들 그에게 '시대착오적'이라며 경고하였고, <아미스타드>가 실패하자 경고는 비웃음이 되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28분을 포함한 2시간 40분의 영화로 환골탈퇴하였다. <쉰들러 리스트>의 미학과 <쥬라기 공원>의 SFX,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와 <아폴로13호>에서 불러 온 톰 행크스를 리믹스하여 완성시킨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목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영화라는 장르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칼라 퍼플>과 <쉰들러 리스트>를 거쳐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스필버그의 어떠한 경향위에 놓여져 있는 영화들이다. 그것은 아카데미 원로 회의로부터 어른이 되었음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스필버그의 간절한 모습과도 같다. 스필버그의 이러한 아카데미 프로젝트의 전략은 장르 안에서의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다. 스필버그에게 리얼리즘이란 언제나 장르 자체를 새롭게 혁신하는 미학이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 효과가 아니라 사실감의 효과이다. 오마하 상륙작전에서 보여지는 하드고어 영화를 보는 듯한 무자비한 전투장면에 대한 재현은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공룡을 재현하는 것과도 같다. (유태인의 학살 장면과 노예선 상의 처참한 모습, 그리고 오마하 시퀀스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스필버그가 추구하는 리얼리즘은 놀랍게도 <쥬라기 공원>의 대혼란과 궤를 같이 한다)

공룡을 리얼하게 만드는 것이 SFX의 테크놀로지였다면 전쟁을 리얼하게 만드는 것은 핸드 헬드 카메라와 사운드이다. 테크놀로지를 감상적 휴머니즘과 연결시킬 줄 아는 동시대의 거의 유일한 헐리우드 고전주의자인 스필버그는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그것을 영화의 기술적 재현수단을 통해 복원해내면서 거꾸로 환타지의 공포와 흥분을 이끌어낸다. 역사적 재현에 대한 강박관념을 떨친 스필버그는 기록사진과 영상기억 안에서 그 아우라만을 재현시키는 쪽으로 그의 관심을 돌림으로써 영화는 역사의 진정성으로부터 멀어져서 이미지의 표상화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사실감의 효과를 만들어 내는 심혈을 기울이다가 그 바탕을 이루는 역사의 구도를 지나쳐버린 스필버그는 그 인물들마저도 이미지에 잠식당하게 만들고 그 바람에 영화 속의 인물들은 실체없는 이미지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생생한 이미지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스필버그의 휴머니즘은 이러한 비참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는 인물들을 극한의 비참한 상황으로 밀어넣고 그러한 홀로코스트의 점입가경 속에서 감동을 이끌어내고자 하며 노스텔지어를 통해 이것을 강화한다.

아미스타드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고향은 하나의 원형이다. <아미스타드>에서는 고향을 떠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제 고향을 찾아가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전쟁터의 한 청년을 고향으로 귀환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낯선 곳에서 고향으로 가겠다는 하나의 의지만으로 주인공은 온갖 고초를 겪는다. 스필버그의 노스텔지어는 결국 <E.T>를 원형으로 하는 것이며, <E.T>의 키덜트 무비로의 확대 재생산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보다 더 좋은 곳은 없어'를 외치는 이 두 영화는 90년대에 우리가 만나는 <오즈의 마법사>의 뉴버전이다.

두 편의 영화는 일관된 스필버그의 아카데미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아미스타드>는 실패하였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성공하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이전까지의 스필버그 영화들에 대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 (재미있지만 진지하지 못하고 인물의 형상화나 내러티브의 형상화에 실패하였다)를 일시에 무너뜨린 것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가족의 복원이라는 절대선의 가치 앞에서) 미국의 한 평범한 가정의 막내 아들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 함께 빠져 들어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스필버그의 또다른 모색이다. 그것은 스필버그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멀리 나아간 것 같지만 동시에 단순히 세련된 화술로 말하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이 영화에서 그는 다른 두 개의 과녁을 향하는 자신의 욕망의 화살의 각을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하 생략)

(출처: 키노)

2008/03/05 18:50 2008/03/0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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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어느 한 편을 들어야 한다.
중립은 억압하는 자만 도와줄 뿐,
억압받는 자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침묵은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동조하는 것뿐,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결코 힘이 되지 못한다."

- 엘리 위젤
2008/02/18 19:28 2008/02/1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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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만인 제사장설"이 받고 있는 심각한 오해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제사장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고맙습니다만, 나에게는 제사장이 필요 없습니다. 나 혼자서 예수님과 잘 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개혁을 위한 기본 교의에 만인 제사장설을 포함시켰을 때 의도했던 바는, 그러한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이 아닌 서로를 위한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내 제사장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일을 하는 동안에 나도 당신의 제사장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제에서만큼은 다른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는 교만한 개인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그 말은 상호성의 고백이다.

(유진 피터슨, "그 길을 걸으라" 중에서)
2008/01/28 19:26 2008/01/28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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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 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출처 :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 네이버 지식iN)
2008/01/28 19:25 2008/01/28 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