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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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많은 선생이 있다.
지금도 연락이 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 시점 이후로는 완전히 관계가 단절된 분들도 있다.
군복무를 병무청에서 했는데
그 때 총무과장님이 내겐 그런 분이다.

지나고 보면 참 공무원들에 대한 안좋은 감정이 많았다.
문서수발을 하던 나는 짬이 날 때마다 책읽기를 즐겼는데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고
그것을 가지고도 트집 잡는 이들이 있었다.
군대생활 쉽게 한다는 둥, 그렇게 할 일이 없냐며
노가다나 개인 심부름을 악착같이 시키는 등
괴롭히는 이들에도 여러 부류가 있었다.

그 와중에 총무과장님이 새로 전근을 왔다.
다른 과장보다는 직급이 높았으나 아직 과장을 하던 때였다.
한 며칠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보시다가
어느날 나를 불렀다.
나는 근무 시간에는 정도껏 봐라, 너 군대 생활 맞냐 하며
또 나를 괴롭힐 것이라 예상했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 반감이 이 때에도 있었던 듯..^^)

과장님이 입을 열었다.
"네 나이 때는 되도록 두꺼운 책을, 그리고 되도록 고전을 봐라.
내 나이가 되면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아.
지금은 나도 너 보는 정도의 책은 쉽게 보지만 두꺼운 책들은 이젠 볼 시간도 능력도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냐?"
과장님은 잠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다시 원복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일 봐"

이후로도 과장님은 나를 가끔씩 부르셔서
짧게 짧게 말들을 많이 해주었다. 경상도 분들 특유의 방식으로..
난 병무청에서 2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한 분량의 책들이 500페이지가 넘는 책들로
읽으면서도 고통스러운 인문학 고전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과장님의 조언이 떠오르곤 했다.
내가 대학생이라면
교양서로 추천된 인문한 고전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그 때 생겼다.

한 번은 내가 젊은 혈기로 인해 정말 난감한 경우에 처했을 때도
그 분은 친히 내 편을 들어주었고, 그 문제로 나에게 특별히 충고하지 않았다.
군복무 기간동안 그 분에 관한 이야기는 몇 개가 더 있는데 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워낙 무뚝뚝한 분이었고 또 금방 과가 바뀌어서 잊고 지냈는데
오늘 회사에서 짬을 내서 책을 읽다가 문득 책 페이지를 세는데 그 분 생각이 났다.
책 두께를 보면 생각나는 분, 내 지식의 기저를 만드는 동기를 부여한 분..
2007/06/16 19:11 2007/06/16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