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스탠리 하우어와스는 자살을 그 행위자에 대한 판단으로 귀결시키지 말고 공동체로서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보듬어 주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로 보도록 합니다. 그는 이것을 '자살의 문법'(grammer of suiacide)이라고 명명합니다. 삶은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인데, 그 선물을 서로 나누어 줌으로써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비극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살은 그 공동체의 실패를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상처받은 연약한 영혼들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없이 그들을 또다시 지옥간다는 말로 협박한다거나 장례마저 거부하는 것은 최소한 죽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거니와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다운 행동이 아닙니다.
(김기현, "가룟 유다 딜레마" 중에서)
가사노동이 허드렛일이고 단순반복적인 지루한 일이라는 점,
그리고 그 일을 가족의 일원이 분담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가정한다면 나는 설거지를 좋아한다.
곧 날씨가 더 더워지면 설거지를 조금만 미뤄도
주방에서는 악취가 가득해진다. 날파리도 접시 사이로 날아다닌다.
돼지고기라도 먹은 날이면 기름기 가득한 그릇들로 씻을 엄두가 안난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현상임을 난 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걸 볼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일단 설거지를 시작하여 그릇을 씻기 시작하면
접시 하나 하나가 손 끝에서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하게 씻겨진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렇듯,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씻김'이 설거지의 묘미이다.
과거에 날파리가 꼬였든 곰팡이가 피었든, 접시가 붉게 물들었든 간에
설거지라는 반복적인 행위에 의해 그릇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맛깔스런 음식을 담은 채 화려하게 식탁으로 컴백한다.
나는 설거지를 통해 삶을 배운다. 사람도 이와 같다.
'씻김'을 통해 누구나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러하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우리는 자주 주변의 관심과 칭찬에 기대어 산다.
초등학교 시절,
"참 잘했어요"라고 쓰여진 도장이 공책에 찍히면
나도 모르게 내가 했던 숙제를 보고 또 보곤 했다.
대충 하려던 것도 그 전날 숙제에 찍힌 도장을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고 TV만화와 간식을 뒤로한 채
나름 열심히 몇 자 더 적던 기억이 가끔 난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대학을 가고 글을 쓰고 직장을 다녀도
주위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가던 길을 가려 하지만
때로 누군가가 "참 잘했어요"라고 내 걸어온 길에
진한 잉크로 도장을 찍어주길 기다리는 건 여전하다.
숨기고 무덤덤한 척 하지만,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지지해주고, 칭찬해주길 기대한다.
누군가의 관심과 인정, 그리고 사랑.
오늘도 나의 한 걸음은,
그들의 "참 잘했어요"로 인해 나아가는 것이다.
대학교 2학년. 군대도 가기 전인 스물 하나의 나는
캠퍼스 노천 극장에 늦은 시간 캔맥주를 사들고
친구들과 앉아 미래에 대한 넋두리를 하곤 했다.
그래,
그 땐 나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십년 후의 내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던 터라
안개 속 산 길을 걷듯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들이 내 앞에 펼쳐질 것 같은 두려움과
한 편으로는 은근히 설레는 기대감에 잠겨.
그렇게 달빛에 물든 캠퍼스 구석구석에 시선을 내려놓고
씁쓸한 맥주를 삼키듯 마시곤 했다.
희한하게 그 땐 맥주가, 지금처럼 잘 넘어가지질 않았다.
멍한 표정으로 잠시 떠올려보는 시간들.
허나 내가 알기로 프로페셔널은 '완전'하지 않은 사진은 쉽게 버린다. 그래서 프로들에게는 찍는 것도 일이지만 고르는 것도 일이다. 트리밍을 하거나 후처리를 한다 해도 어정쩡한 사진을 남겨두는 일은 거의 없다. 영화 '취화선'에서 주인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그림이나 도자기는 일말의 고민 없이 찢어버리고 깨어부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렇게 엄선한 사진은 '작품'이 되고, 이러한 작품들은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나는 그게 쉽지 않다. 자꾸 못난 사진들에 정이 간다. 포토샵을 켜서는 이렇게 저렇게 '가공'을 해본다. 이 사진은 이래서 못 지우고 저 사진은 저래서 못 지운다. 특히 인물 사진이 그렇다. 그 사람의 특징이나 내가 아는 어떤 특유의 인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사진들 앞에서 삭제 버튼을 누르는 것 자체가 곤혹스럽다. 그래서 계속 '가공'을 하고는 다시 모든 사진을 뽑는다. 내가 보기에도 내 사진은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 골고루 끼어 있고,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내 사진을 무난하다 혹은 그저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끔 모든 일에 완전한 것들만 내보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결과만을 엄선해서 나란 사람을 꾸민다면, 그러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다부진 마음을 품어 본다. 그게 처세며 자기 관리이고, 또한 직장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프로페셔널의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인물 사진을 고르는 방식처럼 내 삶에서 프로처럼 살고 싶은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 '잃어간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그런 '나태한' 방식이 내가 원하는 방향은 분명 아니니까. 하지만 어느 새 나이가 들어가고 시간 속에서 내 서툰 모습들이 익숙해져간다.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여유가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또는 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고 있는 것도 같다. 좋고 나쁨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삶에서 아마추어가 되어간다. 오늘도 나는 찍은 사진들을 살려 보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