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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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모임 때 후배들이 알려준 동영상. 이름하여 '아이유 삼촌팬의 좋은날'
보다가 완전 빵터졌다.ㅋㅋㅋㅋㅋㅋ


요즘 아이유가 대세는 대세인가보다. 아내가 아이유가 좋다면서 '내 안에 아저씨있다!'라는 충격 발언까지!
그러는 사이 우리 성하도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아이유의 '좋은 날'에 도전하기에 이른다.

아래는 성하의 아이유버전. 부끄러운지 톤이 작은 편. 끝나고도 도망가는 성.하.군.ㅋㅋ

에그, 귀여운 것.^^


(출처: Youtube)

2011/02/17 22:47 2011/02/17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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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야곱을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가다 >>> 창 43:1-34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혼자 살아간 이들에게 가족이라는 존재는 떠올리기만 해도 뭉클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다 준다. 가족은 실수나 잘못 속에서도 연을 쉽게 끊지 못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최초의 공동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가족 공동체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요셉의 가족처럼 헝클어지고 실타래가 꼬여 매듭이 굳게 잠겨버린 경우도 허다하다. 자식을 때리는 아버지, 잘못으로 형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형, 오빠, 부모를 미워하는 자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인간 관계 속의 어려움은 유년 시절 혹은 성장기의 가족으로부터 기인한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러한 가정의 문제 속에서 자신의 억울함과 과오를 명확히 구분하고 이를 되내이며 심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해야만 변화가 된다는 사실이다.

요셉은 야곱의 집안의 최대 피해자였지만 그도 과오가 있는 철부지였고 타지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내면의 질서를 잘 찾아갔다. 이 만찬은 그러한 요셉에게, 그리고 그 형제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이다. 요셉에게 기억될만한 슬픈 기억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기쁜 하루는 이 날로 기억될 것이다.

내가 가족 안에서 기쁨을 누리던 날은 언제였던가. 그 날을 기쁨의 날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가족의 문제를 내 안에서 얼마나 들여다보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내 과오와 내 상처를 얼마나 직시하고 있는가. 혹 그 날이 오더라도 나는 내면을 정리하지 못해 그 기쁜 순간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유다의 말 >>> 창 44:18-34

본문에서 유다는 떠날 때 야곱에게 맹세한 대로 야곱이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큰 상심에 빠질 것을 요셉에게 설명하고 그 대신 자신이 남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대목에서 요셉은 야곱의 가정에 찾아든 가족애를 경험했을 것이다.

레아의 아들들과 라헬의 아들들에게 생긴 반목이 자신의 죽음(죽었다고 여겼을 것)으로 인해 더 이상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아들들의 노력으로 변화되었고 이제 유다는 라헬의 남은 아들인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바꿀 것을 제안한다.

어쩌면. 요셉은 자신에게 온 해로 인하여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야곱 가정 안의 우애와 화목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을런지도 모른다. 유다의 대속적 고백에 그의 내면에 있던 억울함이 완전히 녹아내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용서는 당위적인 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생긴 울림으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가정의 실패를 돌아보고 그것을 귀감으로 삼아 유다와 같이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자인가. 나를 희생하고 공동체를 살리려는 마음을 가진 자인가. 형제들 가운데 먼저 나서서 위기에 봉착한 어린 자들을 위해 내 목숨을 담보로 걸 수 있는 자인가. 혹은 나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는 이들을 여전히 시샘하는 악한 가족원은 아닌가.


기근이 더욱 심해지다 >>> 창 47:13-26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무엇일까. 어두운 곳에 들어갔을 때 그 성품만으로도 주변을 밝게 밝히고 부패를 막는 그런 존재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품과 존재감은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감에 기인한 것이다.

본문에서 요셉은 이방 민족 애굽 땅에 임한 기근 가운데 기준 체제를 허물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구제할만한 제도를 마련한다. 가축을 팔고 남은 게 없자 땅과 몸을 팔려고 온 백성들에게 땅과 종자를 나눠주고 그 수확의 1/5만 상납케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활개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기독인이 모여있지 않은 척박한 이방의 땅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주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는 존재다.

나는 종교 울타리에서 고급 기독교 문화를 즐기는 한심한 존재는 아닌가. 더 탁월한 교회, 그룹을 찾아다니며 그 안에 매몰되어 스스로가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 공동영역 안에 스치는 빛과 소금에 묻어가고 싶어하는 자는 아닌가.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다 >>> 창 48:1-22

흔히 성경을 읽는 중에 많이 하는 오류는 서사 속에서 이적적인 요소들, 그리고 원리들을 추출해내려는 시도이다. 본문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축복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요셉의 의도와 다르게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야곱이 특별히 장자인 므낫세를 두고 에브라임을 더 축복한 일에 흥분한다.

이는 성경의 흐름을 통해서도 약속의 성취라는 대목에서 더 그럴듯하다. 북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에브라임 지파의 번성을 보며 우리는 퍼즐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이런 퍼즐맞추기를 즐기다 보면 진정 감동을 받아야 할 한 가족의 축복 장면을 놓치게 된다.

평생 가슴에 묻어둔 아들 요셉의 생존을 확인하고 그와 더불어 그의 자녀들을 보게된 야곱, 그 아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나는 일찌기 자녀를 잃은 부모들을 몇 분 알고 있다. 그들은 자녀를 잃은 날부터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 자녀의 상실은 어느 것으로도 그 어느 다른 자녀로도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이자 절망이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말년에 잃었던 아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야곱에게도 여러 기쁨이 있었겠지만 이 장면은 아마 야곱에게 있어 편하게 하나님의 품을 갈 수 있겠다는 행복에 젖은, 자신의 생에 있어 가장 기쁜 장면 중 하나였으리라. 오늘은 한 가장의 아름운 노년을 돌아보며 그 삶을 묵상해야겠다.

2011/02/16 20:32 2011/02/1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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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다 (눅 1:26-38)

아마도 우리 세대에서 마리아의 결단을 체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정서적으로나 관계적 측면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과업 중심, 목표 중심으로 세상을 보려는 측면이 있어 구속사라는 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면 아마 마리아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 순종을 당연히 여겼으리라.

마리아는 가부장적인 이스라엘에서 음행을 저지르면 공개적으로 돌로 맞아 죽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자신과 관계를 갖지 않은 요셉에게도 설명할 길이 없는 일에 대해 유대교 공동체에서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임신 사실에 대해 그녀는 감수하겠다고 순종하겠다고 말한다.

특히 그녀는 자신은 주의 종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욥처럼 하나님께 항변할 수 있었다. 정의를 내세울 수도 있었다. 자신이 여성인 사실을 알지 못하시냐고, 이런 차별과 학대의 위험에서 건져줄 것을 약속해 달라고... 정당한 요구를 천사에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모든 게 이해되진 않았지만 천사의 말에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종의 위치에서 순종을 약속드린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런 마리아의 아름다운 성품을 알고 계신 듯 하다. (28절)

하 지만 이 본문은 오독의 위험이 있다. 여성에게 전반적으로 순종적 성품, 가부장적 질서 가운데 공동체의 요구에 순응하고 종처럼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적용으로 발전하게 될 위험이 있다. 자, 마리아를 보라. 그리고 이 여성의 성품을 닮아라! 하지만 이 본문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순종하게 된 한 여성의 겸손이지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행동하라는 일반적 지침이 아니다. 한국의 남자 목사들은 이 본문에서 비복음을 전할 위험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 (눅 1:39-45)

마리아가 그 길로 엘리사벳에게 갔던 것으로 보아 누구보다 그녀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싶었던 듯 하다. 또한 엘리사벳도 마리아의 뱃속 아이의 태동을 보고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를 대번 알아채고 찬양을 올린다.

나 는 이런 영적 친구가 있는가. 나에게 일어나는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서 말하고픈 이들이 있는가. 혹은 그런 이들이 편하게 와서 나눌 수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러한 일상 속에서 엘리사벳처럼 영적인 의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로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줄 아는 사람인가.



배고픈 자들의 편이신 예수 (눅 6:1-5)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이 본문을 보면서 새롭게 상기해보고 싶은 부분은 본문의 제목처럼 "배고픈 자들의 편이신 예수님"이라는 단순 구도가 아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6장으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의 행보에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는 나병환자를 고치셨을 때와는 달리 17절 이하 중풍환자를 고쳤을 때에 자신이 '인자' 즉 예언대로  '사람의 아들'임을 드러내셨다.

누가가 병행적으로 연결해놓은 금식논쟁과 제자들의 밀이삭 먹는 행위,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신 행위는 모두 자신의 공생애를 선언하여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대목이다. 이 사건들에는 항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하게 할 수 없지 않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고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직시하도록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이 본문의 보다 깊은 의미는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어리석은 율법자들을 꾸짖는 행위를 넘어 자신이 인자, 즉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 그 사람이며 자신이 안식일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신랑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열두제자를 부르시고 그 공생애를 탄탄히 하는 것에서 이 의도는 보다 분명해지며 누가도 그런 맥락에서 이 예화들을 병행적으로 기록한 듯이 보인다.



원수를 사랑하라 (눅6:27~36)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 본문은 선을 행하라는 단순한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흔히 알려진 팔복을 설교하면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윤리관을 선포하고 있다. 이 윤리관은 선을 행하는 행위의 개선과 같은 인간의 노력이라기 보다는 그 백성이 아닌 인간이 배풀 수 없는 절대적 우위의 윤리관을 제시한다.

이러한 윤리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파격적 메시지로 제자들에게 제시된다. 본문의 가르침을 착하게 살라는 경구 정도로 인식했다면 그처럼 행할 때 겪게 되는 많은 내적 충돌로 인하여 이 잣대가 세속의 행위 잣대가 아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는 이제 공생애의 본격적인 시작에 있어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 초대받은 자인가. 이 나라의 도에 감동하는 백성인가. 혹은 이 나라 백성의 윤리관에 전율하는 것으로 제 삼자의 입장에서 팔짱끼고 방관하는 구경꾼에 불과한가.
2011/02/09 20:34 2011/02/0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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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사를 묵상함 (출 7:14-25)

전통적으로 10가지 재앙들은 이집트인들이 숭배했던 자연신들을 지칭한다는 해석이 있어 왔다. 물론 혹은, 자연적으로 홍수 전후로 일어났던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도 존재한다. 전통적인 해석이든 과학적 해석이든 어쨌거나 본문에서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이 어찌할 수 없었던 자연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신과 미신적인 방법들을 다루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변에는 항상 술사들이 있었고 그들도 나름의 마술들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일강은 이집트인들에게는 젖줄이자 그들의 기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한 나일강이 붉게 물들어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지팡이가 뱀이 되게 만드는 이전 본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술사들은 그러한 사태를 보고 자신들도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흉내낸다. 그러한 결과로 식수는 사라지고 백성들은 나일강 주변을 두루 파며 마실 물을 구한다.

오늘의 본문에서 나는 술사의 모습이 되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모세는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설명한다. 신적 존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는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고, 나일강을 붉게 만드는 표적을 보인다. 술사들은 그의 메시지를 듣고 그의 표적을 흉내내어 본다. 신적인 증거를 표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다.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때에 그 말씀의 현상들을 모방하려는 습성이 내게는 있다. 때로는 윤리적으로 착하고 모범적으로 보이기 위해, 때로는 신적 존재와 가깝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전달하고 그 말씀대로 따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술사와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때때로 그 모방에 지나치게 치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배의 형식이나 신앙 고백, 교리, 실천, 이웃 사랑의 방법, 이 모든 행위에 단순한 모방 정신이 팽배해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며 그 임재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들에 마음을 돌려야 한다. 때로는 경외감으로 가득찰 때도 있고 때로는 위로와 안위함으로 때로는 심한 죄책에 허덕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신적 존재와의 대면에서 우리는 그 분의 크심을 깨달음과 더불어 그 분에게 집중하려는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의 신적 표적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려는 행위는 다분히 부차적이며 또한 이방인이 행하는 방법이다. 술사를 보며 그 보다 한 수 위인 모세와의 대결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 메시지의 근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실존과 그 메시지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타협함 (출 8:16-32)

성경에는 하나님과 타협점을 찾으려는 인물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타협'이란 말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하나님을 시험했던 기드온이나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전날의 땀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도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했던 장면들 중의 하나이다.

본문에서 이방인인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 온 모세와 타협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본문에서 파리 재앙 이후에 그 백성들을 보내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나 제사를 허락하는 장면에서 그는 모세와 협상을 하고 있다.
문제는 파라오의 의도인데 그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보고서 놀라서 쉽게 거래를 시도하지만 그 마음 속에 지속적으로 그 백성들을 보내는 일이 탐탁치 않아 번복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정작 일이 터졌을 때는 급한 마음에 쉽게 응락하던 일들도 되돌아서면 다시 강팍한 마음으로 협상한 결과를 이행하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마음의 이면에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타협할 수 있다는 마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약속에 있어서 설령 그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다.

때 때로 우리는 심각한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바로 그날 밤' 기도 자리에서 하나님과 타협점을 찾으려는 회개 기도를 한다. 다음에는 이러지 않으리라, 사실 이러한 마음으로 실수한 것이니 좋게 봐달라는 식으로 말이다.
'바로 그날 밤'의 기도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쉽게 타협점을 찾아가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기도 언약은 쉽사리 이행되지 않을 때가 많다. 또한 그 죄의 결과들에 대해 피부에 와 닿게 심판받는 일이 생기지 않으므로 더더욱 우리는 파라오와 동일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심판의 날은 도적과 같이 오거니와, 우리는 그 때까지 통회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약시대와 달리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매순간마다 우리 안에서 바른 길을 제시하는 성령 하나님의 의도대로 자신을 내어주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일에 매진하여야 한다.
바울의 표현처럼 날마다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그 거룩한 뜻에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전쟁의 신'이란 해석을 버림 (출 14:1-14)

하워드 요더의 책을 읽기 전까지 이 본문을 읽으면서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를 "너희는 너희를 위해 싸움을 돕는 전쟁신의 힘을 보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의 책은 구약의 이런 본문들이 "너희가 피흘리며 싸움을 정당화시키지 말고 나를 대적하는 이들에 대한 심판을 내가 직접 치르도록 두라"는 의미로 이해하게 이끈다.

항상 하나님은 정의에 대한 심판자로 존재했고 항상 심판 앞에 회개를 촉구시킨다. 인간은 신의 이름으로 싸움과 피흘림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데에 능했다. 구약은 전쟁사가 아니라 구속사의 큰 흐름 가운데 해석되어야만 한다.
2011/02/07 20:34 2011/02/0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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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8)

관계가 깨어지고 나면 함께 했던 일들과 목표, 공동체의 의식마저 희미해진다.
그 좌절감과 죄책감 속에서 '나'의 인격과 사회성 모두 절름발이 신세에 처한다.
예수님은 친히 베드로에게 오셔서 깨어진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그 시점부터 다시 베드로에게 세 번을 물어보심으로
그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신다.
또한 이제까지의 온전했던 방향과 사역, 그리고 베드로의 인격마저 회복시키신다.
기독교는 도덕, 명제의 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관계와 공동체의 종교다.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상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 종교이자 진리다.
그 관계성의 회복에 예수님 사역의 본질이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일과 목표에 대한 성취감과 타인의 인정인가,
아니면 예수님 만으로 기뻐하고 한 사람을 천하보다 낫게 여기는 공동체의 기쁨인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9-10)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한 경각심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모든 문제를 환경과 권력 구도에서 야기되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해결은 내적 치유나 자기긍정, 자아성취로 대체된다.

요한은 말씀되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자신의 서신들을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로고스요 하나님이다.
예수님을 믿고 그에게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것,
구원이 자신에 대한 긍정과 확신, 그리고 치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자신의 피조물됨을 인정하는 것임을
사도 요한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매일매일의 회개가 쉽지 않다.
내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들이 많고 그 때 그 때마다
나를 의지하고 나를 강하게 하고 나에게 지혜로운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곤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리는 나에게 돌아온다.

하나님 없이, 죄에 대한 경각심없이 사는 것.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일상은 불순종의 삶에 더욱 가깝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4:12)

살면서 내가 가장 강하게 느끼는 신적 요소는
바로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슬픔과 아픔, 그리고 어두움처럼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죄된 성품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의 성품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온전한 연합이 이뤄지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충만해진다.
사랑 없이 구원, 회복, 그의 나라와 같은 기독교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들은 실상 다분히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것이다.
2011/02/07 20:33 2011/02/07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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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다 >>> 창 41:37-57

고난에는 끝이 있다. 요셉은 오랜 시련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두 아들을 얻었다. 첫째 아들 므낫세를 통해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게 하셨다’고, 둘째 에브라임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찬양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종국에까지 그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그 시련의 끝을 가늠하는 게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요셉은 자신의 시련의 끝을 어디로 인식했을까. 보디발의 집에 들어갔을 때였을까. 아니면 죄수의 신분으로 옥에 갇혔다가 관원장의 꿈해몽을 해주었을 때였을까. 만일 그 시기를 마지막으로 보았다면 그 때에 일말의 의지조차 흔들렸다면 그는 연이은 시련에 완전히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하였고 그 자체로 그는 영혼의 안식을 누렸다. 그 안식을 통해 현세의 시련들을 묵묵히 감당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련의 끝이 자신이 인식하기 전에 찾아왔음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나는 시련의 끝에 연연하는 자인가, 혹은 하나님의 임재를 삶의 매순간 고대하는 자인가.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가다 >>> 창 42:1-25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실제로 인간 관계에서 극한 시련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말이다. 복수는 복수일 뿐, 내가 당한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마음 속 뜨거운 분노는 이미 내가 분노를 키우는 게 아니라 분노가 내 영혼을 갉아먹는 상태로 변질된다.

용서가 최고의 복수가 되는 이유는 이미 시작되어 내 영혼을 무너뜨리고 있는 분노를 몰아낼 수 있음에 그 본질이 있다. 용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하나님은 그 영혼에 그 만큼의 그릇을 허락하고 마음 가운데 자기 정체성, 인격, 영혼의 성숙 혹은 승격을 보장한다. 용서의 그릇만큼 성장하고 강해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제들과 조우한다. 아마도 그는 그간 자신이 보낸 세월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자신의 자만심으로 비롯된 언행과 그로인해 몇십배 더 가혹하게 찾아온 시련에 억울함을 호소할 곳 없었던 이방생활을 돌이켰을 것이다.

요셉이 매일매일 형제들에게 복수의 칼을 갈지는 않았겠지만 형제와의 문제가 미결로 남은 것이 그의 평생의 짐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 짐은 용서를 위한 짐이었음을 우리는 이후 본문에서 확인한다.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이러한 관계의 상처와 왜곡이 있고 그로 인한 짐과 분노가 있다. 사실상 용서를 위한 '너무 늦음'은 없다. 분노를 분노로 상처준 자에게 그에 합당한 복수를 하는 길은 영원히 그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두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지금 용서할 이를 용서하고 사죄할 이에게 사죄하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분노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가장 신속한 길임을 항상 인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내가 그러하다.

 

요셉의 형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다 >>> 창 42:26-38

야곱은 레아를 얻은 후 또다시 라헬을 아내로 맞으면서 레아를 통해 많은 아들들을 얻지만 또다시 자신이 더 아끼던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을 특별히 총애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야곱은 자신의 호불호를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듯 하다.

야곱의 가정에서 레아와 라헬 사이의 보이지 않는 질투와 감정 다툼은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며 결국 형제들이 모여서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극단적인 가정 파탄으로 귀결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야곱의 가정은 내적인 문제가 큰 공동체였을 것이다.

본문에서 야곱은 비통해하며 형제들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여자를 건드린 상처를 회복하고자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이 아버지가 애정하는 아들 베냐민을 구해오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이 모든 시발점이 야곱에게 있음에도 야곱은 그 사실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듯 하다. 오히려 그는 그 원망을 그 자식들에게 돌리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애정하는 아들의 상실을 레아의 형제들에게 돌리는 무책임함을 보인다. 더불어 그 질책은 레아의 형제들의 실제적 죄의 쓴뿌리로 인해 다시 그 형제들의 마음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꽃단장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가정사의 상처들은 풀리지 않은 채 겉으로만 멀쩡한 척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불안요소는 평소엔 티가 나지 않다가 자기 자녀를 대할 때, 혹은 명절에 고향에 가서 한번씩 폭발하곤 한다. 폭발까지는 아니지만 이따금 내면의 깊은 곳에 묻어둔 시궁창 같은 침전물들이 온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부모 형제 자녀 간에는 대체로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불식간에 참으로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가정사의 상처가 내게 영향을 주었고 그 상처는 아직 진행중이라는 반증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전개함과 동일하게 야곱의 가정사를 요셉을 통해 회복하고자 하신다.

그들의 상처를 이용하여 그들을 치유하고자 계획하는 그 분의 탁월함은 구속사와 동일하게 하나님에게 의미가 있으며 항시 관심을 가졌던 부분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나의 가족사의 상처들을 돌아보고 그 문제를 해결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1/02/06 20:32 2011/02/0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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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다 >>> 창 37:12-36

본문에서 르우벤은 빌하와의 통간 이후에 아버지가 아끼는 요셉을 살리려고 많은 애를 쓴다.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은 없지만 이를 통해 장자권을 잃은 것에 낙심하고 더 나쁜 선택을 하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아버지 야곱에게 더 나은 아들이 되고자 했던 듯하다. 그의 돌이킴을 배우자. 그는 구속사의 중요한 시점에서 요셉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유다와 다말 >>> 창 38:1-30

인간관계를 맺다보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몇 차례나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악행의 구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단죄하고 그 연을 끊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혹은 명장이나 대가들은 자신의 이름에 오점을 남길 법한 사소한 흠이 보이면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한 물건을 미련없이 파기한다.

본문에서 메시아의 계보를 잇는 유다는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르우벤으로 인해 그 계보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고 그의 아들들도 그를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다.

가끔 나는 왜 이런 쓰레기 같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묵묵히 수행하시는지 의아해하곤 했다. ...그의 방법은 100% 순결하다기 보다 피조물과 관계에서조차 100% 신의를 지키고 자신의 약속을 관계 속에서 펼쳐가시려는 절대적인 선함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그럴 수 있을까. 내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그리고 내가 수차례 충고하지만 더 깊은 악행의 실타래 속으로 빠져드는 인간 관계에서 묵묵히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이들에게 선함을 보일 수 있을까. 혹은, 하나님 앞에 나는 악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망스런 존재는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타인에게조차 고통을 주며 반복적인 악한 습관을 끊지 못하는 악한 존재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 >>> 창 39:1-6

보디발은 노예인 요셉을 지켜보면서 그를 주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는 요셉을 신뢰하게 되어서 노예신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재산 관리 일체를 그에게 맡겼다.

중 요한 것은 나의 위기 관리 능력이나 나의 지식, 정보력과 같은 후천적인 노력보다, 최우선적으로 내가 하나님이 돌보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을 형성하는 근본이 될 것이다.

본문의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에 의해 훈련시키는 존재이므로 내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내 주변에 물질적인 부나 명예를 동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오독이 될 수 있겠다.
...
하지만 어떤 의미로든 내가 속한 주변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는 역할은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할, 혹은 드러내야할 주된 정체성이 아닐까. 내 주변은 나로 인해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그게 오늘의 묵상이자 적용점이 아닐런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 >>> 창 39:7-23

유혹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요소는 반복적인 경우이다. 또한 이 유혹이 자만과 결합되면 시너지 효과를 크게 발휘한다. 요셉의 나이를 예상할 때 그 시기에 요셉에게 닥친 성적 유혹은 꽤 컸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자기 주인의 여자가 반복적으로 성적 매력을 과시할 것을 요청하는 부분에서 요셉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색옷을 입은 채 꿈얘기를 통해 자신의 특별함을 형들에게 과시하던 철없는 아이에서 이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에게 주어진 노예의 길 속에서도 그 고단한 일상에서도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청년이 되었다. 그는 마치 태초의 유혹인 유일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던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존재처럼 자신에게 제한된 단 하나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임을 명확하게 인식했다.(9절)

그의 선한 행동은 도리어 오해와 누명이라는 나쁜 결과로 돌아왔고 노예에서 죄수로 더 견디기 힘든 위치에 봉착한다. 요셉은 아버지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자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높은 자라고 은근 여기던 철부지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 가운데 노예에서 오명을 얻은 죄수로 곤두박질치는 인생의 혼란기에도 묵묵히 그의 할 일을 해나간다.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애굽의 총리로 훈련시키는 것이었겠지만 요셉은 그 미래를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힘든 일상에서 최선을 다한다.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느끼는 순간에 나는 어떠했던가. 욥기를 떠올리며 하나님과 담판을 짓고 싶어하지는 않았던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보단 내 자존심에 상처받고 내 처지를 비관하며 그것에서 헤어나오기 급급하며 살아오진 않았던가. 고난과 고통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성글은 길을 바라보지 않고 다르싯으로 도피하는 요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다 >>> 창 41:1-36

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꿈해몽을 한 게 알려져 애굽의 최고권력자인 바로 앞까지 서게 된다. 요셉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바로의 마음에 근심을 더하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낸다.

하지만 요셉은 그에 더하여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라는 치정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

요셉은 노예의 신분으로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신뢰를 얻어 그 집의 관리를 맡아서 행하였고 이후에 그는 애굽의 옥에 갇혀서도 옥의 제반사무를 보는 위치에서 공동체의 살림을 꾸리는 훈련을 해왔다. 그는 성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공동체 안에서 그 재정과 행적적인 실무들을 성심껏 수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바로 앞에 서서도 하나님이 알려주신 꿈해몽을 풀어냄과 동시에 애굽에 처한 난관에 대한 즉각적인 대책을 바로에게 제시한다.

많은 기독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지고 비워지길 소원하고 그런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성령이 부어져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을 소원하곤 한다. 하지만 성경의 많은 인물들의 고단하고 무료한 일상 가운데에서 겪은 반복적 훈련들은 제거되거나 무시되기 일쑤다.

다윗과 요셉, 그리고 다른 많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지지부진했던 하루하루와 그 안에서 성실히 훈련받고 매순간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했던 그들의 일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러한 일상으로 훈련된 그들의 재능은 정작 위기의 순간에 진정한 힘을 발휘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별볼일 없는 하루도 그런 의미에서 성실히 살아야 할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이다.

2011/02/06 20:31 2011/02/06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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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는 요즘 OO에 꽂혀 있답니다. 무엇일까요?


모르시겠다구요? (나... 뭐하는 거니?) 그렇다면 아래 동영상을 보시면 '아~' 하실 겁니다.

우리 성하 '마에스트로 킴'으로 불려도 손색없을 지휘죠? (나.. 팔불출 아빠..^^)
이상, 요즘 하루에 한번 이상 '지휘'에 열중하는 성하군이었습니다...

2011/01/28 22:43 2011/01/28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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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의 세배 - 더 비긴즈


성하의 세배 - 마무리

 

일정을 마치고 집에 와서 피곤을 풀고 있는 성하군.^^

2011/01/16 22:39 2011/01/1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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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 부모도 성장한다는 옛말이 맞나보다. 성하를 키우면서 스스로도 이전보다 더 많이 나에 대해 알아간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 조금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청년시절 스스로가 가졌던 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들은 결혼하고 아내와 살면서 한번 무너졌고, 육아를 하면서 또한번 무너졌다.

한편으로 내 부모에 대한 생각도 많이 든다. 난 스무살이 넘고부터 항시 나의 부모를 한계가 있는 부족한 인격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내가 부모를 대하는 좋은 영향을 준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내 부모를 과소평가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성하를 키우면서 옷을 입고 몸을 씻고 밥을 먹고, 배설을 하는 모든 일에 있어 전적으로 아내와 나에게 의존하는 아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나또한 한때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했고 그 의존은 요람에서 시작되어 내가 대학을 들어가서도, 아니 결혼하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어찌됐건 내 부모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나란 존재에 대한 공급을 멈추지 않았다.

난 살면서 매순간은 아니지만 삶의 상당 부분에서 스스로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부모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나는 스스로를 준-자수성가한 사람처럼 여겼고 그런 뉘앙스로 주변 사람들에게 고백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내가 -애써 무시하진 않았겠지만- 자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나를 둘러싼 환경들, 특히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 부모로부터 받은 공급과 그 안전한 울타리에 대해 내 평가는 너무 인색했던 것 같다.

가끔 나는 그런 상상을 한다. 아내나 내가 힘들게 성하를 보살피다가 어느날 그 아이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오고 자아가 확장되는 시기에 '아빠는 너무 답답해', '아빠는 내 인생을 너무 쥐고 흔들려고 해', '아빠가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라고 말한다면 나는 너무 화가 날 것 같다. 이제 세살인 이 아이에게 해준 게 뭐 있다고... 벌써 그런 상상을 하면 마음이 지옥같다.

어쩌면... 부모가 아이와 같이 성장한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내 부모와 나, 나와 내 아이의 역학관계에서 자신을 반추하고 미래의 어느날 아이가 자신의 날개를 가지고 자아를 더 넓게 확장하려는 순간에. 설령 그가 자신의 부모를 열등하게 여기고 그 가치를 내 기대만큼 크게 두지 않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아이가 스스로 내딛는 첫 달음질에서 기꺼이 조연역할을 해 줄 마음의 준비를 지금부터 부단히 해야하는 게 아닐까...

물론 지금은 솔직히 잘 할 자신이 없다. 어쩌면 성하에게 더 많은 사랑을 줄수록 연약한 내가 더 속좁은 마음이 될 지도 모르지만, 막연하게나마 이런 생각들을 떠올려본다. 이제 두돌. 사고를 치고도 천진난만하게 웃으면 마냥 사랑스러운 성하의 생일에 조금 끄적여본다. 아참. 부모님에게도 감사의 표현을 더 자주해야겠다. (끝)
2011/01/10 22:38 2011/01/10 2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