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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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다 (눅 1:26-38)

아마도 우리 세대에서 마리아의 결단을 체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정서적으로나 관계적 측면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과업 중심, 목표 중심으로 세상을 보려는 측면이 있어 구속사라는 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면 아마 마리아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 순종을 당연히 여겼으리라.

마리아는 가부장적인 이스라엘에서 음행을 저지르면 공개적으로 돌로 맞아 죽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자신과 관계를 갖지 않은 요셉에게도 설명할 길이 없는 일에 대해 유대교 공동체에서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임신 사실에 대해 그녀는 감수하겠다고 순종하겠다고 말한다.

특히 그녀는 자신은 주의 종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욥처럼 하나님께 항변할 수 있었다. 정의를 내세울 수도 있었다. 자신이 여성인 사실을 알지 못하시냐고, 이런 차별과 학대의 위험에서 건져줄 것을 약속해 달라고... 정당한 요구를 천사에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모든 게 이해되진 않았지만 천사의 말에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종의 위치에서 순종을 약속드린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런 마리아의 아름다운 성품을 알고 계신 듯 하다. (28절)

하 지만 이 본문은 오독의 위험이 있다. 여성에게 전반적으로 순종적 성품, 가부장적 질서 가운데 공동체의 요구에 순응하고 종처럼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적용으로 발전하게 될 위험이 있다. 자, 마리아를 보라. 그리고 이 여성의 성품을 닮아라! 하지만 이 본문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순종하게 된 한 여성의 겸손이지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행동하라는 일반적 지침이 아니다. 한국의 남자 목사들은 이 본문에서 비복음을 전할 위험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 (눅 1:39-45)

마리아가 그 길로 엘리사벳에게 갔던 것으로 보아 누구보다 그녀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싶었던 듯 하다. 또한 엘리사벳도 마리아의 뱃속 아이의 태동을 보고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를 대번 알아채고 찬양을 올린다.

나 는 이런 영적 친구가 있는가. 나에게 일어나는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서 말하고픈 이들이 있는가. 혹은 그런 이들이 편하게 와서 나눌 수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러한 일상 속에서 엘리사벳처럼 영적인 의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로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줄 아는 사람인가.



배고픈 자들의 편이신 예수 (눅 6:1-5)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이 본문을 보면서 새롭게 상기해보고 싶은 부분은 본문의 제목처럼 "배고픈 자들의 편이신 예수님"이라는 단순 구도가 아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6장으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의 행보에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는 나병환자를 고치셨을 때와는 달리 17절 이하 중풍환자를 고쳤을 때에 자신이 '인자' 즉 예언대로  '사람의 아들'임을 드러내셨다.

누가가 병행적으로 연결해놓은 금식논쟁과 제자들의 밀이삭 먹는 행위,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신 행위는 모두 자신의 공생애를 선언하여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대목이다. 이 사건들에는 항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하게 할 수 없지 않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고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직시하도록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이 본문의 보다 깊은 의미는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어리석은 율법자들을 꾸짖는 행위를 넘어 자신이 인자, 즉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 그 사람이며 자신이 안식일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신랑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열두제자를 부르시고 그 공생애를 탄탄히 하는 것에서 이 의도는 보다 분명해지며 누가도 그런 맥락에서 이 예화들을 병행적으로 기록한 듯이 보인다.



원수를 사랑하라 (눅6:27~36)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 본문은 선을 행하라는 단순한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흔히 알려진 팔복을 설교하면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윤리관을 선포하고 있다. 이 윤리관은 선을 행하는 행위의 개선과 같은 인간의 노력이라기 보다는 그 백성이 아닌 인간이 배풀 수 없는 절대적 우위의 윤리관을 제시한다.

이러한 윤리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파격적 메시지로 제자들에게 제시된다. 본문의 가르침을 착하게 살라는 경구 정도로 인식했다면 그처럼 행할 때 겪게 되는 많은 내적 충돌로 인하여 이 잣대가 세속의 행위 잣대가 아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는 이제 공생애의 본격적인 시작에 있어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 초대받은 자인가. 이 나라의 도에 감동하는 백성인가. 혹은 이 나라 백성의 윤리관에 전율하는 것으로 제 삼자의 입장에서 팔짱끼고 방관하는 구경꾼에 불과한가.
2011/02/09 20:34 2011/02/09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