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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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다 >>> 창 41:37-57

고난에는 끝이 있다. 요셉은 오랜 시련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두 아들을 얻었다. 첫째 아들 므낫세를 통해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게 하셨다’고, 둘째 에브라임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찬양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종국에까지 그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그 시련의 끝을 가늠하는 게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요셉은 자신의 시련의 끝을 어디로 인식했을까. 보디발의 집에 들어갔을 때였을까. 아니면 죄수의 신분으로 옥에 갇혔다가 관원장의 꿈해몽을 해주었을 때였을까. 만일 그 시기를 마지막으로 보았다면 그 때에 일말의 의지조차 흔들렸다면 그는 연이은 시련에 완전히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하였고 그 자체로 그는 영혼의 안식을 누렸다. 그 안식을 통해 현세의 시련들을 묵묵히 감당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련의 끝이 자신이 인식하기 전에 찾아왔음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나는 시련의 끝에 연연하는 자인가, 혹은 하나님의 임재를 삶의 매순간 고대하는 자인가.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가다 >>> 창 42:1-25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실제로 인간 관계에서 극한 시련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말이다. 복수는 복수일 뿐, 내가 당한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마음 속 뜨거운 분노는 이미 내가 분노를 키우는 게 아니라 분노가 내 영혼을 갉아먹는 상태로 변질된다.

용서가 최고의 복수가 되는 이유는 이미 시작되어 내 영혼을 무너뜨리고 있는 분노를 몰아낼 수 있음에 그 본질이 있다. 용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하나님은 그 영혼에 그 만큼의 그릇을 허락하고 마음 가운데 자기 정체성, 인격, 영혼의 성숙 혹은 승격을 보장한다. 용서의 그릇만큼 성장하고 강해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제들과 조우한다. 아마도 그는 그간 자신이 보낸 세월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자신의 자만심으로 비롯된 언행과 그로인해 몇십배 더 가혹하게 찾아온 시련에 억울함을 호소할 곳 없었던 이방생활을 돌이켰을 것이다.

요셉이 매일매일 형제들에게 복수의 칼을 갈지는 않았겠지만 형제와의 문제가 미결로 남은 것이 그의 평생의 짐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 짐은 용서를 위한 짐이었음을 우리는 이후 본문에서 확인한다.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이러한 관계의 상처와 왜곡이 있고 그로 인한 짐과 분노가 있다. 사실상 용서를 위한 '너무 늦음'은 없다. 분노를 분노로 상처준 자에게 그에 합당한 복수를 하는 길은 영원히 그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두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지금 용서할 이를 용서하고 사죄할 이에게 사죄하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분노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가장 신속한 길임을 항상 인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내가 그러하다.

 

요셉의 형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다 >>> 창 42:26-38

야곱은 레아를 얻은 후 또다시 라헬을 아내로 맞으면서 레아를 통해 많은 아들들을 얻지만 또다시 자신이 더 아끼던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을 특별히 총애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야곱은 자신의 호불호를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듯 하다.

야곱의 가정에서 레아와 라헬 사이의 보이지 않는 질투와 감정 다툼은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며 결국 형제들이 모여서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극단적인 가정 파탄으로 귀결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야곱의 가정은 내적인 문제가 큰 공동체였을 것이다.

본문에서 야곱은 비통해하며 형제들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여자를 건드린 상처를 회복하고자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이 아버지가 애정하는 아들 베냐민을 구해오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이 모든 시발점이 야곱에게 있음에도 야곱은 그 사실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듯 하다. 오히려 그는 그 원망을 그 자식들에게 돌리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애정하는 아들의 상실을 레아의 형제들에게 돌리는 무책임함을 보인다. 더불어 그 질책은 레아의 형제들의 실제적 죄의 쓴뿌리로 인해 다시 그 형제들의 마음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꽃단장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가정사의 상처들은 풀리지 않은 채 겉으로만 멀쩡한 척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불안요소는 평소엔 티가 나지 않다가 자기 자녀를 대할 때, 혹은 명절에 고향에 가서 한번씩 폭발하곤 한다. 폭발까지는 아니지만 이따금 내면의 깊은 곳에 묻어둔 시궁창 같은 침전물들이 온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부모 형제 자녀 간에는 대체로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불식간에 참으로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가정사의 상처가 내게 영향을 주었고 그 상처는 아직 진행중이라는 반증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전개함과 동일하게 야곱의 가정사를 요셉을 통해 회복하고자 하신다.

그들의 상처를 이용하여 그들을 치유하고자 계획하는 그 분의 탁월함은 구속사와 동일하게 하나님에게 의미가 있으며 항시 관심을 가졌던 부분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나의 가족사의 상처들을 돌아보고 그 문제를 해결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1/02/06 20:32 2011/02/06 2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