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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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사랑이란 감정이 찾아온다. 나에게도 몇 차례 연애 기회가 있었고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그렇게 조금씩 경험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당시에 유행하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같은 가벼운 책에서부터 게리 콜린스, 폴 투르니에의 책들을 읽었으니 나름 선행학습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선교단체 소그룹 리더를 하면서 얻은 교제의 노하우들은 연애에 도움이 됐다. 자주 우려먹는 내면 깊은 곳의 이야기 하나를 풀어내다 보면, 몇 번 만나지도 않았지만 금세 상대방과 내면의 깊은 대화로 발전하곤 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다분히 왜곡된 연애 판타지 같은 게 있었는데, 백마 탄 왕자라거나 키다리 아저씨, 혹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이상형에 나를 동일시하곤 했다. 그렇게 내 연애는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정형화되었고, 그런 경험들은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졌다. 게다가 이런 헌신과 배려의 태도는 신앙적으로도 권장할 만한, 인간관계의 어떤 모범처럼 느껴졌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나아가 상대방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연애에서도 바람직한 자세로 보였다. 그 결과, 내게 연애는 필연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가는 설렘이 지나면 내 일방적 배려가 지속될 수 있을 때까지만 유지되는 어떤 불연속적 이벤트가 되곤 했다.

'내'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고 '너'의 안에서만 정서적 위로를 주려는 이런 ‘시스템’은 결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허물어졌다. 결혼은 관계의 수위를 조절할 수 없는 어떤 특이한 물리적, 정서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일례로, 사소한 부부싸움 중에 꼭꼭 숨겨둔 내면의 상처를 공격받으면 무시하고 획 돌아서 갈 곳이 없었다. 한 침대 안에서의 일상은 에로틱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벼랑 끝 같은 곳이기도 했다. 심리적 도피 공간이 없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말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제대로 말해봐.”... 이런 단순한 질문 앞에 나는 자주 망설였고 이내 말문이 막히곤 했다. 솔직히, 살면서 타인에게 스스로가 정한 내면의 선을 한 번도 허락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라는 이름의 이 ‘무례한 타자’는 사소한 일에서조차 그 선을 침범했다.

독립적인 두 남녀 사이를 넘나든다. 불행히도 사랑은 할리우드 영화처럼 젊은 두 사람이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고 서로 키스를 하고 눈이 맞아 잠자리로 이어지는, 그런 ‘샤방샤방’한 경험에서 끝나지 않는다. 주변을 보면 연애의 설렘이 다할 즈음 결혼 준비에 정신을 쏟고 결혼하여, 신혼의 설렘이 끝날 즈음 임신과 육아에 정신 팔려 살다가, 이내 자녀교육에 ‘올인’함으로써 부부 관계에서 오는 빈 공간을 채워가는 모습을 본다.

영적으로 더 깊어져야 할 사랑의 감정은 외부의 분주함에 기대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중년의 심리를 다루는 많은 저자들이 지적하듯 자녀가 둥지를 떠나고 나서야 부부는 낯선 상대의 모습들을 대면하게 되고 그제야 미뤄둔 실존적 질문에 직면한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졌던가, 우리가 결혼을 통해 얻으려던 지향점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표현을 그저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건 아닐까. 혹은 섹스 그 자체로 이해했거나 반대로 선교의 베이스캠프라는 영적인 개념으로 비약하려 했던 건 아닐까.

곧 불혹의 나이가 되는 나는 여전히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다. 아내와 영혼을 대면하는 경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다. 육아의 늪에서 빠져 나오고 나니,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서로에 대해 또 다른 낯선 모습을 경험한다. 아내의 거친 ‘야수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 안의 지질하고 연약한 여성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당혹스러움도 맞닥뜨린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이렇듯 사랑하던 사람의 낯선 영혼과 대면해야 하며 나아가 나조차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단 말인가.

사랑, 그 친밀한 관계의 원형은 삼위일체의 신적 교제 그 자체에 있다. 나아가 하나님 스스로만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조물 간에도 더 깊은 교제를 지향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로를 지향하는, 영혼이 대면하는 지점에서 각자가 그 민낯을 편하게 드러내기엔 우리가 감내해야 할 두려움과 고통의 수위는 높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페르조나’를 쓰고 역할극에 익숙해지려 한다. 이른바 부모-자식 노릇, 김과장 노릇, 교인 노릇 등, 그 겉보기 등급의 삶을 분주하게 만든다.

다행히 그 두려움 속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사랑이 찾아온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주기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다. 영혼의 민낯을 대면하는 경험으로 내몰린다. 사회는 결혼이라는 꽤나 보수적인 울타리 안에서 그 고통을 대면하도록 이끈다. 그 안정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조차 영혼의 민낯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영 이 사회에서 답답한 가면을 벗어 던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결혼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신적 경험이자 최고의 도전이다. 물론 내겐 ‘아직도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2014/04/02 20:08 2014/04/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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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주변에 얘기해도 잘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소문난 모범생이었다. 특목고 진학을 꿈꾸던 중학생 시절, 나는 그저 ‘공부기계’였다. 같은 문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풀었으므로 시험을 보면 답이 툭툭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코흘리개 시절에 소심하다거나 착하단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시험을 몇 번 잘 치고 나니 ‘모범생’이란 딱지가 붙었다.

그 이후로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범생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애를 썼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부모님은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 두 분이 잠시 별거를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면,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를 우울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아마도 그때 나는, 내가 모범생이 되면 부모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다시는 이전처럼 슬프게 헤어지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도 어떤 조직에 들어가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다분히 성취 지향적인 행동에 집착하여 매사에 지나치게 긴장하는 습관을 갖게 된 건 아마 그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되고 싶었고,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고, 그것도 좋은 학과에 가고 싶었다. 물론 그 근저에는 항상 ‘부모가 원하는’ OO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솔직히 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부모가 뭐가 되라고 괴롭힌 적도 없지만,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공부를 잘하면 의례히 그렇게 되리라는 ‘어떤’ 학과와 직업을 제시하곤 했고 나는 그것을 목표로 공부만 해댔다.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부기계가 되고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 몹쓸 모범생 코스프레는 30대 초반까지 줄곧, 그리고 불혹을 앞둔 지금까지도 나를 짓누르는 어떤 내적 지향성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 또래의 많은 이들이 참 착한 자녀의 삶을 살아왔고 그 모범생의 삶을 이제는 자기 자녀에게 강요하는 걸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변의 많은 이들도 부모의 기대, 바람의 대물림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타자의 욕망’, 특히 부모의 욕망에 따른 삶에 익숙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삶의 주체성이 결여된 채 분주하게 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분주함의 대부분은 파편화된 사건들, 그 개별적인 것들을 잘 마치는 것, 그 성과로 누군가에게(부모에게, 직장상사에게, 혹은 남친이나 여친에게, 배우자나 자녀에게) 칭찬받는 것에 목적을 둔다. 얼핏 보면 책임감이 강하고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그 내면 깊은 곳에서는 영혼이 소멸되는 느낌,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칭찬해주는 주체가 없으면 존재 이유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자신을 지배하는 셈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회사를 왜 다녀야 하는지, 왜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같은 당연한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순간 숨이 멎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요즘 ‘픽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이 성행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예술가인가 했더니 쉽게 말해서 여자 꾀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란다. 이런 곳에다 몇 백만 원씩이나 돈을 내며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넘쳐난다고 하니, 이성을 사귀고 싶지만 잘 안 되는 싱글들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연애를 하는 이들은 ‘연애 상담’도 많이들 받는다. 연애 중인 커플들은 ‘결혼예비학교’라는 곳도 간다. 그뿐이랴. 요즘 결혼 후 아이를 출산한 부모들을 위한 ‘부모학교’도 성행하고 있다. 이렇듯 모두가 모범적인 연애, 결혼, 육아, 자녀교육을 실수나 시행착오 없이 수행하고 싶어 한다. 물론 배우는 건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배움 행위들이 어떤 내러티브나 연관성을 갖지 않고 파편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개인이나 관계의 근본적인 성장을 담보로 한다기보다는, 중고교 시절의 반복처럼 연애, 결혼, 출산, 육아도 그 개별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이른바 그 분야의 모범생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느낌이 강하다는 말이다.

연애, 결혼, 출산, 육아 매 단계에 모범생이 되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님을, 나는 결혼한 지 10년째인 지금에서야 아내를 통해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일례로 나는 칭찬받는 연애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정작 연애를 하는 중에는 즐겁지 않을 때가 많았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나는 생애에 한번뿐인 귀한 예식에 집중하기보다는 주변의 눈치를 참 많이 봤다. 그 과정에서 정작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원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신혼 초에 심하게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이 결혼이 좌초되고 실패한 무엇으로 전락하게 될까봐 두려움에 떨었다.(매번 아내보다 내가 더 지질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본다. 난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진실한 삶 그 자체였나, 아니면 인생에서 중요한 매 단계마다 누군가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으려 한 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모범생의 티를 벗으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본다. 내 잣대대로 남을 평가하지 않는 것, 나아가 그 잣대대로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는 것, 타인의 눈치를 보기보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 문득 그런 상상을 해봤다. 나의 부모가 서로 깊이 사랑해서 그 충분한 사랑을 통해 자주 “우리 걱정은 말고 네가 원하는 걸 하렴.”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면, 그러면 나는 어떤 아이가 되었을까. 생각만으로도 표현 못할 감정이 요동치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 가정에, 내 아이에게, 그리고 나와 내 아내에게도 필요한 음성은 아닐까.
2014/01/15 23:44 2014/01/15 2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