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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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사를 묵상함 (출 7:14-25)

전통적으로 10가지 재앙들은 이집트인들이 숭배했던 자연신들을 지칭한다는 해석이 있어 왔다. 물론 혹은, 자연적으로 홍수 전후로 일어났던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도 존재한다. 전통적인 해석이든 과학적 해석이든 어쨌거나 본문에서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이 어찌할 수 없었던 자연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신과 미신적인 방법들을 다루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변에는 항상 술사들이 있었고 그들도 나름의 마술들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일강은 이집트인들에게는 젖줄이자 그들의 기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한 나일강이 붉게 물들어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지팡이가 뱀이 되게 만드는 이전 본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술사들은 그러한 사태를 보고 자신들도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흉내낸다. 그러한 결과로 식수는 사라지고 백성들은 나일강 주변을 두루 파며 마실 물을 구한다.

오늘의 본문에서 나는 술사의 모습이 되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모세는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설명한다. 신적 존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는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고, 나일강을 붉게 만드는 표적을 보인다. 술사들은 그의 메시지를 듣고 그의 표적을 흉내내어 본다. 신적인 증거를 표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다.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때에 그 말씀의 현상들을 모방하려는 습성이 내게는 있다. 때로는 윤리적으로 착하고 모범적으로 보이기 위해, 때로는 신적 존재와 가깝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전달하고 그 말씀대로 따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술사와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때때로 그 모방에 지나치게 치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배의 형식이나 신앙 고백, 교리, 실천, 이웃 사랑의 방법, 이 모든 행위에 단순한 모방 정신이 팽배해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며 그 임재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들에 마음을 돌려야 한다. 때로는 경외감으로 가득찰 때도 있고 때로는 위로와 안위함으로 때로는 심한 죄책에 허덕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신적 존재와의 대면에서 우리는 그 분의 크심을 깨달음과 더불어 그 분에게 집중하려는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의 신적 표적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려는 행위는 다분히 부차적이며 또한 이방인이 행하는 방법이다. 술사를 보며 그 보다 한 수 위인 모세와의 대결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 메시지의 근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실존과 그 메시지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타협함 (출 8:16-32)

성경에는 하나님과 타협점을 찾으려는 인물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타협'이란 말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하나님을 시험했던 기드온이나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전날의 땀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도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했던 장면들 중의 하나이다.

본문에서 이방인인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 온 모세와 타협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본문에서 파리 재앙 이후에 그 백성들을 보내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나 제사를 허락하는 장면에서 그는 모세와 협상을 하고 있다.
문제는 파라오의 의도인데 그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보고서 놀라서 쉽게 거래를 시도하지만 그 마음 속에 지속적으로 그 백성들을 보내는 일이 탐탁치 않아 번복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정작 일이 터졌을 때는 급한 마음에 쉽게 응락하던 일들도 되돌아서면 다시 강팍한 마음으로 협상한 결과를 이행하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마음의 이면에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타협할 수 있다는 마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약속에 있어서 설령 그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다.

때 때로 우리는 심각한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바로 그날 밤' 기도 자리에서 하나님과 타협점을 찾으려는 회개 기도를 한다. 다음에는 이러지 않으리라, 사실 이러한 마음으로 실수한 것이니 좋게 봐달라는 식으로 말이다.
'바로 그날 밤'의 기도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쉽게 타협점을 찾아가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기도 언약은 쉽사리 이행되지 않을 때가 많다. 또한 그 죄의 결과들에 대해 피부에 와 닿게 심판받는 일이 생기지 않으므로 더더욱 우리는 파라오와 동일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심판의 날은 도적과 같이 오거니와, 우리는 그 때까지 통회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약시대와 달리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매순간마다 우리 안에서 바른 길을 제시하는 성령 하나님의 의도대로 자신을 내어주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일에 매진하여야 한다.
바울의 표현처럼 날마다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그 거룩한 뜻에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전쟁의 신'이란 해석을 버림 (출 14:1-14)

하워드 요더의 책을 읽기 전까지 이 본문을 읽으면서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를 "너희는 너희를 위해 싸움을 돕는 전쟁신의 힘을 보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의 책은 구약의 이런 본문들이 "너희가 피흘리며 싸움을 정당화시키지 말고 나를 대적하는 이들에 대한 심판을 내가 직접 치르도록 두라"는 의미로 이해하게 이끈다.

항상 하나님은 정의에 대한 심판자로 존재했고 항상 심판 앞에 회개를 촉구시킨다. 인간은 신의 이름으로 싸움과 피흘림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데에 능했다. 구약은 전쟁사가 아니라 구속사의 큰 흐름 가운데 해석되어야만 한다.
2011/02/07 20:34 2011/02/07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