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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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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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에 봤다지만 영화속 설정처럼 정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꼭 봐야할 영화에 항상 오르고 최근에는 재개봉도 했다기에 다시 본 이 영화에 대한 내 기억은 망각, 그 자체였다. 막연하게나마 기억이 나는 내 인상비평은 '이별에 관한 기억이라는 메타포를 신선하게 풀어냈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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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다시 곱씹으며 새삼 깨달은 건 영화에 대한 인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란 사람의 변화였달까. 11년 전의 나는 잘 정돈된 내면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람을 겪을 때도 어떤 거대한 DB에 주요 태그들로 하부구조를 생성하고 거기에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는 느낌. 내 뇌가 그/그녀(에 대한 정보)를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해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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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 갈급했기에 수많은 책을 읽었던 것처럼 인간관계의 갈급함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고 사실상 그 시기엔 인간관계도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더 깊이 분석할수록 세상을, 사람을, 여자를, 그 안에서 생기는 복잡한 감정을 다 알게될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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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화두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제거'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은 자주 가장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기인하기도 한다. 기억을 제거하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윤리적으로도 옳고 내 남은 삶을 버티기에 합리적이고도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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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커스틴 던스트)의 입을 통해 영화의 제목이자 알렉산더 포프 시의 한구절이 낭송된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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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고통에 해매던 주인공들은 기억의 제거를 통해 '영원한 햇살'을 얻으려 하지만, 정작 제거할 기억들을 되내이면서 그 기억들을 붙잡기 위해 망각에 저항하는 처지가 된다. 더 나아가 이 기억 하나만은 보존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마저 생긴다. 그리고 제거해야 했던 기억의 되내임은 어느덧 서로의 종국을 알면서도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용기마저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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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에는 스토리조차 기억나지 않던 이 영화가 문득 내게도 강하게 다가왔다. 더 정교하게 정리되어야 할 기억들. 잘 정리된 하부 구조를 만들고 그 기억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는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내 머리와 가슴, 손끝과 눈빛, 정서 하나하나에 뿌리를 내린 이 기억이란 신기루가, 사실 삶의 '영원한 햇살'이라는 사실을. 더디게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2015/12/13 19:24 2015/12/13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