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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조장하는 '피로사회', 그 해결책은
한병철의 <피로 사회>를 읽고

 

/김용주

 

작년 즈음인가. TV에서 직장인 두 사람의 스트레스에 관한 검사를 하는 내용을 보며 흥미로워했던 적이 있다. 기억을 더듬고 약간 나름의 각색을 더한다면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한 사람은 회사에서 항상 웃는 얼굴이다. 팀원들이 무슨 부탁을 해도 매사에 적극적이며 일이 주어지면 주도적으로 한다. 회식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기막히게 뽑아낼 수 있는 몇 곡의 노래가 있는데 이는 아마 집에서 연습도 많이 한 것 같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주식투자부터 문화예술 분야까지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화제거리를 곧잘 풀어낸다. 살짝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동료들과 함께 담배피는 10분 동안의 대화는 은근 감칠맛이 난다.

 

다른 한 직원은 그와는 다르다. 아침에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출근을 해서는, 상사나 선배 동료가 지시하는 일 하나하나를 왜 자기가 그 일을 해야하느냐고 따져대기 일쑤다. 팀원들의 부탁을 다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별 이유없이 타인에게 자기 시간을 내주는 걸 꺼려한다. 퇴근 후에 갑작스런 회식이 잡히면 그는 선약이 있다고 자리를 피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집단생활에 적응을 못한다고,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라며 뒤에서 수군거리기곤 한다. 누군가가 그는 취미생활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악기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이 두사람의 스트레스 지수를 검사했다. 결과가 어땠을까. 놀랍게도, 매사에 긍정의 힘이 넘쳐나고 적극적인 직원이 심각한 우울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판명났다. 스트레스 지수도 높았고 자살 충동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매일 얼굴을 찌푸리며 까칠하기 그지없는 다른 직원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팀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로사회
한병철 교수는 자신의 유명한 책 <피로 사회>에서 이런 현대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문제를 신선하게 접근한다. 과거 모더니즘 시대는 규율과 법칙, 원리, 강제를 통한 관리체제가 개인을 구속하고 일하게 만들고 압박을 주었다면, 현대는 그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진단한다.

 

바로 긍정의 힘, "예스 유 캔"의 마법이 그것이다. 진위를 따지던 시대, 서구사회의 문명이 진리 그 자체였던 시기를 지나 문화적 다양성, 서로의 기호가 진리를 상대화하는 현대(포스트모던 시대)의 사회 구성원들은 타인, 타문화, 타업무와 같은 기타 자극에 대해 보다 유연한 접근을 요구받는다. 일단 다 긍정하고, 모두를 정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흡수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고로 어떤 조직에서의 이질성과 타자성은 축소되고 대기업에서 그렇게 부르짖는 소통과 협력 그리고 무한한 자기 긍정과 자신의 능력의 과잉을 고양할 것을 요청받는다. 긍정의 힘이나 자기개발, 다양한 분야를 어우르는 통섭적 접근, TRIZ, 어학, 시간관리, 멀티테스킹, 하다못해 두통이나 심한 피로가 몰려와도 약물(포도당 링겔, 피로회복제, 두통약)을 먹어가며 자신을 혹사시킨다. 이렇게해서 자기과잉을 성취하는 자가 글로벌 시대에 진정한 승자이자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된다.

 

하지만 실상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기 긍정의 최면에 빠져 이전 세대와는 다른 병리현상을 경험한다. 면역, 자기방어의 벽을 허물고 무방비상태로 쏟아지는 정보, 대인관계, 처리할 일들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한병철 교수의 진단대로 현대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 즉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는 것이다. 결국 긍정의 시대, 시장 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한 개인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학대하며 자책하며 썩어간다.

 

 

해결책은, 탈진에서 무위로

이러한 지식, 문화, 업무의 과잉 속에서 한 개인은 매순간 효율적, 유연한 습득이 요구되기 때문에 멈춰서서 깊은 사색을 할 시간적 여유는커녕 잠시 멍 때리고 있을 시간도 없다. 회사에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라고 닥달하지만 그것은 한 영역 안의 정보를 다른 영역에 카피하거나 적용하는 영역을 넘나드는 모방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방만한 일들을 처리하지만 산만하고 불안하며 스스로 마음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따져보고 걸을 시간이 없는 탓에 등떠밀려 앞으로 전진한다. 결국 지금 한참 잘 나가는 능력자는 어찌보면 빠르게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격이다.

 

저자가 결론이나 대안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도는 명확하다. 긍정의 힘을 기반으로한 성과사회는 결코 '규율 사회'보다 진보한 패러다임이 아니다. 종국에는 개인 스스로를 (내적 암시를 통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만드는 악순환을 조장할 뿐이다. 인간은 멀티태스킹이나 치밀한 시간관리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병리적 고통 속에 빠질 뿐이다. 따라서 충분한 사색과 여유, 적당한 내적 면역체계의 복구, 나아가 '탈진의 피로'가 아닌 '무위의 여유'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나또한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6185

2013/04/05 00:49 2013/04/05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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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12쪽)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이상 면역학적 주제가 아니다. (13쪽)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이질성은 탈경계과정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그것은 경계선,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과정을 가로막는다.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 상태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면역학적 관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이질성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16쪽)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폭력 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되지 않는다. (20쪽)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은 바이러스성 폭력과 같이 여전히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르며, 시스템에 적대적인 특이한 개별자나 이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24쪽)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28쪽)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31쪽)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attention)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35쪽)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 기계로 변신한다. (58쪽)

(한병철, "피로 사회" 중에서)

2012/12/01 22:55 2012/12/01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