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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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의 칼럼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는 좋은 글이다. 반나절이 지나도 계속 그 글을 곱씹게 되고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는 측면에서 그렇다.(이 글은 15일 점심에 썼음)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나는 발화자의 맥락 또한 그 글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정희진은 알다시피 여성학자이다. 그녀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은 내가 작년에 읽은 책 중 단연 으뜸이라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책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책의 서문에도 썼듯이, 그리고 그 책에 대한 평가 중 자주 나오는 얘기가 정작 일반 여성들조차 그녀가 쓰는 여성학 글쓰기를 어렵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젠더 이론이나 페미니스트들의 글이 전반적으로 일반 여성들에게 외면당하는 것도 하나의 안타까운 현상이다.

 

대체로 내 주변 사람들은 정희진의 이 칼럼을 글쓰기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혜안으로 이해하겠지만 맥락으로 이해해 볼 때 이 칼럼은 정희진이라는 발화자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전개하는 여성학 담론의 난해한 글쓰기 '스타일'에 대한 자기변호다. 그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그런 맥락을 짚고 난 후에. 나는 살짜쿵 그 칼럼에 '딴죽'을 걸고 싶다. 정희진 선생이 칼럼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진정 쉬운 글은 내용(콘텐츠)과 주장(정치학)이 있으면서도 문장이 좋아서 읽기 편한 글을 말한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과 기존 형식이 일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글은 매우 드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쉬운 글은 없다. 소용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있을 뿐이다. 어려운 글은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글은 없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 개념어의 남발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쓴 글, 즉 잘 쓰지 못한 글이 있을 뿐이다."
 
이 본문은 1.새로운 내용과 기존 형식이 일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2.어려운 글은 어려운 게 아니라 소용이 없거나 소통의 문제가 있는 글이며 이는 잘 쓰지 못한 글이다 라는 두 가지의 명제를 갖는다. 엄밀히 말해 이 둘은 거짓이기도 하다.
 
첫째로, 새로운 내용을 기존 형식으로 쓰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여러 차례 언급한대로 (내가 아는 선에서) 강준만, 김두식, 리차드 파인만이 그런 필자 부류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내용'이라는 개념 또한 모호하다. 사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원조'는 없다. 엄밀히 말해 정희진 선생이 추구하는 소수자로서의 여성주의적 접근은 새로워서가 아니라 소수자를 옹호하고 그 안에 숨겨진 권력구도를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조차도 '새롭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새로운 형식으로만 서술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더더욱 회의적이다.
 
둘째로 어려운 글은 어려운 게 아니라 소용이 없거나 소통의 문제가 있는 글이라는, 나아가 잘 쓰지 못한 글이 어렵다는 건 정희진 선생의 '재정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어려운 글은 화자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타인의 표현이나 어구를 차용하고 그것이 불필요하게(어렵게) 독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잘 못쓴 글이 어렵다'.

 

이에 반해 내가 정의하는 '어려운 글'은 이른바 지식을 뽐낸 글이다. 비교적 단순한 주장을 하면서도 그 주장을 했던 북미, 유럽 지식인의 이름이나 개념들을 복잡하게 나열하고 각주를 달고 그 사대주의적인 정서의 도움으로 아주 단조로운 주장을 포장하는 글이다. 아주 힘들게 독해를 하고 났을 때 짜증이 밀려오는 글이다. 혹은 고사성어나 현학적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글이다. 과거 조선일보 같은 보수 신문 칼럼에 글을 쓰는 노교수들이 그런 스타일을 고수했다. 노교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영(young)교수들도 마치 자신이 노교수인 양 그런 스타일을 흉내내는 것은 더더욱 불편했다.
 
사실 '어려운 글'은 그냥 어려운 글이다. 엄밀히 말해 '어려운 글'에 어떤 부정적 이미지를 덧입히는 행위는 발화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재정의하고 싶을 때 그 표현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것이다. 결국 '쉬운 글'도 그냥 '쉬운 글'이다. 가치판단은 발화자의 맥락 속에서 생성된다. 고로 정희진 선생의 글은 짧지만 많은 생각들을 끌어내 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글이지만 정작 '쉬운 글'에 대한 일반론이라기 보다는 '정희진표' 페미니즘을 정작 어렵다고 외면하는 여성들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자 하는 국지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하나더.

정희진 선생의 글과 책들을 더 많은 여성들이 '어렵더라도' 읽기를 권한다. 그녀가 '쉬운 글'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다시 주장하지 않도록 말이다.

 

 

*정희진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2142125025&code=990100

2013/02/16 22:48 2013/02/1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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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주의적 시각이 갖는 부정의(injsutice), 몰역사성, 탈정치성은 차치하더라도 '성 역할'이라는 말은 있지만 '계급역할', '인종 역할'이라는 말은 없다는 점에서 '역할'이 얼마나 정치적인 담론인지 알 수 있다. 최소한 공식적인 사회 담론에서 "사람은 자신의 계급적, 인종적, 장애, 연령 등의 위치에 따라 평생 그에 맞는 역할(직업)을 해야한다. 흑인은 청소부 역할만을 해야 하고, 시각 장애인은 안마사라는 직업만을 가져야 하며, 가난한 사람은 그 위치에 맞는 심리, 행동,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은 발화될 수 없다.

 

 이에 비해 성별에 따른 역할론은 자연스럽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사회는 성 역할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에 대해서 심리적, 문화적,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혐오와 적의, 처벌을 행사한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계급, 장애, 연령, 인종, 종교, 지역, 국적 등으로 인한 분엽(차별)은 부정하며 극복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반면, 젠더는 그렇지 않다. 계급이나 인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사회적 제도이고 피해지만, 젠더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산, 재생산 노동을 모두 감당하는 여성의 노동력은 한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는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향상될수록 이 노동은 남성과 분담되기보다는, 여성들 사이의 계급, 인종, 나이 등의 위계에 따라 여성들 내부에서 '전가'된다.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여성들 역시 공장 노동과 같은 전통적인 제조업부터, 음식 서비스 산업, 가사 노동자, 아내, 농업 노동자, 한국의 심각한 저출산 문제의 해결자, 성 산업에 이르기까지 기존 국내 여성들이 담당해왔던 저임금, 비공식, 비가시화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별 구분보다 자본과 학력, 기술 등 개인이 가진 자원에 따라 젠더 범주가 '유연'해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가부장제의 쇠퇴는 여셩의 지위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2013/01/14 01:16 2013/01/14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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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책을 통해 배운 내 간접 스승은 단연 '정희진'이다.
솔직히 작년 한해는 기독교 배경에서 참 많은 유명한 기독저자들의
책이 나왔지만 나는 그 모든 기독교 대가들과 '정희진' 한명을 견주어
부족하지 않다고 느꼈다.

사실 최근 몇년동안 페미니즘 내지는 성평등에 관한 고민과
그에 따른 내 나름대로의 논리, 입장이 있었다.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나는 내가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공평한 남성'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희진은 나의 이런 나름의 선을 넘게 만들었고 여성문제에
있어 남성들이 더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겸허한 마음을 안겨줬다.
예전에도 고은광순이나 조한혜정 등 몇몇 여성 저자들의 글과 책을
읽었지만 사실 별로 와 닿지 않았다.
아니 - 깔대기를 들이대자면 - 내 생각보다 더 나아갔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올해에도 사이비 언니로서의 삶을 기대하며
작년에 즐겁게 읽은 책들을 리스트업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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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은이) | 교양인 | 2005년 11월

2.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
정희진 (지은이) | 또하나의문화 | 2001년 8월

3.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은이) | 이프(if) | 2001년 5월

4. 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은이) | 푸른숲 | 2003년 5월

5.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 - 섹스의 심리학
데이비드 버스, 신디 메스턴 (지은이)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9월

6. 내가 사랑한 여자- 공선옥.김미월 산문집
공선옥 | 김미월 (지은이) | 유유 | 2012-07-20


2013년 1월 2일
2013/01/02 01:10 2013/01/02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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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장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은 적이 아니라는, 여성들의 자기 다짐과 남자를 안심시키는 발언들, 그리고 남성과 대립하고 싶지 않은 자기 최면의 배후에, 혹시 '가부장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라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37)

 

각 분야에서 여성 1호가 된 여성이나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바깥일을 하지만 애들 아침밥은 꼭 차려주고 나와요." 그리하여 나처럼 출세도 못했으면서 아침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주눅들게 하고, '나쁜 여자'인 여성운동가의 이미지와 확실한 선을 긋는다. (37-38)

 

마오쩌둥, 마르크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비거리가 된다. 이렇게 말하는 남성들도 대개는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인 경우가 많은데,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여성운동가 중 일부가 지식인이라는 시살은 못 견뎌한다. (39)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또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40-41)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한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44)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비극의 성별적인 두 주체, 정신대 '할머니'와 장기수 '선생님'의 존재는 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자는 역사의 피해자, 전쟁의 '부산물'이지만 후자는 역사의 치열한 주체이며,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상징한다. 전자는 불쌍한 혹은 수치스런 존재지만, 후자는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다. (53)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분류, 분리하는 방식은 聖女와 性女, 정숙한 여성과 순진한 여성, 본처와 애첩, 아내와 애인...은 배타적인 범주 같지만 남성을 위한 여성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같다. (55)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피해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62)

 

남편에게 당하는 고문과 국가로부터 당하는 고문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국가 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는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결국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124)

2012/04/10 01:05 2012/04/10 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