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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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회 사역자들이 한국교회의 세속화에 대해 비판한다. 대체로 나는 그 목소리에 공감하지만 때때로 목회자들이 세속/비세속을 정말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고 주식도 안 하고 룸싸롱도 안 가는 다수의 목회자들에게 있어 성/속 개념은 명확할 것이다. 물론 기업의 CEO급 목사들은 술도 먹고 주식도 하고 부동산도 사고 룸싸롱도 가고 바람도 피우시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런 분들은 다수가 정죄하니 오늘은 대상에서 제외하고. (물론 드러나지 않은 몇몇 분들의 루머들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검증도 오늘은 제외) 대신, 자신이 처음부터 근처에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세속의 금을 그을 줄 아는 이들의 자기의에 대한 이야기다.

 

예수는 길을 가다가 우물가에서 이방 여인에게 수작을 건다. 알고 보니 여인은 남편이 다섯인 부정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긴 대화를 주고 받다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복음과 그 메시야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요한복음 4장)

 

대체로 목회자들은 후반에 드러난 교훈에 꽂힐테지만 나같은 세속인은 초반에 예수님이 수작을 걸면서 주고받는 언어유희와, 그 대화를 지켜보는 제자들의 초조함(기이히 여김)에 꽂힌다. 땡볕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누가봐도 '문제의 여자'임을 알텐데 예수는 겁도 없이 그녀에게 무장해제의 자세로 대화를 시도한다.

 

예를 들면 한 목사가 길을 가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들어간 곳이 알고보니 영등포 집창촌 골목이었다고 치자. 아마 그는 깜짝 놀라 그곳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혹은 물을 달라고 했다가 물을 가져온 여인의 옷차림, 행색이나 말투를 경험하고는 대화를 시도하지 않거나 반대로 그 길에서 벗어나라고 무섭게 훈계했을 수도 있다. 솔직히 나라면 훈계까지는 아니라도 그곳을 피했거나 어쩔 수 없이 물만 얻어먹으면서도 불결하다는 느낌을 은연중에 표했을 것 같다.

 

예수의 뛰어남, 고결함은 자신이 구원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 대한 존재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이슈를 접했을 때 자동적으로 하게되는 성속에 대한 판단 '이전'부터 자리잡은 그 영혼 자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 같은 것 말이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친일파 앞잡이 같은 존재인 삭개오의 집에가서도 밥을 먹으며 희희낙낙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물론 모범시민, 모범목회자들에게 알아서 악의 길로 달려들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모범적 성장 배경에서 배제시킨, 이른바 자기의에 기준한 판단으로 세속을 규정짓고 세속적인 삶에 불결함을 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세속주의를 비판하는 상당수의 종교인들, 특히 개신교 배경의 목회자들에게서 예수의 얼굴보다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살던 탕자의 형의 얼굴이 자주 오버랩된다.

 

보수진영의 목회자들이 동성애자, 불신자, 미혼모, 혼전 동거관계에 대해 강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진영의 목회자들도 쉽게 보수파 정치인과 논객들, 기업, 언론인들의 삶을 불결하게 여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또 가진자의 악행의 규모면에서 분명 동의되는 지점이 있지만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그 개별적인 인간 자체에 성속의 선을 너무 짙게 그어버리는 건 아닌가 우려감도 든다.

 

목회자 뿐 아니다. 만인이 제사장이라 믿는 개신교인 모두가 예수의 삶을 따른다면. 적어도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가지고 '자기의'로 삼는 일을 그치고 자신이 걸은 길에 대해 겸손히 동참을 호소해야 하지 않을까. 세속주의에 대해 묵혀뒀던 나의 생각은 그렇다.

 

2013년 1월 7일

2013/01/07 22:02 2013/01/07 22:02